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말에 조연아는 당황한 얼굴로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고맙습니다.”눈치껏 대신 인사를 한 하지석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풀리고 의사가 떠난 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먼저 수술비부터 계산하고 오겠습니다.”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조연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질문했다.“아저씨, 언제쯤이면 마을을 떠날 수 있을까요?”“공항은 피해가 별로 크진 않지만 그래도 1주일 정도는 걸릴 겁니다.”“민지훈 대표도 얼마 전에 수술을 마쳤으니 약 1주일 정도는 회복기가 필요할 거예요. 공항이 정상으로 회복되면 바로 민지훈 대표와 함께 임천시로 돌아가죠.”‘그럼 정말 끝이야... 이젠 더 이상 문지훈과 엮이지 않는 거야.’“알겠습니다.”고개를 끄덕인 조연아는 천천히 민지훈이 있는 508호 병실로 향했다.조용한 병원 복도에서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병실 문을 여니 여전히 창백한 안색의 민지훈이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급류속에서 떨어지는 광고판을 막아내고 그녀를 품에 꼭 안던 그 모습이 다시 펼쳐졌다.“이게 뭐야... 속죄라도 하려는 거야?”씁쓸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리던 조연아가 돌아섰다.하지만, 조금은 차가운 손이 그녀를 덥석 붙잡았다.“속죄도 사랑 중 하나인가? 그렇다면 인정.”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조연아는 멈칫하다 어떻게든 그 손길에서 벗어나려 버둥댔다.“자는 척하고 있었던 거야?”“아니. 그냥 방금 깼어.”“그럼 푹 쉬어.”조연아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민지훈이 다시 물었다.“내가 그렇게 싫어?”피곤함이 담긴 목소리가 조연아의 가슴을 울렸다.“아니. 싫은 것도 감정이야. 난 더 이상 당신한테 아무 감정도 없어.”...병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너무나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천하의 민지훈이 느낀 감정은 우습게도 두려움이었다.그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조연아를 잃었다고 생각했던 그날과 마찬가지로.“나한테 한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될까?”‘다른 건 다 필요 없어
과거에 그녀도 이런 아픔을 겪었을까?이런 생각을 하니 민지훈은 저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쓰리게 아팠다.아무리 그녀가 지금은 그를 거부해도 다시 그녀의 마음을 돌리고 싶은 그의 결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칼을 들고 그의 심장을 겨눈다고 해도, 총으로 머리를 겨눈다고 해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해명하듯 말했다.“내가 한 번도 허락한 적 없는데 그 여자가 어떻게 내 약혼녀야?”“그건 민지훈 씨 개인 사정이고, 내 알 바는 아니야. 아직도 우리 관계에 대해 의문이 남았다면 이혼서류 꺼내서 한번 자세히 훑어봐. 현실을 직시하란 얘기야. 우리 이혼한지 벌써 일년이야.”쿨럭!민지훈이 갑자기 거세게 기침했다.조연아는 그제야 스트레스는 그의 병증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던 의사의 말을 떠올렸다.‘내가 한 말이 그렇게 충격이었나?’이어지는 시간 동안 그의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괜찮아?”그녀는 다급히 그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날 걱정해 주는 거야?”그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쨌든 내 목숨 구해준 사람이니까.”조연아는 자신이 그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오늘 그에게 큰 도움을 받았고 빚지기 싫은 마음이 작용한 거라고 단언했다.“고작 그게 다야?”그는 피식 웃더니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그녀가 몸서리를 치며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놓지 않았다.“말은 그렇게 해도 속은 엄청 걱정하고 있지?”겉으로는 심드렁한 척 하고 있지만 맑고 투명한 그녀의 눈빛은 오로지 그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물론 전처럼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은 아니었지만 미세한 감정의 동요를 민지훈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파고들 수 있는 조그마한 틈새라도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조연아가 화들짝 놀라며 불쾌한 어투로 말했다.“민지훈, 당신 미쳤어? 이거 놔! 사람 말하면 좀 들으라고!”다친 사람이 맞는 건지 힘은 왜 이렇게 센 건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는 손에 더 힘을
민지훈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조연아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이거 순 양아치 아니야?”“맞아.”그는 대놓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만 돌아온다면 양아치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민지훈, 의료비는 전액 내가 부담할게. 하지만 그 이상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씩씩거리며 그의 가슴을 힘껏 밀치고 손아귀를 벗어났다.타박상 정도지만 경미한 부상은 절대 아니었다. 봉합수술까지 한 자리를 그녀가 힘 주어 밀치자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인상을 확 찌푸렸다.그 모습을 보고 놀란 조민아는 저도 모르게 뒤로 뒷걸음질쳤다.“아픈 척 연기 그만해. 이번에는 절대 안 믿어!”조금 전에 기침한다고 걱정돼서 다가갔다가 그의 손아귀에 잡혔는데 똑 같은 수에 또 당할 수는 없었다.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매몰차게 뒤돌아섰다.민지훈은 뒤쫓아가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자 멍하니 떠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창백한 얼굴에 저절로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연아는 이제…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나 보구나.”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 조연아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간호사 데스크를 지날 때,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전에 밀쳤던 게 괜히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508호 환자분, 상처 좀 봐주시겠어요?”간호사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508호에 VIP가 입원해 있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기에 간호사는 신속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걱정 마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말을 마친 간호사가 민지훈의 병실로 달려갔다.간호사가 병실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조연아는 시름 놓고 엘리베이터에 탔다.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지석이 그녀를 보자 서류봉투를 내밀며 말했다.“민지훈 진단서야. 비용은 내가 다 결제했고 의료진에 각별히 신경 쓰라고 언질을 주었으니 이제 걱정 안 해도 돼.”“감사해요, 아저씨. 임천에 돌아가서 입금해 드릴게요.”그녀의 모든 소지품은 호
안에서 우당탕탕하는 소리와 함께 하석진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태윤, 내가 샤워 끝나면 옷을 입고 있으라고 했지? 몇 번을 말해야 고칠 거야?”“아… 아빠! 아파, 아프다고! 그만 때려!”하태윤?조연아는 벌거벗은 남자를 보고 당황해서 급히 시선을 돌리느라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하태윤 씨가 아저씨 아들이었어?’조연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안에서 우당탕 소리와 함께 하태윤의 비명 소리가 또 들려왔다.연예계에 샛별처럼 나타난 인기 배우가 집에서 아버지에게 등짝을 맞는 모습이라니!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광경이었다.“아빠, 이것도 가정폭력이야! 아빠가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올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아빠 언제 애인 생겼어?”하태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애인? 이놈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너 오늘 제대로 걸렸어!”오히려 당황한 조연아가 다급히 문을 두드리며 하석진을 말렸다.“아저씨, 그만하면 됐어요. 그러다가 얼굴이라도 다치면 큰일이에요.”“괜찮아. 이 녀석은 원래 얼굴이 두꺼워서 티도 안 나!”그 말을 들은 조연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곧이어 집안이 잠잠해지더니 문이 열렸다.어느새 옷을 껴입은 하태윤이 잔뜩 기죽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조연아 씨?”그녀를 알아본 하태윤이 놀란 얼굴을 하고 그녀에게 물었다.“호텔에서 구조팀 기다리는 거 아니었어요? 왜 여기 있어요?”하지석이 미심쩍은 얼굴로 아들을 노려보며 물었다.“둘이 아는 사이야?”“호텔에 있을 때 태윤 씨한테 도움을 받았어요.”하석진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랬구나.”말을 마친 그는 소파에 있는 아들을 째려보며 말했다.“오늘은 이만 넘어가지만 앞으로 조심해!”“아빠, 나 이래봬도 인기 배우야. 팬들은 내 얼굴만 보면 열광하는데 앞으로 얼굴을 치는 건 좀 자제해 줘.”말을 마친 하태윤은 다급히 거울을 찾아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괜찮아. 배우 못해도 넌 워낙 얼굴이 두꺼워서 어디 가
그러자 하태윤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앞에 수저를 놓아주었다.“자, 드세요.”식탁에 마주앉은 하지석이 말했다.“이따가 난 병원에 가볼 거야. 그쪽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거든. 태윤이 넌 돌아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집에서 푹 쉬어. 연아 혼자 집에 있는 건 너무 걱정되니까 네가 잘 챙겨주고.”그 말을 들은 하태윤이 불만을 토로했다.“그건 집에서 쉬라는 게 아니라 집에서 보디가드를 하라는 뜻 아니야? 아빠는 왜 나만 갖고 그래?”“사내 녀석이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 팬들도 너 이렇게 이기적인 거 아나 몰라.”하석진은 한심하다는 듯이 아들을 바라보며 핀잔을 주었다.순식간에 할 말이 없어진 하태윤은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알았어. 까짓 거 보디가드, 하지 뭐.”그러는 사이, 하지석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한 하지석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네, 원장님.”수화기 너머로 병원 원장의 초조한 목소리가 전해졌다.“하 선생, 민지훈 씨 상처가 또 벌어졌는데 치료에 협조를 해주지 않아서 정말 미치겠어!”하지석은 조심스럽게 조연아의 눈치를 살폈다.“하 선생, 듣고 있어? 하 선생?”그가 답이 없자 원장이 답답하다는 듯이 재촉했다.민지훈이 어떤 인물인가.이곳에 왔다는 이유 만으로 온갖 화젯거리를 생성해내고 있는데 그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병원은 그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수 없었다.“네, 듣고 있어요. 원장님.”하지석이 난감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조연아 씨한테 연락 좀 해줄 수 있어? 지금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조연아 씨뿐이야.”그 말을 끝으로 당황한 원장의 목소리가 전해졌다.“아이고 민 대표님… 병실에서 쉬지 않고 왜 나오셨어요?”“핸드폰 이리 주세요.”민지훈의 허스키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환자복을 입고도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원장은 순순히 핸드폰을 그에게 건넸다.수화기 너머로 민지훈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전해졌다.“조연아, 난 당신 말만 들을 거야.”단호하고 확신
“그 자식이 또 갑질하면 어쩌려고요? 상류층 사람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막무가내인지 알아요? 모두가 무서워하는 사람이잖아요. 걱정 마세요. 아빠한테 부탁까지 받았으니까 연아 씨 안전은 내가 책임질게요.”하태윤이 장난기가 싹 가신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마음만 고맙게 받을게요. 하지만 저 괜찮아요.”그녀는 하태윤의 앞길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한창 잘나가는 사람인데 민지훈과 안 좋게 엮여서 좋을 게 없었다.하태윤은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실소를 터뜨렸다.“저 여자도 한 고집하네.”말은 그렇게 해도 걱정되었기에 그는 몰래 쫓아가기로 했다.조연아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입원 병동 5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휠체어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민지훈이 보였다.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을 뚝뚝 흘리는 모습,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옆구리가 피로 뻘겋게 물들어 있었다.“민지훈, 당신은 정말 미친 사람이야!”조연아는 냉철하고 자기애가 강한 민지훈이 자기 목숨을 두고 이런 미친 짓을 벌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그녀의 욕설에도 그는 희미한 미소로 화답했다.그는 진작에 미쳐 있었다.그녀를 잃은 순간부터 그의 세상은 온통 흑백으로 뒤덮였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무사히 살아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비로소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기분이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전처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 주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를 증오했으며 다가갈수록 그를 밀어내기만 했다.그래서 그는 미친놈이 되기로 했다.수천 번 거절을 당한다고 해도 그녀와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었다.민지훈은 상처의 아픔을 꾹 참고 휠체어를 끌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그래도 와줬네.”준수한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조연아는 초췌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순간 말문이 막혔다. 과거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약한 모습이었다.조연아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
“당신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돼. 자꾸 움직이면 상처만 더 벌어져.”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조연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간호사가 이때다 싶어 다가와서 휠체어를 밀고 병실로 향했다.병실에 도착한 뒤, 의료진은 다급히 와서 그의 상처를 살폈다.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자 조연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대체 저 지경이 됐는데 어떻게 참고 버틴 걸까?조연아가 눈 부릅뜨고 있었기에 민지훈은 아주 협조적으로 치료를 받았다.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조연아는 부담스러워서 시선을 피하며 의사에게 물었다.“많이 심각한가요?”“네. 다시 상처가 벌어지면 곤란해요. 환자분께서 적극적으로 치료에 협조해 주셔야 합니다. 상처에 감염이라도 되면 처치가 곤란해져요.”이렇게까지 비협조적인 환자는 의사도 처음이었다.“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조연아가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의료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실을 나갔다.깔끔하고 호화로운 VIP 병실에는 피냄새가 진동했다.조연아는 창가로 다가가서 창문을 조금 열고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 모습을 본 민지훈이 불쾌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나 목 말라.”말을 마친 그는 침대머리로 고개를 돌리고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 모습을 본 조연아는 화들짝 놀라며 다가가서 물컵에 물을 따라 그에게 건넸다.“너무 아파.”남자가 말하며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조연아는 황당하다는 듯이 남자를 노려보았다.“민지훈, 이거 놔! 아프면 차라리 진통제를 먹어!”“당신이 내 진통제야.”놓아주기 싫다는 말이었다.“민지훈, 난 사람이지 약이 아니야!”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 당신이 옆에 있는 게 내 치료에 가장 도움이 돼.”‘이런 양아치가!’조연아는 당장이라도 이 손을 확 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그의 투정은 심해져갔다. “자꾸 움직이면 나 상처 벌어질 거야.”“민지훈, 대체 원하는 게
“넌 나한테 그런 말할 자격 없어!”차갑게 민지아의 손길을 뿌리친 조연아는 그대로 손을 들어 그녀의 귀뺨을 후려쳤다.짝!갑작스러운 상황에 민지아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충격에 빠진 얼굴로 욕설을 퍼부었다.“지금 날 쳤어? 조연아, 너 미쳤어?”말을 마친 민지아가 손을 치켜든 순간, 조연아는 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뺨을 때렸다.“조용히 살려고 해도 꼭 매를 버는 애들이 있어요. 네 부모가 제대로 된 예절을 안 가르쳤나 본데, 너 그러고 다니면 맞아!”민지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미친 사람처럼 조연아를 향해 달려들었다.“조연아, 죽여 버릴 거야! 네가 뭔데!”“네가 나를? 그럴 능력은 있고?”조연아는 가볍게 몸을 피하고 그대로 손을 뻗어 민지아의 머리채를 잡고 소파로 던졌다.“민지아, 똑바로 봐. 내가 아직도 과거에 괴롭힘 당하면서도 찍소리 한번 못하던 조연아로 보여? 내 몸에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지옥이 뭔지 알려줄 거야!”민지아 같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스타는 대중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민지아가 다시 미친 사람처럼 조연아에게 달려들던 순간, 병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하태윤이 민지아의 팔목을 잡았다.“인기스타 민지아의 본모습은 미친년이었네?”하태윤이 빈정거리듯 말했다.여자인 민지아는 하태윤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조연아는 갑자기 나타난 하태윤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요.”“걱정돼서 따라왔죠. 내가 안 따라왔으면 어쩔 뻔했어요?”하태윤은 조연아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하태윤?”하태윤을 알아본 민지아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어?’그녀는 하태윤과 조연아를 번갈아보더니 갑자기 웃음ㅇ르 터뜨렸다.“오빠, 봤지? 이 여자 어장관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한다니까? 고 변호사한테 꼬리치더니 이번에는 톱배우 하태윤까지! 조연아는 원래 남자 없으면 못 사는 족속이야.
오민이 어떻게든 버티려는 추연을 억지로 병실에서 내보내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조연아를 꼭 안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연기 좋았어.”단호한 말투에 조연아의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큭.”피식 웃던 민지훈이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상관없어. 연기가 맞든 아니든 난 협조할 테니까.”“...”말없이 민지훈의 품에 안긴 조연아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연기는 완벽했어. 그런데 왜... 들킨 걸까?’“나 피곤해.”대충 핑계를 대고 민지훈의 품에서 벗어난 조연아는 그를 등진 채 돌아누웠다.“재워줄까?”‘예전의 조연아라면 분명 그래 달라고 하겠지.’한편, 이미 들킨 거나 마찬가지지만 모르쇠를 대기로 했으니 조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어떻게 재워줄까?”이때 조연아의 곁으로 훅 다가온 민지훈의 숨결이 그대로 그녀의 귀를 적셨다.‘미친 변태자식.’여전히 눈을 굳게 감은 조연아의 볼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조연아의 볼에 뽀뽀를 하고 이불까지 잘 덮어준 민지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눈을 감고 있고 돌아누워 등까지 진 상태였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조연아는 방금 전 추연의 말과 반응들을 다시 떠올렸다.‘추신수... 그 자식이 날 물속으로 잡아당길 때 분명히 봤어. 목에 걸린 옥 목걸이를.’그 옥 목걸이는 조연아의 어머니와 추연 두 자매의 어머니, 즉 조연아의 외할머니가 두 딸을 위해 특별 제작한 유일무이한 팬던트였다.‘하지만 엄마가 하고 있던 팬던트는 6년 전에 이미 깨졌어. 유품 정리할 때 분명 확인했다고. 그럼 추신수 목에 걸린 건 이모 거란 소린데... 이모 팬던트가 왜 추신수한테 있는 거지?’한번 불씨를 튼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추신수
“너무 무리하지 마.”민지훈이 조연아를 끌어안았다.아무런 저항 없이 얌전히 안긴 모습, 모든 게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이때 밖에서 요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뭐? 연아가 기억상실증?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당장 들어가서 확인해야지.”“이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나 연아 이모야. 무슨 자격으로 날 막아!”그렇게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추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리고 다급하게 그 뒤를 따르던 오민도 눈을 질끈 감았다.‘세상에 두분 지금... 서로 안은 거 맞지?’“이모.”이때 추연을 발견한 조연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이모도 왜 병원복 차림이에요? 이모도 어디 아파요?”“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충격을 받은 추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네.”그리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미는 추연이었다.“민 대표, 두 사람 이렇게 스킨십하는 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봤어 봐. 우리 연아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어? 두 사람 이미 이혼한 사이잖아.”“이혼이요?”조연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민지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우리 언제 이혼한 거야?”“이혼”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상한 민지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이모님, 이만 나가주시죠. 이모님도 다치셨는데 푹 쉬셔야죠.”오민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네, 의사선생님께서 이모님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얼른 가시죠.”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추연이 아니었다.“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기억상실증에... 걱정하지 마. 잃어버린 기억은 천천히 되찾으면 되니까. 아니, 영원히 찾지 못해도 상관없어. 그 동안 있었던 일 이모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줄 테니까. 네 옆에 서 있는 이 남자 때문에 네가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왜 이혼하게 된 건지 전부.”하지만 조연아의 맑은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이모 말
“환자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검사를 마친 의사가 물었다.말없이 고개를 저은 조연아는 또다시 공허한 눈빛으로 민지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대표님, 환자분 뒤통수에 생긴 상처는 아마 며칠 동안 통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이고 뇌출혈 증상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네.”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민지훈의 시선은 여전히 조연아를 향해 꽂혀있었다.“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민지훈을 향해 꾸벅 인사를 남긴 의사가 병실을 나서려던 그때, 조연아의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의 정적을 깨트렸다.“저... 어떻게 다친 거죠?”그 질문을 들은 순간, 의사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환자분, 어떻게 다치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조연아는 민지훈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여보, 나 어떻게 다친 거야?”“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여보?’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모습에 민지훈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아, 남편이라는 호칭 불편해? 미안. 그러니까 그렇게 화난 표정 짓지 말아줘.”3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조심스럽고 겁 많은 새 같은 모습. ‘뭐지?’혼란스러웠지만 민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아니. 남편 맞아. 화난 거 아니야.”그리고 다시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민지훈이 꾸짖 듯 물었다.“별문제 없다면서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당황스러운 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그러게 말입니다. 뒤통수 가격으로 인해 출혈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일 뿐입니다. 기억상실증까지 올 수준은 아닌데요... 물에 빠진 뒤 잠깐의 익수가 있었지만 구조가 빨랐기에 뇌손상도 거의 없었고요. 그런데도 기억을 잃은 거라면 트라우마로 인한 단발적인 기억상실증이 큽니다. 이 문제는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럼 가장 실력 좋은 의사로 컨택해 주세요.”“네.”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빠르게 병실을 나서고 조용해진 병실, 조연아의 옆에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걱정스레 민지훈을 바라보던 오민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욕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얘기는 해야 해.’“저기... 대표님. 지금 총알을 빼내지 않으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연아 씨가 깨어나고 나서 대표님 이런 모습 보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요. 아니,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행여나 앞으로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면 큰 결함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다른 라이벌들 이길 수 있으시겠어요?”민지훈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조연아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오민은 자극 요법을 사용했다.“대표님. 제발 연아 씨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세요!”그제서야 살짝 흔들리던 민지훈이 결국 일어섰다.“그래요. 치료하죠.”“네, 네.”잠시 후, 역시 수술실로 옮겨진 민지훈은 바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마취가 풀리기도 전에 바로 조연아가 있는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리고 조연아가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녀와 함께 VIP 병동으로 입원까지 할 수 있었다.한편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오민은 걱정되는 마음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를뿐이었다.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민지훈이 사랑 때문에 이 정도로 충동적으로 움직이다니. 이게 사랑의 힘인가 싶었다.‘연아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연아 씨가 깨어나야 저희 대표님 좀 쉬실 거 같으니까...’...조용한 병실, 차가운 달빛이 커튼을 넘어 침대를 비춰주었다.민지훈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조연아의 손을 꼭 잡았다.‘연아야...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힘든 건 다 내가 감당할 테니까 넌 그냥 행복만 해줘.’...한편 조연아는 깊은 꿈속을 걷고 있었다.오로라를 기다리던 그날 밤,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귓가에 다정한 사랑의 말을 건네는 꿈이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그녀를 불바다 속으러 밀어버리고
가슴을 움켜쥐고 바다에 추락하는 걸 바라보는 조연아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리고 그런 조연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겁 먹지 마.”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조연아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핏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민지훈의 요트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이제 정말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바다에 빠졌던 추신수가 불쑥 수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요트 난간을 부여잡은 추신수가 악에 받친 얼굴로 조연아의 다리를 잡아끌었다.“으악!!”비명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사방에 튕기고 그와 동시에 민지훈은 망설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대표님!”이에 오민 역시 짧은 고함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두려울 정도로 조용한 바다...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소음이 전부 사라지고 턱턱 막히는 숨이 이곳이 물속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아... 이렇게 죽는 건가...’의식이 아득하게 사라지고 천근만근 무거운 몸에선 더 이상 바닷물의 차가움마저 느껴지지 않았다.바로 그때, 탄탄한 팔이 그녀를 꽉 껴안고 빠르게 수면위로 올라갔다.하지만 민지훈과 조연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탕탕탕 소리가 들려왔다.갑판 위에 남은 남자들이 해수면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조연아를 꽉 끌어안은 민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총 따위 무섭지 않아.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연아만 무사하다면...’한편, 거센 기침과 함께 눈을 뜬 조연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닷물에 엉망으로 젖었음에도 여전히 멋진 민지훈의 얼굴이었다.쿵.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위급한 이 상황이 잊혀질만큼 마음속 한 구석에 묘하게 따뜻해졌다.“탕!”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이 민지훈의 팔을 관통하고 피가 뿜겨져나왔다.“민지...”바다 내음인지 피냄새인지 헷갈리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조연아의 의식은 다시 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이 갑판
추신수의 말대로 저 멀리 수평선 뒤로 다가오는 요트들을 발견한 조연아는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또... 민지훈이라고?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는 건가?’이때, 그녀의 머리채를 홱 잡은 추신수가 총구로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다.“허튼 짓 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아무리 구조 요트로 도망쳐 봤자 쾌속 요트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추신수는 조연아를 미끼로 쓰기로 결정했다.“민지훈. 이 여자 머리에 구멍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멈춰.”추신수가 무전기를 사용해 소리쳤다.한편, 인질로 잡힌 조연아를 발견한 민지훈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곧 모든 요트들이 멈춰서고... 방금 전까지 당황한 표정이던 추신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하, 전 와이프한테 남은 미련이 그렇게 많아? 그 유명한 민지훈 대표가 이렇게 순정남일 줄 몰랐어. 우리 동생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길래 잊지를 못하실까? 뭐 침대에서 끝내주나 보지? 하하하.”추신수의 음담패설에 오민이 확성기를 빼앗아들고 소리쳤다.“추신수 씨, 이쯤에서 그만 하십시오. 당신이 저희 대표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괜한 발버둥치지 말고 조연아 대표 풀어주세요.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하지만 오민의 경고가 굉장한 농담이라도 되는 듯 추신수는 웃음을 터트렸다.“그만 해? 의미없는 발버둥? 하하하, 정말 의미없는 발버둥일까? 조연아가 내 손에 있는 한 민지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너희 잘난 대표님 얼굴 좀 봐. 날 찢어죽이고 싶은데 어쩌할 방도가 없는 저 모습을.”“원하는 게 뭐야?”민지훈이 물었다.“아, 역시 통쾌하셔.”추신수가 피식 웃었다.“요트 한 대만 가까이 붙여. 조종수 한 명만 남겨두고.”잠시 후, 그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요트를 바라보며 추신수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그만!”“너, 뛰어내려.”추신수가 배에 타고 있는 오민을 향해 말했다.조연아가 인질로 잡힌 상황인데다 어차피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추연의 모습에 조연아가 소리쳤다.“이모, 이모. 정신 좀 차려봐요. 이모.”겨우 눈을 뜬 추연아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털썩.남자들의 손길대로 움직이다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진 추연을 바라보는 조연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녀 역시 꿈쩍도 할 수 없는 터라 그저 애타게 소리칠 뿐이었다.“이모! 이모!”그녀의 목소리가 추연에게 닿아 정신을 지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이모랑 사이가 이렇게 좋았어?”한편, 흥미롭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추신수가 피식 웃었다.“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연이 이모는 너한테도 이모잖아.”“동생아,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내가 가족, 핏줄 그런 데 얽매이는 사람처럼 보여? 그럴 거면 애초에 납치도 하지 않았어. 너희 두 사람 오늘 절대 살아서 여기서 못 벗어날 거니까 쓸데없는 기대 따위 하지 마.”추신수가 음침한 미소에 순간 소름이 돋는 조연아였다.“너... 진짜 미쳤구나? 왜? 나랑 이모 다 죽이고 스타엔터 네가 차지하려고?”“그래. 네 말이 맞아.”그 와중에 여유롭게 총구를 닦던 추신수가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널 죽인다고 해서 내가 스타엔터를 차지할 거란 보장은 없지. 하지만 확실한 건... 네가 살아있는 한 그 회사가 내 몫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사람들도 내가 널 죽였다곤 상상도 못할걸. 여기서 물고기밥이 되어서 시체도 못 찾을 텐데. 안 그래?”“너... 신수야, 너 어떻게 그런 짓을.”바닥에 쓰러져있던 추연이 소리쳤다.“아무리 미워도 우린 피를 나눈 가족이야. 어떻게 가족한테 이런 짓을 해... 넌 죄책감 같은 것도 없어?”“죄책감?”한발 앞으로 다가간 추연이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죄책감 그게 밥 먹여줘? 돈만 가질 수 있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말을 마친 추신수는 추연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이모!”“왜 그런 눈으로 봐?”추신수가 증오로 번뜩이는 눈빛의 조연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배 위야. 동해일 가능성이 크고.”망망대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순 없었지만 임천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동해라 그렇게 추측한 것이었다.“신수가... 신수가 벌인 짓이야. 네 얼굴 직접 보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추신수 그 자식을 만났어. 그리곤 바로 쓰러졌고.”피 묻은 추연의 옷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 자세한 설명은 안전해지면 그때 해주세요. 지금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추신수 그 미친 자식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구조정... 이 정도 규모의 배라면 구조 보트 같은 건 있을 거야. 그걸 타고 여기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추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연아야. 난 신경쓰지 말고 너 먼저 가... 이모는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괜히 따라나서봤자 너한테 짐만 될 거야.”“이모...”“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가. 이러다간 우리 둘 다 꼼짝 못하고 여기서 죽는 거야.”어느새 추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아니요.”하지만 조연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저 이모 버리고 못 가요.”“어차피 신수 타깃은 내가 아니라 너야. 당장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진 못할 텐까 너라도 일단... 일단 도망쳐. 그리고 사람들이랑 다시 와서... 날 구해줘.”출혈이 너무 심해서인지 어느새 힘이 빠진 추연은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져만 갔다.“그러니까 어서 가.”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추연은 조연아의 손을 뿌리쳤다.“얼른 가. 얼른!”“그럼... 저 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해요. 알겠죠?”조연아가 입술을 깨어물었다.추연 말대로 지금은 쓸데없는 고집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어떻게든 누구라도 도망쳐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 그게 두 사람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마음을 독하게 먹고 갑판으로 나선 조연아는 한쪽에서 구조 요트를 발견했다.‘저기 있다.’그런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뒤통수를 겨누었다.“하, 내가 정말
꽤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조연아는 부스스 눈을 떴다.머리는 지끈거리고 사지에 힘은 풀린 와중에 피 냄새까지 풍겨왔다.칠흑같은 어둠속 나무판 사이 틈으로 흘러드는 빛 한줄기 덕에 조연아는 본인이 어디 있는지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여긴 배...잖아?’조연아는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이모가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고 나서 나도 공격받았어. 아, 이모... 이모는 어디 계시지?’조연아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잡동사니로 가득 들어찬 방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주위를 둘러보던 조연아는 구석에서 날카로운 철편 하나를 발견했다.어두운 이 공간에서 밧줄을 자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도구.힘겹게 꿈틀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던 그때, 바깥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헉, 뭐지?’당황한 조연아는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 아지 깨어나지 않은 척 눈을 질끈 감았다.역시나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조연아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 여자 상당히 발칙한 X이라니까 조심해. 그리고 이 여자 이모는 옆방에 있으니까 종종 들여다보고. 어촌에서 잡아온 여자들이랑 노닥거리지 말고.”“참나. 형님, 저도 사내입니다. 저딴 여자 두 명 상대 못할까 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그럼에도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당부를 이어갔다.“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라고. 보통 여자가 아니야.”“대표면 뭐요. 결국 힘없고 약한 여자 아닙니까. 게다가... 얼굴에 몸매도 반반한 것이... 한 번 건드려보고 싶은데요?”“어허. 너만 그러고 싶은 줄 알아? 나도 사실은... 엘리트 여자랑 해보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거든.”역겨운 주제에 배멀미까지 더해져 순간 밀려오는 구역질을 조연아는 억지로 참아냈다.잠시 후, 남자들이 방을 나서자 다시 번쩍 눈을 뜬 조연아는 꿈틀거리며 철조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으윽...”겨우 철조각에 손이 닿아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