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크고 작은 명절이 되면 박민정은 유남준과 함께 유씨 가문 저택에 다녀와야 했다.새해 첫날은 당연히 가야 했지만 이번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전 바빠서 못 가요. 남준 씨가 가고 싶다고 하면 데려가세요.”박민정은 바로 전화를 끊었고 반대편에서 고영란은 끊어진 전화를 보며 분노했다.“버르장머리 없는 것. 남준이가 기억상실증만 아니었어도 어딜 감히 네까짓 게!”옆에 있던 비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도련님 모시러 갈까요?”“가. 박민정은 오기 싫어도 남준이는 꼭 와야 해, 유씨 집안 장남이니까.”고영란도 사실 유남준이 오늘 행사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앞을 못 보는 데다 기억상실증까지 걸렸으니 체면을 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유명훈은 콕 집어 유남준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유명훈은 오랫동안 업무에 개입하지 않았어도 회사에 심복이 꽤 많았기 때문에 유남우와 그녀가 감히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그런데 도련님이 오기 싫다고 하면요?”비서가 다시 물었다.“그럼 묶어서라도 데려와. 앞을 못 보는 사람 하나 감당 못 해?”고영란은 화를 내며 말했고 비서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신림현.박민정은 유남준에게 고영란이 전화해 오라고 한 것에 대해 말했다.“엄마, 아저씨 고아라고 하지 않았어요?”박윤우가 바로 묻자 박민정은 흠칫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맞아, 아저씨는 버려졌어.”“아, 이제야 아저씨 엄마가 집에 오길 원하시는 거예요?”“그런 셈이지.”박민정은 유남준을 힐끗 쳐다봤고 이때 박윤우가 유남준에게 말했다.“아저씨, 그럼 엄마한테 돌아가지 그래요? 우리랑 엄마 뺏지 말고요.”아이는 가장 순수한 말로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입 밖으로 꺼냈다.유남준은 화를 내지 않고 박윤우에게 말했다.“어린애들만 엄마를 찾는 거지.”박윤우는 곧바로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불쾌함에 반박하려 했지만 박민정은 두 사람이 또다시 말싸움을 벌이려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말렸다.“됐어, 윤우는 형이랑 옷 갈아입
올해 설날에는 유씨 가문에서 가족 잔치만 열었고, 유씨 가문의 1촌 친척 몇 명 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택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유명훈은 상석에 앉아 증손자 유지훈을 위해 손수 과일 껍질을 벗기고 있었고, 그 애지중지하는 모습이 맨눈으로도 훤히 보였다.유지훈은 참석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한 채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증조할아버지, 저거 줘요.”유지훈은 한 중년 남성의 손에 들린 구슬 원반을 가리키며 달라고 했다.유명훈 형의 아들이었던 중년 남성은 유지훈이 자신의 원반 구슬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는 다소 꺼리는 모습으로 감췄다.“지훈아, 이건 장난감이 아니야. 네가 좋아하면 사촌 할아버지가 내일 새로 한 상자를 보내줄게, 알았지?”이 원반 구슬은 그가 8년 동안 구슬린 것인데 어떻게 어린아이에게 주겠나.“아니, 아니, 저거 주세요, 할아버지...”이를 본 유명훈은 아이의 손을 두드리기 바빴다.“그래그래.”말하며 그가 눈치를 주자 중년 남성은 네 살짜리 아이에게 원반을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유지훈은 손에 쥐자마자 몇 번 만지지도 않고 바로 바닥에 떨어뜨렸고, 구슬은 깨져 여기저기 흩어졌다.“재미없어, 이게 뭐야.”중년 남자의 마음도 함께 산산조각 났다...그러나 차마 유씨 가문의 대를 이을 유일한 아이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유명훈의 다른 자식들은 딸도 없었기 때문에 유지훈을 하늘처럼 받들어 모셨다.유지훈의 부모인 유성혁, 최현아는 더욱 뿌듯해했다.이때 멋지고 온화한 인상의 한 인물이 들어왔다.“할아버지.”유남준 삼촌과 똑같은 얼굴을 본 유지훈은 곧바로 바르게 앉았다.“그래, 앉아라.”유남우를 바라보는 유명훈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지난 몇 달 동안, 그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제대로 속였다.유남우가 오고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속속 도착했지만 유남준이 보이지 않자 다소 짜증이 난 유명훈이 고영란에게 물었다.“남준이는 어딨어?”“오고 있어요.”유씨 가문 사람들은 오늘 유남준을 보고
수모?서다희의 말을 듣고도 박민정의 얼굴은 평온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그녀도 과거 유씨 가문에서 온갖 굴욕을 다 당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유남준이 언제 한번 자신을 도와주는 걸 보지 못했다.서다희는 흠칫하면서 목소리를 낮췄다.“대표님이 구해주신 걸 생각해서라도 좀 도와주세요, 네?”박민정은 그 말에 외국에 있을 때 유남준이 자신을 도와 용 사장 일을 처리해 준 것을 기억해 냈다.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내가 가도 뭘 할 수 있어요. 한 명은 눈이 안 보이고 한 명은 귀가 잘 안 들리는데 내가 도와줄 수 있겠어요?”박민정은 솔직히 유씨 가문 같은 힘 있는 집안이라면 전혀 그녀의 체면 따위 봐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건...”서다희는 망설였다.이를 본 박민정은 그가 포기한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갈 준비를 했지만 서다희가 또 한 번 그녀를 붙잡았다“사모님이 계시면 제가 마음이 놓여요.”서다희는 박민정이 아주 씩씩한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곁에 있으면 적어도 저택 쪽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윤우가 끼어들었다.“엄마, 아저씨가 불쌍하게 버려졌는데 그냥 도와주세요.”박예찬은 왜 갑자기 동생이 쓰레기 아빠를 돕는지 조금 의아해했다.“알았어요. 그럼 두 아이부터 돌려보낼게요.”박민정은 윤우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동의했고 서다희는 곧바로 계산을 마친 뒤 아이들을 차에 태워주었다.두 아이를 돌려보내고 나서야 박민정은 정민기에게 자신을 저택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집에 있던 박예찬은 참지 못하고 윤우에게 물었다.“왜 엄마보고 쓰레기 아빠를 도와주라고 했어? 엄마가 괴롭힘당하면 어떡해?”“형, 나도 저택에 가보고 싶은데 좋은 생각 있어?”박윤우가 이렇게 말하자 박예찬은 곧바로 그의 생각을 알고 즉시 거절했다.“안 돼, 너무 위험해.”“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를 잡을 수 없어. 유씨 가문을 알지
유씨 가문 저택.전화를 받으러 나간 고영란은 기분이 좋았다.평소 유난히 자신과 거리를 두던 박예찬이 먼저 그녀에게 다가오니 무척 의외였다.하지만 이때까지도 유남준은 아직 오지 않았고, 주변에서는 작은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유남준 안 오는 건 아니겠지?”“오기로 하지 않았어, 왜 안 와? 유남준은 한 번 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사람인데.”“너희들 소문 못 들었어? 유남준 눈이 멀어서 아마 지금 오기 창피할 거야.”“어? 그럴 리가 없잖아?”모두들 유남준이 진짜로 앞이 안 보이는지 궁금해했고, 사실이라면 좋은 쇼가 될 것 같았다.드디어 유남준이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모두가 현관문을 바라보자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날카롭던 눈이 더 이상 빛나지 않았고 집사의 안내를 받아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유남준은 도착해서도 사람을 부르지 않았고 고영란이 다가와 유명훈에게 말했다.“아버님, 남준이가 교통사고가 나서 의사가 좀 더 회복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왔으니까 이제 좀 쉬게 놔두는 게 어때요?”유남준이 정말 앞을 못 보는 것을 확인한 유명훈은 더 이상 그를 힘들게 하지 않고 내보내려고 할 때 유성혁이 옆에서 말을 꺼냈다.“큰어머니, 남준이가 오랜만에 나와서 다들 모였는데 서둘러 돌아갈 게 뭐가 있어요.”“그래요, 우리도 남준이랑 얘기 좀 나누고 싶어요.”다른 사람들도 거들자 고영란은 다소 어두운 얼굴로 유명훈을 바라보았고 유명훈은 목발을 짚고 일어났다.“저녁 먹고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야 하니 쉬더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고영란, 넌 내 서재로 와.”“네.”고영란은 곧 질책받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그녀가 떠나자마자 망설일 게 없어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유남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유남우는 차분히 차를 마시며 모든 상황을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유성혁이 유남준에게 다가갔다.“남준아, 너한테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네.”유남준은 그 말에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누구?”유성혁은 멈칫
유성혁은 혼자 앉아 있는 유남준을 보고도 여전히 못마땅했다.그는 사고가 나기 전 유남준이 얼마나 오만하게 굴었는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유남우를 돌아본 유성혁은 그가 유남준을 위해 나서지 않자 망설임 없이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걸어왔다.“유남준, 내 손에 든 와인을 마시고 나한테 사과하면 지난 일은 다 잊어줄게.”유성혁은 손에 든 와인을 흔들며 침을 뱉어 앞으로 건넸고 유남준은 그의 말에 고개도 들지 않았다.유성혁은 그가 자신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 것을 보자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직도 네가 과거의 유남준이라고 생각해? 지금 난 널 개미처럼 짓밟을 수 있어. 눈치껏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이를 보면서도 감히 나서서 도와줄 엄두를 내지 못했다.유남준이 천천히 주먹을 쥐며 유성혁에게 한 방 먹이려는 순간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남준 씨, 왜 날 기다리지 않고 혼자 왔어요?”박민정이다. 박민정은 도착하자마자 구석에 앉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유남준을 보았다.과거 유남준이 자신을 도와줬던 걸 떠올리며 기억상실증에 시각장애인인 데다 두 아이의 아빠인 그가 괴롭힘을 당하는 걸 지켜볼 수 없었다.박민정의 목소리를 들은 유남준은 곧바로 주먹을 풀고 일어나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박민정을 향해 걸어갔다.“민정아, 안 올 줄 알았어.”박민정이 갑자기 다가오자 주위의 모든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고, 한쪽에서 유유히 차를 마시던 유남준도 그들을 바라보았다.그는 목울대가 일렁거리며 손에 든 차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 같았다.박민정은 유남준의 곁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의 팔짱을 낀 뒤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유성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아주버님, 남준 씨가 아직 몸이 회복이 안 돼서 술을 못 마셔요. 이 술은 아주버님이 직접 마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박민정은 유성혁이 술에 침을 뱉는 것을 봤다.유씨 가문에서 정말 별꼴을 다 본다. 앞 못 보는 장님을 괴롭히는 게 소위 말
박민정은 유남준이 줄곧 참아왔다는 사실을 몰랐다.눈앞이 보이지 않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죽기를 바랐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아직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고마워요.”박민정은 자리에 앉아 그에게도 과자 한 조각을 건넸다.“당신도 먹어요.”두 사람이 함께 디저트를 먹는 장면이 유남우의 눈에 들어왔고 그의 따뜻한 눈빛이 갑자기 조금 차가워졌다.비서 홍주영이 왔을 때 그도 한눈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구석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두 사람은 모욕을 당하고도 전혀 개의치 않고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홍주영은 박민정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녀가 무척 아름답고 행동 하나하나에 부드러움과 당당함이 엿보이는 걸 발견했다. 특히 맑은 샘물이 가득 찬 듯한 눈빛을 보면 유남준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 게 이해가 되었다.한편 유명훈의 서재에서는 고영란이 질책을 받았다.고영란이 모두를 속이고 유남우에게 유남준을 사칭하라고 시킨 것 때문이었다.고영란은 욕을 먹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집사가 와서 시간이 되었다고 전해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지팡이를 짚고 나간 유명훈은 박민정도 온 것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밥부터 먹고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자고 했다.그때 고영란은 도우미로부터 예찬이 왔다는 말을 들었다.“이제 추우니까 애 좀 쉬게 하고 맛있는 거 준비해 줘.”도우미는 고개를 끄덕였고 박윤우는 도우미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돌아와 호화로운 집안을 둘러보았다.“할머니는 어디 계세요?”“사모님께서는 오늘 너무 바쁘시니 일단 방에서 푹 쉬고 일 끝나면 보러 오시겠다고 하셨어.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고맙습니다.”박윤우가 얌전한 얼굴로 대답했다.“참 예의 바르네.”도우미는 귀엽고 어른스러운 박윤우를 보고 순식간에 마음이 녹아버렸다.박민정은 막내아들이 몰래 택시를 타고 이곳까지 온 사실을 모른 채 유남준과 함께 식사한 뒤 조상님께 참배를 하고 돌아갈 예정이었다.그런데 저녁 식사가 끝나고 유명훈은 갑자기 두 사람을 불러세웠다.“오
박민정은 말을 마치고 이부자리를 폈다.“전 소파에서 잘게요.”유남준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임신했으니까 네가 침대에서 자.”박민정은 유남준이 이렇게 배려해 줄 줄 몰랐지만 임신해서 몸이 불편하다는 생각에 그녀도 동의했다.씻고 난 박민정은 은은한 향기가 나는 큰 침대에 누웠다.유남준은 멀지 않은 소파에서 긴 다리를 불편하게 뻗은 채 잠을 잤다.박민정은 불을 껐지만 내내 잠이 오지 않았다.눈을 감자마자 떠오른 것은 유남우의 따뜻한 얼굴이었다.분명 마음속에는 의아함이 많았지만 물어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박민정은 서서히 잠에 들었다.밖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박민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악몽 때문에 잠에서 깼다.“남준 씨.”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큰 손이 그녀의 손을 잡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어느 순간 유남준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무슨 일이야?”박민정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꿈속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자 그녀는 크게 심호흡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악몽을 꿨어요.”유남준은 그 말에 아무 말 없이 침대에서 이불을 걷어내고 박민정을 바로 품에 안았다.당황한 박민정이 거절하려던 찰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내가 곁에 있어 줄게.”그의 말을 들은 박민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정감이 들어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잠시 후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남준 씨, 정말 나만 기억해요?”유남준의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응.”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박민정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정말 나 좋아해요?”“그래.”남자는 아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기억을 잃기 전 유남준은 박민정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박민정은 그의 품에 기대어 이 모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어쨌든 의사는 유남준이 기억을 되찾을 가능성이 작다고 했으니 그냥 이대로 지내면 안 될까?“하지만 전에
그제야 유남준은 멈추고 박민정이 다시 잠이 들자 곧바로 화장실로 가서 찬물로 샤워를 했다.한편 박윤우는 도우미들에 의해 아주 고급스러운 어린이 방에 배치됐고, 고영란은 손님을 배웅한 뒤 곧바로 달려왔다.“예찬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뭐 좀 먹을래?”고영란이 다정한 얼굴로 다가오자 박윤우는 반백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매력이 넘치는 눈앞의 미모의 여인을 바라보며 악녀 시어머니라는 생각에 그녀가 못마땅했지만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할머니, 너무 보고 싶었는데 왜 이제야 왔어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영란의 다리를 직접 껴안으며 그녀의 옷에 콧물을 닦았다.고영란은 예찬이가 이렇게 자신을 의지하는 모습을 처음 본 탓에 굳어버렸다.“미안해, 할머니가 잘못했어. 할머니가 일부러 널 여기 혼자 두려고 한 게 아니야. 네가 온다는 소식에 얼마나 빨리 네 곁으로 오고 싶었는데.”박윤우는 속으로 살짝 당황했다.형이 할머니에게 이렇게 귀염받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웠다.“정말요?”박윤우는 고영란을 불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물론이지.”말을 마친 고영란이 다시 물었다.“왜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났어? 집에서 엄마가 괴롭혔어? 너만 원하면 앞으로 할머니랑 같이 살 수 있어. 할머니가 잘해줄게.”박윤우는 마침 유씨 가문에 대해 알고 싶었다.“네, 원해요.”고영란은 순식간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비서에게 박윤우가 살 수 있는 더 큰 방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박윤우는 다정한 그녀의 모습에 자신이 친손자가 아닌 걸 알면서도 왜 저렇게 잘해 주는지 의아했다.“할머니, 나 졸려요. 자고 싶어요.”“알았어, 자.”박윤우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할머니, 여기 남아서 저 좀 지켜봐 주실 수 있어요? 무서워요.”“그래.”고영란은 당연히 거절할 리가 없었다.어린 남준의 모습과 똑같은 아이를 보며 그녀는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하지만 밤이 되자 박윤우는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고, 물을 떠달라, 화장실에 데려다 달라고 하는
“그땐 내가 직접 이 애새끼 목을 졸라 죽여버릴 거니까!”이지원은 아이의 여린 목덜미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솔직히 얘도 참 귀엽게 생겼어. 네 어릴 때처럼 말이야.”순간 당황한 박민정이 외쳤다.“애한테 손대지마! 네가 원하는 게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게.”이지원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아이의 목에서 손을 뗐다.“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나도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이렇게 어린 애한테까지는 손대고 싶지 않단 말이야.”말을 마친 이지원은 다시 아이를 여자에게 넘겨주었다.혹시라도 박민정이 다시 반항할까 봐 두려웠던 것인지 이지원은 두 여자에게 아이를 이곳에 두고 가게 했다.뒤이어 누군가가 박민정의 결박을 풀고는 그녀를 의료용 침대 위로 눕혔다.앞서 나섰던 흰 가운의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이제 눈을 감으시고, 제가 하는 말에 무조건 따르셔야 합니다. 아시겠죠?”“네.”박민정은 그렇게 천천히 눈을 감았다.아직 이성을 잃지 않은 박민정은 해서는 안 되는 일과 해도 되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그 남자의 말에 따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봤지만 결국엔 그가 유도하는 무의식 속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몸이 지나치게 허약해졌던 박민정은 의사에 유도대로 무의식 속에서 양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모든 일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그리고 뒤이어 친모인 정수미가 했던 말들도 떠올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정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더니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흰 가운의 남자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이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런 치료는 하루 이틀만으로는 안 됩니다. 꾸준히 받아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이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요.”의사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이지원은 이내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이쪽 준비는 끝났어요. 약속하신 거 꼭 지키셔야 해요.”“걱정 마세요, 제가 지원 씨를 속일 리가 없잖아요.”그 한 마디에 이지원은 청심환이라도 삼킨 듯 마음이 놓
이지원은 불만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대체 왜?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뭔데?”박민정은 그런 이지원의 말을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거라면 날 원망하지 말고 하늘을 원망했어야지.”그 말에 완전히 이성을 잃은 이지원은 박민정의 목을 거세게 움켜쥐었다.“내가 널 여기까지 불러낸 이유가 단순히 이런 대화나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내가 정말 너 따위를 못 죽일 거라고 생각하냐고.”박민정은 그런 이지원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정말 날 죽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죽여버리지 그래.”박민정의 목을 움켜쥔 이지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 순간, 문가에서 어떤 남자의 낮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이지원은 뭔가가 떠오른 듯 천천히 손에 힘을 풀고는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을 살게 해줄 생각이야.”박민정은 이지원이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녀가 제일 궁금한 것은 아이의 안위였다.“이지원, 화풀이할 거면 나한테만 해. 아이는 지금 어디 있어?”“알고 싶어? 그럼 협조 잘해야 할 텐데?”이지원은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었다.협조라고?박민정은 이지원이 말하는 협조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뭘 하려는 거야?”이지원은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손뼉만 두어 번 쳤다. 뒤이어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섰다.우르르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자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제일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이지원을 바라보며 물었다.“이 사람 맞죠?”이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맞아요. 이제 부탁 좀 할게요.”“네.”대답을 마친 그 사람은 천천히 박민정의 앞으로 다가왔다.“너무 겁먹지는 마시죠. 저희는 심리상담 교수입니다. 민정 씨를 해치지는 않을 거예요.”박민정은 이지원이 왜 생뚱맞게 심리상담 교수들을 불러들였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박민정은 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병상에서 몸을 일으켰다.조하랑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박민정은 그 사람의 지시에 따라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박민정 역시 자신이 간다고 해도 아이를 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탓에 정민기에게 몰래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하지만 그 사람은 박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관찰이라도 하는 듯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왜 말을 안 듣지, 박민정 씨?”곧이어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아이는 건드리지 마요!”박민정이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출산으로 인해 생긴 상처가 다시금 벌어지며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박민정은 순간적인 아픔에 헛숨을 들이키며 입으로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수화기 너머에서는 여전히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그 뒤로 계속해서 누군가의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왔다.“제가 얘기했잖아요. 다른 사람한테 알릴 생각 하지 말라고. 이건 경고예요. 한 번만 더 허튼수작 부렸다간 그땐 저도 봐줄 생각 없어요.”“알았어요. 다른 사람들한텐 연락 안 할 테니까, 제발 아이한테 손대지 마세요.”박민정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제야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는 만족스러운 듯 말을 이어나갔다.“진작 그랬어야죠. 이제 제가 말해주는 장소로 오세요.”박민정은 수화기 너머의 지시에 따라 아이를 찾으러 나섰다.그녀 역시 자신이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어떠한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것쯤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로서의 본능적인 모성애가 그 모든 두려움과 위험을 잊게 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아이를 구할 생각뿐이었다.차에 올라탄 박민정은 택시 기사에게 한 장소를 얘기해 주었다.뒤이어 차를 여러 번 더 갈아타며 수화기 너머의 인간이 얘기해 준 장소로 향했다.끔찍할 정도로 치밀했던 그 인간은 박민정에게 다른 사람과 접촉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하지만 박민정 역시 최대한 기지를 발휘해 자신의 두 귀걸이를 각각 다른 택시에 놓고 내렸다. 이렇게라도 해놓
박민정은 휴대폰을 들어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야?” 유남준이 묻자 박민정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이들... 당신이 데려간 거예요? 신생아실에 왔는데 아이들이 없어요. 지금 어디 있나요?”유남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민정아, 일단 진정해. 내가 지금 바로 갈게. 아이들은 괜찮아.”“정말 괜찮은 거예요? 왜 다들 아이들이 없어졌다고 해요?” 박민정이 재차 물었다.유남준은 가슴이 조여왔지만 박민정이 걱정할까 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이미 본가로 보냈어. 내가 지금 병원으로 갈게. 우리 같이 아이들을 보러 가자.”박민정은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순간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는 전화를 끊고 윤소현을 보며 침착한 척했다. “남준 씨가 아이들을 본가로 데려갔대요.”윤소현은 유남준이 거짓말을 선택할 줄은 몰랐다. “그래? 그럼 본가에 가서 아이들을 봐. 하지만 미리 말해두는데 분명 거기 없을 거야.”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윤소현은 핏기 하나 없는 박민정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보며 자리를 떴다.박민정은 혼자 신생아실에 오랫동안 서 있었고 유남준이 언제 왔는지도 몰랐다.그가 도착하자마자 박민정은 온몸에 힘이 빠져 쓰러질 뻔했다.유남준이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말했잖아. 지금 몸이 매우 약해서 나오면 안 된다고.”“남준 씨, 우리 아이들을 보고 싶어요. 나 데려다 줘요. 아이들을 보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쉴 수도 없어요.” 박민정의 눈가가 붉어졌다.유남준은 대답 대신 그녀를 안아 들어 병실로 향했다.병상에 박민정을 눕히고 난 후,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우선 잘 쉬어. 약속할게. 사흘 안에 반드시 아이들을 데려와서 보여줄게, 어때?”이 말을 듣자 모든 게 명확해졌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순간 그녀의 눈빛에서 생기가 사라졌고 결국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좋아요...”유남준은 이런 그녀의 모
두 여자는 하나같이 악독했다.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박민정을 찾아가기로 했다.“아이들 잘 지켜봐요.”“걱정 마세요.” 이지원이 대답했다.윤소현은 그제야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유남준이 볼일 보러 나간 후에야 박민정의 병실로 들어갔다.“형수님, 들었어요. 쌍둥이 아들을 낳으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윤소현은 들어오자마자 제멋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박민정은 윤소현의 지금까지의 행적을 떠올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나가주세요. 여기서 당신을 환영하지 않아요.”“환영하지 않는다고요? 어제 친자 검사 때문인가요?” 윤소현이 일부러 그녀를 자극했다. “박민정, 사실 난 진작 알고 있었어. 네가 정수미의 친딸이라는 걸.”“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지? 정수미가 널 인정하나? 오늘 누가 날 보내왔는지 알아?”박민정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윤소현은 의도적으로 모든 죄를 정수미에게 뒤집어씌웠다. “바로 정수미야. 그 여자가 특별히 날 보내서 너한테 확실히 말하라고 했어.”“정수미 말로는 장애가 있는 딸은 있을 수 없대. 설령 친딸이라 해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 헛수고 하지 말라고.”친딸인데도 인정하지 않는다고?박민정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는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굉장히 아팠다.“그래요? 친딸에게 빚진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보상하겠다고도 했는데...”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박민정의 모습에 윤소현이 냉소를 지었다. “그건 남들 보라고 한 거지. 생각해 봐. 정수미가 어떤 사람이고 넌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정이 있겠어? 그저 친딸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딸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장애...장애!박민정은 기분이 매우 얹짢았지만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그런 말을 내가 믿을 것 같나요? 정수미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난 알아요. 그분이 진심으로 친딸을 찾고 싶어 한다는 걸요.”박민정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고 윤소현의 말 몇 마디에 속아 넘어갈 리가 없
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 파도가 일렁였지만 겉으로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어서 가서 찾아. 두 아이를 찾지 못하면 진주시에 있을 자격도 없어.”“네, 네, 네.” 경호원들이 즉시 수색에 나섰고 유남준은 휴대폰을 들어 다른 전화를 걸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누가 아이들을 데려갔는지 반드시 찾아내.”소인배들이 그를 만만하게 본 걸 보니, 예전에는 지나치게 너그러웠나보다.“그리고 진주시의 원수들을 하나하나 다 처리해.”“네.”유남준은 모든 지시를 내리고 박민정의 병실로 향하던 중 그만 비틀거리며 한 발짝 휘청거렸다.박민정은 막 깨어난 참이라 아이들이 사라진 사실을 몰랐다.그녀는 유남준을 보자마자 물었다. “남준 씨, 우리 아이들은 어디 있어요? 보고 싶어요.”유남준은 다가가서 거짓말을 했다. “두 아이 모두 아직 인큐베이터에 있어. 황달이 조금 있거든”“그래요? 그럼 내가 일어나서 보러 갈게요.” 아이들이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안 돼. 넌 지금 몸이 약해. 의사 말로는 이틀은 더 누워 있어야 한대. 서두르지 말고 몸이 좋아지면 보러 가자.” 유남준이 부드럽게 달래자 박민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그러고는 팔을 뻗었다. “안아줘요.”최근 이틀은 몸도 마음도 지쳤고 정말 힘들었다. 유남준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녀를 살며시 안았다.박윤우가 간호사와 함께 들어왔을 때 바로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 “엄마, 아빠...” 그는 손으로 눈을 가리긴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여전히 보였고 시선을 전혀 막을 수 없었다.박민정은 서둘러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윤우야, 이리 와봐. 엄마가 좀 볼까?”간호사도 다가왔다.“축하드립니다. 제대혈 교차검사를 했는데 적합하네요. 윤우가 곧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이 소식에 박민정은 무척 기뻤다.“정말요?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별 말씀을요. 당연한 일입니다.” 간호사는 이
“지금 회사가 정상 운영이 안 되고 밖에서 시위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언론인들도 데리고 왔는데 쫓아내기도 곤란하고요.” 진서연은 해외에서 박민정의 작은 회사나 관리했지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지만 유남준은 오히려 침착했고 차근차근 지시를 내렸다.연지석도 왔는데 도우려다가 유남준이 있는 걸 보고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이때 설인하가 창백한 얼굴로 사과했다. “사장님, 정말 죄송해요. 지난번에 주신 프로젝트를 또... 망했어요.”그녀는 지금 자신의 능력을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고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다.연지석은 그녀를 탓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이건 설인하 씨 잘못 아닙니다. 내가 인하 씨 같은 평직원이었고 뭘 하든 막으려는 재벌 회장까지 있다면 나도 성공 못 했을 겁니다.”설인하가 놀랐다.“무슨 뜻이세요?”“인하 씨랑 방성원 씨의 부부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조사해 보니 내가 인하 씨한테 줬던 프로젝트들은 다 방씨 가문에서 가로챘더군요.”설인하는 가슴이 철렁했고 곧이어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그랬군요!”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사장님,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제 개인사 때문에 사장님 프로젝트에 피해를 끼쳤네요.”연지석은 두 손을 책상 위에 모았다.“괜찮아요. 민정 씨 친구니까 내 친구기도 해요. 이 정도 프로젝트는 별거 아니에요.”“감사합니다.” 설인하는 다시 허리 굽혀 인사하고 연지석 사무실을 나와 방성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왜 이런 비열한 짓을 한 거야!”아직 새벽 4시였다. 방성원은 설인하가 혼자 자다가 잠이 안 와서 자기를 생각하며 전화한 줄 알았다.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따지는 소리가 들렸다.“이른 아침부터 날 욕하려고 깨운 거야?” 방성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욕은 무슨, 때리고 싶을 정도야! 왜 내 프로젝트를 가로채? 그게 너한테 무슨 이득이 된다고 생각해? 방씨 가문이랑 우리 PMJ는 업종도 다르고 경쟁사도 아니잖아!” 설인하는 분노가 치밀어 목소리가 떨렸
박민호는 그 말을 듣고 아첨하는 웃음을 지었다. “형, 그렇게 안 하셔도 돼요. 걱정 마세요, 꼭 도와드릴게요.”차가 출발하자 박민호는 이미 자신이 진주시의 유력 인사가 되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병원 밖에는 그들 외에도 윤소현과 이지원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평범한 차 안에 앉아 각자 생각에 잠겼다.“아들 둘을 또 낳았대요!” 윤소현은 질투심을 숨기지 못했다.유남준에게 아들이 넷이나 있으니 앞으로 자기 아이와 재산을 두고 경쟁할 인물이 생긴 것이다.이지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소현 씨, 우리 계획대로라면 곧 박민정의 경사가 상사로 바뀔 거예요.”윤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이 소식을 최현아에게도 전했다.최현아는 최근 시아버지 유석진과 함께 호산 그룹에 있으면서 유남우의 권력을 빼앗으려 했던 터라 갑자기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진짜야?”“이런 걸로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요? 조금만 알아보면 알 수 있죠.” 윤소현이 한숨을 쉬었다. “박민정의 아들 둘도 똑똑한데 이제 둘이 더 생겼으니 지훈이나 제 미래의 아이는 스트레스가 심하겠네요.”최현아는 옆에서 게임하는 유지훈을 보자 화가 났다. “얼른 숙제나 해!”“엄마, 유치원에 무슨 숙제가 있어요.” 유지훈이 불평하며 제 할 일을 계속했다.최현아는 어쩔 수 없었다. 윤소현이 일부러 자신을 부추기는 걸 알았기에 겉으로는 침착한 척했다.“요즘 경쟁이 치열하지. 박민정이 출산했으니 나도 가봐야겠네. 알려줘서 고마워.”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여기서 최현아가 소식을 들었다면 고영란도 당연히 알았을 터. 그녀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귀여운 사내아이 둘을 보자 그녀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민정아, 남준아, 예찬이랑 윤우는 어렸을 때 내가 제대로 키우지 못했잖아. 이번엔 꼭 이 두 아이만큼은 내가 곁에서 돌보면서 키우고 싶어.”박민정이 따뜻하게 웃었다. “좋아요.”유남준은 그녀가 동의하는 걸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머
마침내 분만실 문이 열리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간호사가 두 아기를 데리고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합니다.”유남준은 아기를 보지 않고 바로 분만실로 들어갔는데 분만실에는 박민정이 기력이 없이 누워있었다.“민정아.”박민정은 힘겹게 웃었다. “괜찮아요.”유남준은 그런 그녀가 더욱 안쓰러웠다.“이제 그만 낳자.”“네, 좋아요.”박민정이 대답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아기들은요?”“밖에 있어, 건강해.” 유남준의 이 말에 박민정은 안심되면서도 궁금했다. “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유남준이 멈칫했다.“잠깐만, 내가 보고 올게.”그는 박민정 생각에만 빠져서 아기를 보는 걸 잊고 말았다.밖으로 나오니 박윤우와 박예찬이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아기들은요?”조하랑이 혀를 찼다. “이제 아기 생각나요? 신생아실로 갔어요.”“깜빡했네요.”유남준이 물었다.“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멋진 사내아이 둘이에요.”조하랑의 말에 유남준도 박예찬, 박윤우처럼 실망했다. 그는 박민정을 닮은 딸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걸 잊지 않았고 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깊은 잠에 빠졌다.그녀가 쉬는 동안 조하랑과 진서연네는 아기들을 달래고 있었고 의사는 박윤우의 수술을 위한 검사로 바빴다.“너무 작고 귀여워.”진서연은 모성애가 한껏 피어올라 연신 귀엽다고 했으나 박예찬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동생이 하나라도 있었으면...”“남동생 둘도 좋아, 실망하지 마.”조하랑의 위로에 박예찬은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랑 이모, 언제 아기 낳으실 거예요? 저랑 윤우한테 여동생 둘 낳아주세요.”“맞아요, 한 명씩이요.” 박윤우마저 한마디 하자 조하랑은 말문이 막혔다.“꿈도 꾸지 마. 내가 낳은 딸을 왜 너희한테 하나씩 줘? 게다가 성별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조하랑이 부글부글 말하고 있을 때 김인우도 다가왔다. “맞아, 우리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