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 지아는 도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약효 때문에 그녀는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하며 구역질이 나더니 온몸에 힘이 빠진 것 같았다.도윤은 재빨리 지아를 부축하며 침대에 눕혔다.“지아야, 함부로 움직이지 마.”그녀는 움직이고 싶어도 힘이 없었는데, 움직이기만 하면 온 세상이 빙빙 돌아서 지아는 눈을 꼭 감고 이런 불편함을 완화시킬 수밖에 없었다.약물치료를 받는 시간은 보통 링거를 맞는 시간보다 훨씬 길었고, 어둠의 장막이 내린 후에야 지아는 마지막 링거를 다 맞았다.그동안 도윤은 줄곧 인내심을 가지고 지아와 함께 했지만, 그녀가 약효를 견딜 수 없을까 봐 불안하기도 했다. 다행히 지아는 비록 몸이 허약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쭉 버텼다.이때의 지아는 전혀 움직이지 못했고 익숙한 느낌이 다시 엄습했다. 그녀는 심지어 눈을 뜨지도 못했는데, 머리까지 심하게 어지러웠다.도윤은 건우에게 물었다.“지아가 처음으로 약물치료를 받았을 때도 이런 반응을 보였는가?”“맞아요, 지아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어요. 많은 환자들은 치료를 다 받기도 전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지만 지아는 적어도 끝까지 버텼거든요. 그 후 3일은 부작용이 가장 심할 때라, 또 3일이 지난 후에야 불편함이 점차 줄어들 거예요. 그렇게 21일이 한 주기이니 다음에는 21일 후에 치료를 진행하면 돼요. 물론 그 전에 이번의 효과와 지아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죠.”도윤은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못하는 여자를 보면서 마음속의 죄책감이 재차 깊어졌다.“오늘은 그런대로 괜찮을 거지만 내일부터 점점 더 괴로울 거예요. 지아가 물을 많이 마셔 독소를 배출하도록 꼭 독촉해요. 그리고 요 며칠 단백질을 많이 보충해 주고요. 약물치료를 진행한 후, 신체의 각종 지표, 예를 들면 백혈구와 적혈구의 수량이 빠르게 떨어질 텐데, 이때 지아는 메스껍거나 속이 뒤집혀서 음식을 먹지 않을 거예요. 그럼 대표님은 꼭 지아에게 먹으라고 타일러야 해요. 그리고 각종
도윤은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인기척을 들었다. 고개를 들자, 지아가 땅에 넘어지는 것을 보고 그는 재빨리 달려가 지아를 안았다.“지아야, 괜찮니?” 이미 사람을 자신의 품에 꼭 안았지만 도윤은 여전히 식은땀이 났다.현재 지아의 상태는 너무나도 취약했기에 살짝 넘어져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지아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나...”그녀는 지금 도윤에게 화를 낼 힘이 전혀 없었고 심지어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 거의 질식할 지경이었다.“왜 그래? 목마른 거야? 아니면 배고픈 거야? 나한테 말해 봐.”지아는 입을 열기가 좀 쑥스러웠다.“가, 가서 여자 간병인 좀 불러줘.”도윤은 즉시 지아의 뜻을 알아차렸고, 재빨리 그녀를 화장실로 안고 갔다. 지아는 어색하고 뻘쭘해서 그를 쫓아냈다.도윤은 문 앞에서 지키며 얼른 전화로 이 집사를 불렀고, 또 아침밥을 준비했다.지아는 간단히 씻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을 다 썼고, 도윤은 그녀를 침대로 부축했다.“지아야, 지금 내가 엄청 밉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우선 몸부터 생각해야지.”지아는 담백하고 입맛을 돋우는 죽을 바라보며 오히려 구역질이 났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못 먹겠어.”“못 먹어도 좀 먹어, 자.” 도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내심을 가지고 지아를 달랬다.요 며칠 잠을 잘 자지 못한 데다 또 밤까지 새워서 남자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겼고, 잘생긴 얼굴 역시 많이 초췌해졌다. 어젯밤 도윤은 병실에 있는 작은 침대에서 잤기에 지금 입은 비싼 셔츠까지 쭈글쭈글해졌다.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오직 지아만을 챙겨주었다.지아는 그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녀의 기억 속 도윤은 줄곧 그녀를 무시한 매정한 남자였지만, 그녀가 깨어난 후, 도윤은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는 사랑꾼이었다.지아는 도윤이 왜 갑자기 이렇게 변했는지 몰랐다. 그녀는 지금 남자가 탐낼 만한 그 아무것도 없었다.그녀가 멍을 때릴 때, 도윤은 죽을 먹여
도윤이 동작을 멈추자, 지아는 담담하게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도윤은 동작이 더욱 가벼워졌고, 감히 힘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빠져야 할 머리카락은 계속 빠졌다.도윤은 마침내 2년 전 지아가 단발머리를 자른 이유를 깨달았다.지아가 가장 허약하고 아파할 때, 도윤은 그녀의 곁에 없었으니, 이번에 그는 누가 뭐라 해도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그렇게 가볍게 머리를 정리해 준 뒤, 도윤은 지아에게 외투를 걸쳤고, 그녀를 휠체어로 안았다. 떠나기 전, 도윤은 또 침대 세트를 바꾸라고 분부했다.여자들은 항상 꾸미는 것을 좋아했다. 도윤은 예전에 두 사람이 싸우기 전, 지아가 긴 머리를 가장 좋아했던 것을 떠올렸다.그때 그녀는 소박하고 우아한 치마에 집게핀으로 머리카락을 감아올렸다.도윤은 여전히 지아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말아올릴 수 있다며 자랑스럽게 말하던 그 귀여운 표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예전의 지아는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도윤은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도윤은 지아를 나무그늘 아래로 밀었는데, 그 앞은 바로 잔디밭이었고 일부 환자와 그들의 가족들은 자유롭게 햇빛을 만끽하고 있었다.나뭇가지 위의 새들은 재잘재잘 지저귀고 있었고,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으니 무척 아름다웠다.이때, 작은 노란 공이 지아의 앞으로 굴러갔다. 공 위에는 만화 캐릭터가 눈을 크게 뜬 채 헤벌쭉 웃고 있었다.“엄마...”앳된 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지아는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멜빵바지를 입은 한 남자아이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그날 거실에서 본 것과 달리, 지금 햇빛 아래에서 웃는 아이의 미소는 더욱 뚜렷해졌다.“얘가 바로 이지윤이야?”지아가 물었다.“응, 이것도 네가 지어준 이름이야. 우리 각자의 이름에서 한 글자 따서.”지윤은 지금 자유롭게 달릴 수 있었고, 짧은 다리를 아주 빠르게 내디
이 집사는 멀지 않은 곳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재빨리 와서 지아를 밀고 떠났다. 그리고 떠나기 전, 그녀는 한심한 눈빛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지금 도련님은 또 뭐 하려는 거지? 작은 사모님과의 관계가 가까스로 좋아졌는데 왜 또 눈치 없게 분위기를 망친 거야.’이때 진환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대표님, 지금 너무 조급해 하시지 마세요. 마음이 급할수록 상황은 더욱 엉망이 될 것입니다.”도윤은 한숨을 내쉬었다.“난 지아가 살아갈 동력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난 지아가 계속 살아갈 희망이 있기를 바라거든. 지윤이를 보면 모성애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 같아.”“대표님, 그냥 포기하세요. 사모님 지금 이렇게 되신 이상, 더는 자극을 받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작은 도련님의 일은 앞으로 다시 이야기하시죠.”“그럴 수밖에 없겠군.”도윤은 몸을 웅크리더니 이채나를 안고 일어섰다. 비록 그는 백채원을 극도로 혐오했지만 이 아이는 전림의 유일한 아이였기에 도윤도 정성껏 돌볼 수밖에 없었다.이때 백채원은 휠체어를 밀며 그의 앞으로 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도윤 씨, 나도 그냥 소지아 씨 병문안 좀 보러 오고 싶었을 뿐이에요. 정말 다른 뜻 없었어요.”“아빠, 엄마는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이채나도 쭈뼛쭈뼛 말했다.“착하다, 우리 채나.” 도윤은 이채나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어찌된 일인지 지아는 갑자기 고개를 돌렸는데, 도윤이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아이를 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네 사람이 함께 서 있으니 한 가족과 다름없었고, 지아는 그저 눈에 거슬리다고 생각했다.‘이게 바로 이도윤이 말한 사랑인가? 정말 웃겨.’이 집사는 급히 입을 열어 설득했다.“작은 사모님, 오해하지 마세요. 도련님의 마음속에는 오직 사모님 한 사람 뿐입니다.”“이 집사, 앞으로 이런 말 좀 삼갔으면 좋겠어요.”지아는 듣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그렇게 지아는 다시
이 집사는 지아를 설득하려 했지만 지아는 오히려 손을 흔들었다.“나 좀 쉬고 싶으니까 그 남자 들여보내지 마요. 난 그 남자 꼴도 보기 싫으니까.”“알겠습니다.”이 집사는 지아에게 이불을 잘 덮어준 다음 방을 떠났다. 문밖에서 도윤은 지윤을 안고 있었는데, 지윤의 얼굴에는 커다란 눈물이 맺혀 있어 유난히 불쌍해 보였다.“아빠, 나 엄마 보고 싶어요.” 지윤은 도윤의 옷깃을 잡으며 불쌍하게 말했다. 그는 곧 3살이 되어 갔기에 이미 자신의 의사를 완전히 표현할 수 있었다.그는 엄마를 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아직도 어린 지윤은 예전에 자신을 다정하게 안아준 엄마가 왜 지금은 이렇게 무섭게 변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단지 엄마가 안아주기를 원하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도윤은 한손으로 지윤을 안았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엄마는 지금 아파서 널 안아줄 수 없어.”“엄마가 아파요?” 지윤은 맑은 같은 눈을 굴리며 말했다.“정말이에요?”말하면서 지윤은 감기에 걸린 척 기침을 했고 도윤은 그의 코를 가볍게 긁었다.“엄마 지금 많이 아프거든.”“그럼 약 먹고 주사 놓아야 해요.”“그래, 약 먹으면 엄마도 많이 좋아질 거야.”도윤은 소리 없이 탄식했다.“이제 아빠가 집으로 데려다줄게.”두 사람이 화원을 지나가다 지윤은 무언가 생각난 듯 화원에 활짝 핀 꽃을 가리킨 다음 또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화환, 아빠, 엄마 전에 꽃으로 만든 화환 썼잖아요.”이 말을 듣자, 도윤은 마음이 더욱 아팠다. 1년 여전의 일이었지만 뜻밖에도 지윤이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니.그들 세 식구가 야외에서 캠핑을 할 때, 도윤과 지윤은 많은 들꽃을 따서 화환을 엮었고 지아에게 씌워주었다.지윤은 비록 어리지만, 그날 자신의 어머니가 화환을 쓰고 즐겁게 웃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도윤은 그런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심장이 아팠다.“꽃 따러 가요.” 지윤은 도윤이 마음이 아프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고, 얼른 화원에 달려가 예쁜 꽃
지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아마 정말 궁지에 몰렸을지도 모르죠. 그렇지 않으면 누가 심심해서 병원의 꽃까지 훔치려 하겠어요.”“제 생각에는 지금 기본이 틀려먹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아가씨, 이제 그만 푹 쉬세요.”간호사가 문을 닫고 떠나자, 지아도 바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때, 그녀는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지아는 졸음이 몰려와서 확인할 힘이 없었다.지아는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도리어 곁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났다. ‘머리에 뭐가 있는 것 같은데, 의사 선생님이 아닌가?’생각하다 지아는 눈을 떴고 둥글고 큰 두 눈과 마주쳤다. 그 정교한 작은 얼굴은 지아가 깨어난 것을 보고 쑥스러움을 드러냈다.“엄마, 화환.”지윤은 화환을 바르게 씌워주려고 애를 썼고, 작은 손은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너구나.” 지아는 가볍게 중얼거리며 시선은 어린아이의 손에 있는 그 화환에 떨어졌다. 지아는 멈칫했다.‘설마, 방금 간호사가 말한 그 꽃도둑이 이도윤과 이 아이라고? 두 사람 대체 뭐 하려는 거지?’지아는 어이가 없었다.지아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보고, 지윤은 천천히 작은 침대에 올라가 지아의 품에 안겼다.“엄마, 보고 싶었어요.”지아의 심장은 마치 무언가에 찔린 것 같았고, 따뜻함을 느끼는 동시에 무척 아팠다.그녀는 꼬마가 왜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지 몰랐지만, 지아는 지윤이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그마한 꼬마가 너무 귀여워서 지아의 마음이 사르르 녹기 시작했다.꼬마는 침대에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지아를 위해 화환을 똑바로 씌워 주었다. 그리고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었는데, 특히 그 보조개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엄마, 빨리 나아야 해요.”지아는 더 이상 지윤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순진한 미소에는 아무런 다른 감정도 섞이지 않았다.지아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이자, 꼬마는 매우 기뻐해하며 그녀의 얼굴에 뽀뽀를 한 다음 얼른 달아났다.
지윤은 지금 스스로 사고를 할 수 있었기에 백채원에게 얻어맞은 후, 우는 대신 오히려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랐고, 백채원이 왜 자신을 때렸는지 몰랐다꼬마의 조그마한 얼굴에 손바닥 자국이 나타나더니 오른쪽 얼굴은 새빨갛게 붓기 시작했다. 이를 본 백채원은 화가 즉시 가셨고 곧바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얼른 아이를 품에 안았다.“지윤아, 많이 아파? 엄마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그녀는 지아를 뼈에 사무치게 원망했지만, 지아가 곧 죽을 것이란 생각에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백채원은 기뻐해하며 말했다. “이제 그 미친 여자도 곧 죽을 거야.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어! 지윤아, 이제 아빠가 다시 돌아올 거야. 넌 도윤 씨와 많이 닮았으니 앞으로 꼭 그의 앞에서 잘 보여야 해. 그래야 아빠도 엄마에게 좀 더 잘해 줄 수 있어.”백채원은 수많은 일을 겪은 후, 정신이 아주 비정상적으로 변했다. 그녀는 툭하면 웃다가 울었고, 또 흥분해지면 아예 미쳐버렸기에 지윤은 갈수록 눈앞의 여자가 두려웠다. 커다란 두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지윤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이때, 주은청이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는데, 지윤의 작은 얼굴이 빨갛고 부은 것을 발견했다.전에 백채원은 정서가 불안정할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지윤의 엉덩이를 때렸지만, 지금까지 아이의 얼굴을 때린 적이 없었다.이는 지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본 주은청으로 하여금 가슴 아프게 했다.“뭘 봐?” 그러나 백채원은 심지어 개의치 않았다.“내가 내 아들 때리는 게 뭐가 어때서? 왜 그런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거야?”주은청은 마음속의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입을 열었다.“작은 도련님이 도대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고 싶습니다. 어찌 세 살도 안 된 아이의 뺨을 때리실 수 있습니까? 작은 도련님이 얼마나 착하고 얌전한데, 그런 도련님을 아끼시긴커녕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있습니까?”“닥쳐, 네가 뭔데 감히 나한테 대들어?”백채원은 일어서서 주은청을 때리려고
백채원의 곁에 있는 이 몇 년 동안, 주은청은 그녀의 이런 불쌍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백채원은 계속 울음을 터뜨렸다.“난 이미 부모님을 잃었고, 평생 다시 일어설 수도 없어. 이제 나한테 이 두 아이밖에 없는데, 만약 네가 도윤 씨에게 말한다면 난 더 이상 내 아이를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백채원은 힘겹게 주은청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애걸복걸했고, 주은청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말을 마치자, 주은청은 지윤을 안고 떠났다. 계란으로 지윤 얼굴의 붓기를 가라앉혀 줄 때, 그녀는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세상에 자기 아들의 뺨을 이렇게 세게 때리는 엄마가 또 어딨을까?’“아파요?”지윤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하지 않는 모습은 더욱 애틋해 보였다. 주은청은 한숨을 쉬었다.‘작은 도련님도 참 불쌍하지.’지아가 입원하자, 이씨 가문도 뒤죽박죽으로 되었다. 도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정진은 대추나무 아래에 앉아 무엇을 중얼거리고 있었다.“할아버지 또 발병하신 건가요?”“그래요, 노부인이 돌아가신 후로 어르신의 정신도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셨죠. 한동안 괜찮으셨는데, 작은 사모님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또 어찌 알았겠어요.”대추나무에 열매가 아직 맺히지 않았지만 이정진은 계속 나무 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할아버지, 뭘 보고 계세요?”“대추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지.”도윤은 영문을 몰랐다.“오 집사, 우리 할아버지 대추 좋아하셨어요?”“정신이 맑으실 때, 대추를 드신 것을 별로 본 적이 없지만, 발병하실 때 항상 이 나무 아래 앉으셨어요. 말하자면 이 대추나무들도 2년 전 어르신께서 심으라고 하신 건데, 어르신은 이 나무 아래에서 멍 때리기 가장 좋아하시거든요.”“우리 할머니는요?”“노부인은 가끔 대추차를 드셨지만 대추를 엄청 좋아하시는 편은 아니었어요.”도윤은 천천히 이정진을 향해 걸어갔는데, 어르신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대추나무에 열매가 맺히면 환희에게 줘야지.”‘
지아는 멍하니 서 있다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진봉을 바라보며 물었다.“성형?” “예, 성형수술이요.”지아는 그제야 소시월이 왜 자신과 닮았는지, 혹시 소임호와 관련 있는 사람인지 의심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이제야 모든 것이 설명되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손에 든 서류를 훑어보았다.소시월은 13살에 처음 성형수술을 했고, 이후 매년 한 가지씩 성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게다가 20대 중반 이후로는 유지와 보수를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그 시절 소시월은 기숙 학교에 다녔기에, 사람들은 반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가 성장하며 부모를 닮아간다고 생각했을 뿐, 의술의 힘으로 얼굴을 바꿨다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아마 그들이 당시에 지아를 해치지 않은 이유도 그녀의 얼굴을 복제하려 했기 때문일 터.그 후, 지아가 쓸모없어지자 암살 계획을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지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 가짜 얼굴을 한 꺼풀씩 다 벗겨내 주겠어!”“사모님, 만약 그 여자가 사모님을 계속 암살하려던 배후라면, 그 여자의 등에는 분명히 총상이 있을 겁니다. 그날 저희가 사람들을 데리고 갔을 때, 그 여자는 도망치면서 총을 한 발 맞았었죠.” “당장 알아봐!”지아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는데,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생지옥 같은 나날들이 떠오르는 듯했다.비록 도윤이 한때 지아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결국 그 모든 고통은 누군가가 뒤에서 지아의 삶을 철저히 망가뜨린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소시월은 내 자리를 차지하고, 내가 누려야 할 가족의 사랑과 따듯함을 즐겼어. 그것도 모자라서 나를 지옥 속으로 처참히 몰아넣었다고!’지아의 분노는 억누를 수 없을 정도였다. “사모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반드시 모든 진실을 밝혀내겠습니다.” “그 여자를 감시할 사람을 찾아. 최근 움직임이 많아졌으니,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해!”“예.”지아는 머리를 짚으며
안타깝게도 지아가 이미 진실을 알아낸 상태였기에, 장민호의 소식은 늦은 셈이었다.“지금 어디에 계세요?”지아가 급히 물었다.‘민호 씨가 이 일에 연루되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Z국에 있어요. 최근 소씨 가문에 많은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 소식을 알아내는 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틈을 타서 지아 씨에게 위협이 되는 소시월을 제거할 테니까요.]지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아는 처음에 장민호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자신의 의도를 눈치챘을까 봐 걱정했지만, 장민호는 아직 그녀가 Z국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죽이면 안 돼요.”[왜요? 그 여자는 지아 씨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그런 위험한 존재를 살려두면 지아 씨에게 더 큰 위협이 될 거예요.]지아는 핑계를 댔다.“저는 이미 몇 번이나 그 사람한테 암살당할 뻔했고, 그 소씨 가문의 여섯째 딸이라는 사람과도 만났어요. 우리는 나이도 비슷하고, 국적도 달라서 아무런 원한도 없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저를 죽이려고 했겠어요?” “제 생각엔 누군가 소시월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은 단지 이용당하는 말일 뿐인 거죠. 그 사람을 죽이는 건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에요. 그 배후의 사람이 진짜 목표니까요...” 지아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아니라 말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장민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강인했다.[제가 도울게요.]“위험하지 않겠어요? 너무 위험하다면 하지 마세요. 저는 민호 씨가 다치는 걸 원치 않아요.” [지아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겁니다.]장민호는 마지막으로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제 속죄라고 생각해 주세요.]전화를 끊은 후에도 지아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사건이 윤곽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지만, 주변 상황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특히 소씨 가문이 혼란스러운 지금은 지아가 신분을 밝히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소임호와 조경숙이 자기 친부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지아
병원에서 사고를 당한 시언을 진정시키기 위해, 지아는 일찍이 자신과 시후의 계획을 모두 털어놓았다. 다만, 다른 사람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시후는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고, 시언이 대외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즉, 두 사람이 안팎에서 호응하며 움직이고 있었던 것. 게다가 소임호 또한 차근차근 사건을 조사하며, 여러 정황으로 인해 배후의 흑막이 조경선이라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조경선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미끼로 삼았다. 하지만 비행기 사고 이후로 소임호와 시후의 연락이 끊겼고, 시언은 며칠 동안 마음을 졸이며 초조해했다. 그런데 조금 전, 다행히도 소임호의 행방을 알아낸 것이었다.시언은 즉시 이 소식을 지아에게 알렸다. 지아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자, 시언의 목소리를 듣고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순간적으로 수많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래, 지아야?”시언은 지아의 침묵에 걱정하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 지아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그냥...]하지만 말을 꺼내자 목소리에 눈물 섞인 떨림이 묻어나왔다.시언이 더욱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일이 있다면 숨기지 마. 우리는 이미 네 의형제가 됐어. 우린 가족이라고. 소씨 가문에 이런저런 일이 생겼다고 해도, 난 널 지킬 거야.”시언의 ‘지킨다’라는 말이 지아의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했다.시언은 지아의 정체를 알지 못했음에도 여전히 이렇게 다정하고 따듯하게 대해주었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유대일 것이었다. 하지만 지아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왜 소씨 가문 사람들은 내 존재 자체를 몰랐을까?’ 현재 지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경숙은 여섯 번째 아이를 낳은 후 과다출혈로 크게 몸이 상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고 했다.‘가족이 내 존재를 모를 리가 없는데.’ ‘게다가 시영 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남은 건 소시월 뿐이야.’‘소시
소임호는 눈앞의 광기 어린 조경선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조경선, 그동안 정말 행복했니? 그렇게 애써 계획해서 네가 얻은 건 뭐지?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든 우리는 모두 패배자라고!” “틀렸어.”조경숙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그 당시의 나는 얼굴도 망가지고, 족보에서 제명되고, 가족들에게도 내쳐졌어.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데, 조경숙은 왜 모든 걸 가져야 해? 시골에서 돌아온 한낱 촌뜨기가 어떻게 나를 대신할 수 있었냐고!” “그래, 난 패배자야. 하지만 너희도 내 시체 위에 서서 잘난 척할 수는 없을걸? 우리 두 쪽 다 망가지는 게 내 승리니까!” 조경선이 고개를 숙여 소임호를 살펴보며 말했다.“당신 꼴을 좀 봐. 떠돌이 개랑 다를 게 뭐야? 참 안쓰럽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야.”“곧 소씨 가문은 완전히 망가질 거야. 나는 당신을, 그리고 소씨 가문을 반드시 파멸시키고 말 거야!” “너 정말 미쳤구나.”“그래, 난 미쳤어.”“하지만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젠 내가 겪었던 고통을 당신이 똑똑히 느껴야 할 차례야.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경숙은 이제 심세호의 여자가 됐어. 정말 가슴 아프지 않아?” “참, 그건 모르지? 소씨 가문의 노친네는 이미 죽었고, 당신 아들들도 곧 당신과 함께 무덤으로 갈 거야!” “조경선, 너는 진짜 인간 말종이야!” 소임호는 극도로 분노하며 몸부림쳤고, 쇠사슬은 그의 몸부림으로 인해 요란하게 울렸다.하지만 조경선은 소임호의 턱을 잡고 비웃으며 말했다. “왜, 불만이야? 그럼 나한테 빌어봐. 그러면 그 자식들한테 고통 없는 죽음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꿈 깨.”소임호가 냉소하며 말했다.“죽어도 너한테 무릎 꿇을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당신을 죽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이 죽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참히 망가지는지 보여줄 수 없잖아. 당신 자식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거고,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조경숙은 눈이 멀어 다른 남
여자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넌 먼저 돌아가.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당분간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 “알겠어요.”시월은 갑자기 한 가지 일이 떠올라 물었다.“맞다,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그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흥, 끝까지 고집불통인 쓰레기 같은 남자. 내가 겪은 교통을 천배, 만 배로 되돌려줄 거야!” 시월의 얼굴에 찰나의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엄마,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우리는 그동안 아빠가 가족도 잃게 하고, 집안도 망가지게 했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 꿈 깨! 이건 그 사람이 나한테 진 빚이라고!” 여자가 소시월의 옷깃을 꽉 잡으며 으르렁거렸다.“경고하는데, 나는 네 어미야. 네가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나는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엄마, 알겠어요, 나는 엄마의 딸이니까 당연히 엄마 편이에요.” 소시월은 여자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나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그 여자의 정서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사실, 그녀의 얼굴도 치료를 통해 회복할 수 있었지만, 집착이 너무도 강한 그녀는 치료를 거부했다. “이 고통을 평생 기억하면서 나한테 상처를 준 사람한테 천 배, 만 배로 돌려줄 거야!!” 여자는 평생을 복수 계획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하지만 소시월이 보기에, 복수를 이루더라도 그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소씨 가문은 지금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소시월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소시월이 떠난 후, 여자는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는데, 여자가 자신의 지문을 입력하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여자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안으로 들어갔고,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는 손과 발이 묶인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여자는 그를 향해 다가가며 광기 어린 집착이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소임호
소지훈이 폭로한 충격적인 사실은 소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아에게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출생 비밀을 찾아 헤매던 지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스스로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 소씨 가문 사람들의 고충에 공감했던 지아는 이제 그들이 자기 혈육임을 알게 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천천히 미끄러졌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들이...” 하지만 더욱 지아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예전에 마주했던 그 시신이 자기 친언니였다는 사실이었다. ‘시영 언니는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어.’ ‘심지어 나는 그걸 전혀 몰랐고, 언니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했어...’ 지아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지아야!”도윤은 지아를 안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침대에 누운 채 찡그린 표정을 한 지아를 보며 도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지아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어. 그런데 간절히 바랐던 가족마저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다니.’ 무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아의 곁을 지켰다.도윤은 무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엄마는 괜찮을 거야. 그냥 과로한 상태에서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뿐이거든.” 한편, 소씨 가문의 황당한 해프닝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으며, 소영수의 장례식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들의 싸움의 장이 되고 말았다. 겉으로는 소지훈이 이긴 듯 보였으나, 사실 그로 인해 소씨 가문은 체면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시월은 마음이 조급해졌고, 해가 뜨기도 전에 황급히 차를 몰아 오래된 별장으로 향했다. 건물 꼭대기에는 까마귀들이 앉아 있었다.‘까악까악’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섬뜩하게 들렸다. 장미 덩굴은 낡은 담벼락 위로 기어오르며, 삭막하고 부패한 세상에 한 줄기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햇살이 어둠을 찢으며 온 세상의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