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굳어버린 박민정을 느끼지 못한 채 유남준은 몸을 한껏 더 숙여 입술에 뽀뽀했다.그 모습에 박윤우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뽀뽀만 하라고 했지 입술에 키스하라고 하지 않았는데!’“엄마.”박윤우의 부름에 박민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유남준을 밀쳐냈다.“그만하고 밥 먹어요. 이러지 말고.”유남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이었다.“그래.”그렇게 일가족이 단란하게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조금 쉬고 나서 9시쯤 씻으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박윤우가 박민정의 손을 잡고 운을 떼기 시작했다.“엄마, 오늘 아빠하고 나하고 같이 자자.”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유남준이 먼저 대답했다.“윤우야, 인제 세 살짜리 어린이도 아니고 혼자 자는 것에 익숙해져야 해.”박윤우는 그 대답에 그저 멍하기만 했다.‘왜 이러시는 거지? 아빠 도와주려고 이러고 있는 거잖아!’하지만 유남준은 박윤우의 마음을 몰라주었고 박윤우 역시 어떻게 사인을 보내면 좋을지 몰랐다.“알았어요.”자기 마음을 몰라주니 박윤우는 더 이상 도와주기가 귀찮아졌다.하지만 유남준은 그 마음을 몰라준 것이 아니라 박민정과 단둘이 누워있고 싶었던 것이었다.먼저 방으로 박윤우를 보내고 나서 유남준은 박민정의 뒤로 쪼르르 따라갔다.박민정은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했는데.“왜 이렇게 쫓아다녀요?”유남준은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같이 자려고.”“안방으로 들어가서 자요. 저는 객실에서 자면 돼요.”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채로 박민정이 대답했다.임신한 몸이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유남준과 함께 눕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박민정이 거절할 것으로 생각지 못한 유남준은 두말하지 않고 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가 그녀를 번쩍 들었다.“아니, 같이 잘 거야.”박민정이 반항을 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안방으로 안고 갔다....고요한 밤.윤씨 가문 사람들은 아직 잠에 들지 못했다.법원에서 보내온 압수 집행서를 보면서 윤석후는 눈살을 찌푸렸다.“박민정은 대체 어디서 그
윤석후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주식을 팔자마자 유남준이 뒤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그의 모든 주식을 사들인 것에 대해.그것도 모르고 윤석후는 이득을 봤다며 좋아했을 것이다.“계속 소송 진행하지 않으면 박민정한테 무조건 그 돈을 다 갚아야 한다는 거잖아요?”윤소현이 물었다.이때 윤석후의 두 눈에 차가운 빛이 번쩍였는데.“소현아, 박민정이 저렇게 강압적으로 나오는 건 내가 아직 네 엄마랑 부부 사이여서 그러는 거야. 만약 내가 이혼하면 이는 한수민 개인의 채무가 되는 거야.”그 말을 들은 윤소현은 반박하지 않았다.“내일 엄마 찾으러 가요.”한수민보다는 돈이 더 좋은 윤소현이다.다음날 이른 아침.한수민의 병실은 오랜만에 북적거렸다.윤석후와 윤소현이 찾아왔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자기를 보러 온 줄 알고 한수민은 윤석후를 일부러 상대조차 하지 않은 채 윤소현하고만 얘기를 주어 받았다.그동안 단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은 윤석후는 자기 입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윤소현에게만 눈짓을 했다.윤소현 역시 이에 대해 눈치 차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이윽고 윤소현은 박민정의 모든 행위에 대해 부채질하며 한수민에게 알려주었다.“미친 거 아니야? 정말로 돈을 요구했단 말이야?”모든 걸 듣고 난 한수민이 욕설을 퍼부었다.“엄마, 간병인한테 듣자 하니 박민정이 어제도 찾아왔다면서요. 무슨 일로 온 거죠?”“별거 아니고 그냥 돈 갚으라고 그 소리 하려고 온 거야.”한수민은 윤소현의 손을 잡고서 덧붙였다.“소현아, 네가 고생이 많다.”“앞으로 매주 찾아온다고 했었어 그 미친년이.”윤소현은 떠보며 물었는데.“엄마, 다른 방법은 없어요? 돈 갚지 않아도 되는 방법은 없나요?”잠시 침묵하더니 한수민은 말을 아끼며 고개를 저었다.그러자 윤소현은 더 이상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재산을 지킬 수 있는 방법, 저희한테 있긴 해요.”“그게 뭔데?”“아빠랑 이혼해 주세요.”순간 벼락에 맞은 것만 같은 한수민이었다.두 사람이 이렇
“엄마, 또 바지에 오줌 눴어요?”싫어하는 모습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낸 윤소현이다.수치스러움에 얼굴이 빨개진 한수민은 이불을 당기면 어떻게든 냄새를 가리려고 했다.그 모습에 윤소현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이 지경까지 되었으면 이혼할 법도 한데, 대체 왜 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예요?”이제 곧 죽게 될 몸인데, 짐이 되지 말고 홀로 모든 걸 안고 떠나라는 소리였다.하지만 그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난처하기 그지없는 한수민이다.“생각해 볼게. 그만 가 봐.”“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아니면 박민정이 모든 걸 빼앗아 갈지도 몰라요.”윤소현 역시 이곳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아 윤석후를 데리고 떠났다.그들이 떠난 뒤 간병인이 바로 들어왔다.“사모님, 괜찮으세요? 선생님 불러드릴까요?”눈시울이 붉어진 한수민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시트 좀 갈아주세요.”외부인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써 왔던 그녀이다.간병인은 먼저 한수민을 부축해 일어서고 시트를 갈려고 했는데, 오줌을 눈 그곳에서 피가 가득했다.그동안 많은 환자들을 간병해 왔지만, 그곳을 보는 순간 간병인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피... 피가 엄청 많아요...”한수민 역시 눈길을 돌렸는데,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어서! 어서 의사 불러와요.”죽음이 두려운 한수민이다.의사와 간호사가 급히 달려왔고 그들은 덤덤한 모습을 보였다.간호사가 한수민에게 말했다.“환자분, 마음 편히 놓으세요. 말기에 이러한 상황이 일어나는 건 정상이거든요.”“제가 알아본 게 좀 있는데, 제가 곧 죽게 된다는 뜻이 아닌가요?”한수민이 간호사의 옷자락을 꽉 잡고 물었다.지금까지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못한 그녀는 아직 이 세상을 좀 더 즐기고 싶었다.간호사와 의사는 한수민에게 도저히 잔인한 사실을 말해줄 수 없었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쉬고 있으라고만 했다.옆에서 모든 걸 지켜본 간병인은 동정 어린 눈빛으로 한수민을 바라보았다.“사모님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한수민은 차를 타고 병원 밖으로 빠져나왔다.하도 오랜만이라 격세감이 들 정도였다.“손님, 어디로 모실까요?”운전기사가 물었다.순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수민은 어디로 향하면 좋을지 몰랐다.그렇게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박씨 가문 본가로 향하기로 했다.30분 뒤, 차는 박씨 가문 본가에 도착했다.법원 손을 거쳐 이미 다른 이의 집으로 넘어갔겠고 생각하고 본가에 변화가 많을 줄 알았다.하지만 차에서 내려 고개를 들어보니 본가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집안이든 밖이든 깨끗하기 그지없었고 마당에는 벗꽃이 하늘거리고 있었다.도저히 믿어지지 않은 채로 한수민은 천천히 다가갔다.이지원이 본가를 산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한수민이다.이지원을 본지 하도 오래되었기에 한수민은 이 집을 유남준이 1년 전에 사들인 것에 대해 모르고 있다.“어떻게 오신 거죠?”청소하던 아줌마가 한수민을 보고 나왔다.한수민은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이 집 원래 주인이에요.”“이 집 주인은 박씨 가문이 아닌가요?”아줌마는 다소 의아해하며 덧붙였다.“박민정 씨와 어떻게 되는 사이시죠?”유남준은 일찍이 명의를 박민정에게 넘겨주었는데, 이곳으로 들어오지 않고 청소 아줌마만 보내왔던 박민정이다.한수민은 아줌마의 입에서 다른 정보를 알아냈으나 대답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그 뜻은 이 집주인이 박민정이란 말이에요?”“네, 저는 정해주신 시간대로 청소하러 오는 사람이고요.”거듭 확인해도 한수민은 믿어지지 않았다.‘박민정이 무슨 돈으로 본가를 사들인 거지?’그렇게 넋을 잃고 있을 때 아줌마가 또다시 물었다.“사모님 친척분 되시는 거예요? 들어가서 좀 기다리고 계실래요? 오늘 사모님 오실 거예요.”한수민은 거절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인테리어도 작은 소품까지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변한 게 있다면 거실에 흑백으로 된 박형식의 사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박형식은 사진을 보게 되는 순간 한수민은 눈동자가 흔들렸고 감정이 복잡
“정말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날 낳아준 것을 봐서라도 죽게 두지는 않을 거예요.”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박민정의 모습을 보고서 한수민은 비아냥거렸다.“유남준이 너한테 홀딱 빠져서 지금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는 거 같지? 천만에!”“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죽게 두지 않아?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야! 우리 소현이가 얼마나 우수하고 대단한지 알아? 소현이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잘살고 있는 지 알기나 해? 그냥 떠보면서 하는 소리였는데, 이렇게 네 본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거야? 개를 키워도 너보다 낫겠어...”욕설을 퍼붓고 있는 한수민이다.박민정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다시 집안으로 돌아와 박윤우와 함께 제사 준비를 했다.한참이나 욕설을 퍼부은 한수민은 아랫배가 또다시 아파 나기 시작했고 피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청소 아줌마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괜찮으세요?”하지만 한수민은 이미 밀려온 통증에 말조차 할 수 없었다.아줌마는 황급히 박민정을 찾으러 갔고 바지까지 피에 흠뻑 젖었다는 말을 해주었다.채소를 다듬고 있던 박민정은 멈칫거렸으나 가지 않았다.“병원으로 바래다 드리라고 경비원한테 부탁해 주세요.”“네.”박윤우도 함께 채소를 다듬고 있었는데 고개를 들어 박민정을 바라보았다.“엄마, 외할머니 걱정되면 나가 봐.”박민정의 마음이 얼마나 약한지 잘 알고 있는 박윤이다.하지만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어린아이한테 한수민과 자기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몰라 간명하게 설명해 주었다.“윤우야, 어릴 적부터 부모님께서 키워주시면 어른이 되고 나서 부모님을 도로 돌봐줘야 한다는 말이 있단다.”“만약 내가 윤우를 낳기만 하고 키워주지 않았다면 윤우는 앞으로 엄마를 돌봐주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야.”박윤우는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외할머니께서 엄마한테 모질게 했으면 우리 그냥 신경 쓰지 말자.”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박민정은 박윤우를 꼭 안아주었다.실은 전까지만 해도 한
박밈정은 윤소현이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한수민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했던 딸의 입에서 나온 소리다.병원 앞에 이른 한수민은 핸드폰을 들고서 윤소현에게 말했다.“이미 와 있어요.”그 말을 듣고서 윤소현은 더 이상 핑계를 찾지 않았다.“나도 갈게.”전화를 끊고 비서에게 차를 대기하라고 했다.병원 안에서.수술을 마친 한수민은 한참이나 기절해 있었다.힘겹게 눈을 뜬 한수민의 시야로 가장 먼저 들어온 이는 베란다에 서서 전화를 하고 있던 윤소현이었다.“소현아...”힘없는 한수민의 소리에 윤소현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엄마, 깨어나셨네요.”한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병원으로 데리고 온 거야?”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윤소현은 거짓말을 했다.“네, 앞으로 혼자 병원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너무 위험하지 않아. 네?”병원으로 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정이 떠났다.“알았어. 우리 소현이 말 들어야지.”윤소현을 바라보고 있는 한수민은 눈빛은 그토록 자상할 수가 없었다.분위기를 보아 윤소현은 자리에 앉았다.“엄마, 전에 드렸던 그 제안에 대해서 생각 다 하셨어요? 이혼 냉각기라는 것도 있고 하니 얼른 결정 내리셔야 해요.”한수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예요? 개의치 않으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한 달 동안 냉각기도 있잖아요.”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은 윤소현이다.“그래.”한수민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재산만 지킬 수 있다면 박민정에게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이 정도 억울함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럼, 내일 아빠랑 엄마 구청으로 모시고 갈게요.”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 윤소현은 바로 태도를 바꾸며 한수민과 담소를 나눴다.윤소현이 떠나고 나서 옆에 있던 간병인은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사모님, 제가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그러는데요... 사모님 수술하시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분은 저분이 아니에요.”“
박민정은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그제야 수신 버튼을 눌렀는데.“연지석?”하도 오랜만에 하는 전화라 박민정은 상대가 연지석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그래. 나야.”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내내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마침내 내려앉는 순간이었다.“괜찮아?”윗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연지석은 한참 침묵했다.“아니.”그러자 박민정은 다시 다급해 물었다.“어디 아파?”“여기저기 다 아파. 이제 겨우 정신 든 거야.”연지석은 살짝 억울해하며 덧붙였다.“보러 오지도 않고.”그 말에 박민정은 미안하기만 했다.“너 지금 어디에 있어? 오늘 밤 비행기로 보러 갈게.”“그래. 주소 보내줄 테니 이리 와.”연지석은 먼저 전화를 끊고서 주소를 보내주었다.주소를 받아 적고 난 뒤 박민정은 다시 전화를 걸어 몸 상황이 어떠한지 물었다.연지석은 너스레를 떨었는데.“염라 대왕님께 인사드리고 왔어. 근데 내가 아직 이루지 못한 소원이 있다고 아직 죽으면 안 된다고 빌고 빌어서 다시 날 보내준 거야.”박민정은 그 말에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장난으로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짐부터 챙기고 내일 갈게.”연지석이 이제 막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친구 하민재가 손짓을 했다.“나 보러 와도 되는 거야? 유남준 씨 뭐라고 하지 않아?”유남준에 대해 언급하자 박민정은 죄책감이 더 깊어졌다.연지석이 그렇게 된 것에 유남준의 몫이 대단했기 때문이다.“그럴 리가. 하물며 내가 무슨 그 사람 부속품도 아니고 내가 내 발로 가겠다는 데 뭐라고 할 게 뭐가 있어.”“알았어.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그래.”연지석은 전화를 끊고서 고개를 돌려 하민재를 바라보았다.매혹적인 두 눈에 불쾌함을 띄고서 입을 열었다.“고요 속의 외침이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왜 자꾸 손짓하고 난리야.”하민재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제대로 얘기하고 와야지. 아니면 어떻게 여기까지 널 보러 올 수 있겠어.”연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유부녀야. 대체 언제까지 포
침묵하고 있던 유남준은 박민정이 옆을 지나갈 때 팔을 덥석 잡았다.“같이 가.”아내 홀로 라이벌을 만나러 가게 가만히 둘 리가 없다.박민정은 의아하기만 했는데.“따라가서 뭐 하려고요?”“외국은 안전하지 않아. 너 지켜주려고 따라가려는 거야.”유남준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연지석이 있는 곳은 안전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또다시 박민정을 데리고 숨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때 후회해도 쓸모없을 것이다.그렇게 자기만을 사랑했던 박민정인데 갑자기 연지석과 함께 4, 5년 동안 사라졌으니 말이다.하물며 지금 두 사람 사이는 예전처럼 가까운 것도 아니라 그냥 보낼 수 없었다.혹시나 또 사라질 수도 있으니.“괜찮아요. 에스토니아에서 오랫동안 지내면서 아무런 문제도 없었어요. 그리고 지석이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는 것도 좀 그렇고요.”“뭐가 그렇다는 거야? 난 네 남편이야.”유남준은 소리를 한껏 내리깔았다.박민정은 그제야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자기 팔을 꼭 잡고 있던 유남준의 손을 뿌리치고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내가.”유남준은 여전히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덤덤한 모습을 보였다.“넌 걱정이 안 돼. 환경이 걱정된다는 거지.”“그럼, 혼자 갈래요.”박민정은 고집을 피웠고 더 이상 그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유남준도 따라서 들어왔는데, 분위기는 한껏 굳어졌다.모르는 이가 봐도 유남준이 박민정을 ‘믿지’않고 있는 것이다.이때 박윤우가 천천히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아빠, 엄마 걱정되시면 몰래 따라가도 되잖아요.”유남준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한기가 대단했다.“그게 포인트가 아니야.”박민정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게 포인트지.박윤우는 손으로 턱을 짚고서 그럴듯하게 물었다.“그럼, 뭐가 문제죠? 엄마가 지석 삼촌 만나러 간다고 해서 질투 난 거예요?”“저라면 질투 날 것 같기도 해요. 지석 삼촌 키도 크고 잘생기고 게다가 엄마랑 죽마고우로 지내왔잖아
그리고 침대에 던져지고 나서야 박민정은 이게 무슨 뜻인지 깨닫고 재빨리 이불을 몸에 둘렀다.“오지 말아요!”그러나 유남준의 눈빛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그녀의 턱을 잡고 말했다.“민정아, 나도 남자야.”시간도 많이 흘렀고 같은 방을 쓰고 있지만 매일 그냥 잠만 자려고 하자니 그도 나름 괴로웠다.그리고 이 상태로 두 사람이 계속 지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병들 것 같았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유남준은 단번에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그녀는 순간 호흡이 가빠지고 또다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하여 다 포기한 채 가만히 누워 온전히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을 무렵 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엄마.”박예찬과 박윤우가 학교에서 돌아왔는지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박민정을 불렀다.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에 순식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진서연이랑 설인아, 그리고 민수아까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으나 두 아이도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박민정은 있는 힘껏 유남준을 밀쳐냈다.하여 오늘에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멈춰야 했다.박민정이 황급히 방에서 나오니 두 아이가 마침 문 앞에 서 있었다.“엄마, 자고 있었어? 왜 얼굴이 빨개?”박윤우의 물음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게...”겨우 설명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유남준이 갑자기 방 안에서 나오더니 한껏 어두운 얼굴로 두 아이에게 물었다.“왜 벌써 왔어?”“추석이라 수업이 일찍 끝났어요.”박예찬은 뭔가 눈치챈 듯 무뚝뚝하게 답했다.그러나 박윤우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엄마, 저 쓰레기 아빠랑 같이 잔 거야?”“아니.”박민정은 단번에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저 찾을 물건이 있어서.”“무슨 물건인데?”호기심이 많은 아이의 질문 공세에 박민정은 한참 동안 생각해 보다가 겨우 답했다.“책.”“무슨 책? 나도 같이 찾아볼게.”“아니야
박민호가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레 물었다.“누나, 괜찮아?”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가자.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박민호는 돈을 뜯어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해 그녀를 부축해 줬다.“그럴 필요 없어.”박민정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한수민의 묘를 몇 번 더 바라보다가 애써 어지러움을 참고 자리를 떴다.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이를 본 박민호는 재빨리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누나!”그리고 단번에 들어 올리더니 빠르게 차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빨리 병원에 가요.”그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한 시간이 지난 뒤였고 박민정은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다.그리고 조각난 기억들이 어렴풋이 맞춰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느낌은 그녀를 매우 괴롭게 만들었다.이때, 누군가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는데 박민정은 그제야 비로소 맨 앞에 서 있는 유남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좀 어때? 괜찮아?”그는 다정하게 물었다.뒤따라온 사람은 박민호였는데 그도 다급히 물었다.“누나, 나 진짜 깜짝 놀랐어. 앞으로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면 병원부터 가봐. 알겠지?”박민정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제 괜찮아. 아마 저혈당 때문에 쓰러졌을 거야.”검사 결과에서도 별다른 증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유남준은 그래도 그녀가 걱정되었다.“앞으로 어디 갈 때는 꼭 사람 한 명이라도 데리고 가.”“그럴게요.”박민정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박민호는 자기 누나를 걱정하는 유남준을 보고 살짝 안심했다.그러다가 문득 이제부터 유남준을 따라가기만 하면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했다.“배고파? 내가 밥 좀 가져다 달라고 할게.”“다 나은 것 같은데 우리 그냥 집에 가서 먹어요.”박민정은 병원에 있는 게 싫었다.유남준은 원래 안 된다고 말하려 했지만 박민정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에는 집에 가기로 했고 박민호는 두 사람을 집까
깊은 밤, 어느 술집 룸.최현아는 주성민의 품에 안겨 자신의 서러움을 토로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그러자 남자는 한껏 다정하게 그녀를 위했다.“조금만 참아. 유씨 가문의 재산만 손에 넣으면 우리도 이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으니까.”“어디 그게 말처럼 쉬워? 남준 씨는 우리가 영원히 넘지 못하는 산처럼 버티고 있잖아. 지금 호산그룹도 손에 쥐고 있고 또 네 명의 아들까지 옆에 끼고 있으니 얼마나 득의양양해 있겠어.”최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지훈이만 앞으로 힘들게 살아갈 것 같아.”순간 주성민의 눈빛이 살벌해지더니 그녀에게 물었다.“그 사람들을 한방에 제거할 방법이 없을까?”최현아는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무슨 소리야?”“현아야, 옛말에 모질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말이 있잖아. 네가 하기 힘들면 네 남편 시키면 되지.”주성민의 말에 최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예전에 남준 씨한테 한번 당한 뒤로는 겁을 먹고 찍소리도 못하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네가 자극해야지.”남자는 낮은 소리로 최현아에게 방법을 알려줬다.최현아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 마디 했다.“그 뜻은 성혁 씨랑 동서를...”“만약 유성혁이 박민정을 진짜로 건드리면 유남준의 성격에 무슨 짓을 못 할까?”남자의 말에 최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렇게 되면 박민정 그 고약한 여자도 한 방에 처리되겠네!”“며칠 뒤면 추석이라 아마 다들 돌아올 거야.”“그러면 일단 그날로 정하자.”둘은 말을 마친 뒤 다시 꼭 끌어안았다....추석 당일.박민정은 미리 박형식과 은정숙에게 제사를 올렸다.또한 한수민의 묘에도 가보았는데 마침 박민호와 윤소현도 그 자리에 있었다.윤소현은 원래 오기 싫었지만 최근에 너무 안 좋은 일만 벌어지는 것 같아 액운이라도 떨쳐내려고 온 것이다.“네가 여기까지 제사 지내러 올 줄은 또 몰랐네.”박민호가 한껏 비아냥거리며 말하자 윤
이미 집 안까지 들어온 사람을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박민정은 애써 웃으며 답했다.“앉으세요.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최현아가 자리에 앉자 유지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별건 아니고 우리 지훈이가 예찬이랑 윤우랑 놀고 싶다고 해서.”도우미는 빠르게 마실 차를 내왔다.유지훈은 집안을 둘러보다가 박예찬의 방에 들어와 같이 놀자고 했다.그러나 박윤우는 한껏 불편한 티를 내며 물었다.“유지훈, 우리 집엔 왜 왔어?” 유지훈도 사실 내키지 않았지만 최현아와 할아버지가 당부했던 일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꾹 참고 그들에게 말했다.“윤우야, 예찬아, 우리 같이 놀자. 집에서 혼자 놀다가 너무 심심해서 왔어. 그리고 너희들은 지금 옛 저택에도 안 오잖아. 현진이랑 현우가 보고 싶지 않아?”유지훈의 입에 발린 말에 박윤우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우리가 어디에 있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냥 네 집으로 빨리 꺼져.”그의 말에도 유지훈은 애써 화를 참고 다시 박예찬에게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예찬아, 너도 내가 꺼지길 바라는 건 아니지? 몰라, 난 그냥 여기서 놀 거야.”여태껏 안하무인, 기고만장이던 유지훈이 갑자기 이리도 얌전하고 모든 걸 참아내는 모습에도 박예찬은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그래. 그러면 여기서 우리랑 같이 놀자.”“좋아!”그러나 박윤우는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 박예찬에게 다가가 슬쩍 물었다.“형, 제 정신이야? 왜 갑자기 저 애랑 놀겠다는 거야?”그러자 박예찬이 은밀하게 눈빛을 보낸 뒤 다시 말했다.“윤우야, 지훈이는 우리 친척인데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지.”박윤우는 단번에 그의 생각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겠어. 유지훈, 그러면 여기서 얌전히 놀아. 일부러 사고 칠 생각하지 말고.”방안은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졌다.한편, 거실에서 최현아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박민정에게 물었다.“동서, 오늘 남준 씨는 집에 없어?”“네, 요즘 회사 일이 바쁜지 계속
아직 어린아이인데 일찍 철이 든 박예찬을 보고 박민정은 고마우면서도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바보야. 넌 아직 어려서 엄마 아빠가 지켜주면 돼.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먼저 우리한테 말해줘야 해, 알겠지?”박예찬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박민정은 그에게 몇 가지 더 당부해 주고 나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이때, 박윤우가 방안에 들어오면서 박예찬에게 다가왔다.“형은 대체 어떻게 그 나쁜 놈을 잡은 거야?”박윤우가 궁금증을 못 참고 그에게 묻자 박예찬은 간단하게 설명해 줬다.“대박!”박윤우는 손뼉까지 치며 그를 칭찬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런데 엄마와 저 쓰레기 아빠는 이제 그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 거래?”“몰라. 그런데...”박예찬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내 생각에는 그 범인이 이제 나를 해칠 마음이 없는 것 같아.”오늘 다시 만난 정호철의 눈빛은 예전처럼 살기가 돋쳐있지 않았고 오히려 정수미가 자신을 바라보던 것처럼 따듯함이 느껴졌다.“만약 그 사람이 정수미, 그 늙은 여우 쪽의 사람이라면 아마 우리를 해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만약 윤소현 쪽의 사람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박윤우가 세밀하게 분석했다.“네 말이 맞아. 그러니까 우리도 경계심을 높이고 조심해야 해.”“알겠어.”말하다가 박윤우는 문득 박예찬의 컴퓨터를 보며 물었다.“형, 지금 뭐 해?”박예찬은 그제야 막고 있던 손을 걷으며 말했다.“별거 아니야. 그저 지엔 그룹의 지도를 보고 있었어.”박윤우는 컴퓨터 화면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자료를 본 순간 머리가 아파졌다.“보고 있으니 벌써 눈이 침침하네. 난 그만 노래나 들으면서 그림이나 그려야겠다.”박윤우는 자신이 잘하는 것과 못 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다.박예찬도 별말 없이 계속 자기 일을 해 나가고 있는데 유지훈이 갑자기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박예찬이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화면에는 그의 작은 얼굴이 나타났다.“예찬아, 집에서 뭐 하고 있어?”“무슨 일이야?”박예
박예찬은 최근에 계속 박씨 가문 옛 저택에서 지냈다.그는 경계심도 높고 눈치도 빨랐는데 요즘 따라 누군가가 계속 자신을 미행하는 것 같았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하여 이날 박예찬은 돌아오는 길에 정민기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일부러 구석으로 들어갔다가 뒤따라오는 범인을 잡을 속셈이었다.박예찬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뒤 어느 구석에 숨었다.이때, 그의 뒤를 따르던 정호철은 앞에 길도 없고 박예찬도 보이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져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어디로 갔지?”이때 눈앞에 한 무리의 사람이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다.박예찬도 쓰레기통 뒤에 숨었다가 그제야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당신이었군요.”그때 자신을 납치했던 사람이다.정호철은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아챘다.정민기는 재빨리 그를 제압했고 다시 박예찬에게 다가가 걱정스레 물었다.“예찬아, 괜찮아?”박예찬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요. 아저씨, 감사합니다.”말을 마친 뒤 손가락으로 정호철을 가리켰다.“저 사람이 그때 저를 납치했던 범인이에요.”그의 말에 정민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래. 알겠어. 바로 민정 씨랑 대표님한테 보고할게.”“네.”박예찬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정호철에게 다가가 물었다.“왜 저를 계속 미행했나요? 또 납치하려고요?”정호철은 자기 다리 길이보다도 작은 아이가 뿜어내는 카리스마에 그만 기가 눌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아니. 난 그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는 정수미의 건강 상태가 날로 악화하고 있고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동시에 박예찬이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몰래 뒤에서 보호해 주고 있었다.그의 말에 박예찬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사과요?”“그래.”정호철은 솔직하게 말했지만 박예찬은 쉽게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그렇게 정민기와 몇 명의 보디가드는 그를 차에 태우고 저택으로 향했다.박민정과 유남준은 집에
“전 괜찮아요.”“정말 다행이다.”정수미는 수화기에 대고 말하다가 문득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큰 문제가 없대. 그저 저혈당으로 쓰러진 거래.”박민정은 이 말을 왜 지금 자신에게 하는지 몰랐지만 그래도 차분하게 답해줬다.“네, 그러면 다행이네요.”“내일부터 다시 내가 아침밥 가져다줄게.”“그럴 필요 없어요.”박민정은 단번에 거절했다.또다시 자신 때문에 정수미가 쓰러졌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고 괜히 윤소현의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뺨 맞는 일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정수미는 그녀의 단호함에 가슴이 답답했지만 뭐라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다른 일 없으면 이만 전화 끊을게요.”“잠깐만. 그러면 내가 언제든지 너 보러 가도 돼?”정수미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아니요.”박민정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정수미는 한참이나 이미 끊긴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나에 대해 생각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비서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오늘 윤소현이 박민정의 뺨을 때린 일을 그녀에게 말해줬다.“뭐?”정수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되물었다.“그런데 왜 안 말렸어?”“말릴 새도 없이 큰 아가씨가 먼저 손을 댔습니다.”비서는 한껏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정수미는 이대로 병원에 누워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는 그대로 별장에 돌아갔다.윤소현은 한창 친구들을 불러 수다를 떨고 있었고 정수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차가운 얼굴로 그녀만 밖으로 불러냈다.“엄마, 왜 벌써 퇴원하셨어요?”윤소현이 걱정하는 척 묻자 정수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누가 너한테 민정이를 때려도 된다고 했어?”순간 윤소현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는데 분명 박민정이 그새 고자질했다고 생각했다.“엄마, 저는 단지 엄마가 너무 걱정돼서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간 거예요. 혹시 민정이가 말해줬어요? 엄마가 걱정되는 것보다 자기가 맞은 게 더 억울했나 보네요.”윤소현의 말에 정수미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박민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정수미는 윤소현더러 그녀를 잡으라고 했지만 윤소현은 그러기 싫었다.“엄마, 너무 편애가 심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몸도 안 좋은 사람이 매일 일찍 일어나 민정이네 회사 사람한테도 아침밥 해서 가져다주니까 쓰러지죠. 전 싫어요.”“소현아, 넌 모르겠지만 방금 민정이가 아니었으면 난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을 꺼야.”정수미는 정신을 잃기 전까지 자기 몸 아래에 박민정이 깔려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또한 그녀가 기꺼이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도 알고 있다.하여 이 일을 윤소현에게 말해줬지만 그녀는 이 말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친딸인데 당연히 그랬어야죠. 만약 똑같은 상황이었으면 저도 엄마한테 달려갔을 거예요.”정수미는 윤소현의 단호한 말에도 이상하게 믿고 싶지 않았다.“너도 그만 가봐. 혼자 좀 쉬어야겠다.”윤소현도 마침 병원에 있기 싫었던 참에 그녀는 냉큼 답했다.“네, 그럼 이만 가볼게요.”비서는 윤소현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정수미는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신신당부했다.“사람 보내서 민정이는 괜찮은지 알아봐. 몸도 성치 않은데 괜히 나 때문에 더 나빠지면 안 되니까.”“네.”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참아왔던 말을 토해냈다.“정 대표님, 전 그래도 둘째 아가씨가 좋아요. 큰 아가씨는 그저 빈말만 하시는 것 같거든요.”박민정은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져 정수미를 구해줬지만 윤소현은 그저 말만 하다가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갔다.정수미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그녀는 한껏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나도 알아. 민정이는 모든 면에서 소현이보다 뛰어나지만 소현이는 어렸을 때부터 내 손에서 자랐잖아. 그 애가 지금 이렇게 변한 건 내 책임도 커.”...박민정은 병실에서 나온 뒤 의사를 찾아가 간단하게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진서연은 그녀를 보자 마자 냉큼 달려와 물었다.“보스, 괜찮아요?”그녀는 박민정의 몸을 이
그러자 비서가 달려와 그녀를 말렸다.“큰 아가씨, 정 대표님께서 먼저 둘째 아가씨한테 직접 요리해 주고 싶다고 했어요. 둘째 아가씨만 탓할 게 아닌 것 같습니다.”“그럼 누구를 탓해야 하는데? 거절할 줄도 몰라? 엄마는 원래부터 몸 상태가 안 좋았잖아!”윤소현은 일부러 더 크게 화를 냈다.“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우리 엄마한테 저런 일을 시켜본 적이 없어.”비서도 그녀가 정수미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더는 말릴 수 없었다.박민정은 그제야 자신이 맞은 이유를 알고 윤소현의 손을 놨다.“저도 말렸는데 정 대표님께서 계속 오셨어요. 그리고 방금 제가 맞은 건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번에는 참지 않을 겁니다.”윤소현은 날카로운 그녀의 눈빛에 살짝 겁을 먹었다.하여 더 때리는 건 무리인 것 같아 수술실 문을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엄마, 제발 일어나요. 이대로 가면 저는 어떡해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정수미가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다.그리고 며칠 전에 윤소현은 이미 유언장에도 손을 댔기에 정수미가 죽고 장 변호사까지 처리하기만 하면 장씨 가문의 모든 재산은 다 그녀의 것으로 된다.그러나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한 시간 뒤, 수술실의 문이 열리면서 의사가 걸어 나오자 윤소현이 빠르게 달려가 물었다.“의사 선생님, 저희 엄마는 괜찮나요?”의사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고 윤소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간신히 참았다.그러다가 의사가 겨우 입을 뗐다.“지금은 맥박이 돌아왔지만 환자분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혹시 예전에 큰 병을 앓았었나요?”의사의 말에 윤소현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다행히 모두가 지금 정수미한테에 집중되어 있어 그녀의 표정 변화는 보지 못했다.박민정은 정수미가 살았다는 소식에 그제야 마음이 살짝 놓이는 것 같았다.비서는 의사에게 정수미가 지금까지 앓던 병을 모두 알려줬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수미는 수술실에서 밀려 나왔는데 문 어구에서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