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인도인의 두 번째 계급인 그가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 보았겠는가?하지만 어쨌든 그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그는 심호흡을 하고 얼굴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표정으로 일관했다.그는 감히 자신의 얼굴을 때린 대하 남자가 누구인지 죽일 듯이 보고 싶었다.하지만 브라흐마 아샴은 스스로 손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어쨌든 그는 오늘 패왕파의 손님이었다.화가 치민 것으로 친다면 그보다 김규민이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게다가 지금 김 씨 가문은 한창 상승기인데 어떻게 이런 일로 체면을 구길 수 있겠는가?만약 김 씨 가문이 웃음거리가 되면 그야말로 큰일이 날 것이다.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브라흐마 아샴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흥미로운 일이긴 하지만 이 또한 정상이지.”“우리 선봉사가 대하에 뿌리가 별로 없으니 천대받는 것도 당연해.”“오죽했으면 엊그제 샤르마 커 부자도 체면을 구기고 병원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을까?”“대하에는 유능한 사람이 많고 무성에서는 잠룡들이 떠오른 거지!”그는 스스로 타협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가슴속엔 분노가 가득했다.그는 일부러 이런 말로 김규민을 자극해 그녀로 하여금 감히 인도인을 모욕한 대하인들을 혼내주길 바라고 있었다.김규민이 냉랭한 표정으로 브라흐마 아샴을 힐끗 쳐다보았다.김규민같이 약삭빠른 사람이 브라흐마 아샴의 속마음을 모를 리 있겠는가?다만 그녀는 김 씨 가문 사람으로서 언제나 절대적인 냉정과 침착함을 유지했던 것이다.그래서 그녀의 얼굴색은 말할 것도 없고 자세도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술잔에 있는 와인을 다 비운 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머리 남자를 보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김 씨 가문과 패왕파, 그리고 선봉사의 내력을 아는 놈이라면 당장 물러나도 시원찮을 텐데.”“지금 우리한테 감히 싸움을 거는 거야?”“무학의 성지 사람이야? 아니면 어느 명문가 자제야?”
김규민의 명령에 제육영이라는 부하가 씩 웃으며 앞으로 나와 김규민의 영패를 집어 들었다.제육영은 한때 무성에서 날아다니는 쌍절곤이라 불렸다.쌍절곤을 들고 혼자 상대편에게 진격해 소위 고수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많이 해치웠다고 했다.무성 6대 파벌들이 그를 영입하려고 군침을 흘렸지만 결국 제육영은 김규민의 품으로 갔다.그는 그동안 김규민을 위해 싸우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이로 인해 김규민이 호령하는 김 씨 가문에서 그의 위상도 덩달아 높아졌다.김규민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제육영의 위상도 높아져 최근에는 직접 손을 쓰는 일이 줄어들었다.어쨌든 그는 김규민의 영패만 있으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해치울 수 있었다.그리고 몇 년 동안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로운 날들의 연속이어서 스스로 자신감도 한껏 충만해 있던 차였다.그는 자신이 무성에서 이미 천하무적이라고 느꼈고 원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해치울 수 있다고 자신했다.간단히 말해서 주인을 오랫동안 모시던 토종개는 결국 주인의 호가호위를 등에 업고 세력을 키우는 법을 배운 것이다!김규민의 영패를 든 제육영은 오만방자하고 기세등등한 자태로 일어서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십여 명의 심복을 데리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현장에서 인도인들을 모시던 몇몇 아리따운 여자들이 이 광경을 보고 재미난 구경을 놓칠 세라 얼른 제육영 일행의 뒤꽁무니를 따라갔다.길을 가던 종업원은 제육영 일행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결국 제육영의 발길질에 바닥에 넘어졌다.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무성에 황제가 나타난 줄 알았을 것이다.“퍽!”제육영은 곧 1호실 입구에 도착했고 문을 발로 뻥 걷어찼다.요란한 소리와 함께 방문이 펄럭거렸다.십여 명의 기세등등한 건달들이 1호실 안으로 들어갔다.제육영은 담배를 물고 건들거리며 당차게 앞으로 걸어갔다.그는 룸 안의 사람들을 흘겨보며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개자식! 어느 눈먼 놈이 감히 고귀한 인도인들의 심기를 건드린 거야?”“죽
제육영의 말에 하현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좋아. 개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지.”“어서 말해 봐. 원하는 게 뭐야?”하현의 말에 제육영은 화가 나서 폭발할 지경이었지만 애써 꾹 참고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이놈아. 이건 우리 김 씨 가문 김규민 아가씨의 영패야. 네놈은 스스로 두 손을 부러뜨린 다음 얌전하게 아가씨 방 앞에서 10분 동안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 그러면 없던 일로 해 줄 거야!”“잘 들어. 이건 우리 김규민 아가씨가 네놈이 대하인인 걸 특별히 생각해서 기회를 준 거야!”“소중히 여겨야 할 거야!”“만약 네놈이 감히 거절한다면 네놈만 여기서 죽는 게 아니야!”“네놈의 가족, 친구, 배후에 있는 모든 세력들이 힘들어질 거야.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는 얘기야!”제육영은 분명 하현이 세상 물정 모르는 허여멀건한 남자인 줄 착각하는 것 같았다.말을 하면서 그는 황금 영패를 꺼내 위세를 부리며 오만방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그의 일행들은 모두 가슴을 펴고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였다.마치 하현이 오금을 저리며 용서를 빌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제육영이 내민 것이 무엇인가?김 씨 가문 영패가 아닌가?무성에서 김 씨 가문의 영패는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한다.아무리 거물이라도 김 씨 가문의 영패만 보면 저절로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용 씨 가문, 만 씨 가문도 김 씨 가문의 영패 앞에서는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어쨌든 김 씨 가문 뒤에는 황금궁이 있었다.무성에서 이를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다만 하현은 이런 것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란 게 문제였다.그는 소파에 기대어 천천히 눈을 들었다.“그게 뭔데? 잘 안 보이는데.”“어서 가져와 봐!”“뭐? 어서 가져와 봐!?”제육영이 격노한 목소리로 말했다.“개자식! 내가 귀머거리인 줄 알아?”“네놈이 뭐라도 된 줄 알아?”“죽
”김규민이라고?”하현은 영패에 쓰여진 글씨를 보고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김 씨 가문이 내 앞에서 돈자랑을 하는 거야?”“그런데 어쩌지? 나도 돈이 부족하진 않은데.”“돌아가서 김규민에게 전해. 이런 물건으로는 날 움직이지 못한다고.”“돈으로는 날 움직이지 못하지.”순간 하현은 제육영을 힘껏 걷어찼다.제육영은 끙끙거리며 비틀거리다가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성질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김 씨 가문도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거야?”“당신 도대체 누구야?”“신분을 밝혀!”하현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나? 난 그냥 데릴사위에 불과해.”“다른 건 내세울 게 없어. 뭐 그냥 의로운 일에 관심이 많다고 할까?!”“개자식! 네가 어떤 사람이든 감히 날 다치게 했으니 절대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제육영은 하현이 데릴사위에 불과하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거렸다.순간 그는 옆에 있던 동료들에게 소리쳤다.“야! 다 같이 해치워!”그의 명령과 함께 패왕파와 김 씨 가문에서 나온 십여 명의 싸움꾼들이 소지한 무기를 꺼내면서 하현이 있는 곳을 향해 살벌하게 돌진했다.“퍽퍽퍽!”하현이 손을 쓸 필요도 없이 진주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움직였다.그녀의 동작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고 순식간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날아갔다.그들은 진주희의 발길질에 뼈가 부러졌고 고통 때문인지 놀랐기 때문인지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저 얼굴을 찡그리고 땅바닥에서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킬 뿐이었다.그들은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가지고 있던 전투력을 모두 잃었다.“개자식!”이 광경을 본 제육영은 온몸을 부르르 떨렸고 자신도 모르게 뒤춤에 넣어둔 총을 만지작거렸다.그러나 그가 총을 꺼내기도 전에 진주희가 테이블을 탁 치더니 그녀의 옷소매에서 젓가락이 툭 튀어나와 그대로 제육영의 손바닥을 관통해 버렸다.그의 손바닥에서 피가 분수처럼
제육영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 맞은편에서 쌀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제육영, 왜 이렇게 안 데리고 오는 거야?”제육영은 떨리는 얼굴로 하현을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규민 아가씨, 저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습니다.”“김 씨 가문 영패로는 안 된다고 전하랍니다.”“죄송합니다.”전화기 너머에선 잠시 침묵이 흘렀다.“오늘 밤은 별로 재미없게 흘러가나 싶었는데.”“이렇게 나한테 즐거움을 주려는 자가 나타난 줄 몰랐네.”“그럼 구경이나 해.”“누군가 나한테 재미난 구경거리를 주려고 이렇게 발버둥이니 뭐 가서 놀아줄 수밖에.”...10분 후 술집 전체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손님들은 다 쫓겨났다.사방팔방에서는 수많은 패왕파들이 몰려들어 술집 안팎을 물샘틈없이 에워쌌다.키 크고 건장한 남자들이 통로까지 꽉 차 있었다.열기로 후끈거렸던 술집이 갑자기 싸늘하게 식어가는 순간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힐을 또각거리는 소리가 술집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을 이끈 싸늘한 그림자가 들이닥쳤다.하현이 사람을 시켜 차를 끓이려고 했을 때 갑자기 방문을 뻥 걷어찼다.발렌시아가의 검은 옷을 입은 아리따운 여자의 다리가 먼저 룸 안으로 들어왔다.이 장면을 본 남자들은 매혹적인 여자의 모습에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물론 이 사람들 중에 하현은 포함되지 않았다.이윽고 매서운 아우라를 풍기며 김규민이 등장했다.그녀의 뒤에는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세라 브라흐마 아샴이 따라붙었다.이어서 김 씨 가문 고수들과 많은 인도인들이 뒤따랐다.갑작스러운 김규민 일행의 등장에 룸 안은 무거운 기운으로 가득 들어찼다.그들은 널브러져 있는 그들의 사람들을 힐끔 보았다가 시선을 던져 여유롭게 찻잔을 들고 있는 하현에게 던졌다.차손녕과 제육영이 모두 죽은 개처럼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김 씨 가문 고수들은 하나같이 눈썹을 치켜
”당신 좀 재미있는 사람이군.”하현이 오만방자하게 되받아치는 모습을 보고 김규민의 입매가 야릇하게 올라갔다.그녀는 가늘고 긴 눈을 치켜뜨고 하현을 쓱 훑어보다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지금 나 김규민과 싸우겠다는 거야?”“당신이 나의 상대가 될 수 있겠어?”김규민은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여자였다.자신의 명성과 배경이 때로는 무성의 김 씨 가문보다 훨씬 높다고 생각했다.“상대?”하현은 찻잔을 움켜쥐고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당신은 나의 상대가 될 자격이 없어.”“내가 자격이 없다고?”김규민이 어리둥절해하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대단하군, 대단해.”“이런 사람 참 오랜만이야.”“감히 나 김규민 앞에서 이렇게 날뛰다니!”“잘 생각해 보고 한 말이지?”“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지?”“그 말, 뒷감당할 수 있겠어?”“참고로 이 가게는 오늘 내가 이미 접수했어.”“지금 안팎으로는 김 씨 가문 고수 오십 명과 패왕파들이 백여 명 쫙 깔렸어.”“참, 그리고 인도 선봉사의 고수들도 있어.”김규민은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취급하듯 눈을 아래로 깔며 흥미로운 눈빛을 반짝였다.“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궁금한데.”“나도 참 궁금해. 나 김규민이 당신의 상대가 될 수 있을지 어떨지 말이야.”김규민의 말을 들은 그녀의 부하들은 하나같이 섬뜩한 미소를 떠올리며 싸늘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손에 든 총기를 만지작거리며 무언의 협박을 시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이들은 김규민이 눈짓이나 손짓으로 명령만 내린다면 언제든지 사양하지 않고 하현에게 덤벼들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그런 문제를 내가 고민해야 해?”하현은 여전히 태연스럽게 찻잔을 기울였다.“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따져 보면 알지 않아?”“게다가 지금은 당신들이 나한테 해명을 하고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상황 아닌가?”“당신들이 무릎을 꿇고 사과만 하면 이 일은 그냥 없던 일로
바깥에서는 수많은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창백한 표정의 영지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그녀의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다.아마 그녀의 경호원들인 것 같았다.그들의 수는 아주 많았고 모두들 김규민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영지루가 나타난 것을 본 브라흐마 아샴은 눈이 번쩍 뜨였다.“오, 영지루! 당신도 날 보고 싶었던 거야, 그렇지? 난 당신을 위해 이미 세 알이나 먹었어. 오늘 밤 제대로 죽여줄 거야!”“퍽!”브라흐마 아샴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영지루는 이미 손바닥을 휘갈겼고 브라흐마 아샴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그러나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반격하지는 않고 자신의 뺨만 어루만지며 변태 같은 표정을 지었다.자세히 보니 벌써부터 한껏 달아오른 브라흐마 아샴이 흥분한 듯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김규민은 잠시 영지루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오만하게 입을 열었다.“만진해의 치료담당 그 영지루?”만진해의 치료담당이라는 신분은 무성에서 알려져 있는 영지루의 신분이었다.그렇지 않으면 영지루의 정체가 탄로 나게 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지 모르는 일이었다.하지만 만진해의 치료담당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신분이었다.“맞아.”영지루는 하현 앞에 다가가 차가운 표정으로 김규민을 쳐다보았다.“김 씨 가문은 정말 대단하군.”“인도인을 앞세워 대낮에 감히 대하의 여자를 강탈해 인도인에게 바치려고 했다니!”“김 씨 가문도 이젠 끝이야!”영지루를 뒤따르던 경호대장은 험악한 표정으로 다가왔다.“김규민, 당신은 이 일에 대해 제대로 해명해야 할 거야.”경호원들은 모두 영 씨 가문 출신들이다.그들이 모시는 공주가 하마터면 인도인에 의해 유린당할 뻔했다.국제적인 영향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마 진즉에 이 인도인을 죽였을 것이다.영지루의 신분이 만만치 않음을 간파한 브라흐마 아샴은 얼굴을 가린 채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김규민, 뭐야? 이 사람들 다 누구냐고?”김규민
영지루의 정체가 범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김규민도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결국 아무리 강한 용도 기세 좋은 뱀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다.외부인의 눈에는 무성에 뿌리를 깊이 내린 것처럼 보이는 만 씨 가문도 김 씨 가문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결국 만진해는 김 씨 가문의 사람과 황금궁의 궁주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실패해 폐위당했으니 아마 그 기세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지금 김규민은 화의를 취하는 모습이었지만 결코 미안한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다.배경이 있을 법한 여자을 상대하면서 적대감을 무한정 키우는 것은 결코 김 씨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었다.순전히 계산에 의한 전략이었다.브라흐마 아샴은 나사 빠진 인간처럼 계속 영지루를 보며 실실거리고 있었다.분명히 영지루에게 완전히 빠진 모습이었다.하현은 브라흐마 아샴 뒤에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노인에게 눈길이 갔다.언뜻 보기에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사람 같았지만 유심히 보니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 같았다.아마도 인도 요가를 수련한 대가일 것이다.“사과는 필요 없어.”“일억도 필요 없어.”“난 만진해 어르신의 도움 없이도 끝까지 싸울 수 있어.”“나 혼자 힘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거든.”영지루는 역시 영 씨 가문 공주다운 기세를 보여주었다.“오늘 밤 운 좋게 하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이 파렴치한 인도인에게 유린당했을 거야!”“한 가지면 돼!”“저 사람의 남근을 잘라!”하현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충분히 포악하고 강력한 영 씨 가문의 공주다운 발언이었다!유약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행동에는 기개가 넘쳐흘렀고 보통 사람들이 보일 수 없는 아우라를 풍겼다.“영지루, 이건 너무 심하잖아!”“우리도 많이 양보했으니 그쪽도 좀 양보해야지...”“욕심이 끝도 없잖아!”“잘난 척하고 싶어서 그래?”김규민의 예쁜 얼굴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경고하는데 여기서 한 치도 더 나가지
”여수혁?”하현은 여음채를 쳐다보며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그가 이 병원 대주주인 동시에 당신의 뒷배라고?”“그래! 알고 나니 이제야 겁이 나?”“무서운 줄 알면 이제 무릎 꿇고 내 신발 밑창을 핥아!”“그리고 다리를 부러뜨리고 이십억을 배상해! 그러면 여수혁도 당신한테 살길을 열어줄지도 모르지!”“그렇지 않으면 당신 오늘 재수 없을 줄 알아!”여음채는 경멸하는 기색을 한껏 드러내었다.하현이 남양 무맹과 여수혁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전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고 여겼던 것이 분명했다.강옥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현에게 말했다.“하현, 여수혁은 남양 무맹주가 총애하는 제자야.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페낭 무맹의 부문주라서 건드리기가 쉽지 않아.”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어릿광대일 뿐이야.”“뭐? 어릿광대?”하현의 말에 여음채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그런 용기를 줬는지 모르겠군! 흥!”“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이 사람은 페낭 무맹의 부맹주 아들이야!”“이 사람은 페낭 무맹 장로가 아주 아끼는 제자라구!”“게다가 남양 무맹이 페낭 무맹에 파견한 제자라고!”“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딜 가나 거칠 것이 없는 사람들이야. 그뿐만 아니라 실력도 비할 데 없어!”화려한 옷차림의 남녀 예닐곱 명이 걸어와 소리치며 하현을 향해 멸시하는 눈빛을 보이며 비아냥거렸다.“야, 너 오늘 큰일 났어! 아주 재수 옴 붙은 날이라고! 우리가 당신 목숨뿐만 아니라 가죽까지 싹 벗겨버릴 거거든! 하하하!”이 사람들은 하현이 무슨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원하는 대로 칼질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험한 말을 마구 내뱉었다.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들은 더욱 경멸하는 눈초리로 하현을 노려보았다.하현 같은 외지인이 감히 그들 같은 거물들한테 입을 놀리다니 정말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망나니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하현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 광경을 보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외지인 관광객 주제에 너무 오만하고 포악하지 않는가?진 반장이 이미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나려는데 여전히 권세를 믿고 남을 괴롭히려고 하다니, 이건 지나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진 반장은 얼굴을 가리고 일어나 하현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도대체 이놈의 정체가 뭔지 알 길이 없어 진 반장은 순간 분노했지만 애써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젊은이, 당신 너무 심한 거 아니야?”“퍽!”하현은 손바닥을 휘둘러 또다시 뺨을 때리며 냉담하게 말했다.“그렇게 대단하게 나한테 큰소리쳤다는 건 잘못을 하면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도리도 잘 안다는 뜻 아니셨나?”“이렇게 간단한 이치도 몰라?”진 반장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았다.생각 같아서는 하현을 죽이고 싶었지만 결국 그는 소리 없이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미안해! 잘못했어!”그는 하현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구봉이 전화를 건 정종화 총경이 두려운 것이 분명했다.감히 이런 상황에서 어찌 그가 하현을 상대로 싸울 수 있겠는가?상대방의 사과를 들은 후에야 하현은 앞으로 나와 그의 오른쪽 얼굴을 툭툭 건드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꺼져!”진 반장은 그의 무리들을 데리고 쏜살같이 꽁무니를 뺐다.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들은 하현이 진 반장을 내쫓을 만큼 강력한 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진 반장 일행이 꽁무니를 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진 반장의 얼굴까지 때렸다.“내가 당신을 얕잡아 본 것 같군. 당신이 이렇게 큰 뒷배를 뒀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진 반장이 황급히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여음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냉소를 흘렸다.“그렇지만 똑똑히 들어. 당신 뒤에 얼마나 큰 거물이 있든 간에!”“페낭 병원의 뒷배가 훨씬 강할 거야!”“날 건드려?! 흥! 두고 봐! 당신은 죽
선두에 선 남자를 보자 여음채는 안색이 환해졌다.그리고 나서 얼른 다정하게 남자의 팔짱을 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진 반장님, 마침 잘 오셨어요. 바로 저 자식이에요. 저 자식은 우리가 의료 윤리를 중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때린다고 호도하고 있어요.”“게다가 내 아랫배까지 걷어찼다구요!”“저놈을 반드시 감옥에 가둬 주세요. 그 안에서 제대로 반성할 수 있게요.”여음채는 하현을 가리키며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다.부일민 일행도 모두 큰소리로 맞장구를 치며 하현이 억지를 부린다고 한마디씩 보탰다.“뭐? 감히 병원에서 원장님을 때려요?”“대낮에 그런 짓을 한단 말이에요?”“법도 뭣도 없답니까?”진 형사는 하현의 얼굴을 주시했고 곧바로 그가 남양인이 아니란 걸 눈치챘다.그러자 얼굴이 싸늘하게 바뀌며 비아냥거렸다.“이봐, 어서 저놈을 데려가! 모질게 심문해! 지독하게 조사해!”“감히 반항한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법으로 다스려!”하현은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진 형사를 쳐다보았다.“당신은 어쨌든 형사반 반장이면 경찰서를 대표해서 일을 해야죠. 무슨 일이 생겼으면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일을 어떻게 하든 당신 같은 사람이 날 가르칠 건 아니지!”“당신이 먼저 사람을 치고 법을 어겼어. 그러니 법 집행자로서 당신을 연행하는 건 당연한 거야!”“물론 당신도 저항하는 길을 택할 수 있어!”“하지만 저항한 결과는 내가 당신을 한 방에 죽이는 거야!”진 반장은 언성을 높였고 눈을 부릅뜨고 하현의 얼굴을 툭툭 건드리려고 손을 내밀었다.하현은 손을 들어 진 반장의 오른손을 막은 뒤 담담하게 하구봉을 쳐다보며 말했다.“전화 걸어.”하구봉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곧바로 하현이 말하는 뜻을 알아차리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전화기 건너편에 냉랭한 목소리가 전해오자 하구봉은 핸드폰을 진 반장에게 건네주었다.“당신의 직속 상사가 전화를 받아
하현은 여음채의 말을 듣고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페낭은 정말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곳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이렇게 공공연하게 정경유착이 만연할 줄이야!하현의 표정을 살피던 여음채는 순간 하현이 겁을 먹은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자 여음채는 다시 의기양양한 기운을 내뿜으며 이를 악물고 하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왜? 무서워?”“이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어?”“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봐줄 수도 있어. 아직 늦지 않았다구.”“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기다리는 건 억세게 불행한 일들뿐일 거야!”말을 하는 동안 여음채는 부일민에게 손짓을 하며 다른 의료진과 경호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하현 일행을 겹겹이 에워쌌다.기세등등하게 하현 일행을 노려보고 있는 그들 무리는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사나운 모습이었다.이 광경을 본 여음채는 더욱 득의만만해져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이봐, 이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 어서 사과하고 내 신발 밑창을 개처럼 깨끗이 핥아!”“그렇지 않으면 당장 오늘 밤부터 감옥에서 썩어야 할 거야!”강옥연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떠올랐다.하구봉은 콧방귀를 뀌며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했다.주위의 구경꾼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현에게 다가올 불운을 생각하며 탄식했다.아무리 거세게 싸운다고 해도 경찰관들 앞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설마 하현 일행은 법이라도 어기려는 건가?하현은 냉담한 얼굴로 여음채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평온한 표정이 되었다.“내가 감옥에 갈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의료 윤리를 중시하지 않는 건 그렇다 쳐. 그런데 어떻게 이익만 챙기고 인명을 돌보지 않는 거야?”“멀쩡한 병원이 사기꾼 소굴이 되어 관광객을 속이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군.”“당신들 오늘 잘 만났어. 당신들은 이제 좋은 날 끝났어.”“이 병원, 망하게 해 줄게.”하현의 말을 들은 부일민과 예쁘장한 간호사들은 모두 코웃음을 쳤다.그녀들은 허
잠시 후 넋이 나간 듯 멍하던 여음채는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배를 움켜쥐고 일어나 하현을 노려보며 말했다.“개자식! 감히 날 걷어차?”“내 엄마가 누군지 알아?”“당신은 누구야? 의료 윤리를 저버린 원장 아니야?”하현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때린 건 당신이야.”“뭐?”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현의 목소리와 행동에 여음채는 화가 치밀어 올라 하현을 가리키며 호통쳤다.“모두 저놈을 죽여!”“일이 터지면 내가 다 수습할 거야!”그녀의 말에 수십 명의 건장한 경호원들이 사납게 웃으며 하현을 에워쌌다.강옥연은 이런 막무가내 인사를 본 적이 없었다.병원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막무가내라니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결국 강옥연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조심해!”그녀의 말을 들은 부일민은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우리 원장님한테 미움을 산 사람은 살아남지 못해!”예쁘장한 간호사들은 앳된 얼굴로 눈을 흘기며 거들었다.“흥! 조심해 봤자 소용없어! 죽어야 해!”주위를 둘러보던 환자와 의료진들도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하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여음채의 인품이 별로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녀의 영향력과 인맥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이 페낭 병원에서 누가 감히 그녀한테 대들 수 있겠는가?아무 물정 모르는 외지에서 온 관광객이 하필 여음채를 건드리다니!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이때 선두에 선 경호원은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하현에게 다가왔다.그는 고개를 옆으로 까딱까딱 꺾으며 광분한 사냥개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이놈아! 감히 여기서 소란을 피워? 여기가 어디라고? 눈을 어디다 둔 거야?”“퍽!”“앗!”경호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현은 듣기 귀찮다는 듯이 손바닥을 휘둘러 그를 내동댕이쳤다.맨 앞에 있던 경호원은 눈앞이 캄캄해졌고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기절하고 말았다.기절했어?!이 광경을 보고 놀
앞뒤 사리를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여음채의 모습에 강옥연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뭐가 모욕이에요?”“당신들은 환자를 구하고 비용을 청구해야 하는데 환자를 구하기는커녕 무슨 스타가 나타났다고 부리나케 쫓아다니지 않았냐구요?!”“응급실에 30분씩이나 방치해 놓고 이제 와서 보증금은 돌려주지 못하겠다니요?”“당신들 같은 병원이 무슨 의료 윤리 의식이 있겠어요?”“병원이 아니라 사기 소굴이에요!”강옥연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식약청에 고소할 거예요!”하현은 침착한 눈빛으로 여음채의 표정을 살피다가 하구봉에게 원가령의 안전을 보호하라는 손짓을 했다.아마도 강옥연의 강경함에 여음채는 일을 처리하기가 좀 곤란해졌다고 느꼈을 것이다.여음채는 눈빛이 서늘해지더니 달려오는 수십 명의 경비원들에게 하현 일행을 포위하라고 손짓하며 지시했다.이어 그녀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긴 다리를 뻗으며 다가와 말했다.“우리 페낭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고 잘못을 하면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해.”“무릎을 꿇고 잘못을 인정해. 그리고 내 신발 밑창을 깨끗이 핥아. 그뿐만 아니라 우리 부일민 의사에게 십억을 배상해. 그러면 이 일은 이대로 덮어 두겠어!”“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지 마.”“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당신들은 칠흑 같은 남양 감옥에 갇히게 될 거야!”“1년 반 동안 안에서 통곡만 하다가 세월을 보내게 될 거라고!”분명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여음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주 능수능란했다.어떤 외국인이라도 감히 페낭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는 모두 이런 꼴을 당했을 것이다.부일민 일행은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린 채 고소하다는 듯 히죽거렸다.큰소리 뻥뻥 치더니 하현이 아주 제대로 걸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페낭 거물도 아닌데 감히 페낭 병원에 와서 행패를 부려?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꺼운지 모르는 거지!강옥연은 한기를 가득 품은 목소리로 소리쳤다.“당신들은 아주 법도 뭣도
응급실에 있던 원가령은 아직도 술에 취한 듯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원래 같았으면 벌써 위를 씻고 상처를 치료해야 했었지만 의료진은 그녀를 병상에 눕혀만 놓고 방치한 것이다.하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뻗어 원가령의 위를 몇 번 누른 다음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하구봉에게 쓰레기통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원가령은 술을 모두 토한 뒤에야 비로소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이 되었다.강옥연에게 응급실의 소독약으로 간단하게 원가령의 상처 부위만 소독한 뒤 휠체어를 구해 원가령을 실었다.그리고 하현 일행은 떠날 준비를 했다.이때 문밖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남양 말로 뭔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분명 경비원들이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하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하구봉에게 눈빛을 보냈고 하구봉은 지체 없이 한 걸음 내디디며 한 발로 세게 문을 걷어찼다.‘퍽'하는 소리와 함께 응급실 문이 벌컥 열렸다.예닐곱 명의 건장한 경비원이 뛰어들려다가 튕겨나가는 부일민과 부딪혀 난장판이 되었다.비슷한 시각 복도 끝 쪽에서는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어딘가 낯이 익어 보이는 여자가 맨 앞에 서 있었다.그녀는 몸매가 유려했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으며 걸어왔다.앳된 간호사 몇 명은 이 여자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 중년 여자는 페낭 병원에서 제일 영향력이 센 원장, 여음채였기 때문이다.여음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우리 병원에서 소란을 피워? 눈도 없어?”“원장님, 외지 사람들이 와서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우리가 의술의 도리를 저버렸다고 하면서 사람을 때리고 응급실 문을 발로 차고 있어요.”“우리는 모두 들어가서 환자를 치료하려고 하는데 환자를 마음대로 데려가려고 합니다!”“이건 아주 우릴 무시하는 거죠!”넘어져 있던 부일민은 여음채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하현 일행의 행동을 가리키며 고자질
부일민은 더욱 냉소적으로 말했다.“하지만 우리 앞에서 귀에 거슬리는 그런 말은 해도 되지만 이것만은 알고 가세요. 한번 지불한 돈은 환불되지 않아요.”“사람이야 얼마든 데려가도 되지만 보증금 천만 원은 돌려주지 않습니다!”“그럼 어서 물러가세요!”“여기서 방해하지 말구요!”의사의 오만방자한 말에 강옥연은 얼굴이 싸늘해졌다.“살리기는커녕 환불도 안 된다구요?!”“내가 당신들 고소할 거예요!”“고소?!”부일민은 여간호사 몇 명과 눈을 마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어떤 사람은 손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강옥연이 고소라는 말을 꺼내도 그녀들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게 분명했다.어차피 페낭 병원은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고소? 그래 하세요!”부일민은 눈썹을 치켜세운 뒤 벽에 붙은 전화번호를 가리켰다.“국민신문고, 식약처, 경찰서, 등등, 전화번호들이 여기 다 있으니까!”“아무데나 전화해서 아무나 불러 보세요!”“사람을 불러서 날 고소해 보세요! 그럼 내가 당신들을 할아버지라고 부를게요!”“대하 촌놈들이 감히 우리 남양 땅에 와서 거드름을 피우며 위세를 부리고 있어?! 흥!”“당신들이 전화를 해 봤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부일민은 한껏 코웃음을 쳤다.그들은 이미 관광객들을 등쳐먹는 데 아주 익숙한 것 같았다.관광객이 신고해도 결국 팔이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당신들 제정신이에요!”강옥연은 눈을 부라렸다.이런 몰상식한 사람들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이때 하현이 앞으로 나와 강옥연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담담하게 말했다.“강옥연, 어쨌든 당신은 용문 사람인데 어떻게 기본적인 도리도 몰라?”“뭐라고?”강옥연이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도무지 하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어떤 사람들은 말로 하면 못 알아들어. 그냥 얼굴을 두들겨 맞아야 알아듣지.”
황천화 일행을 해결하고 하현은 강옥연에게 전화를 한 뒤 택시를 타고 페낭 병원으로 향했다.페낭 병원은 사립 병원으로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인테리어가 호화로웠다.거리마다 홍보 간판이 걸려 있는 병원다웠다.다만 의술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했고 보감 그룹 병원에 속하며 페낭 현지에서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았다.보통은 관광객을 속이고 사기를 쳐서 이익을 남기는 병원이었다.그리고 해외에서 온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사기를 당해도 신고할 길이 없어 결국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었다.하현은 오는 길에 이런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강옥연도 현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병원에 가게 된 것을 그녀의 잘못만이라고 탓할 수가 없었다.하현과 하구봉은 곧바로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 복도에서 강옥연을 찾았다.“하현.”하현이 나타난 것을 보고 강옥연은 급히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하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응급실에 들어가긴 했지만...”강옥연이 말끝을 흐렸다.하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응급실 문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대여섯 명의 환자가 병상에 누워 있었고 그중 두세 명은 외상을 입고 낮은 소리로 신음하고 있었다.그러나 응급실 안에는 의료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내가 원가령을 데리고 왔을 때 의료진은 어떤 유명 연예인이 다쳐서 나간다고 했어.”“이곳의 한 인플루언서 스타가 영화를 찍다가 손가락을 다쳐서 급하게 응급실 의료진이 갔어!”“곧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보증금 천만 원을 먼저 내라고 했어.”“그래서 보증금을 내고 30분째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도 아직 아무도 안 와...”강옥연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하현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보감 그룹 산하 병원의 평판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그가 다른 의료진을 찾아보려고 하자 강옥연이 그를 멈춰 세우며 말했다.“하현, 내가 가서 재촉해 볼게.”강옥연은 혼자서 달려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