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떨어지자 이도윤은 표정이 의미심장해졌다. 그리고 손은 소지아의 목으로 미끄러지더니 가볍게 그녀를 어루만졌다.“질투하고 있는 거야?”“이 대표 농담도 참. 지금 내가 질투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이도윤은 소지아의 눈에 스쳐 지나간 증오를 보고 몸을 숙여 그녀의 목을 물었다.그는 심지어 이렇게 매섭게 소지아의 목을 물어버려 그들 사이의 모든 원한을 끊어버리고 싶었다.소지아가 반항을 하자, 이도윤은 그녀의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고, 손가락으로 소지아의 턱을 쥐고 또박또박 말했다.“자신의 주제를 알면서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거야?”소지아는 미간을 찌푸렸다.“이도윤, 너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흥.”이도윤은 소지아의 턱을 놓아주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소지아는 이미 이도윤과 약속을 했으니, 그녀는 반항할 수 없었고, 반항해서는 안 됐다.소지아는 백씨 집안을 방패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이도윤, 넌 백씨 집안에서 맹세를 했는데, 지금 날 건드리는 건 또 무슨 뜻이지?”“애인을 만났을 뿐, 무슨 뜻이긴? 아니면 넌 자신이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예로부터 변하지 않는 이도윤의 경멸과 비웃음에 소지아의 자존심은 와르르 무너졌다.소지아는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더니 조금씩 힘을 주었다.이도윤의 숨소리는 점점 가빠졌고, 소지아의 옷은 이미 거의 다 벗겨졌다. 지금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잠…… 잠깐!”소지아는 급히 소리를 냈고, 고개를 들어 약간 빨개진 남자의 두 눈을 마주쳤다.이도윤은 머리를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힘겹게 물었다.“왜?”“나 지금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가 싫어. 샤워할래.”소지아는 아무 이유나 하나 찾았다.사실 이도윤도 그 향수 냄새를 맡았다. 싸구려는 아니지만 냄새는 코를 찔렀다. 이는 그와 소지아가 모두 싫어하는 냄새였고, 나이트클럽에서 짙은 화장을 한 여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같았다.이도윤은 소지아를 놓아주더니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5분 줄게.”소지아는
이도윤은 손끝으로 소지아의 눈썹을 그렸다. 그 새까만 동공은 마치 깊은 호수처럼 그녀를 빠져들게 했다.“만약 지금 네가 돌아오기를 원한다면?”소지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늦었어.”그녀는 이도윤을 등지고 그들의 발밑의 풍경을 가리켰다.“당신은 과거의 날 직접 이곳에서 밀어버렸어. 너에 대한 나의 모든 사랑과 함께. 내 마음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지.”이도윤은 소지아의 허리를 꼭 잡더니 다음 순간, 그녀는 유리에 몸을 붙였다.이도윤은 눈을 드리우고 소지아의 깨끗하고 하얀 얼굴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그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차가웠으며 심지어 약간의 위협까지 띠었다.“네 마음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건 너란 사람이야.”이도윤은 마치 높은 곳에 있는 신처럼 사람들의 생사를 장악하고 있었다.그리고 그의 앞에 있으면 소지아는 마치 개미와 같았고, 이도윤은 손을 들기만 하면 쉽게 그녀를 죽일 수 있었다.심지어 이도윤의 목소리조차도 오만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봐, 네가 내키든 내키지 않든,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냐에 달려 있어, 넌 여전히 바꿀 수 없거든. 예전처럼.”이도윤의 이러한 제멋대로 구는 행동은 소지아의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이도윤, 난 이미 예전의 그 너만 바라보는 소지아가 아니야.”소지아는 손을 뻗어 이도윤을 밀어냈고, 얼굴에 오만한 기색이 가득했다.이런 표정에 이도윤은 매우 불만스러웠다.“왜? 전에는 이혼하지 말라고 그렇게 빌었는데, 지금은 내가 너 건드릴 수조차 없는 거야?”소지아가 발버둥 칠수록 이도윤은 화가 났고, 미간에 분노로 가득 찼다.남녀의 힘 차이에 소지아는 답답했다. 몸 앞은 차가운 유리로 뒤에 있는 남자의 몸과 선명한 대조를 이뤘다.소지아는 마지막 찬스를 썼다.“이도윤, 나를 건드리는 전제는 네가 나를 위해 레오를 찾는 거야. 그런데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 그 사람은?”한마디로 차가운 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두 사람의 뜨거운 열기를 깨뜨렸다
‘억지를 부린다고?’소지아는 화가 나서 이도윤을 매섭게 쳐다보았다.“너도 나란 여자만 있는 게 아닌데, 왜 꼭 나여만 하는 거지? 백채원은 바로 아래층에 있는데, 내가 그녀를 불러올까?”‘너뿐이니까!’이도윤은 이 대답을 마음속에 숨기고 손가락으로 소지아의 연한 허리살을 꼬집으며 깊은 숨을 쉬었다.“너 꼭 이렇게 나올 거야?”소지아는 구역질이 난다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그녀는 지금 이도윤과의 관계가 마치 줄타기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지아는 조심스럽게 균형을 장악해야 했고, 너무 급진적이면 자신에게 좋을 게 없었다.이 점을 깨닫고 소지아는 약한 모습을 보이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날카로운 모습을 숨겼다.“나…… 약간 적응하지 못해서 그래.”아니나 다를까, 소지아의 약한 모습은 이도윤을 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이도윤은 소지아가 불쌍하게 고개를 숙이며 하얀 목덜미를 드러낸 것을 보았다.마치 새끼 고양이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 같아 그도 화가 좀 풀렸다.“그래, 당분간 널 건드리지 않을 거야.”의외로 이도윤은 많이 상냥해졌다.소지아는 고개를 들어 눈에 빛이 생겼다.그녀는 이도윤이 가끔 자신에게 여전히 각박하지만 이전처럼 그렇게 큰 원한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아마도 그의 태도를 알아볼 수 있을지도.’만약 이도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소지아는 공을 적게 들여도 그 일을 조사할 수 있었다.“이도윤, 우리 얘기 좀 하자.”“그래, 난 아직 밥을 먹지 않았으니 먹으면서 이야기하자.”이도윤은 음식을 주문한 다음 욕실로 갔다. 소지아는 원래 몇 마디만 하고 떠나려 했지만 이 남자는 분명히 그녀를 보내려 하지 않았다.소지아는 욕실 물소리를 듣고 한숨을 쉬며 옷장을 열었다.안에는 예전에 자신이 입던 옷이 놓여 있었고, 백채원은 이곳에 오지 않았다.소지아는 옷 한 벌을 찾아 갈아입은 다음 조용히 이도윤을 기다렸다.곧 음식이 올라왔다. 꽃, 와인, 스테이크.이는 너무 낭만스러워서 소지아
소지아는 이도윤의 이런 눈빛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 어제 네 사무실에 갔을 때, 청소 아줌마를 보았는데.”이도윤은 소지아가 애교를 부릴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언급하다니.“소지아, 너 지금 나와 그 아주머니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는 거야?”이도윤의 목소리는 약간의 분노를 띠고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그래. 너의 사무실처럼 이렇게 중요한 곳에, 그것도 네가 출근할 때 어떻게 청소를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이도윤은 개의치 않았다.“그 이모는 집이 멀어서 앞당겨 퇴근해야 하는데, 가끔 내가 일할 때 청소하는 거야. 왜? 백채원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그 아주머니가 신경 쓰이는 거야?”“회사가 언제 자선사업을 했다고?”이도윤은 스테이크를 썰면서 담담하게 대답했다.“구연 이모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아. 그녀는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특권을 좀 주는 것도 당연하지.”“언제? 난 왜 몰랐지!” 소지아는 칼과 포크를 내려놓았다.“나 관심하는 거야?” 이도윤의 굳은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몇년 전의 일이었어. 지하 주차장에 겁도 없는 사람들이 매복하여 나를 기다렸어. 누군가가 차로 나를 죽이려 했지만 구연 이모가 나를 밀어냈어.”소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넌 날렵해서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잖아.”“그날 확실히 다른 일이 좀 있었지.”“무슨 일?”이도윤은 소지아의 얼굴을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그날은 네 생일이었고, 나는 특별히 케이크를 주문했지.”케이크를 언급하자마자 소지아는 바로 깨달았다. 그때의 이도윤은 그녀를 정말 사랑했다.생일 전에 그녀는 한 고급 케이크를 먹겠다고 떼를 썼고, 재료가 매우 비싼 것 외에 케이크 스타일도 유난히 특별했다.케이크 한 개의 값이 무려 수천만 원이었다.케이크라기보다는 예술품이라 해야 할지도.이도윤이 들고 돌아왔을 때, 수정으로 만든 백조 중 한 마리의 머리가 케이크에 떨어졌다.당시 소지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
소지아는 상황이 틀린 것을 보고 재빨리 해석했다.“난 그 자료들을 보고 문제를 발견했거든. 그 자료들은 우리 아빠가 네 동생을 죽였단 것을 직접 증명할 수 없어. 증거가 없으니 그저 우리 아빠가 범죄동기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야.”펑 하는 소리와 함께 이도윤은 책상 위의 모든 그릇과 접시를 땅바닥에 던졌다.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웃음기가 없었고, 그 대신 싸늘한 3개월 전의 이도윤이 다시 나타났다.소지아가 설명하기도 전에 이도윤은 일어나 높은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았고, 강한 압박감이 밀려왔다.“첫째, 난 이미 그 시체에게 DNA 검사를 시켰어. 그녀는 내 여동생이 맞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지. 둘째,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시체를 소계훈과 대조한 적이 있는데, 두 사람이 친자 관계라는 것을 증명했지.”“그리고, 나는 예린의 생전 활동을 조사한 적이 있어. 그녀의 통화 기록이든 다른 기록이든 가장 많이 연락한 사람도 소계훈이었고.”“마지막으로, 그녀가 생전에 유일하게 본 사람은 역시 소계훈이었어. 그가 아니면 범인은 또 누구일까? 증거? 넌 네 아빠가 기적적으로 일어나길 원하는 거야, 아니면 죽은 사람이 다시 입을 열게 하고 싶은 거야?”소지아는 이도윤의 그 차가운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예린은 여전히 영원히 그의 앞에서 언급할 수 없는 존재였다.소지아는 이도윤와의 관계가 좀 완화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그의 마음속에서의 자신의 지위는 백채원보다도 못하며 이예린보다도 못했다.소지아는 묵묵히 말하려고 했던 사실을 삼켰다. 지금은 말해도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었고, 이도윤은 조금도 마음 아파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소계훈을 위해 핑계를 대고 있다고 느낄 뿐이다.난장판이 된 바닥을 보며, 소지아는 자신의 예전의 진심과 이도윤과의 산산조각이 난 혼인생활을 떠올렸다.소지아는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어쨌든 나는 우리 아빠를 믿어.”이 말은 이도윤을 격노시켰다. 그는 험상궂은 얼굴로
소지아는 답답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컴퓨터를 켜고 위치 추적기를 살펴보았는데, 이는 바로 그녀가 그 5명의 비서에게 준 위치 추적기였다.다른 네 사람은 모두 금당 아파트에 있었다. 소지아는 이곳이 고급 직원들에게 배치한 아파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나지밀은 한 술집에 있었다. 그녀는 낮에는 고급 비서였고 밤에는 파티의 여왕이었다.하지만 오가희의 책상에 놓은 위치 추적기의 행방은 비교적 복잡했다. 이는 거의 전반 구역을 돌아다니다 마지막에는 쓰레기 처리센터에 멈추었다.소지아는 이마를 짚었다.‘역시 오가희란 사람이 좀 수상해.’돈을 싫어하는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이 보낸 브로치를 바로 쓰레기통에 버렸다니.전효 쪽에서 조사 결과가 나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지아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고객님의 전화가 꺼져 있어 삐 소리 이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소지아는 좀 불안해졌다. ‘전효에게 사고가 난 건 않겠지?’그의 신분은 신비롭고 특별해서, 소지아는 그동안 전효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고, 그 배후의 사람도 그를 알 수 없었다.그리고 전효는 항상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비밀을 지키기 위해 전원을 껐을 수도 있다고 소지아는 자신을 설득하며 머릿속의 좋지 않은 생각을 떨쳐버렸다.범위를 확정하고 소지아는 될수록 빨리 오가희의 자료를 얻으려 했다.이날 밤, 그녀는 편안하게 자지 못했고, 눈을 감으면 이도윤이 갑자기 포효하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마치 쇠사슬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난 짐승이 어두운 밤에 격노한 것 같다.소지아의 인상에서 이도윤은 언제나 냉정하고 자제했다. 마치 그때 자신이 본 서류처럼, 아무도 그의 진정한 취향을 몰랐고, 그의 심정을 추측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방금 이도윤은 매우 이상했다. 보아하니 이예린의 죽음은 그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준 것 같았다.이 일을 거쳐 소지아는 더는 이도윤 앞에서 이예린의 일을 언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자신에 의지해서라도 반
소지아는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보았는데, 짧은 머리에 매우 세련된 여자였다.그 두 사람은 그녀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더는 방자하게 굴지 못했다.“팀장님.”B팀의 팀장 손승옥이었다.손승옥은 차갑게 그들을 훑어보았다.“일은 다 했어? 기획안은 통과되었고?”“아니요.”“그럼 빨리 가서 계속해!”“네, 팀장님.” 두 사람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바로 도망갔다.손승옥의 눈빛은 소지아의 얼굴에 떨어지더니 비꼬며 말했다.“젊은 사람이, 이런 가장 더러운 방식으로 올라갈 필요는 없지. 설령 기어올랐다 하더라도 바로 다른 사람에게 차일 텐데, 그때 난감한 것은 여전히 너뿐이야.”소지아는 정말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어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 손 팀장님.”그녀는 이 일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C조가 계약을 얻었다고 해도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할까?소지아는 오자마자 모든 사람들의 미움을 샀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해도 아무도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소지아는 화장실에 가서 지난번에 만난 청소 아주머니에게 알아보고서야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았다.그 핸드크림을 봐서라도 청소 아주머니는 자신의 단톡방에 뜬 사진을 소지아에게 보여주었다.그것은 사진 두 장이었는데, 첫 번째 사진은 소지아가 이은리와 함께 들어간 사진이었다. 당시 그녀는 오피스룩을 입고 있었다.두 번째 사진은 그녀가 호텔을 떠나는 사진인데, 그때 소지아는 이미 옷을 갈아입었다.이 두 장의 사진을 보고 모두들 상상하기 시작했다.“아가씨, 혹시 누구에게 미움을 샀어요? 오늘 아침 이 두 장의 사진이 여러 단톡방에서 퍼졌어요. 우리 청소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이 일을 얘기하고 있었고요. 별의별 말을 하는 사람 다 있다니까.”“알려줘서 고마워요.”“나도 아가씨가 마음이 좋아서 이렇게 알려주는 거예요. 직장은 전쟁터와 같지. 아가씨처럼 예쁜 사람은 더더욱 조심해야 해요.”소지아가 몸을 팔아먹고 계약을 따냈다는 소식은 이미 회사에 널리 퍼졌다.소지아는 이은리의 사무실 문을
이은리는 소지아가 만만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녀가 이렇게 똑똑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진작에 자신을 대처할 생각을 했다니.“지아야, 내가 잘못 눌러서 그래.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이렇게 하자, 이번 프로젝트 업적에 네 이름 넣어줄게.” 이은리는 즉시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소지아는 원래 떠보고 싶었다. 이은리보다 그녀는 그 주모자가 이 일을 했다고 의심했다.상대방은 마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눈처럼 시시각각 자신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내가 그 업적을 원한다고 생각해요?”“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 일은 이미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고, 지금 설명해도 너무 늦었어.”“또 뭐 찍었는데요?” 그것보다 소지아는 지금 그녀와 이도윤이 찍혔는지에 대해 더 신경이 쓰였다.“또 뭐가 있겠어? 이 두 장의 사진일 뿐이야, 다른 거 있었다면 나도 진작에 올렸겠지.”이은리는 한숨을 쉬었다.“나는 단지 복수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아니면 내가 지금 해명해 줄까?”“해명?” 소지아는 냉소했다.“쓸모가 있나요? 모두들 내가 마음이 찔려 당신과 한통속이 됐다고 생각하겠죠. 지금 당신의 사람더러 그 사진들 모두 나에게 보내라고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신이야말로 오 사장의 침대에 올라간 그 사람이라는 것을 폭로할 거예요.”“이건…… 또 무슨 사진이 있다는 거야? 있으면 벌써 올렸지.”소지아는 이은리에게 접근했다.“없는 거예요 아니면 꺼낼 수 없는 거예요?”“지아야, 그게 무슨 뜻이야?”“사진을 준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줘요.”이도윤의 곁에 이렇게 오랫동안 있으면서 소지아는 그의 카리스마를 조금 따라배웠다.소지아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자 가뜩이나 마음이 찔린 이은리는 더욱 반격할 힘이 없었다.그녀는 분명히 매우 긴장되었는데, 소지아에게 어디서 이런 박력이 났는지 몰랐다.“난…….”“나의 인내심은 한계가 있어요. 이 팀장은 날 망신하게 만들었으니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