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다른 사람이 자기 별장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다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말대로 사람을 보내 밖에 대기시켜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들어가서 돌볼 수 있게 했다.고영란도 호산 그룹 내에서 자리다툼이 심해졌기 때문에 그를 돌볼 시간이 없었다.유남준의 사촌 형인 유성혁은 이미 일부 주주들과 연합하여 주주총회를 열어서 유남준의 대표직을 해임하기로 했다.유명훈도 나이가 많았기에 대표를 하기에는 힘들었다.게다가 유명훈도 호산 그룹을 눈먼 사람에게 줄 수는 없었다. 고영란은 사방이 적이었다.이튿날.아침 9시, 또 하나의 특종 뉴스가 나왔다.[이혼 신고를 했는데 거절당한 실명한 유남준과 그의 아내]뉴스에는 한때 거물이었단 사람이 지금은 아내에게 버림받고 불쌍하다는 내용이었다.누군가는 짧은 동영상을 게시했다.[유남준은 장님이지 바보가 아니었다]바로 박민정이 했던 말이었다.동영상 아래에는 많은 댓글들이 달렸다.“어머나. 유남준은 너무 불쌍해. 한때 그렇게 잘 나가던 게. 지금은 두 눈이 멀었다니.”“그래. 너무 안타까워. 이런 여자는 유남준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야.”“그나저나 이지원은 어디 있어? 지금 와서 첫사랑을 구해줘야지.”“오랫동안 이지원을 보지 못했어. 듣기로는 은퇴했다던데...”“설마 아직도 이지원과 유남준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 예전에 이지원의 그 동영상을 잊었어?”인터넷 네티즌들은 별의별 댓글을 다 달았다.누군가가 전체 영상을 올리자 또 어떤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난 왜 박민정이 불쌍하다고 생각되는 거지? 그녀가 한 말을 듣지 못했어? 유남준이 눈이 멀기 전부터 이혼하려고 했다잖아.”“그래. 며칠 전에 두 사람은 이혼 소송을 했잖아.”조하랑도 그런 댓글들을 보고 저도 모르게 박민정을 위해 특별히 글을 써서 올렸다.“박민정을 나무라는 사람들도 눈이 멀었어? 박씨 집안이 무너질 때 유남준은 단 한 번도 나서서 도와준 적이 없었어. 박민정과 이혼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이지원과 썸을 탔고.”
박민정도 인터넷에서 뉴스를 보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삶을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이혼도 못하고 유남준은 기억을 잃자 박민정은 은정숙과 두 아이를 찾으러 해외로 가기로 했다.출발 하기 하루 전, 그녀는 연지석의 전화를 받았다.“민정아, 아주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어.”연지석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그러자 박민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어떻게 된 거야?”“의사 말로는 전부 노인병이래. 그리고 폐가 좀 안 좋대...”연지석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기껏해야 이번 설까지 버틸 수 있다 하셔...”설날까지 이제 겨우 두 달 남짓했다.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몸이 휘청거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지금 바로 거기로 갈게.”하지만 연지석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민정아, 아줌마가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나뭇잎이 언젠가는 땅위에 떨어지듯이 나이가 든 사람은 입으로는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지만 머리에는 줄곧 고향 생각이 배어 있었다.박민정은 목이 메어왔다.“아줌마께 너무 미안해. 당장 가서 아줌마를 신림으로 모셔다드릴게.”“마침 최근에 프로젝트를 처리하러 국내로 가야 하는데, 내가 아줌마와 함께 돌아가도 돼.”연지석도 유남준의 일을 알았기에 말을 덧붙였다.“두 아이도 함께 따라가고 싶어 해.”은정숙이 돌아오면 박민정도 두 아이가 외국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유남준은 기억을 잃었고 눈까지 멀었으니 두 아이를 찾을 리가 없었다.“그럼 두 아이도 함께 데려와 줘.”“알았어.”...그날 밤, 박민정은 도저히 잠이 들 수가 없었다.은정숙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녀는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사실 은정숙은 한수민보다 더 엄마처럼 느껴졌다. 그녀를 향한 보살핌과 사랑은 모성애와 다를 바 없었다.새벽쯤에 박민정은 바로 일어나서 아줌마와 두 아이를 위해 세면도구도 준비하고 장도 봤다.쇼핑몰에서 옷과 신발도 샀고 그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점심에 박민정은 공항으로 마중 나갔다.지난번에 외국
유남준은 말하면 말한 대로 행동했다. 가정법원을 떠난 후, 그는 다시 박민정을 찾지 않았다.주변의 그 누구에게도 박민정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두원 별장은 한밤중에도 전등을 켜지 않았다.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집안의 유리 제품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그러자 바로 들어가려던 경호원이 물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꺼져!”유남준은 큰 소리로 차갑게 말했다.그러자 경호원은 어쩔 수 없이 바로 밖으로 나갔다.유남준은 식탁 뒤에 서 있었고 유리 조각에 베인 손에서는 피가 흘렀다.그는 마치 아픔을 못 느끼는 사람처럼 수도꼭지를 더듬어 열고 차가운 물에 상처가 난 손을 헹구고 있었다.요 며칠 그는 단지 물건을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몇 번 넘어지기도 했다.다행히 그는 집 안의 모든 위치를 기억해서 더 이상 잘못된 곳을 찾지 않았다.그는 피가 멈출 때까지 손을 헹구다가 수도꼭지를 닫고 주방을 떠났다.그리고 혼자 거실로 와서 소파에 앉았다.그의 남은 기억 속에는 박민정이 이곳에 앉아서 그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었다.집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오자 유남준은 또 경호원이 다시 온 줄 알고 짜증을 내며 말했다.“꺼지라고!”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경호원이 아닌 고영란이었다.고영란은 집안이 이렇게 어두운 것을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왜 불을 켜지 않은 거야?”그녀는 거실에서 앉아 있는 유남준을 보고서야 자신이 말을 잘못한 것을 깨달았다.눈이 먼 사람으로서 불을 켤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히터를 켜지 않았기에 실내는 몹시 추웠다. 그래서 고영란은 걸어가서 히터를 켜고 유남준 앞으로 왔다.“남준아, 네 몸도 이젠 거의 나았어. 엄마가 최근에 몇몇 집안의 아가씨들을 보았는데. 다 예쁘기도 하고 조건도 괜찮아. 게다가 다들 널 어렸을 때부터 좋아해 왔대. 내일 시간이 되면 한번 만나보지 않을래?”고영란이 말한 여자들은 전부 이제 겨우 스무 살이었다.모두 젊고 예뻤고 게다가 아이를 낳기에 신체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영란은
기억상실에 실명까지 겹친 후 유남준은 더욱더 쩍하면 화를 냈다. 박민정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좋은 표정을 지어주지 않았다.고영란은 방금 유남준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니 마음이 초조해졌다.그녀는 서다희에게 물었다.“어떻게 하면 남준이가 다른 여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서다희는 그 말을 듣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대표님은 전에 그저 이지원 씨와 사귄 적이 있고 박민정 씨와 결혼한 외에는 다른 여자분이 없었어요.”유남준은 항상 사업을 중시해 왔기에 연애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서다희가 이지원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고영란은 그녀를 잊었을 것이다.“참. 이지원은 지금 어디에 있어?”서다희는 목이 메어 잠시 후에야 대답했다.“진주 정신병원에 있어요.”...병원 원장 사무실.이지원은 환자복을 입고 머리가 헝클어진 채 멍하니 서 있었다.고영란이 온 것을 보고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다.고영란이 자신을 괴롭히려 온 줄 알고 그녀는 즉시 멍청한 척했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이제 다시는 안 그럴게요. 죄송해요...”고영란은 그런 이지원을 보고 조금 놀랐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이지원은 며칠 전에 김인우가 왔을 때 그녀를 혼냈기 때문에 고영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미친 척하지 않았다면 김인우는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고영란은 한숨을 내쉬며 뒤에 있는 원장을 보고 말했다.“제가 헛걸음을 했네요. 이 사람은 정말 미쳤나 봐요.”그녀는 말을 마친 후 곧 떠나려고 했다.병원 간호사들이 이지원을 끌어가려고 하자 그녀는 정신병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갇히고 싶지 않아 즉시 고영란에게 달려갔다.“사모님,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고영란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그러자 이지원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뉴스를 다 봤어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남준 오빠를 돌봐 드릴게요.”“남준이가 널 여기에 가뒀는데, 원망하지 않아?”고영란이 묻자 이지원은 고개를 저었다.“오빠가
전 여자 친구?유남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지원이 천천히 그에게로 걸어갔다.“오빠, 기사 봤어요. 민정 씨랑 이혼한다면서요? 처음부터 이기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런 사람 때문에 속상해하지 말아요.”유남준은 이지원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이지원이 박민정의 얘기를 꺼내는 것을 듣고 저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박민정에 대해서 잘 알아?”“당연하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다 같은 학교에 다녔어요. 어릴 때는 민정 씨 집에 자주 놀러 갔어요.”이지원은 박씨 가문의 후원을 받았다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그녀는 유남준 앞에 앉아 유남준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유리에 베인 상처가 남아있었다.이지원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상처를 만지려고 했다.유남준은 미리 예지한 듯 뒤로 물러났다.이지원은 그대로 굳은 채 얘기했다.“오빠, 내가 오빠랑 함께할게요. 네? 난 민정 씨랑은 달라요. 오빠가 어떤 모습이든지 영원히 사랑할게요.”이지원은 정말 유남준을 좋아했다. 또 유남준의 재력을 좋아하기도 했다.유남준이 장님이라고 해도 다른 남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런 이지원을 뿌리쳤다.“꺼져.”이지원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결국 그녀는 유남준한테 쫓겨났다.입구에 서 있던 고영란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얘기했다.“쓸모없을 줄 알았다니까.”이지원은 고영란을 찾으러 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유남준은 이지원을 정신 병원에 입원시켰다. 하지만 이지원이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벌어둔 돈은 그대로다.이지원은 바로 비서한테 전화해 데리러 오라고 했다.차에 앉으면서 이지원은 맹세했다.“박민정, 두고 봐. 깜짝 놀랄만한 걸 들고 갈 테니까.”꼭 박민정을 가만두지 않겠다고....신림현.박민정은 은정숙의 집을 새로 인테리어한 후 두 아이를 데리고 신림현으로 왔다.주변의 이웃들은 거의 다 이사갔기에 주변은 꽤 처량해 보였다.요즘 은정숙은 자는 시간이 더욱 많았다. 하지만 깨어나기만 하면 일을
고영란은 유남우가 바로 자기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차에 앉아서 두원에 있는 유남준을 보면서 강연우에게 물었다.“강 변호사, 당신이 남준이를 도와 이혼 소송을 한 사람이죠?”유남준은 고영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다른 집안과의 혼인도 거절했고 이지원도 거절했다.고영란은 유남준이 혼자 두원에 있다가 무슨 일이 있을까 봐 걱정되었다.그래서 이혼 소송을 도와주었던 강연우를 찾아 상황을 알아보았다.“네.”강연우가 대답했다.“물어볼 게 있어요. 남준이 아내는 아직 박민정이니까 남준이를 챙겨줘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죠?”고영란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강연우는 그녀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당연하죠.”그는 흠칫하더니 말을 이었다.“필요하다면 유남준 씨를 위해 소송장을 미리 써드릴 수 있습니다. 박민정 씨의 의무를 다하게 말입니다.”고영란은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좋아요. 오늘 안에 박민정이 소송장을 받게 해요. 알겠어요?”“네.”고영란은 강연우의 영리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자기 명함을 건네주었다.“강연우 변호사. 호산으로 와요.”강연우는 명함을 받지 않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고영란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목적은 달성했으니까.차에서 내린 고영란은 별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유남준은 서재에 앉아 예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하지만 서류의 내용을 볼 수 없었고 핸드폰으로 음성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영란은 남부럽지 않았던 아들이 이런 모습이 되자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남준아, 할 말이 있어.”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 서류를 내려놓았다.“무슨 일이죠?”“내가 잊은 일이 있는데, 민정이 임신한 지 2개월이 됐어.”유남준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너희는 부부잖아. 아무리 싸워도 침대에서 풀리는 게 부부야.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 둘은 같이 살아야 해.”고영란은
강연우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에서는 서다희가 내렸고 그 뒤로 경호원과 고용인들이 내렸다.강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타고 돌아갔다.은정숙은 밖의 소리를 듣고 힘겹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서다희 일행을 보더니 물었다.“이분들은 다 누구야?”박민정은 은정숙이 찬 바람을 쐬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아줌마, 먼저 들어가서 쉬어요. 이따가 얘기해 드릴게요.”“그래.”은정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허리를 굽힌 채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박민정은 대문을 굳게 닫은 후, 서다희 일행에게로 걸어갔다.서다희도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허름한 집을 보면서 유남준 대신 식은땀을 흘렸다.유남준은 태어나서부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왔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을 리 없었다.박민정은 그들의 앞에 걸어갔다. 유남준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서다희에게 물었다.“서 비서님, 뭐 하는 거죠?”“고영란 사모님께서 유 대표님의 모든 옷을 이곳으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서다희가 대답했다.강연우의 말이 맞았다. 고영란은 정말 박민정에게 유남준을 맡길 예정이다. 만약 박민정이 거절한다면 그녀를 고소할 생각이기도 했다.박민정은 차갑게 물었다.“남준 씨는요?”“유 대표님은 곧 도착하십니다.”말을 마친 서다희는 뒤에 있는 사람들더러 물건을 옮기라고 했다.“잠깐만요.”박민정은 얼른 그들을 막아 나섰다.“유남준은 여기서 살 수 없어요.”서다희는 약간 난감한 기색을 내비췄다.“고영란 사모님께서 얘기하시길, 유 대표님이 이곳으로 오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두원으로 가서 유 대표님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거절한다면 강연우 변호사가 얘기한 대로 진행할 겁니다.”임신했을 때는 옥살이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 감옥에 간다.박민정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화가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서다희도 이 제안이 박민정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박민정 씨, 아니, 이제는 사모님이라고 불러야겠죠. 사모님, 유 대표님
서다희 일행을 내보낸 박민정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박민정은 박윤우를 병원에 입원시켰고 박예찬은 아직 방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박예찬에게 유남준이 와서 같이 산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박민정은 먼저 은정숙의 방에 가서 아까 일어난 모든 일을 설명해 주었다.은정숙은 끝까지 듣더니 박민정의 손을 천천히 잡았다.“혼자서 나와 두 아이까지 보살피고 있는데 어떻게 유남준까지 돌보겠어. 유씨 가문 사람들은 정말 너무하다니까.”은정숙은 유씨 가문 사람들이 부자들이니 일반인들보다 더 마음이 넓을 줄 알았다.하지만 돈이 많을수록 더 쪼잔하고 뒤끝이 길었다.“전 유남준 씨를 돌보지 않을 거예요. 여기 오면 다 직접 해야 할 겁니다.”말을 마친 박민정은 은정숙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예찬이와 윤우는 아직 상황을 잘 몰라요. 만약 유남준 씨가 온다고 하면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윤우는 전에 남준 씨를 본 적이 있고 또 지금은 병원에 있으니 괜찮지만 예찬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총명해서 수상한 점을 발견할까 봐 걱정이에요.”은정숙도 그 말을 듣더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유씨 가문 사람들은 이득을 손에 꽉 잡고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다. 만약 박예찬과 박윤우가 유남준의 아이라는 것을 알면 두 아이를 빼앗아가려고 아득바득 애를 쓸 것이다.마침 이때 조하랑이 전화를 걸어 물었다.“민정아, 나 예찬이 좀 빌릴 수 있을까?”“빌린다고?”박민정은 약간 의아해했다.“강연우가 돌아온 거 알잖아. 약혼녀도 같이 왔더라고. 둘이 결혼식을 올릴 거라는데 청첩장을 나한테까지 보냈어.”조하랑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화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어! 며칠 후면 예찬이를 데리고 결혼식에 가려고.”박예찬 같은 총명한 아이가 있으면 강연우의 콧대를 부숴줄 수 있다.박민정은 박예찬에게 유남준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이라 바로 조하랑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유남준이 곧 온다는 얘기도 해주었다.“유씨 가문 사람들 정
두 여자는 하나같이 악독했다.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박민정을 찾아가기로 했다.“아이들 잘 지켜봐요.”“걱정 마세요.” 이지원이 대답했다.윤소현은 그제야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유남준이 볼일 보러 나간 후에야 박민정의 병실로 들어갔다.“형수님, 들었어요. 쌍둥이 아들을 낳으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윤소현은 들어오자마자 제멋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박민정은 윤소현의 지금까지의 행적을 떠올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나가주세요. 여기서 당신을 환영하지 않아요.”“환영하지 않는다고요? 어제 친자 검사 때문인가요?” 윤소현이 일부러 그녀를 자극했다. “박민정, 사실 난 진작 알고 있었어. 네가 정수미의 친딸이라는 걸.”“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지? 정수미가 널 인정하나? 오늘 누가 날 보내왔는지 알아?”박민정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윤소현은 의도적으로 모든 죄를 정수미에게 뒤집어씌웠다. “바로 정수미야. 그 여자가 특별히 날 보내서 너한테 확실히 말하라고 했어.”“정수미 말로는 장애가 있는 딸은 있을 수 없대. 설령 친딸이라 해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 헛수고 하지 말라고.”친딸인데도 인정하지 않는다고?박민정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는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굉장히 아팠다.“그래요? 친딸에게 빚진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보상하겠다고도 했는데...”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박민정의 모습에 윤소현이 냉소를 지었다. “그건 남들 보라고 한 거지. 생각해 봐. 정수미가 어떤 사람이고 넌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정이 있겠어? 그저 친딸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딸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장애...장애!박민정은 기분이 매우 얹짢았지만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그런 말을 내가 믿을 것 같나요? 정수미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난 알아요. 그분이 진심으로 친딸을 찾고 싶어 한다는 걸요.”박민정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고 윤소현의 말 몇 마디에 속아 넘어갈 리가 없
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 파도가 일렁였지만 겉으로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어서 가서 찾아. 두 아이를 찾지 못하면 진주시에 있을 자격도 없어.”“네, 네, 네.” 경호원들이 즉시 수색에 나섰고 유남준은 휴대폰을 들어 다른 전화를 걸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누가 아이들을 데려갔는지 반드시 찾아내.”소인배들이 그를 만만하게 본 걸 보니, 예전에는 지나치게 너그러웠나보다.“그리고 진주시의 원수들을 하나하나 다 처리해.”“네.”유남준은 모든 지시를 내리고 박민정의 병실로 향하던 중 그만 비틀거리며 한 발짝 휘청거렸다.박민정은 막 깨어난 참이라 아이들이 사라진 사실을 몰랐다.그녀는 유남준을 보자마자 물었다. “남준 씨, 우리 아이들은 어디 있어요? 보고 싶어요.”유남준은 다가가서 거짓말을 했다. “두 아이 모두 아직 인큐베이터에 있어. 황달이 조금 있거든”“그래요? 그럼 내가 일어나서 보러 갈게요.” 아이들이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안 돼. 넌 지금 몸이 약해. 의사 말로는 이틀은 더 누워 있어야 한대. 서두르지 말고 몸이 좋아지면 보러 가자.” 유남준이 부드럽게 달래자 박민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그러고는 팔을 뻗었다. “안아줘요.”최근 이틀은 몸도 마음도 지쳤고 정말 힘들었다. 유남준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녀를 살며시 안았다.박윤우가 간호사와 함께 들어왔을 때 바로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 “엄마, 아빠...” 그는 손으로 눈을 가리긴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여전히 보였고 시선을 전혀 막을 수 없었다.박민정은 서둘러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윤우야, 이리 와봐. 엄마가 좀 볼까?”간호사도 다가왔다.“축하드립니다. 제대혈 교차검사를 했는데 적합하네요. 윤우가 곧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이 소식에 박민정은 무척 기뻤다.“정말요?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별 말씀을요. 당연한 일입니다.” 간호사는 이
“지금 회사가 정상 운영이 안 되고 밖에서 시위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언론인들도 데리고 왔는데 쫓아내기도 곤란하고요.” 진서연은 해외에서 박민정의 작은 회사나 관리했지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지만 유남준은 오히려 침착했고 차근차근 지시를 내렸다.연지석도 왔는데 도우려다가 유남준이 있는 걸 보고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이때 설인하가 창백한 얼굴로 사과했다. “사장님, 정말 죄송해요. 지난번에 주신 프로젝트를 또... 망했어요.”그녀는 지금 자신의 능력을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고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다.연지석은 그녀를 탓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이건 설인하 씨 잘못 아닙니다. 내가 인하 씨 같은 평직원이었고 뭘 하든 막으려는 재벌 회장까지 있다면 나도 성공 못 했을 겁니다.”설인하가 놀랐다.“무슨 뜻이세요?”“인하 씨랑 방성원 씨의 부부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조사해 보니 내가 인하 씨한테 줬던 프로젝트들은 다 방씨 가문에서 가로챘더군요.”설인하는 가슴이 철렁했고 곧이어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그랬군요!”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사장님,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제 개인사 때문에 사장님 프로젝트에 피해를 끼쳤네요.”연지석은 두 손을 책상 위에 모았다.“괜찮아요. 민정 씨 친구니까 내 친구기도 해요. 이 정도 프로젝트는 별거 아니에요.”“감사합니다.” 설인하는 다시 허리 굽혀 인사하고 연지석 사무실을 나와 방성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왜 이런 비열한 짓을 한 거야!”아직 새벽 4시였다. 방성원은 설인하가 혼자 자다가 잠이 안 와서 자기를 생각하며 전화한 줄 알았다.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따지는 소리가 들렸다.“이른 아침부터 날 욕하려고 깨운 거야?” 방성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욕은 무슨, 때리고 싶을 정도야! 왜 내 프로젝트를 가로채? 그게 너한테 무슨 이득이 된다고 생각해? 방씨 가문이랑 우리 PMJ는 업종도 다르고 경쟁사도 아니잖아!” 설인하는 분노가 치밀어 목소리가 떨렸
박민호는 그 말을 듣고 아첨하는 웃음을 지었다. “형, 그렇게 안 하셔도 돼요. 걱정 마세요, 꼭 도와드릴게요.”차가 출발하자 박민호는 이미 자신이 진주시의 유력 인사가 되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병원 밖에는 그들 외에도 윤소현과 이지원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평범한 차 안에 앉아 각자 생각에 잠겼다.“아들 둘을 또 낳았대요!” 윤소현은 질투심을 숨기지 못했다.유남준에게 아들이 넷이나 있으니 앞으로 자기 아이와 재산을 두고 경쟁할 인물이 생긴 것이다.이지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소현 씨, 우리 계획대로라면 곧 박민정의 경사가 상사로 바뀔 거예요.”윤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이 소식을 최현아에게도 전했다.최현아는 최근 시아버지 유석진과 함께 호산 그룹에 있으면서 유남우의 권력을 빼앗으려 했던 터라 갑자기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진짜야?”“이런 걸로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요? 조금만 알아보면 알 수 있죠.” 윤소현이 한숨을 쉬었다. “박민정의 아들 둘도 똑똑한데 이제 둘이 더 생겼으니 지훈이나 제 미래의 아이는 스트레스가 심하겠네요.”최현아는 옆에서 게임하는 유지훈을 보자 화가 났다. “얼른 숙제나 해!”“엄마, 유치원에 무슨 숙제가 있어요.” 유지훈이 불평하며 제 할 일을 계속했다.최현아는 어쩔 수 없었다. 윤소현이 일부러 자신을 부추기는 걸 알았기에 겉으로는 침착한 척했다.“요즘 경쟁이 치열하지. 박민정이 출산했으니 나도 가봐야겠네. 알려줘서 고마워.”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여기서 최현아가 소식을 들었다면 고영란도 당연히 알았을 터. 그녀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귀여운 사내아이 둘을 보자 그녀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민정아, 남준아, 예찬이랑 윤우는 어렸을 때 내가 제대로 키우지 못했잖아. 이번엔 꼭 이 두 아이만큼은 내가 곁에서 돌보면서 키우고 싶어.”박민정이 따뜻하게 웃었다. “좋아요.”유남준은 그녀가 동의하는 걸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머
마침내 분만실 문이 열리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간호사가 두 아기를 데리고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합니다.”유남준은 아기를 보지 않고 바로 분만실로 들어갔는데 분만실에는 박민정이 기력이 없이 누워있었다.“민정아.”박민정은 힘겹게 웃었다. “괜찮아요.”유남준은 그런 그녀가 더욱 안쓰러웠다.“이제 그만 낳자.”“네, 좋아요.”박민정이 대답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아기들은요?”“밖에 있어, 건강해.” 유남준의 이 말에 박민정은 안심되면서도 궁금했다. “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유남준이 멈칫했다.“잠깐만, 내가 보고 올게.”그는 박민정 생각에만 빠져서 아기를 보는 걸 잊고 말았다.밖으로 나오니 박윤우와 박예찬이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아기들은요?”조하랑이 혀를 찼다. “이제 아기 생각나요? 신생아실로 갔어요.”“깜빡했네요.”유남준이 물었다.“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멋진 사내아이 둘이에요.”조하랑의 말에 유남준도 박예찬, 박윤우처럼 실망했다. 그는 박민정을 닮은 딸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걸 잊지 않았고 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깊은 잠에 빠졌다.그녀가 쉬는 동안 조하랑과 진서연네는 아기들을 달래고 있었고 의사는 박윤우의 수술을 위한 검사로 바빴다.“너무 작고 귀여워.”진서연은 모성애가 한껏 피어올라 연신 귀엽다고 했으나 박예찬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동생이 하나라도 있었으면...”“남동생 둘도 좋아, 실망하지 마.”조하랑의 위로에 박예찬은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랑 이모, 언제 아기 낳으실 거예요? 저랑 윤우한테 여동생 둘 낳아주세요.”“맞아요, 한 명씩이요.” 박윤우마저 한마디 하자 조하랑은 말문이 막혔다.“꿈도 꾸지 마. 내가 낳은 딸을 왜 너희한테 하나씩 줘? 게다가 성별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조하랑이 부글부글 말하고 있을 때 김인우도 다가왔다. “맞아, 우리 딸
정수미는 돌아간 뒤 박민정이 조산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윤소현이 계속 세뇌를 시도했다. “엄마, 박민정이 회사 일 때문에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벌인 것 같아요.”“지원이가 엄마 딸이잖아요. 박민정도 엄마 딸이라면 쌍둥이라도 낳으셨단 말이에요?”정수미는 귓가가 윙윙거렸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만약 박민정이 정말 딸이라면 그동안 자신이 박민정에게 했던 모든 일들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엄마, 왜 아무 말씀도 없으세요? 절대 믿으시면 안 돼요. 그럼 지원이는 어떻게 해요?” 이 말에 정수미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좀 조용히 있어 줄래?”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고 몰래 이지원에게 박민정이 모든 걸 알았다고 문자를 보냈다. 이지원도 소름이 돋았다. [정수미가 믿었어요?][아직은요. 하지만 엄마 성격상 분명 조사할 거예요.]이 메시지에 이지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방금 소식 들었는데 박민정이 너무 흥분해서 지금 출산한대요. 소현 씨, 우리는 한 배를 탔어요. 도와주셔야 해요.]혼자서는 박민정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정씨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윤소현은 이지원을 찾아갔고 정수미는 모든 걸 지켜보며 사람을 시켜 그들의 대화를 도청하게 했다.이지원은 방에서 계획을 세우다가 윤소현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윤소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적으로는 언니라고 부르지 마요. 무슨 일이겠어요, 박민정 일로 의논하려고 왔죠.”이지원은 윤소현이 악랄하면서도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자기를 찾아오다니, 정수미가 뭐라고 생각할까?“아...”이지원이 목소리를 낮춰 이해관계를 설명한 후에야 윤소현은 깨달았다. “내가 너무 급했네요.”“괜찮아요, 언니. 진실은 밝혀질 테니 일단 쉬세요.”이지원이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지만 다른 방에서 대화
박민정은 정수미가 검사 결과를 보고 기뻐할 줄 알았다. 이지원이 가짜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하지만 정수미가 제일 먼저 위조 얘기를 꺼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박민정은 목구멍이 바늘에 찔린 듯했다.“이건 진짜예요. 위조된 게 아니에요. 믿지 못 하시다면 직접 확인해보세요.” 윤소현이 비웃듯 말했다.“사기꾼 말 믿고 우리 엄마가 세상 모든 여자랑 친자 검사라도 해야 하나?”그녀는 정수미 손에서 검사서를 뺏어 찢어 쓰레기통에 던졌다.“엄마, 가요. 이런 사기꾼이랑 말할 가치도 없어요.”정수미는 일어서지 못한 채 박민정을 바라보았다. “내 친딸 얘기로 장난치지 말라고 했죠. 평생의 아픔이에요!”박민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절대 용서 못 해요. 다시는 연락하지 마요!” 정수미의 마지막 말이었다.그들이 떠난 후, 박민정은 찢어진 검사서를 바라보았고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바보같아.”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식당을 나섰다. 밖에 나와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가슴 한켠을 누르는 거대한 바위같은 무게감이 사라지지 않았다.전화벨이 울리자 박민정은 정수미가 마음을 돌려 자신과 함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자신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아보니 유남준이 건 전화였다.“남준 씨.”“일어났어?”남자의 익숙한 목소리에 박민정은 눈물이 났다. “진작 일어났어요.”“그럼 전화하지 그랬어? 지금 갈게.” 유남준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말에 박민정은 휴대폰을 꼭 쥐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일하는데 방해될까 봐... 나 정수미 씨 만나고 왔어요.” 유남준은 걸으며 통화를 이어갔다.“그래서?”“그 사람이 내가 보여준 유전자 검사를 믿지 않았어요. 나더러 사기꾼이래요. 다시는 연락하지 말래요.”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어디야? 내가 갈게. 울지 마.” 유남준이 차에 타며 말했고 박민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병원 근처
윤소현은 정수미가 박민정과 만난다는 걸 알자마자 전화를 걸었고 진짜 그렇다는 걸 확인하고는 순간 급해졌다.“엄마, 제가 같이 갈게요. 박민정이 엄마를 만나자고 한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닐 거예요. 지난번에 칼을 들고 엄마를 협박했던 일을 잊으셨어요?”정수미는 그 말을 듣고 경계심이 들었다. “네가 말하니 기억나네. 걱정 마, 이번엔 경호원을 데리고 갈 거야. 그러면 못할 거야.”“엄마, 무서워요. 제가 꼭 같이 가야겠어요.” 윤소현은 이미 차에 탄 상태였다. “엄마, 주소 보내주세요. 엄마는 제 전부예요. 엄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요.”정수미는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알았어.”주소를 보내고 나서 정수미는 윤소현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비서도 대화를 대충 들었다. “소현 아가씨가 냉철해도 대표님을 많이 생각하시네요.”정수미는 미소 지었다. “그 애는 내가 너무 잘해줘서 그래. 난 정말 걱정이야. 내가 먼저 가버리면 어떡하나...”“대표님, 분명 오래 사실 거예요.” 비서가 아부했다.정수미는 한숨을 쉬었다. “내 몸은 내가 알지. 젊을 때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육칠십까지만 살아도 만족해.”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박민정과 약속한 식당에 도착했다.윤소현이 오기 전에 정수미는 비서 겸 경호원과 함께 올라갔다.룸의 고급 방에서 박민정은 조용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긴장된 마음을 달랬다.마침내 발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리자 정장 차림의 정수미가 비서와 함께 들어왔다.“민정 씨, 무슨 얘기하실 건가요?”정수미는 들어오자마자 앉지도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함미현 일 때문 아닌가요? 박민정 씨가 이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네요.”예전 같았으면 박민정은 바로 받아쳤을 테지만 지금은 정수미의 얼굴을 보며 잠시 멍해졌다.정수미가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면 대가를 치르게 되죠.”박민정이 화를 낼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아무 반응 없이
병실에서 퇴원할 생각 없이 늦게까지 떠나지 않는 진서연 일행. 남자인 유남준은 당연히 그들과 할 얘기가 없어 다른 방에서 계속 일했고 그들이 떠나자마자 그는 밖으로 나왔다. 박윤우는 이미 피곤함에 지쳐 잠들어 있었고 그걸 본 유남준이 박민정 곁으로 다가왔다. “피곤하지 않아? 좀 누워있을래?” 박민정은 매번 누울 때마다 그가 이것저것 장난치는 걸 떠올리며 얼굴이 붉어졌다. “안 피곤해요, 좀 더 앉아있고 싶어요.”“출산이 얼마 안 남았는데 가서 좀 누워있자. 응?” 유남준이 다정하게 달랬고 결국 박민정은 그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겨 함께 누웠다.불을 끄자 밖의 희미한 불빛만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함미현네는 괜찮아요?” 박민정이 물었다. 유남준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걱정 마, 내가 몰래 사람을 붙여뒀어.” “네...”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정수미는 왜 저렇게 잔인한 걸까요?” 박민정은 자신과 박예찬이 그녀 손에 죽을 뻔했던 걸 떠올렸다. 또 함미현네 일을 생각하니 그 사람이 무서워졌다. 함미현의 일은 자업자득이지만, 자신은? 그저 윤소현의 미움을 샀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친어머니라니!“여자가 그 자리까지 올라가려면 어느 정도 수단은 필요하지.” 유남준이 대답했다. 박민정도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고민이에요. 그분을 엄마로 받아들여야 할지...”“사실 진실을 말해도 좋을 것 같아. 그 뒤는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하면 되고.” 유남준이 말했다. 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결심이 선 듯했다. “좋아요, 내일 가서 얘기해 볼게요.” 어차피 이 문제는 언젠가는 해결해야 했다.“응.” 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박민정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준 씨!” 유남준은 또 ‘응’하고 대답했는데 목소리가 쉰 듯했다.좋아하는 여자가 곁에 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