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성도는 하현이 인도라는 나라의 신앙과 문화를 잘 모르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차성도의 자신감과 강경함에 하현의 얼굴은 더욱 의미심장한 빛으로 가득했다.사실 지금 하현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차성도는 완전히 죽게 된다.브라흐마 샤주와 요승들은 겁에 질려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혹시라도 함부로 움직였다가 차성도가 죽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정작 차성도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이봐, 하 씨. 내가 굴복할 거라고는 꿈도 꾸지 마.”차성도는 침착하게 하현을 바라보았다.“우리 인도인은 원래 이래. 피를 흘리고 머리가 깨질 수는 있지만 절대 인도를 욕되게 하지는 않아!”“우리 인도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자에겐 성심성의껏 은혜를 베풀지.”“하지만 감히 우리 인도인을 모욕한다면 우린 절대 가만두지 않아!”“그러니 나 하나 죽인다고 우리 인도인이 멸하지 않아. 우리 인도인이 멸하지 않는 한 반드시 당신한테 복수할 거야!”“게다가 당신은 날 절대 죽이지 못해. 난 믿어.”“어쨌거나 난 인도 두 번째 계급이야. 당신 같은 하인이 무슨 자격으로 날 죽이겠어?”“퍽!”차성도가 입을 마음대로 놀리기 전에 하현은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쳤다.“인도인의 존엄?”“인도 두 번째 계급, 그게 그렇게 대단해?”“퍽!”“당신들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래?”“두 번째 계급이란 애초에 침략자에게 굴복한 지역의 귀족들일 뿐이야!”“자기 나라조차 버릴 수 있는, 침략자에게 바로 무릎 꿇은 자들이 첫 번째 계급이지!”“자국의 몇 천 년 역사와 강토와 문화를 넙죽 침략자들 손에 넘겨준 사람들이야!”“아직도 고개 빳빳이 들고 의기양양하다니?!”“퍽!”“수치스러워해야 마땅할 일을 자랑인 양 떠벌리고 다니는 인도인이라니!”“피를 흘리고 머리가 깨지더라도 인도는 욕되게 하지 않는다고?”“정말 그렇게 재주가 좋으면 당신 머리 위에 앉아 있는 그 첫 번째 계급도 완전히 없애버리지 왜?”“아무리
대하 정부의 오랜 행정 스타일로 볼 때 무성에서 이 일이 밝혀지게 되면 인도파는 무성에서의 오랜 입지를 완전히 잃게 될지도 모른다.그만큼 대단한 사건이다.게다가 인도로서는 대하가 국경에 쉽게 진군할 수 있는 병력을 유치하는 데 핑곗거리를 제공하는 셈이다.어쨌거나 거리낌 없이 대하 경내를 드나들며 도박장을 열었다는 것 자체가 대하를 업신여겼다는 방증이 되기 때문이다.이렇게 되면 우선 모든 것이 수면 위로 떠올라 탄로 날 것이고 앞으로 인도 측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차성도의 입장에선 차라리 하현이 든든한 뒷배를 데려오는 편이 훨씬 쉽다.하현이 전화 한 통으로 대하 정부를 건드린다면 정말로 그건 차성도에게 치명타를 안기는 일이다.하현이 천군만마를 몰고 오는 것보다 훨씬 차성도를 떨게 하는 일이었다.그리고 지금 차성도가 떨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현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하현은 일을 크게 만드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정말로 브레이크가 없는 미치광이 같았다.이때 브라흐마 샤주가 입을 열었다.“하 씨. 당신 남자 아니야?”“이 바닥 일은 이 바닥에서 있었던 걸로 처리해야지!”“정부의 힘을 동원하러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아?!”하현은 냉소를 지으며 눈을 흘겼다.“당신이 나한테 그런 말할 자격이나 있어?”“우리가 싸우는 동안 난 한여침에게 CCTV를 확인해 보라고 일렀지.”“지금 내 손에 모든 진실이 담겨 있단 얘기라고.”“누가 옳고 그른지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거야.”“그런데도 당신네 인도인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손님을 끝까지 억울하게 만들고 협박까지 일삼아 이 지경까지 몰고 왔어.”“내가 어떻게 관청에 신고하지 않을 수 있겠냐구?”“관청 사람도 오라고 하고 경찰서 사람도 오라고 하고 기자도 오라고 해서.”“무엇이 진실인지 함께 따져 보자구!”“인도인의 스타일도 좀 알려주고 말이야!”“파렴치한 소
”이걸로 됐어”“그렇지만 다른 건 아직 해명 안 했어.”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탕탕!”연이어 두 발.브라흐마 샤주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이번에는 두 다리에 총알이 박혔다.방금까지만 해도 꼿꼿이 서 있던 그가 그대로 주저앉아 뒹굴었다.“하 씨! 당신 절대 가만 안 둘 거야!”“죽을 때까지 당신이랑 싸울 거야!”이를 지켜보던 차성도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그는 오늘 자신이 충분히 양보하고 참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하현이라는 대하인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자신이 그렇게 잘못을 인정했는데도 이런 짓을 하다니!이건 인도상회 전체의 체면을 발로 짓밟는 행동이었다.“개자식!”“끝까지 해 보자 이거야?”“넌 절대 나한테 안 돼!”하현은 손에 들고 있던 총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차성도의 행커치프로 손가락 사이를 닦았다.깨끗이 닦은 뒤 다시 고이 접어 차성도의 양복에 꽂았다.“이렇게 하지. 특별히 내가 차성도 당신의 체면을 봐줄게.”“내일 이맘때 무성황금회사의 일을 당신이 나한테 만족스럽게 설명해 준다면 나도 이쯤에서 끝내지.”“하지만 제대로 설명을 못한다면 인도파도 망하는 거고 인도상회도 망하는 거야.”“나 하현, 내가 한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야. 명심해!”말을 마치자마자 하현은 차성도를 발로 걷어차 바닥에 쓰러뜨렸고 진주희와 함께 그 자리를 훌쩍 떠났다.하현 일행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차성도의 눈가에 폭풍 같은 경련이 일었다.차성도는 태어나서 이런 수모를 처음 겪었다.이번에 정말 제대로 체면이 구겨진 것이다!그는 땅바닥에서 온몸을 벌벌 떨며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브라흐마 샤주를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말해 봐. 무성황금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체 무슨 일을 한 거냐고?!”“나,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정말이야. 아무짓도 안 했다고...”브라흐마 샤주는 밀려오는 고통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용천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사람이 못생겼으면 책이라도 많이 읽어야 한다고!”“책을 읽어 봤다면 낚싯줄에 스스로 걸려든다는 말이 무슨 뜻인 줄 알 거야.”용천오는 말을 하면서 낚싯대를 내려놓고는 옆에 있는 대야에서 수건을 꺼내 두 손을 닦았다.그제야 그는 마하성에게 앉으라고 손짓하며 담담하게 말했다.“이렇게 급하게 날 만나러 오다니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거야?”마하성은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졌다.“큰일이 일어나긴 했어.”“설은아가 인도상회 샤르마 커한테 맞아서 입원했다는 소식 못 들었어?”“얼마 전에 하현이 진주희를 데리고 무성호텔로 쳐들어왔대.”“그들은 브라흐마 샤주한테서 오십억을 가져갔을 뿐만 아니라.”“차성도는 얼굴을 맞았고 브라흐마 샤주는 사지를 총에 맞았대.”마하성은 막힘없이 자초지종을 말했다.“용천오, 이 과정에서 차성도는 이미 당신을 언급했고 당신과 브라흐마 아부가 의형제라는 사실도 말했대.”“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언제 당신한테 불똥이 튈 줄 몰라서 이렇게 달려왔지.”“미리 준비를 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아니면 그냥 바로 하현 그놈을 없애버릴까?”“인도상회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당했어?”용천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난 몇 년 동안 우리 무성에서 순풍에 돛 단 듯이 다니더니 이제는 호랑이의 앞니가 많이 무뎌진 모양이군.”“브라흐마 샤주가 총을 맞고 차성도가 뺨을 맞았으니 브라흐마 아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앞으로 볼거리가 더 흥미진진하겠는데.”마하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하지만 용천오, 결국 하현을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두고두고 우리 앞길에 걸리적거릴 거야. 안 그래?”“왜 지금 손을 쓰지 않는 거야?”“사자는 토끼를 잡는데도 전력을 다한다고 하지 않았어?”용천오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아직 밖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지만 용문주 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나고 있을 거야.”“지금 당
용천오와 마하성이 신중하게 머리를 맞대고 있을 때 하현은 이미 도끼파 본거지로 돌아왔다.최희정과 설유아는 병원에서 설은아를 간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기척이 없는 집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진주희는 하현에게 보이차 한 주전자를 우려 준 뒤 잠시 자리를 떠났다.그런데 얼마 후 한여침이 뭔가에 놀란 사람처럼 달려와 누군가 하현을 뵙기를 청한다고 전했다.하현은 누구인지도 묻지 않고 한여침에게 얼른 들어오라고 했다.그러나 들어오는 사람을 본 순간 하현은 멍한 눈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어르신,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굳이 이렇게 오지 않고 전화로 하셔도 될 텐데 무슨 일이신지요?”한여침과 함께 들어온 사람은 무성 만 씨 가문 만진해였다.그는 말끔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손에는 용머리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보아하니 기운은 넘쳐 보였다.하현이 그의 고질병을 치료한 뒤 완전히 몸이 나아진 것임이 분명했다.만진해는 사양하지 않고 하현의 맞은편에 앉으며 미소를 띠었다.“하현, 우리 사이에 그렇게 예의 차릴 거 없어.”“내가 오늘 여기 온 건 두 가지 일 때문일세.”하현은 직접 찻주전자를 들어 공손하게 만진해의 잔을 채우며 미소로 답했다.“말씀하십시오.”“첫째, 우리 만 씨 가문의 골칫덩이 만천기 말이야.”“자네한테 성의를 표하기 위해 내가 내 손으로 그의 남은 손발을 부러뜨렸어. 아마 반 년 동안은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거야.”“또 다른 하나는 자선병원 지분 50% 말일세.”“간단히 말해 지금부터 자선병원은 자네 마음대로 처리하게.”만진해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주식양도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하현이 거절할 틈도 없이 만진해는 입가에 미소를 드리우며 말했다.“제발 거절하지 말아주시게. 이건 내 감사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사과의 표시이기도 하네.”“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자네가 무성에서 자네 이름의 사업체를 가지고 있었으면 하는 걸세.”“그렇게 해야만 자네가 날 도와줄 수가 있
”아, 그렇게 된 거군요.”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만진해가 말한 용문대회에 그토록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줄은 몰랐다.말하자면 용문의 일인자를 가르는 무술 대회였던 것이다.그러나 하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어르신, 제가 어르신의 체면을 세워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가 명예를 거머쥐는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그래서 이 일은 제가 도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하현이 참여하지 않을 뜻을 내비치자 만진해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말했다.“하현, 사실 난 자네가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하네.”“네?”하현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그런 자리는 자기 한 사람 더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자기 하나 빠진다고 해서 뭐 하나 모자라지 않는다.자기가 꼭 가야 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자기 눈앞에 놓인 일도 이미 충분해서 하현은 정말로 그 일에 관심이 없었다.“제가 들은 바로는 지금 용문 문주, 용인서가 위독해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더군.”“그가 죽으면 용문, 용 씨 가문은 혹독한 내홍을 겪을 거야.”“이럴 때는 대세를 장악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이 필요해.”“그렇지 않으면 대하에서 용문의 지위로 볼 때 용문이 혼란을 겪으면 대하도 큰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그렇게 되면 하현 자네도 용문 집법당 당주로서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하현은 자신이 집법당 당주라는 사실을 만진해가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전혀 의아해하지 않았고 그저 걱정스러운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정말입니까?”“정말로 용인서가 위독합니까?”“그가 정말 위독하다구요? 농담하는 거 아니시구요?”만진해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당연히 농담이 아닐세. 루돌프 그놈이 정말로 무성까지 내 병을 돌보기 위해 온 줄 아는가?”“나는 핑계일 뿐이야.”“영지루가 루돌프를 데리고 무성에 온 것은 용인서 때문이었어.”“안타깝게도 용인서는 이미 고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 거야. 그가 걸린
하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저는 정말로 용문대회는 관심이 없습니다. 용문주 자리에도 관심 없구요.”“자네가 명예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란 건 내가 잘 아네.”“하지만 대장부는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있는 거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용문이 어지러우면 이 바닥도 어지러워지고 나아가 나라도 어지러워진다네.”“소인배들이 우리 대하를 어지럽히는 꼴을 가만히 지켜볼 수 있겠는가?”거절하기 어렵게 만드는 만진해의 말에 하현은 할 말을 잃었다.잠시 후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어르신, 어르신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렵네요. 이렇게 된 이상 참가하지 않는 게 오히려 소인배의 짓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구체적으로 어디서 지원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그럴 필요없네.”만진해는 직접 지원서를 가져온 것이었다.하현은 그 위에 서명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만진해는 빙그레 웃으며 하현에게 지원서를 건넸다.“여기 서명만 하면 되네.”“참, 내일이 무성지구 시전이고 장소는 무성 체육관이야. 절대 놓쳐서는 안 되네.”하현은 만진해가 이미 준비해 온 지원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뭔가 함정에 빠진 기분이 되었다.하지만 이미 얘기가 끝난 것이니 더 이상 왈가왈부해 봐야 아무 의미가 없었다.서명을 마치며 하현은 마침 다른 일이 생각났다.“참, 어르신. 오늘 오후에 인도인을 좀 손봐 주었습니다.”“그게 이번 출전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겠죠?”만진해는 찻잔을 들려다가 손을 살짝 떨었다.“인도인? 어느 인도인?”무성에서 인도인의 위세는 작지 않았다.그만큼 무서운 인물도 많았다.그렇지 않았더라면 만진해가 이렇게 긴장한 얼굴로 하현을 쳐다보지 않았을 것이다.하현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무슨 차성도라고 하던 것 같던데요. 인도상회의 군사 스승이라고 했어요.”“그 외에도 브라흐마 샤주라는 놈도 있었구요.”“차성도의 뺨을 몇 대
하현은 비록 조용하고 차분하게 행동했지만 마음속에선 벌써 패권의 다툼 속에 들어가 있었다.누군가 자신을 괴롭힌다면 절대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어젯밤은 차성도의 기품과 체면을 봐서 인도상회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만약 인도상회가 이 기회를 놓치고 감히 자신을 공격한다면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인도상회를 망쳐 놓고 말겠다고 다짐했다.하현의 자신감에 만진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오기 전에 이미 인도상회에 사람을 보내 좋은 말로 타이른 그였다.이치에 따라 일을 한다면 이런 일도 큰 소란 없이 지나갈 수 있다.그리고 하현에게는 내일 용문대회에 꼭 참가하라는 말을 남긴 뒤 만진해는 홀연히 그곳을 떠났다.하현은 인도상회 일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하고 정원 벤치에 기대어 쉬었다.두 시간쯤 지나 갑자기 정원 한편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하현, 큰일 났습니다!”진주희가 굳은 얼굴로 뛰어들어왔다.그녀의 안색은 딱 보기에도 매우 좋지 않았다.하현이 얼른 물었다.“무슨 일이야? 병원에 또 무슨 일이 생겼어?”“아닙니다!”진주희는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병원 쪽에는 별일 없는데 무성호텔에서 일이 생겼습니다.”“30분 전에 무성 경찰서의 수사팀장들이 무성호텔을 급습해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던 지하 도박장을 깡그리 청소해 버렸습니다.”“현장에는 수천억의 도박 자금뿐만 아니라 브라흐마 샤주를 비롯한 굵직한 인물들까지 구속되었다고 합니다.”“그리고 일부 주식과 계약서, 장부 등도 압수해 갔다고 합니다. 차성도도 이 일에 연루되었다고 합니다.”“그래서 지금 무성호텔 전체가 아주 쑥대밭이 되었습니다...”진주희는 줄곧 무성호텔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변고에 대비해 그쪽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런데 이렇게 큰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하현은 똑바로 앉아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무성호텔이 쑥대밭이 되었다고?”하현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좋아, 당신이 그렇게 잘난 척을 하니 한 명이라도 어디 해고해 봐!”우민은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비아냥이 가득한 얼굴로 하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자! 어서 해 보라니까!”“퍽!”바로 그때 은행 로비의 문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차여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곧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남녀 열 명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양복 차림이었는데 그냥 보기에도 부티가 좔좔 흘렀다.그는 바로 금정은행 은행장, 은둔가 나 씨 가문 나천우였다.나천우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우민은과 이국흥은 모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려 굽신거렸다.“행장님!”“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우민은과 이국흥은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나천우 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환한 미소를 보였다.그런데 평소에는 친근하게 그들을 대했던 나천우가 오늘 이렇게 차가운 얼굴로 들이닥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나천우는 그들에겐 눈길도 돌리지 않고 하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하현의 손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하현,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이 말을 듣고 장내의 분위기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모두 어안이 벙벙해지다 못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곳곳에서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잠시 후 예쁘장한 여직원들이 자신의 뺨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잘못 본 것도 아니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연스럽게 하현에게 쏠렸다.몇몇 여자 고객들도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가 않는지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버렸다.우민은은 마치 사지가 마비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국흥은 더했다.사지가 그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 쉼 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이게 무슨 상황인가?그들은 하현
이국흥은 염치도 체면도 안중에 없는 사람 같았다.그는 없던 일을 있었던 일처럼 꾸몄다.그의 목적은 단 하나, 우민은이 하현을 혼내 주길 바랐던 것이다.이때 설은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부행장님, 그게 아닙니다...”우민은은 이국흥에게 힘을 실어 주러 온 상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설은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감히 우리 은행에서 사람을 때려요?”“간이 배밖에 나왔어요?”“지금부터 당신은 우리 은행 블랙리스트에 오를 거예요!”“이봐! 어서 관청에 신고해!”그녀의 카랑카랑한 말투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그러자 설은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분명 그녀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될 줄은 몰랐다.설은아가 이끄는 회사의 자금줄이 빠듯한 건 사실이었다.그런데 결국 이렇게 완전히 파산하게 되었다.자신이 아홉 번째 집안을 맡은지 얼마나 되었는가?이렇게 빨리 파산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훗날 대구 정 씨 가문의 수장이 되겠다는 것인가?그야말로 허황된 꿈이었다!“하하하! 이게 바로 당신의 최후야!”“이제 알겠어?”이국흥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개자식! 이 개새끼야! 너 방금 정말 미친놈처럼 날 치더라? 정말 대단했지, 안 그래?”“자, 다시 한번 더 해 보시지?!”“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디 한번 보자고!”“퍽!”하현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그의 요구에 답하며 앞으로 걸어가다가 또 한 번 손바닥을 휘둘렀다.이국흥은 하현이 감히 자신에게 또 손을 쓸 줄은 몰랐다.뺨을 맞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그는 가까스로 우민은의 몸에 기댄 덕분에 쓰러지지는 않았다.“미친 거야?!”“당신들 여기가 무법천지인 줄 알아?”우민은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이봐, 어서 신고해!”“은행 협회에 통보해서 설은아한테 대출 다 막으라고 해!”이때 하현은 싸늘한 표정으로 우민은과 이국흥을 바라보며 말했다.“두 사람이야말로 내 블랙리
하현을 말리는 설은아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국흥은 험상궂은 얼굴로 이를 갈며 일어섰다.그는 입가의 피를 닦고 하현을 가리키며 말했다.“개자식! 당신 누구야?!”“당신이 뭔데 감히 이러는 거야?”“날 때려? 감히 날 때렸어?”“내가 뭐?”하현은 앞으로 나서면서 또 손바닥을 올려 이국흥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감히 내 아내한테 그런 모욕감을 주다니! 나한테 누구냐고 물었어?”“내가 누군지 당신 눈엔 안 보여?”“혹시 설 대표가 당신 부인이야?”이국흥은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뭔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신이 그 소문으로만 듣던 그 쓰레기 같은 놈?”“그런데 감히 날 때려?!”“죽여버릴 거야!”하현은 또 그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퍽!”“날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렇지만 내 여자를 건드리는 놈은...”“절대 용서할 수 없어! 오늘이 당신 제삿날인 줄 알아!”퉁퉁 부은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국흥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벌벌 떨었다.“하현, 그만해! 그만하라고!”설은아는 한사코 하현을 말리며 붙잡았다.“또 때리면 정말 사람이 죽겠어!”그녀는 마음속으로는 그를 고맙고 든든하게 여겼지만 불똥이 그에게 튈까 봐 걱정도 되었다.오래된 도시 금정의 은둔가 가문이 뒷배에 있는 금정은행 부장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금정은행의 뒷배인 나 씨 가문은 금정 금융계의 거물이었다.“개자식! 감히 날 때리다니?!”“흥! 넌 이제 죽었어! 내가 반드시 널 죽여버릴 거야!”이국흥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러나 그는 감히 하현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입만 떠들썩하게 떠벌렸다.“반드시 관청에 보고해서 감옥에 처넣어 버릴 거야!”“그리고 제멋대로 날뛰는 네놈 때문에!”“이 여자도 상상하기 힘든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블랙리스트에 올라 금융계에선 다시는 일 원 한 푼 빌릴 수 없게 만들 거라고!”“
설은아는 얼굴이 굳어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부장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부장님이 이천억, 아니 이조를 준다고 해도 난 이런 파렴치한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요!”“설 대표님, 왜 그렇게 고지식하게 굴어요!”“아니 그냥 잠 한 번 자는 것 가지고 뭘 그래요? 결국 서로 윈윈하는 거 아닙니까?”“다른 사람들은 이런 기회가 없어서 꿈도 못 꾼다고요!”“그런데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요?”“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혼도 한 번 했겠다 잠 한 번 자는 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남의 편의를 봐주고 내 이익을 챙기면 되는 거죠.’“이번에 잘 하면 앞으로도 대표님은 육 씨 도련님의 사람이 되어서 금정에서 편하게 사업할 텐데, 그런 기회를 발로 차버려요?”“대표님이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돈을 빌릴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러면 금정에선 사업하기 힘들어져요!”“왜 돈을 앞에 두고 내팽개치려는 거예요?”이국흥은 이 바닥에서 닳을 대로 닳은 인물이었다.이런 일에 경험도 많고 비열함 따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상대를 앞에 두고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며 이리저리 이로울 대로 몰아가고 있었다.정신력이 보통인 여자가 아니라면 그의 능수능란한 언변과 뻔뻔스러운 행동에 쉽게 넘어가고도 남았다.설은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섰다.“이 부장님, 내가 돈이 필요하긴 해요!”“하지만 돈 때문에 내 몸과 영혼을 팔진 않을 겁니다!”설은아에겐 분명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있었다.“좋아요, 안 받으셔도 됩니다!”“없던 일로 하죠!”이국흥은 테이블을 탁 치며 노기등등한 표정을 지었다.“게다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은 우리 금정은행에 따로 오백억 빚이 있습니다!”“계약대로 다음 달에 갚아야 하고요!”“기한이 지나면 우리 금정은행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 자산을 몰수할 권리가 있습니다!”“그렇게 되면 대표님도 자리를 보전할 수 없을 겁니다!”
”대출이 갱신이 안 되어서 우리 회사가 두 달째 월급을 못 주고 있어요.”“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고 공장 생산도 중단되었어요.”“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회사는 정말 파산할 거예요.”설은아는 조심스럽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말했다.“이 부장님, 우리 회사랑 거래하는 게 처음도 아니잖아요.”“부장님도 우리 집안에 대해 잘 알고 계시고요. 우리 뒤에는 10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인 대구 정 씨 가문이 있어요.”“도와주신다면 그 은혜 꼭 보답하겠습니다.”이국흥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설은아를 바라보았다.“설 대표님, 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대표님 회사는 지금 장부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 위험평가를 통과할 수가 없어요!”“내가 직업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업윤리를 어겨 가면서까지 대표님을 도와드릴 순 없잖습니까?!”“안타깝지만 우리 은행에서 이번 대출 연장은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하지만 우리 은행에서 대표님께 기회를 안 드리는 건 아닙니다...”말을 마치며 이국흥은 미리 준비해 둔 서류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서남 천문채 육 씨 도련님이 당신한테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하는군요.”“이건 이천억을 빌린다는 차용증입니다. 대표님이 여기 서명만 하면 당장 효력이 발생하고요.”“언제든지 돈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하지만 육 씨 도련님이 말씀하셨어요. 하룻밤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고.”육 씨 도련님?!설은아는 낯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녀는 분명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그래서 그녀의 눈빛에선 겨울 칼바람 같은 매서운 기운이 넘실거렸다.“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직업윤리도 없고 염치도 없으세요?”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이국흥은 뻔뻔스럽게 입을 열었다.“당연히 무슨 말씀인지 알 텐데요.”“난 대표님이 육 씨 도련님의 요구대로 했으면 합니다!”“그분이 누굽니까? 서남 천문채에서 어마어마한 지위에 있지 않습니까? 잘 아시면서 왜 그러
”아, 아니...”“대, 대사님! 대사님!”이때 나천우는 정신을 차리고 울부짖으며 하현을 쫓아가려고 발버둥쳤다.임단은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나천우를 뒤따랐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현은 그들에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나천우 부부가 급한 마음에 부하들에게 전화를 걸어 얼른 하현을 뒤쫓으라고 하려던 참이었다.나천우를 뒤쫓아온 형나운은 나천우의 전화기를 툭 쳤다.“천우 오빠, 또 일을 그르치려고 그래?!”그녀는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다.“지금 하현이 화가 나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게 생겼는데 부하들이 쫓아간들 어쩌겠어?”“하현이 돕지 않겠다고 하는데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겠어?”나천우는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 되었다.“형나운, 우리가 잘못했어.”“우리가 눈이 멀었나 봐. 눈앞에 사람을 두고도 제대로 볼 줄 몰랐으니 말이야!”“하지만 너랑 나랑 오랜 인연을 생각해서 부디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잘 좀 봐달라고 말 좀 해 줘!”“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돈 문제는 절대 신경 쓰지 마!”“맞아.”이때 임단도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형나운, 그러면 주소라도 알려줘. 우리가 가서 삼고초려라도 해 볼게!”“좀 진정해. 이렇게 쫓아가 봐야 아무 소용없어.”형나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조금 있다가 내가 전화해 볼게.”그 시각 진회강 강변에 위치한 금정은행 본사 앞.설은아는 머뭇거리다가 뭔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은행 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마침 택시를 타고 지나가던 하현이 설은아의 모습을 보았고 자금난에 허덕이는 그녀의 사정을 급히 떠올리며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한 뒤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뒤따랐다.하현이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마침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전화를 받아보니 형나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나 사장 부부가 잘못을 깨닫고 직접 사과드리고 싶다고 해요.”“내 얼
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형나운도 틀림없이 이 사기꾼에게 속았다고 생각했다.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감히 자신을 풍수대사라 할 수 있겠는가?장난하는 건가?이런 사람이 사기꾼이 아니라면 누가 사기꾼이란 말인가?임단이 참지 못하고 옆에서 끼어들었다.“그럼 당신은 음양학을 배운 학생이에요?”하현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아니요. 난 굴착기를 배웠어요. 기술도 좋고 자격증도 있어요.”“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갑자기 표정이 냉랭해졌다.“지금 뭐라는 거예요?”“굴착기를 배운 사람이 무슨 풍수를 본단 말이에요?”“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예요?”“대하에서 풍수지리가 얼마나 큰 위상을 차지하는지 몰라요?”“우리를 속이려 들다니 후환이 두렵지도 않아요?”나천우의 말에 형나운의 안색이 새까맣게 일그러졌다.그녀는 다급하게 나천우에게 눈길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오빠, 그만하면 안 돼!”“우리 두 집안의 친분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내가 이런 중요한 일을 두고 오빠를 속였을 거라고 생각해?”“내가 바보야?!”“너 나 속이는 거 아냐?”나천우의 얼굴은 냉랭하게 식었다.“너도 자세히 봐 봐. 이 젊은 사람은 풍수라는 두 글자도 모르는 것 같은데 어떻게 믿으란 얘기야?!”“이 사기꾼을 만나려고 내가 금정은행 투자 포럼도 안 나가고 여기 왔겠냐고!”임단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비난에 열을 올렸다.“형나운, 당신 정말 경솔했어!”예전 같았으면 두 집 사이에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형나운이 하현에 대해 거의 신처럼 말했다는 것이다.나천우와 임단은 자신들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줄로 알고 커다란 희망을 품고 여기 왔다.다만 희망이 크면 실망도 큰 법이고 분노는 걷잡을 수 없다는 걸 몰랐을 뿐이다.“나 사장님?”형나운은 하현의 목소리에 그에게 눈길을 떨구며 손을 내저었지만 하현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담담한 눈
”형나운, 정말 축하해!”“우릴 속이지 않았군!”“그런데 그 대사님은 어디에 계셔?”“얼른 좀 소개해 줘!”나 사장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병은 이미 수많은 국내외 명의들한테 보여줬어. 국수인 장북산 선생님도 보셨지!”“어르신은 우릴 보고 병이 아니라 악에 부딪힌 것이라고 하셨어.”“풍수에 정통한 사람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대.”“하지만 수많은 풍수지리사를 만나봤지만 도저히 해결되지 않았어.”“어쨌든 형나운, 당신이 대사님한테 말 좀 잘 해 줘!”나 사장의 부인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형나운, 우리를 살릴지 말지 여부는 전적으로 당신의 손에 달려 있어.”“이 일이 잘 해결되면 최고 가문에서 기가 막힌 남편감을 물색해 줄게. 정말 섭섭하지 않게 해 줄 거야!”옆에 살짝 비켜서 있던 하현의 이마에 주름살이 잔뜩 드리워졌다.기가 막힌 남편감?뭐가 기가 막히다는 거지?형나운은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나 사장님, 그 대사님은 바로 가까운 곳에 있어요.”“하현, 소개할게요. 이 분은 나천우 사장님, 그리고 이쪽은 나 사장님 사모님, 임단.”“나 사장님은 나 씨 가문 출신이에요.”“나 씨 가문은 형 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금정에 토박이로 아주 뿌리가 깊은 가문이죠.”“예로부터 은행업을 해 왔고 지금도 금정에서 가장 큰 은행인 금정은행을 움직이는 가장 큰 지주이자 실세죠.”“나 사장님 부부는 결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자식이 없어요. 그래서 온갖 치료를 받았지만 성과가 없어서 결국 풍수지리술에 기대 보려고 하고 있어요.”“할아버지 얘기를 듣고 여기까지 오셨고요.”“우리 형 씨 가문과 나 씨 가문은 사이가 좋아서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당신한테 말도 없이 여기로 오라고 했어요.”형나운은 조금 찔리는지 불안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하현, 이렇게 불쑥 말을 꺼내면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지만 제발 나 사장님 부부를 좀 도와줬으면
하현은 이맛살을 구기며 말했다.“말로 하면 되지! 당신 왜 이러는 거야? 이런 행동을 왜 하는 거냐고?”“내가 그런 사람이야?”“하현, 치료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형나운은 미안한 듯 겸연쩍어하며 말했다.“그래서 내가 주동적으로 이런 자세를 보인 거예요. 언제든지 와도 상관없다고.”“아무튼 당신이 날 고쳐 줄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요.”“강하면 강할수록 난 더 좋아요.”“당신 정말...”“마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죠?”하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순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퍽’하고 내리쳤다.“이렇게 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누가 말했어?”“지난번에 난 기혈과 두통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줬어.”“그런데 지금 당신 문제는 완전히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절대 호전되지 않아!”하현의 말을 들은 형나운은 순간 얼굴이 벌게졌다.그녀는 얼른 엉덩이를 내리고 똑바로 선 다음 서랍 속에서 노란 가죽으로 싼 고서적 한 권을 꺼내 하현에게 건네주었다.하현이 힐끔 쳐다보니 ‘영춘’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집안을 다스리는 처세술에 관한 책인 ‘영춘’은 여자아이의 수련에 안성맞춤이었다.하지만 진짜 ‘영춘’은 기본적으로 무학의 성지에서 내려오는 비법서 같은 것이고 방금 형나운이 꺼낸 책은 남은 자투리 책이라고 할 수 있다.그녀는 자투리 잡서에 가까운 책으로 수련을 하는 바람에 자주 숨이 막히는 증상이 생긴 것이다.하현은 그제야 뭔가를 알아차리며 빠진 부분을 보충해서 써 준 뒤 그녀에게 책을 던져주며 말했다.“이 책은 영춘의 상반부에 불과해. 그래서 내가 상반부만 보충해 줬어. 이렇게 한다면 별일 없을 거야.”“후반부는 당신이 기회를 봐서 오매 도교 사원에 가서 문의해 봐.”“만약 내가 당신한테 준다면 오매 도교 사원이 아마 날 죽이려고 들 거야.”“아, 알겠어요.”형나운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하현이 보충해 놓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