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아는 법의관에게 사정했다.“법의관님, 이 사람은 내 친구인데요, 좀 봐 주시면 안 될까요?”“네? 좀 봐 주세요.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주세요.”법의관은 차가운 목소리로 콧방귀를 뀌며 동리아의 가슴팍에 있는 명찰에 눈길을 돌렸다.그제야 법의관은 살짝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아, 당신이었군요.”“하지만 당신이라고 해서 규칙을 어길 수는 없어요!”“이 사람을 못 들인다는 건 아니에요. 정 들어오게 하고 싶다면 먼저 나가서 등록부터 하고 오세요.”하현은 태연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웃었다.“문제없죠. 지금 당장 가서 등록하고 오겠습니다. 그런데 등록실이 어디죠?”법의관은 문을 나가더니 하현에게 직접 등록실 위치를 알려주었다.“저쪽에 등록실이 있어요. 위에 간판이 있으니 찾기 쉬울 거예요. 안에 등록을 담담하는 의사가 있어요. 이름은 송학민이구요.”“자, 가서 등록하세요.”“고맙습니다. 법의관님.”하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돌아서서 텅 빈 복도를 향해 걸어갔다.하현이 유유히 복도로 사라지자 법의관의 시선은 곁에 서 있던 두 경찰관에게 향했다.“어멋!”법의관은 갑자기 발을 삔 듯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자신의 발에 손을 갖다 대었다.순간 두 경찰관의 시선은 법의관의 발목에 쏠렸다.“솨솩!”두 경찰관의 시선이 발목으로 쏠리는 틈을 타 법의관은 갑자기 자신의 소매 쪽에 손을 대었고 이내 하얀 연기가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두 경찰관은 갑자기 온몸이 휘청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안에서 시신을 다시 살펴보려던 동리아는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지며 얼른 뒤돌아섰다.순간 눈앞의 광경에 동리아는 정신이 멍해졌다.“당신 누구야?”“우린 모르는 사이인 것 같은데. 우리 사이엔 아무런 원한도 없고.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누가 지시한 거야?”동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있던 총에 손을 갖다 대었지만 보호복을 입은 탓에 얼른
”그리고 걱정하지 마. 난 당신을 난처하게 만들 생각 없어.”“하구천이 이미 경고했거든. 비록 당신네 동 씨 집안과 하현이 공수동맹을 맺었지만 하구천의 체면을 봐서 당신은 인질로 삼기만 하되 조금도 건드리지 않기로.”“그러니 당신은 나한테 협조하기만 하면 돼. 반항할 생각은 하지 마.”“혹시라도 반항했다가 내가 실수로 당신 아름다운 얼굴에 생채기를 내더라도 날 원망하지 마! 알았어?”무카이 루미코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하면서 어느새 칼을 꺼내 동리아의 눈앞에서 눈알을 희번덕거렸다.“퍽!”바로 그때 무카이 나오토의 시신이 놓인 침상 아래로 누군가가 굴러 나오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카이 루미코의 복부에 칼을 꽂았다.“팍!”갑자기 무카이 루미코가 피를 한가득 뿜어내며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그녀는 이 방에 자신과 동리아 외에 다른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무카이 루미코는 후회할 겨를도, 물어볼 겨를도 없이 안치실을 떠나려고 했다.그녀가 시체 안치실에서 몸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뺨을 때렸다.순간 무카이 루미코의 얼굴이 붉어졌고 몸은 튕겨 나가 벽 모서리에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그녀는 일어서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기세가 기운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문밖에서 냉랭한 얼굴로 들어온 하현은 무카이 루미코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옅은 미소를 지었다.“무카이 루미코?”“쯧쯧쯧, 무카이 집안에 일손이 부족한 모양이지?”“어떻게 킬러가 할 짓을 손수 이렇게 나설 수가 있어?”“돈이 없으면 말을 해. 내가 대신 킬러 몇 명 고용해 줄 테니까!”“그렇지 않으면 무카이 집안이 나 하나 죽이려는 데 돈이 아까워서 이러는 줄 알잖아. 그건 너무 체면 구기는 일이지 않아?”“내가 너무 뻔뻔한가?”하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하며 상대에게 다가가 마스크를 사정없이 끌어내렸다.무카이 나오토와 닮은 예쁘장한 얼굴이었다.“내가 동리아를 억류하고 있을 줄 어떻
”그래서 난 동정감에게 메시지를 보냈어. 능수능란한 동정감이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르겠어?”“처음 당신이 법의관 행세를 하며 문을 두드렸을 때 난 당신이 킬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놓지 않았지.”“나머지 일은 당신이 직접 본 것 그대로야.”하현은 거침없이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읊었다.“아무도 당신을 미리 알아챈 사람은 없었어. 다만 섬나라 사람들의 머리가 너무 어리석었기 때문에 들키고 만 거지, 알겠어?”“당신...으...”무카이 루미코의 얼굴은 충격에 휩싸였다.그녀는 자신의 계획이 처음부터 하현에게 간파당했다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그럼 자신이 한 모든 일이 깡패들이 하는 짓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저리 꺼져!”하현에게 호되게 당하긴 했지만 무카이 루미코는 전혀 굽힐 뜻이 없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나지막이 말했다.“하현, 당신은 내 동생을 죽였어. 그리고 지금은 날 죽이려 하고 있어. 잘 들어. 우리 무카이 집안은 당신을 끝까지 쫓아가 죽일 거야!”“능력이 있으면 어디 날 죽여 보시든지!”“지금 날 죽이지 않으면 천군만마를 데리고 반드시 당신을 멸망시켜 버릴 거야!”“우리 무카이 집안사람들은 절대 욕되게 죽을 수 없어!”“자! 어서 죽여! 능력이 있거든 죽여 보라구!”하현은 무카이 루미코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날 자극해서 당신을 죽이게 만들려는 거야?”“아쉽지만 난 지금 당신을 죽일 생각이 없어.”“당신네 무카이 집안이 아무 이유도 없이 나한테 덤볐으니 나도 당신네들에게 응당한 보답을 해 줘야 하지 않겠어?”말을 하면서 하현은 동리아에게 손짓을 했고 그녀는 수갑을 꺼내 바로 무카이 루미코의 손목에 감았다.그리고 동 씨 집안 주치의를 불러와 무카이 루미코의 상처를 봉합하고 지혈하라고 사람들에게 지시했다.“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덤빈다고?”무카이 루미코는 험악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하현, 당신이 내 동생을 죽였는데 어떻게 뻔
저녁 무렵, 항성 호텔.이름상으로는 큰 호텔이었지만 사실 이곳은 항성 도시 전체에서 유일한 장례식장으로 숙식 등 일련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주변에 단독 빌라들이 많았고 그곳은 높은 신분의 귀빈들을 위한 전용 공간으로 운영되었다.무카이 나오토의 시신은 부검이 끝난 직후 바로 이곳으로 보내졌고 구석에 있는 건물을 하나 차지하고 있었다.이 건물은 아주 조용하고 주변 환경도 아주 쾌적했다.무카이의 시신이 이곳으로 보내진 후 무카이 집안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무카이 마키와 그의 아들딸 외에도 무카이 집안의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이번에 무카이 나오토의 울분을 반드시 풀어주지 않으면 절대 물러서지 않을 분위기였다.저녁 7시.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하얀 등불이 걸린 빈소를 향해 소리 없이 입구에 모습을 드러내었다.차 문이 열리자 홍성 정예들이 내렸다.곧이어 다소 초췌한 얼굴의 젊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하루 종일 심문을 받았지만 저녁 무렵에 홍성의 많은 변호사들이 공동으로 보증을 선 관계로 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초췌함과 피곤함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매력적인 분위기를 가리지는 못했다.그녀가 바로 홍성을 대표하는 얼굴, 진홍두였다.경찰서를 나와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곳에 와서 무카이 나오토를 향해 향불을 바치는 것이었다.세 가닥 가느다란 향이 모래 속을 파고든 후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며 빈소를 가득 채웠다.진홍두는 종이돈에 향불을 붙인 뒤 화로에 살며시 던졌다.다 타버린 검은 재에서 악마의 손아귀 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진홍두는 마지막 종이돈을 넣고는 많아 봐야 삼십 대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다가가 허리를 90도로 숙였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그녀가 허리를 굽히자 박꽃같이 하얀 그녀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무카이 세이이치로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눈길이 갔고 순간 그의 눈동자에 이상야릇한 빛이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진홍두의
무카이 세이이치로가 결연한 의지로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는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옆에 납작하게 몸을 숙이고 있는 섬나라 장도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제아무리 큰 뒷배를 가졌어도, 제아무리 대단한 능력이 있더라도 우린 끝까지 그에게 죄를 물을 거예요!”“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할 겁니다!”“하현은 죽어야 마땅해요!”“무카이 집안, 섬나라 음류의 영웅이 흘린 피를 헛되이 하지 않을 거예요!”무카이 세이이치로의 눈에 무카이 나오토는 분명 영웅으로 비친 듯했다.그의 말에 빈소 양쪽에 무릎을 꿇고 있던 섬나라 사람들이 하나같이 분노하며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반드시 복수할 거라는 글귀가 새겨진 흰 두건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그들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하현을 찾아내 당장 도륙 내지 않고는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하현에 대한 섬나라 사람들의 깊은 증오를 몸소 눈으로 목격하고 있자니 진홍두의 마음속에 묵은 체증이 조금은 내려가는 것 같았다.이번 일로 홍성 쪽 사람들이 호되게 당했을 뿐만 아니라 라이온 킹도 죽었으니 진홍두 입장에서도 큰 손실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홍성 쪽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고수가 없어서 조용히 처리했을 뿐이었다.진홍두는 원래 억울한 마음을 삼켜 버리려고 했다.그러나 지금 섬나라 사람들이 분기탱천하는 모습을 보니 하현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진홍두가 지금 하현을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섬나라 사람들이 하현을 어떻게 죽이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결국 이 일은 무카이 가문, 섬나라 음류, 양국의 외교와도 얽혀 있는 문제였다.어젯밤에는 하현이 전화 몇 통으로 미꾸라지처럼 사건에서 쏙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은 그렇게 간단히 되지 않을 거라고 진홍두는 믿었다.하현, 기다려. 당신 목에 칼끝이 향할 때까지.마음속에 이런 그림이 그려지자 진홍두의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심호흡을
무카이 세이이치로는 서류를 받아들고 유심히 살펴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돌아가서 총교관에게 알려주세요. 우리 무카이 가문은 홍성을 영원한 친구로 삼겠다고!”“저희 아버지가 지금은 상심한 나머지 위층에서 쉬고 계셔요. 안 그랬으면 여기 와서 직접 감사 인사를 드렸을 텐데 참 아쉽습니다.”“하지만 이 일이 마무리가 되면 꼭 찾아뵐 거예요!”진홍두는 고개를 약간 끄덕인 후 조심스럽게 무카이 세이이치로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제가 이렇게 온 것은 홍성뿐만 아니라 항도 하 씨 가문의 조의도 전달하려고 왔어요.”“하구천은 자신이 직접 나서기 좀 어려운 일이 있다고 했는데 만약 섬나라 음류 쪽이 그분을 친구로 삼길 원한다면”“그렇다면 섬나라 음류가 항성과 도성에서 하는 모든 일엔 반드시 청신호가 켜질 거예요.”항도 하 씨 가문이라는 말을 듣고 무카이 세이이치로의 눈이 번쩍 뜨였다.그는 진홍두의 눈을 깊이 마주 보며 말했다.“하구천에게 꼭 전해주세요.”“우리 섬나라 음류는 항도 하 씨 가문이야말로 항성과 도성의 진정한 주인이라 생각한다는 것을요.”“그리고 하구천이야말로 항도 하 씨 가문의 주인이시죠!”진홍두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하구천의 능력에 또 한 번 감탄을 자아냈다.겉으로 보기에는 홍성의 땅을 무카이 집안에 헌납함으로써 홍성은 땅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카이 가문과 섬나라 음류의 분노를 지렛대 삼아 결국 하현에게 더 가까이 칼끝을 들이댄 것이다.섬나라 음류와 돈독한 관계를 맺은 것은 덤이었다.이 돈독한 연줄은 훗날 하구천이 항도 하 씨 가문 후계자 자리에 앉을 때 아주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무카이 가문과 진홍두 일행이 흐뭇한 미소를 주고받고 있을 때 갑자기 빈소 밖에서 자동차 굉음이 들렸다.“퍽퍽!”굉음을 듣고 달려 나온 섬나라 청년 몇 명은 도요타 차량의 거친 진격에 이미 몸이 날아가 버렸다.섬나라 사람들도 횡포하긴 어디 뒤지는 편이 아니었으나 지금 눈앞의 거친 소용돌
”하현!?”그 이름을 들은 섬나라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이놈이 바로 무카이 나오토를 죽인 그 하현이었던 거로군!넘어져 있던 섬나라 사람들은 모두 하나둘 일어나 장도를 뽑아 들고는 순식간에 그를 포위했다.장내는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는 칼날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하현!”무카이 세이이치로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매서운 표정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당신이 내 동생을 죽인 장본인이로군!”“감히 내 동생 빈소에 겁도 없이 쳐들어오다니!”“그것도 차를 몰고?”“이렇게 겁 없이 낳아준 네 아버지를 욕해!”“우리는 절대 널 용서할 수 없어!”“네가 감히 우리 섬나라 사람들을 우습게 본다는 거지?”“믿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칼을 한 번 휘두른다면 날고 긴다는 동정감이 와도 내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거야!”무카이 세이이치로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그가 두 눈 부릅뜨고 있는데 감히 겁도 없이 찾아오다니,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이건 남을 업신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대놓고 섬나라 사람들을 무시하는 처사였다.섬나라 사람들은 이런 수모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바로 그 순간 그들은 일제히 칼을 들고 하현을 갈기갈기 찢어 놓으려는 듯 음흉한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진홍두도 거들었다.“하현, 당신 정말 감당이 안 되는 사람이군!”“동정감이 당신을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해? 당신은 항성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지!”“사람을 죽이고!”“빈소로 찾아와 고인을 모독하고!”“섬나라 사람들을 무시해?”“당신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하현은 욕설을 퍼붓는 진홍두를 힐끔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무카이 나오토를 죽였다고?”“내가 그를 죽이려고 했다면 어젯밤에 그 자리에서 죽였을 거야!”“내가 그런 놈 때문에 뭐하러 내 손을 더럽히겠어? 그놈이 그럴 자격이라도 된다고 생각해?”말을 하는 동안에도 하현은 발로 사람을 걷어차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이 여자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무카이 세이이치로가 의구심을 품는 모습을 본 진홍두가 얼른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하현에게 소리쳤다.“하현, 지금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당신이 동 씨 집안과 손을 잡았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야.”“동정감은 항성 최고 책임자잖아. CCTV 하나쯤 조작하는 거 일도 아니지, 안 그래?”“잘 들어. 당신이 증거라고 말하는 것들, 무카이 세이이치로 선생님 눈에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보일 뿐이야. 절대 당신 말에 속지 않을 거라구!”“내 말 못 믿겠으면 무카이 루미코한테 물어봐. 직접 눈으로 본 증거들을 믿는지 안 믿는지 물어보라고!”“설마 우리 홍성이 이런 일에 귀한 섬나라 손님을 속이겠어?”진홍두의 말에 무카이 세이이치로는 잠자코 무카이 루미코를 힐끔 쳐다보았다가 입을 열었다.“하현, 당신이 어떻게 루미코를 협박했는지 모르겠어!”“하지만 우리 무카이 가문과 섬나라 음류는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야!”“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거든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조작할 수 있는 그런 동영상들, 우린 믿지 않아!”“증거가 없다면 당신은 오늘 밤 내 동생 관 밑에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어야 할 거야!”말을 마치자마자 무카이 세이이치로는 손을 흔들었다.갑자기 수십 명의 섬나라 사람들이 우르르 소리를 내며 앞으로 몰려왔다.하나같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하현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하현은 터질 듯한 그들의 화난 얼굴을 당당히 되받아치며 섬나라 무사들의 칼자루를 간단히 물리치고 나서는 담담하게 말했다.“무카이 세이이치로, 오늘 밤 루미코를 여기에 데리고 온 것은 당신들을 위협하려는 것도 두려움에 떨게 하려는 것도 아니야.”“무카이 나오토의 죽음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알려주려고 온 거야.”“당신들이 정 나와 싸워 보고 싶다면 다른 핑계를 가져와.”“게다가 오늘 본 동영상이 조작한 것인지 아닌지는 직접 본 무카이 루미코가 가장 잘 알 거야.
”좋아, 당신이 그렇게 잘난 척을 하니 한 명이라도 어디 해고해 봐!”우민은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비아냥이 가득한 얼굴로 하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자! 어서 해 보라니까!”“퍽!”바로 그때 은행 로비의 문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차여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곧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남녀 열 명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양복 차림이었는데 그냥 보기에도 부티가 좔좔 흘렀다.그는 바로 금정은행 은행장, 은둔가 나 씨 가문 나천우였다.나천우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우민은과 이국흥은 모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려 굽신거렸다.“행장님!”“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우민은과 이국흥은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나천우 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환한 미소를 보였다.그런데 평소에는 친근하게 그들을 대했던 나천우가 오늘 이렇게 차가운 얼굴로 들이닥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나천우는 그들에겐 눈길도 돌리지 않고 하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하현의 손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하현,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이 말을 듣고 장내의 분위기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모두 어안이 벙벙해지다 못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곳곳에서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잠시 후 예쁘장한 여직원들이 자신의 뺨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잘못 본 것도 아니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연스럽게 하현에게 쏠렸다.몇몇 여자 고객들도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가 않는지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버렸다.우민은은 마치 사지가 마비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국흥은 더했다.사지가 그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 쉼 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이게 무슨 상황인가?그들은 하현
이국흥은 염치도 체면도 안중에 없는 사람 같았다.그는 없던 일을 있었던 일처럼 꾸몄다.그의 목적은 단 하나, 우민은이 하현을 혼내 주길 바랐던 것이다.이때 설은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부행장님, 그게 아닙니다...”우민은은 이국흥에게 힘을 실어 주러 온 상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설은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감히 우리 은행에서 사람을 때려요?”“간이 배밖에 나왔어요?”“지금부터 당신은 우리 은행 블랙리스트에 오를 거예요!”“이봐! 어서 관청에 신고해!”그녀의 카랑카랑한 말투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그러자 설은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분명 그녀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될 줄은 몰랐다.설은아가 이끄는 회사의 자금줄이 빠듯한 건 사실이었다.그런데 결국 이렇게 완전히 파산하게 되었다.자신이 아홉 번째 집안을 맡은지 얼마나 되었는가?이렇게 빨리 파산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훗날 대구 정 씨 가문의 수장이 되겠다는 것인가?그야말로 허황된 꿈이었다!“하하하! 이게 바로 당신의 최후야!”“이제 알겠어?”이국흥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개자식! 이 개새끼야! 너 방금 정말 미친놈처럼 날 치더라? 정말 대단했지, 안 그래?”“자, 다시 한번 더 해 보시지?!”“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디 한번 보자고!”“퍽!”하현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그의 요구에 답하며 앞으로 걸어가다가 또 한 번 손바닥을 휘둘렀다.이국흥은 하현이 감히 자신에게 또 손을 쓸 줄은 몰랐다.뺨을 맞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그는 가까스로 우민은의 몸에 기댄 덕분에 쓰러지지는 않았다.“미친 거야?!”“당신들 여기가 무법천지인 줄 알아?”우민은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이봐, 어서 신고해!”“은행 협회에 통보해서 설은아한테 대출 다 막으라고 해!”이때 하현은 싸늘한 표정으로 우민은과 이국흥을 바라보며 말했다.“두 사람이야말로 내 블랙리
하현을 말리는 설은아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국흥은 험상궂은 얼굴로 이를 갈며 일어섰다.그는 입가의 피를 닦고 하현을 가리키며 말했다.“개자식! 당신 누구야?!”“당신이 뭔데 감히 이러는 거야?”“날 때려? 감히 날 때렸어?”“내가 뭐?”하현은 앞으로 나서면서 또 손바닥을 올려 이국흥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감히 내 아내한테 그런 모욕감을 주다니! 나한테 누구냐고 물었어?”“내가 누군지 당신 눈엔 안 보여?”“혹시 설 대표가 당신 부인이야?”이국흥은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뭔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신이 그 소문으로만 듣던 그 쓰레기 같은 놈?”“그런데 감히 날 때려?!”“죽여버릴 거야!”하현은 또 그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퍽!”“날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렇지만 내 여자를 건드리는 놈은...”“절대 용서할 수 없어! 오늘이 당신 제삿날인 줄 알아!”퉁퉁 부은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국흥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벌벌 떨었다.“하현, 그만해! 그만하라고!”설은아는 한사코 하현을 말리며 붙잡았다.“또 때리면 정말 사람이 죽겠어!”그녀는 마음속으로는 그를 고맙고 든든하게 여겼지만 불똥이 그에게 튈까 봐 걱정도 되었다.오래된 도시 금정의 은둔가 가문이 뒷배에 있는 금정은행 부장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금정은행의 뒷배인 나 씨 가문은 금정 금융계의 거물이었다.“개자식! 감히 날 때리다니?!”“흥! 넌 이제 죽었어! 내가 반드시 널 죽여버릴 거야!”이국흥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러나 그는 감히 하현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입만 떠들썩하게 떠벌렸다.“반드시 관청에 보고해서 감옥에 처넣어 버릴 거야!”“그리고 제멋대로 날뛰는 네놈 때문에!”“이 여자도 상상하기 힘든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블랙리스트에 올라 금융계에선 다시는 일 원 한 푼 빌릴 수 없게 만들 거라고!”“
설은아는 얼굴이 굳어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부장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부장님이 이천억, 아니 이조를 준다고 해도 난 이런 파렴치한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요!”“설 대표님, 왜 그렇게 고지식하게 굴어요!”“아니 그냥 잠 한 번 자는 것 가지고 뭘 그래요? 결국 서로 윈윈하는 거 아닙니까?”“다른 사람들은 이런 기회가 없어서 꿈도 못 꾼다고요!”“그런데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요?”“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혼도 한 번 했겠다 잠 한 번 자는 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남의 편의를 봐주고 내 이익을 챙기면 되는 거죠.’“이번에 잘 하면 앞으로도 대표님은 육 씨 도련님의 사람이 되어서 금정에서 편하게 사업할 텐데, 그런 기회를 발로 차버려요?”“대표님이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돈을 빌릴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러면 금정에선 사업하기 힘들어져요!”“왜 돈을 앞에 두고 내팽개치려는 거예요?”이국흥은 이 바닥에서 닳을 대로 닳은 인물이었다.이런 일에 경험도 많고 비열함 따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상대를 앞에 두고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며 이리저리 이로울 대로 몰아가고 있었다.정신력이 보통인 여자가 아니라면 그의 능수능란한 언변과 뻔뻔스러운 행동에 쉽게 넘어가고도 남았다.설은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섰다.“이 부장님, 내가 돈이 필요하긴 해요!”“하지만 돈 때문에 내 몸과 영혼을 팔진 않을 겁니다!”설은아에겐 분명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있었다.“좋아요, 안 받으셔도 됩니다!”“없던 일로 하죠!”이국흥은 테이블을 탁 치며 노기등등한 표정을 지었다.“게다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은 우리 금정은행에 따로 오백억 빚이 있습니다!”“계약대로 다음 달에 갚아야 하고요!”“기한이 지나면 우리 금정은행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 자산을 몰수할 권리가 있습니다!”“그렇게 되면 대표님도 자리를 보전할 수 없을 겁니다!”
”대출이 갱신이 안 되어서 우리 회사가 두 달째 월급을 못 주고 있어요.”“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고 공장 생산도 중단되었어요.”“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회사는 정말 파산할 거예요.”설은아는 조심스럽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말했다.“이 부장님, 우리 회사랑 거래하는 게 처음도 아니잖아요.”“부장님도 우리 집안에 대해 잘 알고 계시고요. 우리 뒤에는 10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인 대구 정 씨 가문이 있어요.”“도와주신다면 그 은혜 꼭 보답하겠습니다.”이국흥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설은아를 바라보았다.“설 대표님, 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대표님 회사는 지금 장부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 위험평가를 통과할 수가 없어요!”“내가 직업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업윤리를 어겨 가면서까지 대표님을 도와드릴 순 없잖습니까?!”“안타깝지만 우리 은행에서 이번 대출 연장은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하지만 우리 은행에서 대표님께 기회를 안 드리는 건 아닙니다...”말을 마치며 이국흥은 미리 준비해 둔 서류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서남 천문채 육 씨 도련님이 당신한테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하는군요.”“이건 이천억을 빌린다는 차용증입니다. 대표님이 여기 서명만 하면 당장 효력이 발생하고요.”“언제든지 돈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하지만 육 씨 도련님이 말씀하셨어요. 하룻밤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고.”육 씨 도련님?!설은아는 낯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녀는 분명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그래서 그녀의 눈빛에선 겨울 칼바람 같은 매서운 기운이 넘실거렸다.“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직업윤리도 없고 염치도 없으세요?”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이국흥은 뻔뻔스럽게 입을 열었다.“당연히 무슨 말씀인지 알 텐데요.”“난 대표님이 육 씨 도련님의 요구대로 했으면 합니다!”“그분이 누굽니까? 서남 천문채에서 어마어마한 지위에 있지 않습니까? 잘 아시면서 왜 그러
”아, 아니...”“대, 대사님! 대사님!”이때 나천우는 정신을 차리고 울부짖으며 하현을 쫓아가려고 발버둥쳤다.임단은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나천우를 뒤따랐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현은 그들에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나천우 부부가 급한 마음에 부하들에게 전화를 걸어 얼른 하현을 뒤쫓으라고 하려던 참이었다.나천우를 뒤쫓아온 형나운은 나천우의 전화기를 툭 쳤다.“천우 오빠, 또 일을 그르치려고 그래?!”그녀는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다.“지금 하현이 화가 나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게 생겼는데 부하들이 쫓아간들 어쩌겠어?”“하현이 돕지 않겠다고 하는데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겠어?”나천우는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 되었다.“형나운, 우리가 잘못했어.”“우리가 눈이 멀었나 봐. 눈앞에 사람을 두고도 제대로 볼 줄 몰랐으니 말이야!”“하지만 너랑 나랑 오랜 인연을 생각해서 부디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잘 좀 봐달라고 말 좀 해 줘!”“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돈 문제는 절대 신경 쓰지 마!”“맞아.”이때 임단도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형나운, 그러면 주소라도 알려줘. 우리가 가서 삼고초려라도 해 볼게!”“좀 진정해. 이렇게 쫓아가 봐야 아무 소용없어.”형나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조금 있다가 내가 전화해 볼게.”그 시각 진회강 강변에 위치한 금정은행 본사 앞.설은아는 머뭇거리다가 뭔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은행 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마침 택시를 타고 지나가던 하현이 설은아의 모습을 보았고 자금난에 허덕이는 그녀의 사정을 급히 떠올리며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한 뒤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뒤따랐다.하현이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마침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전화를 받아보니 형나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나 사장 부부가 잘못을 깨닫고 직접 사과드리고 싶다고 해요.”“내 얼
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형나운도 틀림없이 이 사기꾼에게 속았다고 생각했다.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감히 자신을 풍수대사라 할 수 있겠는가?장난하는 건가?이런 사람이 사기꾼이 아니라면 누가 사기꾼이란 말인가?임단이 참지 못하고 옆에서 끼어들었다.“그럼 당신은 음양학을 배운 학생이에요?”하현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아니요. 난 굴착기를 배웠어요. 기술도 좋고 자격증도 있어요.”“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갑자기 표정이 냉랭해졌다.“지금 뭐라는 거예요?”“굴착기를 배운 사람이 무슨 풍수를 본단 말이에요?”“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예요?”“대하에서 풍수지리가 얼마나 큰 위상을 차지하는지 몰라요?”“우리를 속이려 들다니 후환이 두렵지도 않아요?”나천우의 말에 형나운의 안색이 새까맣게 일그러졌다.그녀는 다급하게 나천우에게 눈길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오빠, 그만하면 안 돼!”“우리 두 집안의 친분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내가 이런 중요한 일을 두고 오빠를 속였을 거라고 생각해?”“내가 바보야?!”“너 나 속이는 거 아냐?”나천우의 얼굴은 냉랭하게 식었다.“너도 자세히 봐 봐. 이 젊은 사람은 풍수라는 두 글자도 모르는 것 같은데 어떻게 믿으란 얘기야?!”“이 사기꾼을 만나려고 내가 금정은행 투자 포럼도 안 나가고 여기 왔겠냐고!”임단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비난에 열을 올렸다.“형나운, 당신 정말 경솔했어!”예전 같았으면 두 집 사이에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형나운이 하현에 대해 거의 신처럼 말했다는 것이다.나천우와 임단은 자신들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줄로 알고 커다란 희망을 품고 여기 왔다.다만 희망이 크면 실망도 큰 법이고 분노는 걷잡을 수 없다는 걸 몰랐을 뿐이다.“나 사장님?”형나운은 하현의 목소리에 그에게 눈길을 떨구며 손을 내저었지만 하현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담담한 눈
”형나운, 정말 축하해!”“우릴 속이지 않았군!”“그런데 그 대사님은 어디에 계셔?”“얼른 좀 소개해 줘!”나 사장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병은 이미 수많은 국내외 명의들한테 보여줬어. 국수인 장북산 선생님도 보셨지!”“어르신은 우릴 보고 병이 아니라 악에 부딪힌 것이라고 하셨어.”“풍수에 정통한 사람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대.”“하지만 수많은 풍수지리사를 만나봤지만 도저히 해결되지 않았어.”“어쨌든 형나운, 당신이 대사님한테 말 좀 잘 해 줘!”나 사장의 부인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형나운, 우리를 살릴지 말지 여부는 전적으로 당신의 손에 달려 있어.”“이 일이 잘 해결되면 최고 가문에서 기가 막힌 남편감을 물색해 줄게. 정말 섭섭하지 않게 해 줄 거야!”옆에 살짝 비켜서 있던 하현의 이마에 주름살이 잔뜩 드리워졌다.기가 막힌 남편감?뭐가 기가 막히다는 거지?형나운은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나 사장님, 그 대사님은 바로 가까운 곳에 있어요.”“하현, 소개할게요. 이 분은 나천우 사장님, 그리고 이쪽은 나 사장님 사모님, 임단.”“나 사장님은 나 씨 가문 출신이에요.”“나 씨 가문은 형 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금정에 토박이로 아주 뿌리가 깊은 가문이죠.”“예로부터 은행업을 해 왔고 지금도 금정에서 가장 큰 은행인 금정은행을 움직이는 가장 큰 지주이자 실세죠.”“나 사장님 부부는 결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자식이 없어요. 그래서 온갖 치료를 받았지만 성과가 없어서 결국 풍수지리술에 기대 보려고 하고 있어요.”“할아버지 얘기를 듣고 여기까지 오셨고요.”“우리 형 씨 가문과 나 씨 가문은 사이가 좋아서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당신한테 말도 없이 여기로 오라고 했어요.”형나운은 조금 찔리는지 불안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하현, 이렇게 불쑥 말을 꺼내면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지만 제발 나 사장님 부부를 좀 도와줬으면
하현은 이맛살을 구기며 말했다.“말로 하면 되지! 당신 왜 이러는 거야? 이런 행동을 왜 하는 거냐고?”“내가 그런 사람이야?”“하현, 치료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형나운은 미안한 듯 겸연쩍어하며 말했다.“그래서 내가 주동적으로 이런 자세를 보인 거예요. 언제든지 와도 상관없다고.”“아무튼 당신이 날 고쳐 줄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요.”“강하면 강할수록 난 더 좋아요.”“당신 정말...”“마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죠?”하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순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퍽’하고 내리쳤다.“이렇게 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누가 말했어?”“지난번에 난 기혈과 두통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줬어.”“그런데 지금 당신 문제는 완전히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절대 호전되지 않아!”하현의 말을 들은 형나운은 순간 얼굴이 벌게졌다.그녀는 얼른 엉덩이를 내리고 똑바로 선 다음 서랍 속에서 노란 가죽으로 싼 고서적 한 권을 꺼내 하현에게 건네주었다.하현이 힐끔 쳐다보니 ‘영춘’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집안을 다스리는 처세술에 관한 책인 ‘영춘’은 여자아이의 수련에 안성맞춤이었다.하지만 진짜 ‘영춘’은 기본적으로 무학의 성지에서 내려오는 비법서 같은 것이고 방금 형나운이 꺼낸 책은 남은 자투리 책이라고 할 수 있다.그녀는 자투리 잡서에 가까운 책으로 수련을 하는 바람에 자주 숨이 막히는 증상이 생긴 것이다.하현은 그제야 뭔가를 알아차리며 빠진 부분을 보충해서 써 준 뒤 그녀에게 책을 던져주며 말했다.“이 책은 영춘의 상반부에 불과해. 그래서 내가 상반부만 보충해 줬어. 이렇게 한다면 별일 없을 거야.”“후반부는 당신이 기회를 봐서 오매 도교 사원에 가서 문의해 봐.”“만약 내가 당신한테 준다면 오매 도교 사원이 아마 날 죽이려고 들 거야.”“아, 알겠어요.”형나운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하현이 보충해 놓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