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 밝히는 최희정의 모습을 하현은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는 병원을 떠나 택시를 타고 무성체육관으로 향했다.오늘 그가 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용문대회에 참가하는 일이었다.원래 그는 이 대회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만진해의 간곡한 부탁을 하현은 끝끝내 거절할 수가 없었다.아침 일찍부터 진주희는 하현에게 이미 많은 자료를 보냈다.자료는 용문대회에 관한 기본적인 절차에 관한 것이었다.용문대회 절차는 간단했다.용문 사람, 용문의 각 분파, 용 씨 가문 사람이면 누구라도 예선에 참가할 수 있었다.이른바 예선전은 전국의 시에서 치러진다.첫 번째 절차는 이론 시험을 치른 후 100명을 선발하여 시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다.두 번째 절차는 시 대회에서 10명을 선발하여 도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다.세 번째 절차는 도 대회에서 한 명을 선발해 진짜 용문대회에 출전하는 것이다.그리고 진정한 용문대회의 일인자는 용문의 일인자가 될 뿐만 아니라 용문주가 될 기회를 얻게 된다.일단 용문주 자리에 오르면 대하의 절대적인 지존이 되는 것이다.말 한마디로 수많은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명예와 권세를 누리게 된다.하현이 다른 자료를 보니 무학의 성지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날고 긴다는 사람들은 일단 대부분 참가 신청을 하는 것 같았다.최종 고사장에 정원이 몇 명이든 일단 지원 열기는 후끈했다.자료를 쭉 훑어보는 하현에게 진주희는 무학의 상식도 세심하게 준비해 주었다.하현은 몇 번을 꼼꼼히 살펴보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아마 사람들은 용문대회에 이론 시험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하현이 자료를 다 읽었을 때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통화 버튼을 누르자 맞은편에서 만진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현, 오늘 시험인 거 알지?!”“꼭 승리할 거라 믿네!”“참, 누군가 자네를 방해할 수도 있으니 내가 특별히 자네의 신상정보를 좀 바꿔 놓았네.”“지금 자료에는 자네 이름
하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격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회에 참가하기로 약속했으니 반드시 방법을 강구해서 어르신의 뜻을 이루겠습니다.“그런데 며칠 동안 만천우에게 신세를 좀 져야 할 것 같습니다.”“예를 들어 인민병원 입구에 무릎 꿇고 있는 사람들을 좀 지켜봐 달라든가 하는 일 말이죠.”“사흘 밤낮을 무릎 꿇고 있지 않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하현은 만진해가 이 일을 언급할 것 같아서 먼저 선수를 쳤다.전화기 건너편에 있던 만진해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만진해는 원래 이 일에 관해서 뭐라고 할 생각이었다.샤르마 부자는 아무리 그래도 인도인이자 브라흐마 커크의 사람들이었다.잘못하다가 브라흐마 커크의 미움까지 살까 봐 조금은 걱정스럽던 참이었다.하지만 하현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듣고 만진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다.만진해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자네가 이미 그런 결정을 했다면 나도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네.”“다만 브라흐마 커크는 결코 쉽지 않은 상대임을 꼭 명심하길 바라네.”“인도인을 상대할 때는 신중해야 하네...”하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르신, 그게 아닙니다!”“제가 인도인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인도인이 절 미워합니다.”“저들이 3일 동안 충분히 무릎을 꿇고 사과한다면 저도 여기서 끝낼 것입니다.”“그러나 저들이 계속해서 절 귀찮게 한다면...”“죄송하지만 그건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저들을 밟아 죽일 수밖에요.”만진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자네 뜻 알았네. 부디 잘 해결되길 바라네.”“아, 참. 그리고 용천오를 조심해야 하네.”“용 씨 가문의 세 자제들과 인도인은 사이가 아주 가까워.”“인도인을 건드린다는 건 그들을 건드린다는 거나 마찬가지야.”전화를 끊은 후 하현은 먼 곳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만진해는 주의를 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신분으로
하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뒤를 돌아보니 예쁜 여자들 몇 명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제일 앞에 서 있는 여자는 머리를 하나로 단단히 묶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수수한 차림이었지만 절로 눈길을 끄는 세련한 생김새였다.하현은 이 여자가 왠지 낯이 많이 익은 것 같았다.그러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저기...”“어머? 나 몰라?”“하현, 오랜만이야. 나 못 알아보겠어?”포니테일을 한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나야. 김방아.”“김방아?”하현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아, 이제 생각났어. 김방아였구나...”하현은 그제야 그녀가 생각이 났다.대학 때 친구였다.게다가 학교의 꽃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여자였다.역시 그녀의 가문은 듣던 대로였다.무학의 가문에서 태어나 졸업 후 바로 무성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친구들 중 아무도 그녀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하현이 그녀를 알게 된 것은 교외 인턴을 참가했을 때였다.김방아가 실수로 인턴십 회사의 수천만 원 상당의 장비를 망가뜨렸기 때문이었다.게다가 그 실수로 인해 하현이 다치게 되었다.그러나 하현은 좋은 마음으로 김방아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았다.그런데 그 결과 뜻밖에도 김방아는 하현이 인턴 기업의 장비를 망가뜨렸다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녔다.그때 하현은 돈이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다른 평범한 학생들이었다면 아마도 그런 김방아의 행동에 많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이 일이 있은 후 하현은 김방아가 얼굴은 예쁘지만 심성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어차피 하현도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른 것이다.그런데 몇 년 만에 이렇게 무성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하현은 별생각 없이 예의상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오랜만이야.”“누가 이렇게 예쁜가 했네.”“설마? 아직도 남자 친구가 있나 없나 염탐하는 거야?”김방아는 일
올라가지도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고?하현은 어이가 없었다.자신이 용문대회에 온 것은 김방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김방아는 하현의 설명 따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탄식하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하현, 사실 난 네 마음 이해해.”“대학 다닐 때 남자들이 나한테 미련이 남아서 기숙사 뒤 운동장을 뛰어다녔던 거 다 나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잖아!”“세월이 지났는데도 당신은 참 여전하네!”김방아는 포니테일을 새침하게 흔들며 잘난 척했다.“솔직히 말해서 난 그런 거 별로 안 믿었거든.”“전교에서 제일 예쁘고 인기가 많았지만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미련을 못 버리고 쫓아온 사람이 있을 줄은.”“졸업한 지가 얼마야? 그런데 아직도 이렇게 쫓아다니다니! 날 만나기 위해 남원에서 무성까지 온 건 우연히라도 나랑 마주치기 위해서잖아!”“그건 네가 계속 내 행방을 알아보고 다니며 날 만나고 싶어 했다는 뜻이고.”“하현, 널 어쩌면 좋아?”김방아는 기분이 좋은 듯 계속 입을 열었다.“네가 나한테 사랑에 빠진 건 알지만 난 아니야. 우린 이루어질 수 없어!”“그만 단념해. 더 이상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김방아의 말에 그녀의 친구들은 놀란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그들은 김방아가 젊었을 때는 분명 지금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하현 같은 사람이 감히 무성에까지 쫓아와 김방아를 귀찮게 하다니!그는 당최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는 것인가?자신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김방아는 팔짱을 끼며 도도한 표정으로 하현 앞으로 걸어와 거만하게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하현, 우린 그냥 친구로 지내는 게 어때?”“아니면 남사친 정도?”“하지만 내 남사친들은 모두 돈도 권력도 어마어마한데...”“예를 들어 오늘 여기 시험장에 있는 이서국이라는 사람이 며칠 동안 내 꽁무니를 쫓아다니지 뭐야. 그렇다고 그를 비난할 수도 없잖아.”“대학 동창이니 특별히
김방아는 하현이 계속 자신에 대한 감정을 부정하자 몹시 불쾌한 모양이었다.가난뱅이인 주제에 대범하게 인정도 할 줄 모르니 김방아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지금까지 김방아가 떵떵거리며 잘난 척 다했는데 어떻게 여기서 무너질 수 있단 말인가?그녀의 고귀한 허영심에 생채기가 나서야 될 일인가?김방아는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하현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하현,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많이 신경을 써도 날 쫓아올 수 없어!”“난 용문 무성 지회 제자라고.”“그런데 넌?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 내지 못한 빈털터리일 뿐이잖아!”“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야!”“얘들아, 우리 어서 들어가자!”김방아는 오른손으로 포니테일을 튕기며 친구들을 이끌고 당당하게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하현은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저 김방아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그녀의 이런 모습이 자신감 넘친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이 운이 억세게 없었다고 해야 할지 하현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용문대회에 참가하러 왔는데 미녀 뒷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얼뜨기 취급을 당하다니!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하현은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몸서리치며 얼른 프런트 데스크로 가서 시험장 정보를 확인했다.몇 분 후 하현은 실내 축구장에 도착했다.이곳은 실내 축구장이었지만 지금은 테이블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대충 훑어보니 무려 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고 이론 시험을 동시에 치를 수 있을 만큼 컸다.하현은 수십 대의 카메라들도 발견했다.아마도 부정행위를 감시하려는 장치인 것 같았다.현장에 온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고 하현은 한 바퀴를 돈 후 가장자리에 있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그러나 어이없게도 김방아를 비롯한 그녀의 친구들이 그의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특히 김방아는 하현의 바로 앞자리였다.하현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자리에 앉았다.바로 그때
”시험시간은 2시간이고 지금 현장에는 1000명입니다. 60점 이상이면 합격입니다!”“합격자 중 상위 100명은 높은 순서대로 예선을 통과한 것으로 보고 바로 시 대회로 진출할 수 있습니다!”“시험 볼 때는 귓속말, 핸드폰 금지입니다. 발각될 시 바로 실격입니다!”“시험을 감독하는 사람은 모두 용문 제자들입니다!”“예선 총감독은 용문 무성 지회 부지회장인 구양연입니다.”“여러분이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한다면 바로 고발당하게 됩니다. 부정행위를 고발한 사람에게는 가산점이 주어집니다.”중년 남자의 말이 떨어지자 남녀 10여 명이 나와 수험생들에게 인사를 했다.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무도복을 입은 건장한 체격에 위엄 넘치는 노인이었다.용문 무성 지회 부지회장, 구양연이었다.비록 용문 무성 지회가 그리 크지는 않아 부지회장이라고 해도 그리 높이 평가받는 신분은 아니었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대단한 지위였다.장내의 많은 수험생들은 모두 구양연을 보며 존경 어린 시선을 보냈다.그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면 진정한 용문 제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구양연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장내는 곧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얼른 시험관들이 시험지를 나눠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김방아도 더 이상 하현과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자신의 자리에서 포니테일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사실 그녀에게 있어 이론 시험은 식은 죽 먹기 때문이다.하현도 담담한 표정으로 종이와 펜을 앞에 놓고 조용히 시험을 기다렸다.시험이 진행되자 구양연 일행은 대부분 떠나고 대여섯 명만 남아 시험 감독에 열중했다.이들은 모두 용문 자제들이었다.비록 대다수가 용문 무성 지회 출신이었지만 현장에 있는 수험생들에게는 여전히 위압적인 존재였다.그러나 갑자기 약간의 질투심과 경계 어린 시선들이 하현이 있는 곳으로 쏠렸다.하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서로의 시선이 마주친 후 하현은 눈앞의 사람을 쳐다보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하현이
”조용! 시험 시작!”시험지가 곧 배포되었고 그 안에는 100개의 문항이 있었다.비록 일부는 사지선다, 일부는 단답형 문제, 일부는 빈칸 채우기였지만 주제들은 꽤 깊이가 있었다.만약 무학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런 시험지를 보고 바로 당황할 것이다.김방아 일행은 시험지를 보고 다소 당황한 듯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하현은 시험지를 한 번 휙 훑어보고 아무런 감정의 기복 없이 빠르게 문제를 풀어 갔다.시험장을 가득 메운 감독관들은 한결같이 여유로운 표정들이었다.시험장에는 CCTV도 많이 있었고 서로 부정행위를 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시험지 난이도가 높기 때문에 부정행위가 쓸모없었던 것이다.왜냐하면 아무도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그 문제를 알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런 분위기가 감지되자 시험관들은 두어 번 순찰을 돈 후 시험지를 하나둘씩 집어 들기 시작했다.그들은 자신들이라면 몇 점쯤 받을 수 있는지 궁금했던 터였다.시간은 어느덧 30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원래는 두 시간 동안 치러지는 시험이었는데 하현은 30분 만에 문제를 다 풀었다.진주희가 준 자료들이 거의 모든 범위를 다 커버했을 뿐만 아니라 무학의 진정한 지식과 관련된 주제들을 묻는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무도에서 몇 년을 지낸 사람들은 만점도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고 합격에는 그다지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하현에게 이런 지식은 완전히 기초 중의 기초라고 할 수 있었다.그를 혼란스럽게 할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하현은 문제를 풀고 나머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까워서 한 번 쭉 훑어본 후 바로 시험지를 제출했다.모두들 힘들게 고전하고 있는 시험을 30분 만에 끝내다니!사람들은 하현을 보고 냉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김방아는 반쯤 푼 자신의 시험지를 보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현에게 경멸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그녀가 보기에 하현은 분명히 자신의 뒤꽁무니를 쫓아 이곳에 온 게 틀림
시험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까지는 한 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이론시험은 모두 OMR로 처리되기 때문에 성적도 빨리 나왔다.모두들 현장에서 한 시간 정도 기다렸고 11시 반에 성적이 나왔다.단상으로 돌아온 이서국과 몇몇 시험관들이 시험지를 들고 사람들 앞에서 나눠주기 시작했다.현장에 있던 이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얼굴들이었다.김방아 일행도 긴장한 얼굴로 사람들 속에 서 있었다.그러나 하현만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 그대로였다.앞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사오십 대 성적을 거두었다.이번 시험이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였다.시험장 전체는 순식간에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로 가득 찼다.“황수찬 79점 랭킹 100위!”비록 점수가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시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진대겸, 82점, 89위!”“...”시험장에 좋은 성적을 얻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자 환호성이 들려 겨우 분위기는 조금 달아올랐다.“김방아, 95점 최다 득점 1위!”최다 득점자가 나오자 시험장은 술렁거렸다.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며 김방아에게 시선을 돌렸다.김방아의 예쁜 얼굴이 보자 사람들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김방아에게 감탄에 마지않는 시선을 던졌다.김방아는 거만하게 자신의 시험지를 받아든 후 하현을 힐끔 쳐다보았다.그녀의 눈에는 경멸하는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로써 자신과 하현은 완전히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임이 판명 난 것이다.시험관들은 시험지를 모두 다 나눠주었고 시험을 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시험지를 받았는데 하현만이 오로지 빈손이었다.그는 제일 처음으로 시험지를 제출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도 집중되어 있었다.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김방아 일행들은 비꼬듯 그에게 눈을 흘겼다.그들이 뭐라고 무시하는 언사를 날리기도 전에 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어섰다.“시험관님, 저는 아직 점수를 받지 못했습니다.”점수를 받지 못했다고?모든
”여수혁?”하현은 여음채를 쳐다보며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그가 이 병원 대주주인 동시에 당신의 뒷배라고?”“그래! 알고 나니 이제야 겁이 나?”“무서운 줄 알면 이제 무릎 꿇고 내 신발 밑창을 핥아!”“그리고 다리를 부러뜨리고 이십억을 배상해! 그러면 여수혁도 당신한테 살길을 열어줄지도 모르지!”“그렇지 않으면 당신 오늘 재수 없을 줄 알아!”여음채는 경멸하는 기색을 한껏 드러내었다.하현이 남양 무맹과 여수혁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전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고 여겼던 것이 분명했다.강옥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현에게 말했다.“하현, 여수혁은 남양 무맹주가 총애하는 제자야.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페낭 무맹의 부문주라서 건드리기가 쉽지 않아.”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어릿광대일 뿐이야.”“뭐? 어릿광대?”하현의 말에 여음채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그런 용기를 줬는지 모르겠군! 흥!”“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이 사람은 페낭 무맹의 부맹주 아들이야!”“이 사람은 페낭 무맹 장로가 아주 아끼는 제자라구!”“게다가 남양 무맹이 페낭 무맹에 파견한 제자라고!”“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딜 가나 거칠 것이 없는 사람들이야. 그뿐만 아니라 실력도 비할 데 없어!”화려한 옷차림의 남녀 예닐곱 명이 걸어와 소리치며 하현을 향해 멸시하는 눈빛을 보이며 비아냥거렸다.“야, 너 오늘 큰일 났어! 아주 재수 옴 붙은 날이라고! 우리가 당신 목숨뿐만 아니라 가죽까지 싹 벗겨버릴 거거든! 하하하!”이 사람들은 하현이 무슨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원하는 대로 칼질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험한 말을 마구 내뱉었다.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들은 더욱 경멸하는 눈초리로 하현을 노려보았다.하현 같은 외지인이 감히 그들 같은 거물들한테 입을 놀리다니 정말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망나니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하현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 광경을 보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외지인 관광객 주제에 너무 오만하고 포악하지 않는가?진 반장이 이미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나려는데 여전히 권세를 믿고 남을 괴롭히려고 하다니, 이건 지나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진 반장은 얼굴을 가리고 일어나 하현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도대체 이놈의 정체가 뭔지 알 길이 없어 진 반장은 순간 분노했지만 애써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젊은이, 당신 너무 심한 거 아니야?”“퍽!”하현은 손바닥을 휘둘러 또다시 뺨을 때리며 냉담하게 말했다.“그렇게 대단하게 나한테 큰소리쳤다는 건 잘못을 하면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도리도 잘 안다는 뜻 아니셨나?”“이렇게 간단한 이치도 몰라?”진 반장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았다.생각 같아서는 하현을 죽이고 싶었지만 결국 그는 소리 없이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미안해! 잘못했어!”그는 하현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구봉이 전화를 건 정종화 총경이 두려운 것이 분명했다.감히 이런 상황에서 어찌 그가 하현을 상대로 싸울 수 있겠는가?상대방의 사과를 들은 후에야 하현은 앞으로 나와 그의 오른쪽 얼굴을 툭툭 건드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꺼져!”진 반장은 그의 무리들을 데리고 쏜살같이 꽁무니를 뺐다.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들은 하현이 진 반장을 내쫓을 만큼 강력한 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진 반장 일행이 꽁무니를 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진 반장의 얼굴까지 때렸다.“내가 당신을 얕잡아 본 것 같군. 당신이 이렇게 큰 뒷배를 뒀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진 반장이 황급히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여음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냉소를 흘렸다.“그렇지만 똑똑히 들어. 당신 뒤에 얼마나 큰 거물이 있든 간에!”“페낭 병원의 뒷배가 훨씬 강할 거야!”“날 건드려?! 흥! 두고 봐! 당신은 죽
선두에 선 남자를 보자 여음채는 안색이 환해졌다.그리고 나서 얼른 다정하게 남자의 팔짱을 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진 반장님, 마침 잘 오셨어요. 바로 저 자식이에요. 저 자식은 우리가 의료 윤리를 중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때린다고 호도하고 있어요.”“게다가 내 아랫배까지 걷어찼다구요!”“저놈을 반드시 감옥에 가둬 주세요. 그 안에서 제대로 반성할 수 있게요.”여음채는 하현을 가리키며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다.부일민 일행도 모두 큰소리로 맞장구를 치며 하현이 억지를 부린다고 한마디씩 보탰다.“뭐? 감히 병원에서 원장님을 때려요?”“대낮에 그런 짓을 한단 말이에요?”“법도 뭣도 없답니까?”진 형사는 하현의 얼굴을 주시했고 곧바로 그가 남양인이 아니란 걸 눈치챘다.그러자 얼굴이 싸늘하게 바뀌며 비아냥거렸다.“이봐, 어서 저놈을 데려가! 모질게 심문해! 지독하게 조사해!”“감히 반항한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법으로 다스려!”하현은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진 형사를 쳐다보았다.“당신은 어쨌든 형사반 반장이면 경찰서를 대표해서 일을 해야죠. 무슨 일이 생겼으면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일을 어떻게 하든 당신 같은 사람이 날 가르칠 건 아니지!”“당신이 먼저 사람을 치고 법을 어겼어. 그러니 법 집행자로서 당신을 연행하는 건 당연한 거야!”“물론 당신도 저항하는 길을 택할 수 있어!”“하지만 저항한 결과는 내가 당신을 한 방에 죽이는 거야!”진 반장은 언성을 높였고 눈을 부릅뜨고 하현의 얼굴을 툭툭 건드리려고 손을 내밀었다.하현은 손을 들어 진 반장의 오른손을 막은 뒤 담담하게 하구봉을 쳐다보며 말했다.“전화 걸어.”하구봉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곧바로 하현이 말하는 뜻을 알아차리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전화기 건너편에 냉랭한 목소리가 전해오자 하구봉은 핸드폰을 진 반장에게 건네주었다.“당신의 직속 상사가 전화를 받아
하현은 여음채의 말을 듣고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페낭은 정말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곳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이렇게 공공연하게 정경유착이 만연할 줄이야!하현의 표정을 살피던 여음채는 순간 하현이 겁을 먹은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자 여음채는 다시 의기양양한 기운을 내뿜으며 이를 악물고 하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왜? 무서워?”“이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어?”“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봐줄 수도 있어. 아직 늦지 않았다구.”“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기다리는 건 억세게 불행한 일들뿐일 거야!”말을 하는 동안 여음채는 부일민에게 손짓을 하며 다른 의료진과 경호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하현 일행을 겹겹이 에워쌌다.기세등등하게 하현 일행을 노려보고 있는 그들 무리는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사나운 모습이었다.이 광경을 본 여음채는 더욱 득의만만해져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이봐, 이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 어서 사과하고 내 신발 밑창을 개처럼 깨끗이 핥아!”“그렇지 않으면 당장 오늘 밤부터 감옥에서 썩어야 할 거야!”강옥연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떠올랐다.하구봉은 콧방귀를 뀌며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했다.주위의 구경꾼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현에게 다가올 불운을 생각하며 탄식했다.아무리 거세게 싸운다고 해도 경찰관들 앞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설마 하현 일행은 법이라도 어기려는 건가?하현은 냉담한 얼굴로 여음채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평온한 표정이 되었다.“내가 감옥에 갈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의료 윤리를 중시하지 않는 건 그렇다 쳐. 그런데 어떻게 이익만 챙기고 인명을 돌보지 않는 거야?”“멀쩡한 병원이 사기꾼 소굴이 되어 관광객을 속이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군.”“당신들 오늘 잘 만났어. 당신들은 이제 좋은 날 끝났어.”“이 병원, 망하게 해 줄게.”하현의 말을 들은 부일민과 예쁘장한 간호사들은 모두 코웃음을 쳤다.그녀들은 허
잠시 후 넋이 나간 듯 멍하던 여음채는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배를 움켜쥐고 일어나 하현을 노려보며 말했다.“개자식! 감히 날 걷어차?”“내 엄마가 누군지 알아?”“당신은 누구야? 의료 윤리를 저버린 원장 아니야?”하현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때린 건 당신이야.”“뭐?”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현의 목소리와 행동에 여음채는 화가 치밀어 올라 하현을 가리키며 호통쳤다.“모두 저놈을 죽여!”“일이 터지면 내가 다 수습할 거야!”그녀의 말에 수십 명의 건장한 경호원들이 사납게 웃으며 하현을 에워쌌다.강옥연은 이런 막무가내 인사를 본 적이 없었다.병원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막무가내라니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결국 강옥연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조심해!”그녀의 말을 들은 부일민은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우리 원장님한테 미움을 산 사람은 살아남지 못해!”예쁘장한 간호사들은 앳된 얼굴로 눈을 흘기며 거들었다.“흥! 조심해 봤자 소용없어! 죽어야 해!”주위를 둘러보던 환자와 의료진들도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하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여음채의 인품이 별로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녀의 영향력과 인맥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이 페낭 병원에서 누가 감히 그녀한테 대들 수 있겠는가?아무 물정 모르는 외지에서 온 관광객이 하필 여음채를 건드리다니!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이때 선두에 선 경호원은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하현에게 다가왔다.그는 고개를 옆으로 까딱까딱 꺾으며 광분한 사냥개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이놈아! 감히 여기서 소란을 피워? 여기가 어디라고? 눈을 어디다 둔 거야?”“퍽!”“앗!”경호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현은 듣기 귀찮다는 듯이 손바닥을 휘둘러 그를 내동댕이쳤다.맨 앞에 있던 경호원은 눈앞이 캄캄해졌고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기절하고 말았다.기절했어?!이 광경을 보고 놀
앞뒤 사리를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여음채의 모습에 강옥연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뭐가 모욕이에요?”“당신들은 환자를 구하고 비용을 청구해야 하는데 환자를 구하기는커녕 무슨 스타가 나타났다고 부리나케 쫓아다니지 않았냐구요?!”“응급실에 30분씩이나 방치해 놓고 이제 와서 보증금은 돌려주지 못하겠다니요?”“당신들 같은 병원이 무슨 의료 윤리 의식이 있겠어요?”“병원이 아니라 사기 소굴이에요!”강옥연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식약청에 고소할 거예요!”하현은 침착한 눈빛으로 여음채의 표정을 살피다가 하구봉에게 원가령의 안전을 보호하라는 손짓을 했다.아마도 강옥연의 강경함에 여음채는 일을 처리하기가 좀 곤란해졌다고 느꼈을 것이다.여음채는 눈빛이 서늘해지더니 달려오는 수십 명의 경비원들에게 하현 일행을 포위하라고 손짓하며 지시했다.이어 그녀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긴 다리를 뻗으며 다가와 말했다.“우리 페낭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고 잘못을 하면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해.”“무릎을 꿇고 잘못을 인정해. 그리고 내 신발 밑창을 깨끗이 핥아. 그뿐만 아니라 우리 부일민 의사에게 십억을 배상해. 그러면 이 일은 이대로 덮어 두겠어!”“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지 마.”“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당신들은 칠흑 같은 남양 감옥에 갇히게 될 거야!”“1년 반 동안 안에서 통곡만 하다가 세월을 보내게 될 거라고!”분명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여음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주 능수능란했다.어떤 외국인이라도 감히 페낭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는 모두 이런 꼴을 당했을 것이다.부일민 일행은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린 채 고소하다는 듯 히죽거렸다.큰소리 뻥뻥 치더니 하현이 아주 제대로 걸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페낭 거물도 아닌데 감히 페낭 병원에 와서 행패를 부려?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꺼운지 모르는 거지!강옥연은 한기를 가득 품은 목소리로 소리쳤다.“당신들은 아주 법도 뭣도
응급실에 있던 원가령은 아직도 술에 취한 듯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원래 같았으면 벌써 위를 씻고 상처를 치료해야 했었지만 의료진은 그녀를 병상에 눕혀만 놓고 방치한 것이다.하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뻗어 원가령의 위를 몇 번 누른 다음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하구봉에게 쓰레기통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원가령은 술을 모두 토한 뒤에야 비로소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이 되었다.강옥연에게 응급실의 소독약으로 간단하게 원가령의 상처 부위만 소독한 뒤 휠체어를 구해 원가령을 실었다.그리고 하현 일행은 떠날 준비를 했다.이때 문밖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남양 말로 뭔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분명 경비원들이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하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하구봉에게 눈빛을 보냈고 하구봉은 지체 없이 한 걸음 내디디며 한 발로 세게 문을 걷어찼다.‘퍽'하는 소리와 함께 응급실 문이 벌컥 열렸다.예닐곱 명의 건장한 경비원이 뛰어들려다가 튕겨나가는 부일민과 부딪혀 난장판이 되었다.비슷한 시각 복도 끝 쪽에서는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어딘가 낯이 익어 보이는 여자가 맨 앞에 서 있었다.그녀는 몸매가 유려했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으며 걸어왔다.앳된 간호사 몇 명은 이 여자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 중년 여자는 페낭 병원에서 제일 영향력이 센 원장, 여음채였기 때문이다.여음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우리 병원에서 소란을 피워? 눈도 없어?”“원장님, 외지 사람들이 와서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우리가 의술의 도리를 저버렸다고 하면서 사람을 때리고 응급실 문을 발로 차고 있어요.”“우리는 모두 들어가서 환자를 치료하려고 하는데 환자를 마음대로 데려가려고 합니다!”“이건 아주 우릴 무시하는 거죠!”넘어져 있던 부일민은 여음채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하현 일행의 행동을 가리키며 고자질
부일민은 더욱 냉소적으로 말했다.“하지만 우리 앞에서 귀에 거슬리는 그런 말은 해도 되지만 이것만은 알고 가세요. 한번 지불한 돈은 환불되지 않아요.”“사람이야 얼마든 데려가도 되지만 보증금 천만 원은 돌려주지 않습니다!”“그럼 어서 물러가세요!”“여기서 방해하지 말구요!”의사의 오만방자한 말에 강옥연은 얼굴이 싸늘해졌다.“살리기는커녕 환불도 안 된다구요?!”“내가 당신들 고소할 거예요!”“고소?!”부일민은 여간호사 몇 명과 눈을 마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어떤 사람은 손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강옥연이 고소라는 말을 꺼내도 그녀들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게 분명했다.어차피 페낭 병원은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고소? 그래 하세요!”부일민은 눈썹을 치켜세운 뒤 벽에 붙은 전화번호를 가리켰다.“국민신문고, 식약처, 경찰서, 등등, 전화번호들이 여기 다 있으니까!”“아무데나 전화해서 아무나 불러 보세요!”“사람을 불러서 날 고소해 보세요! 그럼 내가 당신들을 할아버지라고 부를게요!”“대하 촌놈들이 감히 우리 남양 땅에 와서 거드름을 피우며 위세를 부리고 있어?! 흥!”“당신들이 전화를 해 봤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부일민은 한껏 코웃음을 쳤다.그들은 이미 관광객들을 등쳐먹는 데 아주 익숙한 것 같았다.관광객이 신고해도 결국 팔이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당신들 제정신이에요!”강옥연은 눈을 부라렸다.이런 몰상식한 사람들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이때 하현이 앞으로 나와 강옥연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담담하게 말했다.“강옥연, 어쨌든 당신은 용문 사람인데 어떻게 기본적인 도리도 몰라?”“뭐라고?”강옥연이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도무지 하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어떤 사람들은 말로 하면 못 알아들어. 그냥 얼굴을 두들겨 맞아야 알아듣지.”
황천화 일행을 해결하고 하현은 강옥연에게 전화를 한 뒤 택시를 타고 페낭 병원으로 향했다.페낭 병원은 사립 병원으로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인테리어가 호화로웠다.거리마다 홍보 간판이 걸려 있는 병원다웠다.다만 의술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했고 보감 그룹 병원에 속하며 페낭 현지에서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았다.보통은 관광객을 속이고 사기를 쳐서 이익을 남기는 병원이었다.그리고 해외에서 온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사기를 당해도 신고할 길이 없어 결국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었다.하현은 오는 길에 이런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강옥연도 현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병원에 가게 된 것을 그녀의 잘못만이라고 탓할 수가 없었다.하현과 하구봉은 곧바로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 복도에서 강옥연을 찾았다.“하현.”하현이 나타난 것을 보고 강옥연은 급히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하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응급실에 들어가긴 했지만...”강옥연이 말끝을 흐렸다.하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응급실 문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대여섯 명의 환자가 병상에 누워 있었고 그중 두세 명은 외상을 입고 낮은 소리로 신음하고 있었다.그러나 응급실 안에는 의료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내가 원가령을 데리고 왔을 때 의료진은 어떤 유명 연예인이 다쳐서 나간다고 했어.”“이곳의 한 인플루언서 스타가 영화를 찍다가 손가락을 다쳐서 급하게 응급실 의료진이 갔어!”“곧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보증금 천만 원을 먼저 내라고 했어.”“그래서 보증금을 내고 30분째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도 아직 아무도 안 와...”강옥연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하현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보감 그룹 산하 병원의 평판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그가 다른 의료진을 찾아보려고 하자 강옥연이 그를 멈춰 세우며 말했다.“하현, 내가 가서 재촉해 볼게.”강옥연은 혼자서 달려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