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들에게 각양각색의 정밀한 기구들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루돌프는 팔짱을 낀 채 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은 이런 것들 본 적 없죠?”“우리 서구의 독점 특허 장비예요. 어떤 것이든 당신이 고군분투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어요!”“우리 서구의 의사들은 병을 고치고 사람을 살리는 데에 모든 의학적 수단을 다 동원하죠!”“오늘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똑똑히 보여주겠어요!”하현은 장비들을 잠시 훑어보고서 담담하게 말했다.“어르신은 병에 걸린 게 아닙니다. 아마 십중팔구는 심부전으로 오진할 겁니다.”“의사가 그런 걸 한눈에 알 수 있을 순 없죠.”“이렇게 많은 장비를 가지고도 나중에 오진했다고 변명하지 마세요.”영지루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아저씨의 상황을 한눈에 알아본 거예요?”“지금 내가 헛소리한다는 겁니까?”하현은 한 번 피식하고 웃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루돌프는 냉랭하게 콧방귀를 뀌었다.오늘 제대로 자신의 의술에 반기를 드는 놈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그 명성을 되찾기 위해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장비를 갖춘 다음 천천히 만진해를 검사하기 시작했다.검사를 마친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망설였다가 침착하게 말했다.“어르신, 지금 어르신의 상황으로 볼 때 문제는 심장인 것 같습니다. 심장이 아주 약해져 있어요. 하지만 다른 장비로 검사해 봤을 때 어르신의 심장은 별로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구요...”“그런데 어르신의 병세는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있어요.”“내 말이 맞다면 석 달 안에 어르신은 죽게 될 겁니다!”“뭐라구요!?”영지루는 눈이 휘둥그레졌다.한편으로는 만진해의 병세에 충격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하현의 판단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만진해는 하현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현은 이미 자신의 병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칠절탈명지의 마지막 발작까지 3개월이 남았다.그 안에 치료하지 못한다면 그는 죽는 것이다.증상은 확실히 심부전과 많이 흡
만진해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생사는 운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는 말이 있어.”“성공률이 높지 않으면 됐어!”“닥터 루돌프가 먼 길을 왔는데 천우야, 이분께 섭섭치 않게 챙겨 드려라.”만진해는 남은 시간을 병상에서 연명하고 싶지 않았다.이 말을 들은 루돌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어르신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다만 이 돈은 받기가 민망합니다.”영지루는 단념하지 않았다.“루돌프, 당신은 국제 의학 연맹 최연소 이사예요. 당신은 의술이 뛰어난 의사라구요. 정말 다른 방법 없겠어요?”“심장 이식 수술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루돌프는 심호흡을 했다.“30%의 확률에 모든 것을 걸 것인지 아니면 3개월 동안 죽을 날만 기다리든지요!”“저는 물론이고 국제 의술 연맹 이사장이 와도 이건 고칠 수 없어요.”루돌프의 말에 영지루는 순간 입을 다물고 말았다.이때 하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와 루돌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루돌프, 당신은 의술은 뛰어난지 모르겠지만 식견은 좀 부족해 보이는군요...”“대하의 문화는 넓고 심오해요. 몇 년 배운다고 해서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그러니 당신의 얕은 식견을 탓할 것만도 못 돼요.”“하지만 앞으로 우리 대하에서 그런 잘난 척은 하지 말길 바라요...”말을 마치며 하현은 눈을 낮게 뜨고 만진해를 바라보았다.“어르신, 이 병은 제가 해결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영지루는 하현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당신이 어떻게 해결한단 말이에요? 말도 안 돼요!”“당신이 루돌프보다 대단하다는 말이에요?”루돌프는 방금 하현이 한 말에 얼굴이 벌게졌다.하현이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루돌프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비록 하현 앞에서 약간의 망신을 당하긴 했지만 루돌프의 의술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그는 자신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굳게 믿었다.만진해는 하현의 말을 듣고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
루돌프는 의술이 탁월하다고 자인하며 북유럽에서 오랜 시간 동안 황실과 귀족들의 집안을 드나들었다.게다가 국제의학연맹 이사라는 간판까지 내걸었으니 의학계에서는 늘 권위자였던 셈이다.그가 고칠 수 있다면 고칠 수 있는 것이었고 그가 고칠 수 없다면 누구도 고칠 수 없는 것이었다!방금 하현이 자신의 말 못 할 고충을 사람들 앞에서 들추어내자 루돌프는 이미 그때부터 매우 불쾌했었다.그런데 지금 그가 잘하는 분야에서 하현이 망신을 주니 당연히 더 기분이 나빴다.그의 주변에 있던 조수들과 여자 간호사들은 모두 경멸하는 듯한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그녀들은 대하 사람들이 너무 오만하다고 생각했다.정말로 루돌프의 말 못 할 사정을 알았더라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모른 척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루돌프는 그쪽 방면으로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의 의술만은 누가 보아도 최고였다!“어르신, 제가 한 번 상태를 봐도 괜찮겠습니까?”하현은 루돌프 일행의 비아냥거림에도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만진해를 바라보았다.“방금 말씀드렸듯이 의술은 몰라도 살인술은 제가 좀 압니다.”“칠절탈명지는 아무리 과장해서 말한다고 해도 살인술에 불과합니다.”“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거꾸로 살릴 수도 있는 것이죠.”하현의 당당한 표정에 만진해의 눈동자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만진해 같은 인물은 한눈에 경험이 많은지 적은지 알아볼 수 있었다.하현은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진 사람 같았다.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당당하고 단호할 수가 없을 것이다.“하현, 정말 날 구할 수 있겠나? 확신할 수 있어?”만진해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100% 자신 있냐는 말일세?!”하현은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100%라고 말했으니 분명 100% 자신 있습니다.”“그럼 됐어!”만진해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젊은이가 그런 기개라면 한번 치료해 보시게.”만진해는 하현이 어떻게 자신을 치료할지 매우 궁금했다.비록 하현의 정체를
이 광경을 본 영지루는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다만 만진해가 이미 하현에게 자신의 몸을 허락했기 때문에 영지루도 무슨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오직 만천우만이 자신의 아버지가 곧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로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어르신, 준비되셨죠?”하현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른손을 뻗어 검지와 중지를 칼처럼 세운 후 살짝 움직였다.“자네 마음대로 해 보게.”만진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그러나 아무리 담담한 사람이라도 지금 이 순간은 긴장되고 근육이 약간 팽팽해졌다.“솩!”이때 하현은 곧장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고 갑자기 그의 왼손을 만진해의 얼굴에 떨어뜨렸다.“퉁!”공명이 가득 찬 소리가 울리자 만진해의 얼굴에 순간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하현!”만천우의 안색도 크게 요동쳤다.“감히 저 사람이!”영지루의 예쁜 얼굴에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나쁜 놈!”루돌프의 얼굴이 분노로 슬슬 차올랐다.이렇게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그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의과대학에서 뭐하러 허송세월했겠는가?!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슬슬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을 때...하현은 이미 오른손 두 손가락을 모아 재빠른 손놀림으로 만진해의 명치를 찔렀다.잠시 후 하현의 손놀림은 더욱더 빨라져서 순식간에 일곱 번이나 같은 자리를 눌렀다.그런 다음 하현은 살짝 뒤로 발을 뺐다.그는 뒤로 물러서는 순간에 다시 손바닥으로 만진해의 얼굴을 후려쳤다.“퍽!”순식간에 바닥에는 얼음 결정 같은 것들이 섞인 핏물이 후두둑 떨어졌고 핏물에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만진해는 순간 고통스럽게 얼굴이 일그러졌고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의자에 축 늘어져 꼼짝도 하지 못했다.“아저씨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영지루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져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당신 이건 모욕이에요! 살인이라구요!”루돌프의 조수들과 간호사들도 충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이 사람은 정말
루돌프는 세상이 이런 신기한 의술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하현은 만진해의 얼굴에 뺨을 두 번 때리고 가슴에 손가락으로 몇 번 그은 게 다였다.그런데 그가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선언한 만진해를 죽음의 문턱에서 끌어온 것이다!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왜 어르신을 포박한 겁니까?”“그리고 왜 뺨을 때렸어요?”“그 이유를 꼭 들어야겠습니다!”루돌프는 목이 타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이것이 확실하게 이해가 되지 않으면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았다.애가 타는 듯한 루돌프의 얼굴에 영지루는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조수들은 물론이고 간호사들까지 하나같이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교만하고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루돌프한테서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간단합니다.”하현은 만천우에게도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입을 열었다.“어르신은 21년 간 앓아 오면서 심장에 무리가 생겼어요.”“물리적인 손상은 아니었지만 나쁜 기운이 심장에 박힌 거죠.”“처음에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점점 더 강한 한기가 어르신의 심장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혈액을 타고 온몸을 돌게 된 것입니다...”“그러면서 어르신의 몸은 더욱더 쇠약해지셨고요...”“내가 어르신의 뺨을 때린 것은 첫 번째는 그의 마음에 분노가 생겨서 마음의 한기를 막아내는 저항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어요.”“두번째 뺨을 때렸을 때 어르신의 분노가 한기 가득한 핏물을 내뿜은 거죠...”“자세히 보면 어르신이 내뿜은 핏물이 바닥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어요....”“어르신의 가슴에 맺혀 있던 한기가 사라지면 병세는 완전히 치유될 겁니다...”하현의 설명은 쉽고 간결해서 모두가 이해하기 쉬웠다.만천우와 영지루는 모두 무술을 익힌 사람들이라 바로 이해했다.하현이 말하는 한기는 바로 그 당신 일곱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었다.다만 하현이
영지루는 깜짝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물끄러미 하현에게 시선을 돌렸다.“하현,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다니! 이런 기술을 국가에 공헌하는 건 당연해요. 당신을...”“루돌프, 너무 지나친 말씀입니다.”“의술은 잘 모르고 살인술만 알 뿐입니다!”“학술에는 순서가 있고 예술에도 전문성이란 것이 있습니다.”“난 운이 좋아서 잘하는 분야에서 다행히 사람을 구했을 뿐이에요.”하현은 영지루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루돌프를 일으켜 세웠다.“어르신이 이 병을 앓은 지 오래되셨기 때문에 비록 지금 병의 원인을 제거했다고 해도 기력을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동안 보양을 잘 해야 하구요.”“이후 어르신의 회복에 대해선 당신한테 부탁드리겠습니다.”말을 마친 후 하현은 돌아서서 떠났다.잘나가는 집안의 곱게 큰 여식에게 하현은 일일이 대꾸할 의사가 없었다.하현이 아니라도 영지루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눈먼 귀족 공자들은 얼마든지 많을 테니까.하현은 그런 사람들을 상대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1호 정원에서 이들을 만났다는 것으로 무성에서 하현의 인맥이 또 한층 넓어진 것이다.전에는 만 씨 집안 만천우만이 그에게 고분고분했다면 아마 지금쯤 당당하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하현을 대했던 만천구조차 순한 양이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하현은 그런 세세한 것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그가 만진해를 구한 것은 순전히 만천우의 체면을 위해서였다.하현은 만진해가 젊었을 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런 사람이 만년에 편안하게 지내지 못한다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다.도끼파 본거지에 돌아온 하현은 주변의 어두운 불빛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처음에는 이곳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만 씨 가문의 저택을 보고 나니 비교가 되었던 것이다.하현은 무성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1호 정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만천우에게 부탁해 설은아가 오래 머물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1호 정원
”초대한 사람이 남자야? 여자야?”하현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당연히 여자죠!”설유아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난 이미 어른이에요. 어린애가 아니라구요? 그것도 몰라요?!”“남자가 초대했다면 당연히 거절했을 거예요!”“오늘은 무성 비즈니스 업계에서 신분이 두터운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했어요.”“오늘 오후에 우리 회사에 와서 비즈니스 상담하던 사람이 마침 오늘 이 모임의 주최자여서 날 초대한 거예요.”“언니가 무성에서 단단히 자리잡으려면 이런 자리도 거절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그래서 흔쾌히 승낙했구요!”“하지만 이곳은 낯선 곳이잖아요.”“그래서 형부한테 함께 가 달라고 이렇게 부탁하는 거예요.”이쯤 되자 설유아의 표정은 애처롭게 구걸하는 얼굴이 되었다.“형부, 어차피 무성은 형부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요!”“그렇다고 항상 싸우고 있을 수만은 없구요!”“사람들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사업을 하려면 두루두루 잘 지내 놓아야 한다고들 하잖아요.”“오늘 밤은 우리가 언니의 지위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 두 손 걷어붙였다고 생각해요, 형부?”설유아는 하현의 두 손을 번쩍 들어 흔들기 시작했다.하현은 마치 벌을 서는 듯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하현은 스스로도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서 피식하고 웃었다.“됐어. 보아하니 오늘 그 모임은 부잣집 자제들이 모여 놀고 마시는 자리가 될 것 같은데.”“처제 혼자 가. 난 안 가!”“한여침한테 얘기해서 경호원 몇 명 붙여 달라고 할게.”설유아는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형부, 한여침이 보낸 사람들은 딱 봐도 우락부락하고 험상궂게 생겼잖아요. 옆에 있으면 다들 날 어린애 취급할 거라고요.”“싫어요!”“형부가 나랑 같이 가 줘야 나중에 내가 언니한테 좋은 얘기라도 해 줄 거 아니에요!”“난 알아요. 형부가 우리 언니와 이혼하는 것을 주저한다는 걸요. 많이 아쉬워하시잖아요!”“형부는 사실 언니와의 관계를 개선해서 재결합
이해나는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으며 매혹적인 눈매로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는 한기가 가득했다.그녀의 눈빛을 보아하니 설유아가 자신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까 봐 걱정되어 일부러 마중 나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이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하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해나를 쳐다보았다.“설유아, 당신이랑 함께 일하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이런 자리에 초대했어요.”“내가 너무 지나쳤나요?”하현의 팔짱을 끼고 있던 설유아의 다정한 모습에 이해나의 매혹적인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우리 상류층 만찬에 외부인을 데리고 왔군요.”“샤르마 커가 알면 기분 나빠할 텐데.”“그의 심기를 건드리면 좀 골치 아프거든요!”샤르마 커?인도 특유의 성 씨를 듣자 하현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이해나를 바라보았다.이제야 하현은 설유아가 왜 자신을 이 모임에 데리고 가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아마도 방패막이가 필요했던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하현은 화가 나지 않았다.하현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 대부분이 인도인이란 얘기를 아침에 만천우한테서 전해 들은 터였다.겉으로 보기에 상대방은 설유아를 노리고 온 것 같지만 실상은 자신에게 칼끝을 겨누고 있을지도 모른다.그래서 하현은 인정과 도리에 따라 스스로 이 방패막이가 되기로 했다.설유아는 지금 이해나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는지 방긋 웃으며 말했다.“그냥 친구들 모임인 줄 알았어요. 하현은 내 형부이자 가장 친한 친구거든요. 그래서 당연히 같이 왔죠.”이해나는 하현은 매섭게 쳐다보았다.눈동자에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인도상회 사람이라 당연히 하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듣자 하니 그들의 브라흐마 아부와 가까운 용이국조차도 하현의 손에 당했다고 들었다.다만 그녀는 최희정과 접촉한 적은 있었다.최희정의 말에 의하면 하현은 대구 정 씨 집안의 세력과 설은아의 지위를 믿고 무성에 와서 제멋대로 위세를 떨쳤다고 했다.
”좋아, 당신이 그렇게 잘난 척을 하니 한 명이라도 어디 해고해 봐!”우민은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비아냥이 가득한 얼굴로 하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자! 어서 해 보라니까!”“퍽!”바로 그때 은행 로비의 문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차여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곧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남녀 열 명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양복 차림이었는데 그냥 보기에도 부티가 좔좔 흘렀다.그는 바로 금정은행 은행장, 은둔가 나 씨 가문 나천우였다.나천우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우민은과 이국흥은 모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려 굽신거렸다.“행장님!”“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우민은과 이국흥은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나천우 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환한 미소를 보였다.그런데 평소에는 친근하게 그들을 대했던 나천우가 오늘 이렇게 차가운 얼굴로 들이닥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나천우는 그들에겐 눈길도 돌리지 않고 하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하현의 손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하현,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이 말을 듣고 장내의 분위기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모두 어안이 벙벙해지다 못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곳곳에서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잠시 후 예쁘장한 여직원들이 자신의 뺨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잘못 본 것도 아니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연스럽게 하현에게 쏠렸다.몇몇 여자 고객들도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가 않는지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버렸다.우민은은 마치 사지가 마비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국흥은 더했다.사지가 그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 쉼 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이게 무슨 상황인가?그들은 하현
이국흥은 염치도 체면도 안중에 없는 사람 같았다.그는 없던 일을 있었던 일처럼 꾸몄다.그의 목적은 단 하나, 우민은이 하현을 혼내 주길 바랐던 것이다.이때 설은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부행장님, 그게 아닙니다...”우민은은 이국흥에게 힘을 실어 주러 온 상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설은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감히 우리 은행에서 사람을 때려요?”“간이 배밖에 나왔어요?”“지금부터 당신은 우리 은행 블랙리스트에 오를 거예요!”“이봐! 어서 관청에 신고해!”그녀의 카랑카랑한 말투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그러자 설은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분명 그녀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될 줄은 몰랐다.설은아가 이끄는 회사의 자금줄이 빠듯한 건 사실이었다.그런데 결국 이렇게 완전히 파산하게 되었다.자신이 아홉 번째 집안을 맡은지 얼마나 되었는가?이렇게 빨리 파산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훗날 대구 정 씨 가문의 수장이 되겠다는 것인가?그야말로 허황된 꿈이었다!“하하하! 이게 바로 당신의 최후야!”“이제 알겠어?”이국흥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개자식! 이 개새끼야! 너 방금 정말 미친놈처럼 날 치더라? 정말 대단했지, 안 그래?”“자, 다시 한번 더 해 보시지?!”“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디 한번 보자고!”“퍽!”하현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그의 요구에 답하며 앞으로 걸어가다가 또 한 번 손바닥을 휘둘렀다.이국흥은 하현이 감히 자신에게 또 손을 쓸 줄은 몰랐다.뺨을 맞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그는 가까스로 우민은의 몸에 기댄 덕분에 쓰러지지는 않았다.“미친 거야?!”“당신들 여기가 무법천지인 줄 알아?”우민은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이봐, 어서 신고해!”“은행 협회에 통보해서 설은아한테 대출 다 막으라고 해!”이때 하현은 싸늘한 표정으로 우민은과 이국흥을 바라보며 말했다.“두 사람이야말로 내 블랙리
하현을 말리는 설은아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국흥은 험상궂은 얼굴로 이를 갈며 일어섰다.그는 입가의 피를 닦고 하현을 가리키며 말했다.“개자식! 당신 누구야?!”“당신이 뭔데 감히 이러는 거야?”“날 때려? 감히 날 때렸어?”“내가 뭐?”하현은 앞으로 나서면서 또 손바닥을 올려 이국흥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감히 내 아내한테 그런 모욕감을 주다니! 나한테 누구냐고 물었어?”“내가 누군지 당신 눈엔 안 보여?”“혹시 설 대표가 당신 부인이야?”이국흥은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뭔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신이 그 소문으로만 듣던 그 쓰레기 같은 놈?”“그런데 감히 날 때려?!”“죽여버릴 거야!”하현은 또 그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퍽!”“날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렇지만 내 여자를 건드리는 놈은...”“절대 용서할 수 없어! 오늘이 당신 제삿날인 줄 알아!”퉁퉁 부은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국흥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벌벌 떨었다.“하현, 그만해! 그만하라고!”설은아는 한사코 하현을 말리며 붙잡았다.“또 때리면 정말 사람이 죽겠어!”그녀는 마음속으로는 그를 고맙고 든든하게 여겼지만 불똥이 그에게 튈까 봐 걱정도 되었다.오래된 도시 금정의 은둔가 가문이 뒷배에 있는 금정은행 부장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금정은행의 뒷배인 나 씨 가문은 금정 금융계의 거물이었다.“개자식! 감히 날 때리다니?!”“흥! 넌 이제 죽었어! 내가 반드시 널 죽여버릴 거야!”이국흥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러나 그는 감히 하현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입만 떠들썩하게 떠벌렸다.“반드시 관청에 보고해서 감옥에 처넣어 버릴 거야!”“그리고 제멋대로 날뛰는 네놈 때문에!”“이 여자도 상상하기 힘든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블랙리스트에 올라 금융계에선 다시는 일 원 한 푼 빌릴 수 없게 만들 거라고!”“
설은아는 얼굴이 굳어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부장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부장님이 이천억, 아니 이조를 준다고 해도 난 이런 파렴치한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요!”“설 대표님, 왜 그렇게 고지식하게 굴어요!”“아니 그냥 잠 한 번 자는 것 가지고 뭘 그래요? 결국 서로 윈윈하는 거 아닙니까?”“다른 사람들은 이런 기회가 없어서 꿈도 못 꾼다고요!”“그런데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요?”“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혼도 한 번 했겠다 잠 한 번 자는 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남의 편의를 봐주고 내 이익을 챙기면 되는 거죠.’“이번에 잘 하면 앞으로도 대표님은 육 씨 도련님의 사람이 되어서 금정에서 편하게 사업할 텐데, 그런 기회를 발로 차버려요?”“대표님이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돈을 빌릴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러면 금정에선 사업하기 힘들어져요!”“왜 돈을 앞에 두고 내팽개치려는 거예요?”이국흥은 이 바닥에서 닳을 대로 닳은 인물이었다.이런 일에 경험도 많고 비열함 따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상대를 앞에 두고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며 이리저리 이로울 대로 몰아가고 있었다.정신력이 보통인 여자가 아니라면 그의 능수능란한 언변과 뻔뻔스러운 행동에 쉽게 넘어가고도 남았다.설은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섰다.“이 부장님, 내가 돈이 필요하긴 해요!”“하지만 돈 때문에 내 몸과 영혼을 팔진 않을 겁니다!”설은아에겐 분명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있었다.“좋아요, 안 받으셔도 됩니다!”“없던 일로 하죠!”이국흥은 테이블을 탁 치며 노기등등한 표정을 지었다.“게다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은 우리 금정은행에 따로 오백억 빚이 있습니다!”“계약대로 다음 달에 갚아야 하고요!”“기한이 지나면 우리 금정은행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 자산을 몰수할 권리가 있습니다!”“그렇게 되면 대표님도 자리를 보전할 수 없을 겁니다!”
”대출이 갱신이 안 되어서 우리 회사가 두 달째 월급을 못 주고 있어요.”“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고 공장 생산도 중단되었어요.”“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회사는 정말 파산할 거예요.”설은아는 조심스럽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말했다.“이 부장님, 우리 회사랑 거래하는 게 처음도 아니잖아요.”“부장님도 우리 집안에 대해 잘 알고 계시고요. 우리 뒤에는 10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인 대구 정 씨 가문이 있어요.”“도와주신다면 그 은혜 꼭 보답하겠습니다.”이국흥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설은아를 바라보았다.“설 대표님, 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대표님 회사는 지금 장부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 위험평가를 통과할 수가 없어요!”“내가 직업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업윤리를 어겨 가면서까지 대표님을 도와드릴 순 없잖습니까?!”“안타깝지만 우리 은행에서 이번 대출 연장은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하지만 우리 은행에서 대표님께 기회를 안 드리는 건 아닙니다...”말을 마치며 이국흥은 미리 준비해 둔 서류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서남 천문채 육 씨 도련님이 당신한테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하는군요.”“이건 이천억을 빌린다는 차용증입니다. 대표님이 여기 서명만 하면 당장 효력이 발생하고요.”“언제든지 돈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하지만 육 씨 도련님이 말씀하셨어요. 하룻밤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고.”육 씨 도련님?!설은아는 낯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녀는 분명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그래서 그녀의 눈빛에선 겨울 칼바람 같은 매서운 기운이 넘실거렸다.“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직업윤리도 없고 염치도 없으세요?”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이국흥은 뻔뻔스럽게 입을 열었다.“당연히 무슨 말씀인지 알 텐데요.”“난 대표님이 육 씨 도련님의 요구대로 했으면 합니다!”“그분이 누굽니까? 서남 천문채에서 어마어마한 지위에 있지 않습니까? 잘 아시면서 왜 그러
”아, 아니...”“대, 대사님! 대사님!”이때 나천우는 정신을 차리고 울부짖으며 하현을 쫓아가려고 발버둥쳤다.임단은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나천우를 뒤따랐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현은 그들에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나천우 부부가 급한 마음에 부하들에게 전화를 걸어 얼른 하현을 뒤쫓으라고 하려던 참이었다.나천우를 뒤쫓아온 형나운은 나천우의 전화기를 툭 쳤다.“천우 오빠, 또 일을 그르치려고 그래?!”그녀는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다.“지금 하현이 화가 나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게 생겼는데 부하들이 쫓아간들 어쩌겠어?”“하현이 돕지 않겠다고 하는데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겠어?”나천우는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 되었다.“형나운, 우리가 잘못했어.”“우리가 눈이 멀었나 봐. 눈앞에 사람을 두고도 제대로 볼 줄 몰랐으니 말이야!”“하지만 너랑 나랑 오랜 인연을 생각해서 부디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잘 좀 봐달라고 말 좀 해 줘!”“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돈 문제는 절대 신경 쓰지 마!”“맞아.”이때 임단도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형나운, 그러면 주소라도 알려줘. 우리가 가서 삼고초려라도 해 볼게!”“좀 진정해. 이렇게 쫓아가 봐야 아무 소용없어.”형나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조금 있다가 내가 전화해 볼게.”그 시각 진회강 강변에 위치한 금정은행 본사 앞.설은아는 머뭇거리다가 뭔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은행 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마침 택시를 타고 지나가던 하현이 설은아의 모습을 보았고 자금난에 허덕이는 그녀의 사정을 급히 떠올리며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한 뒤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뒤따랐다.하현이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마침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전화를 받아보니 형나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나 사장 부부가 잘못을 깨닫고 직접 사과드리고 싶다고 해요.”“내 얼
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형나운도 틀림없이 이 사기꾼에게 속았다고 생각했다.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감히 자신을 풍수대사라 할 수 있겠는가?장난하는 건가?이런 사람이 사기꾼이 아니라면 누가 사기꾼이란 말인가?임단이 참지 못하고 옆에서 끼어들었다.“그럼 당신은 음양학을 배운 학생이에요?”하현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아니요. 난 굴착기를 배웠어요. 기술도 좋고 자격증도 있어요.”“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갑자기 표정이 냉랭해졌다.“지금 뭐라는 거예요?”“굴착기를 배운 사람이 무슨 풍수를 본단 말이에요?”“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예요?”“대하에서 풍수지리가 얼마나 큰 위상을 차지하는지 몰라요?”“우리를 속이려 들다니 후환이 두렵지도 않아요?”나천우의 말에 형나운의 안색이 새까맣게 일그러졌다.그녀는 다급하게 나천우에게 눈길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오빠, 그만하면 안 돼!”“우리 두 집안의 친분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내가 이런 중요한 일을 두고 오빠를 속였을 거라고 생각해?”“내가 바보야?!”“너 나 속이는 거 아냐?”나천우의 얼굴은 냉랭하게 식었다.“너도 자세히 봐 봐. 이 젊은 사람은 풍수라는 두 글자도 모르는 것 같은데 어떻게 믿으란 얘기야?!”“이 사기꾼을 만나려고 내가 금정은행 투자 포럼도 안 나가고 여기 왔겠냐고!”임단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비난에 열을 올렸다.“형나운, 당신 정말 경솔했어!”예전 같았으면 두 집 사이에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형나운이 하현에 대해 거의 신처럼 말했다는 것이다.나천우와 임단은 자신들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줄로 알고 커다란 희망을 품고 여기 왔다.다만 희망이 크면 실망도 큰 법이고 분노는 걷잡을 수 없다는 걸 몰랐을 뿐이다.“나 사장님?”형나운은 하현의 목소리에 그에게 눈길을 떨구며 손을 내저었지만 하현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담담한 눈
”형나운, 정말 축하해!”“우릴 속이지 않았군!”“그런데 그 대사님은 어디에 계셔?”“얼른 좀 소개해 줘!”나 사장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병은 이미 수많은 국내외 명의들한테 보여줬어. 국수인 장북산 선생님도 보셨지!”“어르신은 우릴 보고 병이 아니라 악에 부딪힌 것이라고 하셨어.”“풍수에 정통한 사람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대.”“하지만 수많은 풍수지리사를 만나봤지만 도저히 해결되지 않았어.”“어쨌든 형나운, 당신이 대사님한테 말 좀 잘 해 줘!”나 사장의 부인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형나운, 우리를 살릴지 말지 여부는 전적으로 당신의 손에 달려 있어.”“이 일이 잘 해결되면 최고 가문에서 기가 막힌 남편감을 물색해 줄게. 정말 섭섭하지 않게 해 줄 거야!”옆에 살짝 비켜서 있던 하현의 이마에 주름살이 잔뜩 드리워졌다.기가 막힌 남편감?뭐가 기가 막히다는 거지?형나운은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나 사장님, 그 대사님은 바로 가까운 곳에 있어요.”“하현, 소개할게요. 이 분은 나천우 사장님, 그리고 이쪽은 나 사장님 사모님, 임단.”“나 사장님은 나 씨 가문 출신이에요.”“나 씨 가문은 형 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금정에 토박이로 아주 뿌리가 깊은 가문이죠.”“예로부터 은행업을 해 왔고 지금도 금정에서 가장 큰 은행인 금정은행을 움직이는 가장 큰 지주이자 실세죠.”“나 사장님 부부는 결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자식이 없어요. 그래서 온갖 치료를 받았지만 성과가 없어서 결국 풍수지리술에 기대 보려고 하고 있어요.”“할아버지 얘기를 듣고 여기까지 오셨고요.”“우리 형 씨 가문과 나 씨 가문은 사이가 좋아서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당신한테 말도 없이 여기로 오라고 했어요.”형나운은 조금 찔리는지 불안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하현, 이렇게 불쑥 말을 꺼내면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지만 제발 나 사장님 부부를 좀 도와줬으면
하현은 이맛살을 구기며 말했다.“말로 하면 되지! 당신 왜 이러는 거야? 이런 행동을 왜 하는 거냐고?”“내가 그런 사람이야?”“하현, 치료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형나운은 미안한 듯 겸연쩍어하며 말했다.“그래서 내가 주동적으로 이런 자세를 보인 거예요. 언제든지 와도 상관없다고.”“아무튼 당신이 날 고쳐 줄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요.”“강하면 강할수록 난 더 좋아요.”“당신 정말...”“마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죠?”하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순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퍽’하고 내리쳤다.“이렇게 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누가 말했어?”“지난번에 난 기혈과 두통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줬어.”“그런데 지금 당신 문제는 완전히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절대 호전되지 않아!”하현의 말을 들은 형나운은 순간 얼굴이 벌게졌다.그녀는 얼른 엉덩이를 내리고 똑바로 선 다음 서랍 속에서 노란 가죽으로 싼 고서적 한 권을 꺼내 하현에게 건네주었다.하현이 힐끔 쳐다보니 ‘영춘’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집안을 다스리는 처세술에 관한 책인 ‘영춘’은 여자아이의 수련에 안성맞춤이었다.하지만 진짜 ‘영춘’은 기본적으로 무학의 성지에서 내려오는 비법서 같은 것이고 방금 형나운이 꺼낸 책은 남은 자투리 책이라고 할 수 있다.그녀는 자투리 잡서에 가까운 책으로 수련을 하는 바람에 자주 숨이 막히는 증상이 생긴 것이다.하현은 그제야 뭔가를 알아차리며 빠진 부분을 보충해서 써 준 뒤 그녀에게 책을 던져주며 말했다.“이 책은 영춘의 상반부에 불과해. 그래서 내가 상반부만 보충해 줬어. 이렇게 한다면 별일 없을 거야.”“후반부는 당신이 기회를 봐서 오매 도교 사원에 가서 문의해 봐.”“만약 내가 당신한테 준다면 오매 도교 사원이 아마 날 죽이려고 들 거야.”“아, 알겠어요.”형나운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하현이 보충해 놓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