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모?서다희의 말을 듣고도 박민정의 얼굴은 평온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그녀도 과거 유씨 가문에서 온갖 굴욕을 다 당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유남준이 언제 한번 자신을 도와주는 걸 보지 못했다.서다희는 흠칫하면서 목소리를 낮췄다.“대표님이 구해주신 걸 생각해서라도 좀 도와주세요, 네?”박민정은 그 말에 외국에 있을 때 유남준이 자신을 도와 용 사장 일을 처리해 준 것을 기억해 냈다.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내가 가도 뭘 할 수 있어요. 한 명은 눈이 안 보이고 한 명은 귀가 잘 안 들리는데 내가 도와줄 수 있겠어요?”박민정은 솔직히 유씨 가문 같은 힘 있는 집안이라면 전혀 그녀의 체면 따위 봐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건...”서다희는 망설였다.이를 본 박민정은 그가 포기한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갈 준비를 했지만 서다희가 또 한 번 그녀를 붙잡았다“사모님이 계시면 제가 마음이 놓여요.”서다희는 박민정이 아주 씩씩한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곁에 있으면 적어도 저택 쪽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윤우가 끼어들었다.“엄마, 아저씨가 불쌍하게 버려졌는데 그냥 도와주세요.”박예찬은 왜 갑자기 동생이 쓰레기 아빠를 돕는지 조금 의아해했다.“알았어요. 그럼 두 아이부터 돌려보낼게요.”박민정은 윤우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동의했고 서다희는 곧바로 계산을 마친 뒤 아이들을 차에 태워주었다.두 아이를 돌려보내고 나서야 박민정은 정민기에게 자신을 저택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집에 있던 박예찬은 참지 못하고 윤우에게 물었다.“왜 엄마보고 쓰레기 아빠를 도와주라고 했어? 엄마가 괴롭힘당하면 어떡해?”“형, 나도 저택에 가보고 싶은데 좋은 생각 있어?”박윤우가 이렇게 말하자 박예찬은 곧바로 그의 생각을 알고 즉시 거절했다.“안 돼, 너무 위험해.”“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를 잡을 수 없어. 유씨 가문을 알지
유씨 가문 저택.전화를 받으러 나간 고영란은 기분이 좋았다.평소 유난히 자신과 거리를 두던 박예찬이 먼저 그녀에게 다가오니 무척 의외였다.하지만 이때까지도 유남준은 아직 오지 않았고, 주변에서는 작은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유남준 안 오는 건 아니겠지?”“오기로 하지 않았어, 왜 안 와? 유남준은 한 번 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사람인데.”“너희들 소문 못 들었어? 유남준 눈이 멀어서 아마 지금 오기 창피할 거야.”“어? 그럴 리가 없잖아?”모두들 유남준이 진짜로 앞이 안 보이는지 궁금해했고, 사실이라면 좋은 쇼가 될 것 같았다.드디어 유남준이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모두가 현관문을 바라보자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날카롭던 눈이 더 이상 빛나지 않았고 집사의 안내를 받아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유남준은 도착해서도 사람을 부르지 않았고 고영란이 다가와 유명훈에게 말했다.“아버님, 남준이가 교통사고가 나서 의사가 좀 더 회복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왔으니까 이제 좀 쉬게 놔두는 게 어때요?”유남준이 정말 앞을 못 보는 것을 확인한 유명훈은 더 이상 그를 힘들게 하지 않고 내보내려고 할 때 유성혁이 옆에서 말을 꺼냈다.“큰어머니, 남준이가 오랜만에 나와서 다들 모였는데 서둘러 돌아갈 게 뭐가 있어요.”“그래요, 우리도 남준이랑 얘기 좀 나누고 싶어요.”다른 사람들도 거들자 고영란은 다소 어두운 얼굴로 유명훈을 바라보았고 유명훈은 목발을 짚고 일어났다.“저녁 먹고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야 하니 쉬더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고영란, 넌 내 서재로 와.”“네.”고영란은 곧 질책받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그녀가 떠나자마자 망설일 게 없어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유남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유남우는 차분히 차를 마시며 모든 상황을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유성혁이 유남준에게 다가갔다.“남준아, 너한테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네.”유남준은 그 말에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누구?”유성혁은 멈칫
유성혁은 혼자 앉아 있는 유남준을 보고도 여전히 못마땅했다.그는 사고가 나기 전 유남준이 얼마나 오만하게 굴었는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유남우를 돌아본 유성혁은 그가 유남준을 위해 나서지 않자 망설임 없이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걸어왔다.“유남준, 내 손에 든 와인을 마시고 나한테 사과하면 지난 일은 다 잊어줄게.”유성혁은 손에 든 와인을 흔들며 침을 뱉어 앞으로 건넸고 유남준은 그의 말에 고개도 들지 않았다.유성혁은 그가 자신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 것을 보자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직도 네가 과거의 유남준이라고 생각해? 지금 난 널 개미처럼 짓밟을 수 있어. 눈치껏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이를 보면서도 감히 나서서 도와줄 엄두를 내지 못했다.유남준이 천천히 주먹을 쥐며 유성혁에게 한 방 먹이려는 순간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남준 씨, 왜 날 기다리지 않고 혼자 왔어요?”박민정이다. 박민정은 도착하자마자 구석에 앉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유남준을 보았다.과거 유남준이 자신을 도와줬던 걸 떠올리며 기억상실증에 시각장애인인 데다 두 아이의 아빠인 그가 괴롭힘을 당하는 걸 지켜볼 수 없었다.박민정의 목소리를 들은 유남준은 곧바로 주먹을 풀고 일어나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박민정을 향해 걸어갔다.“민정아, 안 올 줄 알았어.”박민정이 갑자기 다가오자 주위의 모든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고, 한쪽에서 유유히 차를 마시던 유남준도 그들을 바라보았다.그는 목울대가 일렁거리며 손에 든 차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 같았다.박민정은 유남준의 곁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의 팔짱을 낀 뒤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유성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아주버님, 남준 씨가 아직 몸이 회복이 안 돼서 술을 못 마셔요. 이 술은 아주버님이 직접 마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박민정은 유성혁이 술에 침을 뱉는 것을 봤다.유씨 가문에서 정말 별꼴을 다 본다. 앞 못 보는 장님을 괴롭히는 게 소위 말
박민정은 유남준이 줄곧 참아왔다는 사실을 몰랐다.눈앞이 보이지 않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죽기를 바랐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아직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고마워요.”박민정은 자리에 앉아 그에게도 과자 한 조각을 건넸다.“당신도 먹어요.”두 사람이 함께 디저트를 먹는 장면이 유남우의 눈에 들어왔고 그의 따뜻한 눈빛이 갑자기 조금 차가워졌다.비서 홍주영이 왔을 때 그도 한눈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구석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두 사람은 모욕을 당하고도 전혀 개의치 않고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홍주영은 박민정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녀가 무척 아름답고 행동 하나하나에 부드러움과 당당함이 엿보이는 걸 발견했다. 특히 맑은 샘물이 가득 찬 듯한 눈빛을 보면 유남준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 게 이해가 되었다.한편 유명훈의 서재에서는 고영란이 질책을 받았다.고영란이 모두를 속이고 유남우에게 유남준을 사칭하라고 시킨 것 때문이었다.고영란은 욕을 먹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집사가 와서 시간이 되었다고 전해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지팡이를 짚고 나간 유명훈은 박민정도 온 것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밥부터 먹고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자고 했다.그때 고영란은 도우미로부터 예찬이 왔다는 말을 들었다.“이제 추우니까 애 좀 쉬게 하고 맛있는 거 준비해 줘.”도우미는 고개를 끄덕였고 박윤우는 도우미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돌아와 호화로운 집안을 둘러보았다.“할머니는 어디 계세요?”“사모님께서는 오늘 너무 바쁘시니 일단 방에서 푹 쉬고 일 끝나면 보러 오시겠다고 하셨어.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고맙습니다.”박윤우가 얌전한 얼굴로 대답했다.“참 예의 바르네.”도우미는 귀엽고 어른스러운 박윤우를 보고 순식간에 마음이 녹아버렸다.박민정은 막내아들이 몰래 택시를 타고 이곳까지 온 사실을 모른 채 유남준과 함께 식사한 뒤 조상님께 참배를 하고 돌아갈 예정이었다.그런데 저녁 식사가 끝나고 유명훈은 갑자기 두 사람을 불러세웠다.“오
박민정은 말을 마치고 이부자리를 폈다.“전 소파에서 잘게요.”유남준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임신했으니까 네가 침대에서 자.”박민정은 유남준이 이렇게 배려해 줄 줄 몰랐지만 임신해서 몸이 불편하다는 생각에 그녀도 동의했다.씻고 난 박민정은 은은한 향기가 나는 큰 침대에 누웠다.유남준은 멀지 않은 소파에서 긴 다리를 불편하게 뻗은 채 잠을 잤다.박민정은 불을 껐지만 내내 잠이 오지 않았다.눈을 감자마자 떠오른 것은 유남우의 따뜻한 얼굴이었다.분명 마음속에는 의아함이 많았지만 물어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박민정은 서서히 잠에 들었다.밖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박민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악몽 때문에 잠에서 깼다.“남준 씨.”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큰 손이 그녀의 손을 잡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어느 순간 유남준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무슨 일이야?”박민정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꿈속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자 그녀는 크게 심호흡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악몽을 꿨어요.”유남준은 그 말에 아무 말 없이 침대에서 이불을 걷어내고 박민정을 바로 품에 안았다.당황한 박민정이 거절하려던 찰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내가 곁에 있어 줄게.”그의 말을 들은 박민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정감이 들어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잠시 후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남준 씨, 정말 나만 기억해요?”유남준의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응.”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박민정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정말 나 좋아해요?”“그래.”남자는 아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기억을 잃기 전 유남준은 박민정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박민정은 그의 품에 기대어 이 모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어쨌든 의사는 유남준이 기억을 되찾을 가능성이 작다고 했으니 그냥 이대로 지내면 안 될까?“하지만 전에
그제야 유남준은 멈추고 박민정이 다시 잠이 들자 곧바로 화장실로 가서 찬물로 샤워를 했다.한편 박윤우는 도우미들에 의해 아주 고급스러운 어린이 방에 배치됐고, 고영란은 손님을 배웅한 뒤 곧바로 달려왔다.“예찬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뭐 좀 먹을래?”고영란이 다정한 얼굴로 다가오자 박윤우는 반백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매력이 넘치는 눈앞의 미모의 여인을 바라보며 악녀 시어머니라는 생각에 그녀가 못마땅했지만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할머니, 너무 보고 싶었는데 왜 이제야 왔어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영란의 다리를 직접 껴안으며 그녀의 옷에 콧물을 닦았다.고영란은 예찬이가 이렇게 자신을 의지하는 모습을 처음 본 탓에 굳어버렸다.“미안해, 할머니가 잘못했어. 할머니가 일부러 널 여기 혼자 두려고 한 게 아니야. 네가 온다는 소식에 얼마나 빨리 네 곁으로 오고 싶었는데.”박윤우는 속으로 살짝 당황했다.형이 할머니에게 이렇게 귀염받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웠다.“정말요?”박윤우는 고영란을 불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물론이지.”말을 마친 고영란이 다시 물었다.“왜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났어? 집에서 엄마가 괴롭혔어? 너만 원하면 앞으로 할머니랑 같이 살 수 있어. 할머니가 잘해줄게.”박윤우는 마침 유씨 가문에 대해 알고 싶었다.“네, 원해요.”고영란은 순식간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비서에게 박윤우가 살 수 있는 더 큰 방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박윤우는 다정한 그녀의 모습에 자신이 친손자가 아닌 걸 알면서도 왜 저렇게 잘해 주는지 의아했다.“할머니, 나 졸려요. 자고 싶어요.”“알았어, 자.”박윤우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할머니, 여기 남아서 저 좀 지켜봐 주실 수 있어요? 무서워요.”“그래.”고영란은 당연히 거절할 리가 없었다.어린 남준의 모습과 똑같은 아이를 보며 그녀는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하지만 밤이 되자 박윤우는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고, 물을 떠달라, 화장실에 데려다 달라고 하는
유남우도 마침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어젯밤 파티와 달리 지금 이 순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둘만 있는 것 같았다.박민정의 동공이 살짝 움츠러들더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끌어안았다.“왜 발코니에 서서 양치하고 있어. 밖이 너무 추운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유남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자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시선을 거두며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행히 유남준은 지금 앞이 보이지 않았다.“괜찮아요, 안 추워요.”박민정은 곧바로 방으로 돌아왔다.하지만 그녀는 유남준이 앞을 못 본다는 것만 알았지, 유남준이 사방에 눈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유남우가 다가오는 순간 누군가 유남준에게 이를 보고했고 발코니에 서서 찬바람이 유남준의 얼굴을 스칠 때 전화벨이 울렸다.전화를 받자 유남우에게서 온 연락이었다.“엄마 말로는 네가 기억을 잃었다더니 사실인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할게. 민정이가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아니라 나야.”유남우는 유남준을 보며 또박또박 읊조리고는 전화를 끊고 눈을 밟으며 돌아갔다.그의 말에 일부러 잊고 있던 기억들이 유남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특히 박민정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남준 씨,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야. 내가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어.”잘못 생각했다라...박민정 역시 샤워를 마치고 침착함을 되찾은 후 짐을 다 챙긴 다음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다 됐어요? 이제 돌아가요.”“그래.”박민정은 유남준에게서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다.두 사람은 돌아가는 차에 올라탔고 유남준은 가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박민정 역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밖에서 내리는 눈을 계속 바라보았다.두 사람 모두 마음이 무거워 보였지만 누구도 먼저 나서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신림으로 돌아와서야 박민정은 윤우가 사라졌고 그의 방 안에는 쪽지만 남겨진 채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형, 나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올게. 며칠 뒤에 돌아올 거야.]“윤
박윤우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듣고 때마침 뒤돌아보니 유지훈이 보였다.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앞에 있는 꼬마는 누굴까?’그러자 유지훈이 그에게 다가갔다.“예찬아, 너 왜 그래? 왜 날 무시하는 거야?”형을 아는구나.박윤우는 짜증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인데?”진지한 박예찬과는 너무 다른 앳된 목소리에 유지훈은 당황했다.“예찬아, 너 왜 갑자기 여성스러워졌어?”“...”박윤우는 얼굴이 새까맣게 상기되어 있었다.‘여성스럽긴 누가. 넌 온 가족이 다 여성스럽냐?’“근데 그렇게 말하니까 나름 귀엽네.”유지훈은 활짝 웃었다.“나랑 놀러 온 거 맞지? 유씨 가문에는 내가 모르는 곳이 없으니 나랑 같이 가자.”박윤우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이상했다.“모르는 곳이 없다니 무슨 말이야?”“나 유지훈이야. 유씨 가문 직계 유일한 손자, 잊었어?”유지훈은 뿌듯한 얼굴이었다.유지훈...박윤우는 그 이름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금방 기억해 냈다.형이 쓰레기 아빠 형한테 아들이 있다고 하면서 지 뭐라고 불렸던 것 같은데...‘얘가 걔구나.’박윤우는 눈앞에 있는 앳된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생긴 건 봐줄 만했으나 애가 어딘가 멍청해 보였다.“아, 생각나네.”박윤우는 곧장 그를 지나쳤다.“별일 없으면 나 귀찮게 하지 마”유지훈은 실망한 얼굴로 멀어지는 꼬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찬이가 왜 갑자기 나를 무시하는 걸까?내가 잘못한 게 있나?유지훈은 굴하지 않고 그의 뒤를 쫓았다.“예찬아, 내가 우리 아빠가 새로 사준 드론 줄 테니까 그거 갖고 놀래?”“싫어.”박윤우는 눈앞에 있는 유지훈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다.‘난 계속 유씨 가문에 대해 알아야 해.’“그만 따라와. 안 그러면 때릴 거야.”박윤우가 협박하자 유지훈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곧바로 걸음을 멈추고 박윤우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가 엄마 최현아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박윤
최근에 윤소현은 정윤아한테서 받은 충격 때문에 매일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자지 못했다.“할 말이 뭔데요?”“민정이한테만 말하고 싶으니까 먼저 데려오기나 해요.”윤소현은 혼자만 이런 곳에 갇힌 게 너무 억울했다.그러자 손연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답했다.“말은 해볼 텐데 올지 안 올지는 모르겠네요.”말을 마친 뒤 곧바로 자리를 떴다.그리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박민정에게 알렸다.사실 박민정도 윤소현이 순순히 양육권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어쩔 수 없이 유남우 씨한테 가야겠네요.”박민정의 말에 손연서가 고개를 끄떡이면서 답했다.“알겠어요. 그런데 윤소현 씨가 지금 민정 씨한테 꼭 할 말이 있다던데요?”“무슨 할 말요?”“저도 물어봤는데 무조건 민정 씨한테만 말하겠대요.”수화기 너머에서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자 손연서가 다시 말을 이었다.“좋은 일로 오라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혹시나 오게 되면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네, 걱정하지 말아요.”손연서와의 전화 통화를 마친 뒤 박민정은 방금 들은 내용을 정수미에게 알려줬다.그러자 정수미도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왜 갑자기 널 보자고 하는 거지? 고소를 취소해달라고?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그러자 박민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저도 잘 모르겠는데 지금 갇힌 마당에 설마 저한테 해코지하겠어요?”“하긴, 그러면 엄마랑 같이 가자.”그러나 박민정은 단칼에 거절했다.“지금 몸도 안 좋은데 의사 말대로 엄마는 그냥 어디도 가지 말고 병원에만 있어요.”“그래도...”여전히 걱정하는 정수미를 보고 박민정이 활짝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정 걱정되면 제가 남준 씨를 데리고 갈게요, 됐죠?”박민정의 말에 정수미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그래. 그러면 남준이더러 같이 가자고 해. 그래야 내가 마음이 놓여.”“네, 내일 같이 가볼게요.”그러다가 정수미는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박민정의 손을 꼭 잡았다.“민정아, 넌 이제 그
그러자 정수미는 다혜를 대신해서 너무 기뻐했다.“연서 씨가 입양해 주면 아이한테는 큰 복이지.”사실 유씨 가문에서도 다혜가 필요 없다고 하면 정수미가 데려오려 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오래 살지 못한다.하여 손연서가 먼저 입양하겠다고 나서니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저한테도 복인걸요.” 손연서는 마치 자기 친자식인 것처럼 애틋하게 다혜를 바라보았다.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고요. 그런데 입양 절차는 어떤지, 어렵지는 않은지 걱정되네요.”윤소현이 만약 판결을 받게 되면 자동으로 양육권을 잃게 된다.하여 지금 상황에서는 유남우 쪽이 관건이다.어쨌든 지금 명목상으로는 유다혜의 친아빠이기도 했다.손연서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오늘 제가 윤소현 씨한테 찾아가서 물어보려고요. 만약 허락받으면 바로 유남우 씨한테도 가볼게요.” “그래요.”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은 지금 퇴원이 가능했기에 손연서를 보며 말했다.“어려운 일이 있으면 바로 말씀 주세요.”왠지 다혜를 입양하는 게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알겠어요.”손연서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유다혜를 보고 말을 이었다.“다혜야, 며칠만 병원에서 지내고 있어. 다 나으면 내가 꼭 우리 집으로 데려갈게.”순간 유다혜는 자신을 버리고 가는 줄 알고 안아달라고 양팔을 벌렸다.그 모습을 본 손연서는 단번에 그녀를 안아 올려 살살 달래주기 시작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최대한 빨리 입양 신청을 끝내고 너 데리러 올게. 그리고 나랑 영원히 같이 살자.”다혜는 울지도 보채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그녀의 품에 안겨있었다.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해도 누가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지 구분할 줄 안다.손연서는 다혜를 다시 병실로 데려다준 뒤 그길로 윤소현을 찾아갔다.그러나 그녀를 보자마자 놀랐던 게 예전의 그 한 마리의 백조처럼 아름답게 춤을 추던 윤소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지금은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변해있었다.이미 익히 윤소현의 만행을 들었기에 손연서
한편, 손연서는 유다혜 병실로 오게 되었다.다혜는 현재 상황이 호전되어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그러나 그녀의 병실에는 오직 간호사뿐이었다.일찍 철이 든 유다혜는 아빠 엄마가 아무리 자신을 보러 오지 않아도 울거나 떼쓰지 않고 그저 침대에 가만히 누워 창밖에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이때 길연서가 말했다.“다혜는 참 용감한 아이예요. 간호사가 와서 주사를 놔줘도 아프다고 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손연서는 고개를 끄덕인 뒤 한 발짝 다가가 낮은 소리로 유다혜를 불러보았다.“다혜야.”손연서의 목소리에 유다혜의 몸이 살짝 반응하듯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을 보자마자 손연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겨우 한 살밖에 안 된 아이의 눈빛이 너무 허망해 보였기 때문이다.순간 손연서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다시 몇 발짝 유다혜에게 다가갔다.“다혜야, 이모랑 같이 살지 않을래?”알아듣지 못하는 걸 당연히 알고 있지만 손연서는 계속 말을 이었다.“이모가 우리 다혜 엄마가 되어줄게, 어때?”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길연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살짝 놀랐다.아무리 유다혜의 병은 많이 호전되었다고 해도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고 또 친엄마라는 사람도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손연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의 눈빛이 반짝거리더니 알아들은 듯 아닌 듯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이때, 길연서가 다시 아이에게 물었다.“다혜야, 이 이모 어때? 이모랑 이제부터 같이 살까?” 사실 다혜 보러 올 때마다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기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여주길 간절히 바랐다.아주 가끔 유남우도 다혜 보러 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아이를 안아준 적이 없었고 계속 무뚝뚝한 얼굴로 보고만 있다가 가곤 했었다.이때, 유다혜는 손연서와 눈을 맞추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에 손연서는 활짝 웃더니 아이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다혜야, 이제부터 너는 내 딸이야.”사막처럼 고요하던
그러나 정수미는 길연서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데 행복하지 않잖아. 엄마라는 사람은 지금 보살펴주지도 않지, 친아버지는 누구인지도 모르지.”“그렇네요...”길연서도 어느새 정수미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그 어린아이는 지금 병실 침대에 혼자 외롭게 누워있는데 윤소현은 아이를 이용하고 싶을 때만 입 밖에 꺼냈다.정수미는 얼마 전, 윤소현이 동정표를 얻어 석방되기 위해 아이가 아픈 사실을 공개했다고 들었다.이때, 손연서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더니 호기심에 물었다.“누구네 집 아이예요?”박민정이 유다혜의 일을 간단하게 말해주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그러면 다혜는 유씨 가문의 아이가 아닌 건가요?”윤소현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유씨 가문에서는 아이를 계속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러자 박민정이 고개를 저었다.“유남우 씨의 친딸이 아니랬어요.”박민정조차 아이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고 애초에 이런 일을 버린 사람이 유남우라는 사실은 더욱 알지 못했다.“아이만 불쌍하네요.”손연서는 안타까워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대뜸 정수미에게 물었다.“정 대표님, 혹시 제가 그 아이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그러자 정수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왜요?”손연서는 어쩔 수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제가 올해 서른이 되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최근 들어 계속 딸아이 하나 입양하고 싶었습니다.”정수미는 그제야 그녀의 말뜻을 깨닫고는 재빨리 길연서에게 말했다.“길 비서, 지금 바로 다혜한테 데려다줘.”만약 손연서가 유다혜를 입양하게 되면 이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그러자 손연서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가보겠습니다.”마침 유다혜도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기에 만나보는 데 얼마 걸리지 않는다.“그래요.”그렇게 두 사람이 자리를 뜨자마자 정수미가 박민정에게 말했다.“네 친구 사람도 괜찮은 것 같은데 만약 다혜도 따라가겠다고 하면 애한테는 너무 잘된 일이야.”“그러게요.”박민정도 손
이튿날, 오준수는 아침 일찍 차현영을 깨워 그 장신구들을 달라고 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보석함을 열어보니 안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다, 다 어디 갔지?”차현영은 순간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한껏 기대했던 오준수도 실망감에 그녀에게 되물었다.“엄마, 혹시 다른 곳에 보관해 두고 잊어버리신 거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차현영은 다급하게 다른 곳도 뒤져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고 온 집안을 다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문득 차현영이 고개를 돌리고 오준수에게 물었다.“천애는? 아직도 자고 있어?”그러자 오준수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몰라요. 저더러 편하게 자라고 어제는 성훈이랑 둘이 잤거든요.”순간 차현영은 뭐가 생각났는지 급히 이천애의 방으로 달려갔다.그러나 방안에는 오성훈만 곤히 자고 있을 뿐, 이천애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준수야, 천애가 내 보석을 갖고 도망갔어!”오준수도 달려와서 확인해 보더니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그리고 곧바로 이천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핸드폰은 꺼져있었다.“어떻게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쳐?”오준수는 여태껏 이천애가 자기 직업이나 모든 명예마저 버릴 만큼 자신만 바라볼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의 곁에 붙어 있었던 이유가 오직 돈 때문이었다.그리고 지금은 자기 친아들도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차현영은 이 상황을 보고 그를 나무라지 않을 수 없었다.“네가 데려온 여자가 어떤지 똑똑히 봐. 그 애는 우리 집 돈만 보고 들어온 여자라고 내가 말했는데도 넌 믿지 않았잖아. 이제 어떡할래? 그건 내가 평생 모아온 재산이란 말이야!”오준수는 대답 대신 빠르게 경찰서에 도난신고부터 했다.그러나 이천애는 이미 멀리 도망간 상태라 한동안 찾아내기는 힘들어 보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 쪽 사람들은 또다시 차현영 집으로 찾아와 빚 독촉을 했고 불과 며칠 만에 오준수는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한편.손연서는 박민정과 정수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차현영은 겨우 달래주더니 다시 오준수에게 물었다.“어떻게 됐어? 서연이 는 아직도 용서해 줄 마음이 없대?”오준수는 오늘 일을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없어 그저 한숨을 쉬며 답했다.“나한테 돌아올 마음도 없고 이대로 계속 밀고 나갈 건가 봐요.”“엄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금방 갈게요.”“그래.”그러나 전화를 끊자마자 또다시 빚 독촉 전화에, 회사 직원이 갑자기 난동을 부린다는 보고에, 갑자기 단체로 사직서를 내겠다는 등등 별의별 일들로 전화가 몰려오기 시작했다.오준수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여태껏 이런 위기는 맞아본 적도, 처리해 본 적도 없어 순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손만 바들바들 떨고 있다가 갑자기 큰소리를 치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이천애도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설마 이대로 오씨 가문이 망하는 건가?’‘그러면 그동안 열심히 일했던 사업들도 다 물거품이 된다는 소리잖아?’이천애는 오준수가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이란걸 진작에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순간 너무 후회스러웠다.그렇게 차는 어느덧 오씨 가문 별장에 도착했다.그리고 멀리서부터 오준수는 자기 어머니가 사람들을 가로막고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우리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요!”그러나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 때문에 오성훈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이건 다 제 물건이라고요! 당장 내려놔요!”오준수는 재빨리 차에서 내린 뒤 그들한테 달려갔다.“무슨 짓이에요? 왜 갑자기 통보도 없이 압류에 들어간다는 거죠?”“오준수 씨 맞습니까?”맨 앞에 서 있던 사람이 그에게 걸어오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은행에 갚아야 할 돈이 지금 두 달이나 연체되어 은행에서 강제 집행 신청을 했습니다.”“하여 이 집도 경매로 넘어갈 겁니다.”오준수는 그제야 얼마 전 회사 계좌가 적자가 나는 바람에 급하게 은행에서 큰돈을 빌렸던 일이 떠올랐다.하여 이번 지엔 그룹과의 계약이 잘 이루어지면 그 빚은 금방 갚을 수 있을
그러자 오준수가 빠르게 해명했다.“연서야, 이런 헛소리는 그냥 무시해. 나 이번에 진짜 많이 반성했고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는 너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어.”“퉤! 어제까지만 해도 나한테 연서 씨 험담을 했었으면서.”이천애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또다시 욕설을 주고받으며 싸우기 시작했다.손연서는 그저 옆에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가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박민정에게 보내줬다.“민정 씨, 제가 재밌는 거 보여줄게요.”박민정은 영상 속 두 사람이 서로 욕설을 퍼부으며 싸우는 모습이 너무 웃겨 정수미에게도 보여줬다.그러자 정수미도 깔깔거리며 웃었다.“쌤통이다.”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손연서는 이제 좀 지루해진 것 같아 두 사람에게 말했다.“준수 씨, 그만해. 그리고 내 앞에서 이렇게 서로 헐뜯을 필요 없어. 솔직하게 말하면 난 내가 결정한 일은 계속 밀고 나갈 생각이고 재혼도 안 할거야.”오준수의 얼굴은 이미 이천애의 손톱에 긁힌 자국으로 가득했고 이천애의 얼굴과 머리도 엉망진창이었다.두 사람은 손연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제야 손연서에게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때 이천애가 한껏 코웃음을 치며 오준수에게 말했다.“오빠, 들었어? 연서 씨는 그저 오빠를 갖고 놀았을 뿐이지 재혼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는데?”오준수는 순간 끓어오르는 화를 더는 참지 못하고 단번에 손연서 쪽으로 달려갔다.“손연서, 내가 오냐오냐해주니까 만만해 보여?”애석하게도 손연서는 미리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 알고 경호원을 문밖에 배치해 뒀는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은 빠르게 달려와 오준수와 이천애를 단번에 제압했다.“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허구한 날 매일 술만 마셨던 사람이라 경호원의 힘을 감당해 내기는 여간 쉽지 않았다.그리고 이천애는 더 말할 나위 없이 손쉽게 끌려갔다.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손연서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가 이상하게 기분이 점점 씁쓸해졌다.한때는 자기 전남편이자 자신이 사
오준수는 말을 마치자마자 이천애에게 눈치를 줬다.“빨리 연서에게 사과하고 우리 두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설명해.”이천애는 내키지 않았지만 오씨 가문과 자기 아들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연서 씨, 정말 미안해요. 일부러 나쁜 마음을 먹고 연서 씨한테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오빠랑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두 분 다시 재혼해 주시면 안 될까요? 오빠 마음속에는 여전히 연서 씨뿐이에요.”손연서는 이천애의 말을 듣자마자 하마터면 입안의 물을 뿜어낼뻔했다.‘내가 저딴 말을 믿을 만큼 바보로 보이나?’“아, 괜찮습니다. 그러면 그쪽 아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손연서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두 사람을 제대로 골탕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이때, 이천애의 얼굴이 삽시에 어두워졌다.“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그러자 오준수도 빠르게 답했다.“맞아, 다 지나간 일이야. 그리고 너도 성훈이를 엄청 예뻐했잖아. 이제부터 네가 성훈이 엄마로 되는데 내가 나중에 꼭 너한테 효도하라고 할게.”효도라...사실 손연서도 오성훈이 여태껏 키워준 정을 봐서 그녀에게 고마워할 줄 알았다.그러나 고마워하기는커녕, 자기 친엄마 편만 들고 음식에 약까지 타서 먹인 바람에 손연서는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었다.저런 아들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나을 것이다.“미안한데 난 다른 사람의 자식까지 키워줄 만큼 마음이 너그럽지 못해. 그리고 그 두 사람 때문에 내가 지금 아이를 못 낳고 있잖아?”손연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오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랑 재혼하고 싶다고? 좋아, 그전에 저 두 모자를 집에서 내보내.”순간 이천애의 얼굴이 삽시에 어두워졌다.“연서 씨,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제가 오늘 이렇게 직접 와서 사과도 했잖아요. 그리고 성훈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인데 애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손연서는 뻔뻔스러운 그녀의 말에 순간 참지 못하고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방금 사과했었어요? 몰랐네요.”그리고 다시 오준수를 바라보았다.“준수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오준수의 엄마, 차현영이 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울먹거리며 물었다.“준수야, 대체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왜 업체들이 갑자기 우리더러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데?”오준수는 하룻밤 사이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상태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엄마, 우리 이제 끝난 것 같아요.”두 사람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이천애도 마음이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아무리 눈치 없다고 해도 오씨 집안이 진짜 큰일 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차현영이 아침 댓바람부터 이렇게 찾아와 울부짖지도 않았을 것이다.집에는 오직 오성훈만 아무 걱정도 없이 쿨쿨 자고 있었다.차현영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떻게 된 건지 빨리 말해. 누구한테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야?”오준수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에 대해 차현영에게 말해줬다.그러자 그녀는 대뜸 오준수를 꾸짖기 시작했다.“이 멍청한 놈, 그때 그렇게 이혼하지 말라고 뜯어말렸는데도 내 말은 귓등으로 흘려보내더니. 손씨 가문 딸이면 우리 가문에도 얼마나 득이 되고 좋아? 하필이면 아무 쓸모도 없는 모델을 데려와서는.”“이천애는 그냥 우리 집안이랑 안 맞는 여자야.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회사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는 것 좀 봐, 이제 어떡하면 좋지?”“지금 당장 연서한테 가서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사과해!”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려보니 이천애가 구석에서 몰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여우 같은 계집애, 우리 집에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꺼지지 못해?”이천애는 오랜만에 집에 온 거라 이대로 순순히 돌아가기 싫었다.“어머님, 아무리 그래도 제가 성훈이 친엄마인데 아이 앞에서 굳이 이런 식으로 저를 대해야겠어요?”“그나마 성훈이가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진작에 널 밖으로 끌어냈어.”그러다가 차현영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오준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따 사과하러 갈 때 천애도 같이 데려가.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