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웃었다.“재결합한 건 아니에요.”전효의 얼굴에는 내가 바보인 줄 아냐는 표정이 역력했다.지아는 두 손을 펼쳤다.“그래요, 재결합은 안 했지만 했어요.”“참 솔직하네.”“나도 평범한 여자인데, 욕구가 있는 건 당연하지 않아요?” 지아는 전효 앞에서 다소 어리게 굴었다.이성이 아니라 남매 같은 사이였다전효는 그동안 지아를 많이 도와줬고, 지아의 마음속에는 이미 그를 의지하는 가족으로 대하고 있었다.전효의 가족은 전부 죽었고 지아도 가족이 없었으니까.“그래도 널 보내주네.”“어쩔 수 없죠. 지금은 그 사람이 뭘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까.”지아는 전효 옆에 앉더니 팔로 전효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그러는 그쪽은 그 나이가 되도록 욕구를 어떻게 해결하는 거예요?” 전효가 지아를 힐끔 쳐다보자 지아는 두 손을 항복하듯 들었다.“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참다가 병 나지나 마요.”지아는 혀를 내밀었다.남자의 손목에 오랫동안 차고 있던 염주를 보았다. 전효는 어떤 의미에서 욕망도 추구도 없는 불자 같았다.하지만 사람을 죽일 때의 건조하고 날카로운 기운은 다른 사람 같았고, 빨리 죽이는 방법도 전효에게 배운 것이 많았다.악마와 부처를 오갔다.“오빠, 원하는 게 정확히 뭐야?”전효가 손을 들어 머리를 만지자 염주에서 풍기는 나무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너처럼 나도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누구요?”“나중에 알게 될 거야.”지아는 전효의 눈에서 혼란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처음에는 지아도 전효를 의심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나.전효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원하는 것도 없이 잘해주었다.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고 다른 속셈이 있었다면 진작에 드러났을 터라 지아는 경계를 풀고 진심으로 그를 가족으로 대했다.지아는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오빠가 뭘 하든 나와 아이들이 뒤에 있다는 것만 기억해요. 이제 더는 혼자가 아니라 가족이 있어요.”전효는 지아가 읽을 수 없는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깊게 바라보
2미터가 넘는 커다란 침대에 푹신한 매트리스를 깔고 누웠다.설렘 때문인지 스릴 때문인지 지아는 잠이 오지 않았다.지난 며칠 동안 도윤과 함께 먹고 자면서 남자의 따뜻한 품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한 시간 동안 침대에서 뒤척여도 졸리지도 않았을뿐더러 머릿속은 더욱 맑아졌다.지아는 외투를 두르고 차키를 챙겨 차고로 내려갔고, 매끈한 검은색 쿠페 한 대가 도로를 질주했다.도윤은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정리하고 시계를 보고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침실로 돌아갔다.문을 열자마자 그는 방안에 희미한 술 냄새에 예민하게 반응했다.누가 있다!도윤이 움직이기 전에 어둠 속에서 한 형체가 그를 향해 돌진했다.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도윤의 눈에 놀라움과 기쁨이 번졌다.“지... 음...”여자는 이미 그의 입술을 막고 있었다.날 죽이려고.한창 지아를 떠올리는데 그녀가 나타나자 도윤은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지아는 불을 켜지 않았고, 어둠은 최고의 촉매제였다.두 사람이 키스를 나누는 야릇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도윤이 재킷을 벗기자 놀랍게도 부드러운 가운만 입은 지아를 발견했다.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던 지아는 주도권을 쥐고 도윤을 벽에 힘껏 밀쳤다.얇은 입술로 목울대를 머금고 손은 바지에서 그의 셔츠를 빼내 단단한 허리와 배를 더듬었다.도윤은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지아야, 날 죽일 생각이야?”“목숨 줄 거야?”“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줄게.”지아는 도윤의 귀를 깨물었다.“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당신 몸만 원해.”도윤은 허리를 굽혀 지아를 들어 푹신한 침대 위에 눕혔다.“다 줄게.”두 사람의 신혼 침대였다. 다만 벽에 걸려있던 결혼사진은 진작 지아의 손에 찢겼다.놀랍게도 두 사람은 신혼 때보다 더 격정적이었다.당시 지아는 너무 어려서 모든 걸 내려놓지 못했고 도윤도 일부러 자제했기에 두 사람은 늘 적당한 정도에서 멈췄다.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당연히 지금과 같은 무모함과 즐거움은 없었
지아는 샤워를 하고 몸을 씻은 후 새 옷으로 가득 찬 옷장으로 걸어갔다.도윤은 잠에서 깨어나 침대에 기대어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하는 여자를 보았다.그 순간 도윤은 마치 한 번도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모든 게 예전과 똑같았다.지아가 얼굴에 볼 터치를 하고 있을 때 거울에 한 사람이 더 나타났고 도윤이 뒤에서 팔로 지아를 감쌌다.등 뒤에서 가슴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며 도윤은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지아야, 이렇게 예쁘게 하고 누구 만나러 가는 거야?”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건 원래 얼굴로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는 뜻이었다.진하지 않은 화장은 요즘 유행하는 ‘꾸안꾸’ 스타일이었고, 눈 밑 애굣살에 바른 글리터가 왠지 가련한 모습을 연출했다.도윤은 지나치게 가식적인 화장이라 지아가 좋아하지 않았던 걸 기억했다.지아는 마지막으로 블러셔 브러시를 쓸어내리고 립스틱을 다시 집어 들었다.그녀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맞춰 봐.”이런 메이크업과 지아의 미소가 어우러진 모습은 정말 아름다워 도윤은 괴로웠다.“분명 남자겠지?”“똑똑하네.”도윤은 지아의 턱을 들어 올려 끝없는 여운을 남기며 입맞춤을 했다.“지아야, 나 힘들어.”“우리 합의하지 않았어?” 지아는 미소를 지으며 도윤을 바라보았고 도윤은 그녀를 안아 화장대 위에 앉히자마자 말했다.“네 일에 참견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내 마음은 통제할 수 없어.”거침없는 키스가 쏟아졌고 지아는 그를 밀어내려 했다.“하지 마, 시간 다 됐어.”도윤은 바로 그녀의 두 손을 머리 위로 포박하며 사나운 늑대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지아야, 나도 내 권리를 행사하는 거야.”새하얀 니트를 겨드랑이까지 걷어 올리자 등 뒤의 거울은 다소 차가웠고 앞에 있는 도윤은 너무 뜨거웠다.매혹적인 지아는 이성을 잃기 전에 한 마디를 남겼다.“내 목에 자국 남기지 마.”“알았어.” 도윤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한바탕 뒹굴고 난 지아는 옷에 가려진 부분에 온통 새빨갛게
지아가 액셀을 밟자 도윤이 차량 번호를 스캔했다.과거 지아에게 많은 집과 차를 선물했지만 이 쿠페는 그의 명의가 아니었다.지아는 예전에는 운전을 거의 하지 않았고, 운전을 하더라도 평범한 세단만 좋아했다.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변했다.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도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쉽게 대답하지 말걸.“대표님,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이제 가실 시간이에요.” 진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도윤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손가락으로 입가에 묻은 립스틱을 닦아내고 뒤돌아보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가자.”지아는 미리 차를 주차하고 거울을 내린 뒤 가방에서 파운데이션을 꺼내 화장을 고쳤다.거울에 비친 자신의 완벽한 얼굴을 보며 입꼬리가 올라갔다.충분히 청순하고 매력적이었다.지아는 손목에 찬 팔찌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미연아, 오래 기다렸지. 금방 내려갈 거야.”카페에서 감미로운 피아노 음악이 감돌았다.이 시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하지만 이곳은 도심에 위치한 가장 문학적인 카페로, 탁 트인 통유리가 눈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다.그래서 많은 커플이 이곳에 와서 데이트하거나 맞선을 본다.눈 내리는 겨울날, 따뜻한 카페에 앉아 눈꽃이 흩날리는 길 건너편 교회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었다.창가에서 한 남자가 영어로 번역된 잡지를 넘기면서 가끔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흘깃 쳐다보곤 했다.휴대폰이 진동하며 상대방이 차가 막혀 늦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답장을 보냈다.[괜찮아요, 기다릴게요.]상대방이 도착까지 아직 3분이 남았다고 말했을 때 페이지를 넘기는 남자의 행동이 멈칫하며 마음속에 긴장감이 감돌았다.2년 동안 채팅한 두 사람은 이제 영혼의 단짝처럼 서로 잘 알았지만 그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몰랐고 상대방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그저 상대가 해외를 돌아다니다가 최근 귀국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공항에 마
눈앞에 있는 여자는 6년 전에 본 적이 있는, 정확히 말하자면 수많은 사진을 보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여자였다.그녀가 얼마나 뛰어난지, 어렸을 때 얼마나 많은 상을 받았는지, 성장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대시를 받았는지, 한 남자를 위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고 일찍 결혼을 했다가 결국 그 남자에게 버림받고 눈물겨운 하루하루를 보낸 것까지.두 사람은 실제로 두 번 만났지만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다.처음 봤을 때는 잠옷 차림의 여자가 배가 부른 채 카펫에 힘없이 쓰러져 있었는데 자신이 직접 그녀의 심장에 총구를 겨누었다.그녀는 한때 그의 사냥 대상 중 하나였던 지아였다.장민호는 오랫동안 시간 속에 묻혀 있던 누군가가 눈앞에 나타난 것에 조금 놀랐다.“당신이 앨리스...”지아는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당당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아직 자기소개를 안 했네요, 전 소지아라고 해요.”지아는 당시 암살에 실패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어 조직에서 쫓겨난 장민호를 떠올렸다.그는 지금 손을 씻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하지만 장민호가 죽인 미연은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고 시신은 이미 백골이 된 지 오래였다.왜 착한 사람은 단명하고 나쁜 사람은 장수하는 걸까.6년이 지났지만 지아는 미연이 자신 대신 총을 맞는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3년 전부터 장민호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2년 전부터 접촉을 시작했다.3년 동안 덫을 놓은 후 이제 그물을 닫아야 할 때였다.장민호를 죽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런 놈을 한 방에 속 시원히 죽일 수도 없었다.지아도 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복수할 것이다.과거 장민호는 작전을 위해 미연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고, 지아 또한 그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갚아줄 생각이었다.“저기...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왜 그렇게 쳐다봐요?” 지아가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장민호는 얼굴에 가짜 마스크를 썼고 신분도 가짜라 지아가 자신을 알아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도 킬러였던 그는 속으로 경계심이 생
민아는 지아에게 하늘 아래 어떤 남자도 거부할 수 없는 얼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인간은 시각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에서 얼굴은 항상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아름다운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장민호는 당황한 표정이었다.지아의 뒤에는 눈송이가 흩날리는 성당이 있었고, 배꽃처럼 청순한 그녀가 자신을 향해 웃는 순간 장민호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쿵 뛰었다.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장민호는 상자를 향해 눈을 돌렸다.“이게 뭐죠?”“열어 봐요.”별로 비싸 보이지 않는 나무 상자였는데, 상자를 여는 순간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상자 안에는 하얀 에델바이스 한 송이가 조용히 놓여 있었다.에델바이스는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꽃으로 매우 높은 고도에 서식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없고 잘 알려지지 않아서 더욱 귀한 꽃이었다.한 사진작가가 이 꽃을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꽃을 보러 갔지만 아쉽게도 직접 볼 수는 없었다.장민호는 화가로서 지아와 2년 동안 소통하며 이 꽃을 언급했었다.“에델바이스인가요, 어떻게 구했어요?”지아는 손을 흔들었다.“얼마 전 여행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쪽 말이 생각나서 가져왔어요. 그림 그리면 무척 예쁠 거예요.”“어떻게 이런 꽃을 우연히 발견할 수 있죠, 당신은...”지아가 손을 들어 귀 주변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는 순간 손바닥 상처가 드러났다.며칠 전 도윤을 찾아 숲에 갔을 때 생긴 상처였는데, 상처는 아물었지만 딱지가 앉아서 창백한 피부 위로 그대로 보였다.“손은 왜 그래요?”지아는 민망한 듯 등 뒤로 숨겼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음식 주문하셨어요? 아직 아침을 못 먹어서 배가 좀 고픈데, 밥부터 먹죠.”장민호는 지아의 소매를 확 당겼고, 두 손에 딱지가 앉고 오래되지 않은 상처가 가득한 걸 보았다.“어떻게 된 거예요?”지아는 서둘러 손을 뒤로 뺐다.“녹명산을 지나가는데 누가 에델바이스를 봤다는 말을 듣고
지아는 테이블 가득 음식을 주문했고 대부분 장민호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장민호는 조금 당황했다.“내가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어머니가 남강 출신이라면서요, 그러면 그쪽 음식 좋아한다는 건 쉽게 알아낼 수 있죠?”지아는 적당히 캐치했다.그녀는 해외에서 본 오로라, 빙하, 사막, 심해 등 자신이 본 것을 아낌없이 공유했다.“정민호 씨, 사막에서 눈 본 적 있어요? 정말 놀라워요, 하늘과 땅에 두 가지 색만 남아있어요.”어린아이처럼 즐겁게 풍경을 이야기하던 지아는 스테이크가 나올 때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미안해요, A시에 친구가 많지 않아서 첫 만남에 말이 많았는데 괜찮으시죠?”장민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비록 다 봤던 풍경이지만 지아의 화려한 언변에 과거의 회색빛 풍경이 갑자기 색을 띠는 것 같았다.“아니요, 재밌어요.”지아는 디저트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온라인에서처럼 여전히 말수가 없으시네요.”“미안해요, 원래 말주변이 부족해요.”“그럴 줄 알았어요.” 겉은 시럽으로 감싸고 안에는 씨를 제거하고 아이스크림을 넣은 과일을 맛보던 지아는 느껴지는 3가지 맛에 눈까지 가늘어졌다.“와, 무슨 이런 디저트가 다 있지?” 지아는 접시에 놓였던 과일을 장민호의 접시에 옮겨주었다.“먹어봐요, 너무 맛있어요. 입안에서 톡 터져요.”장민호는 이런 사람들과의 접촉이 익숙하지 않았다. 킬러라 모든 사람을 경계하는 그가 어떻게 남이 주는 것을 먹을 수 있겠나.“난...”지아는 장민호가 먹지 않는 것을 보고 작은 포크로 집어 입에 가져다주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빨리 먹어 봐요, 안 먹으면 녹아요.”장민호는 얼떨결에 한입 베어 물었고, 지아의 하얀 손목에 있는 붉은 색 팔찌를 보고 동공이 움츠러들었다.바로 자신이 미연에게 선물한 팔찌였다!당시 장민호는 미연이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해 대충 아무 팔찌나 샀고, 비싸지는 않았지만 미연은 너무 기뻐했다.훌륭한 킬러는 어떤 역할이든 해내야 했기에 임무를 마치고 본연의 모습으로
지아는 우느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이미 너무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는데 눈물을 흘리자 가련하기 그지없었다.이 모든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 장민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 감정은 배우가 아니면 전혀 연기할 수 없었다.“울지 마요, 이미 죽은 사람은 어쩔 수가 없으니 잘 보내줘야죠.”지아는 숨을 몰아쉬면서 휴지로 눈물을 닦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었다.“일부러 분위기를 망치려던 건 아닌데 그 친구를 생각하니 그만...”장민호는 그녀에게 휴지 몇 장을 뽑아 건네주며 위로했고, 그제야 지아의 울음소리가 잦아들며 손으로 쥐를 쓰다듬었다.“아직 살날이 남았으니 약속대로 이걸 착용하고 먼 곳으로 다녀야죠.”“방금 아기를 낳았다고 했는데 그럼 이미 결혼한 건가요? 이렇게 만나는 거 불편하지 않아요?”지아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아니요, 아기도 없고 전 이미 이혼했어요.”지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얀 형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귓가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소지아,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민아 어디로 숨겼...”지아는 세찬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세찬을 향해 식탁보를 힘껏 들어 올린 뒤 장민호의 셔츠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뛰어요!”장민호는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뛰기 시작했고 지아는 다가오는 웨이터에게 말했다.“뒤에 있는 사람이 계산할 거예요.”평소 결벽증이 있는 세찬은 지아 때문에 덮어쓴 오물을 정리할 틈도 없이 그가 도망갈까 걱정하던 직원들에게 붙잡혔다.젠장.세찬은 지아가 도망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지아가 가는 길에 남자를 데리고 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허, 이도윤 또 당했네.그 생각에 세찬은 기분이 훨씬 좋아졌고 자신의 양복을 벗으며 지시를 내렸다.“이도윤 앞으로 돌리고 양복 청구서도 함께 보내.”어쨌든 지아는 이미 A시에 있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다!세찬이 도윤의 번호를 누르자 진환이 전화를 받았다.“강 대표님, 보스는 지금 아주 중요한 회의 중이라 전화를 받기가 어려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