정가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정민아를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언니, 이모, 이모부, 마침 잘 왔어요. 자, 제가 준비한 예복이 잘 어울리는지 한 번 입어봐요.”말을 끝나기 무섭게 도우미가 행거를 밀고 나왔다.정민아와 정군, 임은숙이 무의식적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안색이 어두워졌다.물론 예복은 맞지만, 집사와 메이드가 입는 그런 옷이었다.고용인이나 입을 법한 옷을 가져와 정민아 가족한테 입으라고 하다니? 정가을은 대체 무슨 꿍꿍이란 말인가!정민아의 표정이 돌변하자 정가을은 무덤덤하게 말했다.“언니, 성남시 재벌가들은 공식 석상에 참석할 때 전속 하인 몇 명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고 들었어. 아니면 가문의 체면이 말이 아니래. 오늘부터 우리 집도 일류 가문의 문턱까지는 입성했으니까 일거수일투족에 신경 써야 하지 않겠어? 지금 계약한 고용인들은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어디 내놓기는 좀 그러니까 언니네 가족한테 좀 부탁하려고.”정가을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정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임은숙은 이미 분노에 치를 떨고 있었다.“정가을, 우리는 어쨌거나 네 윗사람인데, 감히 약혼식에 가서 하인 노릇을 하라고 해?”“하! 내 약혼식인 줄은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오늘이 지나면 김세자의 아내이자 경기도 1인자의 아내가 저라는 것도 알고 있겠네요? 즉, 앞으로 정 씨 일가의 가장 든든한 뒷배는 저란 뜻이죠! 이모네 일가족뿐만 아니라 할아버지마저 제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을걸요?”정가을의 기고만장한 말투에 정동철은 기분이 거슬리긴 했으나 그래도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맞아! 앞으로 우리 정 씨 일가에서 가을이의 말이라면 곧 법이야. 정군, 와이프 교육이나 제대로 시켜! 얼른 옷 갈아입지 못해? 신부를 픽업하는 차량이 곧 올 거야.”비록 정군은 평소에 의지가 약한 편이지만, 오늘 이 옷을 입는 순간 다시는 성남시에서 얼굴 들고 살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그는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호통쳤다.“그동안 아빠 말이라면 웬만해서 따라 주려고 했어요.
“본인이 정 씨 일가를 떠나겠다고 했으니 말한 대로 해야죠. 여기! 계약서 가져다주세요!”정지용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미리 준비한 계약서를 가져왔다.계약서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정민아 가족은 이제부터 빈털터리 신세로 정 씨 일가를 떠난다는 것이다.즉, 오늘부터 정 씨 일가 지분과 자산의 49%를 차지하는 정가 그룹은 정민아와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된다.게다가 정민아는 대표직에서 자진 사퇴해야 한다.계약서 내용을 보자 정민아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정군은 몸이 후들후들 떨렸고, 임은숙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저도 모르게 욕설을 퍼부었다.“정지용, 정가을! 이 양심도 없는 것들아! 일부러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했네!”정지용이 싸늘하게 말했다.“그런데요? 오늘 딱 두 가지 선택권을 줄게요. 계약서를 체결할 거예요? 아니면 이 옷 입고 행사장에서 하인 노릇을 할 거예요?”정가을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묵인한 것과 다름없었다.이때, 정동철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자, 서둘러! 시간도 얼마 없는데 괜히 경사스러운 날에 내 기분 망치지 말고.”이를 들은 정군과 임은숙은 처연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정 씨 일가를 떠나면 앞으로 어찌 부귀영화를 누린단 말인가?비록 아직 임씨 가문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다고 하지만, 정 씨 일가를 떠나는 순간 빈털터리와 마찬가지인데 임씨 가문에서 과연 그들을 받아줄까? 물론 절대 불가능했다.사실 임은숙은 속으로 뻔했다. 만약 정민아가 대표 자리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임옥희의 인정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다.그러나 정민아가 곧 대표 자리에서 물러날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임씨 가문에게 희망을 품고 있다는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순간, 임은숙의 시선이 행거로 향하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아무리 굴욕을 당하더라도 거지가 되는 것보다 낫겠지!이때 침묵으로 일관하던 김예훈이 갑자기 입을 뗐다.“혹시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앞으로 정 씨 일가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참, 그동안의 정을 봐서라도 구경 좀 하게 사진은 보내줄게요.”김예훈이 싸늘하게 말했다.“너희들이 가서 하인 짓이나 하는 사진은 아니고?”정가을은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쌀쌀맞게 말했다.“빈털터리가 된 놈이 지껄인 말에 흔들릴 거로 생각해요?”이들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은 김예훈은 계약서 사본을 들고 미련 없이 뒤돌아서 정민아를 향해 말했다.“여보, 가자.”그리고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임은숙은 김예훈의 멱살을 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김예훈! 네가 뭔데 우리를 대신해서 계약을 체결하는 거야? 우리도 너처럼 거지 신세가 되어야지 마음이 후련해?!”김예훈이 위로를 건넸다.“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민아가 있는 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거예요.”정군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김예훈, 언제까지 그렇게 순진하게 살 거야? 정 씨 일가라는 든든한 버팀목 덕분에 민아가 성공을 이룬 건 사실이야,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않겠어? 이제 정 씨 일가를 떠나 대표 자리까지 물러난다면 대체 누굴 의지하겠어?”김예훈이 웃으며 말했다.“아버님, 그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죠. 어떻게 보면 정 씨 일가를 떠난 게 저희한테 더 좋은 일일 지도 몰라요. 혹시 잊으셨나요? 예전에 외삼촌 일가도 민아한테 스스로 창업하라고 제안한 적이 있었잖아요.”김예훈의 말을 들은 정군은 침묵으로 일관했다.사실 당시 외삼촌 일가를 만족시키기 위한 또 다른 조건이 김예훈을 쫓아내는 것이었는데, 정작 본인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다만, 다들 비슷한 처지에 전락한 이상 정군도 굳이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다. 결국은 오십보백보이니까!“어머님, 아버님, 제가 보기에 CY그룹에서 직접 민아를 대표직에 임명했으니 정 씨 일가가 끌어내리고 싶어도 소용이 없을 거예요. 저희도 오늘 인수합병 행사장에 갈까요? 어쩌면 우연히 김세자를 마주쳐서 민아의 대표 자리를 사수할 가능성도 있잖아요.”정군은 어이가 없었다.“김세자랑 마주치기는 무슨! 행사
“오늘부터 우리 정 씨 가문도 일류 가문의 문턱에 발을 반쯤 들인 것과 다름없지 않겠습니까?”“여러분, 오늘 밤 꼭 저희 집에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세요.”아파트 단지에 입주한 재벌들은 하나같이 눈치 빠른 사람들인지라 이 말을 듣자 큰소리로 축하 인사를 건네주면서 심지어 가족까지 끌고 나와 정가을 일행을 배웅해줬다.다들 얼굴에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김세자가 프러포즈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주인공을 직접 목격하는 순간 부러우면서도 질투가 나기 마련이었다.어쨌거나 이건 벼락출세는 물론 개천에서 용 나는 상황이지 않냐는 말이다.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스케일이 점점 더 커지더니 마치 연예인이 나타난 현장처럼 북적거렸다.다만 정 씨 일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렉서스 차량에 다가가는 순간, 멈춰있던 차들이 갑자기 시동을 켜더니 유턴해서 줄줄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이게 무슨 일이지?”“얼른 차 세워!”“신부가 아직 차에 안 탔잖아. 안 보여?!”정 씨 일가 사람들은 당황한 나머지 손을 허우적거리며 차를 세우려고 했다.다만 운전기사는 전부 송준의 엄선을 거친 엘리트로서 냉혹하기 그지없고, 오로지 명령만 충실히 집행했다.정 씨 일가 사람들이 뒤에서 아무리 난리를 쳐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다.순간 현장 분위기가 싸해졌다.정 씨 일가가 온갖 위세를 떨치면서 차량에 올라타려는 찰나, 심지어 정가을은 여주인공이 된 듯 주목받을 준비까지 단단히 마쳤는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이지?급기야 정지용이 위기를 모면하려고 일부러 큰소리로 호통쳤다.“이런 웬수 덩어리들! 이게 다 정민아 일가 탓입니다! 하필이면 이때 찾아와서 시간이나 지체하고! 원래 8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벌써 5분이나 지났잖아요. 성남시의 전통에 따르면 약속 시각이 지났으니 신랑 측에서 마련한 차를 타고 갈 수 없게 되었네요. 우리가 직접 운전해서 가야지, 원!”정 씨 일가 사람들도 이내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다만 현장에 있던 다른 재벌들은 어리둥절한
방금까지만 해도 정민아의 얼굴을 팔아 행사장에 입장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차에서 내리자마자 초대장을 주려고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이지?정민아는 의아한 눈빛으로 김예훈을 바라보았다.“설마 네가 준비했어?”김예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초대장을 가져달라고 누군가에게 부탁한 적은 없었기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 아니야. 게다가 우린 초대장 같은 거 없어도 입장이 가능하거든.”김예훈을 향한 기대가 조금이나마 생겨난 정군과 임은숙은 이 말을 듣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아니나 다를까! 초대장을 보낸 적이 없으면 없었지, 웬 허풍이냐는 말이다.“훗, 저런 못난 놈일 리가 있겠어요?”이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멀지 않은 곳에서 살이 뒤룩뒤룩 찐 남자가 벤츠 뒷좌석에서 힘겹게 내렸다.그를 발견하는 순간 정민아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목소리의 출처는 다름 아닌 유문석이 그녀에게 소개해 줬던 나씨 가문 나영수였다.“이분은...”벤츠를 타고 온 남자를 발견하자 임은숙의 눈이 번쩍 뜨였다.허영심이 강한 그녀는 나영수를 보자마자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고, 딸아이의 남편감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후보라고 생각했다.나영수는 애써 젠틀한 척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정민아의 어머님이 되시죠? 제 소개를 드리자면 이름은 나영수라고 하며, 성남시 일류 가문인 나씨 가문 출신이에요. 현재는 성남은행 지점장을 맡고 있습니다.”“영수 씨, 반가워요!”임은숙의 얼굴이 갑자기 훤해졌다. 얼마나 훌륭한 청년이란 말인가!나영수가 말을 이어갔다.“방금 두 분이 행사장에 참석하고 싶은데 초대장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저희 집 초대장 3장을 빼돌려서 가져다드렸어요.”이는 유문석이 얻어듣고 나영수한테 전달한 게 뻔했다.임은숙은 만면에 희색을 띠며 물었다.“영수 씨는 능력도 뛰어나는군요. 민아야, 얼른 지점장님한테 고맙다고 인사하지 않고 뭐해?”정군은 나영수를 위아래로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
“앞으로 두 분 일은 곧 제 일입니다. 나씨 가문은 고작 일류 가문에 불과하지만, 아무리 제일의 명문가라고 해도 우리를 건드리기 전에 망설이기 마련이죠.”정민아가 입을 떼기도 전에 나영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임씨 큰 어르신도 저랑 민아의 사이를 인정했어요. 앞으로 우리 두 가문은 한 가족과 다름없죠. 이제 다 함께 성대한 행사장으로 향할까요? 다만, 초대장이 딱 3장뿐인지라 저 거지 놈은 참석할 자격이 없을 것 같은데...”나영수는 김예훈을 가리키며 마치 승리자라도 된 듯 도도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임은숙은 곧바로 쌀쌀맞게 말했다.“쟨 그냥 쓰레기 같은 놈에 불과해요! 아까만 해도 제멋대로 계약서에 서명한 탓에 우리까지 눈 뜨고 코 베이게 되잖아요. 이런 사람은 죽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둬요. 굳이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민아야, 가자, 얼른 들어가.”정군과 임은숙이 당장이라도 김예훈을 두고 떠나려 하자 정민아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엄마, 아빠가 참석하고 싶으면 두 분이 가세요. 전 밖에서 김예훈과 기다릴 테니까 빠질게요.”나영수가 웃으며 말했다.“민아 씨가 성격이 착하다는 건 알고 있어요. 아무리 못난 놈이라도 걱정이 들긴 마련이죠? 물론 저놈을 들여보낼 수 있지만 도우미 전용 통로로 입장해야 할지도 몰라요.”정민아는 울컥한 나머지 미간을 찌푸렸다.이때, 임은숙이 황급히 끼어들었다.“영수 씨, 아니면 우리라도 먼저 들어갈까요? 민아한테도 혼자 남아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 줘야죠.”임은숙은 정민아의 성격이라면 훤했다. 이 타이밍에서 괜히 억지로 그녀를 끌고 갔다가 무슨 일이 터질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이를 본 나영수는 싱긋 웃었다.“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입장하죠. 민아 씨,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해요.”말을 마친 그는 정민아에게 명함을 건네주고 김예훈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그의 태도는 김예훈이 아무런 위협도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그는 능력이 훨씬 뛰어
한참이 지나서야 정민아는 실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가자.”일이 이 지경까지 흘러갔는데 김예훈이 현실을 직시하기는커녕 여전히 큰소리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래도 김예훈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 남았던 정민아는 이제 실망이 극에 달한 느낌밖에 없었다.데릴남편 주제에 허풍을 빼면 시체뿐이라니!김예훈은 백운가든을 뒤돌아보더니 말했다.“안 돼. 이따가 어머님, 아버님이 전화로 도움 청할 수도 있어.”정민아는 얼굴을 가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김예훈, 대체 어디서 난 자신감이지? 또 뭘 하려고? 일이 터지면 하은혜 씨한테 도움을 청하게? 인정이라는 건 받으면 받을수록 고갈된다는 거 몰라? 게다가 사내대장부라는 사람이 사소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다른 여자에게 도움을 청해? 내 마음은 어떤지 생각해봤어? 나라고 창피하지 않을 것 같아? 됐어! 우리 부모님이 곤경에 처할 거라고 장담하는데 어디 한번 두고 보지, 뭐.”한편, 백운가든 입구.나영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두 분은 성남시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우리 나씨 가문에 대해 아직 잘 모르실 거예요. 대충 소개해드리자면 저희는 성남시, 심지어 경기도를 통틀어 금융업과 은행업에 종사하고 있는 집안이죠. 쉽게 말해 성남시에 있는 은행의 약 50%가 나씨 가문의 소유라고 보시면 됩니다. 비록 전 나씨 가문의 차세대 후계자는 아니지만, 신분은 꽤 있는 편에 속하죠. 현재는 성남은행 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두 분께서 혹시 집을 마련하거나 사업할 때 대출이 필요하다면 최대 혜택을 적용해드릴 테니까 얼마든지 말씀하세요!”정군과 임은숙은 두 눈이 번쩍 뜨였다.나영수라는 사람은 비록 외모가 보기 흉했지만 배경이면 배경, 신분이면 신분, 지위면 지위가 데릴사위인 김예훈을 훨씬 뛰어났다.게다가 임씨 가문이 뒤에서 지지해주고 있으니 사위로 들일 수만 있다면 그 누구의 괴롭힘도 당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특히 오늘 정 씨 일가에서 쫓겨난 정군과 임은숙은 든든한 버팀목을 찾기를 간절히 바랐다
김예훈과 나영수를 잘 비교해본다면 정민아도 무슨 선택을 할지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이때, 정군이 입을 열었다.“사실 예전부터 저 데릴사위를 집에서 쫓아내고 싶었어요. 결혼한 지 3년 차인데 사실상 유명무실한 혼인이죠. 안타깝게도 운명의 장난인지 저놈을 쫓아내려고 할 때마다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는데, 이번만큼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나영수는 이 말을 듣자 저절로 안심되었다.정민아와 결혼하고 싶은 이유는 그녀의 외모뿐만 아니라 더욱이 이번 기회에 임씨 가문과 인연을 맺기 위해서였다.비록 현재 성남시 5대 일류 가문 중에서 임씨 가문의 입지가 가장 약한 편이지만, 그들은 대대손손 관직 집안 출신이었다.따라서 임씨 가문의 외손자 사위가 될 수 있다면, 자기 집안에서도 위상이 상승할 게 뻔했다.이 또한 그가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셋이 웃고 떠드는 사이에 벌써 백운가든 정문에 도착했다.이곳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뤘다.비록 오늘 행사에 참석하고 싶은 사람은 많았지만, 초대장을 지닌 사람은 100명 중 1명도 없을 것이다.심지어 백운별원 밖에서는 생중계하고 있는 방송사도 적지 않았다.한마디로 오늘은 성남시 상류층이 전부 참석하는 대형 모임인 셈이다.현장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단연코 거물급 인사들이다.이때, 정군과 임은숙은 나영수의 뒤를 따라 두리번거리며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 담긴 시선을 한껏 즐겼다.입구에는 경비원들이 수두룩했는데, 다들 당도 부대에서 임시로 파견한 군인으로 단지 일반 슈트 차림을 했을 뿐이다.하지만 온몸으로 뿜어내는 병장의 아우라는 숨길 수 없었다.또한, 이들 덕분에 현장에서 감히 난동을 부리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하나같이 고분고분 초대장을 확인받고 차례대로 입장했다.곧이어 나영수도 도착했다.그가 무심하게 초대장을 건네주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직원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손을 내밀어 나영수의 앞길을 막았다.“손님, 초대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입장이 불가하십니다.”
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일본인이 말 잘하는 걸로 유명하던데 오늘 그걸 직접 경험할 줄이야. 대한민국 무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으면 분명 믿었을 거야. 그런데 입만 번지르르하고 배신에 익숙한 일본인이 한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내가 곧 죽을 나이가 된 건 맞지만 알건 다 알아. 남양국과 대한민국 간의 분쟁은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 그런데 만약 언젠가 일본이 목적을 달성하는 날이 다가온다면 우리 남양국도 좋은 날이 없을 건 확실해. 공과 사를 불문하고 내가 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설득에 실패한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얼마든지 덤벼. 지옥으로 보내줄 거니까.”아마미네 토시로는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속으로는 김예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진주·밀양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지? 김예훈을 죽이지 않았다간 앞으로 일본인이 진주·밀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불가능할 텐데? 지금은 물론 전성기 시절에도 나를 죽이지 못했을 거야. 나를 죽이려면 아마 야마자키파 전 수장인 야마모토 타케시를 모셔 와야 할 거야.”양상철은 태연하기만 했다.“넌 아직 그럴만한 자격이 없어.”아마미네 토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분은 더 이상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너 같은 잡것들이 어르신을 방해하지 않게 내가 노력할 수밖에.”아마미네 토시로는 또 알약을 하나 삼켰다.알약을 삼키자마자 그는 근육이 수축하면서 눈동자가 새빨개지기 시작했다.다음 순간 양상철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양상철은 넓은 소매를 휘둘러 비수를 한쪽으로 내팽개쳤다.펑.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숲속에 불꽃이 튀겼다.이 모습에 양상철은 속으로 일본인이 정말 뻔뻔하다고 욕했다.‘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 정정당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옆길로 샐 궁리만 한다니. 정말 염치가 없네.’공격을 피한 양상철은 앞으로 나
오륜 사찰 금지구역.아마미네 토시로는 복부 상처를 감싸 쥔 채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그는 곧 알약 하나를 삼키고는 절벽 끝에 엎드려 망원경으로 아래쪽 상황을 지켜보았다.잠시 후 그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지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혜선 스님이 아직 저 자식을 죽이지 않았다니. 역시 여자 등이나 처먹는 기생오라비가 맞았어. 여자들마다 아까워서 죽이지 못하잖아.”아마미네 토시로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곳에 남긴 흔적을 없애고는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 재빨리 거즈로 상처를 감싸고는 검을 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1분 1초가 흘러가면서 주변 공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이 순간은 1분이 마치 1년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마침내 숲속에서 어떤 노인이 뒷짐을 쥐고 서서히 걸어 나왔다.그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아마미네 토시로를 쳐다보았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맞은편에 있는 노인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남양 무신 양상철?”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나를 알아봤으면 너의 아들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한 말도 들었을 텐데. 지금 보니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린 모양이군. 왜. 10년 동안 너무 조용하게 지냈더니 나를 잊은 거야?”남양 무신 양상철을 알고 있는 아마미네 토시로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남양국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섬라국과 화국에 의해 멸망하지 않은 것도, 심지어 동해 해역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양상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전해지기로는 대한민국 출신인 그의 조상님이 남양국으로 이주한 뒤 혼자 힘으로 이 나라를 일궈냈다고 했다.남양 무신은 남양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양국을 쥐락펴락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간단히 말해서 남양국에는 무신이 한 명뿐이지만 단 한 명으로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적어도 아마미네 토시로는 지금 상태로는 절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총사령관님은 젊고 멋있는 분이야. 포스까지 장난 아니라고. 그분은 우리 대한민국 국방부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무슨 염치로 자기가 총사령관이라고 하는 거야? ‘총사령관’이라는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혜선 스님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이 이유만으로도 난 네가 너무 싫어졌어. 오륜 사찰에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규칙만 없었더라면 넌 오늘 살아서 나가지도 못했을 거야.”김예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인데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네.”혜선 스님은 김예훈이 우상인 총사령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김예훈을 쫓아내. 저 자식이 원하든 말든 진주 밖으로 쫓아내라고. 그리고 앞으로 김예훈이 총사령관이라고 자칭하거나 진주·밀양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륜 사찰에서 죽여버릴 거라는 공식적인 입장도 전해.”혜선 스님은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다음 순간, 열몇 명의 오륜 사찰 제자들이 나타나 검으로 김예훈을 겨냥했다.그중 한 명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김예훈, 꺼져.”김예훈은 이들을 무시한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혜선 스님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선 스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해. 나를 오륜 사찰에서 쫓아내는 건 상관없는데 진주·밀양에서 쫓아낼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총사령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한마디만 물을게. 김현민이 곧 9대 국방부 총사령관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걔가 과연 전설 속 당도 부대 총사령관일까? 나이, 실력은 막론하고, 정말 김현민이 총사령관이라고 생각해? 총사령관님은 유라시아 전쟁에서 5대 강국을 단숨에 제압하고 혼자 힘으로 일본의 수많은 검신, 음양 대가들을 물리치신 분이야. 총사령관님 같은 분이 굳이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 자리를 탐내서 일본인에게 굽신거릴까? 솔직히 말해서 김현민 같은 사람한테 총사령관이라는
“24시간 내로 진주에서 꺼져주시면 예전에 있었던 일을 따지지도 않을게요. 어쩌면 저희가 약간의 혜택도 드릴 수 있어요.”혜선 스님의 진지한 말투에 김예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성녀님, 저희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제가 정말 진주를 떠났으면 좋겠어요?”“네. 김예훈 씨가 진주에 오고부터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 내부에서도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고요.”혜선 스님은 차분한 모습으로 제자가 건넨 차를 마시며 말했다.“안동 김씨 가문은 진주·밀양의 기둥과도 같아요. 김예훈 씨 존재만으로도 진주·밀양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데 하루빨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안동 김씨 가문을 위한, 진주·밀양을 위한, 김예훈 씨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이 간단한 조건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혜선 스님,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걸 보면 김현민이 수장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있든 없든 수장 자리를 지켜낼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저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일로 제가 진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혜선 스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씨,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왜 진주를 떠나야 하는 거죠?”김예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이곳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제 자유 아닌가요? 아무도 저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요? 오륜 사찰이 아직 저한테 해명해야 할 것이 있는 건 둘째치고,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가 실수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고 꺼지라는 거예요? 혜선 스님, 장사를 너무 잘하시네요. 오히려 제가 그 보잘것없는 몸매를 보고 눈을 버릴 뻔했는데도요? 서로 없었던 일로 하는 건 괜찮은데 이걸로 저를 협박해서 진주에서 쫓아내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혜선 스님은 정말 선녀와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김예훈을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제 목욕탕에 무단 침입했으니 김예훈 씨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에 선재 스님 사건 때 저희 오륜 사찰에 해명을 요구했었죠? 이제 서로 빚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혜선 스님.”오륜 사찰 여제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성녀님의 알몸까지 봤는데 이대로 넘어간다고? 아, 선재 스님 사건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면 누가 손해 보는 거지?’이때 한 여제자가 무의식적으로 혜선 스님을 힐끔 쳐다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설마 오륜 사찰과 맨날 사이가 안 좋던 저 자식을 성녀님이 인정해버린 걸까?’김예훈은 그저 어이없기만 했다.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어쨌든 잘못한 것이 있으니 천천히 목욕탕에서 나와 혜선 스님이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향긋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그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한 제자가 말했다.“그건 성녀님께서 몸 닦는 수건인데...”퍽.제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선 스님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앞으로 걸어가 김예훈의 가슴팍을 쳤다.퍽.김예훈은 재빨리 손으로 막았지만 뻘쭘한 마음에 별로 힘을 쓰지도 않았다.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혜선 스님이 이미 수건을 빼앗아 간 후였다.혜선 스님의 표정은 다시 냉랭해지면서 김예훈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이제 저희 오륜 사찰에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이만 가시죠.”김예훈은 상대방의 분노를 느끼고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더 이상 도망가지 않으면 그녀가 칼을 빼 들고 죽일 것만 같았다.김예훈은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 말했다.“가긴 가겠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오늘 이 일이 정말 우연이라면 제가 해명해야 되겠지만...”김예훈은 말을 하다 말고 눈빛이 차가워지고 말았다.“만약에 오륜 사찰이 일본인과 손잡고 저를 함정에
“성녀님? 도포? 오륜 사찰? 당신이 바로 혜선 스님이에요?”보지 말아야 할 모습까지 다 봐버린 김예훈은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오륜 사찰의 성녀인 혜선 스님의 목욕탕에 빠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보니 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는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성녀의 목욕탕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계획이었나? 정말 그의 계획이라면 김현민이 자기를 죽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을까?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김현민 그 자식이 성녀 혜선 스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혜선 스님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면서 김예훈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갑자기 자기 목욕탕에 나타난 이 건방진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때 혜선 스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예훈 씨?”“뭐? 몇 번이고 우리 오륜 사찰의 얼굴에 먹칠하고 경매회까지 망친 그 김예훈?”“선재 스님을 해친 것도 모자라 3일 안에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어?”“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성녀님, 저 자식이 이곳에 나타난 건 성녀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욕이에요. 죽여야 한다고요.”오륜 사찰의 한 제자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곧장 달려들어 김예훈을 검으로 찌르려 했다.퍽.이때 혜선 스님이 손가락을 튕겨서 검을 날려버리고는 뒤돌아 병풍 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진주에 어쩌다 천연 온천이 생겼는데 여기서 피를 볼 순 없지.”제자들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성녀님, 저희가 너무 성급했나 봐요. 지금 바로 저 자식을 데리고 나가서 죽여버릴게요.”제자들은 검을 빼 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직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은 김예훈을 째려보았다.‘계속 우리 오륜 사찰을 건들던 놈이 감히 성녀님 목욕탕에 뛰어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네.’“툭하면 죽이느니 마느니 하지 말고 제 설명 좀 들어보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그래도 여자 목욕탕에 뛰어들어 못 볼 꼴
쨕.아마미네 토시로는 옆으로 날아가더니 세게 바위에 부딪히면서 피를 뿜어냈다.그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비록 처음부터 온갖 함정까지 파놓으면서 김예훈을 평생의 적으로 대했지만 김예훈이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할 줄 몰랐다.연기까지 하면서 겨우 이곳까지 끌고 왔는데 김예훈을 죽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뺨 맞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정말 괴물이네.’퍽.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에 뺨 자국이 나 있는 채로 이를 꽉 깨물더니 말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칼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빠르고도 정확했다.김예훈도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김예훈은 절벽 끝에 서 있었고, 아마미네 토시로는 울창한 숲 변두리에 서 있었다.“대단한데?”아마미네 토시로는 칼날을 만지작거리면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같은 사람은 몇 년 더 지나면 아마 내가 너의 상대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자신 있었다면 왜 이런 꼼수를 부린 거지? 일본인은 무신 경지에 이르렀어도 결국엔 본성을 잃지 못하네. 네가 도망치려고 바다에 뛰어든 순간부터 넌 영원히 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어. 지금까지 너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도 네가 또 어떤 꼼수를 준비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너무 실망이네.”“실망하긴 아직 이른 것 같은데?”아마미네 토시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김예훈,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어?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냐고. 모르고 있었다면 내가 알려줄까?”아마미네 토시로는 검으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쿵.격렬한 진동이 울리면서 김예훈이 서 있던 절벽이 순식간에 갈라졌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앞으로 던졌다.“풉.”몸에 검이 제대로 꽂힌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후회되지 않는 듯 미친 듯이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반면으로
“풉!”핏덩이를 토해낸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김예훈, 역시 대단해. 어린 나이에 탑 무신 급 경지에 이르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너 같은 사람이 우리 일본의 귀족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김예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마미네 토시로, 아무리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난 널 살려줄 마음이 없어. 요트에 있을 때 이미 이 구역 통신을 차단하라고 했거든. 간단히 말해서 네가 방금 나 몰래 보낸 메시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이야.”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이 살짝 굳으며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몇 분 전에 보낸 구조 요청 메시지가 발신 실패로 떠 있는 것이다.“이런 제기랄!”이 순간 아마미네 토시로는 본능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정말 나랑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받아라! 불사참!”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내리쳤다.칼날이 얼마나 매서운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김예훈은 아무런 무기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하지만 아마미네 토시로가 이 기세를 몰아 검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고 있을 때, 김예훈을 스쳐 지나 산꼭대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김예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신이라는 놈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공격하는 척하면서 또 도망쳐?’“아마미네 토시로, 그만 도망치지?”김예훈이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그만 쫓아오지?”아마미네 토시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울창한 숲을 이용해 김예훈을 따돌리려 했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전혀 급할 거 없이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한 사람은 도망치고, 한 사람은 쫓아가는 것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는 듯했다.곧 두 사람은 산 정상에 가까운 한 공터에 도착하게 되었다.먼저 땅에 발이 닿은 아마미네 토시로의 얼굴에는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다음 순간 그는 땅을 구르더니 미리
야마자키파 검신, 일본 무신, 황실 어의인 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명 눈치가 있는 놈이었다.오늘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까지 불러내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한 방에 무너질 줄 몰랐다.이런 상황에서 아마미네 토시로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남아서 김예훈과 맞서 싸울 일은 없었다.그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부하의 뺨까지 때리고, 부하의 시체로 요트 엔진을 고장 내서야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친 것이다.게다가 도망치는 경험까지 풍부해서 바다 한가운데에 있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김예훈은 요트 위에 남아있는 잔병들을 힐끔 쳐다보았다.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혼미해져 마치 어떤 신념이 완전히 무너진 듯했다.이들과 말 섞기도 싫은 김예훈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아마미네 토시로가 도망친 방향으로 쫓아갔다.어쨌든 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었기에 아무리 겁을 먹었다고 해도 실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김예훈은 오늘로써 한 방에 끝내고 싶었다.아니면 어딘가 숨어서 언제 또 습격할지 몰랐다. 김예훈은 상관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안전 또한 고려해야 했다.아마미네 토시로도 김예훈이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속도를 내 바닷가의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이 지역은 진주 태산 뒷산으로 진주 상류 인사들이 휴양하는 곳이라 절대 개발이 허락되지 않았다.이곳은 산짐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진주에서 보기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아쉽게도 지금의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했더니 마침내 절벽 끝에 오래 방치된 정자 하나를 발견했다.그런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숲속에서 김예훈이 뒷짐을 쥔 채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김예훈, 내가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좀 쉬면 안 돼? 요트에 그 많은 사람의 목숨으로는 부족했어? 왜 하필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몰라?”아마미네 토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