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민은 박민정과는 달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딸 덕분에 안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옆에 있던 박민호가 차가운 눈빛으로 흘겨보았고 윤소현이 나가자마자 그는 한수민에게 말했다.“엄마, 쟤가 유남우랑 결혼하면 난 그래도 유씨 가문의 매제가 될 거야. 회사 하나 차리고 싶은데, 혹시...”박민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수민이 가로챘다.“윤씨 집안의 도련님 노릇이나 잘해. 하루 종일 돈 쓸 생각만 하지 말고.”박민호는 그 말에 버럭 화를 냈다.“내가 박민정한테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가 다 무사할 것 같아?”“그러기만 해!”한수민도 화를 내며 물컵을 세게 내려놓았고 박민호는 기운이 다 빠져서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났다.밖에 나가면 제호에서 술 마시는 것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여기서 제일 예쁜 애로.”그는 도착하자마자 많은 관심을 끌었고 그중에는 이곳 단골손님인 김인우도 있었다.김인우는 곧바로 사람을 시켜 박민호를 지켜보게 한 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남준아.”유남준과 연락을 주고받은 건 불과 며칠 전이었다.유남준이 정말 기억을 잃었는지 몰랐던 그가 처음에 다가갔을 때 유남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그리고 며칠 만에 연락을 해서는 조금 기억난다고 했다.“무슨 일이야?”일을 하고 있던 유남준은 김인우의 연락에 이렇게 물었다.“제호에서 박민호를 봤는데 돈이 많은가 봐. 바로 여길 대관하던데?”김인우는 이 망나니를 기억하고 있었다.한때 진주 최고의 부자였던 박씨 가문을 망쳐놓고 어떻게 지금 또 돈을 흥청망청 쓰는 건지.키보드를 두드리던 유남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신경 쓰지 마.”지난번 박민호에게 박민정을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했던 그는 다른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아, 그래.”김인우는 다소 실망스러운 기색이었다.“참 남준아, 뉴스 봤어. 너 정말 유남우한테 다 줬어?”“일단은.”김인우는 안도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유남준이 남에게 괴롭힘당하는 줄 알았다.“그래서 민정 씨는 지금 어떻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유남준이 말했다.“거긴 좀 허름해서 임신한 몸으로 가기엔 불편할 거야.”“괜찮아요, 멀리서 지켜보면 돼요.”박민정이 이렇게 대답하자 유남준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그래.”그렇게 말한 후 그는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돌아갔다.방에 도착하자마자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밤 자선 회사 하나 준비해. 대표와 직원들까지 전부 준비해야 해.”약혼녀를 위해 직접 음식을 준비하던 서다희는 그의 명령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사모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어떨까요? 여자들은 다 돈 좋아하잖아요.”“시키는 대로 해.”유남준은 그와 쓸데없는 말을 섞지 않았다.박민정이 아직 그에게 돈이 많다는 사실을 안다면 당장 이혼하려고 들 게 뻔했다.그는 박민정이 어떤 여자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녀의 가장 큰 결점은 여린 마음이었다.서다희는 어쩔 수 없이 약혼녀를 남겨둔 채 준비를 하러 떠날 수밖에 없었다.마음이 여린 건 박민정뿐만 아니라 은정숙도 마찬가지였다.은정숙 역시 자신의 신분이 동생으로 바뀌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유남준을 불쌍히 여겼다.그녀의 간병인과 집안의 요리사까지 전부 그가 데려온 사람들이라 먹고 싶은 건 뭐든 만들어 주었고 주변 이웃들도 유남준에 대해 좋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그가 도로를 보수하는 일을 돕고 집에 수돗물이 안 나오는 걸 전화 한 통으로 수리를 해줬다고 한다.“은정숙 씨, 좋은 사윗감을 찾았어. 인물도 좋은데 능력까지 있네.”“그래, 앞을 못 보는 것만 빼면 매일 옷도 잘 차려입고 깔끔하잖아. 어떤 시각 장애인이 저 사람만큼 하겠어.”최근 몸이 좋아진 은정숙은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서서히 유남준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변하지 않고 계속 민정이에게 잘해주기만 하면 좋을 텐데.”박민정이 가끔 집에서 곡을 쓰고 있을 때면 은정숙과 이웃 주민들이 유남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그래도 그녀는 쉽게 마음을 놓지 않았다.다음 날 아
유남준의 사무실은 크지 않지만 벽에는 아이를 찾는 것부터 청각장애 아동 후원까지 다양한 소식들로 가득했다.박민정이 들어가 주변을 둘러보니 시각장애인 전용 컴퓨터와 휴대폰도 있자 마음속에 있던 의구심은 잠시 사라졌다.“그럼 일 해요. 난 방해 안 할게요.”“그래, 배웅해 줄게.”유남준은 자신을 믿는 그녀를 보며 가슴에 있던 돌덩이를 마침내 내려놓았다.“됐어요. 그냥 일 해요.”박민정은 혼자 그 자리를 떠났고 돌아오는 길에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랑아, 나 유남준 씨 회사 갔어. 진짜 자선 기업이었어.”전에도 조하랑과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이제 그 정도가 된 거야?”조하랑은 일하면서 물었다.“사실 지금 하는 일 난 좋은 것 같아. 남을 도우면서 평범한 하루하루를 사니까.”박민정은 늘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민정아, 너 그 사람한테 마음 약해져서 용서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건 아니지? 지금은 앞을 못 보지만 언젠가 기억을 되찾고 눈이 좋아져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어떡해?”박민정은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세상에서 제일 변덕스러운 존재가 사람이라 누구도 한결같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 당장 이혼할 수도 없으니까 차근차근 한 걸음씩 나아가야지.”“그래도 네 개인 재산은 꼭 지켜. 그 사람한테 속아 넘어가지 말고.”조하랑이 당부했다.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문득 집안의 요리사와 간병인 모두 유남준의 돈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빚이 그렇게 많은데 간병인과 요리사를 고용할 돈은 어디서 구한 걸까?집으로 돌아온 박민정은 간병인과 요리사의 월급에 대해 물었고 같은 대답을 듣게 되었다.간병인은 한 달에 120만 원, 요리사는 하루에 세 끼만 만들면 되니 60만 원을 받았다.박민정은 앞으로 자신이 월급을 주겠다며 계좌 번호를 달라고 했고, 박민정이 나가자마자 그들은 곧바로 서다희에게 조용히 전화를 걸었다.다행히 유남준은 이미 월급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민정에게 가장
박민정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고 박민호는 여전히 쉬지 않고 말을 하고 있었다.“내가 그동안 얼마나 모욕을 당했는지 몰라. 예전엔 내가 괴롭혔는데! 누나, 나 좀 도와줘, 유남우를 만나면 우리를 도와줄 거야.”박민정이 그의 말을 듣기 싫어서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박민호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내가 엄마한테 속지만 않았어도 우리 박씨 가문은 무너지지 않았을 거야.”“무슨 말이야?”박민정이 곧바로 물었지만 박민호는 이미 술에 취해 길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였다.전화를 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석후가 그의 카드를 동결한 탓에 결제할 돈이 없어 제호 클럽에서 쫓겨났고 무자비한 폭행까지 당했다.“그렇게 큰 가문이 어떻게 3년 만에 무너졌겠어? 엄마가 나보고 애인인 윤석후에게 돈을 다 송금하라고 해서 그래! 이제 윤씨 집안은 돈도 있고 힘도 있으니까 나를 무시하고 감히 내 카드까지 정지시켜서 맞아 죽게 만들었어. 김인우가 구해주지 않았으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박민호는 아까 있었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박민정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그제야 자신이 순진했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한수민이 윤씨 집안에 시집간 건 해외로 간 후 윤 대표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그 말은 한 여사님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곧바로 다른 남자와 연락했다는 뜻이야?”박민호는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리고 말을 더듬었다.“나, 나는 모르겠어. 아무튼 유남우를 만나서 나 좀 도와줘. 난 누나 친동생이고 그래도 혈육이잖아. 내가 재기하면 누나도 박씨 가문 아가씨가 되는 거야.”박민호가 말을 마치기 바쁘게 전화는 끊겼고 박민정은 휴대전화를 꽉 움켜쥐고 가만히 서서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만 느꼈다.과거 한수민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적어도 아버지는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전혀 아니었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정민기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민기 씨, 부하들에게 부탁해서 한수민의 과거를 조사하도록 도와주면 안 될까요?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몇
박민호는 박민정을 그토록 싫어하던 김인우가 왜 갑자기 박민정 편을 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당황했지만 그는 빠르게 반응하며 곧바로 말했다.“알겠습니다. 제 누나니까 이제부터는 존중할게요.”그제야 김인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물었다.“조금 전에 유남우만 만나면 유남우가 널 도와줄 거라고 말했나?”김인우가 무서웠던 박민호는 김인우에게 전날 유남우를 만나러 갔을 때 유남우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고 김인우는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조용히 듣기만 했다.“유남우가 박민정을 알아?”“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요?”박민호도 잘 몰랐다.과거 박씨 가문과 유씨 가문은 왕래가 잦았고 박민호는 박민정이 방에서 유남준에게 몰래 연애편지를 썼다가 자신이 발견하고 찢어버린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김인우는 괜히 알아서는 안 되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그가 다른 말을 하려고 할 때 근처에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인우야, 여기서 뭐 해?”그때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방성원이었고 그를 본 김인우가 박민호에게 말했다.“오늘 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안 그러면 혀를 뽑아버릴 거야! 꺼져!”박민호는 바닥을 구르며 도망쳤고 깔끔한 정장 차림의 방성원이 김인우의 곁에 도착했다.“넌 요즘 왜 수호에 안 가고 제호로 오는 거야?”수호와 제호는 모두 방성원이 운영하는 진주 클럽이었다.“어쩌다 왔어. 성원아, 이 시간에 마누라 곁에 있지 않고 일하러 나왔어?”김인우는 방성원이 박민호에 대해 물어볼까 봐 말을 돌렸다.그와 방성원, 유남준 세 사람은 꽤 친한 사이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는 줄곧 방성원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고 왠지 모르게 속내를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가족들 사이 일은 그가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지금 가려고. 아내가 임신한 지 얼마 안 돼서 성격이 안 좋아.”방성원은 느긋하게 말하며 도망가는 박민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보고 차에 탔다.차
“서다희한테 알아보라고 할게.”유남준은 말하자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이제 당신은 서다희 씨 상사도 아니니까 계속 귀찮게 하지 마세요. 이미 정민기 씨한테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어요. 지석이 말로는 민기 씨가 요원으로 일한 적이 있어서 이런 건 잘 조사한다고 하더라고요.”또 정민기다…유남준은 이 잘생기고 능력 있는 보디가드를 잊을 뻔했다.“민기 씨도 못 찾으면 지석이한테 부탁하면 돼요.”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던 박민정은 옆에 있는 누군가가 질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연지석을 언급하자 박민정은 문득 한동안 연락이 없는 그가 다소 궁금했다.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왜 나한테 부탁하지 않는 거야?”당황한 박민정은 고개를 돌려 남자의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았다.“당신은 눈도 안 보이고 기억도 잃었잖아요?”유남준은 스스로 구멍을 판 것을 다소 후회했다.그는 가만히 서서 박민정에게 몸을 숙였다.“하지만 네가 이러면 난 질투 나.”뜨거운 입김이 얼굴에 닿았고, 박민정은 당황한 듯 시선을 피했다.“무슨 소리예요. 우린 그냥 친구일 뿐이에요.”그 말에 유남준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고 낮은 중저음 목소리가 들렸다.“그럼 나는? 우리 무슨 사이야?”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남준의 손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우린 부부야. 내가 널 도울 수 있게 모든 걸 말해줘.”두 사람은 박민정이 남자의 얼굴을 선명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유남준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가 정말 잘생겼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한숨을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여러 번 말했지만 지금은 당신과 잠시 함께 있을 뿐이고, 당신이 기억을 되찾으면 이혼할 거예요.”그렇게 말한 박민정은 곧바로 손을 빼고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오늘 하랑이 예찬이를 데려갔다. 아빠가 또 다른 소개팅을 주선했다고 아이를 데려가 망칠 생각이란다.박민정이 가자마자 유남준은 서다희에게 사람을 보내 한수민에 대한 모든
박민정이 달뜬 호흡을 뱉었고 다행히 키스는 오래가지 않았다.유남준의 손이 그녀의 뜨거운 얼굴에 닿자 그는 멈칫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나 때문에 놀랐지?”박민정이 얼굴을 돌리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그가 다시 그녀를 붙잡았다.“너 임신했어. 움직이지 마.”“나 임신한 거 알면서 이래요?”박민정은 화를 내며 말했다.“우린 부부니까 키스는 당연한 거야.”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대꾸하지 않았고 유남준은 그녀가 그렇게 조용한 게 익숙하지 않았다.“뭐라고 말 좀 해봐, 응?”그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비굴하게 애원하는지 몰랐다.“할 얘기 없어요. 내 방에 갈 테니까 나 좀 놔줘요.”박민정이 차갑게 말하자 유남준은 동의하지 않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이제부터 그는 박민정을 찾는 사람들이 없도록 박민정의 곁을 지킬 생각이었다.“요즘 어렴풋이 어렸을 때가 기억나.”박민정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그의 말을 계속 들었다.“내가 너 처음 봤을 때 바닥에 쓰러져서 무릎이 다 까지도록 괴롭힘당했던 거 기억나?”박민정은 멈칫했다.솔직히 지금까지도 자신이 언제 유남준을 만났는지, 언제 유남우를 만났는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그녀가 유남준을 처음 본 것은 집사를 따라 박씨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였다.당시 두 가족은 이웃집에 살고 있었고, 유남준은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마당 밖에 서 있었다.지금 보니 그녀가 처음 만난 사람은 유남우였던 것 같다.“그리고 나서요?”박민정이 되물었다.“그때 나를 남준 오빠라고 불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나를 알았는지 모르겠네.”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과거 이야기를 꺼냈고 그는 유남우의 대체품이 되고 싶지 않았다.“당신이 그 양아치들을 때려눕혔어요?”박민정은 너무나도 낯익은 유남준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충격의 파도가 가슴을 파고들었다.“응, 그때 네가 너무 불쌍해서.”그의 말에 박민정의 동공이 움츠러들었고 저도 모르게 이렇게 물었
정민기는 박민정에게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모두 말했다.그가 지금 궁금해하는 것은 수사를 도와준 사람이 누구인지였다.“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부탁드릴게요.”박민정은 더욱 무거운 마음으로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그동안 추측만 했지 그것이 모두 사실인 줄은 몰랐다.멍청한 동생이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키다니.유남준은 박민정이 통화를 끝낸 것을 보고 물었다.“무슨 일이야?”박민정은 정민기가 한 말을 그에게 전했고 그녀는 유남준을 그저 털어놓는 상대로만 생각했다.“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유남준은 오래전부터 눈치를 챘지만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박씨 가문의 것을 되찾고 싶어요.”박민호가 재산을 다 잃었다면 괜찮았겠지만 이거는 사기를 당한 것이 분명해졌다.아버지가 만약을 대비해 유언을 남긴 건 어쩌면 한수민의 속셈을 이미 오래전에 알고 계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너무 어리석고 유남준에게만 집중하느라 박씨 가문의 몰락 원인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할 뿐이었다.“그래, 그렇게 해.”유남준은 박민정을 돕기로 결심했고 박민정은 굳이 그의 도움을 바라지 않았기에 이렇게 말했다.“어머님께 빨리 말씀드려서 빚진 돈 다 갚아요.”그녀는 동시에 유남준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나 좀 쉴게요.”유남준의 허전한 품에 팔을 뻗었지만 더 이상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그녀가 나가자 유남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들어 확인했고 서다희는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가 한수민의 과거를 알아낸 후 정민기에게 전했다고 알렸고 유남준은 답장을 보냈다.[알았어, YN그룹 잘 지켜봐.]서다희는 이불 속에 누워 대표님의 새로운 지시를 보고 조금 의아한 표정이었다.‘갑자기 YN그룹은 왜?’[네.]그는 바로 답장을 보낸 뒤 휴대폰을 옆으로 치우고 한숨을 내쉬었다.“언제까지 가난한 척할 건지 모르겠네.”...다음 날 이른 아침.박민정은 전 변호사인 장명철 변호사에게 연락해 아버지의 유언장을 전달한 뒤 전반적인 상황을 전했
민박집 안, 모두가 아침 식사를 하며 여전히 아찔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칫하면 모두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유남준은 대충 식사를 마친 뒤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누가 한 짓인지 밝혀냈어?”그가 물었다.전화기 너머, 서다희는 무릎 꿇고 있는 무리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밤에 돌을 캐러 갔을 뿐, 사람을 해치려던 건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습니다.”한밤중에 돌을 캐러 갔다고?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하지만 이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으니 더 캐묻기도 애매했다.“대표님, 전 개인적으로 유석진 쪽이 의심됩니다.” 서다희가 덧붙였다.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유남준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표정은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그래. 이놈들은 전부 경찰서로 넘겨.”“알겠습니다.”전화를 끊고 돌아서던 유남준의 시야에 최현아와 그녀의 아들이 탄 차가 들어왔다.최현아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깥에 서 있는 키가 훤칠하고 냉정한 인상의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남준 씨.”그녀는 조심스레 불렀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남준 씨, 왜 혼자 밖에 있어요? 민정이랑 애들은요?”“안에서 밥 먹고 있습니다.”유남준은 냉담하게 답했다.최현아는 어색한 공기를 지우려는 듯 운전기사에게 자신이 호텔에서 포장해 온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아직 제대로 못 먹었을 것 같아서요. 여기 좀 싸 왔어요.”“괜찮습니다. 이런 건 형수님께서 드시죠.”유남준은 말만 남기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최현아는 묘한 허전함을 느꼈다.이때 곁에 있던 아들, 유지훈이 못마땅한 듯 물었다.“엄마, 제가 가져온 음식을 왜 삼촌한테 주려 해요?”최현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좋은 건 나눠야 하잖니.”하지만 유지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집에 있을 때 그는 엄마가 아빠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빠가 밥을 챙겨 먹었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엄마, 전 엄마가 이러는 거 싫어요. 앞으로 예찬이 아빠한테 이렇게 잘해주지 마세요. 전 삼촌이 싫
유남준이 나와보니 텐트와 얼마 멀지 않은 곳에 큰 바위가 굴러떨어져 있었고 산사태도 발생한 흔적이 있었다.“위험할뻔했네.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사전에 점검하지 않았나?”분명 일부러 이런 짓을 벌인 게 아니라면 절대로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박민정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살짝 겁을 먹었다.“세상에. 만약 어제 비가 조금만 더 세게 내렸다면 우리 텐트도 분명 물에 잠기거나 바위에 깔렸을 것 같네요.”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는데 유남준은 겁에 질린 그녀를 보고 재빨리 다가와 안심시켰다.“우린 하느님이 도와줄 테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박민정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네.”학교 선생님들도 눈앞의 상황에 매우 놀랐다.지금은 비가 그쳤고 아무런 사고도 없었기에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이곳은 분명 최현아가 사전에 사람을 보내서 확인 후에 결정했던 곳인데 어떻게 이렇게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까?만약 이 거대한 바위들과 흙들이 비에 씻겨 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면 적어도 몇 집은 이미 큰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선생님들도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게 무리인 것 같아 모두가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오늘 저녁에는 민박집을 예약했다.“너무 좋아요. 이곳에서 자는 것보다 민박집에서 자는 게 훨씬 안전할 것 같네요.”학부모들도 선생님의 아이디어에 저마다 찬성하면서 하나둘씩 짐을 싸기 시작했다.이 시각, 최현아는 진작에 산에서 내려와 혹시나 산사태로 인한 인명피해 뉴스가 뜬 게 없는지 계속 핸드폰으로 확인했다.그러나 아침 9시가 넘었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이때, 유지훈도 진작에 잠에서 깼다가 문득 최현아에게 물었다.“엄마, 저희는 왜 계속 산에 있지 않고 내려왔나요? 저는 배도 안 아픈데.”그의 말에 최현아는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아무 말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선생님께서 오늘에는 더 높은 산에 올라갈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저도 산에
저녁이 되더니 약간의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점차 빗방울이 굵어졌다.원래 유남준은 오늘 이불을 덮고 자려고 했으나 비가 오니 어쩔 수 없이 다시 침낭에서 자야 했다.박민정은 밖에서 요란하게 들리는 천둥소리가 무서워 이불 안으로 꼭꼭 숨었다.옆에 자기 아들이 누워있어 티는 내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박민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예찬이 손을 뻗어 그녀의 침낭을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엄마, 나랑 같이 자자.”“응? 왜?”박민정은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아니면 나랑 같이 잘까? 나 천둥소리가 너무 무서운데.”이때, 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박예찬은 원래 자신이 하려던 말을 그에게 뺏긴 게 너무 괘씸해서 그를 도끼눈으로 째려봤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천둥소리를 무서워한다고요?”“응. 좀 무섭네?”유남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는데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박민정은 사람마다 약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남준같이 돈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도 분명 약점이나 두려워하는 게 있을 텐데 저 사람한테는 그게 천둥소리인가 싶었다.“괜찮아요. 잠들면 금방 안 들릴 테니까.”박민정은 아까까지 너무 무서웠지만 같이 얘기를 나누다 보니 좀 괜찮아진 것 같았다.그러나 유남준은 약간 진정된 그녀를 보고는 자신이 세워둔 작전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 같아 의기소침해졌다가 용기를 내서 다시 물었다.“이쪽으로 좀 오지 않을래?”그의 말에 박민정은 침낭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구르다가 마침 박예찬의 침낭에 딱 붙게 되었다. 박예찬이 흐뭇해하던 찰나에 또다시 유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찬이는 천둥소리가 안 무섭지?”박예찬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빠르게 답했다.“당연하죠. 남자로서 어떻게 천둥소리 따위를 무서워하겠어요? 제가 보호해 줄 테니까 안심하세요.”“그럼 네가 침낭 끝에 자면서 우리를 보호해 줄래?”유남준의 말에 박예찬은 그제야 그의 꾀에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박민정의
박민정은 뜬금없이 자기 앞으로 내미는 음식을 보고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뭐예요?”“형수가 담아줬는데 안에 고기도 있더라고. 아까 잘 못 먹던데 이거라도 먹어.”최현아는 마침 그의 뒤를 따라왔다가 마지막 한마디를 똑똑히 듣게 되었는데 순간 뜨겁게 불타올랐던 마음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차갑게 식었다.유남준이 자기한테 마음이 있어서 호의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마음을 이용해서 박민정에게 애정 공세 할 줄은 몰랐다.“남준 씨는 참 다정한 남편이네요. 제가 가져다준 음식을 그대로 민정 씨에게 줄 만큼.”말속에 가시가 돋혀 있었다.솔직히 저녁 식사가 부실했던 건 사실이었고 양도 적은 데다가 온통 채소뿐이라 박민정은 진작에 허기져 있었다.그가 건네준 음식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최현아를 보고는 막 거절하려는데 유남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빨리 먹어. 너무 늦게 먹으면 건강에 안 좋으니까.”박민정은 그의 닦달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최현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형님, 그럼 감사히 먹을게요.”최현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겨우 답했다.“많이 먹어요.”그리고 한껏 어두워진 얼굴로 뒤돌아서더니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둬.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잖아!”최현아는 원래 유남준이 자기 마음을 받아주면 이따가 이 남자만 살려주려고 마음먹었다.그러나 이제 보니 그럴 필요 없이 그냥 세 가족을 모두 죽여버리면 될 것 같았다.그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박민정은 도시락에 담긴 다양한 음식을 보고는 순식간에 식욕이 올라왔다.“와, 너무 맛있겠다.”그리고 다시 반찬들을 가지런히 모으더니 두 사람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예찬아, 남우 씨, 너무 많아서 저 혼자는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우리 같이 먹어요.”뜬금없이 자신을 남우라고 부르는 모습에 살짝 언짢아졌지만 그래도 티를 낼 수 없었다.“그래.”그렇게 세 사람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맛있는
오늘 저녁은 학교에서 준비해 줬다.사실 물고기를 잡아서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 했는데 다들 많이 잡지 못한 바람에 식사가 조금 부실했다.하여 저녁 식사 시간이 돌아오니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에너지 소모가 많았던 탓에 음식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게 되었다.유지훈은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박예찬을 신경 썼다.그리고 내심 박예찬 주변에 친구가 많은 게 부러웠지만 이제 와서 그에게 붙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한편, 최현아는 오늘 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너무 긴장되어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 쪽을 바라보았는데 세 가족이 화기애애해 보이는 모습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피어올랐다.저녁 식사가 다 끝난 뒤 각자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최현아가 어느새 유남준의 곁에 다가오더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남준 씨, 음식은 입에 잘 맞았나요? 제가 음식을 따로 싸 왔는데 괜찮으시면 좀 드실래요?”그러나 유남준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괜찮습니다.”어제랑 다르게 차가운 그의 태도 때문에 최현아는 순간 멍해졌다.분명 어제 자신이 땀을 닦아줘도 가만히 있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나 싶었다.“그래도 제가 남준 씨 형수인데 너무 체면 차릴 필요 없어요. 제가 금방 가지고 올게요.”최현아는 유남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빨리 음식 가지러 달려갔다.그저 유남준이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보고 오해할까 봐 철벽친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박예찬과 무료함을 달래려 잡초를 뽑고 있다가 무심결에 최현아와 유남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박예찬에게 물었다.“저 두 사람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박예찬은 박민정이 풀 뽑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열심히 같이 뽑다가 문득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유남준이 또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고 있었다.“엄마,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게.”“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하나는 유남준의 좋은 시간을 방해할 것 같아서였고 다른 하나는 괜히 박예찬이 가서 물어보면 마치 그
오후가 되니 날씨가 약간 흐려지기 시작했다.박민정네는 산언덕에 앉아 바람도 쐬고 구운 생선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박예찬은 특별히 물고기 한 마리를 남기더니 조동민에게 주며 말했다.“아마 오래 살지는 못할 거야.”그의 말에 조동민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예찬아, 고마워. 넌 참 착한 아이야.”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자기 아들이 너무 따뜻한 사람이라 앞으로도 친구 사귀는 건 문제없겠다고 생각되었다.“고작 고기 한 마리 가지고 뭘.”박예찬은 아직 칭찬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쑥스러워했다.조동민은 고맙기는 한데 오늘 발생했던 일 때문에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민정 이모, 혹시 오늘 일은 진짜로 제가 잘못한 걸까요?”어린아이의 세계는 그저 흑과 백으로 단조롭게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하여 당연히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자기더러 사과하라던 아버지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다.박민정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이모는 동민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넌 단지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고 있었을 뿐, 유지훈이 먼저 잘못한 거지.”그녀의 말에 조동민은 더욱 억울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런데 저희 아빠는 왜 저더러 사과하라고 했을까요?”“그건 어른들의 세계에는 옳고 그름만이 있는 게 아니거든. 이건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이해가 될 거야.”조동민은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그녀에게 답했다.“저도 알 건 알아요. 저희 아빠는 지훈이네 엄마가 무서웠던 거예요. 저희 부모님은 항상 저에게 유지훈에게 잘 보여야 우리 집안 사업도 잘되고 나중에 돈도 많이 벌 거라고 습관처럼 말하셨어요.”그의 말에 박민정은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이렇게 어린아이가 그런 말 때문에 얼마나 부담감을 느꼈을까?’그녀는 어떻게 조동민을 위로했으면 좋을지 몰라 그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그러나 조동민은 고개를 들고 박민정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이모, 저 오늘부로
한가영은 한껏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박민정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리고 박민정이 한마디 하자마자 장연수도 빠르게 거들었다.“최 회장님, 다 아이들 일이고 누구도 피해 본 사람이 없는데 이쯤 하시죠.”몇몇 학부모들도 최현아를 말리기 시작했다.“아이가 이 정도로 우는 걸 보면 분명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을 겁니다.”“맞아요.”최현아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어두운 얼굴로 가만히 서서 생각해 보았는데 보는 눈이 이리도 많은데 계속 아이를 혼내기도 뭐한 것 같았다.“그럼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내겠는데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겁니다.”조민혁은 심장이 다 타들어 갔다가 겨우 입을 열어 인사를 건넸다.“역시나 최 회장님은 아량이 깊으십니다.”한가영은 일이 이대로 마무리되자 단번에 조민혁을 옆으로 밀쳤다.“어떻게 여동생보다도 간이 작아요? 이런 사람이랑 결혼한 제가 멍청이네요.”부모님이 자기 앞에서 다투기 시작하자 조동민은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자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박민정 덕분에 사건이 종료된 뒤 조동민은 박예찬과 놀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박민정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박민정은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어 조동민과 잠깐 통화하게 했다.조동민은 화면 속의 조하랑을 보자마자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터졌고 조하랑은 겨우 그를 달래서 울음이 그쳤다.“민정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아직 아이라 표현 능력이 제한되어 있어서 조하랑은 자기 조카가 뭔가 억울함을 당했다고는 느꼈어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하여 박민정은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조하랑에게 알려줬고 그녀는 듣자마자 불같은 화를 냈다.“최현아라는 사람 진짜 너무하네! 이렇게 어린아이더러 동급생 아이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시켰다고? 제정신으로 한 말인가 싶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 여자 가면을 벗겨버리는 건데!”조하랑은 씩씩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오빠는 진짜 쓸모없는 인간이라니까.
“지훈아, 우리 동민이가 먼저 때린 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리는 건 아니라고 봐.”조동민의 아버지 조민혁이 말했다.그리고 어머니 한가영도 다시 최현아에게 애원했다.“최 회장님, 작은 오해로 아이에게 무릎 꿇고 사과시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최현아는 고작 조 씨 가문 따위가 자신에게 반항하는 모습이 너무 기분이 언짢았다.또한 두 사람은 박민정의 친구이자 조하랑의 친척이라는 사실에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만약 사과할 수 없다면 법원에 고소해야겠네요.”말이 고소지, 분명 다른 방법으로 조씨 가문을 괴롭힐 게 뻔했다.그래도 한가영은 자기 아들이 이런 수모를 겪게 내버려둘 수 없어 재빨리 조동민을 품에 안았다.이 시각, 조동민은 아주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분명 잘못한 사람은 유지훈인데 왜 자신이 무릎을 당연하게 꿇어야 하는지, 왜 어른끼리 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엄마, 저는 잘못하게 없어요.”순간 목이 메어왔다.한가영도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그저 조민혁만 바라보았다.그러나 조민혁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씨 가문의 세력으로는 최씨 가문이나 유씨 가문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동민아, 미안하다!”괜히 아이 하나 때문에 큰 집안을 말아먹을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아들을 무릎 꿇리게 해야 했다.한가영은 순간 마음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자기 남편이 아무리 무능력하다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고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구는 데도 가만히 있을 줄은 몰랐다.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 씨, 제발 저희를 좀 도와줘요. 민정 씨는 하랑 씨 친구잖아요. 하랑이는 동민이 고모예요.”조동민은 어렸을 적부터 조하랑을 이모라고 불렀는데 그러면 여태껏 잘못 부른 것이다.느닷없는 부탁에 박민정은 순간 눈앞의 아이가 조하랑의 조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다.조동민도 어느새 한껏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때 최현아의 떨떠름
온갖 잡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을 확인해 보니 시아버지인 유석진이었고 재빨리 구석 쪽으로 가서 통화버튼을 눌렀다.“오늘 저녁에 호우주의보가 떴던데 남준이랑 민정이 모두 거기에 있어?”“네.”“그러면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주 자연스럽겠지?”유석진이 묻는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최현아는 다급히 그에게 설명했다.“여기에는 다른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도 계세요.”“난 그저 유남준이랑 박민정만 사라진다면 다른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이 없어.”유석진의 말대로 그는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최현아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더니 눈길은 자기도 모르게 유남준에게로 향했다.“알겠어요. 그럼 준비되면 알려주세요.”“그래. 너랑 지훈이는 꼭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네.”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 전화를 끊었다.그러다가 머릿속에서는 진짜로 유남준과 박민정이 사고 나는 걸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지 온갖 잡생각으로 뒤엉켜있었다.박민정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지만 몰래 마음을 두고 있는 유남준이 이대로 죽는 건 아쉬웠다.두통이 몰려오던 이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마치 싸우고 있는 듯했다.이때 여교사 한 명이 최현아에게 다급히 달려왔다.“지훈이 어머님, 빨리 가보셔야겠어요. 지훈이가 다른 아이랑 지금 싸움 났거든요.”이건 선생님들이 관여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워낙 유지훈의 부모님이 극성이라는 소문이 있어 감히 먼저 말리지 못했다.또한 유씨 가문의 세력만 봐도 선생님들 쪽에서 밉보이는 행동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처지였다.“누가 감히 내 아들을 때려?”최현아가 빠르게 싸움 현장에 달려와 보니 유지훈과 조하랑의 조카인 조동민이 한창 주먹다짐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훈은 조동민보다 덩치가 한참 작았기에 전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내 물고기 당장 물어내! 우리 아빠가 직접 잡은 물고기인데 물어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