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실로 안내받은 지아에게 백호가 진작 준비해 온 자료를 건네주었다.“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그동안 제 동생이 받은 검사 결과예요.”두툼하게 쌓인 검사 결과지를 지아는 유심히 살펴봤다.“수술을 했어요?”“네, 하지만 효과가 별로 없어서 아직도 일어설 수 없어요. 제 동생 참 불쌍해요. 어린 나이에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졌고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셨고 결혼도 취소됐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겠어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구해 주셔야 해요. 동생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백채원의 방에서 콘돔을 보지 않았다면 지아는 정말 눈앞의 남자에게 속았을 것이다.‘겉으로 보기엔 참 좋은 사람인데.’백채원의 시중을 드는 건 전부 여자 가정부들이었고, 그녀를 아끼는 백중권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나.게다가 처음에 자신을 맞이하러 온 것은 집사이고 백호는 나중에 왔으니 분명 그 일로 바빴던 것이다.이런 위선자들을 지아는 오래전부터 많이 보아왔다.지아는 최근 검사 결과를 보며 결론을 내렸다.“치료할 수 있어요.”“정말요?”“네, 뼈가 회복된 정황으로 보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수술과 더불어 침을 맞으면 길어야 3개월이면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아요.”“다행이네요. 역시 선생님처럼 유명한 의사는 치료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남자의 얼굴이 매우 행복해 보였다.“물론 검사 결과만 보고 판단한 것이고 정확한 진단을 하려면 몸 상태를 봐야 해요.”“네, 일단 차부터 마시면서 동생이 조금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검사해도 늦지 않아요.”“안 급해요, 기다릴 시간은 충분해요.” 지아는 천천히 차를 마셨다.몸에 생긴 악성 종양을 치료하고 다시 태어난 듯 지아에게는 이제 천천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생이 주어졌다.잠시 후 집사가 와서 보고했다.“아가씨께서 준비 다 됐으니 가서 좀 봐주세요.”지아가 다시 백채원에게로 갔을 때 옆에는 백중권도 있었다.몇 년의 시간이 흘러 그도 꽤 나이를 먹었다.백채원이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을
지아가 떠난다는 말을 듣자마자 백씨 가문 사람들은 초조해졌다.“안 돼요, 안 돼. 어렵게 찾았는데 이대로 가면 안 되죠. 내 손녀의 다리가 선생님께 달렸는데요.”백중권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선생님, 아가씨 다리부터 살펴봐 주세요. 아가씨, 아까 말씀드린 바네사입니다. 의술이 뛰어나고 여러 분야에 정통한 이분이 방금 아가씨가 일어설 수 있다고 하셨어요.”그러자 백채원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정말? 제가 일어설 수 있어요?”“그쪽이 잘 협조해야죠.” 지아가 덤덤하게 말하자 백채원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지아가 방금 자신을 때렸다는 사실도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알았어요, 협조할게요, 꼭 협조할게요.”“백채원 씨, 오늘 한 말 기억해 두고 후회하지 마세요.”“어떻게 후회하겠어요, 저를 치료해 주신다면 뭐든지 할게요.”“알았어요, 그럼 먼저 진찰을 해볼 테니 침대에 누우세요.”백호가 말했다.“제가 할게요.”그리고는 백채원 옆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으려는데 백채원의 얼굴에는 백호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이 가득했고, 그가 만질 때 몸이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무서운 거다.이 사실을 깨달은 지아는 평생 거만하게 살아온 백채원이 다른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게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두 사람의 관계가 더욱 흥미로워졌다.지아가 파자마 바지를 벗기자 오랫동안 걷지 못해 다리가 많이 쪼그라들었다.부모님을 모두 돌아가시게 한 장본인인데 그깟 다리가 쪼그라든 게 뭐 그리 대수일까.백채원이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다리를 주무르던 지아의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됐어요, 뭐가 보여요?”“별거 아니에요.” 지아는 덤덤하게 손을 뺐다.“다리 치료할 수 있어요. 수술 전에 매일 다리의 신경을 자극하는 침을 놓아야 해요.”“좋아요! 나 돈 많으니까 내 다리를 치료하는 데 필요한 건 뭐든지 줄 수 있어요.”백채원은 다소 미친 것처럼 보였다.“할아버지, 얼른 나가세요. 곧 도윤 씨가 올 텐데 지금 이런 모
도윤은 빨리 왔고 지아는 다음 날 다시 오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윤을 만나면 좀 이상할 것 같았다.하지만 백중권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도 전에 도윤이 서둘러 도착했다.백채원이 저지른 일 때문에 백정일 부부와 소계훈이 죽음에 이르자 백중권도 어쩔 수 없이 불리한 입장이라 도윤의 뜻대로 결혼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백채원은 지난 몇 년 동안 돌이키고 보상하려고 노력했지만 도윤에게 차단당해 연락할 수가 없었다.어렵게 도윤을 다시 만나자 백중권 역시 기대가 컸다.만약 도윤만 꺼리지 않는다면 백씨 가문의 후계자로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다.집사에게 미리 소식을 들은 백채원은 감격에 겨워 얼굴을 치장했고 할아버지에겐 차마 알리지 못했다.이미 부모님과 백정일을 모두 죽였으니 유일하게 자신에게 잘해준 할아버지까지 죽일 수는 없었다.백호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지난 몇 년 동안 마음대로 그녀를 탐했다.유미도 그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빨리 나 좀 밀어줘. 도윤 씨가 왔어.”지아가 베란다에서 눈을 감상하고 있을 때 양복 입은 남자가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들어왔다.백채원은 지난 몇 년 동안 기사로만 도윤의 소식을 접하다가 그를 실제로 보는 순간 마음속의 감정이 극도로 복잡해졌다.반갑고 설레는 마음에 다리를 다친 것도 잊은 채 도윤을 향해 달려가다가 그만 바닥에 딱 주저앉고 말았다.복잡한 감정은 입가에 뱉은 세 글자로 바뀌었다.“도윤 씨...”하지만 도윤의 관심은 전혀 그녀에게 있지 않았고 백채원을 지나 곧장 지아에게로 향했다.비록 지아의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도윤은 익숙한 눈빛을 마주했을 때 백채원과 같은 감정을 느꼈다.지아에 대한 사랑과 그녀가 다시 그의 삶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윤아, 드디어 왔구나.” 백중권의 목소리에 도윤이 정신을 차렸고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태연하게 말했다.“어르신, 오랜만인데 여전히 정정하시네요.”백중권은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저었다. 그 망할
도윤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흥미를 보이는 듯 말했다. “바네사 씨는 젊고 재능도 있는데 결혼하셨나요?”지아가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현명한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 않죠.”백채원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도윤은 자신을 보러 온 게 아니었나, 그런데 왜 낯선 여자가 결혼했는지 묻는 걸까.하지만 도윤이 오랫동안 자신을 무시하다가 겨우 찾아온 것이기에 그에게 밉보일 수 없었던 터라 그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도윤 씨...”도윤은 그제야 자신이 백채원을 빌미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백채원에게 시선을 돌렸다.몇 년이 지난 후 백채원은 많이 핼쑥해져 병들어 창백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전림을 생각해서라도 동정심이 생겼을 텐데, 그동안 지아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동정심은 조금도 없이 냉정하게 물었다.“오랜만이네, 어떻게 지냈어?”어떻게 지냈냐고? 암울한 그녀의 삶은 하루가 일 년 같았다.하지만 백채원은 눈물을 흘리며 또박또박 말했다.“나, 난 괜찮아요.”“대표님 걱정 마세요. 동생은 제가 잘 돌보고 있으니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백호가 입을 열며 도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백씨 가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윤은 뻔히 알고 있었고, 기억 속 어렸을 때 깡마르고 병약했던 모습이었던 백호가 이젠 어엿한 가주의 모습으로 성장할 줄은 몰랐다.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기에 도윤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어르신은 기뻐하셨다.“도윤이가 오랜만에 와서 부엌에 음식 준비하라고 해 뒀다.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술 한잔하자.”도윤은 난감한 상황에서 지아를 돌아보았다.“바네사 씨는 의술이 뛰어나다고 하던데 백채원의 다리도 고칠 수 있나요?”지아는 분명 좋은 사람이 되려고 여기 온 게 아니라 자신만의 계획이 있었다.“고칠 수 있어요.” 지아가 덤덤하게 말하자 도윤은 또 칭찬을 퍼부었고 그가 아부하기 전에 지아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오늘부터 바로 침놓아도 돼요.”
백채원은 뜨거움에 욕설을 퍼부었지만 스스로 다리를 고칠 능력은 없었기에 불쌍한 처지를 한탄하며 울면서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내가 왜 이런 고생을.’백중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얘야, 조금만 참아. 다시 일어서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할아버지, 너무 뜨거워요. 정말 너무 뜨거워요. 피부에 물집이 잡힐 것 같아요. 안 할래요, 너무 뜨거워요. 어디서 온 돌팔이 의사야, 난 당신한테 원한이 없는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도윤 씨, 나 좀 살려줘요.”도윤과 지아가 밖에서 다과를 먹으며 눈을 감상하는 동안 안방에서는 백채원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백씨 가문도 소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눈이 오면 경치가 아름다운 고풍스러운 별장이었다.백씨 가문 사람들은 백채원을 말리기 위해 집 안에 있었고 밖에는 지아와 도윤 둘뿐이었다.도윤은 지아에게 정신이 팔려 백채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그는 포도 껍질을 벗겨 지아의 입에 건넸다.“포도 먹고 기분 풀어.”이미 까진 포도고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지아는 거절하지 않았다.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사람들이 나올 테니까.지아가 입을 벌려 한입 베어 물자 도윤의 손끝이 혀끝을 부드럽게 쓸었다. 거친 손끝을 스치는 촉촉한 부드러움에 두 사람 모두 가슴이 떨렸다.‘이런 개자식, 여기가 어디라고.’지아는 불쾌한 기분이 들어 화를 내며 그를 노려보았다.도윤은 방금 지아가 머금었던 곳을 야릇하게 핥았다.“포도가 꽤 다네.”그 행동에 마치 그 옛날 나라를 망하게 했던 요물 후궁이 떠올랐지만 양복을 입은 도윤의 금욕적인 표정이 더 도발적이었다.무의식적으로 포도를 한입 베어 물자 과즙이 입가에 살짝 흘러내렸고, 도윤은 한 손으로 소파를 지탱한 채 다른 한 손으로 지아의 턱을 들어 올려 키스를 했다.지아의 눈이 커졌다.‘이 개자식이 지금 뭐 하는 거지?’자신은 복수하러 왔는데 도윤은 몰래 사랑을 나누러 온 건가?하여튼 뼛속까지 음흉한 남자다.남자의 혀가 부드럽게 감겨오며 두 사
도윤이 말한 검사가 단순한 검사가 아니었기에 지아는 속으로 변태라며 욕을 퍼부으면서 겉으로 태연하게 말했다.“시간 다 됐으니까 이제 백채원 씨 다리 치료하러 가야겠네요.”도망치듯 떠나는 지아의 뒷모습에 도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아야, 내가 널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디로 도망가려고?’막 물에서 건져 올린 백채원의 발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물집도 적지 않게 잡혀 있어 백채원은 이미 고통에 울고 있었다.“채원아, 조금만 참아, 곧 끝날 거야.” 그래도 백채원을 좋아했던 백호는 우는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지만 백채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도윤을 바라보았다.“도윤 씨, 나 너무 아파요.”백호는 얼굴에 따귀라도 맞은 듯 눈빛이 점점 사악해졌다.하느님처럼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지아는 재밌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소계훈과 변진희의 딸로 두 사람의 좋은 점만 물려받은 백채원의 외모는 나쁘지 않았다.특히 소계훈을 닮은 쌍꺼풀 있는 눈매와 변진희를 닮은 입술과 이목구비가 인상적이었다.거만한 성격만 아니었다면 저 얼굴만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전림만 봐도 죽을 때까지 백채원을 챙기지 않았나.저 얼굴은 뭇 남성들 마음의 사랑으로 자리 잡기에 충분했다.사랑하는 사람에겐 백채원의 고통이 안타까움과 연민이겠지만 도윤에겐 속 검은 짐승일 뿐이었다.백채원은 전림의 모든 은혜를 저버릴 만큼 도윤과 지아를 오늘날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그동안 지아를 그리워한 만큼 도윤은 백채원을 증오했고, 전림만 아니었다면 진작 백채원을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다.그런 그녀의 눈물에 도윤이 조금이라도 동요할 리가 없었다.도윤은 차갑게 대답했다.“아프면 의사를 부르지 나는 왜 찾아? 내가 진통제도 아니고.”백채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온기를 가진 사람의 입에서 그토록 차가운 말이 나올 수 있을까.지아가 구급상자를 열었다.“백채원 씨, 다 울었어요? 다 울었으면 침놓을게요.”백채원은 충격에 휩싸인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악
“가지 마요, 치료받을게요. 그쪽 말대로 할게요.”백채원은 유미를 바라보았다.“네가 약 발라.”유미는 두 다리 가득 번쩍이는 작은 물집들을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저, 전 못해요. 도련님이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백중권은 이유도 모른 채 이렇게 말했다.“그래, 세심하고 담대한 백호가 해.”백중권의 눈에 백호는 자상한 오빠였다. 백채원이 친동생은 아니었지만 친동생보다 더 잘 챙겼다.백호는 가문을 이어받은 이후 출신이 다른 백채원을 하대하지 않고 오히려 더 살뜰히 챙겼기에 백중권은 마음이 놓였다.백채원은 입술을 깨물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모든 걸 알고 있던 지아만이 흥미롭게 두 사람을 지켜보며 앞으로 이어지는 나날들이 따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만지기만 해도 아픈 물집을 지아가 터뜨리기까지 하고 약을 바르라고 하자 아무리 백호라도 내키지 않았다.“조금만 참아.”단호한 백호의 손길에 백채원은 고통의 눈물을 흘렸다.겨우 물집을 다 터뜨리고 옅은 푸른색 연고를 바르는데 마치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그 위에 고춧가루까지 한층 더 뿌린 것 같았다.“아악!”백채원은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이 고통으로 떨리고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이번에는 통증으로 곧바로 기절해 버려 욕을 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선생님, 어떻게 된 거예요?”지아가 천천히 대답했다.“제가 직접 만든 연고인데, 자극이 심하지만 가장 효과적이고 일반 약에 비해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어서 30분 이내에 다리의 변화를 볼 수 있지만... 대신 백채원 씨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올 거예요.”백호가 서둘러 물었다.“혹시 건강에 위협이 되지는 않나요?”지아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세상에 그런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아무런 대가도 없이 무언가를 얻을 수는 없죠.”그렇게 말하며 백씨 가문 사람들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 주머니를 꺼내 백채원에게 침을 놓기 시작했다.백채원을 위해 지아는 일반 침보다 몇 배나 굵은 침을 선택했다.“선생
“당신 대체 누구야? 할아버지, 저 이 사람한테 치료받기 싫어요.”백채원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이 여인에게서 자신에 대한 증오와 지아의 잔상을 보았다.지아는 그때 떠난 이후 소식이 끊겼고 누군가는 그녀가 오래전에 죽었다고 말했다.지아가 지금 어디에 있든 절대 이런 모습은 아닐 것이다.지아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전 단지 백채원 씨와 이 대표님 말씀을 듣고 제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뭘 그렇게 긴장하세요, 백채원 씨? 설마 떳떳하지 못한 짓이라도 했나요?”부모를 모두 죽인 백채원은 죽어서도 억겁의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채원아,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다른 의사 스케줄이 꽉 찼어. 우리도 오랫동안 연락해서 모셔온 분이니까 괜한 생각 말고 아파도 일어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며 조금만 참아.”“참으라고, 그럼 얼마나 더 참아야 해?”“3개월 정도 조리하면서 경과가 좋으면 시간을 더 줄일 수도 있어요. 조리가 끝나면 수술할 거예요.”“3개월이나!”백일 가까이 매일 이런 고문을 견뎌야 한다는 생각에 백채원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마침내 모든 침이 다리에 꽂히고 침을 놓을 때마다 극심한 통증이 몰려와 백채원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온몸은 땀을 뻘뻘 흘렸다.“30분만 있어요.”백채원은 백호에게 짓밟히는 게 지옥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 고통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날이 어두워지자 지아는 침을 뽑으며 당부했다.“앞으로는 내가 오기 전에 미리 발을 담그고 약을 발라요. 전 침만 놓을 테니까, 알았죠?”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부탁드리겠습니다. 시간도 늦었는데 식사하고 가시죠.”“네, 이번만이에요. 앞으로는 제 식사 준비할 필요 없어요.”지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가운 모습으로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인상을 주었다.“알겠습니다.”백호는 4억짜리 수표를 건넸다.“이건 진료비입니다. 제 동생이 일어설 수 있다면 그때 더 두둑이 챙겨드리겠습니다.”지아도 마다하지 않았다.“그러세요.”저녁 식사 자리에서 백채원은 일어날 기운이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