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현은 잠시 멈칫하다가 곧바로 거짓말을 지어냈다.“계모가 암에 걸렸다고 했잖아요. 계모를 보러 왔어요.”“그래? 그럼 왔던 김에 뵈러 가면 좋겠는데?”유남우는 윤소현이 어떻게 거짓말을 이어 나가는지 보고 싶었다.윤소현은 즉시 거절했다.“괜찮아요. 지금 주무시고 있으니까 방해하지 마요.”“알겠어.”윤소현은 아직 이용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으니 이대로 사이가 틀어지면 안 되었다.차가 출발하여 서서히 병원을 떠났다.병실 안에서.한수민의 머릿속에는 윤소현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내 엄마는 정수미뿐이야.”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얌전하고 착할 뿐만 아니라 능력 있는 딸이 다른 사람을 엄마로 받아들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박민정이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한수민의 말라붙은 얼굴은 생기가 없었다. 눈동자도 초점을 잃어 기운이 없어 보였다.박민정이 간병인에게 말했다.“한 여사님과 단둘이 있게 해주실 수 있나요?”“네, 알겠습니다.”간병인은 박민정을 믿고 병실을 나섰다.간병인이 떠나자 병실 안은 박민정과 한수민만 남아 유난히 조용했다.박민정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여사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한수민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는 아련한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봤다. 왜인지 모르지만 후회가 몰려왔다.박민정이 물었다.“아버지 사고, 여사님과 관련이 있죠?”그 말은 폭탄처럼 한수민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그녀는 즉시 부인했다.“그게 무슨 헛소리야? 네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정말이에요? 그런데 아버지가 탔던 차, 여사님이 전날에 운전했었다고 하더군요. 그때 차에 여사님 혼자밖에 없었고요.”박민정은 목이 메었다.“또 차의 브레이크 패드에 문제가 있다는 게 발견되었어요. 그건 절대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었다고요.”한수민은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뭐?”박민정은 한수민이 아직도 모르는 척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아직도 진실을 얘기하지 않는
한수민은 그 말을 듣고 나서 바로 그녀를 제지했다.“안 돼! 박민정에게 말하면 나... 나 당신 앞에서 죽어버릴 거야.”한수민은 이 방법으로 간병인을 협박할 수밖에 없었다.간병인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렇다고 계속 박민정 씨를 속일 수는 없잖아요. 지금 사모님이 누리고 있는 모든 건 박민정 씨가 제공한 거잖아요. 양심이 있다면 진실을 얘기해요.”한수민은 간병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감히 진실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내가 죽기 전에 말할게.”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두원 별장에 도착하자 추경은이 돌아온 걸 발견했다.어제 클럽 갔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얌전하고 착한 모습이었다.추경은의 얼굴에는 아직도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어젯밤 민수아가 꽤 세게 때린 모양이었다.“새언니, 돌아오셨어요? 어제 친구에게 아이 돌보는 방법을 배우러 가서 늦게 돌아왔어요. 윤우를 더 잘 돌봐야죠. 설마 화가 나신 건 아니죠?”박민정은 의아해서 물었다.“경은 씨 친구도 아이가 있어요?”“네. 나이가 비슷한데 아들이 네 살이거든요.”추경은 거짓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었다.“그랬군요. 수고 많았어요.”박민정이 말했다.“아니에요. 수고는 무슨.”추경은은 박민정을 속였다고 생각해 저도 모르게 코를 만졌다.옆에서 과일을 먹고 있던 박윤우도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눈치챘다.“경은 이모, TV에서 심리학자가 말한 걸 봤는데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 하는 움직임이 있대요. 경은 이모가 계속 코를 만지고 있던데 거짓말을 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추경은은 코를 만지던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럴 리가 있겠어?”그녀는 또 손에 있던 물컵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박윤우는 조용히 그녀를 보며 또 말했다.“참,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물을 마시면서 자신을 감추려고 한다고도 했거든요.”“...”할 말을 잃은 추경은은 물컵을 내려놓았다.박민정은 제 발 저린 추경은을 보고 웃음
밤이 되었다.추경은은 침대에 누워 잠들었는데 갑자기 방 안에서 ‘따르릉’ 소리가 울렸다.깜짝 놀라 잠에서 깬 그녀는 불을 켰는데 그 소리는 다시 사라졌다.“이상하다. 꿈인가?”추경은은 불을 끈 후 다시 잠들었다.그런데 한 시간쯤 지나서 다시 막 잠들려는 순간 ‘따르릉’ 소리가 또다시 울렸다.이번엔 꿈이 아닌 게 확실했다.“어디서 난 소리지? 설마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인가?”추경은은 휴대폰 전원을 끈 후 다시 잠을 청했다.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갑자기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우우...”비몽사몽한 추경은은 등골이 오싹해졌다.놀라서 깨어난 그녀는 더 이상 잠들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몸을 움츠렸다.“설마 귀신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추경은은 결국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다음 날, 박민정이 아침을 다 먹고 출근 준비를 할 때까지도 추경은은 깨어나지 못했다.박민정은 똑같이 되갚아주기 위해 혼자 회사로 가는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경은 씨가 너무 깊이 자서 깨우기가 미안하네. 오늘도 혼자 출근하는 날이네요.]박민정은 고영란이 한가할 때 SNS를 자주 확인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자질은 그녀도 할 수 있었다.박민정은 이 게시물을 고영란에게만 보이도록 설정했다.추경은은 고영란의 연이은 전화벨 소리에 겨우 깨어났다.전화를 받자마자 그녀의 본성이 드러났다.“누구야? 왜 자는데 방해를 해?”“10시인데 아직도 자고 있어?”고영란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고영란이 추경은더러 박민정과 함께 회사로 출근하라고 한 이유는 임신한 박민정을 잘 돌보라는 뜻이었지, 두원 별장에서 편하게 지내게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추경은 고영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휴대폰을 보니 정말로 10시가 넘었다.어젯밤 방 안에서 계속 소리가 나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이모, 죄송해요. 지금 바로 일어날게요.”추경은은 급히 일어나 방 안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이상한 소리가 어디서 났는지 찾기 시작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리 찾
박민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박민정?”유남준은 확신이 없었는지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무슨 일이에요?”박민정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유남준은 이 번호 주인이 박민정인 걸 확인하고는 조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호산 그룹에 출근하지 마.”“왜요?”박민정은 황당할 뿐이었다.호산 그룹에서 일하면 월급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으면서도 회사를 운영하는 지식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이유는 없어. 그냥 내 말 들어.”유남준이 말했다.박민정은 그의 말투를 듣고 그가 아직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는 걸 직감했다.“이유도 말하지 못하면서 내가 왜 남준 씨 말을 들어야 해요?”‘아직도 내가 옛날의 박민정으로 알고 있는 거야?’“다른 일 없으면 먼저 끊을게요.”박민정은 유남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전화를 끊었다.유남준은 끊긴 휴대폰을 바라보며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다.그의 옆에 있던 서다희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힘이 빠진 채로 의기소침해 있었다.서다희는 오늘도 민수아와 제대로 얘기를 나누지 못했는데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기 앞에서 애교를 부리던 약혼자가 이틀 전 밤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것일까?“겁이 없네. 감히 내 전화를 끊어?”유남준이 말하고는 또 서다희에게 물었다.“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도 이랬어?”서다희는 의문스러운 얼굴을 보였다.“네? 누가요?”“너 요즘 도대체 왜 이래?”유남준은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다 변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서다희마저 변해버린 듯했다.서다희는 유남준이 화를 내자 어쩔 수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대표님, 요즘 여자친구가 이유도 없이 외박을 하거든요. 걱정이 돼서 그러는데 오늘 하루 휴가를 내도 될까요?”유남준은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여자 문제였다.“가.”“대표님, 감사합니다. 빨리 처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서다희는 외투를 챙기고 서둘러 자리를
서다희는 제자리에 얼어붙었다.추경은을 만나러 간 게 민수아에게 들켰을 뿐만 아니라 사진까지 찍혔다니.[수아 씨, 내가 설명할게.]문자를 보냈지만 카톡도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서다희는 곧바로 민수아 회사로 향했다.회사 안.민수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끝까지 사실을 말하지 않는 서다희에게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민수아가 다니는 회사는 크지 않고 경비도 허술했다.서다희는 곧바로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민수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수아 씨, 내 말 좀 들어봐.”민수아는 깜짝 놀랐다.주변 동료들이 모두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서다희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사람이 없는 곳에 도착하자 서다희는 바로 그녀에게 사과했다.“수아 씨, 미안해. 거짓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냥 수아 씨가 화낼까 봐 솔직히 말할 용기가 없었어.”‘내가 화낼까 봐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고?’민수아는 더 화가 났다.“그럼 나도 밖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희 씨 화낼까 봐 그 사실을 숨기면 받아들일 수 있겠어?”서다희는 자신이 처음에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민수아의 말을 듣고 나서 죄책감이 밀려왔다.“당연히 안 되지.”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민수아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다희 씨가 그렇게 했잖아. 다를 게 뭐가 있어? 내가 화낼까 봐 나한테 말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돼? 내가 한밤중에 다른 남자와 몰래 만나서 포옹했는데 다희 씨에게 말하지 않으면 다희 씨는 어떻게 할 건데?”서다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는 그 남자를 절대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미안해, 수아 씨. 이번엔 정말 내가 잘못했어.”처음에는 추경은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민수아의 말을 듣고 나니 서다희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다.“나를 믿어줘. 정말 포옹한 적은 없어. 그 사람이 갑자기 와서 안겨서 나도 어떻게
서다희는 감정에 있어서 아직도 서툴렀기 때문에 민수아가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민수아는 더 이상 그와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회사로 돌아가려 하자 서다희가 따라오려고 했다.민수아는 바로 단호하게 말했다.“나랑 친구도 안 하겠다는 거지?”서다희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아니, 그런 건 아니야.”그는 이제야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았다.하지만 민수아는 쉽게 그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지금 용서하면 다음엔 또 다른 여자와 껴안을 수 있으니 말이다.사무실로 돌아온 민수아는 마음이 울적했는데 이 모든 걸 믿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서다희와 사귄 이후로 이 도시를 오게 되었기 때문에 친구가 별로 없었다.헤어지겠다고 말은 했지만 막상 이사하면 어디서 살아야 할지조차 막막했다.그러다 민수아는 문득 박민정을 떠올렸다. 주저하다가 끝내 박민정에게 문자를 보냈다.[민정아, 혹시 어디에 방을 빌릴 수 있는 곳을 알고 있어?]민수아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다.박민정은 예전에 재벌가의 아가씨였고 지금은 재벌가의 사모님이라 방을 빌릴 수 있는 곳을 알 리가 없었다.문자를 삭제하려고 하던 찰나, 박민정의 답장이 도착했다.[서 비서님이 너를 내쫓았어? 그 녀석 진짜 나쁜 놈이네!]박민정은 민수아와 서다희가 결혼을 앞두고 있어 지금 동거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서 비서님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쓰레기네. 자기가 한 일이 들켰으니까 수아를 쫓아내려는 거야?’[그게 아니라 내가 자진해서 나가려고 하는 거야. 계속 같이 살면 내가 너무 자존심 없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서.]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내가 빈집이 하나 있는데 괜찮다면 거기서 지내도 돼.]박씨 가문의 옛 저택은 현재 청소부가 가끔 가서 청소할 뿐,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상태였다.민수아가 그곳에 살면 집에도 온기가 더할 것 같았다.[정말? 그럼 내가 월세를 내고 살면 안 돼?][그래. 진주시 평균 월세로
하지만 택시가 멈춘 뒤, 서다희는 택시에 타고 있던 사람이 민수아가 아닌 것을 발견했다.“젠장!”그 순간에도 추경은은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왔다.그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경은 씨,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추경은은 서다희의 냉랭한 목소리에 당황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다희 오빠, 자고 있어요?”“아니요.”‘덕분에 오늘 밤은 아예 잠도 못 잘 것 같다고.’추경은은 이어서 말했다.“어젯밤에 별장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거든요. 좀 무서워서 그러는데 오빠가 남준 오빠에게 나 좀 데려가달라고 말해줄 수 없어요?"서다희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대표님께 직접 전화해 보세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끊을게요.”추경은은 끊긴 전화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문득 전날 밤 민수아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혹시 민수아가 서다희에게 모든 것을 말한 건가?’추경은은 서다희에게 먼저 고자질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민수아에게 맞았던 얼굴 사진을 찍어뒀었다.서다희는 민수아에게 안전하게 도착했는지 묻기 위해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그 순간 추경은이 또다시 사진을 보내왔다.사진 속 추경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었다.서다희는 처음에 그 사진을 보고 박민정이 때린 건 줄 알아 너무하다고 생각했다.곧이어 추경은이 또 문자를 보내왔다.[사실 다희 오빠에게 말하지 않은 일이 있어요. 우리가 저녁을 먹은 그날 밤에 다희 오빠 여자친구를 만났거든요. 여자친구분이 우리 사이를 오해했는지 저를 때렸어요.]서다희는 추경은의 뺨을 때린 사람이 민수아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민수아와 추경은이 나눈 대화 녹음 파일을 듣지 않았다면 그는 민수아가 예의 없이 사람을 때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제 그는 추경은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경은 씨, 증거가 있나요?]서다희가 문자를 보냈다.[증거 있으면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을
민수아는 진심으로 박민정에게 고마움을 느꼈다.박민정도 그녀를 도와준 기분이 들어 만족스러웠다.전화를 끊은 후, 박민정은 추경은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기 앞을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추경은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박민정을 바라보며 물었다.“새언니, 저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뭔데요?”“서 비서님의 약혼녀를 아세요?”추경은은 서다희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분명 민수아가 무슨 말을 했기 때문에 서다희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왜 그래요? 서 비서님 약혼자는 왜 찾아요?”추경은은 자리에 앉은 후 박민정에게 말했다.“새언니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 정말 무례하거든요. 며칠 전에 만났는데 너무 거만했어요.”추경은은 박민정에게 민수아에 대한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은 관심 있는 척하며 물었다.“정말이요? 그 여자가 어떻게 했는데요?”“새언니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하더라고요. 새언니는 대표님과 어울리지 않는다면서요. 그리고 서다희 오빠도 새언니 뒷담화를 했다고 했어요. 새언니는 할 줄 아는 게 없으면서 사모님 자리만 차지한다고요.”추경은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이어갔다.박민정은 추경은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 자리에서 일어섰다.“나 쉬러 갈게요. 경은 씨도 일찍 자요.”추경은은 방을 바꿨지만 어젯밤의 이상한 소리가 여전히 두려웠다.“새언니, 저랑 같이 자면 안 돼요? 저 너무 무섭거든요.”“미안한데 난 낯선 사람과 함께 자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박민정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추경은은 차갑게 박민정을 쳐다보다가 결국 윤우를 돌보는 가정부와 함께 자려고 했다.가정부는 추경은이 착한 사람이라 생각해 동의했다....한편, 에리는 신곡 녹음을 마치고 박민정과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았다.박민정은 회사에 휴가를 내고 에리를 만나러 가려고 했지만 추경은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새언니, 어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