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흥미를 보이는 듯 말했다. “바네사 씨는 젊고 재능도 있는데 결혼하셨나요?”지아가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현명한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 않죠.”백채원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도윤은 자신을 보러 온 게 아니었나, 그런데 왜 낯선 여자가 결혼했는지 묻는 걸까.하지만 도윤이 오랫동안 자신을 무시하다가 겨우 찾아온 것이기에 그에게 밉보일 수 없었던 터라 그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도윤 씨...”도윤은 그제야 자신이 백채원을 빌미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백채원에게 시선을 돌렸다.몇 년이 지난 후 백채원은 많이 핼쑥해져 병들어 창백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전림을 생각해서라도 동정심이 생겼을 텐데, 그동안 지아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동정심은 조금도 없이 냉정하게 물었다.“오랜만이네, 어떻게 지냈어?”어떻게 지냈냐고? 암울한 그녀의 삶은 하루가 일 년 같았다.하지만 백채원은 눈물을 흘리며 또박또박 말했다.“나, 난 괜찮아요.”“대표님 걱정 마세요. 동생은 제가 잘 돌보고 있으니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백호가 입을 열며 도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백씨 가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윤은 뻔히 알고 있었고, 기억 속 어렸을 때 깡마르고 병약했던 모습이었던 백호가 이젠 어엿한 가주의 모습으로 성장할 줄은 몰랐다.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기에 도윤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어르신은 기뻐하셨다.“도윤이가 오랜만에 와서 부엌에 음식 준비하라고 해 뒀다.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술 한잔하자.”도윤은 난감한 상황에서 지아를 돌아보았다.“바네사 씨는 의술이 뛰어나다고 하던데 백채원의 다리도 고칠 수 있나요?”지아는 분명 좋은 사람이 되려고 여기 온 게 아니라 자신만의 계획이 있었다.“고칠 수 있어요.” 지아가 덤덤하게 말하자 도윤은 또 칭찬을 퍼부었고 그가 아부하기 전에 지아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오늘부터 바로 침놓아도 돼요.”
백채원은 뜨거움에 욕설을 퍼부었지만 스스로 다리를 고칠 능력은 없었기에 불쌍한 처지를 한탄하며 울면서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내가 왜 이런 고생을.’백중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얘야, 조금만 참아. 다시 일어서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할아버지, 너무 뜨거워요. 정말 너무 뜨거워요. 피부에 물집이 잡힐 것 같아요. 안 할래요, 너무 뜨거워요. 어디서 온 돌팔이 의사야, 난 당신한테 원한이 없는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도윤 씨, 나 좀 살려줘요.”도윤과 지아가 밖에서 다과를 먹으며 눈을 감상하는 동안 안방에서는 백채원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백씨 가문도 소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눈이 오면 경치가 아름다운 고풍스러운 별장이었다.백씨 가문 사람들은 백채원을 말리기 위해 집 안에 있었고 밖에는 지아와 도윤 둘뿐이었다.도윤은 지아에게 정신이 팔려 백채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그는 포도 껍질을 벗겨 지아의 입에 건넸다.“포도 먹고 기분 풀어.”이미 까진 포도고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지아는 거절하지 않았다.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사람들이 나올 테니까.지아가 입을 벌려 한입 베어 물자 도윤의 손끝이 혀끝을 부드럽게 쓸었다. 거친 손끝을 스치는 촉촉한 부드러움에 두 사람 모두 가슴이 떨렸다.‘이런 개자식, 여기가 어디라고.’지아는 불쾌한 기분이 들어 화를 내며 그를 노려보았다.도윤은 방금 지아가 머금었던 곳을 야릇하게 핥았다.“포도가 꽤 다네.”그 행동에 마치 그 옛날 나라를 망하게 했던 요물 후궁이 떠올랐지만 양복을 입은 도윤의 금욕적인 표정이 더 도발적이었다.무의식적으로 포도를 한입 베어 물자 과즙이 입가에 살짝 흘러내렸고, 도윤은 한 손으로 소파를 지탱한 채 다른 한 손으로 지아의 턱을 들어 올려 키스를 했다.지아의 눈이 커졌다.‘이 개자식이 지금 뭐 하는 거지?’자신은 복수하러 왔는데 도윤은 몰래 사랑을 나누러 온 건가?하여튼 뼛속까지 음흉한 남자다.남자의 혀가 부드럽게 감겨오며 두 사
도윤이 말한 검사가 단순한 검사가 아니었기에 지아는 속으로 변태라며 욕을 퍼부으면서 겉으로 태연하게 말했다.“시간 다 됐으니까 이제 백채원 씨 다리 치료하러 가야겠네요.”도망치듯 떠나는 지아의 뒷모습에 도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아야, 내가 널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디로 도망가려고?’막 물에서 건져 올린 백채원의 발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물집도 적지 않게 잡혀 있어 백채원은 이미 고통에 울고 있었다.“채원아, 조금만 참아, 곧 끝날 거야.” 그래도 백채원을 좋아했던 백호는 우는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지만 백채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도윤을 바라보았다.“도윤 씨, 나 너무 아파요.”백호는 얼굴에 따귀라도 맞은 듯 눈빛이 점점 사악해졌다.하느님처럼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지아는 재밌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소계훈과 변진희의 딸로 두 사람의 좋은 점만 물려받은 백채원의 외모는 나쁘지 않았다.특히 소계훈을 닮은 쌍꺼풀 있는 눈매와 변진희를 닮은 입술과 이목구비가 인상적이었다.거만한 성격만 아니었다면 저 얼굴만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전림만 봐도 죽을 때까지 백채원을 챙기지 않았나.저 얼굴은 뭇 남성들 마음의 사랑으로 자리 잡기에 충분했다.사랑하는 사람에겐 백채원의 고통이 안타까움과 연민이겠지만 도윤에겐 속 검은 짐승일 뿐이었다.백채원은 전림의 모든 은혜를 저버릴 만큼 도윤과 지아를 오늘날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그동안 지아를 그리워한 만큼 도윤은 백채원을 증오했고, 전림만 아니었다면 진작 백채원을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다.그런 그녀의 눈물에 도윤이 조금이라도 동요할 리가 없었다.도윤은 차갑게 대답했다.“아프면 의사를 부르지 나는 왜 찾아? 내가 진통제도 아니고.”백채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온기를 가진 사람의 입에서 그토록 차가운 말이 나올 수 있을까.지아가 구급상자를 열었다.“백채원 씨, 다 울었어요? 다 울었으면 침놓을게요.”백채원은 충격에 휩싸인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악
“가지 마요, 치료받을게요. 그쪽 말대로 할게요.”백채원은 유미를 바라보았다.“네가 약 발라.”유미는 두 다리 가득 번쩍이는 작은 물집들을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저, 전 못해요. 도련님이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백중권은 이유도 모른 채 이렇게 말했다.“그래, 세심하고 담대한 백호가 해.”백중권의 눈에 백호는 자상한 오빠였다. 백채원이 친동생은 아니었지만 친동생보다 더 잘 챙겼다.백호는 가문을 이어받은 이후 출신이 다른 백채원을 하대하지 않고 오히려 더 살뜰히 챙겼기에 백중권은 마음이 놓였다.백채원은 입술을 깨물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모든 걸 알고 있던 지아만이 흥미롭게 두 사람을 지켜보며 앞으로 이어지는 나날들이 따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만지기만 해도 아픈 물집을 지아가 터뜨리기까지 하고 약을 바르라고 하자 아무리 백호라도 내키지 않았다.“조금만 참아.”단호한 백호의 손길에 백채원은 고통의 눈물을 흘렸다.겨우 물집을 다 터뜨리고 옅은 푸른색 연고를 바르는데 마치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그 위에 고춧가루까지 한층 더 뿌린 것 같았다.“아악!”백채원은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이 고통으로 떨리고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이번에는 통증으로 곧바로 기절해 버려 욕을 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선생님, 어떻게 된 거예요?”지아가 천천히 대답했다.“제가 직접 만든 연고인데, 자극이 심하지만 가장 효과적이고 일반 약에 비해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어서 30분 이내에 다리의 변화를 볼 수 있지만... 대신 백채원 씨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올 거예요.”백호가 서둘러 물었다.“혹시 건강에 위협이 되지는 않나요?”지아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세상에 그런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아무런 대가도 없이 무언가를 얻을 수는 없죠.”그렇게 말하며 백씨 가문 사람들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 주머니를 꺼내 백채원에게 침을 놓기 시작했다.백채원을 위해 지아는 일반 침보다 몇 배나 굵은 침을 선택했다.“선생
“당신 대체 누구야? 할아버지, 저 이 사람한테 치료받기 싫어요.”백채원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이 여인에게서 자신에 대한 증오와 지아의 잔상을 보았다.지아는 그때 떠난 이후 소식이 끊겼고 누군가는 그녀가 오래전에 죽었다고 말했다.지아가 지금 어디에 있든 절대 이런 모습은 아닐 것이다.지아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전 단지 백채원 씨와 이 대표님 말씀을 듣고 제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뭘 그렇게 긴장하세요, 백채원 씨? 설마 떳떳하지 못한 짓이라도 했나요?”부모를 모두 죽인 백채원은 죽어서도 억겁의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채원아,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다른 의사 스케줄이 꽉 찼어. 우리도 오랫동안 연락해서 모셔온 분이니까 괜한 생각 말고 아파도 일어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며 조금만 참아.”“참으라고, 그럼 얼마나 더 참아야 해?”“3개월 정도 조리하면서 경과가 좋으면 시간을 더 줄일 수도 있어요. 조리가 끝나면 수술할 거예요.”“3개월이나!”백일 가까이 매일 이런 고문을 견뎌야 한다는 생각에 백채원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마침내 모든 침이 다리에 꽂히고 침을 놓을 때마다 극심한 통증이 몰려와 백채원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온몸은 땀을 뻘뻘 흘렸다.“30분만 있어요.”백채원은 백호에게 짓밟히는 게 지옥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 고통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날이 어두워지자 지아는 침을 뽑으며 당부했다.“앞으로는 내가 오기 전에 미리 발을 담그고 약을 발라요. 전 침만 놓을 테니까, 알았죠?”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부탁드리겠습니다. 시간도 늦었는데 식사하고 가시죠.”“네, 이번만이에요. 앞으로는 제 식사 준비할 필요 없어요.”지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가운 모습으로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인상을 주었다.“알겠습니다.”백호는 4억짜리 수표를 건넸다.“이건 진료비입니다. 제 동생이 일어설 수 있다면 그때 더 두둑이 챙겨드리겠습니다.”지아도 마다하지 않았다.“그러세요.”저녁 식사 자리에서 백채원은 일어날 기운이
줄곧 존재감이 없던 백호는 우연히도 이곳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고, 지아의 시선은 백호의 얼굴로 향했다.“내가 A시 사람인지 아닌지 백호 씨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요.”처음부터 지아가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인상을 준 것도 성가신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괜히 사람들과 엮이기 싫어서 성격 나쁜 이미지를 주려는 것이었다.하지만 자신이 부탁하는 입장도 아닌데 그 사람들 생각까지 신경을 써야 하나.백호가 머쓱하게 웃었다.“그렇죠, 다만 아직 3개월 정도 남았으니까 바네사 씨에 대해 좀 더 알아가다 보면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백호 씨가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는 진료하러 온 거지 친구 사귀러 온 게 아닙니다.”상대의 체면 따위 안중에도 없는 말이었다. 그래도 백씨 가문은 나름 재벌가 가문인데 의사인 그녀가 뭐라고?‘누구한테나 다 저러네.’지아가 백호에게 대꾸를 하자 백채원은 기분이 좋았다.백중권 말고 정상인 사람이 없는 식사 자리는 무척 어색했다.지아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가겠다고 했고 백중권은 도윤의 손을 잡으며 남아서 같이 술 한잔하자고 했다.도윤은 지아가 떠나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급해 중요한 일이 있다며 거절했다.그는 서둘러 달려 나가 지아가 차에 타기 전에 가까스로 붙잡고 그녀의 손에서 열쇠를 빼앗아 진봉에게 던졌다.그리고는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아를 자신의 차로 끌고 들어갔다.“도윤 씨, 그만 좀... 읍...”도윤은 거침없이 지아의 입술을 머금었고 앞에서는 진환이 운전을 하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도윤이 이렇게 대범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점점 더 멍청한 왕처럼 변해가고 있었다.“지아야, 장민호랑 좋은 시간 보냈어?”도윤이 지아의 입술을 깨물었다.두 사람이 친밀한 접촉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지아가 남자와 단둘이 있는 게 화가 났다.지아는 세찬이 알게 된 이상 도윤에게 숨길 수 없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그가 정민호가 장민호라는 걸 그렇게 빨리 짐작할 줄은 몰랐다.“
지아는 도윤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가장 친하던 형제는 자신 때문에 죽고 백채원을 보살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그런데 채원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아는 자신한테 이런 일이 생겼다면 도윤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채원은 조금씩 도윤의 인내심을 갉아먹었고 이제 도윤조차 채원을 방치했다.이 이름이 들리자, 도윤은 냉소를 터뜨렸다.“그 이름이 네 입에서 나오니 정말 역겨워. 내가 은혜를 갚을 상대는 전림이지, 네가 아니야. 그러니 백채원, 난 너한테 해줄 만큼 해줬다고 생각해.”도윤은 채원의 눈을 주시하며 천천히 말했다.“지아를 크루즈에서 밀던 순간, 넌 죽어 마땅했어!”그리고 차창을 올린 도윤은 빠르게 액셀을 밟고 떠났다.채원은 온 힘을 다해 달렸으나 결국 눈밭에 넘어지고 말았다. 손을 뻗어 도윤을 잡고 싶었지만 닿지 않았다.“도윤아, 제발 날 떠나지 말아줘. 내가 잘못했으니까 정말 잘못했으니까 제발 날 떠나지 마.”백호가 천천히 채원의 뒤로 걸어와 단숨에 그녀를 안아 들었고 귓가에 대고 말했다.“그러니 얌전하게 있으면 좋았잖아.”“이거 놔! 백호,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백호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나보고 떠나라고? 넌 꼭 이도윤이 아니면 안 되겠어? 그런데 네까짓 게 소지아의 눈곱만큼이라도 되는 줄 알아? 너 같은 사람이 한 트럭이라고 해도 이도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야.”정확하게 아픈 곳이 찔린 채원은 소리를 치며 현실 부정을 했다.도윤과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제 겨우 딱 한 발짝 남겨두었다!하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걸음이 잘못되었으므로 결과는 걷잡을 수 없이 뒤틀렸다.차 안의 도윤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지아를 품에 안은 채 냉기만 뿜을 뿐이었다.차 안이 너무 조용하자 지아는 손가락을 들어 도윤의 허리를 찔렀다.“말 좀 해봐.”“지아야.”도윤은 지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크루즈에서 떨어지던 날, 사실 나도 그 사람을 죽일 만큼 원망했
차는 집이 아닌 호텔을 향했다.엘리베이터에 오른 소지아가 물었다.“여긴 왜 온 거야?”도윤이 지아의 코끝을 긁으며 말했다.“그동안 너와 함께 있었던 시간이 너무 짧았어. 우린 부부였지만 보통의 커플보다도 못한 사이였지. 그러니 그동안 못했던 일을 하나하나 해보고 싶어.”밝은 조명이 도윤을 비추고 부드러운 시선은 지아를 향했다.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도윤이 어딘가 달라 보였다.이어 도윤이 허리를 숙이고 지아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100층이 넘는 건물에서 하면 더 짜릿할 것 같지 않아?”“...”‘이런.’도윤은 뻔뻔하게 지아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띵-하고 문이 열리는 순간 지아는 거의 떠밀리듯 엘리베이터에서 나갔다.방문이 열리고 지아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스위트 룸은 보이는 모든 곳이 장미로 장식되었고 카펫에도 장미꽃이 깔려있었으며 장미 향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지금...”도윤은 지아를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메이크업 지워. 키스하는 게 바람피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지아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지아는 메이크업을 지우고 샤워도 했다. 그리고 옷걸이에 걸린 드레스로 갈아입었다.도윤이 참 꼼꼼하다고 생각하며 지아는드레스를 입었고, 머리를 예쁘게 땋아 올렸다. 그리고 화장대에 있는 하얀색 베일을 발견했다.‘또 무슨 서프라이즈를 하려는 거야.’문을 열자, 방안의 모든 조명이 꺼졌고 장미꽃 위의 예쁜 별빛이 방안을 채웠다.지아는 어느 구석에서 사람이 뛰쳐나와 컨페티를 터뜨리지는 않을까 걱정했다.하지만 걱정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도윤은 꽃으로 만든 하트 위로 장미꽃 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지아는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 양팔에 팔짱을 끼고 말했다.“아니, 지금 촌스럽게 프러포즈 같은 걸 하려는 거야?”그 말이 끝나고 도윤은 바로 무릎 한쪽을 꿇고 말했다.“지아야, 우린 결혼식도 올리지 못했고 프러포즈도 하지 못했잖아. 이건 그냥 형식적인 거니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