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말을 마치고 이부자리를 폈다.“전 소파에서 잘게요.”유남준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임신했으니까 네가 침대에서 자.”박민정은 유남준이 이렇게 배려해 줄 줄 몰랐지만 임신해서 몸이 불편하다는 생각에 그녀도 동의했다.씻고 난 박민정은 은은한 향기가 나는 큰 침대에 누웠다.유남준은 멀지 않은 소파에서 긴 다리를 불편하게 뻗은 채 잠을 잤다.박민정은 불을 껐지만 내내 잠이 오지 않았다.눈을 감자마자 떠오른 것은 유남우의 따뜻한 얼굴이었다.분명 마음속에는 의아함이 많았지만 물어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박민정은 서서히 잠에 들었다.밖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박민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악몽 때문에 잠에서 깼다.“남준 씨.”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큰 손이 그녀의 손을 잡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어느 순간 유남준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무슨 일이야?”박민정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꿈속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자 그녀는 크게 심호흡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악몽을 꿨어요.”유남준은 그 말에 아무 말 없이 침대에서 이불을 걷어내고 박민정을 바로 품에 안았다.당황한 박민정이 거절하려던 찰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내가 곁에 있어 줄게.”그의 말을 들은 박민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정감이 들어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잠시 후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남준 씨, 정말 나만 기억해요?”유남준의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응.”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박민정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정말 나 좋아해요?”“그래.”남자는 아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기억을 잃기 전 유남준은 박민정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박민정은 그의 품에 기대어 이 모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어쨌든 의사는 유남준이 기억을 되찾을 가능성이 작다고 했으니 그냥 이대로 지내면 안 될까?“하지만 전에
그제야 유남준은 멈추고 박민정이 다시 잠이 들자 곧바로 화장실로 가서 찬물로 샤워를 했다.한편 박윤우는 도우미들에 의해 아주 고급스러운 어린이 방에 배치됐고, 고영란은 손님을 배웅한 뒤 곧바로 달려왔다.“예찬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뭐 좀 먹을래?”고영란이 다정한 얼굴로 다가오자 박윤우는 반백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매력이 넘치는 눈앞의 미모의 여인을 바라보며 악녀 시어머니라는 생각에 그녀가 못마땅했지만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할머니, 너무 보고 싶었는데 왜 이제야 왔어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영란의 다리를 직접 껴안으며 그녀의 옷에 콧물을 닦았다.고영란은 예찬이가 이렇게 자신을 의지하는 모습을 처음 본 탓에 굳어버렸다.“미안해, 할머니가 잘못했어. 할머니가 일부러 널 여기 혼자 두려고 한 게 아니야. 네가 온다는 소식에 얼마나 빨리 네 곁으로 오고 싶었는데.”박윤우는 속으로 살짝 당황했다.형이 할머니에게 이렇게 귀염받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웠다.“정말요?”박윤우는 고영란을 불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물론이지.”말을 마친 고영란이 다시 물었다.“왜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났어? 집에서 엄마가 괴롭혔어? 너만 원하면 앞으로 할머니랑 같이 살 수 있어. 할머니가 잘해줄게.”박윤우는 마침 유씨 가문에 대해 알고 싶었다.“네, 원해요.”고영란은 순식간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비서에게 박윤우가 살 수 있는 더 큰 방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박윤우는 다정한 그녀의 모습에 자신이 친손자가 아닌 걸 알면서도 왜 저렇게 잘해 주는지 의아했다.“할머니, 나 졸려요. 자고 싶어요.”“알았어, 자.”박윤우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할머니, 여기 남아서 저 좀 지켜봐 주실 수 있어요? 무서워요.”“그래.”고영란은 당연히 거절할 리가 없었다.어린 남준의 모습과 똑같은 아이를 보며 그녀는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하지만 밤이 되자 박윤우는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고, 물을 떠달라, 화장실에 데려다 달라고 하는
유남우도 마침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어젯밤 파티와 달리 지금 이 순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둘만 있는 것 같았다.박민정의 동공이 살짝 움츠러들더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끌어안았다.“왜 발코니에 서서 양치하고 있어. 밖이 너무 추운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유남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자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시선을 거두며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행히 유남준은 지금 앞이 보이지 않았다.“괜찮아요, 안 추워요.”박민정은 곧바로 방으로 돌아왔다.하지만 그녀는 유남준이 앞을 못 본다는 것만 알았지, 유남준이 사방에 눈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유남우가 다가오는 순간 누군가 유남준에게 이를 보고했고 발코니에 서서 찬바람이 유남준의 얼굴을 스칠 때 전화벨이 울렸다.전화를 받자 유남우에게서 온 연락이었다.“엄마 말로는 네가 기억을 잃었다더니 사실인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할게. 민정이가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아니라 나야.”유남우는 유남준을 보며 또박또박 읊조리고는 전화를 끊고 눈을 밟으며 돌아갔다.그의 말에 일부러 잊고 있던 기억들이 유남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특히 박민정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남준 씨,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야. 내가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어.”잘못 생각했다라...박민정 역시 샤워를 마치고 침착함을 되찾은 후 짐을 다 챙긴 다음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다 됐어요? 이제 돌아가요.”“그래.”박민정은 유남준에게서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다.두 사람은 돌아가는 차에 올라탔고 유남준은 가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박민정 역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밖에서 내리는 눈을 계속 바라보았다.두 사람 모두 마음이 무거워 보였지만 누구도 먼저 나서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신림으로 돌아와서야 박민정은 윤우가 사라졌고 그의 방 안에는 쪽지만 남겨진 채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형, 나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올게. 며칠 뒤에 돌아올 거야.]“윤
박윤우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듣고 때마침 뒤돌아보니 유지훈이 보였다.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앞에 있는 꼬마는 누굴까?’그러자 유지훈이 그에게 다가갔다.“예찬아, 너 왜 그래? 왜 날 무시하는 거야?”형을 아는구나.박윤우는 짜증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인데?”진지한 박예찬과는 너무 다른 앳된 목소리에 유지훈은 당황했다.“예찬아, 너 왜 갑자기 여성스러워졌어?”“...”박윤우는 얼굴이 새까맣게 상기되어 있었다.‘여성스럽긴 누가. 넌 온 가족이 다 여성스럽냐?’“근데 그렇게 말하니까 나름 귀엽네.”유지훈은 활짝 웃었다.“나랑 놀러 온 거 맞지? 유씨 가문에는 내가 모르는 곳이 없으니 나랑 같이 가자.”박윤우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이상했다.“모르는 곳이 없다니 무슨 말이야?”“나 유지훈이야. 유씨 가문 직계 유일한 손자, 잊었어?”유지훈은 뿌듯한 얼굴이었다.유지훈...박윤우는 그 이름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금방 기억해 냈다.형이 쓰레기 아빠 형한테 아들이 있다고 하면서 지 뭐라고 불렸던 것 같은데...‘얘가 걔구나.’박윤우는 눈앞에 있는 앳된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생긴 건 봐줄 만했으나 애가 어딘가 멍청해 보였다.“아, 생각나네.”박윤우는 곧장 그를 지나쳤다.“별일 없으면 나 귀찮게 하지 마”유지훈은 실망한 얼굴로 멀어지는 꼬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찬이가 왜 갑자기 나를 무시하는 걸까?내가 잘못한 게 있나?유지훈은 굴하지 않고 그의 뒤를 쫓았다.“예찬아, 내가 우리 아빠가 새로 사준 드론 줄 테니까 그거 갖고 놀래?”“싫어.”박윤우는 눈앞에 있는 유지훈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다.‘난 계속 유씨 가문에 대해 알아야 해.’“그만 따라와. 안 그러면 때릴 거야.”박윤우가 협박하자 유지훈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곧바로 걸음을 멈추고 박윤우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가 엄마 최현아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박윤
차에 오른 후 박윤우는 고개를 숙인 채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박민정은 오늘처럼 화가 나고 걱정했던 적이 없었기에 박윤우에게 묻지 않고 아이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차에 있던 유남준도 서다희에게 더 이상 찾지 말라고 전했다.집에 돌아온 후 유남준이 출근하고 박윤우는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엄마, 미안해요. 엄마랑 아저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갔어요.”아이는 귀여운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예전에는 이렇게 사과하면 엄마가 다정하게 용서해 줬지만 이번에는 박민정이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박윤우는 잠시 당황한 나머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위층으로 올라가 가정부 할머니에게 부탁하려던 찰나, 두 발짝도 떼기 전에 박민정이 말했다.“거기 서.”박윤우는 얌전히 자리에 섰다.“엄마, 정말 잘못했어요.”“정말 엄마랑 아저씨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박민정이 갑자기 이렇게 묻자 박윤우의 예쁜 눈동자가 움츠러들었다.“엄마,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박민정은 창백한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또다시 마음대로 집 나가면 엄마 이제 너 상관 안 해.”박민정이 이렇게 말하자 그제야 박윤우는 엄마가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것을 감지하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다신 안 그럴게요, 약속해요.”혼자 병원에서 치료받고 약을 먹었던 아이는 정말로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엄마, 나 오늘 병원 가죠?”박윤우가 낮게 말하자 병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박민정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윤우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곧 수술할 수 있을 거야.”“네, 알겠어요.”박윤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박민정을 안았다.다행히 엄마는 여전히 나를 아끼고 포기하지 않았다.오후가 되자 박민정은 윤우를 다시 병원으로 보냈다.의사가 몸 상태를 확인한 후, 박민정은 아저씨가 보고 싶다는 윤우의 말을 떠올리며 이렇게 물었다.“윤우야, 아저씨 좋아?”박윤우는 목이 메었다.어떻게 쓰레기 아빠를 좋아할 수 있겠나.하지만 엄마는 분명 그 질문에
한수민은 박민정과는 달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딸 덕분에 안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옆에 있던 박민호가 차가운 눈빛으로 흘겨보았고 윤소현이 나가자마자 그는 한수민에게 말했다.“엄마, 쟤가 유남우랑 결혼하면 난 그래도 유씨 가문의 매제가 될 거야. 회사 하나 차리고 싶은데, 혹시...”박민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수민이 가로챘다.“윤씨 집안의 도련님 노릇이나 잘해. 하루 종일 돈 쓸 생각만 하지 말고.”박민호는 그 말에 버럭 화를 냈다.“내가 박민정한테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가 다 무사할 것 같아?”“그러기만 해!”한수민도 화를 내며 물컵을 세게 내려놓았고 박민호는 기운이 다 빠져서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났다.밖에 나가면 제호에서 술 마시는 것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여기서 제일 예쁜 애로.”그는 도착하자마자 많은 관심을 끌었고 그중에는 이곳 단골손님인 김인우도 있었다.김인우는 곧바로 사람을 시켜 박민호를 지켜보게 한 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남준아.”유남준과 연락을 주고받은 건 불과 며칠 전이었다.유남준이 정말 기억을 잃었는지 몰랐던 그가 처음에 다가갔을 때 유남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그리고 며칠 만에 연락을 해서는 조금 기억난다고 했다.“무슨 일이야?”일을 하고 있던 유남준은 김인우의 연락에 이렇게 물었다.“제호에서 박민호를 봤는데 돈이 많은가 봐. 바로 여길 대관하던데?”김인우는 이 망나니를 기억하고 있었다.한때 진주 최고의 부자였던 박씨 가문을 망쳐놓고 어떻게 지금 또 돈을 흥청망청 쓰는 건지.키보드를 두드리던 유남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신경 쓰지 마.”지난번 박민호에게 박민정을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했던 그는 다른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아, 그래.”김인우는 다소 실망스러운 기색이었다.“참 남준아, 뉴스 봤어. 너 정말 유남우한테 다 줬어?”“일단은.”김인우는 안도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유남준이 남에게 괴롭힘당하는 줄 알았다.“그래서 민정 씨는 지금 어떻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유남준이 말했다.“거긴 좀 허름해서 임신한 몸으로 가기엔 불편할 거야.”“괜찮아요, 멀리서 지켜보면 돼요.”박민정이 이렇게 대답하자 유남준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그래.”그렇게 말한 후 그는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돌아갔다.방에 도착하자마자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밤 자선 회사 하나 준비해. 대표와 직원들까지 전부 준비해야 해.”약혼녀를 위해 직접 음식을 준비하던 서다희는 그의 명령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사모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어떨까요? 여자들은 다 돈 좋아하잖아요.”“시키는 대로 해.”유남준은 그와 쓸데없는 말을 섞지 않았다.박민정이 아직 그에게 돈이 많다는 사실을 안다면 당장 이혼하려고 들 게 뻔했다.그는 박민정이 어떤 여자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녀의 가장 큰 결점은 여린 마음이었다.서다희는 어쩔 수 없이 약혼녀를 남겨둔 채 준비를 하러 떠날 수밖에 없었다.마음이 여린 건 박민정뿐만 아니라 은정숙도 마찬가지였다.은정숙 역시 자신의 신분이 동생으로 바뀌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유남준을 불쌍히 여겼다.그녀의 간병인과 집안의 요리사까지 전부 그가 데려온 사람들이라 먹고 싶은 건 뭐든 만들어 주었고 주변 이웃들도 유남준에 대해 좋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그가 도로를 보수하는 일을 돕고 집에 수돗물이 안 나오는 걸 전화 한 통으로 수리를 해줬다고 한다.“은정숙 씨, 좋은 사윗감을 찾았어. 인물도 좋은데 능력까지 있네.”“그래, 앞을 못 보는 것만 빼면 매일 옷도 잘 차려입고 깔끔하잖아. 어떤 시각 장애인이 저 사람만큼 하겠어.”최근 몸이 좋아진 은정숙은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서서히 유남준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변하지 않고 계속 민정이에게 잘해주기만 하면 좋을 텐데.”박민정이 가끔 집에서 곡을 쓰고 있을 때면 은정숙과 이웃 주민들이 유남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그래도 그녀는 쉽게 마음을 놓지 않았다.다음 날 아
유남준의 사무실은 크지 않지만 벽에는 아이를 찾는 것부터 청각장애 아동 후원까지 다양한 소식들로 가득했다.박민정이 들어가 주변을 둘러보니 시각장애인 전용 컴퓨터와 휴대폰도 있자 마음속에 있던 의구심은 잠시 사라졌다.“그럼 일 해요. 난 방해 안 할게요.”“그래, 배웅해 줄게.”유남준은 자신을 믿는 그녀를 보며 가슴에 있던 돌덩이를 마침내 내려놓았다.“됐어요. 그냥 일 해요.”박민정은 혼자 그 자리를 떠났고 돌아오는 길에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랑아, 나 유남준 씨 회사 갔어. 진짜 자선 기업이었어.”전에도 조하랑과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이제 그 정도가 된 거야?”조하랑은 일하면서 물었다.“사실 지금 하는 일 난 좋은 것 같아. 남을 도우면서 평범한 하루하루를 사니까.”박민정은 늘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민정아, 너 그 사람한테 마음 약해져서 용서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건 아니지? 지금은 앞을 못 보지만 언젠가 기억을 되찾고 눈이 좋아져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어떡해?”박민정은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세상에서 제일 변덕스러운 존재가 사람이라 누구도 한결같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 당장 이혼할 수도 없으니까 차근차근 한 걸음씩 나아가야지.”“그래도 네 개인 재산은 꼭 지켜. 그 사람한테 속아 넘어가지 말고.”조하랑이 당부했다.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문득 집안의 요리사와 간병인 모두 유남준의 돈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빚이 그렇게 많은데 간병인과 요리사를 고용할 돈은 어디서 구한 걸까?집으로 돌아온 박민정은 간병인과 요리사의 월급에 대해 물었고 같은 대답을 듣게 되었다.간병인은 한 달에 120만 원, 요리사는 하루에 세 끼만 만들면 되니 60만 원을 받았다.박민정은 앞으로 자신이 월급을 주겠다며 계좌 번호를 달라고 했고, 박민정이 나가자마자 그들은 곧바로 서다희에게 조용히 전화를 걸었다.다행히 유남준은 이미 월급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민정에게 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