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실로 안내받은 지아에게 백호가 진작 준비해 온 자료를 건네주었다.“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그동안 제 동생이 받은 검사 결과예요.”두툼하게 쌓인 검사 결과지를 지아는 유심히 살펴봤다.“수술을 했어요?”“네, 하지만 효과가 별로 없어서 아직도 일어설 수 없어요. 제 동생 참 불쌍해요. 어린 나이에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졌고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셨고 결혼도 취소됐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겠어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구해 주셔야 해요. 동생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백채원의 방에서 콘돔을 보지 않았다면 지아는 정말 눈앞의 남자에게 속았을 것이다.‘겉으로 보기엔 참 좋은 사람인데.’백채원의 시중을 드는 건 전부 여자 가정부들이었고, 그녀를 아끼는 백중권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나.게다가 처음에 자신을 맞이하러 온 것은 집사이고 백호는 나중에 왔으니 분명 그 일로 바빴던 것이다.이런 위선자들을 지아는 오래전부터 많이 보아왔다.지아는 최근 검사 결과를 보며 결론을 내렸다.“치료할 수 있어요.”“정말요?”“네, 뼈가 회복된 정황으로 보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수술과 더불어 침을 맞으면 길어야 3개월이면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아요.”“다행이네요. 역시 선생님처럼 유명한 의사는 치료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남자의 얼굴이 매우 행복해 보였다.“물론 검사 결과만 보고 판단한 것이고 정확한 진단을 하려면 몸 상태를 봐야 해요.”“네, 일단 차부터 마시면서 동생이 조금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검사해도 늦지 않아요.”“안 급해요, 기다릴 시간은 충분해요.” 지아는 천천히 차를 마셨다.몸에 생긴 악성 종양을 치료하고 다시 태어난 듯 지아에게는 이제 천천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생이 주어졌다.잠시 후 집사가 와서 보고했다.“아가씨께서 준비 다 됐으니 가서 좀 봐주세요.”지아가 다시 백채원에게로 갔을 때 옆에는 백중권도 있었다.몇 년의 시간이 흘러 그도 꽤 나이를 먹었다.백채원이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을
지아가 떠난다는 말을 듣자마자 백씨 가문 사람들은 초조해졌다.“안 돼요, 안 돼. 어렵게 찾았는데 이대로 가면 안 되죠. 내 손녀의 다리가 선생님께 달렸는데요.”백중권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선생님, 아가씨 다리부터 살펴봐 주세요. 아가씨, 아까 말씀드린 바네사입니다. 의술이 뛰어나고 여러 분야에 정통한 이분이 방금 아가씨가 일어설 수 있다고 하셨어요.”그러자 백채원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정말? 제가 일어설 수 있어요?”“그쪽이 잘 협조해야죠.” 지아가 덤덤하게 말하자 백채원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지아가 방금 자신을 때렸다는 사실도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알았어요, 협조할게요, 꼭 협조할게요.”“백채원 씨, 오늘 한 말 기억해 두고 후회하지 마세요.”“어떻게 후회하겠어요, 저를 치료해 주신다면 뭐든지 할게요.”“알았어요, 그럼 먼저 진찰을 해볼 테니 침대에 누우세요.”백호가 말했다.“제가 할게요.”그리고는 백채원 옆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으려는데 백채원의 얼굴에는 백호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이 가득했고, 그가 만질 때 몸이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무서운 거다.이 사실을 깨달은 지아는 평생 거만하게 살아온 백채원이 다른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게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두 사람의 관계가 더욱 흥미로워졌다.지아가 파자마 바지를 벗기자 오랫동안 걷지 못해 다리가 많이 쪼그라들었다.부모님을 모두 돌아가시게 한 장본인인데 그깟 다리가 쪼그라든 게 뭐 그리 대수일까.백채원이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다리를 주무르던 지아의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됐어요, 뭐가 보여요?”“별거 아니에요.” 지아는 덤덤하게 손을 뺐다.“다리 치료할 수 있어요. 수술 전에 매일 다리의 신경을 자극하는 침을 놓아야 해요.”“좋아요! 나 돈 많으니까 내 다리를 치료하는 데 필요한 건 뭐든지 줄 수 있어요.”백채원은 다소 미친 것처럼 보였다.“할아버지, 얼른 나가세요. 곧 도윤 씨가 올 텐데 지금 이런 모
도윤은 빨리 왔고 지아는 다음 날 다시 오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윤을 만나면 좀 이상할 것 같았다.하지만 백중권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도 전에 도윤이 서둘러 도착했다.백채원이 저지른 일 때문에 백정일 부부와 소계훈이 죽음에 이르자 백중권도 어쩔 수 없이 불리한 입장이라 도윤의 뜻대로 결혼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백채원은 지난 몇 년 동안 돌이키고 보상하려고 노력했지만 도윤에게 차단당해 연락할 수가 없었다.어렵게 도윤을 다시 만나자 백중권 역시 기대가 컸다.만약 도윤만 꺼리지 않는다면 백씨 가문의 후계자로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다.집사에게 미리 소식을 들은 백채원은 감격에 겨워 얼굴을 치장했고 할아버지에겐 차마 알리지 못했다.이미 부모님과 백정일을 모두 죽였으니 유일하게 자신에게 잘해준 할아버지까지 죽일 수는 없었다.백호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지난 몇 년 동안 마음대로 그녀를 탐했다.유미도 그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빨리 나 좀 밀어줘. 도윤 씨가 왔어.”지아가 베란다에서 눈을 감상하고 있을 때 양복 입은 남자가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들어왔다.백채원은 지난 몇 년 동안 기사로만 도윤의 소식을 접하다가 그를 실제로 보는 순간 마음속의 감정이 극도로 복잡해졌다.반갑고 설레는 마음에 다리를 다친 것도 잊은 채 도윤을 향해 달려가다가 그만 바닥에 딱 주저앉고 말았다.복잡한 감정은 입가에 뱉은 세 글자로 바뀌었다.“도윤 씨...”하지만 도윤의 관심은 전혀 그녀에게 있지 않았고 백채원을 지나 곧장 지아에게로 향했다.비록 지아의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도윤은 익숙한 눈빛을 마주했을 때 백채원과 같은 감정을 느꼈다.지아에 대한 사랑과 그녀가 다시 그의 삶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윤아, 드디어 왔구나.” 백중권의 목소리에 도윤이 정신을 차렸고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태연하게 말했다.“어르신, 오랜만인데 여전히 정정하시네요.”백중권은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저었다. 그 망할
도윤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흥미를 보이는 듯 말했다. “바네사 씨는 젊고 재능도 있는데 결혼하셨나요?”지아가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현명한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 않죠.”백채원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도윤은 자신을 보러 온 게 아니었나, 그런데 왜 낯선 여자가 결혼했는지 묻는 걸까.하지만 도윤이 오랫동안 자신을 무시하다가 겨우 찾아온 것이기에 그에게 밉보일 수 없었던 터라 그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도윤 씨...”도윤은 그제야 자신이 백채원을 빌미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백채원에게 시선을 돌렸다.몇 년이 지난 후 백채원은 많이 핼쑥해져 병들어 창백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전림을 생각해서라도 동정심이 생겼을 텐데, 그동안 지아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동정심은 조금도 없이 냉정하게 물었다.“오랜만이네, 어떻게 지냈어?”어떻게 지냈냐고? 암울한 그녀의 삶은 하루가 일 년 같았다.하지만 백채원은 눈물을 흘리며 또박또박 말했다.“나, 난 괜찮아요.”“대표님 걱정 마세요. 동생은 제가 잘 돌보고 있으니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백호가 입을 열며 도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백씨 가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윤은 뻔히 알고 있었고, 기억 속 어렸을 때 깡마르고 병약했던 모습이었던 백호가 이젠 어엿한 가주의 모습으로 성장할 줄은 몰랐다.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기에 도윤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어르신은 기뻐하셨다.“도윤이가 오랜만에 와서 부엌에 음식 준비하라고 해 뒀다.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술 한잔하자.”도윤은 난감한 상황에서 지아를 돌아보았다.“바네사 씨는 의술이 뛰어나다고 하던데 백채원의 다리도 고칠 수 있나요?”지아는 분명 좋은 사람이 되려고 여기 온 게 아니라 자신만의 계획이 있었다.“고칠 수 있어요.” 지아가 덤덤하게 말하자 도윤은 또 칭찬을 퍼부었고 그가 아부하기 전에 지아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오늘부터 바로 침놓아도 돼요.”
백채원은 뜨거움에 욕설을 퍼부었지만 스스로 다리를 고칠 능력은 없었기에 불쌍한 처지를 한탄하며 울면서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내가 왜 이런 고생을.’백중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얘야, 조금만 참아. 다시 일어서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할아버지, 너무 뜨거워요. 정말 너무 뜨거워요. 피부에 물집이 잡힐 것 같아요. 안 할래요, 너무 뜨거워요. 어디서 온 돌팔이 의사야, 난 당신한테 원한이 없는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도윤 씨, 나 좀 살려줘요.”도윤과 지아가 밖에서 다과를 먹으며 눈을 감상하는 동안 안방에서는 백채원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백씨 가문도 소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눈이 오면 경치가 아름다운 고풍스러운 별장이었다.백씨 가문 사람들은 백채원을 말리기 위해 집 안에 있었고 밖에는 지아와 도윤 둘뿐이었다.도윤은 지아에게 정신이 팔려 백채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그는 포도 껍질을 벗겨 지아의 입에 건넸다.“포도 먹고 기분 풀어.”이미 까진 포도고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지아는 거절하지 않았다.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사람들이 나올 테니까.지아가 입을 벌려 한입 베어 물자 도윤의 손끝이 혀끝을 부드럽게 쓸었다. 거친 손끝을 스치는 촉촉한 부드러움에 두 사람 모두 가슴이 떨렸다.‘이런 개자식, 여기가 어디라고.’지아는 불쾌한 기분이 들어 화를 내며 그를 노려보았다.도윤은 방금 지아가 머금었던 곳을 야릇하게 핥았다.“포도가 꽤 다네.”그 행동에 마치 그 옛날 나라를 망하게 했던 요물 후궁이 떠올랐지만 양복을 입은 도윤의 금욕적인 표정이 더 도발적이었다.무의식적으로 포도를 한입 베어 물자 과즙이 입가에 살짝 흘러내렸고, 도윤은 한 손으로 소파를 지탱한 채 다른 한 손으로 지아의 턱을 들어 올려 키스를 했다.지아의 눈이 커졌다.‘이 개자식이 지금 뭐 하는 거지?’자신은 복수하러 왔는데 도윤은 몰래 사랑을 나누러 온 건가?하여튼 뼛속까지 음흉한 남자다.남자의 혀가 부드럽게 감겨오며 두 사
도윤이 말한 검사가 단순한 검사가 아니었기에 지아는 속으로 변태라며 욕을 퍼부으면서 겉으로 태연하게 말했다.“시간 다 됐으니까 이제 백채원 씨 다리 치료하러 가야겠네요.”도망치듯 떠나는 지아의 뒷모습에 도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아야, 내가 널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디로 도망가려고?’막 물에서 건져 올린 백채원의 발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물집도 적지 않게 잡혀 있어 백채원은 이미 고통에 울고 있었다.“채원아, 조금만 참아, 곧 끝날 거야.” 그래도 백채원을 좋아했던 백호는 우는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지만 백채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도윤을 바라보았다.“도윤 씨, 나 너무 아파요.”백호는 얼굴에 따귀라도 맞은 듯 눈빛이 점점 사악해졌다.하느님처럼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지아는 재밌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소계훈과 변진희의 딸로 두 사람의 좋은 점만 물려받은 백채원의 외모는 나쁘지 않았다.특히 소계훈을 닮은 쌍꺼풀 있는 눈매와 변진희를 닮은 입술과 이목구비가 인상적이었다.거만한 성격만 아니었다면 저 얼굴만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전림만 봐도 죽을 때까지 백채원을 챙기지 않았나.저 얼굴은 뭇 남성들 마음의 사랑으로 자리 잡기에 충분했다.사랑하는 사람에겐 백채원의 고통이 안타까움과 연민이겠지만 도윤에겐 속 검은 짐승일 뿐이었다.백채원은 전림의 모든 은혜를 저버릴 만큼 도윤과 지아를 오늘날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그동안 지아를 그리워한 만큼 도윤은 백채원을 증오했고, 전림만 아니었다면 진작 백채원을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다.그런 그녀의 눈물에 도윤이 조금이라도 동요할 리가 없었다.도윤은 차갑게 대답했다.“아프면 의사를 부르지 나는 왜 찾아? 내가 진통제도 아니고.”백채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온기를 가진 사람의 입에서 그토록 차가운 말이 나올 수 있을까.지아가 구급상자를 열었다.“백채원 씨, 다 울었어요? 다 울었으면 침놓을게요.”백채원은 충격에 휩싸인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악
“가지 마요, 치료받을게요. 그쪽 말대로 할게요.”백채원은 유미를 바라보았다.“네가 약 발라.”유미는 두 다리 가득 번쩍이는 작은 물집들을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저, 전 못해요. 도련님이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백중권은 이유도 모른 채 이렇게 말했다.“그래, 세심하고 담대한 백호가 해.”백중권의 눈에 백호는 자상한 오빠였다. 백채원이 친동생은 아니었지만 친동생보다 더 잘 챙겼다.백호는 가문을 이어받은 이후 출신이 다른 백채원을 하대하지 않고 오히려 더 살뜰히 챙겼기에 백중권은 마음이 놓였다.백채원은 입술을 깨물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모든 걸 알고 있던 지아만이 흥미롭게 두 사람을 지켜보며 앞으로 이어지는 나날들이 따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만지기만 해도 아픈 물집을 지아가 터뜨리기까지 하고 약을 바르라고 하자 아무리 백호라도 내키지 않았다.“조금만 참아.”단호한 백호의 손길에 백채원은 고통의 눈물을 흘렸다.겨우 물집을 다 터뜨리고 옅은 푸른색 연고를 바르는데 마치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그 위에 고춧가루까지 한층 더 뿌린 것 같았다.“아악!”백채원은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이 고통으로 떨리고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이번에는 통증으로 곧바로 기절해 버려 욕을 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선생님, 어떻게 된 거예요?”지아가 천천히 대답했다.“제가 직접 만든 연고인데, 자극이 심하지만 가장 효과적이고 일반 약에 비해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어서 30분 이내에 다리의 변화를 볼 수 있지만... 대신 백채원 씨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올 거예요.”백호가 서둘러 물었다.“혹시 건강에 위협이 되지는 않나요?”지아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세상에 그런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아무런 대가도 없이 무언가를 얻을 수는 없죠.”그렇게 말하며 백씨 가문 사람들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 주머니를 꺼내 백채원에게 침을 놓기 시작했다.백채원을 위해 지아는 일반 침보다 몇 배나 굵은 침을 선택했다.“선생
“당신 대체 누구야? 할아버지, 저 이 사람한테 치료받기 싫어요.”백채원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이 여인에게서 자신에 대한 증오와 지아의 잔상을 보았다.지아는 그때 떠난 이후 소식이 끊겼고 누군가는 그녀가 오래전에 죽었다고 말했다.지아가 지금 어디에 있든 절대 이런 모습은 아닐 것이다.지아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전 단지 백채원 씨와 이 대표님 말씀을 듣고 제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뭘 그렇게 긴장하세요, 백채원 씨? 설마 떳떳하지 못한 짓이라도 했나요?”부모를 모두 죽인 백채원은 죽어서도 억겁의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채원아,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다른 의사 스케줄이 꽉 찼어. 우리도 오랫동안 연락해서 모셔온 분이니까 괜한 생각 말고 아파도 일어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며 조금만 참아.”“참으라고, 그럼 얼마나 더 참아야 해?”“3개월 정도 조리하면서 경과가 좋으면 시간을 더 줄일 수도 있어요. 조리가 끝나면 수술할 거예요.”“3개월이나!”백일 가까이 매일 이런 고문을 견뎌야 한다는 생각에 백채원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마침내 모든 침이 다리에 꽂히고 침을 놓을 때마다 극심한 통증이 몰려와 백채원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온몸은 땀을 뻘뻘 흘렸다.“30분만 있어요.”백채원은 백호에게 짓밟히는 게 지옥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 고통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날이 어두워지자 지아는 침을 뽑으며 당부했다.“앞으로는 내가 오기 전에 미리 발을 담그고 약을 발라요. 전 침만 놓을 테니까, 알았죠?”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부탁드리겠습니다. 시간도 늦었는데 식사하고 가시죠.”“네, 이번만이에요. 앞으로는 제 식사 준비할 필요 없어요.”지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가운 모습으로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인상을 주었다.“알겠습니다.”백호는 4억짜리 수표를 건넸다.“이건 진료비입니다. 제 동생이 일어설 수 있다면 그때 더 두둑이 챙겨드리겠습니다.”지아도 마다하지 않았다.“그러세요.”저녁 식사 자리에서 백채원은 일어날 기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