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 엄마는 박민정의 아이디어에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박민정을 아무도 없는 구석으로 끌고 가서 말했다.“예찬 엄마, 최현아 씨가 왜 학부모 위원장이 됐는지 알아요? 유씨 가문에서 매년 유치원에 200억씩 기부하거든요. 그쪽도 유씨 가문의 며느리인 건 알지만 남편이...”눈이 멀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면서도 개의치 않았다.“만약 제가 더 기부하면요?”지원 엄마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학부모 위원장은 학교 측 의견도 있어요. 그리고 학부모 위원회 엄마들이 투표로 뽑는 건데 이제 막 들어온 사람에게 위원장 자리를 주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누가 감히 유씨 가문의 심기를 건드리겠어요? 다들 유씨 가문과 최현아 씨 모임에 들어가려고 난리예요. 최현아 씨 한마디면 남편 회사 일이 잘 풀리니까요.”유씨 가문의 실세가 아닌 유성혁도 이 정도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박민정은 호산 그룹을 아무나 쉽게 무너뜨릴 수 없다고 확신했다.지원 엄마는 그녀가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참지 못하고 물었다.“혹시 최현아 씨에게 밉보이는 행동을 했어요?”비록 최현아와는 사촌지간이지만 그래도 시누이 사이인데 보통 가족이라도 다투기 마련인 걸 더구나 여긴 대가족이었다.“저희 사이엔 큰 갈등이 있죠.”예전에는 말로만 박민정을 모함하던 최현아가 이제는 유지훈에게 자신의 아들을 해치라고 시킨 것이다.또한 그녀는 최씨 집안 부모님까지 불러 윤우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했다.이 말을 들은 지원 엄마는 자신이 엉뚱한 사람에게 붙은 건 아닌가 싶어 조금 겁이 났다.“예찬 엄마, 어차피 애들 학교 다니는 건 2, 3년밖에 안 되니까 그냥 최현아 씨한테 잘못 인정하고 고개 숙이고 조금만 참는 게 어때요?”참으라고?박민정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여러 번 참아주면 상대는 결국 자신을 우습게 볼 것이다.“알겠어요.”그녀는 지원 엄마에게 속내를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최현아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바로 가서 일러바칠지 누가 알겠나?지원 엄마가 떠나
박민정은 엄마로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준비하기로 결심했다.먼저 유치원 원장에게 투자에 대해 문의했고 원장도 흔쾌히 동의했다.그리고 박민정은 엄마들의 모임에 천천히 들어갈 준비를 했다. 처음에는 엄마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임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시간이 금세 지나갔고 박윤우는 잠든 눈을 비비며 불렀다.“엄마, 밥 먹을 시간이에요.”“그래.”박민정은 컴퓨터를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밥 먹을 시간이 되자 박윤우는 일부러 박민정과 유남준을 함께 앉혔다.“엄마 내 맞은편에 앉아요.”아이 맞은편에는 유남준이 앉아 있었다.박민정은 유남준을 힐끗 보고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자리에 앉았다.식사 자리에서 유남준의 음식은 가정부가 떠줬기에 더는 당근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유남준은 식욕이 별로 없었는지 대충 몇 입 먹는 시늉을 했다.두 사람은 아주 가깝게 앉았는데, 박민정의 팔이 이따금 유남준의 팔에 닿자 그녀가 살짝 멀어지려던 찰나, 식탁 아래에서 유남준이 손을 뻗어 박민정의 의자를 옆으로 끌어당겼다.드르륵-의자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나며 박민정의 몸이 함께 흔들리더니 그대로 그의 품에 쓰러질 뻔했다.“뭐 하는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안 보여서 의자를 잘못 잡아당겼네.” 유남준은 무심하게 대답했다.박민정도 더 따지지 않고 다시 의자를 옮기려는데 이번엔 유남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또 잘못 잡았어요?” 박민정은 다소 화가 났지만 때마침 박윤우가 말을 꺼냈다.“엄마, 아빠는 앞이 안 보이니까 좀 이해해 줘요.”박민정은 유남준이 아이에게 무슨 약이라도 먹인 듯 왜 윤우가 계속 그의 편을 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억지로 손을 빼고 고개를 숙여 식사를 계속했다.바로 그 순간 전화가 걸려 왔고 박민정은 에리의 전화인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에리, 무슨 일이야?”에리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세 부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심
박윤우는 잠들기를 거부했다. “엄마, 엄마랑 아빠가 저랑 형한테 이야기해 주면 안 돼요?”“무슨 이야기 듣고 싶어? 엄마가 나중에 들려줄게.”다정하게 말하는 박민정은 자신은 해줄 수 있어도 유남준은 필요 없다는 뜻을 전했다.유남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인공지능 로봇 가져와서 너희들에게 이야기 해주라고 할게.”“...”이 아빠가 정말 눈치도 없네.말하면 말한 대로 하는 유남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시뮬레이션이 잘 된 지능형 로봇을 가져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뿐만 아니라 아이와 함께 숙제를 해주고 간단한 집안일도 돕게 했다.박윤우는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로봇이 너무 재미있었는지 박예찬과 함께 얼른 침실로 들어가 로봇을 조작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은 두 아이가 금방 말을 듣자 문득 유남준이 기꺼이 받아줬더라면 해외에서 자신 따라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위층으로 올라가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불렀다.“오늘 학부모 위원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멈칫한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덧붙였다.“내가 애들 아빠인데 아이를 몰래 낳더니 아직도 숨기려는 거야? 나도 알 권리가 있어.”박민정은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가 갑자기 학부모 위원회에 물어봐서 망설였다.“학부모 위원회 위원장이 최현아 씨인데, 한 아이의 학부모가 알려줬어요. 학교 측 담당자와 가까운 사이인데 아이들을 따돌리고 왕따 시킬 수 있다고요.”유남준은 오늘 박민정이 아이와 이야기하는 걸 들으며 살짝 망설이는 걸 보아 분명 말하지 않은 일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런 일인 줄은 몰랐다.“최현아의 위원장 자리는 유씨 가문이 수년에 걸쳐 유치원에 투자한 것과 관련이 있을 거야. 내 기억이 맞다면 할아버지가 유치원의 최대 주주지.”박민정은 유치원에 투자한 사람이 유성혁인 줄은 알았는데 그 배후가 유명훈인 걸 보니 증손자인 유지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모양이었다.“그 얘기는 들었어요.” 박민정이 말하자 유남준은 카드를 꺼내 박민정에게 건넸다.“여기 있
박민정은 지원 엄마의 SNS도 살펴봤는데 딸 자랑과 인생 글귀를 제외하면 그녀가 직업도 없고 돈도 없이 집에서 시어머니에게 끌려다닌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박민정이 SNS를 살펴보던 중 엄마들 단톡방에 누군가 문자를 보냈다.[일요일에 다들 시간 되세요? 우리 집에 파티하러 와요.] 최현아였다.평소 최현아는 해외 출장을 가지 않을 때면 엄마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 파티를 하곤 했는데 심심한 것도 있었고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함도 있었다.이번에 초대를 하며 최현아는 특별히 박민정도 언급했다.오늘 박민정을 망신시키지 못했으니 박민정이 파티에 오기만 하면 반드시 난처하게 만들 생각이었다.먼저 답장을 보낸 건 지원 엄마였다.[좋아요, 위원장님. 빨리 만나고 싶네요.]벌써 자정인 데다 박민정은 가사를 써야 하는 상황인데 지원 엄마가 아직 깨어 있었고 게다가 가장 먼저 답장을 보낼 줄은 몰랐다.다른 사람들도 잇달아 참석하겠다며 답장을 보냈고 박민정이 답장을 하지 않자 지원 엄마가 따로 메시지를 보냈다.[예찬 엄마, 좋은 기회인데 이번 기회에 최현아 씨와 더 가까워지는 게 어때요?]박민정은 이처럼 학부모 위원회 엄마들을 한 번에 다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드물었기에 지원 엄마에게 이렇게 답장했다.[네, 알려줘서 고마워요.]최현아와 가까워지려 하는 건 아니었다.박민정 역시 단톡방에 답장을 보냈다.[그래요, 내일 봬요.]답장을 마친 박민정은 밤새 유명 브랜드 의류 본사에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원피스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박민정은 자신의 키와 몸무게, 사이즈를 보내며 맞춤 제작은 필요 없고 입을 수 있는 드레스면 된다고 말하며 돈은 얼마든지 내겠다고 했다.돈이 많으니 일이 무척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마찬가지로 박민정은 전에 엄마들이 원했던 가방이나 구하지 못한 팔찌, 주얼리 등을 구입했다.단순히 그들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할 때도 기교가 필요했다. 처음부터 비싼 선물을 주면 오히려 호감 대신 반감만 살 수 있었다.다음 날
주식 인수가 무척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박민정이 시세보다 3배나 높은 가격을 제시하자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이제 그녀는 유명훈을 제치고 54%의 지분을 가진 국제 유치원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절차가 거의 마무리되자 원장이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정민기는 그녀를 유씨 가문 저택으로 데려다주었다.유씨 가문 저택,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는 동쪽에 어르신과 작은 아들, 즉 유남준 부친 일가가 있었고, 서쪽에는 큰아들이 살고 있었다.박민정은 도착하자마자 서쪽 집사의 안내를 따라 최현아가 사는 곳으로 향했다.차로 10분 정도 달려서 최현아와 유성혁의 집에 도착했다.멀리서 봐도 정자와 누각이 곳곳에 고급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박민정이 차에서 내리자 탁 트인 잔디밭에는 이미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고, 아기 엄마들은 모두 최고의 복장으로 곱게 차려입고 도착해 있었다.다소 평범해 보이는 지원 엄마도 목과 손목에 값비싼 보석을 차고 있었다.다만 주얼리와 들고 있는 가방 모두 오래된 모델이라 주변에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줄곧 박민정을 기다리던 그녀는 박민정이 도착하자 다가가려는데 어제와 다른 박민정의 모습을 발견했다.눈앞에 있는 박민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억’ 소리가 났다.다른 아기 엄마들도 박민정이 입은 옷을 훑어봤는데 귀걸이마저 1억 이상이었다.누가 일류 재벌이고 누가 평범한 사장인지 한눈에 드러났다.“예찬 엄마가 들고 있는 가방, 전 세계에 단 두 개뿐인 거 아니에요? 항상 갖고 싶었는데 남편이 우리 집 재산으로는 못 산다던데요.”“저 팔찌, 저도 눈여겨본 건데 10억짜리예요!”“옷도 맞춤 제작한 것 같은데 저거 최소 1년 전에 예약해야 할 걸요.”“위원장님 가방 중 가장 비싼 게 4억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죠? 예찬 엄마가 들고 있는 이 가방은 최소 6억 이상이겠는데요?”“...”아기 엄마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박민정은 그들의 부러운 눈빛을 바라보며 자신이 옳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알았
지원 엄마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다. 유지훈은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정도였지만 박예찬에 비하면 훨씬 부족했다.그래도 감히 최현아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던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설명했다.“위원장님, 그런 말씀이 어디 있어요. 우리 반 애들 다 똑똑하죠.”이 한마디에 자리에 있던 엄마들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그 누구도 자기 자식이 뒤처진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박민정도 지원 엄마가 누구의 기분도 상하지 않게 모두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는 것을 이해했다.그녀는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은 돈 위에 군림하는 자라고 생각했다.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아이 엄마들은 각자 남편과 아이에 대한 이야기, 기본적으로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박민정은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매 사람마다 기억하고 싶었지만 그게 힘들었다. 모든 사람이 유남준처럼 한번 보면 바로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지원 엄마가 다가왔다.“예찬 엄마, 편하게 있어요. 처음엔 모르는 게 당연하죠. 앞으로 천천히 친해지면 돼요.”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지원 어머니, 학부모 위원회에서 활동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거의 1년 됐죠.”“그럼 이 사람들을 다 알아요?”지원 엄마는 곧바로 자랑스럽게 말했다.“당연하죠, 다 제가 데려온 사람들인걸요.”말을 마친 그녀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자기가 데려온 사람들인데 그녀의 능력이 부족하다며 대화하기를 꺼려했다.“그럼 제가 모든 분들에 대한 정보 프로필을 만드는 걸 도와주실 수 있나요?”지원 엄마는 당황했다.“정보 프로필이 왜 필요해요?”“제가 사람 얼굴을 잘 까먹어서 얼굴을 기억하기가 힘들거든요. 아이를 위해서 돌아가서 사진 보면서 외워두려고요.”지원 엄마는 아이를 위해 하는 일이라는 말에 더 이상 의구심을 갖지 않았지만 맨입으로 하려 하지는 않았다.박민정은 주머니 속에서 상자를 꺼냈다.“저를 잘 챙겨주셔서 특
얼마 지나지 않아 지원이 엄마는 최현아에게서 그리로 오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는 박민정에게 미안해하며 말했다.“잠시 저쪽에 갔다가 다시 올게요” 박민정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 지금 당장은 최현아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게 더 중요했다. 박민정은 이해했고 그녀를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그 후 남은 대부분의 시간은 최현아가 엄마들과 수다를 떨고 자랑을 늘어놓는 시간이었다. 박민정은 구석에 앉아 있었다.“위원장님 남편분이 수백억 원을 들여 시장 사업을 독점하고, 공동 구매 플랫폼을 준비 중이라면서요?”한 엄마가 물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최현아는 그녀의 물음을 정정했다.“수백억 원이 아니라 자그마치 1조 원이에요. 이 1조 원은 아직 초기 투자금이고 앞으로 얼마나 더 들어갈지 모르겠어요.”한 사업 분야를 독점하려면 몇백억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1조 원? 이제 일주일밖에 안 된 시간이라고 했다.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유씨 가문의 방계마저 사업을 위해 물 쓰듯 돈을 쓰고 있었는데, 현재 일가를 책임지고 있는 유남우는 매개 프로젝트에 얼마를 많은 돈을 쏟아붓는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현아 씨, 제 남편도 이 업계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시간이 되시면 혹시...”그중 한 엄마는 이번 기회에 자기 남편을 유씨 가문에 빌붙게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현아는 단칼과 같이 잘랐다. “어머, 미안해요. 사업에 관한 건 보통 제 남편이 결정하고 저는 집에서 돈 쓰는 담당이에요.”정말 재수 없을 만큼 얄미운 말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감히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때 최현아가 곁에 있던 한 엄마에게 눈짓했다. 그 엄마는 이를 보고 박민정에게 물었다.“예찬이 어머니 남편분은 무슨 일 하시죠?”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또 다른 엄마가 말을 가로챘다.“박예찬 어머니 남편분이 바로 유남준 씨잖아요? 교통사고로 앞을 볼 수 없어서 지금은 아마 일을 할 수 없죠?”최현아는 차를 마치는 척 찻잔을 들어 올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최현아는 일부러 자기 집에서 준비한 이 파티에서 박민정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얼른 화제를 돌려 요즘 유치원에서 준비하고 있는 새로운 개혁안을 언급했다.유치원에 대한 새로운 개혁 방안을 이야기하자 엄마들은 다시 그녀와 함께 떠들썩하게 토론을 시작했고 박민정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레 사라졌다.요즘 아이들은 모두 출발선부터 다퉜고 박예찬이 다니고 있는 이 국제 유치원은 입학과 동시에 두 가지 언어와 수학 및 기타 취미 프로그램부터 시작했다.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좋은 교육을 받게 하려고 엄마들은 하나둘 앞다투어 최현아의 환심을 사는 데 급급했다.그중 박민정을 가장 놀라게 한 건 최현아가 그 자리에서 아이들의 좌석을 배정하는 것이었다.20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학급이었지만 최현아는 자기에게 아부하는 학부모들을 위해 맨 앞자리와 가운데 자리를 배정해 주었다. 그러고는 박민정에게 말했다.“예찬이 엄마, 예찬이는 성적이 좋으니 다른 아이들처럼 앞자리에 앉을 필요 없지?”사실 박예찬에게는 앞자리나 뒷자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민정은 아들이 차별을 당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쟁취할 것은 쟁취해야 하지.“그럼 지훈이는요? 그 아이도 뒷자리에 앉히나요? 성적이 좋으니까요?”박민정이 웃으며 물었다. 만약 최현아가 유지훈을 뒷자리에 앉히지 않겠다고 말하면, 그 뜻은 자기 아들의 성적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최현아는 알고 있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우리 지훈이는 시력이 좋지 않아서.”박민정은 듣자마자 옆을 가리켰다. 지원이 엄마처럼 별로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엄마였다. 그녀는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박민정은 그녀의 아들이 반에서 유일하게 안경을 쓴 한 학생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학생의 이름은 아마 도한이었던 것 같았다.“그럼 도한이도 제일 앞자리에 앉혀야죠. 어떻게 맨 구석에 앉힐 수 있나요.”최현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박민정이 순간 다른 엄마들을 끌어들일 줄은
박민정이 사라졌을 무렵 유남준은 정수미와의 모든 협력을 거절했는데 이는 오로지 박민정에게 자신이 화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하여 처음에 박민정이 찾아와서 자신이 친딸이란 사실을 확인해 줬을 때까지도 정수미는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엄마의 사랑을 돌려주려고 하니 유남준이 분명 기회를 줄 것 같지 않았다.그런데도 정수미는 갖은 방법을 이용해서 PMJ 그룹에 존재하는 잠재적인 상업적 위험을 제거해 주려 했다.오늘 유남준이 없으니 진서연은 어쩔 수 없이 박민정더러 가보라고 했다.회의실 안.정수미는 떨리는 마음으로 박민정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민정아.”“정 대표님, 안녕하세요.”자신보다 한껏 덤덤한 얼굴의 박민정을 보고 정수미는 살짝 실망했지만 그래도 의자를 당겨주며 앉으라고 했다.“민정아, 나 PMJ 그룹에 투자하고 싶어.”박민정은 아직 회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다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되자 이따 저녁에 유남준의 견해는 어떤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그러자 정수미가 재빨리 필기하고 있는 그녀를 말렸다.“적을 필요 없어.”“무슨 뜻이에요?”박민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묻자 정수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 손에 지금 적지 않은 자금이 있는데 다 너한테 줄게.”그녀의 말에 박민정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답했다.“괜찮습니다.”“그리 급하게 거절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정수미는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고 또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을 화나게 할까 봐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나도 지금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고 지난번에는 내가 말실수했어. 나도 네가 내 돈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알아.”이 사실을 진작에 알아야 했다. 만약 박민정이 진짜 돈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박씨 가문의 재산을 전부 남동생 박민호에게 넘겨주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박민정은 다시 단호
조하랑은 집을 깔끔히 정리한 뒤 너무 힘들어서 침대에 털썩하고 누웠다.이때 도우미가 각종 재료가 듬뿍 들어간 국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사모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어르신도 말씀하셨는데 젊은 사람들은 평소에도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기에 이런 음식으로 많이 보충해야 아이가 빨리 들어선다고 했거든요.”조하랑은 지금 국물만 봐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아니요.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으니까 가져가세요.”“네? 벌써 입덧하나?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닐 텐데요.”도우미의 말에 순간 조하랑은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가 숨고 싶었다.그렇게 도우미를 방에서 내보낸 뒤 그녀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민정아.”박민정은 회사에서 한창 업무 내용에 대해 숙지하고 있다가 조하랑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하랑아, 무슨 일이야?”“말하자면 길어.”조하랑은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전부 그녀에게 말해줬다.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은 어이없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할아버지가 그런 수를 썼다고?”“그렇다니까? 나 지금 결혼한 게 너무 후회돼.”조하랑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이상한 일이 한 가지 더 있는데...”“무슨 일?”조하랑은 또다시 자신이 결혼 전날 납치되었던 일에 대해서도 박민정에게 말해줬다.그러자 박민정이 대뜸 그녀에게 되물었다.“그날 저녁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너무 찜찜한게 그날 내가 정신을 잃으면서 분명 그 남자들을 봤는데...”뒷말은 결국 하지 못했다.“이 일은 무조건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어.”박민정은 분명 이 일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는 걸 느꼈고 또 혹시나 그 남자들이 진짜 다른 나쁜 일을 했으면 어떡하나 싶었다.조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인우 씨도 이미 사람을 보내서 조사하고 있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결과가 없는 걸 보면 분명 간단한 일은 아닐 것 같아.”“그래도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지. 내가 민기 씨더러 한번 알
조하랑은 힘껏 그를 밀쳐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세 살짜리 애로 보여요?”김인우는 워낙 조건이 뛰어난 사람이니 지금까지 잠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을 리가 없었다.조하랑이 믿지 않자 김인우는 마지못해 진실을 털어놓았다. “몇 년 전에 어떤 일을 겪은 후로 여자에게 더 이상 관심이 생기지 않았어요.”조하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그 뒤로는요?”“그 뒤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정상 남자로 보이기 위해 적지 않은 여자를 만났죠.”조하랑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무슨 일이었는데요?”김인우는 말하기 싫어했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신지 알아요?”조하랑은 김씨 집안에 온 이후 김인우의 부모님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 뿐 구체적인 사연은 몰랐다.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출산 중 양수 색전증으로 돌아가셨어요.”처음엔 가벼운 표정이었던 조하랑은 점점 김인우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냈다.김인우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땐 끔찍한 광경만이 남아 있었어요.”조하랑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그럴 줄 알았으면 묻지 않았을 거예요.”김인우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미 오래전 일이니까.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사실 어젯밤이 되어서야 그는 자신이 정상임을 깨달았다.조하랑은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김인우는 그녀가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 못마땅했던지 화제를 돌렸다. “그러니까, 이제 하랑 씨가 나한테 책임져야 돼요.”“네?” 조하랑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책임이요?”“남자의 첫 경험도 책임져야죠. 남자의 청춘은 청춘이 아니에요? 서로 책임지기로 해요. 그게 공평하잖아요.”김인우가 뻔뻔하게 말하자 조하랑은 황당해하며 대꾸했다. “그럴 거면 우리 서로 퉁치죠. 아무도 손해 본 게 없잖아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김인우가 그녀를 붙잡았다.“놔요!”“안 놔요. 하랑 씨가 내 요구를 들어줄 때
“착한 사람이라뇨...” 조하랑은 그 말을 중얼거리며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김인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랑 씨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라요.”그렇게 말하며 어느새 몸을 조하랑 쪽으로 더 가까이 움직였다. 조하랑도 어찌된 영문인지 피하지 않았고 그렇게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김인우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붙잡고 조하랑을 안아 올려 어느 노인네의 눈을 피해 은밀한 곳으로 옮겼다. 그 노인네도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번에는 거실에 CCTV를 설치하지 않았다.하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한 김훈은 하인에게 문 너머의 상황을 엿보게 시켰다. 잠시 후, 하인은 기쁜 표정으로 달려왔다. “어르신, 성공했습니다.”“정말인가?” 김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 틀림없어요.” 하인이 확신하자 노인은 마음속 무거운 짐을 덜어낸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편히 잘 수 있겠구나. 자, 우리도 잠이나 자자.”“네, 알겠습니다.”...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조하랑이 눈을 떴을 때 온몸이 쑤셨다. 전날 밤의 모든 기억이 선명했고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어떻게 그 상황을 이겨내지 못한 걸까?옆에 누운 김인우는 아직 잠들어 있었고 무의식중에 다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조금만 더 자요.” 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조하랑은 갑작스러운 친밀함에 익숙하지 않아 김인우를 흔들어 깨웠다. “이거 놔요. 이제 일어나야죠.”김인우는 졸린 눈을 간신히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때리는 거예요?”어젯밤의 일은 분명 그녀도 동의했던 일이었다.조하랑은 얼굴이 붉어졌다. “어젯밤 일은 그냥 사고였어요.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잖아요. 걱정 마요, 책임지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도 예전처럼 지내요.”그녀는 관계를 명확히 하려 애썼지만 김인우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책임질 필요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자는 건가?김인우는 문득 깨달았다. “설마... 처음이
김인우는 이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지금 이성과 충동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조하랑 역시 불편했다. 수년간 솔로로 지낸 그녀도 결코 무감정한 사람이 아니었다.“인우 씨... 지금... ”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머뭇리자 김인우는 뭔가를 깨닫고는 얼른 그녀를 놓았다.“다른 방 좀 살펴보고 올게요.”“그래요.”조하랑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김인우와 거리를 두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조하랑은 점점 더 참기 힘들어졌다.김인우 역시 괴로웠다. 다른 방들을 확인해 보았지만 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지친 발걸음으로 다시 거실로 돌아온 김인우는 조하랑과 마주 앉았고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말을 건네는 것조차 어려워했다.“구조 요청이라도 할까요?” 조하랑이 드물게 기지를 발휘하자 김인우는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어요. 아까 확인했는데 핸드폰들이 다 사라졌어요.”“뭐라고요?” 조하랑은 더 깊은 절망에 빠졌다.몸의 열기는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고 김인우를 바라볼 때마다 그의 모든 것이 탐나기 시작했다.김인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상황을 잊기 위해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그럼, 우리 뭐라도 얘기할까요?”“좋아요. 무슨 얘기할까요?”김인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하랑 씨, 강연우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강연우의 이름이 나오자 조하랑의 마음은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금 진정됐다.“학교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때 그 사람이 참 잘생겼고 법학과였거든요. 연애 경험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먼저 쫒아다녔어요.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사귀게 됐지 뭐예요.”과거를 떠올리는 조하랑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부드러워졌다.이를 본 김인우는 괜히 질투가 일었다. “그리고 나서는요?”“그냥 연애했죠.” 조하랑은 짧게 답한 뒤 김인우를 바라봤다. “인우 씨는요? 뉴스에서 여자들이랑 많이 엮였던데, 혹시 첫사랑한테 상처라도 받았어요?”김인우는 비웃으며 말했다. “웃기지 마요. 내가 여
김인우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그야 당연하죠. 내가 하랑 씨가 좋아했던 그 녀석보다 훨씬 잘생겼거든요.”“그 녀석이요?” 조하랑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강연우 말이에요.” 김인우는 여전히 그를 경쟁자로 여기고 있었다.이 말에 조하랑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나 그 사람 안 좋아한지 꽤 됐거든요.”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김인우는 그녀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정말 신경 안 써요?” 김인우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물었다.조하랑은 왠지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숙였다.“네, 신경 안 써요.”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말할수록 김인우는 더 의심스러웠다.김인우는 이미 조하랑과 강연우의 과거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당시 조하랑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난한 청년과 결혼하려 했고 강연우 역시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걸 뻔했다.그런 뜨거운 사랑, 그런 소중한 기억을 과연 쉽게 잊을 수 있을까?김인우는 생각할수록 묘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조하랑은 그의 침묵에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늘따라 몸이 이상했다. 김인우 곁에 있으니 더더욱 불편했고 머릿속에는 온갖 이상한 생각들이 스쳤다. 그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몸매도 좋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까지 들 정도로.김인우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그래요, 병원 가요.”그는 조하랑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향했다.하지만 문에 도착한 순간 잠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문 열어요!” 김인우는 화가 나서 소리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인들 역시 모두 사라진 듯했다.조하랑은 문에 기대며 말했다.“누가 문을 잠갔죠? 할아버지는 어떻게 들어오시려고요?”“그 양반이 들어온다면 완전 변태인 거예요.” 김인우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자 조하랑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할아버지한테 그런 말 하지 마요.”김인우는 그녀가 아직도 김훈을 두둔하는 걸 보며 답답해했다.‘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 나중에
하인은 김훈의 뜻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주방으로 가더니 국 한 냄비를 들고 왔다.“국 좀 마셔라.” 김훈은 두 사람에게 국을 권했다.김인우는 거절하려다 김훈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는 멈칫했다.“왜? 할아버지가 증손주를 보고 싶다는데 안 되겠냐? 국 한 그릇 마시라는 것도 거부하는 거냐?”이 말을 듣고 나니 김인우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할아버지, 앞으로 재촉만 안 하신다면 국 한 그릇이 아니라 열 그릇도 마시겠습니다.”조하랑도 분위기에 따라 국을 한 그릇 들이켰다.“할아버지, 이 국 정말 맛있어요.”김훈은 인자한 표정을 지었으나 눈빛에는 슬쩍 장난기가 스쳤다.“맛있으면 더 마셔라.”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하랑아, 인우야, 이 할애비를 원망하지 말아라. 나도 너희 둘의 감정에 불 좀 지펴주려는 거니까.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언제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겠니?'김인우와 조하랑은 김훈이 뭔가 꾸미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국 한 냄비를 모두 비워버렸고 거기에 밥과 반찬도 푸짐하게 먹었다.김인우는 심지어 겉옷까지 벗으며 말했다.“할아버지, 이 국 정말 보양에 좋은가 봐요. 몸이 엄청 뜨겁고 힘이 넘칩니다.”김훈은 그 말을 듣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렇지. 내가 좋은 재료를 듬뿍 넣었거든.”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앞으로 이렇게 몸에 좋은 건 밤에 먹지 말아야겠어요. 너무 덥네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는데 이때 김훈이 그를 불러 세웠다.“어디 가려고?”“너무 더워서 바람 좀 쐬려고요.”김인우가 문으로 향하자 김훈은 단호하게 말했다.“나가지 마. 예찬이도 아직 안 돌아왔고 너희 둘 다 이 늙은이와 함께 있어야지.”김훈의 강한 말에 두 사람은 거절할 수 없어 그대로 남았고 결국 가족 셋이 거실에 앉아 TV를 보았다.오늘따라 김훈은 평소 즐겨보던 뉴스 대신 로맨스 드라마를 틀었다.이를 본 김인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할아버지, 이런 거 좋
설인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문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며 결국 방성원의 모습은 그녀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머리가 지끈거렸고 손에 쥔 휴대폰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휴대폰 화면 속에는 과거 설씨 집안이 어떻게 경쟁자에게 모함당하고 함정에 빠졌는지, 그 모든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방씨 집안의 이름은 없었다.설인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아빠, 설마... 아빠가 잘못 알고 계셨던 거예요?”하지만 허공은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고 텅 빈 방안엔 그녀의 메마른 목소리만 메아리쳤다.설인하는 너무 지쳐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수년간 품어왔던 증오. 그토록 미워했던 사람을 단 하루 만에 오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그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한편, 방성원은 당시 설인하의 아버지가 누구를 만났는지 조사하고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버린 탓에 많은 것들이 이미 사라지고 희미해져 있었다.방성원은 담배를 연달아 피웠다. 한 개비, 또 한 개비. 하지만 짙은 연기가 그의 답답한 마음을 조금도 풀어주지 못했다.그때, 아이의 작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방성원은 화들짝 놀라 담배를 급히 비벼 끄고 창문을 활짝 열고는 소리쳤다.“아주머니!”보모가 재빨리 방에서 나왔다.“대표님!”방성원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애가 어떻게 나왔어요?”보모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아까부터 은정이가 계속 울면서 엄마, 아빠를 찾길래... 제가 잠깐 데리고 나왔어요.”방성원은 혹여나 딸이 자신의 담배 냄새를 맡을까 걱정이 앞섰다.“애 데리고 가서 설인하랑 놀게 해요. 다만, 설인하가 애를 데리고 도망치진 못하게 조심하고.”“네.”보모는 활짝 웃으며 아이를 안고 설인하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둘이 사라지자 방성원은 욕실로 향했다. 그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 옷까지 갈아입은 후 설인하의 방 앞에 섰는데 멀리서부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설인하와
방성원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설인하 앞에 섰고 차가운 눈빛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은정아, 아빠한테 와.”방은정은 방성원의 손길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작은 두 눈 가득 망설임과 혼란이 서려 있었다.설인하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더 꽉 끌어안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뒤쪽 문이 쾅 하고 닫혔고 설인하는 당황해 외쳤다.“방성원, 당장 문 열어! 날 내보내!”방성원은 비웃듯 미소를 지었다.겨우 이 안으로 끌어들였는데 다시 나가게 해달라고?“만약 내가 안 열어주면?”설인하는 한 손으로 방은정을 안고 다른 손으로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그러나 방성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품에서 아이를 낚아챘다.아직 어린 방은정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채 단순한 놀이로 착각하고 까르르 웃었다.설인하의 품이 텅 비자 그녀는 휴대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성원의 팔에서 아이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 여자가 성인 남성을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방성원은 한 손으로 설인하를 가볍게 제압한 채 다른 손으로 아이를 보모에게 넘겼다.“방으로 데려가요.”“네”보모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고 감히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설인하는 방성원에게 억눌린 채 그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그녀는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방성원, 이 개자식아! 은정이를 돌려줘! 은정이는 내가 열 달 동안 품어 키운 내 딸이야! 넌 고작... 고작 삼 초면 끝났잖아! 대체 무슨 권리로 내 아이를 빼앗는 거냐고!”방성원은 그녀의 새로운 욕설에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밖에서 안 좋은 것들만 배워온 모양이군.’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좋아, 이제 말발이 꽤나 늘었네?”그는 설인하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어딜 데려가는 거야? 놓으라고!”설인하는 버둥거리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어딜 가겠어. 네 정신 좀 차리게 하려는 거지.”방성원은 그녀를 과거 함께 지냈던 방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