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남자는 눈가에 경련을 일으켰다.만약 예전에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이렇게 호통쳤다면 그들은 반드시 상대를 해치웠을 것이다.그러나 이제 그들에게는 조금의 오기도 용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다만 목숨보다 소중한 마지막 자존심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그래서 그들은 더욱 난감했다.무릎 꿇고 투항하는 게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이란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이 일로 그들은 평생 고개도 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무성 사람들 모두에게 영원히 비웃음을 살 것이다.심지어 인도인의 체면까지 구기게 된다.샤르마 수라즈는 눈꺼풀이 파들파들 떨렸다.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하현은 쓸데없는 말 따위는 집어치우고 오른손을 힘차게 휘두르며 담담하게 말했다.“해치워!”한여침이 고개를 까딱하자 순식간에 그의 뒤편에서 수없이 많은 도끼가 동시에 날을 세웠다.산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인도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쳤다.“개자식! 어서 맞서라!”도끼파들과 인도인들이 뒤엉키는 걸 보며 하현은 신선처럼 여유로운 자태로 찻잔을 들었다.까까머리 남자는 격노하며 손에 든 칼을 휘둘렀고 하현이 있는 곳을 향해 필사적으로 돌진했다.흰자위가 가득한 남자의 눈은 이미 보이는 게 없는 듯했다.남자의 움직임도 맹렬하고 빨랐으나 아무리 빨라도 하현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그가 들고 있던 칼이 하현의 머리 위에 떨어지기도 전에 하현은 이미 손바닥을 휘둘러 그를 제압했다.‘퍽'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다가왔고 그의 커다란 몸집은 순식간에 뒤집혔다.그의 코는 그대로 주저앉아 피범벅이 되었고 칼을 쥐고 있던 손에는 말할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그는 땅바닥에 쓰러진 채 끊임없이 울부짖었고 온몸에 쉴 새 없이 경련이 일어나 도저히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도도한 인도 여자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하현을 얕잡아보던 도도함은 온데간데없
”하현!”“사람들 괴롭히는 짓 그만해!”몰려오는 사람들을 향해 샤르마 수라즈는 호통을 쳤다.“이래 봬도 인도상회 총지배인이고 무성 전체에서 으뜸가는 거물이야.”“당신 같은 사람이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구!”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일단 무릎부터 꿇고 말해!”“무릎 꿇고 말하라고?”샤르마 수라즈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하현, 당신이 뭐라도 된다고 생각해?”“무성 전체에서 샤르마 수라즈한테 무릎 꿇으라고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어!”“자신이 용 씨 가문 사람이라도 된다고 생각해? 어?”“똑똑히 들어. 당신이 용 씨 가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한테 이런 짓은 할 수 없어!”샤르마 수라즈는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다.비록 하현이 젊고 세력도 강한 것 같지만 샤르마 수라즈는 인도의 두 번째 계급의 성 씨였다.인도상회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는 인물이었다.그는 요가 기술에 있어 고수로도 군림하는 자였다.병왕의 경지에 거의 진입한 실력이다!자신의 실력이면 일당백으로는 안 되겠지만 자신의 아들을 이끌고 혈로를 뚫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샤르마 수라즈의 자신감은 아직 수그러들지 않았다.어쨌든 그는 인도의 3대 요승 중 하나인 브라흐마 커크의 제자였다.다만 지금까지는 겸손을 미덕의 소양으로 여겨 떠벌리지 않았을 뿐이다.샤르마 수라즈는 원래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하현이 이렇게 자신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려고 하고 있으니 그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개자식! 찢어 죽일 놈! 고수가 무엇인지 오늘 내가 단단히 네놈에게 알려주마!”말을 하면서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두 손을 툭툭 쳤다.“퍽!”하현은 냉소를 머금은 채 걸음을 옮겼고 순식간에 샤르마 수라즈의 얼굴에 손바닥을 후려쳤다.“용상반야권!”샤르마 수라즈는 온몸이 흔들리고 몸 안에 있던 힘이 폭발하면서 윙윙 바람 소리가 났다.이것은 인도 요가술의 일종으로 보는 것
하현의 손바닥 앞에서 한때 고귀했던 샤르마 수라즈는 반격도 하지 못하고 모두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현은 계속 샤르마 수라즈의 뺨을 때렸고 그의 몰골은 점점 더 피범벅으로 뭉개지기 시작했다.인도인들은 이 모습을 보고 그야말로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샤르마 커는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아버지의 실력을 잘 모르겠지만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아버지는 인도 3대 요승 중 하나인 브라흐마 커크의 제자일 뿐만 아니라 가장 어렵다는 용상반야권도 수련했다.아버지가 1 대 10으로 사람들을 쉽게 날려 버리는 모습을 직접 본 적도 있다.그런데 왜? 이렇게 강한 아버지가 하현 앞에서는 왜 아무것도 못하는 거지?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나?샤르마 커는 자신도 모르게 뺨을 때렸다.이건 분명 꿈일 것이다.현실일 리가 없다.자신의 뺨을 때려서라도 샤르마 커는 확인하고 싶었다.“퍽!”하현의 마지막 한 방에 샤르마 수라즈는 피범벅이 된 채 날아올랐다.샤르마 수라즈는 땅바닥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다 핏덩어리를 뿜어내고 일어서려고 애썼다.하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에게 다가가 손바닥을 치켜들었다.“풀썩!”샤르마 수라즈는 놀라서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인도인의 고귀한 자존심, 하늘을 찌를 듯했던 고수로서의 자부심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그는 정말 무서웠다!하현은 이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샤르마 커와 차현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당신들은... 그냥 가만히 서 있을 거야?”샤르마 커와 차현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순간 누구랄 것도 없이 풀썩 무릎을 꿇었다.이를 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모두들 얼빠진 사람처럼 초점을 잃었다.도저히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하현은 그들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가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그러나 떠나기 전 그는 샤르마 수라즈 일행에게 말했다.“모두들, 병원 입구에
하현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사람들이 은아를 다치게 해서 사과의 뜻으로 밤낮으로 3일 동안 무릎 꿇으라고 한 것뿐이에요.”“아, 그래?”최희정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내가 원한 해명은 이런 게 아니었어. 그들이 배상할 건 배상하고 봐줄 건 봐주면 되는 거지!”“이렇게 무릎을 꿇게 만들면 뭐해?”“무엇보다 이런 놈들은 나중에 앙심을 품고 사사로이 원한을 갚으려 덤빌 놈들이라고!”“괜히 무릎 꿇게 해서 망신을 주고 그래?!”“이런 상황에서는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거야.”“그 대신 오늘 일로 인해 앞으로 두고두고 우리한테 앙갚음하려고 할 거라고!”“그냥 그들한테 몇억 배상하라고 해. 무릎 꿇지 말고!”최희정은 분명 밖에서 한참 동안 그들을 관찰한 것 같았다.특히 샤르마 수라즈, 샤르마 커가 밤새 꼿꼿이 무릎 꿇고 있는 것을 보았고 적잖이 당황했을 터였다.“그들이 그렇게 무서워요?”하현은 차를 한 잔 따라 마시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몇몇 인도인들은 자신들의 배경과 힘을 믿고 우리 대하 땅에서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저렇게 밖에서 3일 동안 무릎 꿇게 하지 않으면 저들이 어찌 교훈을 얻을 수 있겠어요?”“앙갚음이요?”“어찌 되었든 저들은 앙갚음을 할 거예요.”“하지만 우리가 강하다면 그들은 원한을 마음속에 간직할 뿐 겉으로는 드러내지 못할 거예요.”“몇억? 그 정도 돈은 없어도 살아요.”“하지만 무성의 모든 사람들은 알아야 할 거예요. 감히 설은아를 건드리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을요!”하현은 냉담한 표정으로 샤르마 커 일행들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한 이유를 설명했다.강력한 경고는 벌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이렇게 해야만 무성 상류층 모두가 설은아를 쉽게 보지 못할 거라는 걸 하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그들에게 배상하라고 하면 절대로 이런 교훈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최희정은 마뜩잖은 얼굴로 말했다.“그들을 무릎
돈만 밝히는 최희정의 모습을 하현은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는 병원을 떠나 택시를 타고 무성체육관으로 향했다.오늘 그가 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용문대회에 참가하는 일이었다.원래 그는 이 대회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만진해의 간곡한 부탁을 하현은 끝끝내 거절할 수가 없었다.아침 일찍부터 진주희는 하현에게 이미 많은 자료를 보냈다.자료는 용문대회에 관한 기본적인 절차에 관한 것이었다.용문대회 절차는 간단했다.용문 사람, 용문의 각 분파, 용 씨 가문 사람이면 누구라도 예선에 참가할 수 있었다.이른바 예선전은 전국의 시에서 치러진다.첫 번째 절차는 이론 시험을 치른 후 100명을 선발하여 시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다.두 번째 절차는 시 대회에서 10명을 선발하여 도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다.세 번째 절차는 도 대회에서 한 명을 선발해 진짜 용문대회에 출전하는 것이다.그리고 진정한 용문대회의 일인자는 용문의 일인자가 될 뿐만 아니라 용문주가 될 기회를 얻게 된다.일단 용문주 자리에 오르면 대하의 절대적인 지존이 되는 것이다.말 한마디로 수많은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명예와 권세를 누리게 된다.하현이 다른 자료를 보니 무학의 성지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날고 긴다는 사람들은 일단 대부분 참가 신청을 하는 것 같았다.최종 고사장에 정원이 몇 명이든 일단 지원 열기는 후끈했다.자료를 쭉 훑어보는 하현에게 진주희는 무학의 상식도 세심하게 준비해 주었다.하현은 몇 번을 꼼꼼히 살펴보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아마 사람들은 용문대회에 이론 시험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하현이 자료를 다 읽었을 때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통화 버튼을 누르자 맞은편에서 만진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현, 오늘 시험인 거 알지?!”“꼭 승리할 거라 믿네!”“참, 누군가 자네를 방해할 수도 있으니 내가 특별히 자네의 신상정보를 좀 바꿔 놓았네.”“지금 자료에는 자네 이름
하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격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회에 참가하기로 약속했으니 반드시 방법을 강구해서 어르신의 뜻을 이루겠습니다.“그런데 며칠 동안 만천우에게 신세를 좀 져야 할 것 같습니다.”“예를 들어 인민병원 입구에 무릎 꿇고 있는 사람들을 좀 지켜봐 달라든가 하는 일 말이죠.”“사흘 밤낮을 무릎 꿇고 있지 않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하현은 만진해가 이 일을 언급할 것 같아서 먼저 선수를 쳤다.전화기 건너편에 있던 만진해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만진해는 원래 이 일에 관해서 뭐라고 할 생각이었다.샤르마 부자는 아무리 그래도 인도인이자 브라흐마 커크의 사람들이었다.잘못하다가 브라흐마 커크의 미움까지 살까 봐 조금은 걱정스럽던 참이었다.하지만 하현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듣고 만진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다.만진해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자네가 이미 그런 결정을 했다면 나도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네.”“다만 브라흐마 커크는 결코 쉽지 않은 상대임을 꼭 명심하길 바라네.”“인도인을 상대할 때는 신중해야 하네...”하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르신, 그게 아닙니다!”“제가 인도인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인도인이 절 미워합니다.”“저들이 3일 동안 충분히 무릎을 꿇고 사과한다면 저도 여기서 끝낼 것입니다.”“그러나 저들이 계속해서 절 귀찮게 한다면...”“죄송하지만 그건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저들을 밟아 죽일 수밖에요.”만진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자네 뜻 알았네. 부디 잘 해결되길 바라네.”“아, 참. 그리고 용천오를 조심해야 하네.”“용 씨 가문의 세 자제들과 인도인은 사이가 아주 가까워.”“인도인을 건드린다는 건 그들을 건드린다는 거나 마찬가지야.”전화를 끊은 후 하현은 먼 곳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만진해는 주의를 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신분으로
하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뒤를 돌아보니 예쁜 여자들 몇 명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제일 앞에 서 있는 여자는 머리를 하나로 단단히 묶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수수한 차림이었지만 절로 눈길을 끄는 세련한 생김새였다.하현은 이 여자가 왠지 낯이 많이 익은 것 같았다.그러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저기...”“어머? 나 몰라?”“하현, 오랜만이야. 나 못 알아보겠어?”포니테일을 한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나야. 김방아.”“김방아?”하현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아, 이제 생각났어. 김방아였구나...”하현은 그제야 그녀가 생각이 났다.대학 때 친구였다.게다가 학교의 꽃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여자였다.역시 그녀의 가문은 듣던 대로였다.무학의 가문에서 태어나 졸업 후 바로 무성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친구들 중 아무도 그녀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하현이 그녀를 알게 된 것은 교외 인턴을 참가했을 때였다.김방아가 실수로 인턴십 회사의 수천만 원 상당의 장비를 망가뜨렸기 때문이었다.게다가 그 실수로 인해 하현이 다치게 되었다.그러나 하현은 좋은 마음으로 김방아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았다.그런데 그 결과 뜻밖에도 김방아는 하현이 인턴 기업의 장비를 망가뜨렸다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녔다.그때 하현은 돈이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다른 평범한 학생들이었다면 아마도 그런 김방아의 행동에 많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이 일이 있은 후 하현은 김방아가 얼굴은 예쁘지만 심성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어차피 하현도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른 것이다.그런데 몇 년 만에 이렇게 무성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하현은 별생각 없이 예의상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오랜만이야.”“누가 이렇게 예쁜가 했네.”“설마? 아직도 남자 친구가 있나 없나 염탐하는 거야?”김방아는 일
올라가지도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고?하현은 어이가 없었다.자신이 용문대회에 온 것은 김방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김방아는 하현의 설명 따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탄식하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하현, 사실 난 네 마음 이해해.”“대학 다닐 때 남자들이 나한테 미련이 남아서 기숙사 뒤 운동장을 뛰어다녔던 거 다 나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잖아!”“세월이 지났는데도 당신은 참 여전하네!”김방아는 포니테일을 새침하게 흔들며 잘난 척했다.“솔직히 말해서 난 그런 거 별로 안 믿었거든.”“전교에서 제일 예쁘고 인기가 많았지만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미련을 못 버리고 쫓아온 사람이 있을 줄은.”“졸업한 지가 얼마야? 그런데 아직도 이렇게 쫓아다니다니! 날 만나기 위해 남원에서 무성까지 온 건 우연히라도 나랑 마주치기 위해서잖아!”“그건 네가 계속 내 행방을 알아보고 다니며 날 만나고 싶어 했다는 뜻이고.”“하현, 널 어쩌면 좋아?”김방아는 기분이 좋은 듯 계속 입을 열었다.“네가 나한테 사랑에 빠진 건 알지만 난 아니야. 우린 이루어질 수 없어!”“그만 단념해. 더 이상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김방아의 말에 그녀의 친구들은 놀란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그들은 김방아가 젊었을 때는 분명 지금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하현 같은 사람이 감히 무성에까지 쫓아와 김방아를 귀찮게 하다니!그는 당최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는 것인가?자신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김방아는 팔짱을 끼며 도도한 표정으로 하현 앞으로 걸어와 거만하게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하현, 우린 그냥 친구로 지내는 게 어때?”“아니면 남사친 정도?”“하지만 내 남사친들은 모두 돈도 권력도 어마어마한데...”“예를 들어 오늘 여기 시험장에 있는 이서국이라는 사람이 며칠 동안 내 꽁무니를 쫓아다니지 뭐야. 그렇다고 그를 비난할 수도 없잖아.”“대학 동창이니 특별히
”좋아, 당신이 그렇게 잘난 척을 하니 한 명이라도 어디 해고해 봐!”우민은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비아냥이 가득한 얼굴로 하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자! 어서 해 보라니까!”“퍽!”바로 그때 은행 로비의 문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차여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곧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남녀 열 명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양복 차림이었는데 그냥 보기에도 부티가 좔좔 흘렀다.그는 바로 금정은행 은행장, 은둔가 나 씨 가문 나천우였다.나천우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우민은과 이국흥은 모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려 굽신거렸다.“행장님!”“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우민은과 이국흥은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나천우 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환한 미소를 보였다.그런데 평소에는 친근하게 그들을 대했던 나천우가 오늘 이렇게 차가운 얼굴로 들이닥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나천우는 그들에겐 눈길도 돌리지 않고 하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하현의 손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하현,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이 말을 듣고 장내의 분위기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모두 어안이 벙벙해지다 못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곳곳에서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잠시 후 예쁘장한 여직원들이 자신의 뺨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잘못 본 것도 아니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연스럽게 하현에게 쏠렸다.몇몇 여자 고객들도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가 않는지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버렸다.우민은은 마치 사지가 마비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국흥은 더했다.사지가 그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 쉼 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이게 무슨 상황인가?그들은 하현
이국흥은 염치도 체면도 안중에 없는 사람 같았다.그는 없던 일을 있었던 일처럼 꾸몄다.그의 목적은 단 하나, 우민은이 하현을 혼내 주길 바랐던 것이다.이때 설은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부행장님, 그게 아닙니다...”우민은은 이국흥에게 힘을 실어 주러 온 상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설은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감히 우리 은행에서 사람을 때려요?”“간이 배밖에 나왔어요?”“지금부터 당신은 우리 은행 블랙리스트에 오를 거예요!”“이봐! 어서 관청에 신고해!”그녀의 카랑카랑한 말투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그러자 설은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분명 그녀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될 줄은 몰랐다.설은아가 이끄는 회사의 자금줄이 빠듯한 건 사실이었다.그런데 결국 이렇게 완전히 파산하게 되었다.자신이 아홉 번째 집안을 맡은지 얼마나 되었는가?이렇게 빨리 파산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훗날 대구 정 씨 가문의 수장이 되겠다는 것인가?그야말로 허황된 꿈이었다!“하하하! 이게 바로 당신의 최후야!”“이제 알겠어?”이국흥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개자식! 이 개새끼야! 너 방금 정말 미친놈처럼 날 치더라? 정말 대단했지, 안 그래?”“자, 다시 한번 더 해 보시지?!”“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디 한번 보자고!”“퍽!”하현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그의 요구에 답하며 앞으로 걸어가다가 또 한 번 손바닥을 휘둘렀다.이국흥은 하현이 감히 자신에게 또 손을 쓸 줄은 몰랐다.뺨을 맞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그는 가까스로 우민은의 몸에 기댄 덕분에 쓰러지지는 않았다.“미친 거야?!”“당신들 여기가 무법천지인 줄 알아?”우민은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이봐, 어서 신고해!”“은행 협회에 통보해서 설은아한테 대출 다 막으라고 해!”이때 하현은 싸늘한 표정으로 우민은과 이국흥을 바라보며 말했다.“두 사람이야말로 내 블랙리
하현을 말리는 설은아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국흥은 험상궂은 얼굴로 이를 갈며 일어섰다.그는 입가의 피를 닦고 하현을 가리키며 말했다.“개자식! 당신 누구야?!”“당신이 뭔데 감히 이러는 거야?”“날 때려? 감히 날 때렸어?”“내가 뭐?”하현은 앞으로 나서면서 또 손바닥을 올려 이국흥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감히 내 아내한테 그런 모욕감을 주다니! 나한테 누구냐고 물었어?”“내가 누군지 당신 눈엔 안 보여?”“혹시 설 대표가 당신 부인이야?”이국흥은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뭔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신이 그 소문으로만 듣던 그 쓰레기 같은 놈?”“그런데 감히 날 때려?!”“죽여버릴 거야!”하현은 또 그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퍽!”“날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렇지만 내 여자를 건드리는 놈은...”“절대 용서할 수 없어! 오늘이 당신 제삿날인 줄 알아!”퉁퉁 부은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국흥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벌벌 떨었다.“하현, 그만해! 그만하라고!”설은아는 한사코 하현을 말리며 붙잡았다.“또 때리면 정말 사람이 죽겠어!”그녀는 마음속으로는 그를 고맙고 든든하게 여겼지만 불똥이 그에게 튈까 봐 걱정도 되었다.오래된 도시 금정의 은둔가 가문이 뒷배에 있는 금정은행 부장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금정은행의 뒷배인 나 씨 가문은 금정 금융계의 거물이었다.“개자식! 감히 날 때리다니?!”“흥! 넌 이제 죽었어! 내가 반드시 널 죽여버릴 거야!”이국흥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러나 그는 감히 하현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입만 떠들썩하게 떠벌렸다.“반드시 관청에 보고해서 감옥에 처넣어 버릴 거야!”“그리고 제멋대로 날뛰는 네놈 때문에!”“이 여자도 상상하기 힘든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블랙리스트에 올라 금융계에선 다시는 일 원 한 푼 빌릴 수 없게 만들 거라고!”“
설은아는 얼굴이 굳어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부장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부장님이 이천억, 아니 이조를 준다고 해도 난 이런 파렴치한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요!”“설 대표님, 왜 그렇게 고지식하게 굴어요!”“아니 그냥 잠 한 번 자는 것 가지고 뭘 그래요? 결국 서로 윈윈하는 거 아닙니까?”“다른 사람들은 이런 기회가 없어서 꿈도 못 꾼다고요!”“그런데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요?”“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혼도 한 번 했겠다 잠 한 번 자는 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남의 편의를 봐주고 내 이익을 챙기면 되는 거죠.’“이번에 잘 하면 앞으로도 대표님은 육 씨 도련님의 사람이 되어서 금정에서 편하게 사업할 텐데, 그런 기회를 발로 차버려요?”“대표님이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돈을 빌릴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러면 금정에선 사업하기 힘들어져요!”“왜 돈을 앞에 두고 내팽개치려는 거예요?”이국흥은 이 바닥에서 닳을 대로 닳은 인물이었다.이런 일에 경험도 많고 비열함 따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상대를 앞에 두고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며 이리저리 이로울 대로 몰아가고 있었다.정신력이 보통인 여자가 아니라면 그의 능수능란한 언변과 뻔뻔스러운 행동에 쉽게 넘어가고도 남았다.설은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섰다.“이 부장님, 내가 돈이 필요하긴 해요!”“하지만 돈 때문에 내 몸과 영혼을 팔진 않을 겁니다!”설은아에겐 분명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있었다.“좋아요, 안 받으셔도 됩니다!”“없던 일로 하죠!”이국흥은 테이블을 탁 치며 노기등등한 표정을 지었다.“게다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은 우리 금정은행에 따로 오백억 빚이 있습니다!”“계약대로 다음 달에 갚아야 하고요!”“기한이 지나면 우리 금정은행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 자산을 몰수할 권리가 있습니다!”“그렇게 되면 대표님도 자리를 보전할 수 없을 겁니다!”
”대출이 갱신이 안 되어서 우리 회사가 두 달째 월급을 못 주고 있어요.”“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고 공장 생산도 중단되었어요.”“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회사는 정말 파산할 거예요.”설은아는 조심스럽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말했다.“이 부장님, 우리 회사랑 거래하는 게 처음도 아니잖아요.”“부장님도 우리 집안에 대해 잘 알고 계시고요. 우리 뒤에는 10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인 대구 정 씨 가문이 있어요.”“도와주신다면 그 은혜 꼭 보답하겠습니다.”이국흥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설은아를 바라보았다.“설 대표님, 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대표님 회사는 지금 장부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 위험평가를 통과할 수가 없어요!”“내가 직업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업윤리를 어겨 가면서까지 대표님을 도와드릴 순 없잖습니까?!”“안타깝지만 우리 은행에서 이번 대출 연장은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하지만 우리 은행에서 대표님께 기회를 안 드리는 건 아닙니다...”말을 마치며 이국흥은 미리 준비해 둔 서류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서남 천문채 육 씨 도련님이 당신한테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하는군요.”“이건 이천억을 빌린다는 차용증입니다. 대표님이 여기 서명만 하면 당장 효력이 발생하고요.”“언제든지 돈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하지만 육 씨 도련님이 말씀하셨어요. 하룻밤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고.”육 씨 도련님?!설은아는 낯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녀는 분명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그래서 그녀의 눈빛에선 겨울 칼바람 같은 매서운 기운이 넘실거렸다.“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직업윤리도 없고 염치도 없으세요?”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이국흥은 뻔뻔스럽게 입을 열었다.“당연히 무슨 말씀인지 알 텐데요.”“난 대표님이 육 씨 도련님의 요구대로 했으면 합니다!”“그분이 누굽니까? 서남 천문채에서 어마어마한 지위에 있지 않습니까? 잘 아시면서 왜 그러
”아, 아니...”“대, 대사님! 대사님!”이때 나천우는 정신을 차리고 울부짖으며 하현을 쫓아가려고 발버둥쳤다.임단은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나천우를 뒤따랐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현은 그들에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나천우 부부가 급한 마음에 부하들에게 전화를 걸어 얼른 하현을 뒤쫓으라고 하려던 참이었다.나천우를 뒤쫓아온 형나운은 나천우의 전화기를 툭 쳤다.“천우 오빠, 또 일을 그르치려고 그래?!”그녀는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다.“지금 하현이 화가 나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게 생겼는데 부하들이 쫓아간들 어쩌겠어?”“하현이 돕지 않겠다고 하는데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겠어?”나천우는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 되었다.“형나운, 우리가 잘못했어.”“우리가 눈이 멀었나 봐. 눈앞에 사람을 두고도 제대로 볼 줄 몰랐으니 말이야!”“하지만 너랑 나랑 오랜 인연을 생각해서 부디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잘 좀 봐달라고 말 좀 해 줘!”“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돈 문제는 절대 신경 쓰지 마!”“맞아.”이때 임단도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형나운, 그러면 주소라도 알려줘. 우리가 가서 삼고초려라도 해 볼게!”“좀 진정해. 이렇게 쫓아가 봐야 아무 소용없어.”형나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조금 있다가 내가 전화해 볼게.”그 시각 진회강 강변에 위치한 금정은행 본사 앞.설은아는 머뭇거리다가 뭔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은행 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마침 택시를 타고 지나가던 하현이 설은아의 모습을 보았고 자금난에 허덕이는 그녀의 사정을 급히 떠올리며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한 뒤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뒤따랐다.하현이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마침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전화를 받아보니 형나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나 사장 부부가 잘못을 깨닫고 직접 사과드리고 싶다고 해요.”“내 얼
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형나운도 틀림없이 이 사기꾼에게 속았다고 생각했다.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감히 자신을 풍수대사라 할 수 있겠는가?장난하는 건가?이런 사람이 사기꾼이 아니라면 누가 사기꾼이란 말인가?임단이 참지 못하고 옆에서 끼어들었다.“그럼 당신은 음양학을 배운 학생이에요?”하현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아니요. 난 굴착기를 배웠어요. 기술도 좋고 자격증도 있어요.”“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갑자기 표정이 냉랭해졌다.“지금 뭐라는 거예요?”“굴착기를 배운 사람이 무슨 풍수를 본단 말이에요?”“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예요?”“대하에서 풍수지리가 얼마나 큰 위상을 차지하는지 몰라요?”“우리를 속이려 들다니 후환이 두렵지도 않아요?”나천우의 말에 형나운의 안색이 새까맣게 일그러졌다.그녀는 다급하게 나천우에게 눈길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오빠, 그만하면 안 돼!”“우리 두 집안의 친분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내가 이런 중요한 일을 두고 오빠를 속였을 거라고 생각해?”“내가 바보야?!”“너 나 속이는 거 아냐?”나천우의 얼굴은 냉랭하게 식었다.“너도 자세히 봐 봐. 이 젊은 사람은 풍수라는 두 글자도 모르는 것 같은데 어떻게 믿으란 얘기야?!”“이 사기꾼을 만나려고 내가 금정은행 투자 포럼도 안 나가고 여기 왔겠냐고!”임단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비난에 열을 올렸다.“형나운, 당신 정말 경솔했어!”예전 같았으면 두 집 사이에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형나운이 하현에 대해 거의 신처럼 말했다는 것이다.나천우와 임단은 자신들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줄로 알고 커다란 희망을 품고 여기 왔다.다만 희망이 크면 실망도 큰 법이고 분노는 걷잡을 수 없다는 걸 몰랐을 뿐이다.“나 사장님?”형나운은 하현의 목소리에 그에게 눈길을 떨구며 손을 내저었지만 하현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담담한 눈
”형나운, 정말 축하해!”“우릴 속이지 않았군!”“그런데 그 대사님은 어디에 계셔?”“얼른 좀 소개해 줘!”나 사장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병은 이미 수많은 국내외 명의들한테 보여줬어. 국수인 장북산 선생님도 보셨지!”“어르신은 우릴 보고 병이 아니라 악에 부딪힌 것이라고 하셨어.”“풍수에 정통한 사람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대.”“하지만 수많은 풍수지리사를 만나봤지만 도저히 해결되지 않았어.”“어쨌든 형나운, 당신이 대사님한테 말 좀 잘 해 줘!”나 사장의 부인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형나운, 우리를 살릴지 말지 여부는 전적으로 당신의 손에 달려 있어.”“이 일이 잘 해결되면 최고 가문에서 기가 막힌 남편감을 물색해 줄게. 정말 섭섭하지 않게 해 줄 거야!”옆에 살짝 비켜서 있던 하현의 이마에 주름살이 잔뜩 드리워졌다.기가 막힌 남편감?뭐가 기가 막히다는 거지?형나운은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나 사장님, 그 대사님은 바로 가까운 곳에 있어요.”“하현, 소개할게요. 이 분은 나천우 사장님, 그리고 이쪽은 나 사장님 사모님, 임단.”“나 사장님은 나 씨 가문 출신이에요.”“나 씨 가문은 형 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금정에 토박이로 아주 뿌리가 깊은 가문이죠.”“예로부터 은행업을 해 왔고 지금도 금정에서 가장 큰 은행인 금정은행을 움직이는 가장 큰 지주이자 실세죠.”“나 사장님 부부는 결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자식이 없어요. 그래서 온갖 치료를 받았지만 성과가 없어서 결국 풍수지리술에 기대 보려고 하고 있어요.”“할아버지 얘기를 듣고 여기까지 오셨고요.”“우리 형 씨 가문과 나 씨 가문은 사이가 좋아서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당신한테 말도 없이 여기로 오라고 했어요.”형나운은 조금 찔리는지 불안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하현, 이렇게 불쑥 말을 꺼내면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지만 제발 나 사장님 부부를 좀 도와줬으면
하현은 이맛살을 구기며 말했다.“말로 하면 되지! 당신 왜 이러는 거야? 이런 행동을 왜 하는 거냐고?”“내가 그런 사람이야?”“하현, 치료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형나운은 미안한 듯 겸연쩍어하며 말했다.“그래서 내가 주동적으로 이런 자세를 보인 거예요. 언제든지 와도 상관없다고.”“아무튼 당신이 날 고쳐 줄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요.”“강하면 강할수록 난 더 좋아요.”“당신 정말...”“마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죠?”하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순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퍽’하고 내리쳤다.“이렇게 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누가 말했어?”“지난번에 난 기혈과 두통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줬어.”“그런데 지금 당신 문제는 완전히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절대 호전되지 않아!”하현의 말을 들은 형나운은 순간 얼굴이 벌게졌다.그녀는 얼른 엉덩이를 내리고 똑바로 선 다음 서랍 속에서 노란 가죽으로 싼 고서적 한 권을 꺼내 하현에게 건네주었다.하현이 힐끔 쳐다보니 ‘영춘’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집안을 다스리는 처세술에 관한 책인 ‘영춘’은 여자아이의 수련에 안성맞춤이었다.하지만 진짜 ‘영춘’은 기본적으로 무학의 성지에서 내려오는 비법서 같은 것이고 방금 형나운이 꺼낸 책은 남은 자투리 책이라고 할 수 있다.그녀는 자투리 잡서에 가까운 책으로 수련을 하는 바람에 자주 숨이 막히는 증상이 생긴 것이다.하현은 그제야 뭔가를 알아차리며 빠진 부분을 보충해서 써 준 뒤 그녀에게 책을 던져주며 말했다.“이 책은 영춘의 상반부에 불과해. 그래서 내가 상반부만 보충해 줬어. 이렇게 한다면 별일 없을 거야.”“후반부는 당신이 기회를 봐서 오매 도교 사원에 가서 문의해 봐.”“만약 내가 당신한테 준다면 오매 도교 사원이 아마 날 죽이려고 들 거야.”“아, 알겠어요.”형나운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하현이 보충해 놓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