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감은 서서히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계속 힘을 주었다.나중에는 거의 모든 힘을 다 쏟아 하현의 손을 꽉 쥐었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한 힘이 아무런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손아귀가 희미하게 아파지기 시작하면서 곧이어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는 걸 깨달았다.“나쁘지 않아. 좋아, 좋아.”동정감은 드디어 손을 거두었다.그는 하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머리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몸놀림과 심성도 모두 최상급이군.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네!”말을 마치며 동정감이 하인에게 손짓을 하자 하인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탁자와 의자를 두 사람 가까이로 옮겨왔다.하현에게 앉으라고 손짓한 후 동정감은 하현에게 직접 차를 따라주었고 뒤이어 맛깔스러운 항성식 다과가 탁자 위에 놓였다.동리아는 자신의 아버지가 하현에게 하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 아침은 분명 동정감이 하현을 염탐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는데 갑자기 이제야 만나게 된 걸 아쉬워하는 듯한 분위기로 흘러간 것이다.동정감은 찻잔에 입을 갖다 대고 한 모금 음미한 다음 줄곧 의아해하는 표정을 하고 서 있는 동리아를 힐끔 보며 웃었다.“리아야, 내가 오늘 하현을 때려죽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예의 바르게 대접하는 걸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거지?”동리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동정감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내가 원래 하현과 밥 한 끼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어서였단다. 내가 가까이 소중하게 두어도 될 사람인지 어떤지 알고 싶었거든.”“이 사람이 가까이 소중하게 둘 깜냥이 안 되는 사람이고 어젯밤 사건은 그냥 운이 좀 나빴다고 치더라도 난 이 사람에게 식사를 대접했을 거야.”“그랬다면 아마 그냥 밥 한 끼에 불과했겠지.”동정감의 말을 듣고 동리아는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나서 그녀는 하현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방금 보석으로 풀려난 사람을 자신
”둘째, 항도 하 씨 가문이 홍성을 뒤에서 움직여 항독을 압박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지금 각 방면으로 알아보고 있는 중인데 이 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신다면 그들은 당장 항독을 이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할 겁니다.”“그리고 오늘 이 식사를 빌어 다른 사람들에게 아직 항독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혀 흔들림이 없다는 것도 보여줄 수 있구요.”“셋째는 동맹할 사람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어쨌든 제가 항성과 도성에 온 후 용전 항도 지부를 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하구천을 여러 번 공격하게 되었죠.”“항독께서는 제가 도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 저력은 얼마나 탄탄한지 손을 잡아도 될 사람인지 가늠하고 싶으셨던 겁니다.”예리하게 분석한 하현의 말을 듣고 동리아는 정신이 혼미해졌다.어젯밤 사건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 큰 소용돌이에 직면할 줄은 몰랐다.뜻밖에 외부인의 입을 통해 사건의 이면을 듣게 될 줄이야.하현의 빈틈없는 분석에 동리아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동정감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하현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앞의 두 가지는 확실히 내 생각과 일치하네만 세 번째는 나도 잘 몰랐던 것이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하현, 나한테도 좀 가르쳐 주세요”어느새 하현에 대한 동리아의 말투가 공손하게 바뀌어 있었고 이는 하현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걸 의미한다.동정감은 이미 하현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지 않습니다. 백성에게는 두 왕이 있을 수가 없죠.”“이전의 항도 하 씨 가문은 상대적으로 조용했지만 하구천은 다릅니다.”“용전의 떠오르는 전쟁의 신으로 불릴 뿐만 아니라 항성과 도성의 젊은 세대 중 일인자에 9대 병부 총교관감이라는 말도 있죠.”“하지만 항독께서는 하구천이 9대 병부 총교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하구천은 바로 항독
정오가 되어서야 하현은 동정감의 집을 나왔다.동정감은 직접 하현을 문밖까지 배웅했다.동 씨 집안에선 보기 드문 일이었다.줄곧 집에서 조용히 지내던 항독이 직접 나와서 배웅을 하다니!도대체 하현에게 어떤 매력이 있길래 이러는 것인가?동 씨 집안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의아한 눈빛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어떻게 해서라도 하현과 친해질 기회를 찾느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오갔다.어쨌든 그들이 보기에 동정감이 이렇게 극진히 대접하는 사람은 드물었기 때문이다.동정감이 저택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아까 뾰로통해 있던 동리아가 그에게 커피 한 잔을 가져다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버지, 저도 아버지가 하현을 왜 집까지 이렇게 초대한 건지는 이제 알겠는데요.”“마음에 들면 그냥 마음에 든다고 하면 되지 뭘 이렇게 크게 벌이세요? 지지한다니요? 그럴 필요까지 있어요?”“항도 하 씨 가문에서 아버지 태도를 눈치챈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항도 하 씨 가문은 항성과 도성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시하고 있어요. 그들에게 미움을 사면 우리 집안도 시끄럽게 될 거라구요!”동리아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동 씨 집안사람이 항독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생각만큼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항도 하 씨 가문은 항성과 도성을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하고 있었다.몇 년 동안 동정감이 이 깊은 산속 같은 집에 칩거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우리 동 씨 집안도 거북이처럼 움츠린 채 조용히 지낼 수 있었다구요.”“그런데 어젯밤 일로 인해 우리 집안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게 생겼어요.”동정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하현은 경찰서에 신고를 한 뒤 바로 언론에 제보했어.”“우리 집안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거지.”“우리 동 씨 집안이 권력자의 편에 서서 그와 같은 선량한 시민에게 칼을 들이댄다면 어떻게 되겠니? 그러니 날 믿어 봐. 오늘 이 자리가 우리
”설령 그가 본토에서 이룬 것이 보잘것없는 일이라고 해도 너 생각을 해 봐. 하현이 항성과 도성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니?”“그가 손을 뻗자 항성과 도성은 완전히 국면이 바뀌었어. 화 씨 집안은 더 이상 왕이 아니야.”“대립각을 세워야 할 화 씨 집안과 최 씨 집안은 서로 악수는 하지 않았지만 모두 하현의 편에 서 있어.”“최 씨 가문은 말할 것도 없고 하현을 등에 업은 최영하는 용전 항도 지부장 자리를 꿰찼어. 그 순간 최 씨 가문은 하현과 생사를 같이 할 수밖에 없다고!”“그리고 화 씨 집안은 말이야. 화풍성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든 간에 어젯밤 하현은 영웅처럼 화풍성의 딸을 구했어.”“화풍성이 금이야 옥이야 아끼는 딸을 두 번이나 구해줬다고.”“화풍성이 어떻게 하현의 편에 서지 않을 수가 있겠니?”“하현이 아직 도성에서 이렇다 할 만한 일을 벌이진 않았지만 이 두 집안의 지지가 있는 한 그리 멀지 않았어.”“지금까지 애비의 말을 듣고도 아직 하현이 평범한 사람처럼 여겨지느냐?”동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흠칫 놀랐다.하현이 항성과 도성에 온 후 여기저기서 미움을 사는 일을 벌였다.그렇지만 불과 한두 주 만에 그는 은밀하고 치밀하게 무서운 세력으로 떠올랐다!아주 무서운 속도로 강력한 회오리를 일으키며 폭풍우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런 이유로 우리 집안이 하현의 편에 서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그가 정말 하구천을 상대할 만한 능력이 된다고 보세요?”동정감은 남은 커피를 홀짝이고는 의미심장하게 동리아를 쳐다보았다.동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우리 집안은 앞으로 뭘 해야 하죠?”“선명하게 깃발을 그에게 꽂는 건가요?”동정감은 동리아의 원색적인 표현에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누가 이런 일에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드러낸다더냐?”“리아야, 잘 기억해 둬. 어젯밤 일을 조사한 후 하현이 섬나라 사람들을 자극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으면 그
동 씨 집안 조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맞아요. 살해당했어요. 그의 목에 칼자국이 있었다니까요.”“아마 당도 자국인 것으로 추정됩니다.”“다른 단서는 아직 없어서 계속 찾고 있는 중이에요.”“하지만 현재 수사선상으로 볼 때 어젯밤 사건도 있고 해서 모든 추적의 화살이 하현을 향해 있어요.”동정감의 안색이 일순 어두워졌다.그는 항도 하 씨 가문에서 손을 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시작할 줄은 몰랐다.그는 방금 하현에게 좋은 시민상을 주려고 궁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날벼락 같은 일이라니.항도 하 씨 가문은 분명 하현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계략을 꾸몄을 것이다.이런 일을 저지른 가장 큰 이유는 동정감에게 항도 하 씨 가문과 하구천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기 위함이니라.상대가 손을 쓰지 않았을 뿐 손을 쓰기 시작한다면 그 결과는 반드시 죽음으로 끝나야 한다는 메시지였다.간단히 말해 무카이 나오토의 죽음은 결국 하현이 진범이라는 올가미를 단단히 씌운 셈이다.동정감이 직접 나서서 하현의 증언을 받은들 아무 소용이 없다.증거만큼 분명한 단서는 없다.동정감은 시름에 잠긴 얼굴로 손을 들어 양미간을 문질렀다.그리고 동리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하구천한테 갔다 와.”“왜요?”동리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가서 우리 동 씨 집안의 입장을 알려.”동정감은 깊은 한숨을 쉬며 마당 너머로 보이는 바다 위로 시선을 내렸다.저 멀리 지평선과 수평선이 거의 맞닿은 곳에서 구름이 몽글몽글 엉키고 있었다.항성에 또 한 번 폭풍우가 몰아칠 기세였다.이번 폭풍우가 지나간 후에 과연 이 항성에는 뭐가 남아 있을지 동정감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퍽!”오후 3시 정각 빅토리아 항구의 고급 오피스텔 문이 소란스러운 빗소리를 뚫고 거칠게 소리를 내며 열렸다.동리아는 긴 다리를 뻗으며 프런트에 있던 직원들을 무시하고 바로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이곳은 항도
동리아는 허민설의 도발을 무시한 채 눈살을 찌푸리며 유유히 차를 마시고 있는 하구천을 바라보았다.“하구천, 당신한테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요!”“동리아, 여차하면 날 경찰서로 데려가서 취조라도 할 태세군, 어? 난 어젯밤 일에 대해 이미 분명히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 뭐 그러나저러나 잘 왔어.”“쌍방의 갈등을 중재하는 데 전념하는 것도 항성의 치안을 위해서 좋은 일이지.”“좋은 시민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나한테 누명을 씌우진 않겠지, 안 그래?”자신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듯 하구천은 담담하게 말했다.평소 같으면 하구천의 말에 화가 났을 테지만 동리아는 지금 당장 그것을 따져 물을 수 없었다.지금은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말했다.“하구천, 내가 묻고 싶은 건 왜 무카이를 죽이고 하현에게 누명을 씌우는 거냐는 거예요.”“무카이가 죽었다고?”하구천은 깜짝 놀라는 얼굴을 했다.그 얼굴엔 조금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어젯밤 이미 항도 하 씨 가문에서 많은 의사들을 에드워드 병원에 보냈는데 어떻게 죽어? 치료되지 않았어?”“어떻게 그가 죽을 수 있어?”동리아는 하구천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잠시 후 침착하게 말했다.“내 말은 무카이가 호흡이 멎어서 숨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거예요.”“아무리 의사가 많아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죠.”“탁!”“말도 안 돼!”화가 난 하구천은 벌떡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내가 무카이를 살리려고 그렇게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을 보냈는데 어떻게 그가 죽을 수 있어?”“동리아, 이 일은 당신네 항성 경찰서에서 반드시 명명백백히 밝혀내야 해! 섬나라 대사관에 제대로 설명해야 한다고!”“그렇지 않으면 내가 반드시 당신들에게 그 죄를 물을 거야!”노발대발하는 하구천의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오히려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관청 사람 같
그러나 지위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하민석 앞에서는 겸손할 수밖에 없다.허지강은 사람 좋은 미소로 일어서며 말했다.“하구천, 이 일은 내가 이미 우리 허 씨 집안 경로를 통해 섬나라 음류 쪽에 알렸어.”“섬나라 음류 장로인 무카이 마키가 오늘 밤 항성에 도착한다고 해.”“그는 자신의 혈육인 무카이 나오토를 위해 정의를 되찾으려고 할 거야.”하구천은 능청스럽게 허지강의 말을 되받았다.“에이 너무 안 됐어. 원래 정의를 되찾는 일은 관청이 나서서 해 줘야 하는 건데, 스스로 되찾으려 하다니.”“섬나라 친구들한테 좀 미안해지는군.”“허지강, 날 대신해서 섬나라 손님들을 잘 대접해 줘.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아, 물론 뒷수습은 분명히 깨끗하게 처리해야 해. 절대 아무런 단서도 남겨서는 안 돼.”허지강은 간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구천, 걱정하지 마. 우리 허 씨가 운송으로 가세를 키운 집안이야. 어떤 것이 유출되었다손 치더라도 절대 그 경로를 알 수 없어.”하구천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 후 일어서서 하민석을 힐끔 보고는 입을 열었다.“하민석, 정말 하현이 무카이를 죽인 것이 확실하지?”하민석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물론이지. 오늘 아침 병원 CCTV에 그의 모습이 찍혔고 현장에 남은 칼에 그의 지문이 확실히 찍혔어.”“하지만 실증이 아니라서 살인자를 감옥에 가게 할 수는 없어.”“그래도 섬나라 손님들의 마음속 울분을 가라앉혀 주기에는 충분한 복수야.”하구천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렇게 말하면 안 돼. 증거는 증거일 뿐이야. 그게 실증인지 아닌지 무슨 상관이야?”“우리가 할 일은 섬나라 손님들에게 알고 있는 것을 알릴 뿐이지 어떤 선택을 할지는 그들의 몫이야.”“참, 한 가지 더.”하구천은 곽영준을 보며 말했다.“곽 씨 가문 수하에 거물급 변호사가 여럿 있지 않았어?”“그들이 함께 나서서 진홍두를 보석으로 좀 빼왔으면 좋겠는데.”“섬나라 손님이 왔는데 우리 진홍두가
”뚜벅뚜벅!”하현은 천천히 걸어오면서 무심한 듯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문자메시지를 보낸 뒤 복도 끝 시체 안치실로 향했다.시체 안치실 입구에 항성 경찰서 수사관 두 명이 꼼짝 않고 서 있었다.그들은 모두 하현을 알고 있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하현을 맞이했다.시체 안치실에는 동리아가 하얀색 의료용 장갑을 끼고 짧은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채 온 신경을 무카이의 사체에 쏟고 있었다.새하얀 목덜미가 갓 뽑은 겨울 무처럼 뽀얀 속살을 드러내었다.하현이 다가갔을 때 동리아는 무카이의 목에 난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다만 시신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자신의 가슴골이 살짝 드러나 보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녀는 하얀 보호복을 입고 있었지만 치명적인 그녀의 몸매와 아름다운 모습을 가라지는 못했다.그녀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던 하현은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뒤 좀 더 다가서서 입을 열었다.“동리아, 당신이 왜 검시관의 일을 하고 있어? 그 사람들한테 시키면 될 것을.”동리아는 동작을 멈추고 곁눈으로 하현을 힐끔 보며 말했다.“검시관 결과가 나온 지는 좀 됐어요. 현장 증거도 다 수집했고.”“모든 증거들은 당신이 살인범이라고 가리키고 있어요.”하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 시간에 여기 없었다는 거야.”“어젯밤 내내 구룡성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있었어. CCTV 확인해 보면 될 거잖아.”“오늘 아침 난 당신 집에 있었어. 당신도 거기 있었으니 누구보다 더 잘 알 거 아니야!”하현은 말을 하면서 무카이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눈앞에서 보고도 하현은 믿기지가 않았다.그는 무카이가 무방비로 당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동리아는 하현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어깨를 살짝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사실 지금 누가 진범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이 사건의 증거도 누군가가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고요. 당신이 가서 따져 물을 수도 없을 거예요.”“하지만 문제는 우리
”좋아, 당신이 그렇게 잘난 척을 하니 한 명이라도 어디 해고해 봐!”우민은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비아냥이 가득한 얼굴로 하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자! 어서 해 보라니까!”“퍽!”바로 그때 은행 로비의 문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차여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곧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남녀 열 명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양복 차림이었는데 그냥 보기에도 부티가 좔좔 흘렀다.그는 바로 금정은행 은행장, 은둔가 나 씨 가문 나천우였다.나천우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우민은과 이국흥은 모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려 굽신거렸다.“행장님!”“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우민은과 이국흥은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나천우 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환한 미소를 보였다.그런데 평소에는 친근하게 그들을 대했던 나천우가 오늘 이렇게 차가운 얼굴로 들이닥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나천우는 그들에겐 눈길도 돌리지 않고 하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하현의 손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하현,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이 말을 듣고 장내의 분위기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모두 어안이 벙벙해지다 못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곳곳에서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잠시 후 예쁘장한 여직원들이 자신의 뺨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잘못 본 것도 아니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연스럽게 하현에게 쏠렸다.몇몇 여자 고객들도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가 않는지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버렸다.우민은은 마치 사지가 마비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국흥은 더했다.사지가 그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 쉼 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이게 무슨 상황인가?그들은 하현
이국흥은 염치도 체면도 안중에 없는 사람 같았다.그는 없던 일을 있었던 일처럼 꾸몄다.그의 목적은 단 하나, 우민은이 하현을 혼내 주길 바랐던 것이다.이때 설은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부행장님, 그게 아닙니다...”우민은은 이국흥에게 힘을 실어 주러 온 상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설은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감히 우리 은행에서 사람을 때려요?”“간이 배밖에 나왔어요?”“지금부터 당신은 우리 은행 블랙리스트에 오를 거예요!”“이봐! 어서 관청에 신고해!”그녀의 카랑카랑한 말투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그러자 설은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분명 그녀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될 줄은 몰랐다.설은아가 이끄는 회사의 자금줄이 빠듯한 건 사실이었다.그런데 결국 이렇게 완전히 파산하게 되었다.자신이 아홉 번째 집안을 맡은지 얼마나 되었는가?이렇게 빨리 파산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훗날 대구 정 씨 가문의 수장이 되겠다는 것인가?그야말로 허황된 꿈이었다!“하하하! 이게 바로 당신의 최후야!”“이제 알겠어?”이국흥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개자식! 이 개새끼야! 너 방금 정말 미친놈처럼 날 치더라? 정말 대단했지, 안 그래?”“자, 다시 한번 더 해 보시지?!”“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디 한번 보자고!”“퍽!”하현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그의 요구에 답하며 앞으로 걸어가다가 또 한 번 손바닥을 휘둘렀다.이국흥은 하현이 감히 자신에게 또 손을 쓸 줄은 몰랐다.뺨을 맞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그는 가까스로 우민은의 몸에 기댄 덕분에 쓰러지지는 않았다.“미친 거야?!”“당신들 여기가 무법천지인 줄 알아?”우민은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이봐, 어서 신고해!”“은행 협회에 통보해서 설은아한테 대출 다 막으라고 해!”이때 하현은 싸늘한 표정으로 우민은과 이국흥을 바라보며 말했다.“두 사람이야말로 내 블랙리
하현을 말리는 설은아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국흥은 험상궂은 얼굴로 이를 갈며 일어섰다.그는 입가의 피를 닦고 하현을 가리키며 말했다.“개자식! 당신 누구야?!”“당신이 뭔데 감히 이러는 거야?”“날 때려? 감히 날 때렸어?”“내가 뭐?”하현은 앞으로 나서면서 또 손바닥을 올려 이국흥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감히 내 아내한테 그런 모욕감을 주다니! 나한테 누구냐고 물었어?”“내가 누군지 당신 눈엔 안 보여?”“혹시 설 대표가 당신 부인이야?”이국흥은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뭔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신이 그 소문으로만 듣던 그 쓰레기 같은 놈?”“그런데 감히 날 때려?!”“죽여버릴 거야!”하현은 또 그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퍽!”“날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렇지만 내 여자를 건드리는 놈은...”“절대 용서할 수 없어! 오늘이 당신 제삿날인 줄 알아!”퉁퉁 부은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국흥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벌벌 떨었다.“하현, 그만해! 그만하라고!”설은아는 한사코 하현을 말리며 붙잡았다.“또 때리면 정말 사람이 죽겠어!”그녀는 마음속으로는 그를 고맙고 든든하게 여겼지만 불똥이 그에게 튈까 봐 걱정도 되었다.오래된 도시 금정의 은둔가 가문이 뒷배에 있는 금정은행 부장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금정은행의 뒷배인 나 씨 가문은 금정 금융계의 거물이었다.“개자식! 감히 날 때리다니?!”“흥! 넌 이제 죽었어! 내가 반드시 널 죽여버릴 거야!”이국흥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러나 그는 감히 하현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입만 떠들썩하게 떠벌렸다.“반드시 관청에 보고해서 감옥에 처넣어 버릴 거야!”“그리고 제멋대로 날뛰는 네놈 때문에!”“이 여자도 상상하기 힘든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블랙리스트에 올라 금융계에선 다시는 일 원 한 푼 빌릴 수 없게 만들 거라고!”“
설은아는 얼굴이 굳어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부장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부장님이 이천억, 아니 이조를 준다고 해도 난 이런 파렴치한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요!”“설 대표님, 왜 그렇게 고지식하게 굴어요!”“아니 그냥 잠 한 번 자는 것 가지고 뭘 그래요? 결국 서로 윈윈하는 거 아닙니까?”“다른 사람들은 이런 기회가 없어서 꿈도 못 꾼다고요!”“그런데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요?”“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혼도 한 번 했겠다 잠 한 번 자는 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남의 편의를 봐주고 내 이익을 챙기면 되는 거죠.’“이번에 잘 하면 앞으로도 대표님은 육 씨 도련님의 사람이 되어서 금정에서 편하게 사업할 텐데, 그런 기회를 발로 차버려요?”“대표님이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돈을 빌릴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러면 금정에선 사업하기 힘들어져요!”“왜 돈을 앞에 두고 내팽개치려는 거예요?”이국흥은 이 바닥에서 닳을 대로 닳은 인물이었다.이런 일에 경험도 많고 비열함 따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상대를 앞에 두고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며 이리저리 이로울 대로 몰아가고 있었다.정신력이 보통인 여자가 아니라면 그의 능수능란한 언변과 뻔뻔스러운 행동에 쉽게 넘어가고도 남았다.설은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섰다.“이 부장님, 내가 돈이 필요하긴 해요!”“하지만 돈 때문에 내 몸과 영혼을 팔진 않을 겁니다!”설은아에겐 분명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있었다.“좋아요, 안 받으셔도 됩니다!”“없던 일로 하죠!”이국흥은 테이블을 탁 치며 노기등등한 표정을 지었다.“게다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은 우리 금정은행에 따로 오백억 빚이 있습니다!”“계약대로 다음 달에 갚아야 하고요!”“기한이 지나면 우리 금정은행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 자산을 몰수할 권리가 있습니다!”“그렇게 되면 대표님도 자리를 보전할 수 없을 겁니다!”
”대출이 갱신이 안 되어서 우리 회사가 두 달째 월급을 못 주고 있어요.”“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고 공장 생산도 중단되었어요.”“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회사는 정말 파산할 거예요.”설은아는 조심스럽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말했다.“이 부장님, 우리 회사랑 거래하는 게 처음도 아니잖아요.”“부장님도 우리 집안에 대해 잘 알고 계시고요. 우리 뒤에는 10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인 대구 정 씨 가문이 있어요.”“도와주신다면 그 은혜 꼭 보답하겠습니다.”이국흥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설은아를 바라보았다.“설 대표님, 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대표님 회사는 지금 장부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 위험평가를 통과할 수가 없어요!”“내가 직업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업윤리를 어겨 가면서까지 대표님을 도와드릴 순 없잖습니까?!”“안타깝지만 우리 은행에서 이번 대출 연장은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하지만 우리 은행에서 대표님께 기회를 안 드리는 건 아닙니다...”말을 마치며 이국흥은 미리 준비해 둔 서류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서남 천문채 육 씨 도련님이 당신한테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하는군요.”“이건 이천억을 빌린다는 차용증입니다. 대표님이 여기 서명만 하면 당장 효력이 발생하고요.”“언제든지 돈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하지만 육 씨 도련님이 말씀하셨어요. 하룻밤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고.”육 씨 도련님?!설은아는 낯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녀는 분명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그래서 그녀의 눈빛에선 겨울 칼바람 같은 매서운 기운이 넘실거렸다.“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직업윤리도 없고 염치도 없으세요?”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이국흥은 뻔뻔스럽게 입을 열었다.“당연히 무슨 말씀인지 알 텐데요.”“난 대표님이 육 씨 도련님의 요구대로 했으면 합니다!”“그분이 누굽니까? 서남 천문채에서 어마어마한 지위에 있지 않습니까? 잘 아시면서 왜 그러
”아, 아니...”“대, 대사님! 대사님!”이때 나천우는 정신을 차리고 울부짖으며 하현을 쫓아가려고 발버둥쳤다.임단은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나천우를 뒤따랐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현은 그들에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나천우 부부가 급한 마음에 부하들에게 전화를 걸어 얼른 하현을 뒤쫓으라고 하려던 참이었다.나천우를 뒤쫓아온 형나운은 나천우의 전화기를 툭 쳤다.“천우 오빠, 또 일을 그르치려고 그래?!”그녀는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다.“지금 하현이 화가 나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게 생겼는데 부하들이 쫓아간들 어쩌겠어?”“하현이 돕지 않겠다고 하는데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겠어?”나천우는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 되었다.“형나운, 우리가 잘못했어.”“우리가 눈이 멀었나 봐. 눈앞에 사람을 두고도 제대로 볼 줄 몰랐으니 말이야!”“하지만 너랑 나랑 오랜 인연을 생각해서 부디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잘 좀 봐달라고 말 좀 해 줘!”“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돈 문제는 절대 신경 쓰지 마!”“맞아.”이때 임단도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형나운, 그러면 주소라도 알려줘. 우리가 가서 삼고초려라도 해 볼게!”“좀 진정해. 이렇게 쫓아가 봐야 아무 소용없어.”형나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조금 있다가 내가 전화해 볼게.”그 시각 진회강 강변에 위치한 금정은행 본사 앞.설은아는 머뭇거리다가 뭔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은행 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마침 택시를 타고 지나가던 하현이 설은아의 모습을 보았고 자금난에 허덕이는 그녀의 사정을 급히 떠올리며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한 뒤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뒤따랐다.하현이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마침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전화를 받아보니 형나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나 사장 부부가 잘못을 깨닫고 직접 사과드리고 싶다고 해요.”“내 얼
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형나운도 틀림없이 이 사기꾼에게 속았다고 생각했다.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감히 자신을 풍수대사라 할 수 있겠는가?장난하는 건가?이런 사람이 사기꾼이 아니라면 누가 사기꾼이란 말인가?임단이 참지 못하고 옆에서 끼어들었다.“그럼 당신은 음양학을 배운 학생이에요?”하현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아니요. 난 굴착기를 배웠어요. 기술도 좋고 자격증도 있어요.”“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갑자기 표정이 냉랭해졌다.“지금 뭐라는 거예요?”“굴착기를 배운 사람이 무슨 풍수를 본단 말이에요?”“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예요?”“대하에서 풍수지리가 얼마나 큰 위상을 차지하는지 몰라요?”“우리를 속이려 들다니 후환이 두렵지도 않아요?”나천우의 말에 형나운의 안색이 새까맣게 일그러졌다.그녀는 다급하게 나천우에게 눈길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오빠, 그만하면 안 돼!”“우리 두 집안의 친분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내가 이런 중요한 일을 두고 오빠를 속였을 거라고 생각해?”“내가 바보야?!”“너 나 속이는 거 아냐?”나천우의 얼굴은 냉랭하게 식었다.“너도 자세히 봐 봐. 이 젊은 사람은 풍수라는 두 글자도 모르는 것 같은데 어떻게 믿으란 얘기야?!”“이 사기꾼을 만나려고 내가 금정은행 투자 포럼도 안 나가고 여기 왔겠냐고!”임단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비난에 열을 올렸다.“형나운, 당신 정말 경솔했어!”예전 같았으면 두 집 사이에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형나운이 하현에 대해 거의 신처럼 말했다는 것이다.나천우와 임단은 자신들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줄로 알고 커다란 희망을 품고 여기 왔다.다만 희망이 크면 실망도 큰 법이고 분노는 걷잡을 수 없다는 걸 몰랐을 뿐이다.“나 사장님?”형나운은 하현의 목소리에 그에게 눈길을 떨구며 손을 내저었지만 하현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담담한 눈
”형나운, 정말 축하해!”“우릴 속이지 않았군!”“그런데 그 대사님은 어디에 계셔?”“얼른 좀 소개해 줘!”나 사장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병은 이미 수많은 국내외 명의들한테 보여줬어. 국수인 장북산 선생님도 보셨지!”“어르신은 우릴 보고 병이 아니라 악에 부딪힌 것이라고 하셨어.”“풍수에 정통한 사람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대.”“하지만 수많은 풍수지리사를 만나봤지만 도저히 해결되지 않았어.”“어쨌든 형나운, 당신이 대사님한테 말 좀 잘 해 줘!”나 사장의 부인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형나운, 우리를 살릴지 말지 여부는 전적으로 당신의 손에 달려 있어.”“이 일이 잘 해결되면 최고 가문에서 기가 막힌 남편감을 물색해 줄게. 정말 섭섭하지 않게 해 줄 거야!”옆에 살짝 비켜서 있던 하현의 이마에 주름살이 잔뜩 드리워졌다.기가 막힌 남편감?뭐가 기가 막히다는 거지?형나운은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나 사장님, 그 대사님은 바로 가까운 곳에 있어요.”“하현, 소개할게요. 이 분은 나천우 사장님, 그리고 이쪽은 나 사장님 사모님, 임단.”“나 사장님은 나 씨 가문 출신이에요.”“나 씨 가문은 형 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금정에 토박이로 아주 뿌리가 깊은 가문이죠.”“예로부터 은행업을 해 왔고 지금도 금정에서 가장 큰 은행인 금정은행을 움직이는 가장 큰 지주이자 실세죠.”“나 사장님 부부는 결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자식이 없어요. 그래서 온갖 치료를 받았지만 성과가 없어서 결국 풍수지리술에 기대 보려고 하고 있어요.”“할아버지 얘기를 듣고 여기까지 오셨고요.”“우리 형 씨 가문과 나 씨 가문은 사이가 좋아서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당신한테 말도 없이 여기로 오라고 했어요.”형나운은 조금 찔리는지 불안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하현, 이렇게 불쑥 말을 꺼내면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지만 제발 나 사장님 부부를 좀 도와줬으면
하현은 이맛살을 구기며 말했다.“말로 하면 되지! 당신 왜 이러는 거야? 이런 행동을 왜 하는 거냐고?”“내가 그런 사람이야?”“하현, 치료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형나운은 미안한 듯 겸연쩍어하며 말했다.“그래서 내가 주동적으로 이런 자세를 보인 거예요. 언제든지 와도 상관없다고.”“아무튼 당신이 날 고쳐 줄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요.”“강하면 강할수록 난 더 좋아요.”“당신 정말...”“마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죠?”하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순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퍽’하고 내리쳤다.“이렇게 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누가 말했어?”“지난번에 난 기혈과 두통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줬어.”“그런데 지금 당신 문제는 완전히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절대 호전되지 않아!”하현의 말을 들은 형나운은 순간 얼굴이 벌게졌다.그녀는 얼른 엉덩이를 내리고 똑바로 선 다음 서랍 속에서 노란 가죽으로 싼 고서적 한 권을 꺼내 하현에게 건네주었다.하현이 힐끔 쳐다보니 ‘영춘’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집안을 다스리는 처세술에 관한 책인 ‘영춘’은 여자아이의 수련에 안성맞춤이었다.하지만 진짜 ‘영춘’은 기본적으로 무학의 성지에서 내려오는 비법서 같은 것이고 방금 형나운이 꺼낸 책은 남은 자투리 책이라고 할 수 있다.그녀는 자투리 잡서에 가까운 책으로 수련을 하는 바람에 자주 숨이 막히는 증상이 생긴 것이다.하현은 그제야 뭔가를 알아차리며 빠진 부분을 보충해서 써 준 뒤 그녀에게 책을 던져주며 말했다.“이 책은 영춘의 상반부에 불과해. 그래서 내가 상반부만 보충해 줬어. 이렇게 한다면 별일 없을 거야.”“후반부는 당신이 기회를 봐서 오매 도교 사원에 가서 문의해 봐.”“만약 내가 당신한테 준다면 오매 도교 사원이 아마 날 죽이려고 들 거야.”“아, 알겠어요.”형나운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하현이 보충해 놓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