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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 화

작가: 설원
그러자 장 어멈이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아가씨, 그게… 진심인가요? 하지만 전에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장군과 마님부터 뵙고 싶다고 했잖아요?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꾼 거죠?”

이경낙은 산에서 내려올 때부터 친부모를 뵙기에 급급했다.

그랬던 그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으니 의심이 가는 것도 당연했다.

이경낙이 짧은 한숨을 내뱉은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아까 오면서 꿈을 꾸었답니다. 꿈에 백발 어르신이 나오셔서 저를 엄청 혼내더라구요. 은혜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이라면서요. 제가 신분을 회복하고 본가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할머니 덕분인데… 제가 잠시 기쁨에 취해 그걸 잊고 있었네요.”

“꿈에서 깬 후에 많이 반성했어요. 어멈, 제가 전에는 어리석어서 빨리 신분을 되찾고 싶은 마음에 너무 서둘렀던 것 같아요. 하지만 예의법도 대로라면 응당 할머니부터 먼저 찾아뵜어야지요. 할머니 아니었으면 지금도 저는 산골에서 농사나 짓고 있었을 거예요. 어쩜 나이가 좀 더 들면 노총각한테 팔려 가서 비참한 생을 살았을지도 몰라요. 저에게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할머니 덕분인 것이죠.“

이경낙의 말을 들은 장 어멈은 그제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송관은 여기서 멀지 않으니 한 시진 정도 더 가면 도착합니다. 아가씨께서 그리 원하신다면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다만 노부인께서 아가씨를 만나주실지는 확답 드릴 수 없어요.”

남자 시종과 마부는 마땅치 않아 했지만 장 어멈의 위엄이 있었기에 그들도 차를 돌려 청송관 방향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차가 청송관 앞에 멈추자, 이경낙은 차에 내리자마자 눈앞의 도관을 바라보았다.

이번 생은 지난 생과 다를 거라는 것을 직감하며 기대를 안고 찾아왔건만 노부인은 끝내 그녀를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아가씨, 노부인께서는 아가씨의 마음은 알겠다시면서 저택으로 이만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아가씨와 동행하여 아가씨가 저택에 적응하실 때까지 함께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경낙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시에 놀라웠다.

지난 생에 장 어멈은 그녀와 함께 저택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가 적응할 때까지 함께한다고 한 적도 없었다.

‘그냥 도관에 들렀을 뿐인데도 노부인께서 이렇게 배려를 해주실 줄이야.’

어쩌면 노부인은 이씨 가문 사람들과는 좀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장 어멈,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그저 진심으로 할머니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할머니께서 절 만나주시길 원치 않으신다면 그분의 마음이 내키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어쩜 여기 오래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니 어멈이 수고 좀 해주셔야겠어요.”

이경낙은 서툴지만 정성을 다해 장 어멈에게 예를 취했다.

그러자 장 어멈은 포기를 모르는 그녀의 모습에서 젊은 시절 노부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용기가 과연 며칠이나 갈지 의구심이 들었다.

이경낙이 도관에 머무른다고 하자 장군부의 시종과 마부는 가만히 대기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마부는 저택에 소식을 전한다고 금릉으로 돌아가 버린탓에 어린 남자 시종만이 이곳에 남았다.

이경낙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내가 안 돌아가니 자살 연극을 할 수가 없어서 조바심을 태우겠지?’

지난 생의 이경주는 이 날 유서 한 장을 남기고 방에 불을 질렀었다.

저택의 십여 채나 되는 안방을 태우고 불에 탄 시신을 남긴 후에 사라졌다.

그 후로 이씨 가문 전체는 비통에 잠겨 눈물로 매일을 보냈었다.

이경낙은 자신이 집에 돌아가지 않고 있었는데, 이경주가 과연 또 자살 연극을 펼칠지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이경낙은 취아를 시켜 금릉성의 소식을 살피라고 전하고는 도관에서 편하게 자리잡았다.

그렇게 3일이 지났는데도 노부인은 여전히 그녀를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노부인의 거처는 죽림 뒤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입구에 나이 든 어멈들이 지키고 있어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이경낙도 억지로 밀고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장 어멈은 매일 그녀를 보러 왔다.

이경낙은 종이와 붓을 빌려 매일 방 안에서 한 시진씩 글쓰기 연습을 했다.

하지만 붓대를 처음 잡는 그녀였기에 글씨는 아주 엉망이었다.

장 어멈은 그녀가 쓴 연습장을 몰래 챙겨 노부인에게 가져갔다. 연습장을 본 노부인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푸흡!”

옆에서 시중을 들던 시종 앵아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노부인, 이 글씨 좀 보세요. 꼭 지렁이 같네요. 크기도 다 다르고요.”

노부인은 홧김에 연습장을 큰소리 나게 협탁에 내려놓았다.

“누가 웃으랬어!”

앵아는 그제야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연습장을 넘기자 더 엉망인 글씨가 눈에 들어와, 노부인의 입가에는 경련이 일었다.

장 어멈은 앵아를 흘기며 호통쳤다.

“어디 감히 네가 낄 자리라고! 당장 나가 있거라!”

앵아가 나가자마자 장 어멈이 노부인에게 말했다.

“노부인,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아가씨께서 이런 결심을 내린 것만으로도 갸륵하지 않습니까. 어릴 때부터 붓 대신에 도끼와 낫을 들고 농사일을 하던 분입니다. 노부인께서도 그 손을 보시면 마음 아파하실 거예요. 저택에서 허드렛일 하는 시종의 손보다 더 투박했어요.”

“올해 나이 겨우 열여섯입니다. 원래대로라면 귀하게 태어나 대접 받으며 자랐어야 하는 분이 글공부도 못하고 고된 일만 하며 살았으니... 하지만 벽에 쓰여진 글씨를 본받아서 쓰시는 걸 보고 저는 감명받았답니다. 비록… 좀 못쓰긴 했지만 용기를 내서 시도했다는 것이 귀하지 않습니까?”

노부인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 어멈은 그 아이가 참 마음에 들었나 보군. 이리도 그 아이 편을 들어주는 걸 보면 말이야. 용기가 있는 아이인지는 더 지켜봐야 알 일이야.”

“이 글씨는 정말 눈 뜨고 봐줄 수 없군. 저기 장롱 안에 계몽 책자가 있으니 그걸 꺼내 가져다 주거라. 막무가내로 연습만 하다가는 종이가 다 아깝군.”

그러자 장 어멈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노부인은 인자하신 분이시라 후배를 아끼신다는 것 잘 압니다. 그 책자는 장군님을 위해 준비하셨던 것 아닙니까? 안타깝게도 그땐 쓰임새를 다하진 못했지만….”

노부인의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지자 장 어멈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책자를 꺼내 이경낙에게로 가져갔다.

이경낙은 갑자기 찾아온 기쁨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두 손으로 책자를 받은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장 어멈은 자리를 뜨는 대신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노부인께서 왜 이곳 청송관에 상주하시면서 장군부에는 안 돌아가시는지 모르지요?”

지난 생에 이경낙은 장군부에서 얼핏 과거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장 어멈은 며칠간 노부인을 꼭 뵙고자 하는 이경낙의 진심을 지켜보자, 결국 그녀에게 과거 장군부에서 있었던 진실을 이야기해 주기로 했다.

노부인은 개국장군가 배씨 가문의 여식으로, 어릴 때부터 글공부보다는 검을 갖고 놀기를 더 좋아했다.

37년 전, 배씨는 이씨 가문에 시집을 와 이경낙의 아버지 이조정을 낳았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 변방에서 이조정의 아버지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행방불명 되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부군을 구하고 전세를 역전하기 위해 배씨는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남긴 채, 갑옷을 입고 전장에 지원을 나가게 되었다.

이조정은 이 노장군의 첩실이었던 등씨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배씨가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이조정은 등씨를 친어머니라고 부르며 배씨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비록 배씨는 흔들리지 않을 막강한 지위를 얻게 되었지만 유일한 적장자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그 후에 그녀는 어떻게든 틀어진 아들과의 사이를 복구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들마저도 끝내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노부인이 아프다고 하면 이조정은 문안 인사 정도는 왔지만 등씨가 아프다고 하면 친히 약을 달이고 대접하는 등, 두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

이런저런 일들이 쌓이다 보니 배씨도 속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등씨가 이간질하여 아들이 친모인 자신과 멀어졌다고 여겼다.

그래서 등씨를 불당으로 보내든가 처리하려고 했으나, 이조정은 목숨 걸고 이를 반대했다.

그는 이대로 자신들 모자를 갈라놓는다면 평생 증오할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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