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충격에 뒤로 나뒹군 조연아는 벽에 등을 쾅 하고 부딪혔다.게다가 깨진 창문 유리가 팔과 다리에 박혀 어느새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극심한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든 조연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어떻게든 테이블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려던 그때, 또 굉음이 이어졌다.위이잉!그와 동시에 호텔에 경보음이 울리고 스피커를 통해 직원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투숙객 여러분, 지금 속히 비상통로를 따라 6층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귀중품 챙기지 마시고 일단 몸부터 피하세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여러 번 반복되던 직원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뚝 끊겼다.‘이젠 정말 완전히 정전인 건가?’고통을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선 조연아는 애써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보았다.“쾅!”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겨우 연 방문이 세게 닫혀버리는 동시에 쨍그랑 소리와 함께 복도 창문까지 깨져버렸다.돌풍이 복도를 휘몰아치고 온갖 물건들이 나뒹구는 사이로 사람들의 절망적인 비명소리가 언뜻언뜻 들려왔다.한편, 어둠속에서 조연아는 휴대폰 플래시 불빛을 빌어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윽!”그러다 어딘가 부딪힌 조연아가 그대로 넘어지려던 순간,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덥섞 잡았다.“괜찮아요?”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겨우 중심을 잡은 조연아가 고개를 들어보니 선글라스를 쓴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뭐야?’조연아는 순간 자기 눈을 의심했다.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선글라스라니. 미친 사람인 건가 싶을 정도였다.“많이 다친 것 같은데.”말과 동시에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자, 업혀요.”널찍한 등짝을 멍하니 바라보던 조연아의 머릿속에 순간 매화마을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모이니 조심하라는 만두의 말이 스쳐지났다.“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갈 수 있어요.”하지만 말과 달리 벽을 겨우 짚고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그 꼴로 어떻게 계단을 오른다고 그래요. 아, 설마 내가 나쁜 사람일까 봐 그래요?”말
“그런데 선글라스는 왜 쓴 거예요? 앞이 보이긴 해요?”그의 등에 업힌 조연아가 의아함을 표했다.“지금 빨리 대피해야 하는데 제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생기면 사람들이 몰릴 수도 있잖아요.”“선글라스 쓴 게 더 튀는 것 같은데...”이에 조연아가 낮은 목소리로 구시렁댔다.생각지 못한 팩폭에 흠칫하던 하태윤이 괜히 목소리를 다듬었다.“큼, 그럼 좀 벗겨줄래요? 앞이 잘 안 보이긴 하네요.”“네.”선글라스를 벗겨주며 조연아의 손가락이 자연스레 하태윤의 콧등에 닿았다.쿵쾅쿵쾅.그 찰나의 스킨십에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하자 하태윤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연기를 하며 이보다 더 진한 스킨십도 몇 번은 해본 그가 겨우 이 정도 터치에?‘성인 여자를 업고 계단을 오르려니까 힘들었나 보다.’하태윤은 이렇게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6층에 도착하니 타박상을 입은 사람들이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고 직원들이 그 사이를 오가며 비상식량과 생수를 지급하고 있었다.테이프로 창문을 막은 이곳이 모텔의 마지막 안전구역, 어떻게든 끝날 때까진 어떻게든 여기서 버터야 했다.“그런데 대표님께선 여기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여기서 연습생이라도 뽑으시려고요?”여기저기 부딪히고 넘어져 꽤 처참한 모습임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조연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하태윤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아니요.”“그럼 뭔데요?”“비밀이에요.”이에 하태윤이 피식 웃었다.“제가 왜 여기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으세요?”그의 질문에 조연아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뭐 볼일이 있으니 왔겠죠. 연예인 개인적인 사생활엔 관심 없어요.”“재밌네요...”“뭐라고요?”혼잣말이나 다름없는 목소리에 조연아가 되물었다.“아, 가족 만나러 왔다고요.”“아, 네.”“자, 다 됐어요.”“풉.”조연아는 붕대를 어찌나 여러 겹 감았는지 공처럼 되어버린 손을 발견하고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큼, 처, 처음 해보는 거라서 그래요.”멋쩍은 듯 돌아서던 하태윤이 머리를 헝클였다.“고마워요.
“왜요?”하태윤이 고개를 돌렸다.“조심... 해요.”“걱정마요. 나 하태윤이에요.”말을 마친 하태윤이 늘 그렇 듯 환하게 웃어보였다.“선글라스는 대신 보관해 주세요. 다시 돌아오면 받으러 갈게요. 푹 쉬고 있어요.”“네.”이 말을 마지막으로 하태윤은 모텔을 나섰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바람은 점차 잦아들었으나 이미 불어난 물은 거침없이 흐르며 마을의 이곳저곳을 파괴하고 있었다.빗방울로 얼룩진 창문을 통해 밖을 내려다보니 빗물은 어느새 건물 1층 높이를 훌쩍 넘은 상태였다.‘하태윤 씨, 괜찮아야 할 텐데...’극도의 피곤함 때문인지 조연아의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또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역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저기! 저기 좀 봐요. 아이가, 아이가 물에 떠내려가고 있어요.”“어머! 어떡해...”“난 수영도 할 줄 모르는데...”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7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거센 물살을 따라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었다.‘저러다간 죽을지도 몰라...’멀쩡한 생명이 눈앞에서 사그라드는 걸 지켜볼 수만 없었던 조연아가 벌떡 일어섰다.“저기요, 어디 가시는 겁니까?”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향해 직원이 물었다.“아이 구하러요.”그녀의 목소리에 다른 사람들 역시 하나둘씩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나도 가야겠어요. 아이가 죽는 걸 지켜볼 순 없잖아요.”“저도 갈래요.”“다들 같이 가죠. 최선을 다해 보는 거예요.”그렇게 6층에 모였던 투숙객에 직원들까지 조연아의 뒤를 따랐다.여전히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이던 조연아는 일단 팔에 두른 붕대부터 풀었다.3층 창가로 다가가 보니 아이는 난간 하나를 잡고 겨우 버티고 있는 모습이었다.하지만 이미 바람에 볼품없어진 난간은 언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시간이 없어...’조연아가 깨진 창문을 뛰어내렸다.나름 수영에는 자신이 있는 그녀였지만 다친 팔과 다리로 거센 물살을 헤치는 건 생각보다
1번, 2번, 3번...몇 번이나 손을 뻗은 뒤에야 조연아는 밧줄을 잡을 수 있었다.“자, 언니 손 따라서 천천히 다가와. 언니가 몸에 밧줄을 묶어줄게.”“언니, 어, 어떡해요. 저... 팔에 힘이 빠질 것 같아요...”“정신차려! 언니 믿어. 여기서 포기하면 안돼!”조연아 역시 힘들긴 마찬가지였지만 애써 미소 지으며 여자아이를 응원해 주었다.그 모습에 용기를 얻은 아이는 조연아의 팔을 잡고 조금씩 움직였다.“자, 다 묶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밧줄 놓지 마. 알겠지? 무사히 살아서 언니랑 다시 만나는 거야. 응?”“네.”아이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조연아가 다친 팔을 힘겹게 들어 오케이 제스처를 해보이고 모두가 힘을 합쳐 밧줄을 당긴 덕에 여자아이는 무사히 모텔 2층에 도착했다.“고객님, 조금 더 버텨주세요!”사람들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들려왔다.조연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피가 새어나오는 팔과 저려오는 다리는 이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저번엔 불이더니... 이번에는 물이야? 하... 너도 참 기구한 인생이다.’조연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애석하게도 팔의 힘은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뚜둑...여기에 설상가상으로 그녀가 잡고 있던 나뭇가지도 어느새 끊어지려고 하고 있었다.‘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다른 나뭇가지로 옮겨가고 싶었지만 손은 그대로 미끄러지고 말았다.거센 물살이 그녀의 볼을 아프게 때리고... 정말 이대로 죽는 건가 싶어 눈을 질끈 감았던 그때.탄탄한 손이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누구지? 누구지...?’“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을게.”익숙한 목소리에 조연아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역시나, 다시 눈을 뜬 그녀의 시야에 민지훈의 얼굴이 들어왔다.‘뭐지? 꿈인가? 이 사람이 왜 내 곁에 있는 거지?’“조심해!”저 멀리... 거센 물살에 흘러내려오는 광고판을 발견한 민지훈이 다시 그녀를 꼭 끌어아았다.퍽!“윽..
이 상황에서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조연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기서 죽으면 복수는 어떻게 하려고.”‘말을 해도 꼭...’불쾌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지만 지금은 기싸움이나 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조연아는 말없이 민지훈의 목을 끌어안았다.한편, 등이 찢어질 듯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민지훈은 이를 악물었다.‘또... 널 포기할 순 없어...’그렇게 죽을 힘을 다해 걸음을 옮긴 민지훈은 드디어 구조선에 이를 수 있었다.구조선에 오른 민지훈은 바로 조연아의 팔부터 살피기 시작했다.어찌나 물속에 오래 있었는지 하얗게 불어버린 팔을 바라보던 민지훈의 눈동자에는안쓰러움으로 가득했다.“구급약 상자 좀 가져다 주세요.”약 상자를 받은 민지훈은 익숙한 손길로 소독작업부터 시작했다.“조금만 참아.”다친 등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지만 민지훈은 어떻게든 정신줄을 붙잡으려 애썼다.떨리는 손으로 붕대까지 감은 민지훈은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뭐야? 얼굴은 왜 저렇게 창백해선... 누가 보면 자기가 다친 줄 알겠네.’조연아가 이런 생각을 하던 무렵, 구조대원의 깜짝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피...! 대표님, 피가...!”“뭐, 대표님 다치셨어?”다른 쪽에 있는 구조대원이 부랴부랴 달려오고 어느새 배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를 발견한 그들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아니, 이렇게 많이 다치셨으면 얘기를 하시지! 얼른 병원으로 가시죠!”“괜찮습니다.”중상을 입은 사람이라곤 볼 수 없을 정도로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한 민지훈의 시선이 조연아에게로 향했다.무사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그가 말을 이어갔다.“앞으론... 이렇게 위험한 짓 하지 마.”‘이번엔 내가 마침 와줘서 다행이었지만 다음 번엔...’“내가 무슨 짓을 하든 이젠 당신이랑 상관 없잖아.”나름 생명의 은인인데 조연아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고 민지훈의 입꼬리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아, 맞다. 이제 조연아...
“민지훈, 눈 좀 떠 봐!”“민지훈, 네가 죽으면 내 복수는 어떡하라고.”“정신 좀 차려보라고!”병원으로 옮기는 동안 조연아는 민지훈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다시 돌아온 뒤로 어떻게든 그와 선을 그으려 했었고 지금까지 받았던 상처를 그대로 갚아주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죽길 바란 건 아니었다.‘이렇게 죽어버리는 건... 너무 큰 벌이잖아...’목이 쉬어버릴 정도로 이름을 외치고 또 외쳐보아도 굳게 감긴 민지훈의 눈은 다시 떠지지 않았다.어느새 붕대를 흥건히 적신 핏방울이 조연아의 손가락을 타고 바닥으로 끝없이 떨어졌다....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20분 뒤.“응급환자입니다!”구조대원들의 목소리에 다급하게 달려나온 사람들 중 한 명이 들것이 누운 민지훈을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의사 가운을 입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현장을 지원나온 주민들인 듯 싶었다.“민지훈 대표님?”“출혈이 심합니다. 어서 수술실로 옮겨요!”남자의 지휘에 따라 민지훈이 수술실로 옮겨지고 그제야 조연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잠시 후 다시 돌아온 남자가 조심스레 물었다.“조연아... 대표님 맞으시죠?”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조연아의 눈이 커다래졌다.온몸이 흠뻑 젖은 남자는 그 모습이 꽤 초췌하긴 했지만 분명히 그녀가 애타게 찾던 하지석 팀장이었다.“하지석 팀장님?”“팀장은 무슨. 이젠 그저 선생일 뿐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아저씨라고 부르세요.”“아...”그리고 역시 비 맞은 생쥐꼴인 조연아를 발견한 하지석이 다급하게 말했다.“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하고 일단 임시 대피구역으로 가시죠. 거기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시고요. 그렇게 계속 있으면 감기 걸립니다.”“고맙습니다, 팀장... 아니, 아저씨.”감사 인사를 전한 그녀는 하지석의 뒤를 따라 병원 옆의 체육관으로 향했다.“자, 새 옷이니까 입어요.”하지석이 건넨 트레이닝복을 받아든 조연아가 돌아서려는 그를 붙잡았다.“아저씨.”“네. 또 뭐
사람들의 귓속말을 들은 조연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하긴. 나랑 민지훈이 동시에 나타났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이미 SNS엔 사진도 잔뜩 올랐겠다...’어떻게든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병원 쪽으로 향하려던 그때, 그녀의 불안한 예감이 괜한 기우가 아니었음을 말해 주듯 수많은 기자들이 그녀를 향해 몰려들었다.“조연아 대표님, 매화마을에는 무슨 이유로 오신 거죠? 공무 때문에 오신 건가요?”“민하그룹 민지훈 대표님도 현지 병원에 입원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인가요?”“민지훈 대표님과 함께 여기로 오신 건가요?”그녀와 민지훈의 관계에 대해 묻는 묘한 질문들...지긋지긋했지만 우연이든 아니든 두 사람이 이 작은 마을에 동시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기자들의 귀에 들어간 이상 그녀가 제대로 된 해명을 하기 전까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수많은 카메라를 앞에 선 조연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민지훈 대표님의 부상 여부는 병원 측에 물으시는 게 맞겠죠.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닌 저한테 묻는 게 아니라요.”민지훈과의 관계에 선을 그은 조연아가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여러분들이 정말 참된 언론인이라면 지금 자연재해에 큰 피해를 입은 매화마을의 상황에 대해 보도하는 것이 먼저 아닙니까?”조연아의 날카로운 질문에 기자들이 당황하기 시작했고 옆에서 구경하던 주민들 역시 질타를 퍼부었다.“그러니까. 연예인도 아니고 일반인한테 너무 한 거 아니야?”“국민들 알 권리라는 명의로 개인 사생활 캐니까 재밌냐!”“지금 엉망이 된 마을 꼴은 안 보여?”...단호한 조연아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녀의 입에서 뭔가 알아내는 건 어려울 듯한데다 주위의 대중들의 불만까지 쏟아지니 기자들도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기자들이 흩어지니 그제야 조연아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팔과 다리의 상처들은 여전히 욱신거리고 담아두었던 피곤함이 다시 몰려드는 듯했다.이때 기자들을 발견하고 달려왔던 하지석이 조연아에게 물었다.“괜찮으시죠? 소문이
“저를요?”이런 이유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하지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아저씨, 제 삼촌과 현 재무팀 유 팀장이 회사 공금을 횡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저씨가 그룹을 떠나계셨던 동안 회사는 수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제가 횡령자금 중 일부를 다시 되찾긴 했지만... 재무팀 팀장 자리를 이렇게 비워둘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똑똑한 하지석은 그녀의 의도를 바로 눈치채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저기... 대표님. 전 다신 회사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이 마을에서 수학 선생으로 사는 삶이 훨씬 더 행복하니까요.”“압니다. 이곳에서 아저씨께서 더 행복하게 사실 거라는 거, 압니다. 그래도 염치없이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스타엔터는 아저씨가 필요합니다.”그녀의 진심어린 말에 하지석은 고민에 잠긴 듯 침묵을 유지했다.‘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을까?’입술을 꽉 깨물던 조연아가 먼저 침묵을 깨트렸다.“만약 엄마가... 자살로 돌아가신 게 아니라면... 누군가의 음모로 돌아가신 거라면... 절 도와줄 수 있으시겠어요?”말을 마친 조연아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이에 하지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급격하게 흔들리는 그의 눈에 놀라움과 분노의 감정이 빠르게 스쳐지났다.“뭐, 뭐라고 했어요? 지금? 설마... 뭘 알아내기라도 한 겁니까?”“엄마의 정기검진 보고서를 확인했어요. 엄마는 우울증을 비롯한 그 어떤 정신적 질환도 없으셨어요. 그런데... 엄마의 사망 이유는 심각한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라고 했죠. 아저씨도 확인하셨게지만요.”“내 생각이... 내 추측이 맞았어...”하지석이 중얼거렸다.“아저씨도... 뭔가 의심하고 계셨던 거예요?”“네.”하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랫동안 회장님 곁을 지켰지만 우울한 기색은 전혀 없었습니다. 스타엔터를 더 큰 회사로 키우길 바라셨고 향후 몇 년 동안의 계획도 세워두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던 그날, 저와 점심 식사도 같이 하셨던걸요. 그리고 저녁엔 여동생과 함께 약속도 잡아뒀
오민이 어떻게든 버티려는 추연을 억지로 병실에서 내보내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조연아를 꼭 안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연기 좋았어.”단호한 말투에 조연아의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큭.”피식 웃던 민지훈이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상관없어. 연기가 맞든 아니든 난 협조할 테니까.”“...”말없이 민지훈의 품에 안긴 조연아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연기는 완벽했어. 그런데 왜... 들킨 걸까?’“나 피곤해.”대충 핑계를 대고 민지훈의 품에서 벗어난 조연아는 그를 등진 채 돌아누웠다.“재워줄까?”‘예전의 조연아라면 분명 그래 달라고 하겠지.’한편, 이미 들킨 거나 마찬가지지만 모르쇠를 대기로 했으니 조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어떻게 재워줄까?”이때 조연아의 곁으로 훅 다가온 민지훈의 숨결이 그대로 그녀의 귀를 적셨다.‘미친 변태자식.’여전히 눈을 굳게 감은 조연아의 볼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조연아의 볼에 뽀뽀를 하고 이불까지 잘 덮어준 민지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눈을 감고 있고 돌아누워 등까지 진 상태였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조연아는 방금 전 추연의 말과 반응들을 다시 떠올렸다.‘추신수... 그 자식이 날 물속으로 잡아당길 때 분명히 봤어. 목에 걸린 옥 목걸이를.’그 옥 목걸이는 조연아의 어머니와 추연 두 자매의 어머니, 즉 조연아의 외할머니가 두 딸을 위해 특별 제작한 유일무이한 팬던트였다.‘하지만 엄마가 하고 있던 팬던트는 6년 전에 이미 깨졌어. 유품 정리할 때 분명 확인했다고. 그럼 추신수 목에 걸린 건 이모 거란 소린데... 이모 팬던트가 왜 추신수한테 있는 거지?’한번 불씨를 튼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추신수
“너무 무리하지 마.”민지훈이 조연아를 끌어안았다.아무런 저항 없이 얌전히 안긴 모습, 모든 게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이때 밖에서 요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뭐? 연아가 기억상실증?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당장 들어가서 확인해야지.”“이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나 연아 이모야. 무슨 자격으로 날 막아!”그렇게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추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리고 다급하게 그 뒤를 따르던 오민도 눈을 질끈 감았다.‘세상에 두분 지금... 서로 안은 거 맞지?’“이모.”이때 추연을 발견한 조연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이모도 왜 병원복 차림이에요? 이모도 어디 아파요?”“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충격을 받은 추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네.”그리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미는 추연이었다.“민 대표, 두 사람 이렇게 스킨십하는 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봤어 봐. 우리 연아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어? 두 사람 이미 이혼한 사이잖아.”“이혼이요?”조연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민지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우리 언제 이혼한 거야?”“이혼”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상한 민지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이모님, 이만 나가주시죠. 이모님도 다치셨는데 푹 쉬셔야죠.”오민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네, 의사선생님께서 이모님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얼른 가시죠.”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추연이 아니었다.“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기억상실증에... 걱정하지 마. 잃어버린 기억은 천천히 되찾으면 되니까. 아니, 영원히 찾지 못해도 상관없어. 그 동안 있었던 일 이모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줄 테니까. 네 옆에 서 있는 이 남자 때문에 네가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왜 이혼하게 된 건지 전부.”하지만 조연아의 맑은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이모 말
“환자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검사를 마친 의사가 물었다.말없이 고개를 저은 조연아는 또다시 공허한 눈빛으로 민지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대표님, 환자분 뒤통수에 생긴 상처는 아마 며칠 동안 통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이고 뇌출혈 증상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네.”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민지훈의 시선은 여전히 조연아를 향해 꽂혀있었다.“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민지훈을 향해 꾸벅 인사를 남긴 의사가 병실을 나서려던 그때, 조연아의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의 정적을 깨트렸다.“저... 어떻게 다친 거죠?”그 질문을 들은 순간, 의사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환자분, 어떻게 다치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조연아는 민지훈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여보, 나 어떻게 다친 거야?”“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여보?’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모습에 민지훈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아, 남편이라는 호칭 불편해? 미안. 그러니까 그렇게 화난 표정 짓지 말아줘.”3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조심스럽고 겁 많은 새 같은 모습. ‘뭐지?’혼란스러웠지만 민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아니. 남편 맞아. 화난 거 아니야.”그리고 다시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민지훈이 꾸짖 듯 물었다.“별문제 없다면서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당황스러운 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그러게 말입니다. 뒤통수 가격으로 인해 출혈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일 뿐입니다. 기억상실증까지 올 수준은 아닌데요... 물에 빠진 뒤 잠깐의 익수가 있었지만 구조가 빨랐기에 뇌손상도 거의 없었고요. 그런데도 기억을 잃은 거라면 트라우마로 인한 단발적인 기억상실증이 큽니다. 이 문제는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럼 가장 실력 좋은 의사로 컨택해 주세요.”“네.”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빠르게 병실을 나서고 조용해진 병실, 조연아의 옆에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걱정스레 민지훈을 바라보던 오민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욕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얘기는 해야 해.’“저기... 대표님. 지금 총알을 빼내지 않으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연아 씨가 깨어나고 나서 대표님 이런 모습 보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요. 아니,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행여나 앞으로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면 큰 결함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다른 라이벌들 이길 수 있으시겠어요?”민지훈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조연아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오민은 자극 요법을 사용했다.“대표님. 제발 연아 씨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세요!”그제서야 살짝 흔들리던 민지훈이 결국 일어섰다.“그래요. 치료하죠.”“네, 네.”잠시 후, 역시 수술실로 옮겨진 민지훈은 바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마취가 풀리기도 전에 바로 조연아가 있는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리고 조연아가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녀와 함께 VIP 병동으로 입원까지 할 수 있었다.한편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오민은 걱정되는 마음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를뿐이었다.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민지훈이 사랑 때문에 이 정도로 충동적으로 움직이다니. 이게 사랑의 힘인가 싶었다.‘연아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연아 씨가 깨어나야 저희 대표님 좀 쉬실 거 같으니까...’...조용한 병실, 차가운 달빛이 커튼을 넘어 침대를 비춰주었다.민지훈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조연아의 손을 꼭 잡았다.‘연아야...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힘든 건 다 내가 감당할 테니까 넌 그냥 행복만 해줘.’...한편 조연아는 깊은 꿈속을 걷고 있었다.오로라를 기다리던 그날 밤,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귓가에 다정한 사랑의 말을 건네는 꿈이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그녀를 불바다 속으러 밀어버리고
가슴을 움켜쥐고 바다에 추락하는 걸 바라보는 조연아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리고 그런 조연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겁 먹지 마.”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조연아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핏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민지훈의 요트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이제 정말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바다에 빠졌던 추신수가 불쑥 수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요트 난간을 부여잡은 추신수가 악에 받친 얼굴로 조연아의 다리를 잡아끌었다.“으악!!”비명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사방에 튕기고 그와 동시에 민지훈은 망설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대표님!”이에 오민 역시 짧은 고함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두려울 정도로 조용한 바다...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소음이 전부 사라지고 턱턱 막히는 숨이 이곳이 물속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아... 이렇게 죽는 건가...’의식이 아득하게 사라지고 천근만근 무거운 몸에선 더 이상 바닷물의 차가움마저 느껴지지 않았다.바로 그때, 탄탄한 팔이 그녀를 꽉 껴안고 빠르게 수면위로 올라갔다.하지만 민지훈과 조연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탕탕탕 소리가 들려왔다.갑판 위에 남은 남자들이 해수면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조연아를 꽉 끌어안은 민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총 따위 무섭지 않아.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연아만 무사하다면...’한편, 거센 기침과 함께 눈을 뜬 조연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닷물에 엉망으로 젖었음에도 여전히 멋진 민지훈의 얼굴이었다.쿵.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위급한 이 상황이 잊혀질만큼 마음속 한 구석에 묘하게 따뜻해졌다.“탕!”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이 민지훈의 팔을 관통하고 피가 뿜겨져나왔다.“민지...”바다 내음인지 피냄새인지 헷갈리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조연아의 의식은 다시 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이 갑판
추신수의 말대로 저 멀리 수평선 뒤로 다가오는 요트들을 발견한 조연아는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또... 민지훈이라고?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는 건가?’이때, 그녀의 머리채를 홱 잡은 추신수가 총구로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다.“허튼 짓 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아무리 구조 요트로 도망쳐 봤자 쾌속 요트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추신수는 조연아를 미끼로 쓰기로 결정했다.“민지훈. 이 여자 머리에 구멍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멈춰.”추신수가 무전기를 사용해 소리쳤다.한편, 인질로 잡힌 조연아를 발견한 민지훈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곧 모든 요트들이 멈춰서고... 방금 전까지 당황한 표정이던 추신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하, 전 와이프한테 남은 미련이 그렇게 많아? 그 유명한 민지훈 대표가 이렇게 순정남일 줄 몰랐어. 우리 동생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길래 잊지를 못하실까? 뭐 침대에서 끝내주나 보지? 하하하.”추신수의 음담패설에 오민이 확성기를 빼앗아들고 소리쳤다.“추신수 씨, 이쯤에서 그만 하십시오. 당신이 저희 대표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괜한 발버둥치지 말고 조연아 대표 풀어주세요.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하지만 오민의 경고가 굉장한 농담이라도 되는 듯 추신수는 웃음을 터트렸다.“그만 해? 의미없는 발버둥? 하하하, 정말 의미없는 발버둥일까? 조연아가 내 손에 있는 한 민지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너희 잘난 대표님 얼굴 좀 봐. 날 찢어죽이고 싶은데 어쩌할 방도가 없는 저 모습을.”“원하는 게 뭐야?”민지훈이 물었다.“아, 역시 통쾌하셔.”추신수가 피식 웃었다.“요트 한 대만 가까이 붙여. 조종수 한 명만 남겨두고.”잠시 후, 그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요트를 바라보며 추신수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그만!”“너, 뛰어내려.”추신수가 배에 타고 있는 오민을 향해 말했다.조연아가 인질로 잡힌 상황인데다 어차피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추연의 모습에 조연아가 소리쳤다.“이모, 이모. 정신 좀 차려봐요. 이모.”겨우 눈을 뜬 추연아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털썩.남자들의 손길대로 움직이다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진 추연을 바라보는 조연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녀 역시 꿈쩍도 할 수 없는 터라 그저 애타게 소리칠 뿐이었다.“이모! 이모!”그녀의 목소리가 추연에게 닿아 정신을 지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이모랑 사이가 이렇게 좋았어?”한편, 흥미롭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추신수가 피식 웃었다.“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연이 이모는 너한테도 이모잖아.”“동생아,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내가 가족, 핏줄 그런 데 얽매이는 사람처럼 보여? 그럴 거면 애초에 납치도 하지 않았어. 너희 두 사람 오늘 절대 살아서 여기서 못 벗어날 거니까 쓸데없는 기대 따위 하지 마.”추신수가 음침한 미소에 순간 소름이 돋는 조연아였다.“너... 진짜 미쳤구나? 왜? 나랑 이모 다 죽이고 스타엔터 네가 차지하려고?”“그래. 네 말이 맞아.”그 와중에 여유롭게 총구를 닦던 추신수가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널 죽인다고 해서 내가 스타엔터를 차지할 거란 보장은 없지. 하지만 확실한 건... 네가 살아있는 한 그 회사가 내 몫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사람들도 내가 널 죽였다곤 상상도 못할걸. 여기서 물고기밥이 되어서 시체도 못 찾을 텐데. 안 그래?”“너... 신수야, 너 어떻게 그런 짓을.”바닥에 쓰러져있던 추연이 소리쳤다.“아무리 미워도 우린 피를 나눈 가족이야. 어떻게 가족한테 이런 짓을 해... 넌 죄책감 같은 것도 없어?”“죄책감?”한발 앞으로 다가간 추연이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죄책감 그게 밥 먹여줘? 돈만 가질 수 있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말을 마친 추신수는 추연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이모!”“왜 그런 눈으로 봐?”추신수가 증오로 번뜩이는 눈빛의 조연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배 위야. 동해일 가능성이 크고.”망망대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순 없었지만 임천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동해라 그렇게 추측한 것이었다.“신수가... 신수가 벌인 짓이야. 네 얼굴 직접 보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추신수 그 자식을 만났어. 그리곤 바로 쓰러졌고.”피 묻은 추연의 옷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 자세한 설명은 안전해지면 그때 해주세요. 지금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추신수 그 미친 자식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구조정... 이 정도 규모의 배라면 구조 보트 같은 건 있을 거야. 그걸 타고 여기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추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연아야. 난 신경쓰지 말고 너 먼저 가... 이모는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괜히 따라나서봤자 너한테 짐만 될 거야.”“이모...”“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가. 이러다간 우리 둘 다 꼼짝 못하고 여기서 죽는 거야.”어느새 추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아니요.”하지만 조연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저 이모 버리고 못 가요.”“어차피 신수 타깃은 내가 아니라 너야. 당장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진 못할 텐까 너라도 일단... 일단 도망쳐. 그리고 사람들이랑 다시 와서... 날 구해줘.”출혈이 너무 심해서인지 어느새 힘이 빠진 추연은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져만 갔다.“그러니까 어서 가.”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추연은 조연아의 손을 뿌리쳤다.“얼른 가. 얼른!”“그럼... 저 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해요. 알겠죠?”조연아가 입술을 깨어물었다.추연 말대로 지금은 쓸데없는 고집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어떻게든 누구라도 도망쳐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 그게 두 사람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마음을 독하게 먹고 갑판으로 나선 조연아는 한쪽에서 구조 요트를 발견했다.‘저기 있다.’그런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뒤통수를 겨누었다.“하, 내가 정말
꽤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조연아는 부스스 눈을 떴다.머리는 지끈거리고 사지에 힘은 풀린 와중에 피 냄새까지 풍겨왔다.칠흑같은 어둠속 나무판 사이 틈으로 흘러드는 빛 한줄기 덕에 조연아는 본인이 어디 있는지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여긴 배...잖아?’조연아는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이모가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고 나서 나도 공격받았어. 아, 이모... 이모는 어디 계시지?’조연아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잡동사니로 가득 들어찬 방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주위를 둘러보던 조연아는 구석에서 날카로운 철편 하나를 발견했다.어두운 이 공간에서 밧줄을 자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도구.힘겹게 꿈틀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던 그때, 바깥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헉, 뭐지?’당황한 조연아는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 아지 깨어나지 않은 척 눈을 질끈 감았다.역시나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조연아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 여자 상당히 발칙한 X이라니까 조심해. 그리고 이 여자 이모는 옆방에 있으니까 종종 들여다보고. 어촌에서 잡아온 여자들이랑 노닥거리지 말고.”“참나. 형님, 저도 사내입니다. 저딴 여자 두 명 상대 못할까 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그럼에도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당부를 이어갔다.“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라고. 보통 여자가 아니야.”“대표면 뭐요. 결국 힘없고 약한 여자 아닙니까. 게다가... 얼굴에 몸매도 반반한 것이... 한 번 건드려보고 싶은데요?”“어허. 너만 그러고 싶은 줄 알아? 나도 사실은... 엘리트 여자랑 해보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거든.”역겨운 주제에 배멀미까지 더해져 순간 밀려오는 구역질을 조연아는 억지로 참아냈다.잠시 후, 남자들이 방을 나서자 다시 번쩍 눈을 뜬 조연아는 꿈틀거리며 철조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으윽...”겨우 철조각에 손이 닿아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