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반승제의 차가운 표정에 몸이 흠칫 떨리는 것만 같았다.그의 일행은 빠르게 성혜인을 스쳐 지나갔다. 가장 선두에 있는 사람은 반승제와 얘기하느라 주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어 보였다. 뒤에 있는 사람은 전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이는 성혜인이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낯선 세상이었다.성혜인은 잠깐 넋을 놓고 있다가 골프채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평범한 생김새의 이승주는 명품 운동복을 입고 가볍게 공을 치고 있었다. 성혜인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골프채를 캐디에게 건네주며 말했다.“드디어 만났네요, 페니 씨. 일 한 번 같이 하기 너무 힘든 거 아니에요?”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아닙니다. 저는 그냥 평범한 직원일 뿐인데요.”이때 골프장 직원들이 주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거물이 방문하려는 모양이었다.성혜인의 시선을 느낀 이승주는 허풍을 치기 시작했다.“BH그룹이라고 알아요? 제 아버지가 오늘 BH그룹 대표랑 4조짜리 경기를 준비했어요.”성혜인의 경험으로 허풍 치기를 좋아하는 고객을 상대로는 무조건적인 칭찬이 가장 옳았다.“도련님께서 금방 산 땅만 해도 600억은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4조쯤은 HD은행에게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이승주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그 정도는 아니에요. 하지만 반승제가 금방 귀국하고 나서 첫 합작 기회가 생겼으니 이쯤은 준비해야죠.”“반승제 씨의 귀국이 확실히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죠.”성혜인은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칭찬만 했다.이때 이승주가 캐디가 건네는 물을 받아들며 몸을 일으켰고, 성혜인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일어났다.“제 아버지 말로는 반승제가 이미 결혼했다고 하더라고요.”“그래요? 보기에는 전혀 결혼한 사람 같지 않던데요.”성혜인은 골프채를 꺼내면서 말했다. 갑이 하고 싶은 얘기라면 그녀는 뭐든 맞춰줄 수 있었다.“그러게 말이에요. 결혼을 했으면 와이프를 보여줘야 할 거 아니에요. 이쯤 되면 사람들이 비웃을 정도
이승주는 성혜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밖에는 그의 경호원으로 쫙 깔려 있었다.반승제가 우월한 몸매가 숨김없이 드러나는 운동복을 입은 채로 우아한 자태로 걸어오고있었다. 그는 멀지 않은 곳의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이승주는 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성혜인에게 말했다.“남편이 왔는데 인사는 해야 하지 않나요?”성혜인은 숨을 잠깐 고르더니 밖으로 걸어 나갔다.반승제가 휴게실 문을 빼꼼 열었을 때 여자의 손길을 느끼고 동작을 멈췄다. 여자는 그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휴게실 안으로 밀어버렸다.반승제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나가.”성혜인은 빠르게 휴게실 문을 잠그고 간절한 표정으로 반승제를 바라봤다.“정말 죄송해요. 저 여기 잠깐만 있다가 가면 안 될까요?”반승제는 말없이 성혜인의 무릎을 바라봤다.그의 시선을 따라 성혜인도 자신의 무릎을 바라봤다. 샤워하면서 따듯한 물이 닿아서인지 무릎의 상처는 더욱 선명해졌다. 마치 ‘잘못된 자세’로 이렇게 된 것처럼 말이다...“이건 차에 부딛혀서 이렇게 된 거예요.”성혜인은 발그레한 얼굴로 약간 어색하게 설명했다.‘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왜 설명하고 있는 거야!’“여긴 뭘 하러 왔어?”반승제는 눈을 깔아 그녀는 바라봤다.“일하러요.”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반승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복잡한 표정으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녀를 쫓아낼 생각은 없는 듯했다.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성혜인은 눈을 피했다. 반투명한 욕실 문 뒤에서 반승제의 그림자가 은은하게 보였다.반승제의 몸에는 군살이 하나도 없었다. 샤워기에서 떨어진 물은 단단한 가슴팍을 따라 은밀한 곳으로 흘러내렸다.성혜인은 그의 온도와 힘이 또다시 생각날 것만 같아서 눈을 꼭 감고 몸을 돌렸다.이승주에게 보여줄 건 다 보여줬으니, 성혜인은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반승제와 하룻밤을 보낸 것만으로 해도 이미 충분히 어색했는데 그녀는 이혼을 앞두고 다른 에피소드를 만들고
이승주는 잠깐 멈칫하다가 뒤늦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아차린 듯했다.‘감히 부승제의 이름으로 나를 밀어내다니... 담도 크군.’당사자가 직접 아니라고 말했으니, 이승주는 조만간 다시 만나면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골프장에서 나온 성혜인은 아직도 이승주의 역겨운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그녀는 일단 이곳을 빠져나간 후 방법을 생각해 볼 작정이었다.성혜인의 초라한 차는 주차장의 고급 차량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차에 올라탄 성혜인은 조심스럽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 오던 차의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딪쳐 버렸다.성혜인의 차는 앞으로 3m나 밀려났고 바로 앞에 세워져 있던 벤틀리와 연이어 부딪치게되었다.차에서 내려온 성혜인은 한 중년 여자와 마주쳤다. 깔끔한 메이크업을 한 중년 여자는 성혜인의 차를 보고 약간 무시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성혜인을 돈 많은 남자를 쫓으러온 여자로 여기는 듯했다.중년 여자의 표정을 읽은 성혜인은 머리를 돌려 벤틀리를 바라봤다. 번호판이 무려 같은숫자인 자동차를 중년 여자는 봤는지 모르겠다.“그쪽 차는 내 보험회사에서 배상해 줄 테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여자는 손을 휘적이며 대놓고 귀찮은 티를 냈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앞에 있는 차는...”성혜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자가 먼저 가로챘다.“내가 시간 낭비하기 싫다고 했잖아. 앞 차도 내가 알아서 배상할 테니까 빨리 나가. 나도 주차해야 돼!”앞 차는 아무래도 2000만 원 정도 배상해야 할 것 같았지만 중년 여자가 알아 한다고 했으니, 성혜인은 개의치 않고 떠나갔다.중년 여자는 이제야 앞 차가 최고급 벤틀리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차주를 찾을 생각이 없는 듯 재빨리 주차하고 골프장 안으로 들어갔다....반승제는 이문호 부자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심인우는 차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앞으로 달려갔다가 처참한 현장을 바라보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주차
성혜인은 머리카락을 닦다 말고 골프장에서 부딪힌 벤틀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차라면 이미 얘기가 끝나지 않았던가?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옷을 갈아입고 경찰서로 따라갔다.“성혜인 씨, 이건 차량 번호 11111의 사고 현장 사진입니다. CCTV에 따르면 저녁 6시 20분경, 성혜인 씨가 사고를 내고 아무런 연락처도 남기지 않은 채 도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사고는 전적으로 성혜인 씨의 책임입니다.”성혜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다른 차 한 대를 가리켰다.“이분이 급한 일이 있는데 앞 차도 알아서 배상해 준다고 해서 제가 떠난 거예요.”“벤틀리의 차주분은 성혜인 씨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건 보험 회사의 청구서이니 확인해 보십시오.”6000만 원.이는 성혜인이 배상하지 못할 정도의 거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억울해서라도 배상하고 싶지 않았다.“만약 저희의 말을 따르지...”경찰이 말을 끝내기 전에 한 젊은 경찰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성혜인 씨는 이미 석방되셨습니다.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성혜인은 약간 의아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아무한테도 이 일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경찰을 따라 밖으로 나오자 경찰서 바로 앞에 검은색 차량이 보였다. 경찰은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가족분이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네. 감사합니다.”성혜인은 경찰이 떠난 다음에야 다가가서 상대가 누구인지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차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누군가가 그녀를 힘껏 끌어당겼다.이상함을 눈치챈 성혜인은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살...!”코와 입을 막은 손수건에서는 자극적인 냄새가 났다. 성혜인은 잠깐 버둥거리다가 금세 힘없이 축 늘어졌다.그녀는 정신이 몽롱해서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들었다.“도련님이 호텔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야. 얼른 데려가자.”“근데 진짜 예쁘게 생기기는 했네. 얼굴 하고 몸매가 아주 요물이 따로 없어. 어쩐지 승주 도련님이 CCTV를 보자마자 찾아오라고 한다고 했어
성혜인은 입술을 약간 벌렸고 약의 영향으로 인해 눈빛에 물기가 돌았다.애써 잊으려고 했던 기억의 파편들은 반승제의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며칠 전의 그날 밤에도 그녀는 이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무엇이라 표현할지 모를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그리고 성혜인도 이 분위기를 타 그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이승주는 반승제가 그녀를 밀어내지 않는 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분명 낮에 반승제의 입으로 그녀는 자기 부인이 아니라고 부정하였는데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이승주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성혜인에게 말했다.“페니 씨, 저 여기 있어요. 이쪽으로 와야죠.”이승주는 성혜인의 반응이 약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성혜인은 그 누가 데려간다고 하여도 반항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성혜인을 향해 손을 내밀던 이승주는 이내 반승제의 눈치를 보며 다시 손을 거두었다.반승제도 바보가 아니니 그녀가 낮에 자신의 탈의실로 뛰어 들어온 게 이승주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주의 여자친구일 리가 없었다."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는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겠죠..."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자기 목에 매달려 있는 여자를 힐끔 봤다.성혜인의 눈빛은 매혹적이었고 행동 또한 대담하였다.그녀는 이미 반승제의 목을 잡고는 한 마리의 고양이처럼 그의 목에 매달려 자신의 몸을 맞대며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더웠다. 그녀는 불같은 자신의 지금 이 상태를 식히고 싶었고 때마침 눈앞의 남자는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더운 기운에 그녀는 더 차가운 걸 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지금 이 행동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꼴밖에 되지 못하였다. 갈증이 났다.그녀의 행동을 본 이승주는 아랫배가 당겨 오는 것을 느꼈고 성혜인의 청량한 분위기와 표정은 독을 품은 장미의 가시처럼 남자의 가슴을 찔러댔다.설마 반승제도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닐까?여자와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그가 말하지
욕조 옆에 선 반승제의 정장 바지는 물에 흠뻑 젖었고, 따라서 그의 몸도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날 밤의 기억 파편도 반복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반승제 본인도 그녀의 여보라는 말 한마디에 자신의 몸이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다.말을 하는 목소리마저 갈라졌다.“정신 차렸으면 알아서 나와.”성혜인의 옷이 물에 젖은 바람에 그녀의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녀의 긴 생머리는 뺨에 달라붙어 마치 물에서 갓 나온 요정같이 사람을 홀리고 있었다.몸의 열기가 또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반승제를 보고 싱긋 웃더니 그녀는 그대로 욕조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을 쳤다.하지만 반승제의 잘난 얼굴에서는 한치의 표정도 읽을 수 없었고 그녀를 그대로 다시 욕조로 밀어 넣어 그녀의 머리 위로 샤워기를 틀었다.남자의 행동은 부드러움은 고사하고 거칠기까지 하였다.성혜인은 할 수 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정신이 몽롱할 때 딱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약 효과 때문에 이러는 자신 때문에 그녀도 괴로워 미칠 지경이었다.반승제는 힘을 풀었고 그녀 혼자 정신이 돌아오게 놔둘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는 그녀에게 옷깃을 잡히는 바람에 그의 몸은 그만 앞으로 기울어졌다.그렇게 두 얼굴이 서로 마주하고 입술까지 부딪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한 명은 뜨겁고, 다른 한 명은 차가운 채 말이다.콰당.손에 쥐여 있던 샤워기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고, 반승제의 목젖은 심하게 위아래로 요동치고 있었다.그의 몸이 다시 반응하려는 그 순간, 그는 몸을 일으켰다. 욕조 안의 사람은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쾅!욕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반승제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았다.거실로 나온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고 차가운 눈빛은 창가에 고정한 채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심인우가 들어왔을 때, 방 안의 공기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것은 눈치로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얼음장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그는 반승제의 바지가 반쯤 젖어
성혜인의 몸은 흠뻑 젖어져 있었고 긴 생머리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신발을 신지 않은 발로 바닥을 밟고 있으니, 발목마저 뻣뻣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그녀의 발은 하얬고 정갈하게 정리된 발톱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오므리고 있었다.반승제는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쳐다 보았고 노트북을 닫으며 비웃었다.“여보? 이제는 네 속셈을 감출 생각도 없나 봐?”그의 시선을 느낀 성혜인이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불빛 때문에 그녀의 속옷마저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지고 있었다.창백하던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오르더니 그대로 욕실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그녀의 수작 과정을 보고 싶지 않았던 반승제는 다시 자신의 노트북과 파일을 가져와 자리를 뜨려고 하였는데 파일 안에 있던 사진들이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졌다.미처 주울 겨를도 없이 욕실의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갈아입을 옷조차 없었던 성혜인이 타올을 두르고 젖은 긴 머리를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뽀얀 얼굴이 드러났고 그녀의 말과 행동도 전보다 많이 진정된 듯싶었다.“대표님, 이번 일에 대해서는 사과할게요.”성혜인은 고개를 숙이고는 키를 꺼냈다.“방은 다른 방으로 준비해 드릴게요. 그리고 필요하면 이번 일에 대한 정신적 피해 보상도 할게요.”그녀를 이승주 손에서 구해준 자신에게 감사의 표현을 하기는커녕 그녀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이런 취급을 받자 화도 나지 않았다.“정신적 피해 보상?”반승제는 그녀가 한 말을 다시 반복하며 자신이 들은 게 틀림이없다는 걸 확인이라도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성혜인은 불안감에 타올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타워에 주름이 잡혀져 있었다. 아직 몸 안에 약물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기에...고개를 들어 반승제와 눈을 마주치자 방금까지 말하려고 준비해 두었던 말들이 금세 공기 속 먼지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머릿속에는 그녀가 그에게 붙어 억지로 키스하던 장면이 스쳐 지나가자, 가슴속에서는 이
성혜인은 이마에 붙어 있는 앞머리를 뒤로 넘겼고 눈빛은 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내뱉는 발음은 정확했고 온화한 미소마저 지어 보이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대표님, 제가 자기소개를 다시 할게요. 저는 실내 디자이너 페니라고 해요. 대표님께서 보고 계신 작품도 제가 디자인한 거예요.”반승제의 발걸음은 그대로 멈췄고 몸은 경직되어 있었다. 자신이 환청을 들은 건 아닌지 싶었다.성혜인은 그가 자신이 내민 손을 잡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자연스레 손을 거두었다.“전에 몇 번이고 대표님과 미팅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별로 흥미가 없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제 작품 사진을 갖고 계시네요. 혹시 생각이 바뀌셨나요?”그녀는 막힘없이 말하였다.“만약 그런 거라면 저도 대표님에게 보상할 기회가 생긴 거네요.”반승제 이십몇 년 생활에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실내 디자이너?그는 고개를 숙여 손에 쥐어져 있는 사진 말미에 있는 디자이너 이름과 일렬번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Penny. 영어 문자로 정갈하게 쓰여져 있었다.그리고 그동안 두 사람 대화들을 떠올린 그는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오해였다고?남자의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졌고 손에 사진을 꼭 쥔 채 다시 몸을 돌려 소파에 앉았다.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서 심인우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대표님, 여자분이 입을 옷을 가져왔어요.”성혜인은 자신을 위해 준비해 놓은 옷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심인우가 다시 한번 노크를 하려고 하였지만 이미 문은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해 열려 있었고 온몸이 물에 젖은 여인이 목욕 타올을 걸치고 있는 게 보였다.심인우의 눈빛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안 그래도 갑자기 미팅을 중단하는 바람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들어 대표 옆에 있던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심인우도 여기저기서 그녀가 자신의 대표한테 여보라고 했다는 무성한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그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있다가 급히 봉투에 있는 것을 건네주면서도 눈길은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