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아이인 유지훈이 자리에 있다는 생각에 애써 감정을 억제했다.유성혁 부부는 수치심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방을 나섰다.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곧바로 돌변했다.“남준이 저 자식은 위아래가 없는 건가? 감히 나한테 덤벼?”최현아도 분노를 못 이겨 씩씩거리며 유지훈을 끌고 나왔다.“동생이라면서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어르신이랑 지훈이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체면을 짓밟을 수가 있죠?”최현아는 유남준이 머문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띠었다.“방금 우릴 비웃는 거 봤어요?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유성혁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무슨 뜻이야?”“민정 씨를 다시 데려왔다는 소식 못 들었어요?”“그게 왜?”유성혁은 예쁜 박민정이 난청 때문에 외출할 때마다 보청기를 착용하는 게 불쌍하다고 여겼다.“여보, 걱정하지 마요. 오늘 받은 모욕은 반드시 되갚아 줄 거예요.”최현아는 이를 악물었다.“비밀 하나 얘기해줄까요? 민정 씨가 사랑하는 사람은 도련님이 아니에요.”이 일은 최현아도 우연히 알게 되었다.박민정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걸 보고 싶어 지금껏 언급하지 않았지만 유남준에게 한 방 맞고 나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골탕을 먹이고 싶었다....유남준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박민정은 이미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은은한 불빛이 그녀의 몸을 비추자 유난히 매혹적이었다.유남준은 외투를 벗어 던지고 넥타이를 잡아당기더니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어머니가 뭐래?”박민정이 그를 바라봤을 땐 바지만 남은 상태였다.다부진 상체가 고스란히 눈에 보이자,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아이를 임신하면 4,000억을 준대요.”“그래서 동의했어?”유남준은 곧장 침대에 올라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아니요. 전 아이를 팔고 싶지 않거든요.”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입술은 마침 유남준의 볼에 닿았다.순간 가슴이 찡해지며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는 카리스마 넘치는 CEO로 알려진 유남준이 이런 뻔뻔한 면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게 아닌듯싶다.유남준은 옆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앞으로도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그렇게 날이 막 밝아올 무렵에야 박민정은 잠이 들었다.추석날.유씨 가문은 늘 그렇듯 수많은 친척들이 모여 시끌벅적했다.유일하게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오늘은 이 자리에 박민정이 있다는 것이다.일찌감치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추측이 사실인 것처럼 사석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남준 오빠가 직접 데려왔다고? 도대체 왜?”“진짜? 저 여자가 먼저 연락한 게 아니라고?”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울려 퍼지던 그 시각 박민정은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몸을 일으켰다.침대에서 일어나자 준비된 드레스와 한쪽에 놓인 화려한 주얼리가 보였지만 재빨리 시선을 떼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남준은 드레스를 갈아입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파티라도 하는 건가? 아무튼 전 참석할 생각 없어요.”박민정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왜? 이유를 말해봐.”유남준은 지그시 그녀를 바라봤다.“이유가 왜 필요하죠?”박민정의 질문에 유남준은 위압감을 풍기며 한 걸음 다가갔다.“이번에는 다를 거야.”박민정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가고 싶지 않아요.”‘달려졌다고? 날 괴롭히는 방법이 달라진 건가?’5년 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면전에서 얼마나 많은 핀잔을 줄지 안 봐도 뻔하다.유남준은 오늘 박민정을 데리고 직접 가족 연회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늘 서럽다고 얘기했으니까.“친구들은 남편이랑 같이 파티도 가던데 나만 혼자예요... 다들 지켜줄 사람이 있는데 나만 없고...”하지만 이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지금의 박민정은 파티에 참석하고 싶지도,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싶을 만큼 연악하지도 않았다.유남준의 손은 허공에 굳어버렸다.
“오랜만이네. 너무 많이 변해서 못 알아볼 뻔했어.”최현아는 손을 내밀었지만, 박민정은 이를 무시하고 그저 예의 바른 웃음을 지었다.“그쪽은 변한 게 없네요.”순간 표정이 굳어버린 최현아는 손을 거두었다.“나가서 얘기 좀 할래?”최현아는 박민정보다 일찍 유씨 가문에 시집왔다.박민정이 유남준과 약혼 얘기가 오가던 와중에 최현아는 친한 언니처럼 시간 있을 때마다 찾아와 수다를 떨었다.두 사람이 결혼한 후, 박형식이 세상을 뜨고 박씨 가문이 점점 무너지자, 그녀는 비로소 본모습을 드러냈다.타고난 연기파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바깥의 오솔길을 걸으며 최현아는 상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그거 알아? 5년 전에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한숨도 못 잤어. 심지어 그때 지훈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유산할 뻔했다니까?”진심은 일도 없는 가식 섞인 말인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야 하는 게 현실이다.“왜요? 무서웠어요?”박민정은 농담인 척하며 태연하게 물었다.“설마 밤에 찾아올까 봐 두려웠던 건 아니겠죠?”그녀는 박민정의 결혼 생활에서 발목잡는 걸림돌 같은 존재였다.유남준이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실종된 적이 있었다. 그때 박민정은 유앤케이 그룹이 휘청거리지 않도록 유씨 가문의 친인척과 임원들을 일일이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모든 사람이 유남준은 죽었다고 단정하는 와중에도 희망의 끝을 놓지 않은 채 홀로 그를 찾기 위해 두바이로 떠났다.운 좋게 그곳에서 유남준의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나 계약을 성사했을 뿐만 아니라 유명훈의 눈에 들어 성공적으로 유씨 가문에 시집오게 되었다.하지만 이 모든 걸 최현아가 망쳐버렸다. 그녀는 박민정이 두바이에서 부자를 꼬셨다는 루머를 여기저기 퍼뜨렸다.그 얘기를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유명훈은 곧바로 벌을 내렸고, 그렇게 박민정은 사당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하루 밤낮을 보냈다.이런 일은 약과에 불과했으니 그동안 얼마나 잔인한 수단과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혀왔는지 짐작할 수
최현아의 말을 되새기던 박민정은 눈앞의 정원을 바라보며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넋을 잃고 안으로 들어섰다.정원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계수나무 한 그루에서 풍기는 향이 매우 익숙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잊었을 수도 있겠지만 박민정은 자신이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고 확신했다.어릴 적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자주 유씨 가문을 방문했다.박민정은 계수나무 아래에 서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홍색의 가옥을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삐걱-!문이 천천히 열리자, 그녀는 내부의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방안의 모든 가구와 물건들은 뭔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 흰 천으로 덮여있었다.최현아는 도대체 뭘 보여주려고 이곳으로 데려온 걸까?그녀는 의혹을 가득 품은 채 흰 천 하나를 들어 올렸다.쨍그랑!뭔가 바닥에 떨어졌다.앞으로 다가가 보니 액자 하나가 놓여있었고 허리 숙여 그것을 들어 올린 박민정은 액자 속의 사진을 보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사진 속에는 똑같이 생긴 아이 둘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한 명은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반면 다른 한 명은 반달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사진 맨 아래에는 자그마한 글씨체로 뭔가가 적혀있었다.[형 유남준, 동생 유남우.]유남준? 유남우?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밀려오면서 가슴이 답답해진 박민정은 재빨리 다른 흰 천을 젖혀 사진 몇 장을 더 찾았다.여전히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이었는데 어렸을 때가 아니라 성인이 된 모습이었다.정장 차림으로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른쪽 남자와 달리 왼쪽에 서 있는 남자는 캐주얼한 옷차림에 온화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비록 똑같이 생겼지만 풍기는 분위기로만 봤을 땐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역시나 이 사진 아래에도 자그마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형 유남준, 동생 유남우.]싸늘함을 풍기는 남자가 유남준,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유남우다.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밀려오며 박민정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정신
유남준은 망연자실한 박민정의 표정을 보며 뭔가 사고를 칠 것 같은 느낌이 밀려와 재빨리 사람을 시켜 그녀를 방으로 데려갔다.방으로 돌아온 후.유남준은 옷 한 벌을 꺼내 그녀에게 걸쳤다.“확인하고 싶은 게 뭔데?”“쌍둥이 동생 있어요?”박민정은 사진을 손에 꽉 움켜쥔 채 보여주지 않았다.동생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지고 눈빛이 싸늘하게 돌변한 유남준은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맞아.”박민정은 쉴 틈 없이 물었다.“왜 지금까지 한 번도 얘기 안 했어요?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는데요?”유남준은 입술을 깨문 채 감정을 추슬렀으나 싸늘함을 머금은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갑자기 찾아와서 묻고 싶었던 게 고작 이거야?”박민정은 뚫어져라 그를 바라봤다.“집안일이니까 넌 알 필요 없어.”잔인한 독설은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혔고 선을 긋는 말을 들으니 그의 입에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한편으로는 사진을 보여주지 않고 주머니에 숨긴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알려주면 다시는 이 얘기를 꺼내지 않을게요.”유남준의 눈빛에는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의아함이 가득했다.“갑자기 왜 그걸 알고 싶은 건데?”동생 유남우는 유씨 가문에서 금기시되는 거나 다름없었기에 누구도 감히 언급할 엄두가 없었다.심지어 유남우의 존재를 알고 있는 도우미마저도 행여나 말실수로 유남준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다.유남준은 계속하여 따졌다.“누가 뭐라고 얘기해줬어?”박민정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대충 둘러댔다.“지난번에 어머님이랑 대화하는 걸 엿듣고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마침 밖에서 산책하고 돌아오면서 누군가 그 얘기를 하고 있길래 갑자기 생각나서 물어본 것뿐이에요.”이런 어설픈 거짓말에 유남준이 속을 리가 없다.더군다나 얼마나 다급하게 자신을 찾았는지, 얼마나 넋이 나갔는지 직접 봤기 때문에 분명히 큰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미안해요. 마음이 급해서 너무
연회장에서 겪은 갖가지 구설수로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지금 이 순간 전부 부질없게 느껴졌다.그는 박민정을 깨우지 않고 그대로 품에 안았다.바로 이때 그녀의 이마가 평소보다 뜨겁다는 걸 알아챘다.“너 지금 열나.”그의 움직임에 잠이 깬 박민정은 머리가 아픈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왔어요?”“응, 너 열 나니까 의사 선생님 모셔 올게.”유남준은 그녀를 내려놓고 휴대폰을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런데 이때 박민정이 갑자기 그를 껴안았다.“싫어요. 해열제 먹으면 되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보름동안 임신 여부를 확인할 시간조차 없었는데 괜히 의사가 뭔가를 알아챈다면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는 거나 다름없다.적극적으로 품에 안기는 그녀의 모습에 유남준은 온갖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내 말 들어.”박민정은 결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제발요.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요.”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오늘 왜 이래?”박민정은 평소에 애교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나 해외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그 빈도가 더 줄어들었고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가끔 애교를 부리곤 한다.자신을 의심하는 유남준의 눈빛에 박민정은 머리를 그의 품에 파묻고 나지막하게 말했다.“아빠가 병원에서 돌아가셨어요. 아이도요.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게 무서워요.”아버지와 아이 얘기를 꺼내자, 유남준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약 가져다줄게.”그는 몸을 일으켜 해열제를 가지러 갔다.소파에 웅크리고 있던 박민정은 훤칠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허무하다는 느낌이 밀려왔다.곧 유남준이 다가와서 따뜻한 물과 약을 건넸고 그녀는 약을 받고 꿀꺽 삼킨 후 애써 밝은 미소를 지었다.“약 먹으면 바로 괜찮아질 거야.”“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유남준은 그녀가 괜찮다고 말하는 걸 듣고서도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저녁.여전히 미열이 남아있던 박민정은 샤워하고 약을 먹은 후
박민정이 실망하지 않았으면 해서였을까? 유남준은 결국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길고 길었던 비가 드디어 그치고 휘영청 밝은 달이 하늘에 걸렸다.유남준은 박민정이 안내하는 대로 연못에 도착했다. 도착해보니 연못은 어느새 인공 호수가 되어 있었고 주위는 큰 공원으로 변해 있었다.지금 시간대는 다행히 사람이 없었고 박민정은 외투를 걸치고 차에서 내렸다. 아직 겨울이 온 것도 아니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껴입었다.유남준이 그녀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여기야?”“네, 변화가 크네요.”유남준은 이곳에 대한 기억이 없다. 어릴 적 박씨 저택에 몇 번 찾아온 적은 있지만, 뒷산까지 온 적은 없었고 그러니 당연하게도 이곳에 연못이 있었다는 것도 모른다.박민정은 나무다리 위 한가운데 서서 달을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그때 두 사람은 함께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박민정의 당시 소원은 유남준과 결혼하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소원은 이룬 셈이다.유남준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다리 위 여인의 얼굴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달빛이 드리워진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단아하고 예뻤으며 자연과 어우러져 예쁜 풍경화 같기도 했다.그때 박민정이 그를 향해 외쳤다.“왜 안 와요?”유남준은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는 그녀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박민정은 예쁘게 웃으며 답했다.“손이 차면 마음은 따뜻하다잖아요.”이 어린아이 같은 말은 유남준이 어릴 때 그녀에게 해줬던 말이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그저 그녀가 춥지 않도록 꼭 끌어안을 뿐이었다.“딱 1분 줄게. 1분 뒤에 집으로 돌아가자.”“정말 이러고 끝이에요?”박민정은 유남준이 어릴 때 일을 조금이라도 떠올리기를 바랐다. 아주 작은 기억이라도 좋으니...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그는 어릴 적 이곳에서 두 사람이 같이 소
박민정은 결국 최현아에게서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녀의 조언대로 멍청하게 고영란을 찾아가지도 않았다.방으로 돌아와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연지석이 보낸 문자가 와 있었다.[문자 보면 나한테 연락 줘.]박민정이 바로 전화를 걸자 금세 통화가 연결되었다.“요즘 어때?”“윤우가 있는 곳 지도를 얻었어. 다음번에 윤우 만나러 갈 때 몰래 데리고 나올 생각이야.”“시간 정해지면 얘기해줘. 너 혼자 하는 건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연지석이 이러는 건 아마 그녀 혼자 윤우를 데리고 나오다가 잡힐 것을 염려해서 일 것이다.“걱정하지 마. 윤우 데리고 나오면 너부터 찾아갈게.”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 과정에서 유남준과 연지석의 충돌이 생길까 봐 걱정된다. 그녀의 도망을 도운 연지석에서 유남준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르는 노릇이니까.“응, 알겠어.”연지석은 잠시 뜸을 들이다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전에 네가 부탁한 일, 성공했어. 임수호는 이제 이지원이 어떤 여자인지 확실히 알아. 그러니까 임수호를 시켜 유남준에게 진실을 알려도 되고 이지원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도 돼.”솔직히 임수호가 몇 번이나 이곳에서 도망쳐 이지원을 찾으러 가려 했을 때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어제는 실제로 도망에 성공을 해버렸으니 말이다.하지만 병원에 있는 이지원을 찾아갔을 때 임수호는 미친놈 취급을 당하며 쫓겨났다.마지막까지 그녀를 믿었던 결과가 이것이니 충격이 컸을 것이다.하여 이지원이 원하는 게 자신의 죽음이라면 똑같이 되돌려 주겠다는 게 임수호가 내린 결론이었다.박민정이 생각에 빠져있을 때 또 다른 휴대폰의 알림이 울렸다.“잠시만.”연지석에게 양해를 구하고 휴대폰을 확인하자 마침 그건 이지원이 보낸 문자였다.그녀가 보낸 사진을 보니 거기에는 아티스트 트로피를 들고 있는 이지원이 있었고 그 뒤에는 유남준도 서 있었다.‘오늘 볼일이 있다고 했던 게 이지원을 만나기 위한 일이었나 보네.’이지원은 사진을 보낸 후 메시지까지
오늘 저녁은 학교에서 준비해 줬다.사실 물고기를 잡아서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 했는데 다들 많이 잡지 못한 바람에 식사가 조금 부실했다.하여 저녁 식사 시간이 돌아오니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에너지 소모가 많았던 탓에 음식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게 되었다.유지훈은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박예찬을 신경 썼다.그리고 내심 박예찬 주변에 친구가 많은 게 부러웠지만 이제 와서 그에게 붙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한편, 최현아는 오늘 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너무 긴장되어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 쪽을 바라보았는데 세 가족이 화기애애해 보이는 모습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피어올랐다.저녁 식사가 다 끝난 뒤 각자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최현아가 어느새 유남준의 곁에 다가오더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남준 씨, 음식은 입에 잘 맞았나요? 제가 음식을 따로 싸 왔는데 괜찮으시면 좀 드실래요?”그러나 유남준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괜찮습니다.”어제랑 다르게 차가운 그의 태도 때문에 최현아는 순간 멍해졌다.분명 어제 자신이 땀을 닦아줘도 가만히 있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나 싶었다.“그래도 제가 남준 씨 형수인데 너무 체면 차릴 필요 없어요. 제가 금방 가지고 올게요.”최현아는 유남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빨리 음식 가지러 달려갔다.그저 유남준이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보고 오해할까 봐 철벽친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박예찬과 무료함을 달래려 잡초를 뽑고 있다가 무심결에 최현아와 유남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박예찬에게 물었다.“저 두 사람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박예찬은 박민정이 풀 뽑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열심히 같이 뽑다가 문득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유남준이 또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고 있었다.“엄마,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게.”“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하나는 유남준의 좋은 시간을 방해할 것 같아서였고 다른 하나는 괜히 박예찬이 가서 물어보면 마치 그
오후가 되니 날씨가 약간 흐려지기 시작했다.박민정네는 산언덕에 앉아 바람도 쐬고 구운 생선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박예찬은 특별히 물고기 한 마리를 남기더니 조동민에게 주며 말했다.“아마 오래 살지는 못할 거야.”그의 말에 조동민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예찬아, 고마워. 넌 참 착한 아이야.”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자기 아들이 너무 따뜻한 사람이라 앞으로도 친구 사귀는 건 문제없겠다고 생각되었다.“고작 고기 한 마리 가지고 뭘.”박예찬은 아직 칭찬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쑥스러워했다.조동민은 고맙기는 한데 오늘 발생했던 일 때문에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민정 이모, 혹시 오늘 일은 진짜로 제가 잘못한 걸까요?”어린아이의 세계는 그저 흑과 백으로 단조롭게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하여 당연히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자기더러 사과하라던 아버지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다.박민정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이모는 동민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넌 단지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고 있었을 뿐, 유지훈이 먼저 잘못한 거지.”그녀의 말에 조동민은 더욱 억울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런데 저희 아빠는 왜 저더러 사과하라고 했을까요?”“그건 어른들의 세계에는 옳고 그름만이 있는 게 아니거든. 이건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이해가 될 거야.”조동민은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그녀에게 답했다.“저도 알 건 알아요. 저희 아빠는 지훈이네 엄마가 무서웠던 거예요. 저희 부모님은 항상 저에게 유지훈에게 잘 보여야 우리 집안 사업도 잘되고 나중에 돈도 많이 벌 거라고 습관처럼 말하셨어요.”그의 말에 박민정은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이렇게 어린아이가 그런 말 때문에 얼마나 부담감을 느꼈을까?’그녀는 어떻게 조동민을 위로했으면 좋을지 몰라 그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그러나 조동민은 고개를 들고 박민정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이모, 저 오늘부로
한가영은 한껏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박민정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리고 박민정이 한마디 하자마자 장연수도 빠르게 거들었다.“최 회장님, 다 아이들 일이고 누구도 피해 본 사람이 없는데 이쯤 하시죠.”몇몇 학부모들도 최현아를 말리기 시작했다.“아이가 이 정도로 우는 걸 보면 분명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을 겁니다.”“맞아요.”최현아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어두운 얼굴로 가만히 서서 생각해 보았는데 보는 눈이 이리도 많은데 계속 아이를 혼내기도 뭐한 것 같았다.“그럼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내겠는데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겁니다.”조민혁은 심장이 다 타들어 갔다가 겨우 입을 열어 인사를 건넸다.“역시나 최 회장님은 아량이 깊으십니다.”한가영은 일이 이대로 마무리되자 단번에 조민혁을 옆으로 밀쳤다.“어떻게 여동생보다도 간이 작아요? 이런 사람이랑 결혼한 제가 멍청이네요.”부모님이 자기 앞에서 다투기 시작하자 조동민은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자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박민정 덕분에 사건이 종료된 뒤 조동민은 박예찬과 놀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박민정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박민정은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어 조동민과 잠깐 통화하게 했다.조동민은 화면 속의 조하랑을 보자마자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터졌고 조하랑은 겨우 그를 달래서 울음이 그쳤다.“민정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아직 아이라 표현 능력이 제한되어 있어서 조하랑은 자기 조카가 뭔가 억울함을 당했다고는 느꼈어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하여 박민정은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조하랑에게 알려줬고 그녀는 듣자마자 불같은 화를 냈다.“최현아라는 사람 진짜 너무하네! 이렇게 어린아이더러 동급생 아이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시켰다고? 제정신으로 한 말인가 싶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 여자 가면을 벗겨버리는 건데!”조하랑은 씩씩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오빠는 진짜 쓸모없는 인간이라니까.
“지훈아, 우리 동민이가 먼저 때린 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리는 건 아니라고 봐.”조동민의 아버지 조민혁이 말했다.그리고 어머니 한가영도 다시 최현아에게 애원했다.“최 회장님, 작은 오해로 아이에게 무릎 꿇고 사과시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최현아는 고작 조 씨 가문 따위가 자신에게 반항하는 모습이 너무 기분이 언짢았다.또한 두 사람은 박민정의 친구이자 조하랑의 친척이라는 사실에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만약 사과할 수 없다면 법원에 고소해야겠네요.”말이 고소지, 분명 다른 방법으로 조씨 가문을 괴롭힐 게 뻔했다.그래도 한가영은 자기 아들이 이런 수모를 겪게 내버려둘 수 없어 재빨리 조동민을 품에 안았다.이 시각, 조동민은 아주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분명 잘못한 사람은 유지훈인데 왜 자신이 무릎을 당연하게 꿇어야 하는지, 왜 어른끼리 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엄마, 저는 잘못하게 없어요.”순간 목이 메어왔다.한가영도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그저 조민혁만 바라보았다.그러나 조민혁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씨 가문의 세력으로는 최씨 가문이나 유씨 가문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동민아, 미안하다!”괜히 아이 하나 때문에 큰 집안을 말아먹을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아들을 무릎 꿇리게 해야 했다.한가영은 순간 마음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자기 남편이 아무리 무능력하다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고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구는 데도 가만히 있을 줄은 몰랐다.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 씨, 제발 저희를 좀 도와줘요. 민정 씨는 하랑 씨 친구잖아요. 하랑이는 동민이 고모예요.”조동민은 어렸을 적부터 조하랑을 이모라고 불렀는데 그러면 여태껏 잘못 부른 것이다.느닷없는 부탁에 박민정은 순간 눈앞의 아이가 조하랑의 조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다.조동민도 어느새 한껏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때 최현아의 떨떠름
온갖 잡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을 확인해 보니 시아버지인 유석진이었고 재빨리 구석 쪽으로 가서 통화버튼을 눌렀다.“오늘 저녁에 호우주의보가 떴던데 남준이랑 민정이 모두 거기에 있어?”“네.”“그러면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주 자연스럽겠지?”유석진이 묻는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최현아는 다급히 그에게 설명했다.“여기에는 다른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도 계세요.”“난 그저 유남준이랑 박민정만 사라진다면 다른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이 없어.”유석진의 말대로 그는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최현아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더니 눈길은 자기도 모르게 유남준에게로 향했다.“알겠어요. 그럼 준비되면 알려주세요.”“그래. 너랑 지훈이는 꼭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네.”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 전화를 끊었다.그러다가 머릿속에서는 진짜로 유남준과 박민정이 사고 나는 걸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지 온갖 잡생각으로 뒤엉켜있었다.박민정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지만 몰래 마음을 두고 있는 유남준이 이대로 죽는 건 아쉬웠다.두통이 몰려오던 이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마치 싸우고 있는 듯했다.이때 여교사 한 명이 최현아에게 다급히 달려왔다.“지훈이 어머님, 빨리 가보셔야겠어요. 지훈이가 다른 아이랑 지금 싸움 났거든요.”이건 선생님들이 관여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워낙 유지훈의 부모님이 극성이라는 소문이 있어 감히 먼저 말리지 못했다.또한 유씨 가문의 세력만 봐도 선생님들 쪽에서 밉보이는 행동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처지였다.“누가 감히 내 아들을 때려?”최현아가 빠르게 싸움 현장에 달려와 보니 유지훈과 조하랑의 조카인 조동민이 한창 주먹다짐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훈은 조동민보다 덩치가 한참 작았기에 전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내 물고기 당장 물어내! 우리 아빠가 직접 잡은 물고기인데 물어내라고!”
햇빛 아래서 그의 덩치는 유난히 우람해 보였는데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눈앞의 현실을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웬만한 부잣집 도련님들은 보통 이런건 모르지 않나? 그런데 왜 유남준은 개울에서 물고기 잡을 줄도 아는 거지?’이때, 마침 유남준도 그들을 보고 있었고 물고기를 받으라고 손짓했다.그 모습에 박예찬은 한껏 흥분한 상태로 그를 향해 외쳤다.“여기로 던져주세요.”유남준은 그의 말대로 손바닥보다 더 큰 물고기를 박예찬에게 던져줬다. 필경 아직 어린아이라 물고기를 만져보니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첫 번째로 잡은 물고기는 구덩이 하나를 파서 물을 채운 뒤 안에 넣었다.그 모습에 많은 어린이들이 구경하러 오게 되었다.“와! 예찬아, 이게 너희 아빠가 잡은 물고기야?”박예찬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어떤 여자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너희 아빠 참 대단하다. 우리 아빠는 아직 아무것도 못 잡았는데.”다른 아이들도 유남준을 칭찬하며 박예찬을 한껏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은 또 다른 물고기를 잡아 그에게 던져줬다.최현아 따라 땔감을 주우러 가려던 유지훈도 여느 사람들과 같이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엄마, 저도 가서 볼래요.”그의 말에 최현아도 말리지 않았다.“그래.”최현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유지훈은 재빨리 아이들이 몰린 쪽으로 달려가더니 자기 앞에 서 있는 아이를 밀쳐내고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나도 물고기 좀 보게 다들 비켜봐.”아이들은 이런 유지훈의 행동에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내키지 않지만 저마다 자리를 비켜줬다.유지훈이 맨 앞에 다가가 두 마리의 물고기를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난 또 얼마나 대단한 물고기를 잡았다고. 저건 작아도 너무 작잖아? 우리 아빠가 돈 주고 산 물고기가 훨씬 크고 이뻐!”아이들이라 그런지 한창 비교하기 좋아하는 나이다.특히 유지훈은 모든 아이가 박예찬을 둘러싸고 칭찬하는 모습에 질투심을 느꼈다.그러나 아쉽
유남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어젯밤에 네가 계속 춥다고 잠꼬대해서 내가 안고 같이 잤어.”“네?”박민정은 그의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날씨도 이젠 어느 정도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더구나 어젯밤도 전혀 춥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때, 옆에 누워있던 박예찬이 침낭에서 일어나더니 박민정에게 말했다.“엄마, 나도 봤어. 어젯밤에 분명 엄마가 계속 춥다면서 안아달라고 했어.”박예찬의 진지한 말투가 전혀 거짓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자 순간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내가 그런 잠꼬대를 했다고? 나이 먹으면서 외로워졌나?’이때, 박예찬이 박민정 앞에 다가와 다시 말을 이었다.“엄마,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예전에도 두 사람이 자주 그렇게 잤으니까.”박민정은 그의 말에 더욱 부끄러워 어딘가 숨고 싶어졌다.“알았어.”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고개를 돌려 유남준에게 말했다.“그럼 어젯밤은 고마웠어요. 혹시 저 때문에 못 잔 건 아니죠?”유남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야. 내가 이따가 이불을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오늘 밤에는 우리 이불 덮고 자자.”“그럴 필요 없...”박민정이 단번에 거절하려는 순간 텐트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동서, 남준 씨, 깼어?”최현아였다.그녀의 물음에 박민정이 재빨리 답했다.“네. 무슨 일이에요?”“우리 지금 땔감 주어서 아이들한테 야외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짓는 방법을 가르치려 하는데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여기까지 직접 와서 물어보니 박민정은 거절하기 힘들었다.“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박민정이 침낭에서 나오자 유남준이 갑자기 그녀의 팔목을 잡으면서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이때,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최현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남준 씨, 동서가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이따 남자분들은 개울에서 낚시해야 해요.”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말없이 얼굴을 찡그렸다.박민정은 재빨리 준비를 마치고 텐트 밖으로 나왔는데 최현아는 자
유남준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알겠어.”빠르게 저녁 시간이 돌아왔고 산기슭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유난히 별들이 잘 보였다.박민정과 박예찬은 같이 앉아 쉬고 있었고 유남준은 그들과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바비큐를 기다리고 있었다.고기 굽는 냄새가 순식간에 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해 자기도 모르게 시선들이 이쪽으로 쏠리게 되었다.박민정은 살짝 난감한 듯 박예찬에게 말했다.“예찬아, 네가 다른 친구들이랑 학부모님들, 그리고 선생님들도 데리고 와서 같이 먹자고 해.”전날 밤, 그냥 가벼운 말로 야외에서 캠핑하면 바비큐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걸 유남준이 기억하고 준비해 줬다.“네.”박예찬이 엉덩이를 툭툭 털면서 일어서더니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그렇게 잠깐 박민정과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녀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틈에 유남준은 어느새 다 구운 고기를 접시에 담아 박민정에게 건넸다.“먹어.”“먼저 먹어요. 저는 제가 구워서 먹을게요.”박민정은 방금 그와 다퉜는데 그가 구워준 고기를 덥석 받아먹는 게 왠지 미안했다.하여 스스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유남준은 여전히 자신을 거절하는 그녀 때문에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난 고기를 원래 안 좋아해. 네가 안 먹으면 이건 그냥 버릴게.”살짝 화가 난 목소리였다.그의 말에 박민정은 어이없다는 듯이 재빨리 그의 접시를 받아서 들었다.“아깝게 왜 버려요. 고기 안 좋아하면 더 이상 굽지 말아요.”생각했던 대로 말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었다.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순간 질투가 많은 여느 여고생처럼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하!”이제 자신이 구워주는 고기도 마다한다고 생각하니 유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러나 박민정은 이 상황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즐겁게 고기를 먹고 있다가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이 몰려오자 그들과 같이 식사 자리를 즐기기 시작했고 금세 유남준이라는 사람을 잊어버리게 되었다.그런 유남준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웃고
그러다가 최현아는 무심결에 유남준의 튼실한 팔뚝과 또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애초에 남준 씨랑 결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러다가 그에게 다가가 휴지를 꺼내며 물었다.“땀 흘렸네요. 제가 닦아 드릴까요?”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그의 땀을 닦아주려 손을 뻗었다.막 거절하려던 순간 박민정과 박예찬이 들꽃을 꺾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또다시 괘씸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 가만히 서 있었다.순간 최현아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유남준때문에 심장이 또다시 나대기 시작했다.‘들은 소문에 의하면 유남준에게 첫사랑인 이지원을 제외하면 여자라고는 박민정뿐이라고 했는데?’‘역시나 남자들은 다 똑같네!’순간 최현아는 진작에 유남준에게 접근하지 않은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아니면 진작에 IM 대표의 사모님 자리를 꿰찼을 텐데.마음속 욕망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면서 손은 점점 바빠졌다.박민정과 박예찬은 마침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의 애틋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그러다가 박민정은 문득 머릿속에 기억 한 장면이 떠올랐는데 장소는 비슷했지만 유남준의 맞은편에는 최현아가 아닌 이지원이 서 있었다.순간 박민정은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유남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예찬도 화가 난 나머지 잡고 있던 박민정의 손을 놓고 재빨리 달려가 두 사람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물었다.“현아 이모, 지훈이가 급한 일이 있다고 이모 찾던데요?”그의 말에 최현아가 재빨리 되물었다.“무슨 급한 일?”“가서 직접 물어보세요.”박예찬의 말에 최현아는 두말없이 유지훈 쪽으로 향해 달려갔다.박민정은 어느새 유남준에게 다가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보통 이런 식으로 바람피웠나 보네요?”유남준은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무덤덤해 보이는 박민정에게 다가가 되물었다.“화 안나?”“그저 유치해 보이는데요?”박민정의 입에서 들리는 유치하다는 말이 단번에 유남준의 가슴에 꽂혀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