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민은 그 말을 듣고 나서 바로 그녀를 제지했다.“안 돼! 박민정에게 말하면 나... 나 당신 앞에서 죽어버릴 거야.”한수민은 이 방법으로 간병인을 협박할 수밖에 없었다.간병인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렇다고 계속 박민정 씨를 속일 수는 없잖아요. 지금 사모님이 누리고 있는 모든 건 박민정 씨가 제공한 거잖아요. 양심이 있다면 진실을 얘기해요.”한수민은 간병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감히 진실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내가 죽기 전에 말할게.”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두원 별장에 도착하자 추경은이 돌아온 걸 발견했다.어제 클럽 갔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얌전하고 착한 모습이었다.추경은의 얼굴에는 아직도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어젯밤 민수아가 꽤 세게 때린 모양이었다.“새언니, 돌아오셨어요? 어제 친구에게 아이 돌보는 방법을 배우러 가서 늦게 돌아왔어요. 윤우를 더 잘 돌봐야죠. 설마 화가 나신 건 아니죠?”박민정은 의아해서 물었다.“경은 씨 친구도 아이가 있어요?”“네. 나이가 비슷한데 아들이 네 살이거든요.”추경은 거짓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었다.“그랬군요. 수고 많았어요.”박민정이 말했다.“아니에요. 수고는 무슨.”추경은은 박민정을 속였다고 생각해 저도 모르게 코를 만졌다.옆에서 과일을 먹고 있던 박윤우도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눈치챘다.“경은 이모, TV에서 심리학자가 말한 걸 봤는데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 하는 움직임이 있대요. 경은 이모가 계속 코를 만지고 있던데 거짓말을 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추경은은 코를 만지던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럴 리가 있겠어?”그녀는 또 손에 있던 물컵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박윤우는 조용히 그녀를 보며 또 말했다.“참,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물을 마시면서 자신을 감추려고 한다고도 했거든요.”“...”할 말을 잃은 추경은은 물컵을 내려놓았다.박민정은 제 발 저린 추경은을 보고 웃음
밤이 되었다.추경은은 침대에 누워 잠들었는데 갑자기 방 안에서 ‘따르릉’ 소리가 울렸다.깜짝 놀라 잠에서 깬 그녀는 불을 켰는데 그 소리는 다시 사라졌다.“이상하다. 꿈인가?”추경은은 불을 끈 후 다시 잠들었다.그런데 한 시간쯤 지나서 다시 막 잠들려는 순간 ‘따르릉’ 소리가 또다시 울렸다.이번엔 꿈이 아닌 게 확실했다.“어디서 난 소리지? 설마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인가?”추경은은 휴대폰 전원을 끈 후 다시 잠을 청했다.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갑자기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우우...”비몽사몽한 추경은은 등골이 오싹해졌다.놀라서 깨어난 그녀는 더 이상 잠들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몸을 움츠렸다.“설마 귀신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추경은은 결국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다음 날, 박민정이 아침을 다 먹고 출근 준비를 할 때까지도 추경은은 깨어나지 못했다.박민정은 똑같이 되갚아주기 위해 혼자 회사로 가는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경은 씨가 너무 깊이 자서 깨우기가 미안하네. 오늘도 혼자 출근하는 날이네요.]박민정은 고영란이 한가할 때 SNS를 자주 확인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자질은 그녀도 할 수 있었다.박민정은 이 게시물을 고영란에게만 보이도록 설정했다.추경은은 고영란의 연이은 전화벨 소리에 겨우 깨어났다.전화를 받자마자 그녀의 본성이 드러났다.“누구야? 왜 자는데 방해를 해?”“10시인데 아직도 자고 있어?”고영란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고영란이 추경은더러 박민정과 함께 회사로 출근하라고 한 이유는 임신한 박민정을 잘 돌보라는 뜻이었지, 두원 별장에서 편하게 지내게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추경은 고영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휴대폰을 보니 정말로 10시가 넘었다.어젯밤 방 안에서 계속 소리가 나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이모, 죄송해요. 지금 바로 일어날게요.”추경은은 급히 일어나 방 안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이상한 소리가 어디서 났는지 찾기 시작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리 찾
박민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박민정?”유남준은 확신이 없었는지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무슨 일이에요?”박민정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유남준은 이 번호 주인이 박민정인 걸 확인하고는 조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호산 그룹에 출근하지 마.”“왜요?”박민정은 황당할 뿐이었다.호산 그룹에서 일하면 월급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으면서도 회사를 운영하는 지식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이유는 없어. 그냥 내 말 들어.”유남준이 말했다.박민정은 그의 말투를 듣고 그가 아직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는 걸 직감했다.“이유도 말하지 못하면서 내가 왜 남준 씨 말을 들어야 해요?”‘아직도 내가 옛날의 박민정으로 알고 있는 거야?’“다른 일 없으면 먼저 끊을게요.”박민정은 유남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전화를 끊었다.유남준은 끊긴 휴대폰을 바라보며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다.그의 옆에 있던 서다희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힘이 빠진 채로 의기소침해 있었다.서다희는 오늘도 민수아와 제대로 얘기를 나누지 못했는데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기 앞에서 애교를 부리던 약혼자가 이틀 전 밤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것일까?“겁이 없네. 감히 내 전화를 끊어?”유남준이 말하고는 또 서다희에게 물었다.“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도 이랬어?”서다희는 의문스러운 얼굴을 보였다.“네? 누가요?”“너 요즘 도대체 왜 이래?”유남준은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다 변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서다희마저 변해버린 듯했다.서다희는 유남준이 화를 내자 어쩔 수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대표님, 요즘 여자친구가 이유도 없이 외박을 하거든요. 걱정이 돼서 그러는데 오늘 하루 휴가를 내도 될까요?”유남준은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여자 문제였다.“가.”“대표님, 감사합니다. 빨리 처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서다희는 외투를 챙기고 서둘러 자리를
서다희는 제자리에 얼어붙었다.추경은을 만나러 간 게 민수아에게 들켰을 뿐만 아니라 사진까지 찍혔다니.[수아 씨, 내가 설명할게.]문자를 보냈지만 카톡도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서다희는 곧바로 민수아 회사로 향했다.회사 안.민수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끝까지 사실을 말하지 않는 서다희에게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민수아가 다니는 회사는 크지 않고 경비도 허술했다.서다희는 곧바로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민수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수아 씨, 내 말 좀 들어봐.”민수아는 깜짝 놀랐다.주변 동료들이 모두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서다희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사람이 없는 곳에 도착하자 서다희는 바로 그녀에게 사과했다.“수아 씨, 미안해. 거짓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냥 수아 씨가 화낼까 봐 솔직히 말할 용기가 없었어.”‘내가 화낼까 봐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고?’민수아는 더 화가 났다.“그럼 나도 밖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희 씨 화낼까 봐 그 사실을 숨기면 받아들일 수 있겠어?”서다희는 자신이 처음에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민수아의 말을 듣고 나서 죄책감이 밀려왔다.“당연히 안 되지.”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민수아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다희 씨가 그렇게 했잖아. 다를 게 뭐가 있어? 내가 화낼까 봐 나한테 말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돼? 내가 한밤중에 다른 남자와 몰래 만나서 포옹했는데 다희 씨에게 말하지 않으면 다희 씨는 어떻게 할 건데?”서다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는 그 남자를 절대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미안해, 수아 씨. 이번엔 정말 내가 잘못했어.”처음에는 추경은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민수아의 말을 듣고 나니 서다희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다.“나를 믿어줘. 정말 포옹한 적은 없어. 그 사람이 갑자기 와서 안겨서 나도 어떻게
서다희는 감정에 있어서 아직도 서툴렀기 때문에 민수아가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민수아는 더 이상 그와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회사로 돌아가려 하자 서다희가 따라오려고 했다.민수아는 바로 단호하게 말했다.“나랑 친구도 안 하겠다는 거지?”서다희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아니, 그런 건 아니야.”그는 이제야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았다.하지만 민수아는 쉽게 그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지금 용서하면 다음엔 또 다른 여자와 껴안을 수 있으니 말이다.사무실로 돌아온 민수아는 마음이 울적했는데 이 모든 걸 믿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서다희와 사귄 이후로 이 도시를 오게 되었기 때문에 친구가 별로 없었다.헤어지겠다고 말은 했지만 막상 이사하면 어디서 살아야 할지조차 막막했다.그러다 민수아는 문득 박민정을 떠올렸다. 주저하다가 끝내 박민정에게 문자를 보냈다.[민정아, 혹시 어디에 방을 빌릴 수 있는 곳을 알고 있어?]민수아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다.박민정은 예전에 재벌가의 아가씨였고 지금은 재벌가의 사모님이라 방을 빌릴 수 있는 곳을 알 리가 없었다.문자를 삭제하려고 하던 찰나, 박민정의 답장이 도착했다.[서 비서님이 너를 내쫓았어? 그 녀석 진짜 나쁜 놈이네!]박민정은 민수아와 서다희가 결혼을 앞두고 있어 지금 동거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서 비서님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쓰레기네. 자기가 한 일이 들켰으니까 수아를 쫓아내려는 거야?’[그게 아니라 내가 자진해서 나가려고 하는 거야. 계속 같이 살면 내가 너무 자존심 없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서.]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내가 빈집이 하나 있는데 괜찮다면 거기서 지내도 돼.]박씨 가문의 옛 저택은 현재 청소부가 가끔 가서 청소할 뿐,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상태였다.민수아가 그곳에 살면 집에도 온기가 더할 것 같았다.[정말? 그럼 내가 월세를 내고 살면 안 돼?][그래. 진주시 평균 월세로
하지만 택시가 멈춘 뒤, 서다희는 택시에 타고 있던 사람이 민수아가 아닌 것을 발견했다.“젠장!”그 순간에도 추경은은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왔다.그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경은 씨,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추경은은 서다희의 냉랭한 목소리에 당황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다희 오빠, 자고 있어요?”“아니요.”‘덕분에 오늘 밤은 아예 잠도 못 잘 것 같다고.’추경은은 이어서 말했다.“어젯밤에 별장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거든요. 좀 무서워서 그러는데 오빠가 남준 오빠에게 나 좀 데려가달라고 말해줄 수 없어요?"서다희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대표님께 직접 전화해 보세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끊을게요.”추경은은 끊긴 전화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문득 전날 밤 민수아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혹시 민수아가 서다희에게 모든 것을 말한 건가?’추경은은 서다희에게 먼저 고자질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민수아에게 맞았던 얼굴 사진을 찍어뒀었다.서다희는 민수아에게 안전하게 도착했는지 묻기 위해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그 순간 추경은이 또다시 사진을 보내왔다.사진 속 추경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었다.서다희는 처음에 그 사진을 보고 박민정이 때린 건 줄 알아 너무하다고 생각했다.곧이어 추경은이 또 문자를 보내왔다.[사실 다희 오빠에게 말하지 않은 일이 있어요. 우리가 저녁을 먹은 그날 밤에 다희 오빠 여자친구를 만났거든요. 여자친구분이 우리 사이를 오해했는지 저를 때렸어요.]서다희는 추경은의 뺨을 때린 사람이 민수아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민수아와 추경은이 나눈 대화 녹음 파일을 듣지 않았다면 그는 민수아가 예의 없이 사람을 때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제 그는 추경은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경은 씨, 증거가 있나요?]서다희가 문자를 보냈다.[증거 있으면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을
민수아는 진심으로 박민정에게 고마움을 느꼈다.박민정도 그녀를 도와준 기분이 들어 만족스러웠다.전화를 끊은 후, 박민정은 추경은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기 앞을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추경은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박민정을 바라보며 물었다.“새언니, 저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뭔데요?”“서 비서님의 약혼녀를 아세요?”추경은은 서다희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분명 민수아가 무슨 말을 했기 때문에 서다희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왜 그래요? 서 비서님 약혼자는 왜 찾아요?”추경은은 자리에 앉은 후 박민정에게 말했다.“새언니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 정말 무례하거든요. 며칠 전에 만났는데 너무 거만했어요.”추경은은 박민정에게 민수아에 대한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은 관심 있는 척하며 물었다.“정말이요? 그 여자가 어떻게 했는데요?”“새언니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하더라고요. 새언니는 대표님과 어울리지 않는다면서요. 그리고 서다희 오빠도 새언니 뒷담화를 했다고 했어요. 새언니는 할 줄 아는 게 없으면서 사모님 자리만 차지한다고요.”추경은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이어갔다.박민정은 추경은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 자리에서 일어섰다.“나 쉬러 갈게요. 경은 씨도 일찍 자요.”추경은은 방을 바꿨지만 어젯밤의 이상한 소리가 여전히 두려웠다.“새언니, 저랑 같이 자면 안 돼요? 저 너무 무섭거든요.”“미안한데 난 낯선 사람과 함께 자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박민정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추경은은 차갑게 박민정을 쳐다보다가 결국 윤우를 돌보는 가정부와 함께 자려고 했다.가정부는 추경은이 착한 사람이라 생각해 동의했다....한편, 에리는 신곡 녹음을 마치고 박민정과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았다.박민정은 회사에 휴가를 내고 에리를 만나러 가려고 했지만 추경은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새언니, 어
박민정은 공정한 경쟁을 위해 본명으로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진서연은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고는 말했다.“보스님, 너무 착하신 거 아니에요? 어떤 사람들은 1등을 차지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요.”대회 참가 신청이 완료되었다.윤소현은 협력할 작곡가를 찾기 위해 이번 대회를 눈여겨보고 있는 것을 박민정은 알지 못했다.윤소현은 참가자 명단을 확인하다가 박민정이라는 이름에 눈길이 멈췄다.“박민정?”그녀는 즉시 비서를 불러 지시했다.“주최 측한테 이 박민정이라는 참가자의 자료를 구해와.”물론 동명이인일 수도 있었다.윤소현은 박민정이 난청 환자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작곡도 할 줄은 몰랐다.잠시 후 비서가 돌아왔다.“아가씨, 주최 측에서는 이 박민정이라는 참가자가 한 유명 작곡가의 추천으로 참가했다고만 했고 신원 정보 외에는 별다른 자료가 없다고 합니다.”“사진 있어?”비서는 고개를 저었다.윤소현은 비서가 정보를 얻어오지 못한 것에 화가 났다.“도대체 너는 뭐 하는 거야? 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해?”윤소현은 어려서부터 예쁨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비서는 감히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다.“박민정을 주의 깊게 지켜봐.”윤소현이 또 말했다.“알겠습니다.”만약 정말 그녀가 알고 있는 박민정이라면 재미난 구경이 날 것이 분명했다.“참, 한수민 쪽은 무슨 소식 없어?”“박민정 씨가 간병인에게 돈을 줘서 아직도 사모님을 돌보고 있는 모양입니다.”비서가 대답했다.윤소현은 한숨을 쉬었다. 정수미는 그녀에게 한 달의 시간을 주었지만 한수민과의 관계를 그렇게 빨리 정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점점 불러오는 배를 보며 윤소현은 유남우가 언제 자신과 결혼할지 몰라 초조했다.그녀는 될수록 빨리 유씨 가문에 시집가야만 했다. 시간을 끌수록 상황은 점점 더 불리해질 것이다.게다가 이 아이는 유남우의 아이가 아니었다.그러던 중, 전화가 갑자기 걸려 왔다.휴대폰을 확인하니 최현아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최현아와 박민정의 아들들은 물과 기름처럼
박민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좋아요, 신고해요. 경찰이 와서 모든 걸 조사하게 해요. 제가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은 겁니다!”그녀는 나쁜 짓을 하기 않았기에 당당했다.윤소현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려 했지만 고영란이 그녀를 막아섰다.“소현아, 분명 이건 오해가 있을 거야. 민정이가 그렇게 어린 아이를 해칠 리가 없잖니.”정수미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우리 모두 한 가족인데 경찰까지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니?”그러나 윤소현은 눈가가 붉어진 채 항의했다.“엄마, 지금 제 딸이 이런 상태인데도 엄마는 저를 외면하시겠다는 거예요? 우리 아이 편을 들어주실 생각은 없으세요?”박민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그만해요. 차라리 신고해요.”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경찰 조사를 통해서뿐이었다.윤소현은 사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 없었다. 아이의 일은 박민정과 무관했으며 그녀 스스로 꾸며낸 일이었기 때문이다.“민정아, 흥분하지 마. 우리 가족 일이니 우리끼리 해결해.”정수미가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윤소현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비꼬듯 말했다.“좋아요. 우리끼리 해결하죠.”“그럼 말해봐, 박민정. 내 딸이 이렇게 됐는데 넌 어떻게 책임질 거야?”“제가 한 일이 아닌데 왜 제가 책임져야 하죠?”박민정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되묻자 윤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지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야? 우리 다혜는 늘 멀쩡했어. 그런데 네가 안은 뒤로 이렇게 됐다고!”박민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말했잖아요. 전 그런 적 없어요!”그녀는 어린 다혜가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걸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런데도 윤소현은 여전히 공격적이었다.“엄마, 보셨어요? 얘는 끝까지 오리발만 내밀잖아요!”정수미는 한숨을 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유다혜는 너무 어리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고영란이 오늘 아이를 돌본 보모를 불러왔고 보모는 떨
박민정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일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박민정은 고영란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해 윤소현이 말한 병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윤소현이 병실에서 달려나오더니 곧장 박민정에게 달려들었다.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 주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박민정 역시 피할 겨를이 없었고 결국 윤소현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세게 내려앉았다.뜨겁게 달아오르는 통증이 얼굴을 타고 번졌다. 그러나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 박민정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박민정도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고 그렇게 둘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고영란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도저히 가로막을 수 없었다.“박민정, 네가 어떻게 다혜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다혜는 이제 겨우 몇 달밖에 안 됐는데!”‘뭐?’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전 당신 딸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우리 다혜 몸에 이렇게나 많은 상처가 났는데도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고? 너 정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윤소현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분노를 퍼부었고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방어에만 집중했다.고영란이 아무리 소리쳐도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다.“소현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둬!”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윤소현은 그제야 멈췄다.박민정도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정수미가 황급히 달려와 박민정의 얼굴에 선명히 남은 손자국을 보고 안타까워했다.“민정아, 괜찮아?”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불만을 터트렸다.“엄마, 똑같이 엄마 딸인데 우리가 싸웠으면 두 사람 다 챙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박민정만 신경 쓰는 거예요?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정수미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돌아보았다.“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봐. 왜 둘이
박민정은 그 아기가 윤소현의 딸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죠?”보모는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경계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울기만 하고 어떻게 달래도 소용이 없네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따라온 보모에게 두 아들을 잘 돌보라고 지시한 뒤, 직접 아이를 안아 들어 달래기 시작했다.그러나 유다혜는 그녀의 품에서도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아마도 엄마가 된 경험 덕분인지 박민정은 아기를 돌보는 법을 잊었더라도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먼저 보모에게 아이가 충분히 먹었는지 물었고 이어 아이의 기저귀를 확인하며 배탈이 났는지 살펴보았다.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아기가 계속 울자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아기를 병원에 데려가 보세요. 이렇게 계속 우는 건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보모도 동의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보모가 아기를 다시 받으려던 찰나, 멀리서 윤소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내 딸을 저 여자한테 맡기라고 했어?”윤소현은 높은 굽의 힐을 신은 채 빠르게 걸어와 박민정의 품에서 아이를 거칠게 빼앗아 갔다. 그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보모를 질책했다.“내 딸을 당신한테 맡겼더니 이렇게밖에 돌보지 못해? 내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책임인 줄 알아!”그녀는 이어 박민정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너도 아이가 있잖아. 내 아이를 왜 안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은 그 아이가 윤소현의 딸임을 알았더라면 절대 안았을 리 없었다.보모는 난처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작은 사모님, 다혜가 계속 울어서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께서 잠깐 도와주셨던 것뿐이에요. 아무런 악의도 없었습니다.”“악의가 없었다고?”윤소현은 여전히 울고 있는 딸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 뿐이야.”그러다 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작은 사모님, 아이를 병
윤소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선두에 있던 여하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어 한 하인을 거칠게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들어가자마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박민정과 유남준 가족이 함께 웃으며 화목하게 있는 모습이었다.그 광경에 윤소현의 눈빛이 질투로 뒤덮였다. 그녀는 곧바로 고영란을 향해 차갑게 비아냥댔다.“어머니, 저랑 남우 씨가 비록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 건 아니지만 저도 유씨 가문에서 떳떳하게 맞아들인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모른 척하시겠다는 거예요?”고영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소현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유남우 역시 큰 잘못을 저질렀고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겐 큰 실수로 느껴졌다.“소현아,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어서 남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렴. 여긴... 당분간 환영받지 못할 것 같구나.”윤소현은 이 말을 듣고도 뻔뻔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왜요? 제가 여기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혹시 당신 아들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제가 다 까발릴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고영란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윤소현이 마지막 퇴로조차 거부하자 냉소를 띠며 대꾸했다.“우리 아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한번 말해 보렴.”윤소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뭘 말하냐고요? 당신 아들이 자기 형의 여자를 탐냈다는 거. 이게 바로 당신들이 자랑하는 유씨 집안의 가풍인가요?”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에 있던 하인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은 옆에서 두 아이를 달래며 이 상황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유남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다들 뭘 보고 있어? 당장 저 여자를 끌어내!”윤소현은 유남준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자 더 큰 소리로 외쳤다.“유남준 씨, 이 말을 듣기 싫은 거죠? 뭐, 당연하죠. 형의 여자를 뺏어갔다니, 저라도 그런 꼴은 못 참겠어요!”만약 그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벌써 그녀에게 직접 손을 댔을 것이다.곧
박민정의 시선이 우연히 유남준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유남준은 숨이 가빠지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입술이 닿기 직전 박민정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저기... 어젯밤 감사했어요.”박민정은 짧게 말한 뒤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유남준의 품이 순식간에 비어지며 허전함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그도 조용히 일어났다.창밖에는 두껍게 쌓인 눈이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기억나? 재작년 이맘때도 우리 여기 머물렀었잖아.” 유남준이 말을 꺼냈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들었지만 머릿속엔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두 사람은 먼저 읍내로 나가 식사를 한 뒤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은정숙을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이후 차를 타고 진주시로 향했다.진주시는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길 위에는 삼삼오오 모여 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민정은 잠시 멍해졌다.‘만약 내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쯤 저렇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을까?’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몇 개의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뿐이었다.“잠시 후 우리 집, 본가로 갈 거야.” 유남준이 그녀를 바라보다 나지막이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본가요?”“응, 우리 집.”유남준의 대답에 박민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마침 그녀도 그곳에서 두 아이를 보고 싶었다.유씨 가문의 저택에서 고영란은 요즘 완벽한 가정의 화목을 누리고 있었다.자식과 손자들이 곁에 머물렀고 두 아이는 날마다 그녀를 웃게 했다.박민정이 온다는 소식에 그녀는 하인들에게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도록 했다.차가 저택 입구에 도착하자 고영란은 직접 마중을 나왔다.“민정아, 어서 와서 앉아.”박민정의 기억 속 고영란은 어린 시절에만 머물러 있었다.그때의 고영란은 차갑고 냉담한 분위기를 풍기며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사람이었다.박민정은 어릴 적 그녀를 조금 두려워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오늘 하루 동안 많은 곳을 둘러보며 꽤 많은 기억을 떠올렸다.저녁이 되어서야 둘은 시골의 집으로 돌아왔다.박민정은 약간의 후회를 드러냈다.“벌써 열 시가 넘었네요. 지금 진주시로 돌아가면 새벽이 되어야 도착하겠어요.”유남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럼 오늘은 여기서 묵자. 밤늦게 운전하는 건 위험하니까. 게다가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을 깨울 수도 있잖아.”박민정은 타인의 사정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성격이었기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여기서 자는 걸로 할게요. 그런데 괜찮을까요?”“물론 괜찮지.”유남준은 내심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 몹시 반가웠다.박민정이 말한 건 두 개의 방이 있다는 뜻이었지만 유남준은 하나의 방을 생각했다. 그녀는 집 안을 둘러본 뒤 침실이 하나뿐임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그럼 저는 거실 소파에서 잘게요.”여기는 박씨 가문의 본가와는 달랐다. 박씨 가문의 저택은 침실 안에도 넉넉한 공간이 있어 소파를 두는 게 가능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유남준은 단 한 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그럼 나도 소파에서 같이 잘게.”그의 대답에 박민정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그러지 말고 각자 따로 자요.”박민정은 비록 기억의 조각들을 조금씩 되찾고 있었지만 유남준과의 관계가 너무 빨리 진전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유남준은 억지로 그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혼자 침실에서 자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여기는 외딴곳이라 네가 혼자 소파에서 자는 건 걱정돼. 침실 침대는 넓으니까 네가 불편하면 이불 하나로 우리 사이를 막아두면 되잖아. 어때?”그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박민정은 망설이면서도 밖에서 들려오는 거센 바람 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좋아요.”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남준은 곧바로 이불을 가져와 침대 가운데를 나누고 각각 이불을 하나씩 준비했다.유남준이 침대에 눕고 나서야 박민정도 몸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로
전날 밤 악몽 탓에 잠을 설친 박민정은 차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어느덧 차는 어느새 시골에 도착해 있었다.유남준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운전기사에게 차를 잠시 멈추게 했다.박민정은 깊이 잠들지 못했는지 몸을 비틀다가 그만 유남준의 품으로 넘어질 뻔했다.그는 재빨리 그녀를 받아 안았다.박민정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다가 자신이 그의 몸에 기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당황스러워 얼굴이 붉어졌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유남준은 고개를 저었다.“사과할 일은 아니야. 가자, 다 왔어.”벌써 도착한 걸까?박민정은 창밖을 보았는데 새하얀 눈 아래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그곳은 어린 시절 그녀와 정숙 아줌마가 함께 살던 집, 그녀의 진짜 집이었다.어릴 적 기억의 단편들이 박민정의 머릿속에서 하나둘 떠올랐다.“맞아요, 여기가 바로 그 집이에요.”그녀는 유남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아줌마, 나 돌아왔어요.”박민정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이제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차가운 바람이 귀를 스치고 박민정은 눈 덮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집으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고 그때 유남준이 다가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박민정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당신한테 여기 열쇠가 왜 있어요?”“예전에 네가 나한테 맡겼잖아. 우리 여기서 잠시 함께 살았었지.”“우리가 여기서 같이 살았다고요?”박민정은 이 말에 믿기지 않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명품 정장에 품격이 넘치는 태도를 지닌 그가 이렇게 낡은 집에서 자신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유남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응. 예전에 네가 자꾸 삐져서 가출했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라왔지.”그의 농담 섞인 말에 박민정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놀랐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테
박민정은 방을 옮기면 더 편히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밤새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렸다.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꿈, 정숙 아줌마의 죽음, 그리고 한수민의 죽음까지...꿈속의 모든 일들이 희미하고 불분명했지만 그 슬픔은 그녀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꿈에서 겪은 구체적인 상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박민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꿈을 되짚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는 게 없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했다.세수를 마치고 거실로 나온 박민정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누나.”동생 박민호였다.박민호는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박민정은 그를 보고도 별다른 반가움을 느끼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 그녀는 박민호를 몇 번이나 마주쳤기 때문이었다.“응, 여긴 웬일이야?”박민정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유남우가 그녀를 속이고 있을 때, 박민호는 늘 유남우를 도와 거짓말을 꾸미는 데 일조했다.박민호도 그녀의 냉랭한 태도를 눈치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 앞으로 다가왔다.“누나, 설마 나한테 화난 거야? 나도 남우 형한테 속았던 거라고!”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속았다니, 무슨 말이야?”“남우 형이 그러더라고. 유 대표가 진심으로 누나를 대하지 않는다면서 오직 형만이 누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나도 예전에 유 대표가 누나에게 잘못했던 걸 생각하니 누나가 더 사랑받는 사람이랑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형 말을 믿었지.”박민호는 한 단어 한 단어 신중히 말했지만 박민정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그래? 알겠어. 그럼 이제 무슨 일로 온 건데?”박민호는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누나, 기억은 얼마나 돌아왔어? 뭐라도 생각난 거는?”박민정은 솔직히 말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아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그래? 괜찮아, 천천히 떠올리게 될 거야.”박민호는 옆에 있는 과일 바
비서는 정 대표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나서서 말을 보탰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아가씨를 정말 많이 보고 싶어 하십니다. 한 번만이라도 시간을 내서 찾아뵐 수 있을까요?”“대표님께서 예전에 잘못하신 건 전부 아가씨의 정체를 모르셨기 때문이에요. 이제 모든 걸 아시고 정말 많이 후회하고 계십니다.”이 말을 듣자마자 박윤우가 재빨리 박민정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당신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에요! 우리 엄마를 데려갈 생각하지 마요!”“윤우 군, 저희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대표님은 윤우 군 엄마의 친엄마세요. 절대 두 분을 해칠 분이 아니세요.” 비서는 간절히 설득했지만 박윤우는 냉소를 띠며 되받아쳤다.“그럼 예전에 우리 형이 죽을 뻔한 건 누가 그랬는데요? 엄마 얼굴이 이렇게 된 건 또 누구 탓인데요?”비서는 말문이 막혔고 ‘그건 전부 오해’ 라고 간신히 변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그녀를 제지했다.박윤우는 여전히 비웃는 얼굴로 말했다.“그럼 하나만 물어볼게요. 우리 엄마가 정 대표님 딸이 아니었다면 자기 잘못을 인정했을까요? 우리 엄마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냥 끝까지 괴롭혔겠죠?”“옳고 그름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 딸만 감싸고 우리 엄마를 다치게 했어요.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한다고요? 웃기지 마요!”박윤우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 정수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새삼 절실히 깨달았다.“미안하다...”정수미는 고개를 숙이며 박민정에게 사과했다.“민정아,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가 옳고 그름도 모르고 소현이만 감싸느라... 그래서 이렇게 됐어.”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는 점점 떨려왔다. 하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이런 모습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아이조차 아는 간단한 이치를 성인이자 회사 대표인 그녀가 몰랐다는 것이 더 의아했다. 그저 자기 편을 감싸기에 바빴던 사람일 뿐이었다.“정 대표님, 더 할 말이 없으시면 저희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