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는데, 한동안 지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지아야, 내가 다 설명할게. 나와 백채원은 정말 아무것도…”지아는 그의 입에서 백채원에 관한 그 어떤 일도 듣고 싶지 않았다. 이는 그녀로 하여금 구역질 나게 할 뿐이었다.“이도윤, 내가 말했지, 난 당신들이 어떤 관계인지 알고 싶지 않다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일은 내 병에 관해서야.”도윤은 물컵을 들고 있었고, 키가 우뚝 솟은 남자는 지금 무척 당황해 보였다. 그는 컵을 한쪽에 놓고 침대 옆에 앉아 가능한 한 자신의 감정을 진정시켰다.“좋아, 말해봐. 난 가만히 듣고 있을게.”“퇴원 수속 밟아줘. 나 이곳을 떠나고 싶거든.”“그건 안돼, 너 지금 상황이 아주 심각해서 병원을 떠날 수 없어.”도윤은 계속 설명하려고 했다.“의사들은 이미 치료 방안에 대해 상의를 마쳤고, 나도 항암약을 찾고 있어. 너 절대로 자포자기하지 마.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지아 네가 치료에 협조하기만 하면 다 나아질 거야.”지아는 담담하게 웃었다.“이도윤, 나도 의대생이야. 요 며칠 내가 가장 많이 본 책이 바로 의학에 관한 책이고. 넌 지금 내가 자신의 상황조차 모를 것 같아? 난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지아야…”“치료를 협조해도 두 가지 결과밖에 없겠지. 현재 나의 상황으로 보면 난 틀림없이 수술을 할 수 없어. 그럼 방사선 치료나 약물치료를 받아야겠지? 그러나 이 두 가지 치료는 모두 부작용이 매우 큰 데다 지금 내 몸까지 허약하니 병세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만약 내가 버틸 수 없다면 아마도 바로 죽겠지.”지아는 도윤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만약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넌 틀림없이 나에게 약물치료를 안배했을 거야.”도윤의 마음속의 생각까지 지아는 모두 알아맞혔다.“난 확실히 그럴 계획이었어. 이것은 유일한 방법이고.”“하지만 난 그러고 싫지 않아.”도윤은 계속 말했다.“지아야, 지금은 떼를 쓸 때가 아니야. 네 몸에 있는 암세포는 아주
도윤은 더 이상 지아에게 접근하지 못했고, 그저 병실 밖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진환, 지금 당장 지아와 지윤의 친자 확인 검사를 진행해. 그 결과를 보면 지아도 날 믿을 거야.”진환은 안색이 복잡해지더니 도윤을 일깨워주었다.“대표님, 지금 제 말을 좀 들어보시는 건 어떤가요?”도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진환은 즉시 입을 열었다.“대표님, 지금 두 분 사이의 가장 큰 문제는 결코 진실이 아니에요. 저희는 모두 대표님과 백채원 씨가 결백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속이고 또 사모님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사실이죠. 설령 대표님께서 설명했다 하더라도 사모님께서 지금 그 말을 믿으실 것 같아요?”도윤은 방금 지아의 그 격렬한 모습을 떠올렸다.“믿지 않겠지.”“그래요, 설령 대표님께서 진짜 친자 확인서를 사모님에게 보여준다 하더라도, 사모님은 단지 대표님께서 자신의 권세를 통해 거짓을 꾸몄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지금 사모님의 상황은 이미 매우 심각하니 더 이상 이런 일로 사모님을 자극하지 마세요.”진환은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도윤의 존재는 지아에게 있어 일종의 자극이었다.이때 마침 의사도 나왔는데, 앞장을 선 사람은 바로 종양과 주임이었다. 그는 도윤의 신분이 존귀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다짜고짜 도윤을 꾸짖었다.“지금 대체 뭐 하려는 거야? 환자가 너무 오래 살아서 자극이라도 주고 싶은 거야? 왜 환자에게 수차례의 상처를 입힌 거냐고? 가까스로 안정되었는데, 지금 또 당신 때문에 화가 나서 피를 토하고 있잖아!”“선생님, 제 아내의 상황은 어떤 가요?”“상황이 어때? 이대로 가다간 기껏해야 두 주일밖에 살 수 없을 거야. 만약 이틀 만에 저승으로 보내고 싶다면, 계속 환자를 자극해 보든지.”주임은 인정사정 따윈 봐주지 않았다. 그는 건우의 여자친구의 큰아버지로서, 건우의 일에 대해 나름 알고 있었다.도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건우를 다른 나라에 가서 연수하도록 쫓아냈지만 끝내 자신의 아내조차 잘 돌보지 못하
지아는 곧 다가올 자신의 미래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녀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건우가 도시락통을 들고 들어왔다.“선배, 나 못 먹겠어요.”“그래도 좀 먹어. 넌 지금 몸이 너무 허약해서 자신의 면역력을 증강하여 암세포와 맞서야 하거든. 이건 보신탕인데 조금이라도 마셔.”건우는 지아에게 도윤이 특별히 만든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지아는 절대로 먹지 않을 것이다.지아도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선배, 나 기억을 잃어서 그런데, 예전의 일에 대해 알려주면 안 돼요?”건우는 지아가 기억을 잃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 말문이 막혔다. ‘어쩐지 좀 이상했더라니.’“그럼 어떻게 기억을 잃은 거지?”지아는 도윤 그 거짓말쟁이를 떠올렸다. 그때 그가 한 말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 난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죠?”건우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너야 당연히 어릴 때부터 아주 우수했지. 몇 번이나 월반해서 대학에 다닐 때, 넌 18살도 채 되지 않았어. 그리고 사람들은 널 천재라 불렀고. 네가 학교에 입학한 날부터 난 널 알게 되었는데, 그때의 넌 마치 태양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어. 우리 과 교수님도 전부터 네가 재능이 가장 타고난 학생이라며 앞으로 의학계를 뒤흔들 것이라 말한 적까지 있어. 그러나 아쉽게도…”“뭐가요?”“아쉽게도 넌 한 남자를 위해 학업을 포기했어.”이 말을 듣고 지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쉽게 사랑에 빠질 수 있는 타입이 아니라고 느꼈다.“그 남자, 설마 이도윤인가요?”“응, 그런데 그때 너희들은 비밀 결혼을 했고, 아무도 네가 그의 아내란 것을 몰랐어. 몇 년 후, 난 병원에서 널 다시 만났는데, 네 아버지의 상태가 위중해서 입원했어. 넌 자주 병원에 와서 바쁘게 돌아쳤기에 결국 자신도 병이 난 거야.”지아는 건우의 눈을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예전의 난 그 남자를 엄청 사랑했나요?”“뼛속까지 깊게 사랑했지. 심지어 약간… 비굴할 정도로.”건우는
지아는 눈빛이 차가웠다.“이거 그 남자가 결정한 거 맞죠?”“응, 그 사람은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를 엄청 쓰더라. 네 몸에 있는 암세포는 빨리 확산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약물치료는 도박과 같았다. 이기면 종양을 억제하는 효과가 좋아질 것이고, 지면 그녀는 더 빨리 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죽기 전에 지아는 부작용에 시달린다는 것이다.건우는 입술을 핥으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그 사람은 네가 살길 원해. 지아야, 나도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어. 마치 2년 전처럼 말이야. 당시 난 네가 3개월에서 반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단언했지만 그때 약물치료의 효과는 아주 좋았고, 후에 병세까지 점차 안정되었어. 어쩜 이번에도…”“선배, 호의인 건 알겠지만… 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지아는 2년 전에 이 말을 할 때 슬픔이 가득했다. 그것은 생활의 부담에 억눌려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그러나 지금의 지아는 마치 세상만사를 다 겪은 것처럼 차분했다. 절의 스님처럼 그녀는 욕심도, 희망도 그리고 슬픔도 기쁨도 없었다.“난 아버지를 잃었고 가문까지 파산했어요. 그리고 내 아이조차 날 떠났고 지금은 심지어 행복한 결혼생활까지 거짓이란 것을 발견했죠. 난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이라곤 없단 말이에요.”“지아야, 그렇게 말하면 안 돼. 개미도 살아나갈 이유가 있는데, 왜 굳이 자포자기하려는 거야.”“선배, 난 자포자기하는 게 아니라 하늘의 뜻을 따르는 거예요.”지아는 약물치료를 거부했고 심지어 건우까지 내쫓으려 했다. 이때, 병실 입구에 도윤이 나타났는데, 그는 손에 친자 확인 보고서를 들고 있었다.“만약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면, 내가 하나 찾아주지.”지아는 도윤을 만나는 것을 배척했는데, 그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랐다.그는 검사 보고서를 건넸고, 지아는 그것이 자신과 지윤의 이름이 적힌 친자 확인 보고서란 것을 발견했다.‘이지윤? 이도윤이랑 똑같이 생긴 그 아이?’위에는 그녀가 바로 지윤의 어
“소지아, 너 정말 죽었어야 했어.”이 한 마디가 지아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더니, 그녀는 예전의 비천했던 자신과 도도한 도윤을 보았다.‘그때 이도윤은 날 믿었었나?’‘날 바라보는 표정은 마치 쓰레기를 보는 것과 같았는데.’‘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날 이토록 혐오했던 것일까?’이런 일들을 생각하니, 머리에서 심한 통증이 밀려왔고 지아는 아파서 어쩔 바를 몰랐다.“지아야, 왜 그래? 위가 또 아픈 거야?”도윤은 급히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지아는 애써 눈을 들어 도윤을 바라보더니 오히려 그의 손목을 잡아당겼는데, 눈빛은 무척 사늘했다.“이도윤, 너 정말 죽었어야 했어.”도윤은 표정이 굳어졌고, 다음 순간, 지아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내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어? 그래, 치료를 포기하면 나도 곧 네가 원하는 대로 죽게 될 거야.”지아는 또 무언가를 기억해 낸 게 분명했다. 도윤은 황공하면서도 불안했는데, 이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지아야, 과거에 우리 사이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었어. 그러나 그 오해는 다 지나갔으니까 더 이상 생각하지 마. 난 지금 네가 잘 살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야.”“만약 내가 치료를 거부한다면?”“지아야, 약물치료를 받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도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거야. 지금 우리는 더 좋은 방법이 없으니까 나에게 시간을 좀 더 줘, 응?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널 구할 거야.”그러나 도윤이 무슨 말을 해도 지아는 듣고 싶지 않았다.“필요 없어.”“지아야,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나 정말 무슨 짓 할지 몰라.” 도윤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살짝 붉어진 눈시울은 점차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도윤, 난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없지만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선택할 권리는 있어. 날 놓아줘. 남은 시간 동안은 사람처럼 지내고 싶으니까.”그러나 도윤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지아야, 미안. 널 살리는 게 내 가장 큰 소원이라서.”그리고 그
중간에 지아는 도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약효 때문에 그녀는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하며 구역질이 나더니 온몸에 힘이 빠진 것 같았다.도윤은 재빨리 지아를 부축하며 침대에 눕혔다.“지아야, 함부로 움직이지 마.”그녀는 움직이고 싶어도 힘이 없었는데, 움직이기만 하면 온 세상이 빙빙 돌아서 지아는 눈을 꼭 감고 이런 불편함을 완화시킬 수밖에 없었다.약물치료를 받는 시간은 보통 링거를 맞는 시간보다 훨씬 길었고, 어둠의 장막이 내린 후에야 지아는 마지막 링거를 다 맞았다.그동안 도윤은 줄곧 인내심을 가지고 지아와 함께 했지만, 그녀가 약효를 견딜 수 없을까 봐 불안하기도 했다. 다행히 지아는 비록 몸이 허약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쭉 버텼다.이때의 지아는 전혀 움직이지 못했고 익숙한 느낌이 다시 엄습했다. 그녀는 심지어 눈을 뜨지도 못했는데, 머리까지 심하게 어지러웠다.도윤은 건우에게 물었다.“지아가 처음으로 약물치료를 받았을 때도 이런 반응을 보였는가?”“맞아요, 지아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어요. 많은 환자들은 치료를 다 받기도 전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지만 지아는 적어도 끝까지 버텼거든요. 그 후 3일은 부작용이 가장 심할 때라, 또 3일이 지난 후에야 불편함이 점차 줄어들 거예요. 그렇게 21일이 한 주기이니 다음에는 21일 후에 치료를 진행하면 돼요. 물론 그 전에 이번의 효과와 지아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죠.”도윤은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못하는 여자를 보면서 마음속의 죄책감이 재차 깊어졌다.“오늘은 그런대로 괜찮을 거지만 내일부터 점점 더 괴로울 거예요. 지아가 물을 많이 마셔 독소를 배출하도록 꼭 독촉해요. 그리고 요 며칠 단백질을 많이 보충해 주고요. 약물치료를 진행한 후, 신체의 각종 지표, 예를 들면 백혈구와 적혈구의 수량이 빠르게 떨어질 텐데, 이때 지아는 메스껍거나 속이 뒤집혀서 음식을 먹지 않을 거예요. 그럼 대표님은 꼭 지아에게 먹으라고 타일러야 해요. 그리고 각종
도윤은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인기척을 들었다. 고개를 들자, 지아가 땅에 넘어지는 것을 보고 그는 재빨리 달려가 지아를 안았다.“지아야, 괜찮니?” 이미 사람을 자신의 품에 꼭 안았지만 도윤은 여전히 식은땀이 났다.현재 지아의 상태는 너무나도 취약했기에 살짝 넘어져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지아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나...”그녀는 지금 도윤에게 화를 낼 힘이 전혀 없었고 심지어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 거의 질식할 지경이었다.“왜 그래? 목마른 거야? 아니면 배고픈 거야? 나한테 말해 봐.”지아는 입을 열기가 좀 쑥스러웠다.“가, 가서 여자 간병인 좀 불러줘.”도윤은 즉시 지아의 뜻을 알아차렸고, 재빨리 그녀를 화장실로 안고 갔다. 지아는 어색하고 뻘쭘해서 그를 쫓아냈다.도윤은 문 앞에서 지키며 얼른 전화로 이 집사를 불렀고, 또 아침밥을 준비했다.지아는 간단히 씻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을 다 썼고, 도윤은 그녀를 침대로 부축했다.“지아야, 지금 내가 엄청 밉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우선 몸부터 생각해야지.”지아는 담백하고 입맛을 돋우는 죽을 바라보며 오히려 구역질이 났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못 먹겠어.”“못 먹어도 좀 먹어, 자.” 도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내심을 가지고 지아를 달랬다.요 며칠 잠을 잘 자지 못한 데다 또 밤까지 새워서 남자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겼고, 잘생긴 얼굴 역시 많이 초췌해졌다. 어젯밤 도윤은 병실에 있는 작은 침대에서 잤기에 지금 입은 비싼 셔츠까지 쭈글쭈글해졌다.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오직 지아만을 챙겨주었다.지아는 그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녀의 기억 속 도윤은 줄곧 그녀를 무시한 매정한 남자였지만, 그녀가 깨어난 후, 도윤은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는 사랑꾼이었다.지아는 도윤이 왜 갑자기 이렇게 변했는지 몰랐다. 그녀는 지금 남자가 탐낼 만한 그 아무것도 없었다.그녀가 멍을 때릴 때, 도윤은 죽을 먹여
도윤이 동작을 멈추자, 지아는 담담하게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도윤은 동작이 더욱 가벼워졌고, 감히 힘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빠져야 할 머리카락은 계속 빠졌다.도윤은 마침내 2년 전 지아가 단발머리를 자른 이유를 깨달았다.지아가 가장 허약하고 아파할 때, 도윤은 그녀의 곁에 없었으니, 이번에 그는 누가 뭐라 해도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그렇게 가볍게 머리를 정리해 준 뒤, 도윤은 지아에게 외투를 걸쳤고, 그녀를 휠체어로 안았다. 떠나기 전, 도윤은 또 침대 세트를 바꾸라고 분부했다.여자들은 항상 꾸미는 것을 좋아했다. 도윤은 예전에 두 사람이 싸우기 전, 지아가 긴 머리를 가장 좋아했던 것을 떠올렸다.그때 그녀는 소박하고 우아한 치마에 집게핀으로 머리카락을 감아올렸다.도윤은 여전히 지아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말아올릴 수 있다며 자랑스럽게 말하던 그 귀여운 표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예전의 지아는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도윤은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도윤은 지아를 나무그늘 아래로 밀었는데, 그 앞은 바로 잔디밭이었고 일부 환자와 그들의 가족들은 자유롭게 햇빛을 만끽하고 있었다.나뭇가지 위의 새들은 재잘재잘 지저귀고 있었고,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으니 무척 아름다웠다.이때, 작은 노란 공이 지아의 앞으로 굴러갔다. 공 위에는 만화 캐릭터가 눈을 크게 뜬 채 헤벌쭉 웃고 있었다.“엄마...”앳된 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지아는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멜빵바지를 입은 한 남자아이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그날 거실에서 본 것과 달리, 지금 햇빛 아래에서 웃는 아이의 미소는 더욱 뚜렷해졌다.“얘가 바로 이지윤이야?”지아가 물었다.“응, 이것도 네가 지어준 이름이야. 우리 각자의 이름에서 한 글자 따서.”지윤은 지금 자유롭게 달릴 수 있었고, 짧은 다리를 아주 빠르게 내디
심장후는 신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고, 단지 평안한 삶을 살기를 원할 뿐이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시월이 두 사람의 전 재산을 걸고 미래를 도박하려는 것이 걱정이었다.‘만약 월이의 계획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모든 걸 잃고 말 거야.’ 심장후도 시월과 비슷한 출신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특수한 계기로 지금의 명문가 도련님 신분을 얻었지만, 심장후는 그 신분은 아주 소중히 여겼다. 지금 이 순간 물러난다고 해도, 심장후가 가진 돈은 평생을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심장후는 욕심이 없었고, 그에게 있어서는 지금이 인생의 정점이었다.‘나는 단 한 번도 기적 같은 부를 바란 적이 없어.’ 하지만 시월은 심장후의 생각과 달랐다.삼징후가 설득하려 애썼지만, 시월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화만 커질 뿐이었다. “딱 한 가지만 물을게. 날 도울 거야, 말 거야?” “월아, 내가 어떻게 널 돕지 않을 수 있겠어. 하지만...”“그럼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내가 소씨 가문을 손에 넣으면, 오빠도 많은 걸 누릴 수 있을 거야.” 심장후는 한숨을 내쉬었다.“월아, 우리가 누구든,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해. 네가 원한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게.” “그럼 가서 방법이나 생각해 봐, 최대한 빨리 2조를 마련해야 해.” 시월은 자신이 보유한 고정 자산, 즉 부동산, 상가, 펀드 등을 단기간에 현금화할 수 없었기에, 심장후에게 방법을 찾아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심장후는 결국 시월의 요구를 받아들였다.심장후는 심씨 가문에서 사랑받는 가족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런 명문가 집안을 통해 2조를 마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모든 행동은 시후의 감시 아래 있었고, 도윤은 일찍이 사람들을 배치하여 모든 사실을 지아에게 알려주었다. “소시월이 미끼를 물었어. 곧 자금을 마련할 것 같아.” 지아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너무 큰 야망은 독이 되는 법인데... 소시월은 너
2조는 시월에게 전 재산이었다.만약 시월이 그 돈을 들여 소씨 가문의 적자를 메우고도 돌려받지 못한다면, 시월이 수년간 힘들게 세운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시후는 분명히 말했다.“회사가 안정을 되찾으면, 우리 소씨 가문은 너에게 맡길게.”즉, 시월이 2조를 투자하면, 소씨 가문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그것은 몇 배의 높은 수익을 의미했다. 1을 투자해 100을 얻는, 그야말로 엄청난 도박인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박꾼에게 있어 베팅이 클수록 보상이 풍부해지면, 유혹도 더욱 커지는 법이었다. 시월은 자신이 실패할 가능성도 고려했지만, 소씨 가문에서 오랜 세월 동안 지켜본 결과, 시후는 말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실패했을 때의 대가와 성공했을 때의 수익을 비교했을 때, 성공의 가능성이 시월을 더 사로잡았다. ‘그래, 수년 동안 공들여 기다려온 기회를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순 없어.’ 시후가 시월을 난처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2조는 적은 금액이 아니야. 월아, 큰 부담이 되지 않겠어? 우리가 이미 은행에서 2조의 대출을 받지 않았다면, 은행에 도움을 요청했겠지만...”“오빠, 오빠는 어릴 때부터 저를 보호해 주셨잖아요. 이제 집안에 문제가 생겼으니, 이번엔 제가 나설 차례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한테는 저축한 돈도 있고, 그동안 밖에서 조금씩 모은 돈도 있어요. 방법을 조금 더 찾아볼게요.”“월아, 정말 잘 자라줬구나. 하지만 최대한 빨리 돈을 마련해야 해. 친척들도 우리가 반격할까 봐 계속해서 지분을 사들이고 있거든.” “당장 방법을 찾아볼게요.” “그래, 이번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회사를 지키게 되면, 아버지께서 너에게 회사를 넘겨주실 거야.”“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저 오빠들은 잘 지키고 싶을 뿐이니까요.” 시월은 참으로 감동적인 말을 했는데, 시후조차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질 정도였다. ‘아주 완벽한 연기가 따로 없네.’두 사람이 많은 이야기를 나눈 뒤, 시
시후는 계속해서 부드럽게 설득했다. “지금 우리는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에 부닥쳐 있어. 어머니의 행방은 아직 알지도 못하고, 이젠 방계 친척들까지 우리를 노리고 있으니까.”“그 사람들은 원래 할아버지께서 우리를 편애한다고 불만이 많았고, 아버지의 회사도 할아버지의 재산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회사 지분의 일부를 몰래 사들이기 시작했던 거야.”“물론 원래는 걱정할 일이 아니었어. 그 지분들은 큰 위험이 되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제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잖아.” 소시월은 표정이 크게 변했다.“그래서 문제가 생긴 거예요?”“그래, 큰 문제가 생겼어. 그 사람들이 가진 소액 지분에 할아버지의 지분까지 더해지면서 아버지께서 가진 모든 지분을 넘어서고 말았으니까.” 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아버지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탓에, 자식들에게 지분을 나눠주셨던 게 화근이 된 거야. 그 누구도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고, 친척 쪽에서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 거지.” “이제 아버지께서 가진 지분은 그 사람들보다 훨씬 적어. 이대로라면 회사의 주도권도 그 사람들에게 넘어가고 말 거야. 우리가 소송을 해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거라고.” “그럼 이제 어떡해요?”시월이 그 거대한 재산에 눈독을 들이며, 지금까지 도망가지 않고 시후와 대치 중인 것도 그 탐스러운 금은보화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야. 손실을 최소화하고, 우리가 가진 모든 지분을 아버지께 돌려드려야 해.” 이는 시월이 가지고 있는 3%의 지분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비록 3%라고 해도, 시월이 매년 받는 배당금은 수십억대에 달했다.“그걸로 충분할까요?”“부족해.”시후는 단호히 말했다.“그 사람들은 그동안 치밀하게 준비했어. 우리에게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을 거란 뜻이지. 그 사람들이 몰래 사들인 지분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아. 거기에 할아버지의 20% 지분까지 더
소임호는 눈가가 붉어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며 울고 있는 시월을 바라보았다.그 소녀는 한때 소임호가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아빠,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아빠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시월은 병상 앞에서 한참을 울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어서 마음속에 의문을 품었다. “아빠...?”시언은 마음속에 치밀어 오르는 증오를 억누르고,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월아, 아버지는 지금 많이 허약하셔.”“아빠, 그럼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집안일은 제가 잘 챙길게요.”시월은 한참 동안 위로의 말을 전했지만, 소임호는 단지 짧게 ‘그래’라는 대답만 했다. 다만, 시월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침대를 꽉 잡은 소임호의 손등에는 불거진 핏줄이 선명했다. 소임호는 시월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하지만 과거 시월이 저질렀던 일들을 떠올리면, 소임호는 결코 마음이 평온할 수 있었다. ‘우리 시영이는 이 냉혈한 때문에 죽임을 당했어. 시영이는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났고, 죽기 전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 심지어 시신을 거둘 사람도 없었다고.’소임호는 많은 풍파를 겪은 사람이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소임호는 눈을 감고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지금은 참아야 해. 지아의 계획이 아직 진행 중이니, 절대로 폭발해서는 안 돼.’ 소씨 가문 사람들이 시월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이익과 기회를 제공했는지를 소임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소시월은 이미 보통 사람이 백 년을 노력해도 얻지 못할 만큼의 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월은 전혀 만족하지 못했고, 끝까지 탐욕을 부렸다. “큰오빠, 할 말이 있어요.”“잘됐네, 나도 마침 할 말이 있던 참이야.”두 사람은 한 명씩 방을 나섰고, 시후는 거실 소파에 앉아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빠, 오빠랑 연락이 안 되는 동안 우리 소씨 가문에 더
시후는 약간 놀랐다. 조경선을 모든 게 들통나자마자 꼬리를 자르고 도망쳤는데, 오히려 소시월은 도망치지 않고 시후에게 전화를 걸었으니 말이다. ‘지아 말이 맞았어. 소시월은 독하기만 한 게 아니라, 야망도 끝이 없었던 거라고.’ 시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그래, 오빠야, 무슨 일이야?] “오빠, 그동안 연락이 안 돼서 정말 걱정했어요. 괜찮은 거예요?” [난 괜찮아.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아버지를 구출하려고 노력 중이었거든.]“그럼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구했어요?”시월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만약 시후가 진실을 알지 못했다면, 시월의 태도와 과거의 일을 연결 짓지 못했을 것이었다. ‘정말 무서운 여자였구나.’ ‘나이는 어리지만, 보통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야망과 담력을 가지고 있었어.’ ‘이런 사람을 그냥 죽여버리는 건, 너무 가벼운 처벌이야!’ 시후는 지아가 미리 알려준 대로 대처했고, 시월은 즉시 소임호를 보러 오겠다고 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안전하지 않으니, 올 때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 괜히 문제를 더 키울 수도 있으니까.] “오빠,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후, 시후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아야, 역시 네 말이 맞았어. 소시월은 도망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 계획을 진행하려고 하는 중이었다고.” “소시월은 아주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왔어요. 저는 죽이려 한 것만 봐도, 소시월이 얼마나 철저한지 알 수 있잖아요. 그 여자는 절대 본인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거예요.” “제가 할머니의 사진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직도 소시월한테 속고 있었을 거예요. 그 여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을 거라고요!” “그렇게 독한 사람은 죽이는 것도 아까워!”시하는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내 다리, 내가 잃어버린 지난 세월이 다 소시월 때문이었어! 그리고 시영이의 죽음도... 다 그 여자 때문이었다고! 나는 그 여자를 죽이
소씨 가문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고, 시월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비록 지금은 소임호의 신분을 입증할 절대적인 증거가 없었지만, 소씨 가문 사람들은 이미 소임호가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이에 따라 소임호의 혈통은 소씨 가문 내에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시월과 조경선의 원래 계획은 소씨 가문을 후손 없이 무너뜨려 소씨 가문의 대부분 재산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 재산은 실로 어마어마했으니 말이다.게다가 소씨 가문 사람들이 시월은 아무리 아껴주어도, 결국 시월은 시집가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시월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저 한몫의 축의금뿐이었고, 그것마저 심씨 가문으로 가져가야 할 것이었다.게다가 결혼한 뒤에는 시월이 남자의 부속물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시월이 이렇게까지 하려는 이유는 단지 조경선을 위해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시월은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는데, 조경선처럼 사랑에 집착하는 사람과는 달리, 시월은 훨씬 더 영리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게 바로 사랑이야.’ 물질적인 안정만이 시월에게 충분한 안정감을 제공할 수 있었다. 조경선은 시월이 친딸이라고 주장했지만, 시월은 이미 자신의 출생 비밀을 철저히 파헤쳤다. 조경선은 평생 소임호만을 사랑하며 집착했기에, 다른 남자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사실, 시월은 생모는 깊은 산골에 살던 농부의 아내였다. 시월은 집안의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죽을 뻔했지만, 마음이 약해진 시월의 생모는 시월을 산에 버렸고, 마침 산속으로 숨어들었던 조경선이 그녀를 발견해 데려간 것이었다. 조경선은 그 순간부터 복수를 위한 계획을 마음속에 세웠다.시월은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난 후 더욱 노력했고, 조경선이 자신을 산속에서 데려온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비록 시월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노력으로 부족함을 메웠다. 게다가 소씨 가문의 풍부한 자원과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무사히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한편, 도윤은 혼란스러운 예린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예린은 총알에 스쳐 가벼운 상처만 입었지만, 표정은 마치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공허하고 무기력했다. 예린은 차량 뒷좌석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온몸이 부서질 듯한 상태였다. 진실이 주는 충격은 예린에게 너무도 컸다. 그녀의 마음은 죄책감과 혼란으로 가득 찼는데, 고개를 들어 도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빠, 그때 날 죽이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구나? 이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결과라는 걸 알았으니까.” 예린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나도 이렇게 되길 원치 않았어. 나는 소 선생님을 돕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소 선생님의 여동생을 죽일 뻔했어. 나는 죽어야 해!” 도윤은 스스로를 질책하는 예린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신도 아니고, 미래를 내다볼 능력도 없어. 내가 네 목숨을 살려둔 건, 너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다고.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뜻이었어.”도윤이 예린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예린아, 우리는 원래부터 정상적인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했잖아. 우리 부모님의 잘못된 선택이 우리에게도 왜곡된 마음을 심어줬어. 그래서... 우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쉽게 하게 된 거지. 오빠도 과거에는 너처럼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 지아가 어떤 벌을 내리든, 나는 받아들일 생각이야.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이유는 과거를 속죄하기 위해서거든.”“잘못은 잘못이고, 그걸 변명할 수는 없어. 하지만 과거에 얽매여 계속 괴로워한다면, 소 선생님이 널 구할 필요가 있었겠어?” 예린은 시후의 이름이 언급되자, 눈동자에 희미한 생기가 돌았다. “그분의 선의를 배신하지 마. 넌 살아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해. 과거가 아무리 어둡더라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살을 볼 수 있을 거야.” “예린아, 앞으로는 반듯하게 살아가야 해.” “오빠
시후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괜찮아. 일단 진정 좀 해봐.” 시후가 도윤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많이 흥분한 것 같은데, 어서 데려가서 좀 쉬게 해줘.” 도윤의 입장에서 계속 이곳에 머무는 것은 이미 불편한 일이었다. 소씨 가문의 남자들이 맹수처럼 당장이라도 도윤을 물어뜯을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도윤의 목적은 예린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이었는데, 예린은 고집이 세고 완고했기 때문에,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 뻔했다. “장인어른, 몸조리 잘하세요.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도윤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소임호는 도윤에게 베개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소임호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는데, 자기 딸이 밖에서 고생하며 학대받을 때, 도윤이 그저 방관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지아가 급히 다가가 소임호를 달랬다.“아빠, 진정하세요. 아직은 몸이 회복되지 않으셨잖아요.” “이름이 지아라고 했나?”소임호는 지아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지아는 환희와 많이 닮아 있었지만, 눈매와 이목구비는 소임호와 조경숙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네, ‘지혜 지’에 ‘맑을 아’예요.”“아주 훌륭한 이름이구나.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겠니... 너를 잘 키워주신 양아버지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은데, 내가 직접 방문할 기회가 없어서 아쉬울 따름이구나.” “제 양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이 소식을 들으신다면, 저를 가족들과 만나게 해 주신 것을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 지아는 이 방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었지만, 가장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비록 가족을 만나던 순간에는 눈물을 참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미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아빠, 제가 처방전을 써드릴게요. 그대로만 복용하시면 곧 건강을 회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지아가 처방전을 쓰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런데... 다들 소시월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세요?” 지아는 무심한 듯 물었지만, 소시월은 소씨 가문 사람
지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이번 생에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해요.” “지아야, 소시월이 그렇게 악랄한 사람인 줄 몰랐어. 그 X은 너를 몇 번이고 암살하려 했고, 우리 가족을 산산조각 냈어!” “전에 오빠가 너에 대한 편견을 가졌던 걸 용서해 줄 수 있겠어?” “여러분이 제 가족이라는 걸 몰랐을 때도, 저는 한 번도 오빠들을 원망한 적 없어요.” 가족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고, 모두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지만, 이예린만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충격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말도 안 돼. 소지아가 날 속였다니, 어떻게 날 속인 거지?”예린은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시후는 예린이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괜찮아? 이만 일어나.”예린은 시후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고, 지아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모든 게 내 잘못이에요.” 본래 예린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도윤이 그녀의 손과 발의 힘줄을 끊었을 때조차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예린은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미친 듯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머리를 몇 번 조아리자, 예린의 이마에서는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고, 머리뼈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뚜렷하게 울렸다. “그러지 말고 일어나서 이야기해.” 하지만 시후의 말은 예린의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예린은 지아의 손목을 붙잡은 채, 피와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언니, 미안해요. 저도 속아서 그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거예요. 용서는 바라지도 않을게요. 그냥 저를 죽여주세요. 제발 죽여주세요!” 예린은 자신이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느꼈고, 죽음을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지아는 예린을 그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았고, 후회로 가득 찬 예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너는 분명히 죽어 마땅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