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가 액셀을 밟자 도윤이 차량 번호를 스캔했다.과거 지아에게 많은 집과 차를 선물했지만 이 쿠페는 그의 명의가 아니었다.지아는 예전에는 운전을 거의 하지 않았고, 운전을 하더라도 평범한 세단만 좋아했다.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변했다.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도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쉽게 대답하지 말걸.“대표님,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이제 가실 시간이에요.” 진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도윤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손가락으로 입가에 묻은 립스틱을 닦아내고 뒤돌아보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가자.”지아는 미리 차를 주차하고 거울을 내린 뒤 가방에서 파운데이션을 꺼내 화장을 고쳤다.거울에 비친 자신의 완벽한 얼굴을 보며 입꼬리가 올라갔다.충분히 청순하고 매력적이었다.지아는 손목에 찬 팔찌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미연아, 오래 기다렸지. 금방 내려갈 거야.”카페에서 감미로운 피아노 음악이 감돌았다.이 시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하지만 이곳은 도심에 위치한 가장 문학적인 카페로, 탁 트인 통유리가 눈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다.그래서 많은 커플이 이곳에 와서 데이트하거나 맞선을 본다.눈 내리는 겨울날, 따뜻한 카페에 앉아 눈꽃이 흩날리는 길 건너편 교회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었다.창가에서 한 남자가 영어로 번역된 잡지를 넘기면서 가끔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흘깃 쳐다보곤 했다.휴대폰이 진동하며 상대방이 차가 막혀 늦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답장을 보냈다.[괜찮아요, 기다릴게요.]상대방이 도착까지 아직 3분이 남았다고 말했을 때 페이지를 넘기는 남자의 행동이 멈칫하며 마음속에 긴장감이 감돌았다.2년 동안 채팅한 두 사람은 이제 영혼의 단짝처럼 서로 잘 알았지만 그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몰랐고 상대방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그저 상대가 해외를 돌아다니다가 최근 귀국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공항에 마
눈앞에 있는 여자는 6년 전에 본 적이 있는, 정확히 말하자면 수많은 사진을 보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여자였다.그녀가 얼마나 뛰어난지, 어렸을 때 얼마나 많은 상을 받았는지, 성장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대시를 받았는지, 한 남자를 위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고 일찍 결혼을 했다가 결국 그 남자에게 버림받고 눈물겨운 하루하루를 보낸 것까지.두 사람은 실제로 두 번 만났지만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다.처음 봤을 때는 잠옷 차림의 여자가 배가 부른 채 카펫에 힘없이 쓰러져 있었는데 자신이 직접 그녀의 심장에 총구를 겨누었다.그녀는 한때 그의 사냥 대상 중 하나였던 지아였다.장민호는 오랫동안 시간 속에 묻혀 있던 누군가가 눈앞에 나타난 것에 조금 놀랐다.“당신이 앨리스...”지아는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당당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아직 자기소개를 안 했네요, 전 소지아라고 해요.”지아는 당시 암살에 실패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어 조직에서 쫓겨난 장민호를 떠올렸다.그는 지금 손을 씻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하지만 장민호가 죽인 미연은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고 시신은 이미 백골이 된 지 오래였다.왜 착한 사람은 단명하고 나쁜 사람은 장수하는 걸까.6년이 지났지만 지아는 미연이 자신 대신 총을 맞는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3년 전부터 장민호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2년 전부터 접촉을 시작했다.3년 동안 덫을 놓은 후 이제 그물을 닫아야 할 때였다.장민호를 죽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런 놈을 한 방에 속 시원히 죽일 수도 없었다.지아도 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복수할 것이다.과거 장민호는 작전을 위해 미연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고, 지아 또한 그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갚아줄 생각이었다.“저기...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왜 그렇게 쳐다봐요?” 지아가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장민호는 얼굴에 가짜 마스크를 썼고 신분도 가짜라 지아가 자신을 알아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도 킬러였던 그는 속으로 경계심이 생
민아는 지아에게 하늘 아래 어떤 남자도 거부할 수 없는 얼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인간은 시각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에서 얼굴은 항상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아름다운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장민호는 당황한 표정이었다.지아의 뒤에는 눈송이가 흩날리는 성당이 있었고, 배꽃처럼 청순한 그녀가 자신을 향해 웃는 순간 장민호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쿵 뛰었다.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장민호는 상자를 향해 눈을 돌렸다.“이게 뭐죠?”“열어 봐요.”별로 비싸 보이지 않는 나무 상자였는데, 상자를 여는 순간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상자 안에는 하얀 에델바이스 한 송이가 조용히 놓여 있었다.에델바이스는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꽃으로 매우 높은 고도에 서식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없고 잘 알려지지 않아서 더욱 귀한 꽃이었다.한 사진작가가 이 꽃을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꽃을 보러 갔지만 아쉽게도 직접 볼 수는 없었다.장민호는 화가로서 지아와 2년 동안 소통하며 이 꽃을 언급했었다.“에델바이스인가요, 어떻게 구했어요?”지아는 손을 흔들었다.“얼마 전 여행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쪽 말이 생각나서 가져왔어요. 그림 그리면 무척 예쁠 거예요.”“어떻게 이런 꽃을 우연히 발견할 수 있죠, 당신은...”지아가 손을 들어 귀 주변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는 순간 손바닥 상처가 드러났다.며칠 전 도윤을 찾아 숲에 갔을 때 생긴 상처였는데, 상처는 아물었지만 딱지가 앉아서 창백한 피부 위로 그대로 보였다.“손은 왜 그래요?”지아는 민망한 듯 등 뒤로 숨겼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음식 주문하셨어요? 아직 아침을 못 먹어서 배가 좀 고픈데, 밥부터 먹죠.”장민호는 지아의 소매를 확 당겼고, 두 손에 딱지가 앉고 오래되지 않은 상처가 가득한 걸 보았다.“어떻게 된 거예요?”지아는 서둘러 손을 뒤로 뺐다.“녹명산을 지나가는데 누가 에델바이스를 봤다는 말을 듣고
지아는 테이블 가득 음식을 주문했고 대부분 장민호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장민호는 조금 당황했다.“내가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어머니가 남강 출신이라면서요, 그러면 그쪽 음식 좋아한다는 건 쉽게 알아낼 수 있죠?”지아는 적당히 캐치했다.그녀는 해외에서 본 오로라, 빙하, 사막, 심해 등 자신이 본 것을 아낌없이 공유했다.“정민호 씨, 사막에서 눈 본 적 있어요? 정말 놀라워요, 하늘과 땅에 두 가지 색만 남아있어요.”어린아이처럼 즐겁게 풍경을 이야기하던 지아는 스테이크가 나올 때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미안해요, A시에 친구가 많지 않아서 첫 만남에 말이 많았는데 괜찮으시죠?”장민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비록 다 봤던 풍경이지만 지아의 화려한 언변에 과거의 회색빛 풍경이 갑자기 색을 띠는 것 같았다.“아니요, 재밌어요.”지아는 디저트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온라인에서처럼 여전히 말수가 없으시네요.”“미안해요, 원래 말주변이 부족해요.”“그럴 줄 알았어요.” 겉은 시럽으로 감싸고 안에는 씨를 제거하고 아이스크림을 넣은 과일을 맛보던 지아는 느껴지는 3가지 맛에 눈까지 가늘어졌다.“와, 무슨 이런 디저트가 다 있지?” 지아는 접시에 놓였던 과일을 장민호의 접시에 옮겨주었다.“먹어봐요, 너무 맛있어요. 입안에서 톡 터져요.”장민호는 이런 사람들과의 접촉이 익숙하지 않았다. 킬러라 모든 사람을 경계하는 그가 어떻게 남이 주는 것을 먹을 수 있겠나.“난...”지아는 장민호가 먹지 않는 것을 보고 작은 포크로 집어 입에 가져다주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빨리 먹어 봐요, 안 먹으면 녹아요.”장민호는 얼떨결에 한입 베어 물었고, 지아의 하얀 손목에 있는 붉은 색 팔찌를 보고 동공이 움츠러들었다.바로 자신이 미연에게 선물한 팔찌였다!당시 장민호는 미연이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해 대충 아무 팔찌나 샀고, 비싸지는 않았지만 미연은 너무 기뻐했다.훌륭한 킬러는 어떤 역할이든 해내야 했기에 임무를 마치고 본연의 모습으로
지아는 우느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이미 너무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는데 눈물을 흘리자 가련하기 그지없었다.이 모든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 장민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 감정은 배우가 아니면 전혀 연기할 수 없었다.“울지 마요, 이미 죽은 사람은 어쩔 수가 없으니 잘 보내줘야죠.”지아는 숨을 몰아쉬면서 휴지로 눈물을 닦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었다.“일부러 분위기를 망치려던 건 아닌데 그 친구를 생각하니 그만...”장민호는 그녀에게 휴지 몇 장을 뽑아 건네주며 위로했고, 그제야 지아의 울음소리가 잦아들며 손으로 쥐를 쓰다듬었다.“아직 살날이 남았으니 약속대로 이걸 착용하고 먼 곳으로 다녀야죠.”“방금 아기를 낳았다고 했는데 그럼 이미 결혼한 건가요? 이렇게 만나는 거 불편하지 않아요?”지아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아니요, 아기도 없고 전 이미 이혼했어요.”지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얀 형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귓가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소지아,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민아 어디로 숨겼...”지아는 세찬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세찬을 향해 식탁보를 힘껏 들어 올린 뒤 장민호의 셔츠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뛰어요!”장민호는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뛰기 시작했고 지아는 다가오는 웨이터에게 말했다.“뒤에 있는 사람이 계산할 거예요.”평소 결벽증이 있는 세찬은 지아 때문에 덮어쓴 오물을 정리할 틈도 없이 그가 도망갈까 걱정하던 직원들에게 붙잡혔다.젠장.세찬은 지아가 도망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지아가 가는 길에 남자를 데리고 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허, 이도윤 또 당했네.그 생각에 세찬은 기분이 훨씬 좋아졌고 자신의 양복을 벗으며 지시를 내렸다.“이도윤 앞으로 돌리고 양복 청구서도 함께 보내.”어쨌든 지아는 이미 A시에 있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다!세찬이 도윤의 번호를 누르자 진환이 전화를 받았다.“강 대표님, 보스는 지금 아주 중요한 회의 중이라 전화를 받기가 어려운데
도윤은 차갑게 얼굴을 찡그렸다.“뭐라고?”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믿지 않았을 말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지아는 그의 품에서 뜨겁게 키스를 나누었으니까.하지만 세찬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 뭔가 본 게 틀림없었다.“오늘 내가 뭘 봤는지 알아?”“빨리 말해.” 도윤은 으스스한 기운을 뿜어냈다.“이 몸이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 말하기 싫네.”“그럼 너도 김민아 씨의 행방 알 생각 마.”세찬 쪽에서 탁자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개자식,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줄 알았어.”“말해봐, 뭘 봤어?”“말하면 어디 있는지 알려줘.”“그래.”세찬은 식당에서 감시카메라 영상을 가져와 보냈다.지아는 오늘 남자를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감시 카메라 속 남자는 낯선 얼굴이었고, 지아는 그 앞에서 웃다가 우는 등 낯선 모습을 보였다.지아가 남자에게 과일을 먹여주는 것을 본 도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진환은 목을 움츠리고 자신의 존재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지아는 도윤의 금기를 건드렸다.하지만 진환도 이 낯선 남자가 누군지 궁금했다.“알아내.”“네.”진환은 서둘러 자신의 일을 하러 나갔고, 도윤은 몇 번이나 앞뒤를 살피다가 문득 핵심을 알아챘다.남자의 걷는 자세가 조금 이상했다. 예전에 다리를 다친 것 같은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일반인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누구지?지아는 여전히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보여주고 있고, 도윤은 이 팔찌가 미연의 팔찌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미연이 묻혔을 때 지아가 손에서 빼낸 팔찌였는데 이 남자 앞에서 팔찌에 대해 얘기하고 지아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실마리가 서서히 잡혀가고 있었다.진환 역시 금방 돌아왔다.“대표님, 확인해 보니 그 남자 이름은 정민호이고 화가예요.”“정민호 아니야, 장민호야.” 도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그 사람!!!”장민호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진환은 증오에 찬 목소리로 이를 갈았다.그 전투에서 여러 형제
자신도 아는 걸 지아가 모를 리 없었다.정글을 여행하는 동안 지아는 자신이 결코 여린 소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당시 미연의 죽음으로 마음이 아팠던 그녀는 분명 장민호를 쉽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사모님은 도대체 뭘 하려는 거죠?”도윤이 분명하게 말했다.“장민호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고 기꺼이 진심을 내어줬을 때 무자비하게 짓밟아서 모든 모욕과 고난을 겪게 하고 강미연처럼 죽기 전에 모든 상처를 받게 하려는 거지.”진환은 하늘 아래 도윤만이 지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그러니까 사모님은 장민호를 만나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려는 거였네요. 보스 걱정되지 않으세요...”도윤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넌 원수가 널 건드리게 둘 거야? 봐, 지아는 떠날 때도 옷소매를 잡고 손가락을 건드리지 않잖아.”지아는 장민호를 마음속으로 매 순간 죽이고 싶어 했기에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수는 없었다.하지만 설령 어떤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다른 남자 곁에 있는 그녀를 생각하니 도윤은 마음속으로 불쾌했다.“그럼 장민호 문제는...”“일단 두고 보면서 함부로 개입하지 마. 강미연 씨는 지아에게 중요한 사람이야. 이 일로 지아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싶지 않아. 지아는 3년 넘게 이 일을 계획해 왔어,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을 거야, 아마...”도윤은 팔짱을 끼고 섰다.“한 번쯤은 믿어봐야지.”과거 지아는 항상 도윤이 지나치게 이기주의적이고 자신만의 생각으로 본인의 삶을 지배한다고 말했다.독선적인 도윤은 지아의 마음을 한 번도 배려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도윤은 이번에 기꺼이 지아를 위해 변하기로 했다.“형, 보스랑 둘이 나 몰래 무슨 말 하는 거야?”지아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 진봉은 누구든 보면 자신 몰래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할 말 있으면 하고, 없으면 꺼져!” 도윤은 기분이 매우 안 좋았고 진봉은 눈치도 없이 달려들어 주머니를 꺼내며 말했다.“그게... 강 대표님이 돈 내시라고 하면서 이 양복도 사모님
지아는 장민호의 소매를 끌어당겨 쿠페로 돌아와 가속페달을 밟고 거칠게 달렸다.이러한 행동에 장민호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뭐 하는 거예요?”지아는 어디선가 꺼낸 비녀로 머리를 틀어 올리더니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입에 손가락을 가져갔다.“쉿, 일단 묻지 말고 가요.”차가 달리는 동안 지아는 고상한 모습은 어디 가고 속도를 내서 해변로를 달렸다.그 속도는 지아의 성격과는 정반대였다.해변로는 차도 적고 교통 제한도 없어 속도를 내기 제격이었다.반대편에서 추월하던 차가 정면으로 들이받으려는 것을 보고도 지아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결국 상대 차가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세 대의 차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반대편에 있던 사람은 식은땀을 흘렸지만 지아의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장민호는 속으로 목숨도 버린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바닷바람이 눈보라를 휘날리는 바닷가에 차가 멈추자, 지아는 차에서 내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차 옆에 기대어 앉았다.입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며 얼굴이 흐려졌다.“죄송해요, 장민호 씨. 일이 좀 있었네요.”장민호는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지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과거에는 착한 소녀 같았던 지아가 지금은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한참 후 그가 말을 꺼냈다.“흡연은 건강에 안 좋아요.”지아의 입꼬리를 올리며 얕은 미소를 지었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죽을 텐데 뭘.”지아는 염세적인 표정이 가득했다.“세상이 이렇게 더러운데 내가 왜 깨끗하게 살아야 하죠? 잠시 혼자 있고 싶어요, 이만 가 봐요.”지아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우울한 모습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녀의 과거를 아는 장민호는 그녀가 왜 이렇게 됐는지 알았다.가족은 모두 죽고, 아이는 살리지 못했고, 친구마저 눈앞에서 죽고, 남편과 이혼해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었다는 생각에 장민호는 놀랍게도 연민을 느꼈다.그는 자리를 뜨는 대신 지아에게 다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곁에 있었다.그 자신도 비극적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