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하마터면 손에 든 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입을 열어 설명하려 했다.“지아야, 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나와 백채원은 아무 사이도…”지아는 차가운 눈으로 도윤을 바라보더니 그의 말을 끊었다.“이번에 또 무슨 이야기를 꾸미려고? 지금 딱 하나만 묻겠어. 나와 백채원이 동시에 바다에 빠진 날, 네가 구한 사람은 누구지?”이것은 지아가 유일하게 생각난 기억이었고,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녀는 여전히 가슴이 아팠다.그녀가 이렇게 말한 순간, 도윤은 더 이상 지아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지아야, 나도 그때 고충이 있었어.”지아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그랬겠지, 그러나 넌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구하러 갔어. 미안하지만 난 네 고충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아. 난 그냥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하거든. 네 말이 맞아, 그때의 기억들을 잊어도 나쁠 건 없지. 어차피 생각하면 마음만 아플 뿐이니까.”이렇게 냉정한 지아를 마주하며 도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설령 진실이라도 지아는 더는 믿지 않을 것이다.지아는 지금 이미 도윤을 사기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심예지는 죽을 받더니 도윤을 노려보았다.“지아야, 이 자식은 너무 둔하니까 상대하지 마. 내가 먹여줄게. 많이 먹어야 빨리 나아질 거야.”“빨리 낫는다고요? 어머님, 저 이제 곧 죽을 거예요.” 지아는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더 이상 세 살짜리 아이가 아니었고, 자신이 위암 말기에 살아남을 수 있단 말도 믿지 않았다. 하물며 지아는 지금 상태가 심각해서 아마 며칠 정도밖에 살지 못할 것이다.“또 허튼소리 한다, 지금 의학이 얼마나 발달한데,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없지. 너도 절대로 부담 갖지 마. 다 좋아질 거야.”심예지는 인내심을 가지고 지아를 위로했다. 만약 환자가 자신이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을 안다면, 심리적인 부담 때문에 몇 개월 정도 살 수 있어도 두려움에 며칠 밖에 살지 못할 것이다.
도윤은 안방으로 돌아온 후, 욕실로 향했다. 그는 물을 튼 다음 수온이 뜨거워지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갔다.차가운 물이 몸에 쏟아졌지만, 도윤은 마음이 더욱 아팠다.그는 2년 전 그날 밤, 지아가 자신에 의해 화장실에 묶여 찬물을 맞은 장면을 떠올렸다. 물이 이토록 차가웠으니 그때의 지아는 또 얼마나 큰 절망을 느꼈을까.지금의 지아를 생각하면 도윤은 후회막급이었다. 지난날 지아를 모질게 대한 그는 지금 마침내 쓰라린 고통을 받게 되었다. 지아를 얼마나 사랑한다면 도윤은 지금 얼마나 자책하고 있었다.이때 진환이 급히 달려오더니 욕실 문밖에 멈춰 섰다.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바깥의 빛을 빌어 그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도윤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남자는 목을 젖힌 채 물이 얼굴에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었고, 피 묻은 셔츠는 여전히 그의 몸에 딱 달라붙었다. 남자의 주위엔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이 감돌았다.진환은 묵묵히 문을 닫았고, 도윤이 혼자 상처를 핥을 수 있는 공간을 남겨주었다.그는 테라스 옆으로 가서 담배 한 대를 피웠다. 방관자인 그들조차 마음이 아팠으니 당사자인 도윤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울까?“형, 사모님 설마…”진봉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두 사람 모두 지아가 도윤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다. 만약 지아가 죽는다면 도윤은 또 어떻게 될까?진환은 담배꽁초를 끄더니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고, 도윤이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아직은 잘 몰라. 만약 초기였다면, 아니, 중말기였어도 사모님은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아주 높았을 거야. 보통 말기가 되었을 때, 모든 암세포가 전이되어 확산되기 시작했으니 아마도…”“그럼 어떡하지! 사모님께서 돌아가시면 대표님도 큰 타격을 받으실 텐데.”“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자. 독충이 기억을 잃게 하는 약물을 개발할 수 있는 이상, 어쩌면 방법이 있을 지도 몰라.”진환은 비록 신심을 북돋우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지아의 상황은 더 이
이유민의 상황은 정말 좋지 않았다. 어젯밤 지아가 병원으로 긴급 호송된 후, 이정진은 그 자리에서 화가 나서 발병했고 또다시 예전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해졌다.이남수와 임수경은 이유민을 데리고 떠나려 했지만, 도윤이 명령을 내렸기에 경호원들은 그들이 데려가지 못하게 한사코 버텼다.이유민은 한번 기절한 적이 있었는데, 의사가 현장에서 살려준 후, 그는 지금까지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다.어젯밤 집안이 난장판으로 된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그래도 고소하다고 웃을 수 있었지만, 하룻밤 동안 무릎을 꿇고 나니 이유민은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다.무릎은 이미 아파서 마비되었고, 머리의 상처도 간단하게 처리했을 뿐 여전히 아팠다. 이유민은 심지어 자신의 하반신에 이미 아무런 감각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피곤하고 배고프고 졸렸지만 그는 감히 정신줄을 놓지 못했다. 밤중에 이유민은 너무 졸려서 한 번 쓰러졌는데, 온몸에 유리가 가득 박혀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이다.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이유민은 도윤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도윤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심지어 차가운 바람처럼 그의 살을 에는 것 같았다.이유민은 뻑뻑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난 이미 밤새 무릎을 꿇었는데, 또 무슨 짓 하려고?”도윤은 차갑게 물었다.“겨우살이와 무슨 관계지?”이유민은 발뺌을 했다.“겨우살이든 하루살이든, 난 그런 거 몰라.”예전에 이유민이 매번 일을 저지른 후, 도윤이 그를 가만두었기 때문인지, 그는 아직 도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몰랐다. 그러나 그는 지아가 바로 도윤의 가장 큰 약점이란 것을 잊어버렸다.이유민의 말이 떨어지자, 도윤은 다짜고짜 그의 피 섞인 머리카락을 잡고 머리를 호되게 억눌렀다.바닥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유리 조각이 있었는데, 이렇게 포악한 장면을 본 적이 없는 임수경은 즉시 입을 가리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박자, 이유민은 거의 죽을 뻔했다.머리에서 굉음이 날 뿐만 아니
이남수는 도윤의 앞을 가로막더니 엄숙하게 말했다.“그만해, 너희들은 그래도 형제인데, 굳이 서로를 상대할 필요가 있겠어? 오늘 이후로 유민이가 모든 상속권을 포기하면 되잖아. 이제 그만 유민이 놓아줘, 그럼 우리도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남수는 자신의 잘못을 의식하지 못했고 여전히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만약 어린 시절의 도윤이라면 틀림없이 매우 괴로워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단지 핏빛으로 물든 눈을 이남수에게로 천천히 옮기더니 입가에는 조롱의 의미를 가진 미소가 나타났고, 잠시 후 악마처럼 입을 열었다.“그것은 원래 내 것인데, 이유민이 포기하다뇨? 이남수, 만약 내가 당신이었다면 지금 바로 꺼졌을 거예요.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 당장 나가.”“방금 날 뭐라고 불렀어?”전에 도윤은 그래도 이남수를 선생님이라 존칭했지만 지금은 아예 이름에 성까지 붙여 그를 불렀다. 도윤은 더 이상 이남수를 상대하기가 귀찮은 것이다.그는 높은 곳에서 차갑게 이유민을 내려다보았다.“말하지 않겠다 이거야? 하지만 난 네가 입을 열게 할 방법이 아주 많은데.”말을 마치자 도윤은 이유민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그를 질질 끌고 계속 걸었다. 이유민은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었으니 그 장면은 사람을 죽인 현장과 다름없었다.도윤에 비해 이유민은 줄곧 순조로운 삶을 만끽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보살핌속에서 자란 그가 또 언제 이런 굴욕을 당했겠는가?지금 그는 그제야 진심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의 도윤은 전과 전혀 딴판이었다.“아빠, 살려주세요!” 이유민은 구조를 요청하기 시작했다.도윤은 그들의 면전에서 이유민을 이렇게 대했으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어떤 악랄한 수단을 쓸지 모른다. 일은 이미 이남수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그는 하는 수없이 휴대전화를 꺼냈다.지금 이남수는 더 이상 많은 것들을 돌볼 수가 없었는데, 그저 이유민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었다.“당장 유민이 놓지 못해. 그렇지 않으면 바로
이유민은 재차 기절을 했고, 진봉은 그의 몸에 침을 뱉더니 경멸에 찬 표정을 지었다.“허약해 빠졌군. 시작도 하기 전에 쓰러지다니, 퉤, 정말 재수가 없는 놈이야.”도윤은 이씨 가문의 큰 도련님으로서 어릴 때부터 아주 엄격한 훈련을 받아왔다. 이유민의 따뜻하고 원만한 가정에 비해, 도윤의 어린 시절은 무척 비참했다.도윤은 담담하게 이유민을 힐끗 바라보았다.“의사더러 상처 좀 싸매라고 해. 죽이지 말고. 그의 입에서 유용한 단서들을 알아내야 하거든.”“알겠습니다, 대표님.”도윤은 미련없이 몸을 돌려 주방으로 갔고, 하인들은 질서정연하게 집안의 난장판을 치우고 있었다.이때 이 집사가 따라와서 말했다.“도련님, 드시고 싶은 게 있다면 그냥 저희에게 말씀하시면 될 텐데, 왜 직접 요리하시려는 거예요?”도윤은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긴 손가락으로 방금 처리한 닭을 손질하고 있었다.이 집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남자는 포악한 야수였지만, 앞치마를 두른 순간, 하얀 셔츠에서 심지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도윤은 닭과 각종 식재료를 뚝배기에 넣은 다음, 또 다른 식재료를 처리했다. 그는 단숨에 죽을 끓이고 채소를 볶은 다음 또 보신탕을 보온함에 담았다. 그리고 또 직접 차를 몰고 병원에 갔다.지아는 여전히 아픈 모습 그대로였다. 야위고 작은 얼굴은 무척 창백했고, 방금 소염제를 맞았기에 지금은 깊이 잠들었다.심예지는 반나절 동안 지아와 함께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못한 그녀는 연이어 하품을 했다.도윤은 살금살금 심예지의 곁으로 가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여긴 제가 있으니 먼저 돌아가세요.”심예지는 도윤을 복도로 끌고 갔다.“너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야? 지아는 지금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의사 선생님은 오늘 그녀의 암세포가 아주 빨리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어. 이대로 간다면 지아는…”“저 이미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에요. 저 지금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해요. 독충 쪽에서 이미 항암제를 개발했는데, 암세
도윤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는데, 한동안 지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지아야, 내가 다 설명할게. 나와 백채원은 정말 아무것도…”지아는 그의 입에서 백채원에 관한 그 어떤 일도 듣고 싶지 않았다. 이는 그녀로 하여금 구역질 나게 할 뿐이었다.“이도윤, 내가 말했지, 난 당신들이 어떤 관계인지 알고 싶지 않다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일은 내 병에 관해서야.”도윤은 물컵을 들고 있었고, 키가 우뚝 솟은 남자는 지금 무척 당황해 보였다. 그는 컵을 한쪽에 놓고 침대 옆에 앉아 가능한 한 자신의 감정을 진정시켰다.“좋아, 말해봐. 난 가만히 듣고 있을게.”“퇴원 수속 밟아줘. 나 이곳을 떠나고 싶거든.”“그건 안돼, 너 지금 상황이 아주 심각해서 병원을 떠날 수 없어.”도윤은 계속 설명하려고 했다.“의사들은 이미 치료 방안에 대해 상의를 마쳤고, 나도 항암약을 찾고 있어. 너 절대로 자포자기하지 마.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지아 네가 치료에 협조하기만 하면 다 나아질 거야.”지아는 담담하게 웃었다.“이도윤, 나도 의대생이야. 요 며칠 내가 가장 많이 본 책이 바로 의학에 관한 책이고. 넌 지금 내가 자신의 상황조차 모를 것 같아? 난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지아야…”“치료를 협조해도 두 가지 결과밖에 없겠지. 현재 나의 상황으로 보면 난 틀림없이 수술을 할 수 없어. 그럼 방사선 치료나 약물치료를 받아야겠지? 그러나 이 두 가지 치료는 모두 부작용이 매우 큰 데다 지금 내 몸까지 허약하니 병세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만약 내가 버틸 수 없다면 아마도 바로 죽겠지.”지아는 도윤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만약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넌 틀림없이 나에게 약물치료를 안배했을 거야.”도윤의 마음속의 생각까지 지아는 모두 알아맞혔다.“난 확실히 그럴 계획이었어. 이것은 유일한 방법이고.”“하지만 난 그러고 싫지 않아.”도윤은 계속 말했다.“지아야, 지금은 떼를 쓸 때가 아니야. 네 몸에 있는 암세포는 아주
도윤은 더 이상 지아에게 접근하지 못했고, 그저 병실 밖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진환, 지금 당장 지아와 지윤의 친자 확인 검사를 진행해. 그 결과를 보면 지아도 날 믿을 거야.”진환은 안색이 복잡해지더니 도윤을 일깨워주었다.“대표님, 지금 제 말을 좀 들어보시는 건 어떤가요?”도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진환은 즉시 입을 열었다.“대표님, 지금 두 분 사이의 가장 큰 문제는 결코 진실이 아니에요. 저희는 모두 대표님과 백채원 씨가 결백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속이고 또 사모님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사실이죠. 설령 대표님께서 설명했다 하더라도 사모님께서 지금 그 말을 믿으실 것 같아요?”도윤은 방금 지아의 그 격렬한 모습을 떠올렸다.“믿지 않겠지.”“그래요, 설령 대표님께서 진짜 친자 확인서를 사모님에게 보여준다 하더라도, 사모님은 단지 대표님께서 자신의 권세를 통해 거짓을 꾸몄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지금 사모님의 상황은 이미 매우 심각하니 더 이상 이런 일로 사모님을 자극하지 마세요.”진환은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도윤의 존재는 지아에게 있어 일종의 자극이었다.이때 마침 의사도 나왔는데, 앞장을 선 사람은 바로 종양과 주임이었다. 그는 도윤의 신분이 존귀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다짜고짜 도윤을 꾸짖었다.“지금 대체 뭐 하려는 거야? 환자가 너무 오래 살아서 자극이라도 주고 싶은 거야? 왜 환자에게 수차례의 상처를 입힌 거냐고? 가까스로 안정되었는데, 지금 또 당신 때문에 화가 나서 피를 토하고 있잖아!”“선생님, 제 아내의 상황은 어떤 가요?”“상황이 어때? 이대로 가다간 기껏해야 두 주일밖에 살 수 없을 거야. 만약 이틀 만에 저승으로 보내고 싶다면, 계속 환자를 자극해 보든지.”주임은 인정사정 따윈 봐주지 않았다. 그는 건우의 여자친구의 큰아버지로서, 건우의 일에 대해 나름 알고 있었다.도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건우를 다른 나라에 가서 연수하도록 쫓아냈지만 끝내 자신의 아내조차 잘 돌보지 못하
지아는 곧 다가올 자신의 미래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녀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건우가 도시락통을 들고 들어왔다.“선배, 나 못 먹겠어요.”“그래도 좀 먹어. 넌 지금 몸이 너무 허약해서 자신의 면역력을 증강하여 암세포와 맞서야 하거든. 이건 보신탕인데 조금이라도 마셔.”건우는 지아에게 도윤이 특별히 만든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지아는 절대로 먹지 않을 것이다.지아도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선배, 나 기억을 잃어서 그런데, 예전의 일에 대해 알려주면 안 돼요?”건우는 지아가 기억을 잃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 말문이 막혔다. ‘어쩐지 좀 이상했더라니.’“그럼 어떻게 기억을 잃은 거지?”지아는 도윤 그 거짓말쟁이를 떠올렸다. 그때 그가 한 말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 난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죠?”건우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너야 당연히 어릴 때부터 아주 우수했지. 몇 번이나 월반해서 대학에 다닐 때, 넌 18살도 채 되지 않았어. 그리고 사람들은 널 천재라 불렀고. 네가 학교에 입학한 날부터 난 널 알게 되었는데, 그때의 넌 마치 태양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어. 우리 과 교수님도 전부터 네가 재능이 가장 타고난 학생이라며 앞으로 의학계를 뒤흔들 것이라 말한 적까지 있어. 그러나 아쉽게도…”“뭐가요?”“아쉽게도 넌 한 남자를 위해 학업을 포기했어.”이 말을 듣고 지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쉽게 사랑에 빠질 수 있는 타입이 아니라고 느꼈다.“그 남자, 설마 이도윤인가요?”“응, 그런데 그때 너희들은 비밀 결혼을 했고, 아무도 네가 그의 아내란 것을 몰랐어. 몇 년 후, 난 병원에서 널 다시 만났는데, 네 아버지의 상태가 위중해서 입원했어. 넌 자주 병원에 와서 바쁘게 돌아쳤기에 결국 자신도 병이 난 거야.”지아는 건우의 눈을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예전의 난 그 남자를 엄청 사랑했나요?”“뼛속까지 깊게 사랑했지. 심지어 약간… 비굴할 정도로.”건우는
아직 해가 지기 전인데도 짙고 무거운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곧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공기는 눅눅하고 묵직했다. 지아는 교외의 폐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다섯 걸음 간격으로 배치된 보초들을 보았다. ‘소시월이 이런 경비를 받다니 어떻게 보면 영광스러운 일이네.’보초들은 소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씨 가문과 부씨 가문에서도 파견되었다. 세 가문의 힘이 모여 별장을 완벽히 포위한 덕분에 파리 한 마리조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상황이었다. 차가 멈추자 진봉이 문을 열었고, 도윤은 무무를 안고 차에서 내렸다. 무무는 독립심이 강한 아이였지만, 도윤은 여전히 아이를 안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듯했다. “이 대표님, 사모님, 아가씨.”진봉은 차에서 내리는 세 사람을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는데, 지아와 도윤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겪은 수많은 고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제야 평온을 되찾은 모습이야. 드디어 내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아.’“소시월은 좀 어때?” “예린 아가씨께서 안에 계십니다. 저희를 들어가진 못하게 하셨지만...”진봉은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리며 덧붙였다.“아마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밖에서도 비명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이고, 예린 아가씨께서도 워낙 가차 없는 분이셔서...”그 말에 지아는 깊이 공감했다.예린이 과거 자신에게 가했던 방식으로 시월을 다루고 있다면, 과연 시월이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도 알고 싶군.’지아가 무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아가, 엄마가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런데 아빠랑 밖에서 기다려 줄래?” 무무는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아이였지만, 지아에게 있어 무무는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어두운 세상을 보게 할 순 없어.’ 무무는 고개를 저으며 도윤의 품에서 벗어났고, 손짓으로 지아에게 말했다. “소시월의 몸에는 독벌레가 있어요.” 무무는 이전에도 지아에게 경
지아는 가족과의 상봉만으로도 아주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소임호가 이렇게 큰 선물을 준비할 줄은 몰랐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으면서 어렵게 찾은 가족이야. 나는 가족과의 정이 중요하지 재산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지아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오빠들이 다가와 위로했다.“부담 갖지 마. 이건 아버지와 우리 모두의 마음이야.” 시후는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 네가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했고, 네가 자라는 모습도 지켜보지 못했어.” 시하는 지아를 꼭 안으며 말했다.“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너한테는 이제 가족이 있잖아.” 지아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결국 ‘가족’이라는 한 마디였기에, 되려 오빠들을 끌어안으며 그동안 참아 왔던 눈물을 흘렸다. 지아는 자신이 이제 강해졌다고 믿었는데, 요즘 들어 자꾸만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세상일이 아무리 엉망이라지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 부장경은 지아가 가족의 품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멀찍이 서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A시에서 지내던 동안 지아는 부씨 가문과 재회했지만, 부장경은 지아에게 여전히 무언가 아쉬움이 남아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오늘, 소씨 가문과의 재회를 통해 그 아쉬움이 조금이나마 해소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한편, 소임호가 소씨 가문과 완전히 결별하겠다고 선언한 일은 모두에게 예상 밖의 일이었다.비록 이 모든 상황은 소임호가 오랜 시간 준비한 것이었지만, 그조차도 아내가 그 과정에서 희생될 줄은 몰랐다. 소임호는 여러 경로를 통해 조경숙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심세호는 철저히 가짜 신분을 사용했기에 단서를 찾기 어려웠다. 이제 남은 유일한 희망은 소시월이었고, 그녀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시월은 폐별장에 감금되어 있었고, 소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소상현이 저지른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빴다. 그 사이 지아는 먼저 시월이 감금된 폐별장으로 향했다. 차
본래 악랄한 자는 더 악랄한 자가 상대해야 하는 법이었다. 시월은 자신을 예린에게 넘긴다는 말을 듣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저 여자는 완전 미친 사람이야!’ ‘소씨 가문 사람들은 아무리 나를 증오한다고 해도 인간적인 동정심을 느낄 거야. 하지만 이예린이면 말이 달라질 거라고!’ 예린은 독충에서 연구를 할 때부터 가장 잔혹하고 무자비한 인물로 악명이 높았다. 게다가 시월은 시후를 해친 데다가 예린을 속인 적도 있으니, 예린이 시월을 가만두지 않을 것은 뻔했다. 예린은 심문 전문가보다도 더 가혹할 것이었고, 예린에게 붙잡힌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정도의 고통을 겪을 게 분명했다. “안 돼요! 아빠, 오빠들, 우린 그래도 한 가족이었잖아요. 제발 이예린한테 저를 넘기지 말아주세요. 저 여자는 악마예요! 정말이라고요!” 소씨 가문 사람들은 잠시 망설였지만, 시월이 이토록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고 곧 결정을 내렸다. 예린은 마치 유령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한 걸음씩 시월에게 다가갔다. 시월은 황급히 도망치려 했지만, 긴 팔과 다리를 가진 채 온몸에서 서릿발 같은 살기를 뿜어내는 부장경에게 그대로 붙잡히고 말았다. 부장경은 키도 크고 체격도 우람하여,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아우라로 시월을 집어삼키려 했다. 부장경은 곧이어 시월을 가볍게 들어 올리더니 힘껏 탁자 위로 내던졌고, 시월은 탁자 위에 쌓여 있던 서류들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남자와 여자의 힘의 격차는 너무도 크기에, 시월은 자기 등이 아프다는 것만 느낄 뿐, 말 한 마디 할 힘조차 없었다. 부장경이 차가운 눈빛으로 시월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 “그, 그게...”시월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더듬거렸는데, 바로 그때 시월의 팔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시월은 고개를 돌렸고, 예린이 어느새 주사기로 자기 팔에 약물을 주입하고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하지만 이미 주사기 안의 모든 액체가 시월은 몸에 주입된 뒤였다. “이예린, 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소씨 가문 사람들은 마치 굶주린 이리 떼처럼 시월을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가 시월을 증오했지만, 당장 죽일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임호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살의를 억눌렀다. “시월아, 내가 원하는 건 네가 독충의 모든 은신처와 거점, 그리고 그동안 조경선이 해 온 짓거리를 낱낱이 밝히고, 조경선을 여기로 끌어내는 거야.” 이것이 바로 시월이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시월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저한테서 온갖 방법으로 모든 걸 빼앗아 갔으니 이제 전 빈껍데기나 다름없어요. 이제 와서 제가 말하는 말든 무슨 차이가 있죠? 결국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일 뿐이잖아요.” 시월은 주위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 본 듯 덧붙였다.“제 손에 독충과 관련된 모든 자료와 데이터가 있어요. 만약 저를 살려준다면 여러분한테 협조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어요.” 총명한 사람은 어떤 궁지에서도 탈출구를 찾기 마련이다.시월 역시 그런 사람이었는데, 절벽 끝에 뿌리내린 한 줌의 씨앗처럼, 시월에게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끊임없이 위로 뻗어 나가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시월의 문제는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 있었고, 인간으로서의 도덕과 양심을 버렸다는 점에 있었다. 시월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괴물이 되어 있었다. 시하는 분노에 차서 시월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꿈 깨! 네가 그동안 저지른 악행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갈 구멍을 찾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집어 치워. 네가 스스로 모든 걸 털어놓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입을 벌리게 하고 말 거야.” 시월은 뺨을 맞아 입가에서 피가 흘렀지만, 예전처럼 울며 오빠들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려 하지는 않았다. 예전의 시월이라면 사람들의 연민을 사기 위해 연약한 척하고 애교를 부렸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수법이 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 것이었
시월은 목소리를 높였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외쳤다.“나는 너처럼 태어나면서부터 귀한 가문의 아가씨로 살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었어! 나 같은 사람이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발버둥 치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고. 내가 태어난 그 가난한 산골 마을을 네가 알기나 해?”“그곳 여자들은 소랑 말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가. 대부분의 아이는 십 대가 되기도 전에 부모에게 팔려 나가 늙은 노총각에게 시집가고, 아이를 낳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지. 조경선이 아니었다면 나도 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을 거야. 그 여자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으면, 난 이미 죽었을 거라고!”“하지만 당신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걸 가졌잖아. 손만 뻗으면 뭐든 가질 수 있었잖아! 그런데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했지?!” 지아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치를 떨며 외쳤다.“아직도 책임을 회피하고 동정을 사려는 거야?! 어린 나이에 그런 악랄한 수를 썼다는 건, 네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증거야! 태어난 환경이 잔혹함을 정당화하는 핑계가 될 순 없다고!” “너, 정말 네가 저지른 모든 죄를 몇 마디 말로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아는 지난 2년 동안 자신이 왜 어린 나이에 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는지 철저히 조사했다. 짧은 시간에 암이 그 정도로 형성되려면 몹시 어려운 조건이 필요했는데, 지아는 어릴 적부터 소계훈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귀한 딸이었다.설령 소계훈 가문이 몰락하고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아주 힘들었다고 해도, 그렇게 단기간에 병이 악화될 리 없었다. 결국 단 하나의 결론이 남았다.‘누군가 오래전부터 나한테 암을 유발하는 약물을 썼던 거야.” 결혼 문제로 인한 혼란은 단지 발단에 불과했다. 그때만 해도 이서가 조금만 더 일찍 검진받았다면 병을 더 일찍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마침 그 시기에 소계훈 가문이 몰락했고, 그의 치료비만으로도 생활이 빠듯했던 지아는 자신의 건강을 챙길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쓰러져 검사받고 나서야 병이 이미
시월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자신이 아주 완벽하게 숨겨왔다고 생각했지만, 지아는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심지어 시월의 얼굴뿐만 아니라 과거까지 말이다. 지아는 시월에게 한 무더기의 성형 기록을 내던지며 차갑게 말했다. “정말 끈질긴 노력을 했더라? 하지만 어릴 적부터 그렇게 많은 성형을 해서 나랑 비슷한 얼굴을 만들면 뭐 해? 가짜는 어디까지나 가짜이고, 아무리 얼굴을 바꾼다 해도 진짜가 될 수는 없는 법인데. 마치 네 신분처럼 말이야!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진짜가 될 수 없다는 걸 이젠 알겠니?” “언제부터 알았던 거지?”“그게 그렇게 중요해? 소씨 가문이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소영수 어르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만 돌지 않았으면, 나도 끝까지 속았을 거야. 평생 네 거짓말에 속아 살았을 거라고.” “소시월, 우리 소씨 가문에 그렇게 많은 악행을 저질러 놓고 후회한 적은 없니?” 지아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넌 몇 번이고 나를 죽이려 했고,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죽였고, 심지어 내 배 속의 아이까지 해치려 했어.” 시언도 입을 열었다.“내 손, 시하의 다리, 그리고 시영이의 목숨까지... 그 모든 걸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지?!” 시하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네가 우리 친동생이 아니라는 건 잘 알겠어. 하지만 어릴 적부터 부모님과 우리 남매들은 너를 친딸, 친동생처럼 대했어.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줬고, 넌 우리 소씨 가문에서 호강하며 자랐다고. 그런데 어떻게 이런 악랄한 짓을 할 수 있어? 시영이 죽음도 네가 벌인 짓이지?” 시월은 담배를 비벼 끄며 쓴웃음을 지었다.“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무슨 소용이죠?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죄인이 되는 법인 걸요. 난 이미 패배자가 됐다고요.” “아니, 시영이 일만큼은 명확하게 말해! 시영이는 당시 이상한 죽음을 맞이했어. 그 사건, 네가 벌인 짓 아니야?” “그래요, 내가 벌인 짓이에요. 하지만
“형님,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형님은 우리 형님입니다. 그건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에요.”“형수님께 무슨 일이 생겼다고 들었어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만 해주세요.” 소재호와 소윤성이 격앙된 채 말했으나, 소임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해. 자, 이만 돌아가거라. 나는 아직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 소재호와 소윤성은 부장경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고, 그저 소상현 가족만이 큰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희들도 이만 가 봐.”소상현은 마음이 착잡했다.마치 자신이 패배한 것 같았고, 소임호의 회사를 손에 넣지는 못했으나 결국 소씨 가문 전체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상현이 이겼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기에, 마음 한구석에는 기쁨이 아닌 허탈함만이 가득했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어...’‘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고.’소상현이 원했던 건 소임호를 소씨 가문에서 몰아내고, 소임호가 절망한 채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굴욕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소임호는 소씨 가문을 흔쾌히 넘기고 떠나려 하고 있었다. “당신, 그런다고 내가 고마워할 것 같아? 나는...” 소상현은 본심을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또다시 가시 돋친 말이었다. “아버지, 그러지 마세요.”소지훈이 소상현의 팔을 살짝 당기며 만류했다. 소임호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훈아, 앞으로 소씨 가문에선 네가 아버지를 잘 보살펴드려야 해. 소씨 가문은 네 할아버지께서 평생을 들여 이루어진 가문이야. 절대 그분을 실망하게 하지 않아야 해.” “큰아버지...”소지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지금껏 자신이 연예계에서 위기를 넘길 때마다 도와준 사람이 소임호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 깊은 곳에서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왔다. “정말 죄송합니다.”소임호는 한숨을 쉬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모두 나가봐.” 소지훈은 망설임
“정확히 말하면 소씨 가문의 숨겨진 사업 중 하나였지.” 소임호는 이 한마디로 소지훈이 모든 상황을 깨닫게 했다. 소지훈은 그동안 자신이 실력으로 연예계에서 승승장구했다고 믿어 왔으나, 훌륭한 매니저를 만난 것도, 첫 출연작이 최고 등급의 작품이었던 것도 모두 우연이 아니었다.세상에 그렇게 많은 우연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것은 소임호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 당신이...”소지훈은 충격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그토록 오랜 시간 자신을 지켜 주고 보호해 준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을 무시해 왔던 큰아버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소지훈이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허, 당신이 만성의 대표였다니, 이제서야 알게 된 나도... 정말 바보 같군요.” “지훈아, 너도 연예계에서 몇 년간 몸담았으니 그 업계의 룰을 잘 알고 있을 거야. 만성은 너한테 맡기게 된 건 내가 너를 믿기 때문이야. 이건 네 할아버지와 상의한 끝에 정한 일이기도 해.” 소지훈은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손가락으로 옷깃을 세게 쥐고 있었고, 머릿속은 복잡한 감정으로 어지러웠다. 소지훈도 소상현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세워온 가치관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안 돼, 이런 식이면 안 된다고...’소지훈이 생각하던 큰아버지는 권위적이고 독단적이며, 권력을 휘두르는 인물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이렇게 조용히 자신을 보호해 왔다는 건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소지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소상현을 바라보았다.“도훈이는 오래전부터 제 곁에서 일을 배워 온 사람이에요. 제가 하나하나 가르쳐 키운 인재나 다름없죠. 앞으로 소씨 가문의 사업 관련 문제는 도훈이에게 넘기겠습니다. 도장, 주요 문서가 들어있는 서랍 열쇠, 금고 비밀번호 등 모든 것을 도훈이에게 위임할 테니 믿고 맡기셔도 됩니다.” “너...!”소상현은 입을 열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답답하게 한숨만 내쉬었다. 소임호는
소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이게 말이 돼? 아버지께서 형님을 얼마나 아끼셨는데, 유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으셨다고?’ 소상현이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버지가 당신한테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을 리 없어! 그리고 당신이 어떻게 그런 유언장에 동의할 수 있지? 그 유언장은 분명 가짜일 거라고!” 소임호는 담담하게 설명했다.“물론 아버지는 내게 유산을 나눠 주고 싶어 하셨지만, 내가 거절했어. 나도 그동안 나름대로 많은 재산을 모았고, 소씨 가문의 것은 탐낸 적이 없으니까. 그래, 난 소씨 가문의 것을 탐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소임호는 미리 준비해 둔 수표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2조야. 아버지께서 보유하셨던 20% 지분에 대한 금액인데, 현재 시가로 따지면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 아버지께서 투자하신 400억에 비하면 수십 배로 늘어난 금액이야. 그동안 소씨 가문이 우리 가족에게 베풀어준 보살핌에 대한 감사의 뜻이란다.” 가볍게 내민 수표 한 장은 보이지 않는 강렬한 손바닥으로 소상현의 얼굴을 내리친 것과 같았다.소재호와 소윤성은 즉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형님, 저희도 형님이 오랜 세월 동안 소씨 가문을 지탱해 오셨다는 걸 압니다. 이 돈을 절대 받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다고 해도 절대 받지 않으셨을 거고요.” “맞습니다. 형님은 어머니의 아들이니 당연히 유산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형님은 아버지께서 가장 아끼신 자식이었잖아요. 그런데 유산을 거부한 걸로도 모자라 저희에게 주시다니요!” 소영수가 살아 있을 때도 그들이 이 돈을 받을 리는 없었지만, 지금 이 돈을 받는 것은 소임호와 소씨 가문의 관계를 완전히 끊겠다는 뜻이었다. 소임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언제나 너희를 친동생으로 생각해 왔어. 딴마음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더구나.”“상현이가 나와 우리 가족을 내쫓기 위해 이런 극단적인 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