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던 성혜인은 바로 답장했다.‘제가 직접 반승제 씨와 얘기할 수는 없을까요?’이미 BH그룹까지 온 마당에 반승제만 원한다면 두 사람은 바로 만날 수 있었다.변호사는 반승제와 상의해 본다고 답장하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BH그룹의 가장 위층.반승제는 검은색 대리석으로 장식된 사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이때 심인우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성혜인 씨가 대표님과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반승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거절해요.”반승제는 이것 또한 이혼하지 않을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나랑 만나면 뭐가 달라질 줄 아나? 퍽이나...’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단호하게 말했다.“변호사더러 이혼 서류를 성씨 저택으로 보내서 직접 사인할 때까지 지켜보고 있으라고 해요.”심인우는 반승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성혜인의 얘기를 그만하고 스케줄을 확인했다.“HD은행 이문호 대표님과의 골프 스케줄은 지금 출발해야 합니다.”반승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넥타이를 정리하며 말했다.“그래요.”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성혜인은 가만히 앉아서 분주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마치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듯이 말이다.기다림은 아주 평화로웠다. 성씨 저택에서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혜인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승제가 왜 너랑 이혼해?”성휘는 다급하게 말했다.“둘이 싸우기라도 했어? 일단 집으로 와서 잘 좀 얘기해 보자.”성혜인은 약간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아빠, 아무리 남편이라고 해도 저희는 남과 다를 바 없어요. 그리고 승제 씨가 귀국한 이상 저를 아내로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ㅂ성휘는 급한 나머지 랩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혜인아, 이혼은 절대 안 된다. SY그룹에서 곧 투자 유치를 시작할 건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혼한다면 주가가 무조건 하락할 거야.”휴대전화 건너편에서는 소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내가 이럴 줄 알았어요. 혜인이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성혜인은 반승제의 차가운 표정에 몸이 흠칫 떨리는 것만 같았다.그의 일행은 빠르게 성혜인을 스쳐 지나갔다. 가장 선두에 있는 사람은 반승제와 얘기하느라 주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어 보였다. 뒤에 있는 사람은 전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이는 성혜인이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낯선 세상이었다.성혜인은 잠깐 넋을 놓고 있다가 골프채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평범한 생김새의 이승주는 명품 운동복을 입고 가볍게 공을 치고 있었다. 성혜인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골프채를 캐디에게 건네주며 말했다.“드디어 만났네요, 페니 씨. 일 한 번 같이 하기 너무 힘든 거 아니에요?”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아닙니다. 저는 그냥 평범한 직원일 뿐인데요.”이때 골프장 직원들이 주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거물이 방문하려는 모양이었다.성혜인의 시선을 느낀 이승주는 허풍을 치기 시작했다.“BH그룹이라고 알아요? 제 아버지가 오늘 BH그룹 대표랑 4조짜리 경기를 준비했어요.”성혜인의 경험으로 허풍 치기를 좋아하는 고객을 상대로는 무조건적인 칭찬이 가장 옳았다.“도련님께서 금방 산 땅만 해도 600억은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4조쯤은 HD은행에게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이승주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그 정도는 아니에요. 하지만 반승제가 금방 귀국하고 나서 첫 합작 기회가 생겼으니 이쯤은 준비해야죠.”“반승제 씨의 귀국이 확실히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죠.”성혜인은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칭찬만 했다.이때 이승주가 캐디가 건네는 물을 받아들며 몸을 일으켰고, 성혜인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일어났다.“제 아버지 말로는 반승제가 이미 결혼했다고 하더라고요.”“그래요? 보기에는 전혀 결혼한 사람 같지 않던데요.”성혜인은 골프채를 꺼내면서 말했다. 갑이 하고 싶은 얘기라면 그녀는 뭐든 맞춰줄 수 있었다.“그러게 말이에요. 결혼을 했으면 와이프를 보여줘야 할 거 아니에요. 이쯤 되면 사람들이 비웃을 정도
이승주는 성혜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밖에는 그의 경호원으로 쫙 깔려 있었다.반승제가 우월한 몸매가 숨김없이 드러나는 운동복을 입은 채로 우아한 자태로 걸어오고있었다. 그는 멀지 않은 곳의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이승주는 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성혜인에게 말했다.“남편이 왔는데 인사는 해야 하지 않나요?”성혜인은 숨을 잠깐 고르더니 밖으로 걸어 나갔다.반승제가 휴게실 문을 빼꼼 열었을 때 여자의 손길을 느끼고 동작을 멈췄다. 여자는 그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휴게실 안으로 밀어버렸다.반승제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나가.”성혜인은 빠르게 휴게실 문을 잠그고 간절한 표정으로 반승제를 바라봤다.“정말 죄송해요. 저 여기 잠깐만 있다가 가면 안 될까요?”반승제는 말없이 성혜인의 무릎을 바라봤다.그의 시선을 따라 성혜인도 자신의 무릎을 바라봤다. 샤워하면서 따듯한 물이 닿아서인지 무릎의 상처는 더욱 선명해졌다. 마치 ‘잘못된 자세’로 이렇게 된 것처럼 말이다...“이건 차에 부딛혀서 이렇게 된 거예요.”성혜인은 발그레한 얼굴로 약간 어색하게 설명했다.‘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왜 설명하고 있는 거야!’“여긴 뭘 하러 왔어?”반승제는 눈을 깔아 그녀는 바라봤다.“일하러요.”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반승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복잡한 표정으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녀를 쫓아낼 생각은 없는 듯했다.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성혜인은 눈을 피했다. 반투명한 욕실 문 뒤에서 반승제의 그림자가 은은하게 보였다.반승제의 몸에는 군살이 하나도 없었다. 샤워기에서 떨어진 물은 단단한 가슴팍을 따라 은밀한 곳으로 흘러내렸다.성혜인은 그의 온도와 힘이 또다시 생각날 것만 같아서 눈을 꼭 감고 몸을 돌렸다.이승주에게 보여줄 건 다 보여줬으니, 성혜인은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반승제와 하룻밤을 보낸 것만으로 해도 이미 충분히 어색했는데 그녀는 이혼을 앞두고 다른 에피소드를 만들고
이승주는 잠깐 멈칫하다가 뒤늦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아차린 듯했다.‘감히 부승제의 이름으로 나를 밀어내다니... 담도 크군.’당사자가 직접 아니라고 말했으니, 이승주는 조만간 다시 만나면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골프장에서 나온 성혜인은 아직도 이승주의 역겨운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그녀는 일단 이곳을 빠져나간 후 방법을 생각해 볼 작정이었다.성혜인의 초라한 차는 주차장의 고급 차량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차에 올라탄 성혜인은 조심스럽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 오던 차의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딪쳐 버렸다.성혜인의 차는 앞으로 3m나 밀려났고 바로 앞에 세워져 있던 벤틀리와 연이어 부딪치게되었다.차에서 내려온 성혜인은 한 중년 여자와 마주쳤다. 깔끔한 메이크업을 한 중년 여자는 성혜인의 차를 보고 약간 무시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성혜인을 돈 많은 남자를 쫓으러온 여자로 여기는 듯했다.중년 여자의 표정을 읽은 성혜인은 머리를 돌려 벤틀리를 바라봤다. 번호판이 무려 같은숫자인 자동차를 중년 여자는 봤는지 모르겠다.“그쪽 차는 내 보험회사에서 배상해 줄 테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여자는 손을 휘적이며 대놓고 귀찮은 티를 냈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앞에 있는 차는...”성혜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자가 먼저 가로챘다.“내가 시간 낭비하기 싫다고 했잖아. 앞 차도 내가 알아서 배상할 테니까 빨리 나가. 나도 주차해야 돼!”앞 차는 아무래도 2000만 원 정도 배상해야 할 것 같았지만 중년 여자가 알아 한다고 했으니, 성혜인은 개의치 않고 떠나갔다.중년 여자는 이제야 앞 차가 최고급 벤틀리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차주를 찾을 생각이 없는 듯 재빨리 주차하고 골프장 안으로 들어갔다....반승제는 이문호 부자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심인우는 차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앞으로 달려갔다가 처참한 현장을 바라보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주차
성혜인은 머리카락을 닦다 말고 골프장에서 부딪힌 벤틀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차라면 이미 얘기가 끝나지 않았던가?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옷을 갈아입고 경찰서로 따라갔다.“성혜인 씨, 이건 차량 번호 11111의 사고 현장 사진입니다. CCTV에 따르면 저녁 6시 20분경, 성혜인 씨가 사고를 내고 아무런 연락처도 남기지 않은 채 도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사고는 전적으로 성혜인 씨의 책임입니다.”성혜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다른 차 한 대를 가리켰다.“이분이 급한 일이 있는데 앞 차도 알아서 배상해 준다고 해서 제가 떠난 거예요.”“벤틀리의 차주분은 성혜인 씨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건 보험 회사의 청구서이니 확인해 보십시오.”6000만 원.이는 성혜인이 배상하지 못할 정도의 거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억울해서라도 배상하고 싶지 않았다.“만약 저희의 말을 따르지...”경찰이 말을 끝내기 전에 한 젊은 경찰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성혜인 씨는 이미 석방되셨습니다.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성혜인은 약간 의아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아무한테도 이 일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경찰을 따라 밖으로 나오자 경찰서 바로 앞에 검은색 차량이 보였다. 경찰은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가족분이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네. 감사합니다.”성혜인은 경찰이 떠난 다음에야 다가가서 상대가 누구인지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차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누군가가 그녀를 힘껏 끌어당겼다.이상함을 눈치챈 성혜인은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살...!”코와 입을 막은 손수건에서는 자극적인 냄새가 났다. 성혜인은 잠깐 버둥거리다가 금세 힘없이 축 늘어졌다.그녀는 정신이 몽롱해서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들었다.“도련님이 호텔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야. 얼른 데려가자.”“근데 진짜 예쁘게 생기기는 했네. 얼굴 하고 몸매가 아주 요물이 따로 없어. 어쩐지 승주 도련님이 CCTV를 보자마자 찾아오라고 한다고 했어
성혜인은 입술을 약간 벌렸고 약의 영향으로 인해 눈빛에 물기가 돌았다.애써 잊으려고 했던 기억의 파편들은 반승제의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며칠 전의 그날 밤에도 그녀는 이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무엇이라 표현할지 모를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그리고 성혜인도 이 분위기를 타 그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이승주는 반승제가 그녀를 밀어내지 않는 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분명 낮에 반승제의 입으로 그녀는 자기 부인이 아니라고 부정하였는데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이승주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성혜인에게 말했다.“페니 씨, 저 여기 있어요. 이쪽으로 와야죠.”이승주는 성혜인의 반응이 약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성혜인은 그 누가 데려간다고 하여도 반항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성혜인을 향해 손을 내밀던 이승주는 이내 반승제의 눈치를 보며 다시 손을 거두었다.반승제도 바보가 아니니 그녀가 낮에 자신의 탈의실로 뛰어 들어온 게 이승주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주의 여자친구일 리가 없었다."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는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겠죠..."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자기 목에 매달려 있는 여자를 힐끔 봤다.성혜인의 눈빛은 매혹적이었고 행동 또한 대담하였다.그녀는 이미 반승제의 목을 잡고는 한 마리의 고양이처럼 그의 목에 매달려 자신의 몸을 맞대며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더웠다. 그녀는 불같은 자신의 지금 이 상태를 식히고 싶었고 때마침 눈앞의 남자는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더운 기운에 그녀는 더 차가운 걸 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지금 이 행동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꼴밖에 되지 못하였다. 갈증이 났다.그녀의 행동을 본 이승주는 아랫배가 당겨 오는 것을 느꼈고 성혜인의 청량한 분위기와 표정은 독을 품은 장미의 가시처럼 남자의 가슴을 찔러댔다.설마 반승제도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닐까?여자와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그가 말하지
욕조 옆에 선 반승제의 정장 바지는 물에 흠뻑 젖었고, 따라서 그의 몸도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날 밤의 기억 파편도 반복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반승제 본인도 그녀의 여보라는 말 한마디에 자신의 몸이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다.말을 하는 목소리마저 갈라졌다.“정신 차렸으면 알아서 나와.”성혜인의 옷이 물에 젖은 바람에 그녀의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녀의 긴 생머리는 뺨에 달라붙어 마치 물에서 갓 나온 요정같이 사람을 홀리고 있었다.몸의 열기가 또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반승제를 보고 싱긋 웃더니 그녀는 그대로 욕조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을 쳤다.하지만 반승제의 잘난 얼굴에서는 한치의 표정도 읽을 수 없었고 그녀를 그대로 다시 욕조로 밀어 넣어 그녀의 머리 위로 샤워기를 틀었다.남자의 행동은 부드러움은 고사하고 거칠기까지 하였다.성혜인은 할 수 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정신이 몽롱할 때 딱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약 효과 때문에 이러는 자신 때문에 그녀도 괴로워 미칠 지경이었다.반승제는 힘을 풀었고 그녀 혼자 정신이 돌아오게 놔둘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는 그녀에게 옷깃을 잡히는 바람에 그의 몸은 그만 앞으로 기울어졌다.그렇게 두 얼굴이 서로 마주하고 입술까지 부딪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한 명은 뜨겁고, 다른 한 명은 차가운 채 말이다.콰당.손에 쥐여 있던 샤워기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고, 반승제의 목젖은 심하게 위아래로 요동치고 있었다.그의 몸이 다시 반응하려는 그 순간, 그는 몸을 일으켰다. 욕조 안의 사람은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쾅!욕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반승제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았다.거실로 나온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고 차가운 눈빛은 창가에 고정한 채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심인우가 들어왔을 때, 방 안의 공기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것은 눈치로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얼음장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그는 반승제의 바지가 반쯤 젖어
성혜인의 몸은 흠뻑 젖어져 있었고 긴 생머리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신발을 신지 않은 발로 바닥을 밟고 있으니, 발목마저 뻣뻣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그녀의 발은 하얬고 정갈하게 정리된 발톱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오므리고 있었다.반승제는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쳐다 보았고 노트북을 닫으며 비웃었다.“여보? 이제는 네 속셈을 감출 생각도 없나 봐?”그의 시선을 느낀 성혜인이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불빛 때문에 그녀의 속옷마저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지고 있었다.창백하던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오르더니 그대로 욕실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그녀의 수작 과정을 보고 싶지 않았던 반승제는 다시 자신의 노트북과 파일을 가져와 자리를 뜨려고 하였는데 파일 안에 있던 사진들이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졌다.미처 주울 겨를도 없이 욕실의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갈아입을 옷조차 없었던 성혜인이 타올을 두르고 젖은 긴 머리를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뽀얀 얼굴이 드러났고 그녀의 말과 행동도 전보다 많이 진정된 듯싶었다.“대표님, 이번 일에 대해서는 사과할게요.”성혜인은 고개를 숙이고는 키를 꺼냈다.“방은 다른 방으로 준비해 드릴게요. 그리고 필요하면 이번 일에 대한 정신적 피해 보상도 할게요.”그녀를 이승주 손에서 구해준 자신에게 감사의 표현을 하기는커녕 그녀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이런 취급을 받자 화도 나지 않았다.“정신적 피해 보상?”반승제는 그녀가 한 말을 다시 반복하며 자신이 들은 게 틀림이없다는 걸 확인이라도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성혜인은 불안감에 타올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타워에 주름이 잡혀져 있었다. 아직 몸 안에 약물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기에...고개를 들어 반승제와 눈을 마주치자 방금까지 말하려고 준비해 두었던 말들이 금세 공기 속 먼지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머릿속에는 그녀가 그에게 붙어 억지로 키스하던 장면이 스쳐 지나가자, 가슴속에서는 이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
온시환은 천천히 손을 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래, 알았어.”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온시환의 눈가는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러나 공지민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온시환이 또 심심풀이로 자신을 괴롭히려 한다고 생각했다.차인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온시환 같은 남자가 진심일 리 없었다. 설령 진심이라 해도, 공지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는 식당 밖에 홀로 서 있었다.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공지민이 택시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잠시 후, 그는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야, 오늘 한 잔 하자.”반승제는 흔쾌히 응했다.이상하게 오늘 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는 서주혁까지 불렀다.두 사람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여러 병의 술을 비운 상태였다.“시환아, 너 대체 왜 이래?”온시환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했다.“뭐 하는 거야? 얼른 앉아.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못 가!”혼자서 술을 퍼마신 온시환을 보며 반승제는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너 혹시 무슨 고민 있냐?”“고민은 무슨...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하하.”서주혁은 말없이 나무토막처럼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그는 분위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반승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들을 모두 치우고 온시환 앞에 과일주스를 내밀었다.“솔직하게 얘기해. 무슨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온시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반승제는 그가 웃는 줄 알았다. 웃을 때도 어깨가 들썩이긴 마찬가지니까.“뭐야, 웃긴 얘기라도 있어?”그는 온시환의 몸을 돌려보았고 그제야 그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야, 주혁아! 이거 봐. 시환이가 울고 있어!”온시환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꺼져!”반승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동차가 레스토랑 앞에 멈춰서자 공지민이 먼저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온시환도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자리를 예약 해둔 터라 직원이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공지민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푸른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왜, 내가 이제 그 점이 없으니까 나를 쳐다볼 생각도 없어진 거야?”공지민은 그가 귀찮을 뿐이었다. 이미 진실을 알았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지, 굳이 이런 말로 둘 다 어색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그러나 온시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네가 다니던 고등학교 가서 구은우 사진 봤어. 솔직히, 별로 잘생긴 것도 아니던데.”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온시환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오히려 더 그녀를 찌르는 말을 꺼냈다.“그렇게 좋으면 왜 안 찾아가? 아니면 이미 결혼이라도 한 거야? 네가 이러거 있는 거 보면, 그 자식도 너를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지? 참 안 됐네.”그때 마침 직원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말없이 잔을 들어 올린 공지민은 그대로 커피를 온시환에게 끼얹었다.온시환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감정적인 반응이 반갑기까지 했다.마치 나무토막처럼 감정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공지민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정신이 좀 들었어?”온시환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있는 냅킨을 집어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어쩌지? 평생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공지민, 난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왜 날 대체품으로 썼는지. 진짜 그 점 하나 때문이야?”그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을 터였다.그래서 그는 더더욱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심지어 그
온시환은 공지민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왜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그에게 와서 상처를 남겼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더 한심한 건 자신이었다. 대체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몰래 보러 온 자신이 더 우스웠다.온시환의 차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주차돼 있었다. 연예계에서 그의 영향력 덕분에 차를 촬영장 근처에 세워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그는 창문 너머로 공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문 장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아픈 손목을 문지르는 모습, 옆에 있던 낯선 여성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별다른 장면도 아닌데 온시환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공지민은 오후 촬영을 마치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보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공지민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쪽으로는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으로는 문보영이 여전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둘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문보영은 공지민이 그날 밤의 일을 봤다는 걸 몰랐다. 여전히 밝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했다.“지민아, 요즘 다시 촬영 시작했어? 혹시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내가 대표님께 한 번 말씀드릴 수 있어. 사실 대표님도 꽤 후회되시는 것 같더라. 요즘 네 인지도도 높잖아.”“아니, 괜찮아.”“그런데 너랑 시환 씨... 지민아, 너희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파티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잘 될 줄 알았는데, 요즘은 연락도 안 한다고 하던데.”예전 같았으면 공지민은 문보영의 말을 진심 어린 걱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문보영이 정말 궁금한 건 온시환이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여부라는 걸.“헤어졌어. 이번에는 정말 끝이야.”문보영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넌 괜찮아? 너 시환 씨 정말 좋아했잖아. 혹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너를 상처 준 거야?
당연히 취했다. 취하지 않았으면 온시환의 성격상 추지성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추지성은 온시환에게 다시 술병을 열어주며 말했다.“아직 덜 취한 것 같으니 더 마셔.”온시환은 희미하게 뜬 눈으로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지성아, 나 지민이 고등학교에 가봤어. 그리고 지민이 첫사랑을 알게 됐지. 꽤 괜찮게 생겼더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뭔지 알아?”“뭔데?”“내 코끝 여기.”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여전히 흐릿한 눈빛이었다.“여기에 구은우랑 똑같은 점이 있었잖아. 공지민은 아마 그 점 때문에 나에게 잘해줬던 거야. 너도 우습지 않냐?”그는 입으로 우습다고 말했지만 눈빛에는 슬픔이 넘칠 듯 담겨 있었다.추지성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누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가지고 놀고 싶을 뿐이었고 막상 손에 넣으면 금세 흥미를 잃었다.“못 가지는 게 가장 좋은 거지. 손에 넣으면 금방 싫증 나는 법이거든.”“지성아, 나 여기가... 정말 아프다.”추지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야, 네가 진짜 내 친구 아니었으면 벌써 널 집어 수영장에 던져 넣어버렸을 거다. 여자를 두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술 더 마셔야겠어.”“안 마셔. 마시면 더 괴로워질 뿐이야.”온시환은 그 말을 끝으로 옆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추지성은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려다 그의 축축한 속눈썹을 보고 멈칫했다.‘설마 또 울었어? 요즘 완전 여자 같아. 조금만 힘들어도 시도 때도 없이 우네.’온시환은 원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수년 전 큰 수술을 받은 후, 의사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로 그는 늘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그가 쓰는 드라마 대본들도 대부분 막장극이었고 그는 막장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막장이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돌아와 부메랑처럼 자신을 찌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밤중에 온시환은 추위
“뭐?”추지성이 어이없다는 듯 묻자 온시환은 긴 속눈썹을 떨구었다. 두 손은 컵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지민이 곁에 다른 사람이 생겼냐고?”추지성은 요즘 공지민에 대해 나름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어쨌든 그의 친구를 철저히 갖고 논 여자가 아닌가.“없어. 요즘 조연을 맡으려고 하는 것 같더라. 전에 소속사에서 퇴출당했잖아. 제대로 된 역할을 구할 수 없어서 3회 만에 죽는 조연 역할을 맡는 것 같던데.”“그래?”온시환의 대답은 느릿느릿했고 마치 누군가 그의 성대를 누르고 있는 듯 겨우 쥐어짜 낸 목소리였다.‘설마 얘가 아직도 공지민에게 미련이 남아있는 건가?’추지성이 한참 의아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온시환이 입을 열었다.“네가 지금 촬영 중인 작품 있잖아. 거기 서브 주연 역할을 지민이한테 줘.”“뭐야 열이있는 것도 아닌데? 설마 진짜 미친 거야?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곧바로 온시환의 이마를 짚어본 추지성은 당황한 듯 말했다. 그러자 온시환은 추지성의 손을 탁 쳐내며 다시 고개를 숙여 손에 들린 컵을 응시했다.“예전에 누가 감히 너를 이렇게 가지고 놀았다면, 너 절대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지금 이렇게 당하고도 네가 먼저 나서서 자원을 주겠다고? 좀 말이 되는 소리 해.”추지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그의 말은 가차 없었다.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너무 비굴해 보였다.온시환은 결코 이런 비굴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그냥 좀 줘.”“싫어. 너 새로 준비 중인 작품도 있잖아. 그렇게 달래고 싶으면 아예 걔한테 주연을 맡기면 되잖아.”온시환의 눈가에 순간 씁쓸한 기운이 스쳤다. 그는 컵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내가 주면 지민이가 받지 않을 거야.”이제 그는 대체품조차 아니었다. 그녀에게 그는 그저 길거리의 한낱 행인일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불쾌감을 주는 존재일지도 모른다.특히 그녀의 첫사랑 사진을 발로 짓밟았던 일을 떠올리면 그녀는 아마 그를 철저히 증오할
또 하루를 그렇게 보낸 뒤 온시환은 이튿날에서야 제원으로 돌아왔다.휴대폰에는 수많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대부분은 요즘 왜 밖에 안 나가냐는 질문이었다. 몇몇은 그와 공지민의 관계를 묻기도 했다.공지민이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온시환은 마음속에 분노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그 메시지를 삭제했다. 공지민이라는 세 글자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깊은 밤 꿈에서 깨어나면 그 억울함은 온전히 그리움으로 변해 있었다.또다시 꿈에서 깨어난 그는 고통스럽게 딱딱해진 자신의 몸을 보며 휴대폰을 들어 공지민과의 대화창을 열었다.마지막 메시지는 경찰서에 다녀온 그날 이후로 멈춰 있었다.그날 이후 공지민은 단 한 마디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그래. 점이 없어졌으니 이제 더는 첫사랑처럼 보이지 않겠지. 그러니까 나를 신경 쓸 리가 없지.’온시환은 몸을 뒤척이며 마음이 쓰라린 것을 느꼈다.‘구은우가 대체 뭐가 좋다고. 고등학생 시절의 나도 엄청 대단했어. 나 역시 학년 1등이었고, 많은 사람들의 짝사랑 대상이었어. 그저 공지민이 그때 나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 그랬다면 분명히 나에게 더 빠졌을 거야.’그는 혼자서 고등학생 시절의 구은우와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렇게 비교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임을 알고 있었다.신경 쓸수록 자신이 대체품이라는 사실에 대한 분노가 커졌다.분노가 커질수록 그녀가 꿈에 자꾸 나타났다.온시환은 다시 몸을 뒤척이며 휴대폰 화면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다음 날 아침, 그의 휴대폰에는 더 많은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왜 요즘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느냐는 질문들이었다.‘얼마나 오래됐지?’사실 그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부터 시간이 흐릿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그렇게 반달이 지나고 추지성이 직접 그를 집에서 찾아냈다.“시환아, 오늘 밤에는 나랑 술이나 한 잔하러 가자. 너 요즘 밖에 전혀 안 나가니까 사람들
차 안은 조용했다. 온시환이 간헐적으로 들이쉬는 숨소리만 들릴 뿐 다른 소리는 없었다.추지성은 몰래 차에서 내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한 손으로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서성거렸다.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그의 상식을 벗어난 상황이었다.그들 무리에서 온시환은 항상 가장 자유로운 사람으로 통했다. 여자를 잊는 데 있어 누구보다 빠르고 확실한 사람이었다.전날 밤 그의 침대에서 내려온 여자의 얼굴을 다음 날이면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게 온시환이었다.그야말로 진정한 바람둥이였다.그런데 지금 차 안에 웅크려 울고 있는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추지성은 혼란스러웠다. 여자가 그렇게 강력한 존재인가?이해할 수 없었다.반 시간쯤 흐른 후 온시환은 여전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 슬픔뿐만 아니라 후회도 함께 밀려들었다. 추지성에게 이런 초라한 모습을 들킨 것도 모자라 공지민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가다니.온시환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생애 가장 큰 망신을 오늘 모두 겪은 것 같았다.땅에 구멍이라도 생겨 그 안으로 들어가 숨고 싶었다.차에서 10분을 더 버틴 후에야 그는 문을 열고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멀리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추지성은 그의 부은 눈을 보자마자 다가왔다.“시환아, 좀 괜찮아졌어?”“응.”온시환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울어서인지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추지성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온시환은 문을 열고 들어가다 말고 잠시 생각하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오늘 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추지성은 즉시 하늘에 대고 맹세했다.“걱정 마. 이건 너랑 나랑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야.”온시환은 다시금 눈가가 시큰해지며 무력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시환아, 밥은 안 먹고 그냥 올라가?”추지성이 물었지만 온시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침실로 들어가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추지성은 함부로 따라 올라갈 수 없었다. 그
온시환은 기가차서 웃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경찰이 도착해 집 안을 둘러본 뒤 공지민에게 물었다.“신고하신 분이 맞으신가요?”“네, 제가 신고했어요. 불법 침입에 제 물건을 훼손했어요.”경찰은 곧 온시환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를 보자마자 알아보는 눈치였다.온시환은 연예계에서도 유명 인사였다. 수많은 히트작을 내놓았고 인터뷰에도 자주 얼굴을 비췄으며 뛰어난 외모 덕분에 남자 배우들보다도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경찰은 잠시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곧 그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시환 씨,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온시환은 그 순간 차분해진 표정으로 공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자마자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점을 뺐기 때문에 이제 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서 이렇게 매정한 거지, 그렇지?”그의 목소리는 허공을 떠도는 듯했고 눈가에는 비웃음이 어렸다.공지민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녀는 그의 턱을 잡아 좌우로 흔들며 매정하게 말했다.“그래, 이제 정말 하나도 안 닮았네.”그 말은 칼처럼 날카롭게 그의 가슴을 찔렀다. 온시환은 마치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더는 말할 기력조차 없어진 온시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경찰을 따라 걸어 나갔다.몇몇 경찰이 그를 데리고 떠났다. 공지민은 따라가지 않았다. 그녀는 방 안의 엉망진창이 된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온시환은 경찰차에 타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그는 평생 막장 드라마를 써오면서 언젠가 자신이 그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대체품 취급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공지민, 네가 감히...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억울함과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추지성은 경찰서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자마자 귀를 의심했다.‘시환이가 경찰서에 잡혀 있다니? 그리고 보석을 해줘야 한다고?’그는 어안이 벙벙한 채 차를 몰고 경찰서로 향했다. 막상 도착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