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민설은 원망 가득한 눈빛이었다.이번에 하구천은 많은 준비를 했었다.목적은 단 하나.단 번에 하현을 쓸어버리는 것이었다.강학연이 장남백의 전갈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후 누구보다 먼저 사람들을 데리고 현장을 찾아온 하구천과 허민설이었다.눈앞에서 하현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서였다.그런데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되다니!그것은 그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이었다.항상 제멋대로에 거칠 것 없이 행동하던 강학연이 장남백을 도울 생각은 하지 않고 공손한 자세로 하현을 맞이하며 같이 식사를 하러 가다니!이게 무슨 상황인가?“허민설, 내가 당신한테 여러 번 말했지. 큰일마다 이런 예상치 못한 순간은 있는 거야. 그렇게 초조해서 뭐해?”하구천은 눈을 가늘게 뜨며 뭔가 전략을 짜는 듯한 미간을 보였다.“예전에 용전 항도 지부에 용문주가 나타나 하현의 편을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일이 이미 강학연에게 전해진 것 같아.”“강학연은 아주 늙은 여우야. 함부로 움직이지도 함부로 누구 편에 서지도 않는 사람이야.”“그런데 오늘 저녁 하현과 함께 식사를 하다니. 분명 하현에 대해 뭔가 더 알아내려는 수작일 거야!”“하현이 여자 치마폭에 싸여 호의호식하는 남자라는 걸 강학연이 알게 되면 아마 지금처럼 저렇게 공손하게 대하진 않을 거야!”“마리아가 한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예전에 강 씨 집안은 확실히 노국 황실의 개였을 거야!”“강학연이 더 이상 하현이 용문주의 후계자가 아니라고 확신하기만 한다면 그는 언제든지 직접 나서서 하현을 죽일 거야.”“그렇게 해야 한편으로는 노국에 또 한편으론 용문 집법당에 그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보일 수 있지.”“그리고 마지막으로 장 씨 집안과 우리 항도 하 씨 가문에도 보란 듯이 자신의 충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고.”“일석삼조라고 할 수 있지!”하구천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허민설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하구천, 하현이 용문주가 선택
허민설은 머릿속으로 하현의 최후를 떠올렸다.제대로 된 기반도 없이 함부로 날뛰다가 최후를 맞이할 하현을 생각하니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그들의 구역에서 그들 세력이 즐비한 상황에 하현 한 사람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란 걸 진정 모르는 걸까?제멋대로 날뛰고 경외로움이 뭔지도 모르며 여기저기 미움을 사다가 결국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 모르는 놈이 분명했다.허민설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그녀는 핸드폰을 한번 힐끔 보고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강학연 그 늙은 여우가 하현을 직접 해결하진 않았나 봐.”“하현을 금옥루로 데려간 뒤 다른 핑계를 대고 떠났다나 봐.”“강옥연한테 하현을 대접하라고 하고는 자신은 쏙 빠졌대.”“설마 강학연 그 늙은이가 하현과 뭔가 친분 관계를 만들려는 거 아냐?”허민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만약 강학연과 하현 사이에 친분이 생긴다면 하현은 항성과 도성에서 더 많은 인맥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이것은 결코 하구천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강옥연...”하구천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강옥연의 이름을 중얼거렸다.“강학연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우리가 어서 그에게 따끔한 주사를 놔 줘야겠군. 우리 하구천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는 그리 쉽지 않다는 걸 알려줘야지, 안 그래?”“항성과 도성 두 도시는 결국 항도 하 씨 손아래에 있는 땅이니까!”“누구라도 이 구역에서는 함부로 날뛸 수 없지!”“아무리 그게 하현이라도 말이야!”...항성 금옥루.하현은 테이블 중앙석에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잠자코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맞은편에는 기껏해야 이십 대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밝은 인상의 숙녀가 앉아 있었다.하지만 몸매는 어느 성숙한 여인보다 아름다웠고 눈매는 그린 듯 빼어난 곡선을 자랑했다.강학연은 자리에 앉자마자 급한 일이 생겼다며 떠났고 지금 하현과 강옥연 두 사람만이
강옥연은 강 씨 집안 아가씨였지만 평소에 금옥루에 와서 돈을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그런 그녀가 친구들을 모두 불렀으니 이십 대 허영심 많은 남녀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강옥연은 하현에게 물어보지 않고 태블릿PC를 들고 알아서 주문하기 시작했다.그러고 나서 강옥연과 그녀의 친구들은 크고 작은 소리로 웃고 떠들었다.하현은 이 장면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비록 강학연이 두 사람을 위해 마련한 자리였지만 하현은 강옥연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이렇게 온 김에 밥이나 먹고 가면 그만이었다.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찻잔에만 열중했지만 강옥연의 묘한 시선은 자꾸만 하현에게 떨어졌다.강옥연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친구들도 힐끔힐끔 하현을 쳐다보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어쨌든 강 지회장님이 강옥연과 선을 보라고 부른 남자이니 남다른 데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하현이 조용히 찻잔을 기울이고 있자 남자들은 그가 금옥루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장관에 기가 눌렸다고 생각하며 어느덧 슬슬 무시하는 눈빛으로 그를 보며 서로 자신들을 치켜세우기 바빴다.이 남자들은 모두 항성에서 유명한 졸부들의 2세였다.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어떻게 강옥연의 무리에 낄 수 있었겠는가?이따금씩 슬쩍슬쩍 롤렉스 시계를 드러내며 머리를 쓸어넘긴다든지 고급 외제차 열쇠를 무심한 듯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든지 오메가 시계가 둘러쳐진 손목을 자랑스럽게 보인다든지 하는 그들의 행동은 졸부 2세들이 보이는 꼴같잖은 행태 그 자체였다.남자들을 쳐다보는 여자들의 눈에는 흐뭇한 빛이 넘실거렸다.오직 강옥연만이 이 남자들에게 별다른 시선을 보이지 않았다.용문 항도 지회는 겉으로 위용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항성 S4에 필적할 만한 것이다.그래서 어린아이들 놀이하듯 서로 자랑에 목매어 있는 모습들이 강옥연은 못내 탐탁하지 않았다.졸부 2세들의 과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조용히 차를 마시며 음미하는 하현은 모습은 오히려 강옥연에게
”손서기 매니저님. 어떻게 된 거예요? 우리 주문한 지 삼십 분도 더 되었다구요. 왜 애피타이저도 안 나오는 거예요?”“나 주시윤을 무시하는 거예요?”과시욕이 강한 주시윤은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손목에 차고 있던 오메가 시계를 보란 듯이 드러내며 고급 외제차 열쇠를 흔들어 보였다.“여러분, 안녕하세요.”손서기는 주시윤은 쳐다보지도 않고 빙긋이 웃으며 시선을 한 바퀴 빙 훑더니 강옥연에게 고정시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방금 알고 보니 이 룸은 이미 예약되어 있었어요.”“지금 다른 룸은 없고 홀에서 그냥 드시면 안 될까요?”“화장실 옆쪽에 테이블을 하나 추가했어요.”“제 성의 표시로 오늘 주문하신 금액에서 20% 할인해 드리겠습니다.”손서기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들어온 목적을 숨김없이 말했다.“이미 예약되었다구요?”화가 치밀어 오른 주시윤이 가장 먼저 나섰다.“이 룸은 강옥연이 미리 예약한 거예요. 게다가 우리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알기나 해요?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누가 예약했다구요?”“여길 비우라구요?”“농담이죠, 예?”“그래요? 어떻게 된 거죠? 프런트 데스크에서 아마 미리 알려드리지 못한 것 같은데 제가 제대로 처리하겠습니다.”손서기는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그렇지만 그 일은 그 일이고 이 일은 이 일이죠.”“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항성에서 유명한 분들이시니 잘 알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 금옥루의 룸은 일정한 지위와 신분을 가지신 분만 들어올 수 있어요. 다들 아시죠?”“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여러분들 신분으로는 이 룸을 예약할 자격이 안 됩니다.”“화장실 옆쪽에 따로 특별히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저희로서도 최선을 다 한 거예요.”“그러니 여러분들도 협조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손서기는 한마디 한마디 단호하게 힘주어 말했다.“어쨌든 예약한 손님들이 곧 오실 텐데 여러분들이 여기 계속 계시면 서로 불미스러운 일이잖아요? 만약 그렇게 된
조금 전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 씩씩거리던 주시윤은 허민설이라는 말에 갑자기 움찔하며 고개를 떨구었다.다른 졸부 2세들도 모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었다.허민설은 항성 S4 최고 가문인 허 씨 가문 사람이다.그뿐만 아니라 항도 하 씨 가문 하구천과 매우 가깝게 지내는 최측근이다.허민설에게 미움을 산다는 것은 하구천에게 미움을 산다는 얘기다!그곳에 있던 졸부 2세들은 하구천이라는 세 글자를 듣고 바로 겁을 잔뜩 먹었다.어찌 감히 그에게 미움 사는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강옥연 씨, 허민설이 온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이해하셨죠?”손서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강옥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이제 상황을 아셨으면 홀에 있는 테이블로 옮겨 주시겠어요?”“이따가 다른 직원들한테 맥주나 음료수 서비스 잘 해드리라고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섭섭하지 않게 드릴 거예요.”웃는 듯 마는 듯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는 손서기를 보며 하현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이 여자, 하는 짓이 매우 얄밉고 음흉하다.만약 오늘 밤 강옥연이 허민설이라는 이름에 겁을 먹고 여기서 물러난다면 강 씨 집안의 체면은 물론이고 용문 항도 지회장의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된다.강옥연이 일어서려는 것을 보고 하현은 그녀가 겁을 먹고 물러서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오히려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러고 나서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천천히 손서기 앞으로 나갔다.“매니저님. 당신이 이 식당 매니저라면 지금 이 식당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계시겠죠?”강옥연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손서기는 한껏 비꼬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당연히 알고 있죠...”“퍽!”손서기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옥연은 이미 손바닥을 후려쳐 손서기의 뺨을 날렸다.“누가 주인인지 알면서도 감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한 거야?”“계속 오냐오냐해 줬더니 아주 자기가 주인인 줄 안다니까!”
강옥연은 거침없이 이리저리 손바닥을 휘둘렀다.손서기의 얼굴은 점점 더 푸르스름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녀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우리 강 씨 집안이 요 몇 년 동안 너무 겸손하게 굴었더니 당신은 우리 집안을 아주 마음대로 휘둘러도 된다고 생각한 거야? 그런 거야?”“우리 할아버지가 당신한테 너무 관대하게 대해서 오히려 당신은 우리 강 씨 집안의 권위가 없어졌다고 생각했어?”“다른 주인에게 기대면 우리 강 씨 집안을 무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냐구?”“퍽!”“어서 당장 꺼져!”강옥연은 쇄기를 박듯 마지막으로 손서기의 뺨을 후려쳤다.“짐 쌀 시간은 줄 테니 어서 썩 꺼져!”“다음에 내가 금옥루에서 또 당신을 보게 되면 그땐 당신 죽여 버릴 줄 알아!”손서기는 망나니처럼 머리가 헝클어졌고 얼굴은 푸르스름하게 부풀어 올라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조금전 거들먹거리며 룸에 들어왔던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 되었다.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낭패와 처참함만이 그녀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하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강옥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용문 항도 지회장의 손녀인 그녀가 만약 위축되어 겁을 먹었다면 하현은 아주 실망하며 경멸의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을 것이다.하지만 이렇게 결단력 있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담력을 가졌다니!천하를 호령하는 듯한 기세에 하현은 적잖이 감탄한 눈치였다.다른 졸부 2세들은 강옥연을 멀뚱멀뚱 바라볼 뿐 입도 떼지 못했다.평소 점잖고 조용해 보이던 강옥연이 이렇게 발끈하며 기세등등하게 다른 사람의 뺨을 후려갈길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소위 군계일학이라고 하는 말은 지금의 강옥연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강옥연, 금옥루는 당신 집안에서 단독으로 운영하는 곳이 아니야. 다른 주주들의 승인도 없이 금옥루의 매니저를 마구 때리고 해고하려고 해?”“이건 규칙에 어긋나는 짓이잖아?”손서기가 강옥연에게 다시 대들려고 했을 때 갑자기 문 앞에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쯧쯧쯧. 강옥연, 그게 무슨 소리야?”“혹시 이 금옥루에 당신네 강 씨 집안 지분이 30%밖에 안 된다는 거 잊은 거 아니야?”“우리 허 씨 집안은 40%나 된다구!”허민설은 일행은 강옥연 앞으로 다가가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거침없이 말했다.“간단히 말해서 이 금옥루는 우리 허 씨 집안이 진짜 주인이라는 얘기야!”“손 매니저는 우리 허 씨 집안에서 스카우트해 온 매니저라고!”“당신이 감히 손 매니저를 때려? 굴욕을 줘? 여기서 꺼지라고?”이 말을 들은 손서기는 갑자기 거만하고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역시 자신의 뒤에는 든든한 허민설이 있었다.허민설이 강옥연을 이렇게 압도할 줄 그녀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당신네 허 씨 집안이 주인이라고?”강옥연은 냉소를 터뜨렸다.“허민설, 우선 의사한테 가서 머리에 이상이 없는지 검사부터 하고 와!”“당신이 망신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허 씨 집안까지 체면을 다 잃기 전에 말이야!”“잊지 말고 잘 들어. 처음에 우리가 주식을 양도할 때 분명히 말했어. 우리 강 씨 집안이야말로 금옥루의 영원한 주인이라고!”“말 다 했어?”“뭐? 영원한 주인?”허민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강옥연, 사회생활 하루 이틀 하는 거야? 어쩜 이렇게 순진할 수가 있어?”“이 세상에는 확실히 기록한 증거가 있어야 주장할 수 있는 거야. 우리 집안에선 그런 약속한 적이 없다구!”“분명히 말했다고 하는 건 당신네 강 씨 집안 주장일 뿐이잖아?”“분명히 그때 당신네 강 씨 집안에서는 더 이상 금옥루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했어! 이게 내가 기억하는 사실이야!”“게다가 요 몇 년 동안 당신네 강 씨 집안에서는 금옥루를 전혀 관리하지 않았어. 금옥루 직원 채용하는 것부터 모든 업무에 이르기까지 다 우리 허 씨 집안에서 관리하고 있었다구!”“간단히 말해서 당신네 강 씨 집안은 매년 그 30%의 주식에 대한 배당을 받는 것 외에 금옥루에
”게다가 몇 년 동안 당신네 강 씨 집안은 금옥루를 전혀 관리도 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30% 지분에 대한 배당금을 다 받아 가겠다고?”“강 씨 집안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잘 들어. 당신네 강 씨 집안의 배당금은 우리 허 씨 집안 손에 달렸어!”“우리 허 씨 집안에서 매년 몇 천만 원씩이나 강 씨 집안에 보냈어. 그것도 이미 많이 봐 준 거였어!”“만약 당신이 못 믿겠으면 당장 관청에 우릴 고발해. 그러면 오히려 일만 커지는 꼴이 돼! 누가 망신을 당하는지 두고 보자구!”허민설은 매서울 얼굴로 쏘아붙였다.“그래? 우리 강 씨 집안에서 받는 배당금이 당신 허 씨 집안의 손에 달렸다고?”강옥연은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 엷은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말했다.“그럼 우리 강 씨 집안은 허 씨 집안에서 준 배당금에 그저 감사해야겠네?”“이렇게 하자구. 연 10%의 이자를 붙이면 되겠어.”“몇 년 동안 당신네 허 씨 집안에서 우리 강 씨 집안에 줄 돈을 얼마나 빼돌렸든 간에 모두 10%의 이자를 붙여.”“일주일 시간을 줄 테니 한 푼도 떼지 말고 돌려줘.”“허 씨 집안이 이렇게 어마어마한데 설마 우리 집안에 줄 이 정도 작은 돈이 없는 건 아니겠지?”“고발? 망신을 당해? 우리 강 씨 집안은 그런 거 신경 안 써!”“허 씨 가문이 차기 항독 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던데.”“기본적인 신용도 없는 가문이 어떻게 항독 자리를 넘볼 수 있어?”“만약 이 일이 커지면 의원들이 당신네 허 씨 집안에 표를 줄 거 같아?”강옥연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관했지만 사람을 죽일 만큼 매서운 촌철살인이었다.“그만해! 강옥연!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허민설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온데간데없었다.울그락불그락 잠재우지 못한 화가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몇 년 동안 금옥루의 이익은 모두 우리 허 씨 가문의 것이야! 당신 강 씨 가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구!”“그 돈에 눈독 들일 생각 추호도
집복당 후원과 앞뜰을 잇는 긴 회랑.회랑 양옆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 사이를 숨바꼭질하는 금붕어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이곳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명한 정원과도 맞먹는 유려한 풍광과 격조가 느껴졌다.아름드리나무가 테두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고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즈넉한 정자, 단단한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바위 정원, 그 사이를 유유히 유람하는 맑고 고요한 물줄기.더운 여름에도 이곳에서는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일렁거려서 무릉도원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가운데 있는 정자에는 흰색 긴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하나로 머리를 묶은 화장기 없는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손에 나침반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그녀의 곁에는 오래된 죽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촉감으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칼로 빼곡하게 글자를 새겨 놓았다.눈이 멀고 온몸에 힘이 빠져도 글과 그림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것 같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현의 눈에서는 절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요즘 젊은 여자들 대부분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미인이란 미인은 도처에 널렸다.하지만 이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여자는 찾기 어렵다.“할아버지, 정말 우리 집복당을 팔 생각이세요?”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 뭔가를 눈치챈 황보정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표정을 말했다.“저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천기를 누설한 업보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했잖아요?”“조상님들이 물러주신 이 집복당을 판다고 해도 내 병을 고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요. 다 헛수고라고요.”“그러니까 할아버지, 나중에 죽어서 조상님 뵐 낯도 없어서 전전긍긍하시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황보정은 글과 그림에 대한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착한 마음씨와 효를 심성에 장착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정아, 넌 내 하나밖에
하현의 몇 마디에 모든 문제가 줄줄이 해결되었다.손님들은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 하현이 자신의 문제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들이 믿고 떠받들던 황보동은 한켠에 방치되었다.하현은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등을 빠른 속도로 설명하며 근본적인 원인부터 해결책까지 한 번에 술술 늘어놓았다.다들 놀란 표정으로 하현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문제가 해결되자 감격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하현이 붉은 주사 광물을 가지고 각종 부적을 그려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이웃들은 모두 집복당에 젊은 신선이 왔다고 말하며 달려 나갔다.심지어 일부 아줌마들은 자기 딸이 몇 년 동안 시집도 못 가는 일까지 하현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섰다.하현은 한 명 한 명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많은 의견과 해결책들을 제시했다.즉석에서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당사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소위 풍수지리사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일을 한다.이 과정에서 황보동은 옆에서 하현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는 들으면 들을수록 표정이 엄숙하고 경건해졌다.하현이 하는 말들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서로 다 알고 지내는 이웃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평소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누구보다 황보동이 잘 알고 있었다.하현이 침착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황보동의 눈빛은 어느새 그에 대한 경의로 가득 찼다.황보동의 기억 속에 그가 이런 광경을 본 적은 어린 시절뿐이었던 것 같았다.그래서 하현의 모습을 보자 황보동은 아련한 설렘마저 느끼게 되었다.결국 황보동은 자발적으로 책상 옆으로 가서 하현의 조수로 변신해 부적 그리는 것을 도왔다.“하 대사, 당신이 진정한 대사일세!”손님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황보동은 하현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자네는 나를 훨씬 능가하는 재주를 가졌어!”“자네가 이 집복당을 이어간다면 그건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는 것과 같아!”그의 인생에서 가
하현의 말을 들은 황보동은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하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보려는 것이 분명했다.하현은 아줌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아주머니, 앞으로 옷을 입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티셔츠를 거꾸로 돌려서 입으면 계속 목을 조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숨쉬기도 힘들고 잠도 푹 잘 수 없습니다!”“그것만 주의하면 십중팔구는 아무 어려움 없이 푹 잘 수 있을 거예요.”“물론 계란은 잘 챙겨 먹어야 합니다.”하현의 말을 듣고 온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모두 어리둥절해져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잠시 후 엷은 미소가 얼굴에 번지기 시작했다.가만히 눈을 들어 아줌마를 보니 역시나 옷을 거꾸로 입고 있었던 것이다.이렇게 목을 조르고 있으니 당연히 호흡이 곤란해지고 밤에 잠도 잘 수 없었을 것이다.황보동은 이 아줌마보다 하현이 더욱 궁금해졌다.황보동은 일단 아줌마에게 부적을 써서 건네주었고 이윽고 두 번째 손님이 다가왔다.두 번째 손님은 팔십이 넘은 노인이었는데 머리가 좀 헝클어져 있었고 미간에 약간 거뭇거뭇한 빛이 돌았다.몸에는 약취가 풍겨서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황보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나침반을 꺼내 잠시 바라본 뒤 담담한 눈빛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자네, 이분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말해 보게.”하현은 노인을 유심히 쳐다보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이 노인은 아마 며칠 전에 외출할 때 개똥을 밟았고 실수로 또 시궁창에 빠졌을 겁니다.”“그로부터 며칠 동안 운이 없게도 외출할 때마다 크고 작은 재해를 입었습니다.”“물만 마셔도 이가 시릴 지경일 겁니다.”“요즘 아주 운이 나쁜 일 연속이었을 거예요.”“해결책은 간단합니다.”“집으로 돌아가 목욕재계하고 사흘 밤낮으로 쉬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그리고 앞으로 외출할 때는 하늘만 쳐다보지 마세요.”“척추에 문제가 있으면 의사를 찾아가 물리치료를 해야 합니다. 하늘만 쳐다본다고 병이
”제가 사기꾼일까 봐 집복당의 이름을 빌려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셨던 거죠.”“그래서 이천억이란 금액을 불러 절 놀래켰고요.”“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있다고 한다면 돈이 부족하지 않다는 얘기가 되니 안심할 수 있는 거죠.”“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없다면 대사님의 손녀를 구하려고 할 테고요. 혹시라도 제가 구한다면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다는 얘기가 되니 집복당의 새 주인이 되어도 걱정할 일이 없는 거죠.”“한마디로 황보대사님이 매우 고심하고 계시다는 뜻이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결국 대사님 같은 분은 스스로 최소한의 지켜야 할 도리 같은 게 있는 겁니다. 돈 때문에 그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었던 거죠.”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황보동을 바라보았다.풍수를 보러 온 십여 명의 손님들이 하현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어쩐지 평소 붙임성 좋고 환하게 사람들을 대하던 황보대사가 이상하리만큼 싸늘하게 대하더라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로군!하현의 말을 듣고 황보대사의 의도를 간파한 간민효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소를 떠올렸다.그녀도 분명 황보동의 인품을 믿고 싶었던 게 틀림없었다.“이보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도 능력이지만 풍수지리사는 입만 번지르르하다고 되는 게 아니야. 진짜 실력이 좋아야 하는 거야.”“만약 자네가 입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이라면 남을 살리고 도와주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고 그 입 조심하지 않으면 목숨도 잃을 수가 있어.”황보동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내 일 방해하지 말고 어서 썩 꺼져!”말을 하면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나침반을 내려놓고 붉은 종이를 꺼내 부적을 쓰려고 했다.“제 추측이 맞다면...”하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대사님은 이 아줌마가 악습에 깊이 마음을 다쳤다고 판단해 이 부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 차분하게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할 겁니다.”나침반을 든 황보동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하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현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지만 황보동은 냉담한 눈빛으로 얼굴도 들지 않고 매몰차게 말했다.“우리 집복당은 시장에서 파는 허드레 물건이 아니야. 이천억! 다른 가격으로는 안 팔아!”“어때? 살 거야? 말 거야?”차갑고 매마른 말투였다.하현은 눈동자를 살짝 움츠렸다.상대는 분명 뭔가 못마땅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간민효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황보대사님, 우리 장사꾼들은 신용을 중시합니다.”“정직이 천하를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제 기억이 맞다면 어제 분명 이백억에 하기로 한 것 같은데요?”“왜 갑자기 이천억이 된 거죠?”“전 이미 유명한 부동산 전문가를 고용해 이곳에 대한 평가를 꼼꼼히 진행했어요.”“이곳은 많아 봐야 백오십억 정도의 값어치가 있어요. 손볼 곳도 너무 많고요.”“어르신이라 아주 후하게 쳐서 이백억을 제시한 거예요.”“제 호의를 무시한 채 이렇게 얼토당토않는 가격을 제시하는 건 상도에 어긋나지 않습니까?”간민효는 돈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함부로 버릴 만큼 많지는 않았다.특히 황보동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도 않았다.“이백억은 어제 가격이고.”“이천억은 오늘 가격이야.”“집복당은 우리 황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건물이야. 내가 원하는 만큼 받아야 팔 수 있어.”“당신이 아무리 부동산 전문가를 대동해 감정을 했다고 해도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물론 당신이 돈을 내지 않고 사고 싶다고 하면 그것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내 손녀만 치료해 준다면 공짜로도 줄 수도 있어.”황보동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면서 뭔가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들어온 아줌마에게 무엇 때문에 왔냐고 물었다.아줌마는 최근 밤마다 악몽을 꾸고 낮에는 숨이 턱턱 막혀서 생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그녀의 설명을 들은 황보동은 나침반을 꺼내 빙빙 돌리며 계속 미간을 찌푸렸다.황보동이 자신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간민효도 화가 나기
하현은 갑자기 머리가 저릿해져 와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흥!”난처해하는 하현의 모습을 보고 간민효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집복당은 금정에서 이미 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한때 금정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곳이었어.”“옛날에는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도 많았고 다들 어마어마한 재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내가 어릴 때는 태어나는 것 자체가 뭔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안타깝게도 지금 집복당의 주인인 황보동은 한동안 가업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고 과학의 길만 좇았지.”“그러다가 나중에 그의 아들이 사고를 당해 아무도 이 가업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게 되자 다시 돌아왔어.”“하지만 그의 풍수지리술은 그의 조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형편없어서 결국 점점 몰락하게 되었지.”“10여 년 동안 이곳에 드나든 사람은 대부분이 이 근처 오래된 이웃뿐이야.”“첫째는 가까이 있으니까 오는 것이고 둘째는 가끔 좋은 날과 길일을 보는 데는 아주 뛰어난 풍수지리술이 필요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야. 셋째는 아주 싸다는 매력 때문이지.”“다만 이렇게 되었어도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아서 아마 결국 사라질 거야.”“참, 반년 전 황보동의 유일한 손녀이자 집복당의 9대 계승자, 황보정이 갑자기 두 눈을 잃고 온몸에 힘이 빠졌지 뭐야.”“황보정은 집복당을 계승할 만큼 풍수지리사의 자질이 뛰어났어. 그래서 집복당의 영광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해.”“금정 일부 명문가들도 관심을 가졌고.”“그런데 그녀가 공부를 마치고 출사를 했을 때 갑자기 실명하게 되었어.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봤지만 어떤 원인도 찾을 수가 없었지.”“집복당 일가가 여러 해 동안 천기를 누설한 결과라는 말도 있어.”“황보동도 풍수지리술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대.”“그래서 지금 황보동도 많이 낙담한 상태야.”“이 집복
”해결되었으면 됐어.”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세상 일에 대해 그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어떤 일에 개입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이런 사소한 일들은 소꿉놀이 같아서 정말로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다른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의 일이 가장 중요하지.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간민효는 마음의 응어리가 풀린 듯 홀가분한 모습으로 하현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우리 금장 간 씨 가문의 다른 하찮은 일보다 당신과의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어차피 우린 연대한 사이잖아?”“참, 당신의 풍수관이 생기면 내가 첫 고객이 되고 싶어...”하현은 웃으며 말했다.“장난치지 마.”“내가 뭘 얼마나 잘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해?”간민효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인연, 인연이야...”“이 일은 당신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 같은데...”하현은 간민효의 말을 듣고 눈꺼풀을 펄쩍거리며 얼굴빛이 붉어졌다.“자, 장난치지 말고 당신이 선택한 곳부터 둘러보자고.”하현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고 이 모습을 본 간민효는 빙긋 웃으며 하현의 팔짱을 끼고 집복당 안으로 들어갔다.차에 타고 있던 나박하는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이런 상황을 보고 당연히 설은아에게 바로 고자질해야 했다.하지만 문제는 그가 이미 하현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주인 격인 그를 배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나박하가 고민에 빠진 그 시각 하현 일행은 이미 집복당 안으로 들어갔다.집복당 안 넓은 부지 앞쪽에는 큰 홀이 있고 한쪽에는 서재가 있었으며 그 안에는 각종 풍수 설비가 갖춰져 있었다.뒤편에는 사랑채 몇 개와 커다란 마당이 있었다.다만 이곳은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했지만 내부는 꽤나 낡아 보였고 바닥의 청석도 파손된 곳이 적지 않았다.종이로 칠한 창문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많아서 괴기스러운 영화를 찍거나 스릴러물을 촬영하기 딱이라는 생각마저
설은아의 말을 들은 하현은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김탁우가 감쪽같은 위장으로 사람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설은아는 그의 과거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뭐라고 말을 하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뭐, 어쨌든 우린 재혼할 거니까.”“남자들을 많이 접촉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왜? 다른 뛰어난 사람을 보면 내가 홀딱 빠져 버릴까 봐 걱정되어서 그래?”설은아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당신은 간민효랑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 난 다른 남자랑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거야?”하현은 쓴웃음을 지었다.일이 이렇게 흘러 버렸는데 자신이 설명을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하현의 표정을 살피던 설은아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기운이 감돌았다.그녀는 실눈을 뜨고 웃으며 말했다.“자자, 질투하지 마.”“내가 한 번 본 남자한테 사랑에 빠질 여자로 보여?”“김탁우는 오늘 밤 나한테 사람을 소개해 주려고 온 것뿐이라고.”“그러니 당신도 다른 여자들과는 접촉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렇지 않았다가 내가 알기라도 하면 당신 곤란해질 거야.”“어쨌든 우린 아직 이혼한 사이니까!”말을 마친 설은아는 하현을 향해 말로 주먹을 한 방 날리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하현은 이 광경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지금 누구도 두려운 사람이 없었다.모든 것을 다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러나 한 여자 앞에서는 자신도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게다가 이 여자는 지금 이 기회를 빌려 자신과 다른 여자 사이의 애매모호한 관계에 경고장까지 날리며 그를 압박했다.이런 생각이 들자 하현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이튿날 아침 하현은 일어나서 설은아와 얘기라도 좀 나눠 보려고 했다.하지만 설은아는 어제 일은 다 잊은 듯 씨익 웃으며 일이 있다고 말한 뒤 홀연히 집을 나섰
소란은 여기서 끝났다.하현은 임수범과 이산들을 더 이상 압박할 생각이 없었다.그가 해야 할 일은 두 사람의 기세를 제압하는 것이었다.자신의 앞에 놓인 곤궁한 처지를 헤치고 운명을 바꿔 나가는 일은 오로지 나박하가 감당할 몫이었다.소란스러운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만 있던 왕인걸은 등줄기에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하현을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한 순간이었다.그렇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가 있다.소란이 끝난 후 왕인걸은 임수범 일행을 내쫓고 하현과 나박하의 테이블에 반찬 몇 가지를 더 제공해 준 뒤 나박하의 멤버십 기간을 1년 연장해 주었다.오늘 밤 그는 완벽하게 하현의 체면을 세워 주었다고 할 수 있다.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왕인걸의 어깨를 툭 건드릴 뿐이었다.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왕인걸의 마음은 충분히 흡족했다.식사가 끝나자 하현은 나박하에게 자신을 설 씨 집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고 다음 날 다시 와서 적당한 가게를 찾는 데 좀 도와달라고 했다.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설은아는 아직 돌아와 있지 않았다.그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설은아의 성격상 중요한 일이 아니면 그다지 외출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하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전화기를 들었다.그때 문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마세라티 한 대가 대문 앞에 멈춰 섰다.덩치가 크고 잘생긴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려 설은아의 차 문을 멋스럽게 열어주며 에스코트했다.이 과정에서 그는 설은아와 어떤 신체 접촉도 없었지만 의미심장한 미소를 내걸었다.하현의 시선을 눈치챈 듯 남자는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이며 돌아섰다.하현의 눈동자에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그때 갑자기 하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항성에서 원가령과 약혼을 하려다가 자신에게 뺨을 얻어맞은 김탁우였던 것이다!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아마도 성형을 한 뒤 완전히 회복한 것 같았다!그리고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