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설날에는 유씨 가문에서 가족 잔치만 열었고, 유씨 가문의 1촌 친척 몇 명 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택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유명훈은 상석에 앉아 증손자 유지훈을 위해 손수 과일 껍질을 벗기고 있었고, 그 애지중지하는 모습이 맨눈으로도 훤히 보였다.유지훈은 참석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한 채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증조할아버지, 저거 줘요.”유지훈은 한 중년 남성의 손에 들린 구슬 원반을 가리키며 달라고 했다.유명훈 형의 아들이었던 중년 남성은 유지훈이 자신의 원반 구슬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는 다소 꺼리는 모습으로 감췄다.“지훈아, 이건 장난감이 아니야. 네가 좋아하면 사촌 할아버지가 내일 새로 한 상자를 보내줄게, 알았지?”이 원반 구슬은 그가 8년 동안 구슬린 것인데 어떻게 어린아이에게 주겠나.“아니, 아니, 저거 주세요, 할아버지...”이를 본 유명훈은 아이의 손을 두드리기 바빴다.“그래그래.”말하며 그가 눈치를 주자 중년 남성은 네 살짜리 아이에게 원반을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유지훈은 손에 쥐자마자 몇 번 만지지도 않고 바로 바닥에 떨어뜨렸고, 구슬은 깨져 여기저기 흩어졌다.“재미없어, 이게 뭐야.”중년 남자의 마음도 함께 산산조각 났다...그러나 차마 유씨 가문의 대를 이을 유일한 아이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유명훈의 다른 자식들은 딸도 없었기 때문에 유지훈을 하늘처럼 받들어 모셨다.유지훈의 부모인 유성혁, 최현아는 더욱 뿌듯해했다.이때 멋지고 온화한 인상의 한 인물이 들어왔다.“할아버지.”유남준 삼촌과 똑같은 얼굴을 본 유지훈은 곧바로 바르게 앉았다.“그래, 앉아라.”유남우를 바라보는 유명훈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지난 몇 달 동안, 그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제대로 속였다.유남우가 오고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속속 도착했지만 유남준이 보이지 않자 다소 짜증이 난 유명훈이 고영란에게 물었다.“남준이는 어딨어?”“오고 있어요.”유씨 가문 사람들은 오늘 유남준을 보고
수모?서다희의 말을 듣고도 박민정의 얼굴은 평온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그녀도 과거 유씨 가문에서 온갖 굴욕을 다 당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유남준이 언제 한번 자신을 도와주는 걸 보지 못했다.서다희는 흠칫하면서 목소리를 낮췄다.“대표님이 구해주신 걸 생각해서라도 좀 도와주세요, 네?”박민정은 그 말에 외국에 있을 때 유남준이 자신을 도와 용 사장 일을 처리해 준 것을 기억해 냈다.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내가 가도 뭘 할 수 있어요. 한 명은 눈이 안 보이고 한 명은 귀가 잘 안 들리는데 내가 도와줄 수 있겠어요?”박민정은 솔직히 유씨 가문 같은 힘 있는 집안이라면 전혀 그녀의 체면 따위 봐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건...”서다희는 망설였다.이를 본 박민정은 그가 포기한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갈 준비를 했지만 서다희가 또 한 번 그녀를 붙잡았다“사모님이 계시면 제가 마음이 놓여요.”서다희는 박민정이 아주 씩씩한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곁에 있으면 적어도 저택 쪽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윤우가 끼어들었다.“엄마, 아저씨가 불쌍하게 버려졌는데 그냥 도와주세요.”박예찬은 왜 갑자기 동생이 쓰레기 아빠를 돕는지 조금 의아해했다.“알았어요. 그럼 두 아이부터 돌려보낼게요.”박민정은 윤우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동의했고 서다희는 곧바로 계산을 마친 뒤 아이들을 차에 태워주었다.두 아이를 돌려보내고 나서야 박민정은 정민기에게 자신을 저택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집에 있던 박예찬은 참지 못하고 윤우에게 물었다.“왜 엄마보고 쓰레기 아빠를 도와주라고 했어? 엄마가 괴롭힘당하면 어떡해?”“형, 나도 저택에 가보고 싶은데 좋은 생각 있어?”박윤우가 이렇게 말하자 박예찬은 곧바로 그의 생각을 알고 즉시 거절했다.“안 돼, 너무 위험해.”“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를 잡을 수 없어. 유씨 가문을 알지
유씨 가문 저택.전화를 받으러 나간 고영란은 기분이 좋았다.평소 유난히 자신과 거리를 두던 박예찬이 먼저 그녀에게 다가오니 무척 의외였다.하지만 이때까지도 유남준은 아직 오지 않았고, 주변에서는 작은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유남준 안 오는 건 아니겠지?”“오기로 하지 않았어, 왜 안 와? 유남준은 한 번 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사람인데.”“너희들 소문 못 들었어? 유남준 눈이 멀어서 아마 지금 오기 창피할 거야.”“어? 그럴 리가 없잖아?”모두들 유남준이 진짜로 앞이 안 보이는지 궁금해했고, 사실이라면 좋은 쇼가 될 것 같았다.드디어 유남준이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모두가 현관문을 바라보자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날카롭던 눈이 더 이상 빛나지 않았고 집사의 안내를 받아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유남준은 도착해서도 사람을 부르지 않았고 고영란이 다가와 유명훈에게 말했다.“아버님, 남준이가 교통사고가 나서 의사가 좀 더 회복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왔으니까 이제 좀 쉬게 놔두는 게 어때요?”유남준이 정말 앞을 못 보는 것을 확인한 유명훈은 더 이상 그를 힘들게 하지 않고 내보내려고 할 때 유성혁이 옆에서 말을 꺼냈다.“큰어머니, 남준이가 오랜만에 나와서 다들 모였는데 서둘러 돌아갈 게 뭐가 있어요.”“그래요, 우리도 남준이랑 얘기 좀 나누고 싶어요.”다른 사람들도 거들자 고영란은 다소 어두운 얼굴로 유명훈을 바라보았고 유명훈은 목발을 짚고 일어났다.“저녁 먹고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야 하니 쉬더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고영란, 넌 내 서재로 와.”“네.”고영란은 곧 질책받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그녀가 떠나자마자 망설일 게 없어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유남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유남우는 차분히 차를 마시며 모든 상황을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유성혁이 유남준에게 다가갔다.“남준아, 너한테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네.”유남준은 그 말에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누구?”유성혁은 멈칫
유성혁은 혼자 앉아 있는 유남준을 보고도 여전히 못마땅했다.그는 사고가 나기 전 유남준이 얼마나 오만하게 굴었는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유남우를 돌아본 유성혁은 그가 유남준을 위해 나서지 않자 망설임 없이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걸어왔다.“유남준, 내 손에 든 와인을 마시고 나한테 사과하면 지난 일은 다 잊어줄게.”유성혁은 손에 든 와인을 흔들며 침을 뱉어 앞으로 건넸고 유남준은 그의 말에 고개도 들지 않았다.유성혁은 그가 자신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 것을 보자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직도 네가 과거의 유남준이라고 생각해? 지금 난 널 개미처럼 짓밟을 수 있어. 눈치껏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이를 보면서도 감히 나서서 도와줄 엄두를 내지 못했다.유남준이 천천히 주먹을 쥐며 유성혁에게 한 방 먹이려는 순간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남준 씨, 왜 날 기다리지 않고 혼자 왔어요?”박민정이다. 박민정은 도착하자마자 구석에 앉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유남준을 보았다.과거 유남준이 자신을 도와줬던 걸 떠올리며 기억상실증에 시각장애인인 데다 두 아이의 아빠인 그가 괴롭힘을 당하는 걸 지켜볼 수 없었다.박민정의 목소리를 들은 유남준은 곧바로 주먹을 풀고 일어나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박민정을 향해 걸어갔다.“민정아, 안 올 줄 알았어.”박민정이 갑자기 다가오자 주위의 모든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고, 한쪽에서 유유히 차를 마시던 유남준도 그들을 바라보았다.그는 목울대가 일렁거리며 손에 든 차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 같았다.박민정은 유남준의 곁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의 팔짱을 낀 뒤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유성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아주버님, 남준 씨가 아직 몸이 회복이 안 돼서 술을 못 마셔요. 이 술은 아주버님이 직접 마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박민정은 유성혁이 술에 침을 뱉는 것을 봤다.유씨 가문에서 정말 별꼴을 다 본다. 앞 못 보는 장님을 괴롭히는 게 소위 말
박민정은 유남준이 줄곧 참아왔다는 사실을 몰랐다.눈앞이 보이지 않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죽기를 바랐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아직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고마워요.”박민정은 자리에 앉아 그에게도 과자 한 조각을 건넸다.“당신도 먹어요.”두 사람이 함께 디저트를 먹는 장면이 유남우의 눈에 들어왔고 그의 따뜻한 눈빛이 갑자기 조금 차가워졌다.비서 홍주영이 왔을 때 그도 한눈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구석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두 사람은 모욕을 당하고도 전혀 개의치 않고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홍주영은 박민정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녀가 무척 아름답고 행동 하나하나에 부드러움과 당당함이 엿보이는 걸 발견했다. 특히 맑은 샘물이 가득 찬 듯한 눈빛을 보면 유남준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 게 이해가 되었다.한편 유명훈의 서재에서는 고영란이 질책을 받았다.고영란이 모두를 속이고 유남우에게 유남준을 사칭하라고 시킨 것 때문이었다.고영란은 욕을 먹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집사가 와서 시간이 되었다고 전해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지팡이를 짚고 나간 유명훈은 박민정도 온 것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밥부터 먹고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자고 했다.그때 고영란은 도우미로부터 예찬이 왔다는 말을 들었다.“이제 추우니까 애 좀 쉬게 하고 맛있는 거 준비해 줘.”도우미는 고개를 끄덕였고 박윤우는 도우미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돌아와 호화로운 집안을 둘러보았다.“할머니는 어디 계세요?”“사모님께서는 오늘 너무 바쁘시니 일단 방에서 푹 쉬고 일 끝나면 보러 오시겠다고 하셨어.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고맙습니다.”박윤우가 얌전한 얼굴로 대답했다.“참 예의 바르네.”도우미는 귀엽고 어른스러운 박윤우를 보고 순식간에 마음이 녹아버렸다.박민정은 막내아들이 몰래 택시를 타고 이곳까지 온 사실을 모른 채 유남준과 함께 식사한 뒤 조상님께 참배를 하고 돌아갈 예정이었다.그런데 저녁 식사가 끝나고 유명훈은 갑자기 두 사람을 불러세웠다.“오
박민정은 말을 마치고 이부자리를 폈다.“전 소파에서 잘게요.”유남준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임신했으니까 네가 침대에서 자.”박민정은 유남준이 이렇게 배려해 줄 줄 몰랐지만 임신해서 몸이 불편하다는 생각에 그녀도 동의했다.씻고 난 박민정은 은은한 향기가 나는 큰 침대에 누웠다.유남준은 멀지 않은 소파에서 긴 다리를 불편하게 뻗은 채 잠을 잤다.박민정은 불을 껐지만 내내 잠이 오지 않았다.눈을 감자마자 떠오른 것은 유남우의 따뜻한 얼굴이었다.분명 마음속에는 의아함이 많았지만 물어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박민정은 서서히 잠에 들었다.밖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박민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악몽 때문에 잠에서 깼다.“남준 씨.”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큰 손이 그녀의 손을 잡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어느 순간 유남준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무슨 일이야?”박민정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꿈속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자 그녀는 크게 심호흡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악몽을 꿨어요.”유남준은 그 말에 아무 말 없이 침대에서 이불을 걷어내고 박민정을 바로 품에 안았다.당황한 박민정이 거절하려던 찰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내가 곁에 있어 줄게.”그의 말을 들은 박민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정감이 들어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잠시 후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남준 씨, 정말 나만 기억해요?”유남준의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응.”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박민정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정말 나 좋아해요?”“그래.”남자는 아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기억을 잃기 전 유남준은 박민정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박민정은 그의 품에 기대어 이 모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어쨌든 의사는 유남준이 기억을 되찾을 가능성이 작다고 했으니 그냥 이대로 지내면 안 될까?“하지만 전에
그제야 유남준은 멈추고 박민정이 다시 잠이 들자 곧바로 화장실로 가서 찬물로 샤워를 했다.한편 박윤우는 도우미들에 의해 아주 고급스러운 어린이 방에 배치됐고, 고영란은 손님을 배웅한 뒤 곧바로 달려왔다.“예찬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뭐 좀 먹을래?”고영란이 다정한 얼굴로 다가오자 박윤우는 반백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매력이 넘치는 눈앞의 미모의 여인을 바라보며 악녀 시어머니라는 생각에 그녀가 못마땅했지만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할머니, 너무 보고 싶었는데 왜 이제야 왔어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영란의 다리를 직접 껴안으며 그녀의 옷에 콧물을 닦았다.고영란은 예찬이가 이렇게 자신을 의지하는 모습을 처음 본 탓에 굳어버렸다.“미안해, 할머니가 잘못했어. 할머니가 일부러 널 여기 혼자 두려고 한 게 아니야. 네가 온다는 소식에 얼마나 빨리 네 곁으로 오고 싶었는데.”박윤우는 속으로 살짝 당황했다.형이 할머니에게 이렇게 귀염받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웠다.“정말요?”박윤우는 고영란을 불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물론이지.”말을 마친 고영란이 다시 물었다.“왜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났어? 집에서 엄마가 괴롭혔어? 너만 원하면 앞으로 할머니랑 같이 살 수 있어. 할머니가 잘해줄게.”박윤우는 마침 유씨 가문에 대해 알고 싶었다.“네, 원해요.”고영란은 순식간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비서에게 박윤우가 살 수 있는 더 큰 방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박윤우는 다정한 그녀의 모습에 자신이 친손자가 아닌 걸 알면서도 왜 저렇게 잘해 주는지 의아했다.“할머니, 나 졸려요. 자고 싶어요.”“알았어, 자.”박윤우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할머니, 여기 남아서 저 좀 지켜봐 주실 수 있어요? 무서워요.”“그래.”고영란은 당연히 거절할 리가 없었다.어린 남준의 모습과 똑같은 아이를 보며 그녀는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하지만 밤이 되자 박윤우는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고, 물을 떠달라, 화장실에 데려다 달라고 하는
유남우도 마침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어젯밤 파티와 달리 지금 이 순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둘만 있는 것 같았다.박민정의 동공이 살짝 움츠러들더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끌어안았다.“왜 발코니에 서서 양치하고 있어. 밖이 너무 추운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유남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자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시선을 거두며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행히 유남준은 지금 앞이 보이지 않았다.“괜찮아요, 안 추워요.”박민정은 곧바로 방으로 돌아왔다.하지만 그녀는 유남준이 앞을 못 본다는 것만 알았지, 유남준이 사방에 눈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유남우가 다가오는 순간 누군가 유남준에게 이를 보고했고 발코니에 서서 찬바람이 유남준의 얼굴을 스칠 때 전화벨이 울렸다.전화를 받자 유남우에게서 온 연락이었다.“엄마 말로는 네가 기억을 잃었다더니 사실인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할게. 민정이가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아니라 나야.”유남우는 유남준을 보며 또박또박 읊조리고는 전화를 끊고 눈을 밟으며 돌아갔다.그의 말에 일부러 잊고 있던 기억들이 유남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특히 박민정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남준 씨,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야. 내가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어.”잘못 생각했다라...박민정 역시 샤워를 마치고 침착함을 되찾은 후 짐을 다 챙긴 다음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다 됐어요? 이제 돌아가요.”“그래.”박민정은 유남준에게서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다.두 사람은 돌아가는 차에 올라탔고 유남준은 가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박민정 역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밖에서 내리는 눈을 계속 바라보았다.두 사람 모두 마음이 무거워 보였지만 누구도 먼저 나서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신림으로 돌아와서야 박민정은 윤우가 사라졌고 그의 방 안에는 쪽지만 남겨진 채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형, 나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올게. 며칠 뒤에 돌아올 거야.]“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