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식당에서 지아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았다.프로필에 적혀있던 이야기들을 지아가 꺼내자 차가운 글자에 색을 입힌 듯했다.감정적인 부분에 이르러 지아의 눈가는 살짝 붉어졌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정민호 씨, 내 말 들어줘서 고마워요. 난 오랫동안 혼자 가족도 친구도 없이 지냈는데 가끔은 얘기하고 싶어도 얘기할 사람을 찾지 못해서 계속 그쪽에게 메시지를 보냈던 거였어요. 많이 귀찮았죠?”장민호는 지아가 왜 그렇게 말이 많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연달아 오는 메시지에 자신은 늘 차갑게 대했었다.어쩌면 지아에게는 그게 유일한 위안이었을지도 모르는데.“괜찮아요.”장민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입안에 쓴맛이 가득했다.이 세상엔 명이 고달픈 사람들이 참 많았다.“참, 그쪽은 한 번도 사생활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는데, 나이도 있어 보이는데 결혼하셨죠?”장민호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자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결혼을 하나, 타인도 자신도 해치는 짓인걸.게다가 아버지 때문에 그는 결혼이라는 걸 믿지 않았다.“나 같은 사람은 결혼할 자격이 없어요.”“왜요, 전 그쪽 괜찮은 사람 같은데요.”지아는 반나절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음식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비록 장민호는 여전히 유용한 정보를 많이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곁을 떠나지 않은 것만으로 이미 반은 성공이었다.미연의 복수를 제외하고도 전효로부터 당시 자신을 죽이려던 계획의 배후와 접촉한 사람은 장민호뿐이라는 말을 들었다.장민호를 통해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지아는 몇 년 동안 몰래 진실을 찾아다녔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방은 아주 고단수라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그래서 지아는 장민호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첫 번째는 장민호의 신뢰를 얻는 것이었는데, 장민호 같은 사람은 쉽게 누군가를 믿지 않기 때문에 지아는 2년이라는 시간을 미리 그에게 투자했다.식사를 마친 지아는 조금도 머물지 않고 물었다.“내가 데려다줄까요?
백씨 저택.집사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을 데리고 문 앞에 마중을 나왔고, 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자 다소 놀랐다.바네사처럼 대단한 의사라면 당연히 운전기사와 함께 이동해야 하는데, 차에는 여자 한 명만 타고 있었다.얼굴은 평범해 보였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비범했다.“바네사 씨인가요?”“왜요, 안 그래 보이나요?” 지아는 차 문을 닫았다.“아니요,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 아가씨 병을 봐주신다니 정말 영광입니다.”지아는 쓸데없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환자는 어디 있어요?”“이쪽으로 오세요.”백씨 가문은 규모가 컸지만 눈 때문에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이제 가문에는 백씨 가문의 친 자식도 아닌 백채원 한 사람만 남았고 어르신은 큰 충격을 받았다.그래도 홀로 백채원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봤던 어르신은 그녀를 집에서 쫓아내지 않았다.백채원은 비록 유산을 잃었지만 여전히 백씨 가문에서 예전처럼 먹고 자며 여전히 백씨 가문의 아가씨로 지내고 있었다.지아가 들어가자 낯선 남자가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바네사 씨,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동생 잘 부탁드립니다.”지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과거 백씨 가문에 이런 사람은 없었는데 옷차림으로 보아 백씨 가문의 후계자인 백호임이 틀림없었다.“별말씀을요.”백호는 갸름한 외모에 피부가 하얗고, 옛날 의상을 차려입으면 선비같이 단정한 얼굴이 전혀 세속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백씨 가문에는 방계가 많았고 그중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는 건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백씨 가문이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 쇠퇴하긴 했지만 백 어르신은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어 얕잡아 볼 수 없었다.오랜 세월이 지나 백채원은 지금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다.도윤이 그녀와의 결혼을 취소한 이후 목숨을 구해준 전림의 은혜를 생각해 복수는 하지 않았지만 상대하지도 않고 그대로 자멸하게 내버려두었다.하지만 지아는 과거 백채원이 자신에게 했던 일을 단 하루도
지아는 아직도 처음 만났을 때 튀어나온 배를 안고 도윤에게 기대어 있던 백채원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유람선에서 자신을 밀치기 전 백채원이 했던 말도 기억난다.“도윤 씨가 당신을 구할까, 나를 구할까?”그리고 막막한 순간에 전당포에 결혼반지를 맡길 때 고고하게 굴던 백채원의 모습도 기억났다.지아는 두 사람이 만나는 상상을 여러 번 했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아가씨! 세상에, 어쩌다 이런 일이... 당장 119에 신고할게요.”집사가 허둥지둥 말했다.방금 손목을 베인 백채원의 출혈량을 보고 지아는 서둘러 수건으로 상처를 막고 압박을 가하며 출혈을 멈추려 했다.“출혈이 심하지 않고 상처가 얕아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당신 누구야? 누가 오라고 했어, 꺼져!”백채원은 미친 듯이 몸부림쳤고 감정이 매우 불안정했다.발버둥 치다가 지아의 얼굴에 피가 뿌려졌지만 지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때렸다.“이제 좀 진정이 돼요?” 지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백채원은 낯선 사람이 감히 자신을 때렸다는 사실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사실 지아는 그동안 여러 번 뺨을 맞고 무릎까지 꿇고 얼굴이 망가질 뻔했는데 고작 따귀 한대가 뭐란 말인가.백채원이 가만히 있자 집사가 말했다.“아가씨, 이분은 다리를 전문으로 치료하는 의사니까 진정하세요. 어쩌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신 거예요, 어르신이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어요?”어르신을 언급하자 백채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그녀에게 진심으로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은 어르신뿐이었으니까.어르신은 백채원이 백씨 가문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내치지 않았고,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어르신의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남은 세월이 많지 않아 백채원이 이런 짓을 했단 걸 알면 정말 충격에 당장 돌아가실지도 모른다.지아는 차분하게 치료하며 집사에게 무언가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백호는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선생님, 비용이 얼마나
다실로 안내받은 지아에게 백호가 진작 준비해 온 자료를 건네주었다.“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그동안 제 동생이 받은 검사 결과예요.”두툼하게 쌓인 검사 결과지를 지아는 유심히 살펴봤다.“수술을 했어요?”“네, 하지만 효과가 별로 없어서 아직도 일어설 수 없어요. 제 동생 참 불쌍해요. 어린 나이에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졌고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셨고 결혼도 취소됐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겠어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구해 주셔야 해요. 동생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백채원의 방에서 콘돔을 보지 않았다면 지아는 정말 눈앞의 남자에게 속았을 것이다.‘겉으로 보기엔 참 좋은 사람인데.’백채원의 시중을 드는 건 전부 여자 가정부들이었고, 그녀를 아끼는 백중권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나.게다가 처음에 자신을 맞이하러 온 것은 집사이고 백호는 나중에 왔으니 분명 그 일로 바빴던 것이다.이런 위선자들을 지아는 오래전부터 많이 보아왔다.지아는 최근 검사 결과를 보며 결론을 내렸다.“치료할 수 있어요.”“정말요?”“네, 뼈가 회복된 정황으로 보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수술과 더불어 침을 맞으면 길어야 3개월이면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아요.”“다행이네요. 역시 선생님처럼 유명한 의사는 치료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남자의 얼굴이 매우 행복해 보였다.“물론 검사 결과만 보고 판단한 것이고 정확한 진단을 하려면 몸 상태를 봐야 해요.”“네, 일단 차부터 마시면서 동생이 조금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검사해도 늦지 않아요.”“안 급해요, 기다릴 시간은 충분해요.” 지아는 천천히 차를 마셨다.몸에 생긴 악성 종양을 치료하고 다시 태어난 듯 지아에게는 이제 천천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생이 주어졌다.잠시 후 집사가 와서 보고했다.“아가씨께서 준비 다 됐으니 가서 좀 봐주세요.”지아가 다시 백채원에게로 갔을 때 옆에는 백중권도 있었다.몇 년의 시간이 흘러 그도 꽤 나이를 먹었다.백채원이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을
지아가 떠난다는 말을 듣자마자 백씨 가문 사람들은 초조해졌다.“안 돼요, 안 돼. 어렵게 찾았는데 이대로 가면 안 되죠. 내 손녀의 다리가 선생님께 달렸는데요.”백중권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선생님, 아가씨 다리부터 살펴봐 주세요. 아가씨, 아까 말씀드린 바네사입니다. 의술이 뛰어나고 여러 분야에 정통한 이분이 방금 아가씨가 일어설 수 있다고 하셨어요.”그러자 백채원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정말? 제가 일어설 수 있어요?”“그쪽이 잘 협조해야죠.” 지아가 덤덤하게 말하자 백채원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지아가 방금 자신을 때렸다는 사실도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알았어요, 협조할게요, 꼭 협조할게요.”“백채원 씨, 오늘 한 말 기억해 두고 후회하지 마세요.”“어떻게 후회하겠어요, 저를 치료해 주신다면 뭐든지 할게요.”“알았어요, 그럼 먼저 진찰을 해볼 테니 침대에 누우세요.”백호가 말했다.“제가 할게요.”그리고는 백채원 옆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으려는데 백채원의 얼굴에는 백호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이 가득했고, 그가 만질 때 몸이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무서운 거다.이 사실을 깨달은 지아는 평생 거만하게 살아온 백채원이 다른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게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두 사람의 관계가 더욱 흥미로워졌다.지아가 파자마 바지를 벗기자 오랫동안 걷지 못해 다리가 많이 쪼그라들었다.부모님을 모두 돌아가시게 한 장본인인데 그깟 다리가 쪼그라든 게 뭐 그리 대수일까.백채원이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다리를 주무르던 지아의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됐어요, 뭐가 보여요?”“별거 아니에요.” 지아는 덤덤하게 손을 뺐다.“다리 치료할 수 있어요. 수술 전에 매일 다리의 신경을 자극하는 침을 놓아야 해요.”“좋아요! 나 돈 많으니까 내 다리를 치료하는 데 필요한 건 뭐든지 줄 수 있어요.”백채원은 다소 미친 것처럼 보였다.“할아버지, 얼른 나가세요. 곧 도윤 씨가 올 텐데 지금 이런 모
도윤은 빨리 왔고 지아는 다음 날 다시 오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윤을 만나면 좀 이상할 것 같았다.하지만 백중권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도 전에 도윤이 서둘러 도착했다.백채원이 저지른 일 때문에 백정일 부부와 소계훈이 죽음에 이르자 백중권도 어쩔 수 없이 불리한 입장이라 도윤의 뜻대로 결혼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백채원은 지난 몇 년 동안 돌이키고 보상하려고 노력했지만 도윤에게 차단당해 연락할 수가 없었다.어렵게 도윤을 다시 만나자 백중권 역시 기대가 컸다.만약 도윤만 꺼리지 않는다면 백씨 가문의 후계자로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다.집사에게 미리 소식을 들은 백채원은 감격에 겨워 얼굴을 치장했고 할아버지에겐 차마 알리지 못했다.이미 부모님과 백정일을 모두 죽였으니 유일하게 자신에게 잘해준 할아버지까지 죽일 수는 없었다.백호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지난 몇 년 동안 마음대로 그녀를 탐했다.유미도 그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빨리 나 좀 밀어줘. 도윤 씨가 왔어.”지아가 베란다에서 눈을 감상하고 있을 때 양복 입은 남자가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들어왔다.백채원은 지난 몇 년 동안 기사로만 도윤의 소식을 접하다가 그를 실제로 보는 순간 마음속의 감정이 극도로 복잡해졌다.반갑고 설레는 마음에 다리를 다친 것도 잊은 채 도윤을 향해 달려가다가 그만 바닥에 딱 주저앉고 말았다.복잡한 감정은 입가에 뱉은 세 글자로 바뀌었다.“도윤 씨...”하지만 도윤의 관심은 전혀 그녀에게 있지 않았고 백채원을 지나 곧장 지아에게로 향했다.비록 지아의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도윤은 익숙한 눈빛을 마주했을 때 백채원과 같은 감정을 느꼈다.지아에 대한 사랑과 그녀가 다시 그의 삶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윤아, 드디어 왔구나.” 백중권의 목소리에 도윤이 정신을 차렸고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태연하게 말했다.“어르신, 오랜만인데 여전히 정정하시네요.”백중권은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저었다. 그 망할
도윤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흥미를 보이는 듯 말했다. “바네사 씨는 젊고 재능도 있는데 결혼하셨나요?”지아가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현명한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 않죠.”백채원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도윤은 자신을 보러 온 게 아니었나, 그런데 왜 낯선 여자가 결혼했는지 묻는 걸까.하지만 도윤이 오랫동안 자신을 무시하다가 겨우 찾아온 것이기에 그에게 밉보일 수 없었던 터라 그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도윤 씨...”도윤은 그제야 자신이 백채원을 빌미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백채원에게 시선을 돌렸다.몇 년이 지난 후 백채원은 많이 핼쑥해져 병들어 창백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전림을 생각해서라도 동정심이 생겼을 텐데, 그동안 지아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동정심은 조금도 없이 냉정하게 물었다.“오랜만이네, 어떻게 지냈어?”어떻게 지냈냐고? 암울한 그녀의 삶은 하루가 일 년 같았다.하지만 백채원은 눈물을 흘리며 또박또박 말했다.“나, 난 괜찮아요.”“대표님 걱정 마세요. 동생은 제가 잘 돌보고 있으니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백호가 입을 열며 도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백씨 가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윤은 뻔히 알고 있었고, 기억 속 어렸을 때 깡마르고 병약했던 모습이었던 백호가 이젠 어엿한 가주의 모습으로 성장할 줄은 몰랐다.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기에 도윤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어르신은 기뻐하셨다.“도윤이가 오랜만에 와서 부엌에 음식 준비하라고 해 뒀다.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술 한잔하자.”도윤은 난감한 상황에서 지아를 돌아보았다.“바네사 씨는 의술이 뛰어나다고 하던데 백채원의 다리도 고칠 수 있나요?”지아는 분명 좋은 사람이 되려고 여기 온 게 아니라 자신만의 계획이 있었다.“고칠 수 있어요.” 지아가 덤덤하게 말하자 도윤은 또 칭찬을 퍼부었고 그가 아부하기 전에 지아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오늘부터 바로 침놓아도 돼요.”
백채원은 뜨거움에 욕설을 퍼부었지만 스스로 다리를 고칠 능력은 없었기에 불쌍한 처지를 한탄하며 울면서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내가 왜 이런 고생을.’백중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얘야, 조금만 참아. 다시 일어서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할아버지, 너무 뜨거워요. 정말 너무 뜨거워요. 피부에 물집이 잡힐 것 같아요. 안 할래요, 너무 뜨거워요. 어디서 온 돌팔이 의사야, 난 당신한테 원한이 없는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도윤 씨, 나 좀 살려줘요.”도윤과 지아가 밖에서 다과를 먹으며 눈을 감상하는 동안 안방에서는 백채원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백씨 가문도 소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눈이 오면 경치가 아름다운 고풍스러운 별장이었다.백씨 가문 사람들은 백채원을 말리기 위해 집 안에 있었고 밖에는 지아와 도윤 둘뿐이었다.도윤은 지아에게 정신이 팔려 백채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그는 포도 껍질을 벗겨 지아의 입에 건넸다.“포도 먹고 기분 풀어.”이미 까진 포도고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지아는 거절하지 않았다.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사람들이 나올 테니까.지아가 입을 벌려 한입 베어 물자 도윤의 손끝이 혀끝을 부드럽게 쓸었다. 거친 손끝을 스치는 촉촉한 부드러움에 두 사람 모두 가슴이 떨렸다.‘이런 개자식, 여기가 어디라고.’지아는 불쾌한 기분이 들어 화를 내며 그를 노려보았다.도윤은 방금 지아가 머금었던 곳을 야릇하게 핥았다.“포도가 꽤 다네.”그 행동에 마치 그 옛날 나라를 망하게 했던 요물 후궁이 떠올랐지만 양복을 입은 도윤의 금욕적인 표정이 더 도발적이었다.무의식적으로 포도를 한입 베어 물자 과즙이 입가에 살짝 흘러내렸고, 도윤은 한 손으로 소파를 지탱한 채 다른 한 손으로 지아의 턱을 들어 올려 키스를 했다.지아의 눈이 커졌다.‘이 개자식이 지금 뭐 하는 거지?’자신은 복수하러 왔는데 도윤은 몰래 사랑을 나누러 온 건가?하여튼 뼛속까지 음흉한 남자다.남자의 혀가 부드럽게 감겨오며 두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