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우느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이미 너무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는데 눈물을 흘리자 가련하기 그지없었다.이 모든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 장민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 감정은 배우가 아니면 전혀 연기할 수 없었다.“울지 마요, 이미 죽은 사람은 어쩔 수가 없으니 잘 보내줘야죠.”지아는 숨을 몰아쉬면서 휴지로 눈물을 닦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었다.“일부러 분위기를 망치려던 건 아닌데 그 친구를 생각하니 그만...”장민호는 그녀에게 휴지 몇 장을 뽑아 건네주며 위로했고, 그제야 지아의 울음소리가 잦아들며 손으로 쥐를 쓰다듬었다.“아직 살날이 남았으니 약속대로 이걸 착용하고 먼 곳으로 다녀야죠.”“방금 아기를 낳았다고 했는데 그럼 이미 결혼한 건가요? 이렇게 만나는 거 불편하지 않아요?”지아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아니요, 아기도 없고 전 이미 이혼했어요.”지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얀 형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귓가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소지아,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민아 어디로 숨겼...”지아는 세찬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세찬을 향해 식탁보를 힘껏 들어 올린 뒤 장민호의 셔츠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뛰어요!”장민호는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뛰기 시작했고 지아는 다가오는 웨이터에게 말했다.“뒤에 있는 사람이 계산할 거예요.”평소 결벽증이 있는 세찬은 지아 때문에 덮어쓴 오물을 정리할 틈도 없이 그가 도망갈까 걱정하던 직원들에게 붙잡혔다.젠장.세찬은 지아가 도망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지아가 가는 길에 남자를 데리고 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허, 이도윤 또 당했네.그 생각에 세찬은 기분이 훨씬 좋아졌고 자신의 양복을 벗으며 지시를 내렸다.“이도윤 앞으로 돌리고 양복 청구서도 함께 보내.”어쨌든 지아는 이미 A시에 있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다!세찬이 도윤의 번호를 누르자 진환이 전화를 받았다.“강 대표님, 보스는 지금 아주 중요한 회의 중이라 전화를 받기가 어려운데
도윤은 차갑게 얼굴을 찡그렸다.“뭐라고?”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믿지 않았을 말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지아는 그의 품에서 뜨겁게 키스를 나누었으니까.하지만 세찬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 뭔가 본 게 틀림없었다.“오늘 내가 뭘 봤는지 알아?”“빨리 말해.” 도윤은 으스스한 기운을 뿜어냈다.“이 몸이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 말하기 싫네.”“그럼 너도 김민아 씨의 행방 알 생각 마.”세찬 쪽에서 탁자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개자식,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줄 알았어.”“말해봐, 뭘 봤어?”“말하면 어디 있는지 알려줘.”“그래.”세찬은 식당에서 감시카메라 영상을 가져와 보냈다.지아는 오늘 남자를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감시 카메라 속 남자는 낯선 얼굴이었고, 지아는 그 앞에서 웃다가 우는 등 낯선 모습을 보였다.지아가 남자에게 과일을 먹여주는 것을 본 도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진환은 목을 움츠리고 자신의 존재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지아는 도윤의 금기를 건드렸다.하지만 진환도 이 낯선 남자가 누군지 궁금했다.“알아내.”“네.”진환은 서둘러 자신의 일을 하러 나갔고, 도윤은 몇 번이나 앞뒤를 살피다가 문득 핵심을 알아챘다.남자의 걷는 자세가 조금 이상했다. 예전에 다리를 다친 것 같은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일반인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누구지?지아는 여전히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보여주고 있고, 도윤은 이 팔찌가 미연의 팔찌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미연이 묻혔을 때 지아가 손에서 빼낸 팔찌였는데 이 남자 앞에서 팔찌에 대해 얘기하고 지아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실마리가 서서히 잡혀가고 있었다.진환 역시 금방 돌아왔다.“대표님, 확인해 보니 그 남자 이름은 정민호이고 화가예요.”“정민호 아니야, 장민호야.” 도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그 사람!!!”장민호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진환은 증오에 찬 목소리로 이를 갈았다.그 전투에서 여러 형제
자신도 아는 걸 지아가 모를 리 없었다.정글을 여행하는 동안 지아는 자신이 결코 여린 소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당시 미연의 죽음으로 마음이 아팠던 그녀는 분명 장민호를 쉽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사모님은 도대체 뭘 하려는 거죠?”도윤이 분명하게 말했다.“장민호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고 기꺼이 진심을 내어줬을 때 무자비하게 짓밟아서 모든 모욕과 고난을 겪게 하고 강미연처럼 죽기 전에 모든 상처를 받게 하려는 거지.”진환은 하늘 아래 도윤만이 지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그러니까 사모님은 장민호를 만나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려는 거였네요. 보스 걱정되지 않으세요...”도윤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넌 원수가 널 건드리게 둘 거야? 봐, 지아는 떠날 때도 옷소매를 잡고 손가락을 건드리지 않잖아.”지아는 장민호를 마음속으로 매 순간 죽이고 싶어 했기에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수는 없었다.하지만 설령 어떤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다른 남자 곁에 있는 그녀를 생각하니 도윤은 마음속으로 불쾌했다.“그럼 장민호 문제는...”“일단 두고 보면서 함부로 개입하지 마. 강미연 씨는 지아에게 중요한 사람이야. 이 일로 지아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싶지 않아. 지아는 3년 넘게 이 일을 계획해 왔어,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을 거야, 아마...”도윤은 팔짱을 끼고 섰다.“한 번쯤은 믿어봐야지.”과거 지아는 항상 도윤이 지나치게 이기주의적이고 자신만의 생각으로 본인의 삶을 지배한다고 말했다.독선적인 도윤은 지아의 마음을 한 번도 배려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도윤은 이번에 기꺼이 지아를 위해 변하기로 했다.“형, 보스랑 둘이 나 몰래 무슨 말 하는 거야?”지아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 진봉은 누구든 보면 자신 몰래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할 말 있으면 하고, 없으면 꺼져!” 도윤은 기분이 매우 안 좋았고 진봉은 눈치도 없이 달려들어 주머니를 꺼내며 말했다.“그게... 강 대표님이 돈 내시라고 하면서 이 양복도 사모님
지아는 장민호의 소매를 끌어당겨 쿠페로 돌아와 가속페달을 밟고 거칠게 달렸다.이러한 행동에 장민호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뭐 하는 거예요?”지아는 어디선가 꺼낸 비녀로 머리를 틀어 올리더니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입에 손가락을 가져갔다.“쉿, 일단 묻지 말고 가요.”차가 달리는 동안 지아는 고상한 모습은 어디 가고 속도를 내서 해변로를 달렸다.그 속도는 지아의 성격과는 정반대였다.해변로는 차도 적고 교통 제한도 없어 속도를 내기 제격이었다.반대편에서 추월하던 차가 정면으로 들이받으려는 것을 보고도 지아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결국 상대 차가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세 대의 차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반대편에 있던 사람은 식은땀을 흘렸지만 지아의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장민호는 속으로 목숨도 버린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바닷바람이 눈보라를 휘날리는 바닷가에 차가 멈추자, 지아는 차에서 내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차 옆에 기대어 앉았다.입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며 얼굴이 흐려졌다.“죄송해요, 장민호 씨. 일이 좀 있었네요.”장민호는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지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과거에는 착한 소녀 같았던 지아가 지금은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한참 후 그가 말을 꺼냈다.“흡연은 건강에 안 좋아요.”지아의 입꼬리를 올리며 얕은 미소를 지었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죽을 텐데 뭘.”지아는 염세적인 표정이 가득했다.“세상이 이렇게 더러운데 내가 왜 깨끗하게 살아야 하죠? 잠시 혼자 있고 싶어요, 이만 가 봐요.”지아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우울한 모습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녀의 과거를 아는 장민호는 그녀가 왜 이렇게 됐는지 알았다.가족은 모두 죽고, 아이는 살리지 못했고, 친구마저 눈앞에서 죽고, 남편과 이혼해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었다는 생각에 장민호는 놀랍게도 연민을 느꼈다.그는 자리를 뜨는 대신 지아에게 다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곁에 있었다.그 자신도 비극적
바닷가 식당에서 지아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았다.프로필에 적혀있던 이야기들을 지아가 꺼내자 차가운 글자에 색을 입힌 듯했다.감정적인 부분에 이르러 지아의 눈가는 살짝 붉어졌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정민호 씨, 내 말 들어줘서 고마워요. 난 오랫동안 혼자 가족도 친구도 없이 지냈는데 가끔은 얘기하고 싶어도 얘기할 사람을 찾지 못해서 계속 그쪽에게 메시지를 보냈던 거였어요. 많이 귀찮았죠?”장민호는 지아가 왜 그렇게 말이 많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연달아 오는 메시지에 자신은 늘 차갑게 대했었다.어쩌면 지아에게는 그게 유일한 위안이었을지도 모르는데.“괜찮아요.”장민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입안에 쓴맛이 가득했다.이 세상엔 명이 고달픈 사람들이 참 많았다.“참, 그쪽은 한 번도 사생활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는데, 나이도 있어 보이는데 결혼하셨죠?”장민호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자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결혼을 하나, 타인도 자신도 해치는 짓인걸.게다가 아버지 때문에 그는 결혼이라는 걸 믿지 않았다.“나 같은 사람은 결혼할 자격이 없어요.”“왜요, 전 그쪽 괜찮은 사람 같은데요.”지아는 반나절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음식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비록 장민호는 여전히 유용한 정보를 많이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곁을 떠나지 않은 것만으로 이미 반은 성공이었다.미연의 복수를 제외하고도 전효로부터 당시 자신을 죽이려던 계획의 배후와 접촉한 사람은 장민호뿐이라는 말을 들었다.장민호를 통해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지아는 몇 년 동안 몰래 진실을 찾아다녔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방은 아주 고단수라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그래서 지아는 장민호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첫 번째는 장민호의 신뢰를 얻는 것이었는데, 장민호 같은 사람은 쉽게 누군가를 믿지 않기 때문에 지아는 2년이라는 시간을 미리 그에게 투자했다.식사를 마친 지아는 조금도 머물지 않고 물었다.“내가 데려다줄까요?
백씨 저택.집사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을 데리고 문 앞에 마중을 나왔고, 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자 다소 놀랐다.바네사처럼 대단한 의사라면 당연히 운전기사와 함께 이동해야 하는데, 차에는 여자 한 명만 타고 있었다.얼굴은 평범해 보였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비범했다.“바네사 씨인가요?”“왜요, 안 그래 보이나요?” 지아는 차 문을 닫았다.“아니요,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 아가씨 병을 봐주신다니 정말 영광입니다.”지아는 쓸데없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환자는 어디 있어요?”“이쪽으로 오세요.”백씨 가문은 규모가 컸지만 눈 때문에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이제 가문에는 백씨 가문의 친 자식도 아닌 백채원 한 사람만 남았고 어르신은 큰 충격을 받았다.그래도 홀로 백채원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봤던 어르신은 그녀를 집에서 쫓아내지 않았다.백채원은 비록 유산을 잃었지만 여전히 백씨 가문에서 예전처럼 먹고 자며 여전히 백씨 가문의 아가씨로 지내고 있었다.지아가 들어가자 낯선 남자가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바네사 씨,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동생 잘 부탁드립니다.”지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과거 백씨 가문에 이런 사람은 없었는데 옷차림으로 보아 백씨 가문의 후계자인 백호임이 틀림없었다.“별말씀을요.”백호는 갸름한 외모에 피부가 하얗고, 옛날 의상을 차려입으면 선비같이 단정한 얼굴이 전혀 세속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백씨 가문에는 방계가 많았고 그중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는 건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백씨 가문이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 쇠퇴하긴 했지만 백 어르신은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어 얕잡아 볼 수 없었다.오랜 세월이 지나 백채원은 지금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다.도윤이 그녀와의 결혼을 취소한 이후 목숨을 구해준 전림의 은혜를 생각해 복수는 하지 않았지만 상대하지도 않고 그대로 자멸하게 내버려두었다.하지만 지아는 과거 백채원이 자신에게 했던 일을 단 하루도
지아는 아직도 처음 만났을 때 튀어나온 배를 안고 도윤에게 기대어 있던 백채원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유람선에서 자신을 밀치기 전 백채원이 했던 말도 기억난다.“도윤 씨가 당신을 구할까, 나를 구할까?”그리고 막막한 순간에 전당포에 결혼반지를 맡길 때 고고하게 굴던 백채원의 모습도 기억났다.지아는 두 사람이 만나는 상상을 여러 번 했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아가씨! 세상에, 어쩌다 이런 일이... 당장 119에 신고할게요.”집사가 허둥지둥 말했다.방금 손목을 베인 백채원의 출혈량을 보고 지아는 서둘러 수건으로 상처를 막고 압박을 가하며 출혈을 멈추려 했다.“출혈이 심하지 않고 상처가 얕아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당신 누구야? 누가 오라고 했어, 꺼져!”백채원은 미친 듯이 몸부림쳤고 감정이 매우 불안정했다.발버둥 치다가 지아의 얼굴에 피가 뿌려졌지만 지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때렸다.“이제 좀 진정이 돼요?” 지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백채원은 낯선 사람이 감히 자신을 때렸다는 사실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사실 지아는 그동안 여러 번 뺨을 맞고 무릎까지 꿇고 얼굴이 망가질 뻔했는데 고작 따귀 한대가 뭐란 말인가.백채원이 가만히 있자 집사가 말했다.“아가씨, 이분은 다리를 전문으로 치료하는 의사니까 진정하세요. 어쩌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신 거예요, 어르신이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어요?”어르신을 언급하자 백채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그녀에게 진심으로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은 어르신뿐이었으니까.어르신은 백채원이 백씨 가문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내치지 않았고,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어르신의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남은 세월이 많지 않아 백채원이 이런 짓을 했단 걸 알면 정말 충격에 당장 돌아가실지도 모른다.지아는 차분하게 치료하며 집사에게 무언가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백호는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선생님, 비용이 얼마나
다실로 안내받은 지아에게 백호가 진작 준비해 온 자료를 건네주었다.“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그동안 제 동생이 받은 검사 결과예요.”두툼하게 쌓인 검사 결과지를 지아는 유심히 살펴봤다.“수술을 했어요?”“네, 하지만 효과가 별로 없어서 아직도 일어설 수 없어요. 제 동생 참 불쌍해요. 어린 나이에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졌고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셨고 결혼도 취소됐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겠어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구해 주셔야 해요. 동생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백채원의 방에서 콘돔을 보지 않았다면 지아는 정말 눈앞의 남자에게 속았을 것이다.‘겉으로 보기엔 참 좋은 사람인데.’백채원의 시중을 드는 건 전부 여자 가정부들이었고, 그녀를 아끼는 백중권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나.게다가 처음에 자신을 맞이하러 온 것은 집사이고 백호는 나중에 왔으니 분명 그 일로 바빴던 것이다.이런 위선자들을 지아는 오래전부터 많이 보아왔다.지아는 최근 검사 결과를 보며 결론을 내렸다.“치료할 수 있어요.”“정말요?”“네, 뼈가 회복된 정황으로 보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수술과 더불어 침을 맞으면 길어야 3개월이면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아요.”“다행이네요. 역시 선생님처럼 유명한 의사는 치료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남자의 얼굴이 매우 행복해 보였다.“물론 검사 결과만 보고 판단한 것이고 정확한 진단을 하려면 몸 상태를 봐야 해요.”“네, 일단 차부터 마시면서 동생이 조금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검사해도 늦지 않아요.”“안 급해요, 기다릴 시간은 충분해요.” 지아는 천천히 차를 마셨다.몸에 생긴 악성 종양을 치료하고 다시 태어난 듯 지아에게는 이제 천천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생이 주어졌다.잠시 후 집사가 와서 보고했다.“아가씨께서 준비 다 됐으니 가서 좀 봐주세요.”지아가 다시 백채원에게로 갔을 때 옆에는 백중권도 있었다.몇 년의 시간이 흘러 그도 꽤 나이를 먹었다.백채원이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