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이마에 붙어 있는 앞머리를 뒤로 넘겼고 눈빛은 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내뱉는 발음은 정확했고 온화한 미소마저 지어 보이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대표님, 제가 자기소개를 다시 할게요. 저는 실내 디자이너 페니라고 해요. 대표님께서 보고 계신 작품도 제가 디자인한 거예요.”반승제의 발걸음은 그대로 멈췄고 몸은 경직되어 있었다. 자신이 환청을 들은 건 아닌지 싶었다.성혜인은 그가 자신이 내민 손을 잡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자연스레 손을 거두었다.“전에 몇 번이고 대표님과 미팅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별로 흥미가 없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제 작품 사진을 갖고 계시네요. 혹시 생각이 바뀌셨나요?”그녀는 막힘없이 말하였다.“만약 그런 거라면 저도 대표님에게 보상할 기회가 생긴 거네요.”반승제 이십몇 년 생활에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실내 디자이너?그는 고개를 숙여 손에 쥐어져 있는 사진 말미에 있는 디자이너 이름과 일렬번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Penny. 영어 문자로 정갈하게 쓰여져 있었다.그리고 그동안 두 사람 대화들을 떠올린 그는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오해였다고?남자의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졌고 손에 사진을 꼭 쥔 채 다시 몸을 돌려 소파에 앉았다.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서 심인우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대표님, 여자분이 입을 옷을 가져왔어요.”성혜인은 자신을 위해 준비해 놓은 옷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심인우가 다시 한번 노크를 하려고 하였지만 이미 문은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해 열려 있었고 온몸이 물에 젖은 여인이 목욕 타올을 걸치고 있는 게 보였다.심인우의 눈빛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안 그래도 갑자기 미팅을 중단하는 바람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들어 대표 옆에 있던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심인우도 여기저기서 그녀가 자신의 대표한테 여보라고 했다는 무성한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그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있다가 급히 봉투에 있는 것을 건네주면서도 눈길은
방안은 시계 소리 돌아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반승제는 다시 한번 자신의 두 귀를 의심하였다.‘그러니까 나를 여보라고 부른 건 사람을 잘못 봐서라고?’크리스탈 샹들리에의 빛이 그녀의 옆 모습을 비췄고 그녀가 말을 계속하였다.“그날 밤 일에 대해 전 이미 잊었어요. 대표님도 잊었을 거라고 믿어요. 방금 여보라고 한 것도 정식으로 사과할게요.”사춘기 소년 소녀들도 아니고, 그리고 그날 밤 일은 소윤이 꾸민 일이니 그의 문제만은 아니니 당연히 책임질 필요도 없었다.눈앞에 놓여 있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그녀였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골머리를 앓고 싶지 않았다.“혹시 제 디자인에 흥미가 생기신 거라면 대표님이 원하는 걸 말씀해 보세요.”너무도 자연스레 공적인 얘기로 화제를 돌린 그녀는 마치 그날 일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반승제는 욕실에서 실수로 그녀 옷 밑에 지워지지 않은 흔적을 보고서야 그날 자신이 얼마나 이성을 잃었는지 알수 있었다.그날따라 더 심했을지도 몰랐다.그녀가 그 꼴로 집에 돌아갔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이혼하자는 말도 없는 걸 보아서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거나 둘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그는 등을 뒤로 졎혔고, 그 짧은 순간 그는 다시 평정심과 이성을 되찾을수 있었다.“사과해야 할 건 내 쪽이야. 만약 그날 밤 일로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면....”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혜인이 그의 말을 잘랐다.“아니요.”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였다.“저와 제 남편 사이는 그대로예요.”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모르는 사이여야만 했다. 아무것도 변할 건 없었다.반승제는 사실 기분도 그럭저럭 괜찮았고 그녀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더욱이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자 비웃고 싶어졌다. 여전하다고?어떤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바람을 묵인할 수 있단 말인가.자신의 영역 안에서 제삼자의 출현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는 성혜인
반승제의 뒤에 서 있던 심인우는 자신의 대표가 회의 시간을 잊어버린 건 아닌지 알려 주려고 하려다 성혜인의 얼굴을 마주치고는 도로 삼켰다.‘이분이 바로 어제 그 여성분인가? 도대체 우리 대표님과는 무슨 관계일까?’곧이어 엘리베이터가 그들 앞에 멈춰 섰고 성혜인은 손으로 ‘들어가세요’ 하는 자세를 취하였다.반승제는 사양하지 않았고 이어서 몸을 돌려 심인우에게 먼저 회사에 가 있으라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발을 내디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호텔의 조식은 아래층 로비에 있었는데 그들이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반승제와 성혜인은 창가 쪽 자리로 가서 앉았고 곧이어 웨이터가 레몬물을 따라주었다.그녀는 레몬물을 마셨고 레몬의 산미 때문인지 몽롱하던 정신이 많이 맑아진 것만 같았다.식사 후 병원에 가도 늦지 않겠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어쩌면 가는 길에 저혈당으로 먼저 쓰러질 불상사를 피할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물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대표님, 평소에 무슨 책 좋아하세요? 임 사장님한테 듣기로는 예술 관련된 수업도 들으시는것 같던데요.”고객이 원하는 스타일과 평소의 취미 생활은 그녀의 일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또한 이런 간단 대화는 디자인의 모티브를 결정짓는 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반승제는 아마 아메리칸 스타일은 선호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무겁고 색채도 화려하기에.그렇다고 코리안 스타일도 그에게는 딱딱하고 재미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에 관심이 있다고 하였으니 어쩌면 과감한 스타일을 선호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간단한 대화로 그의 선호도를 많이 알고 싶었지만 반승제는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당신이 좋을 때로.”성혜인이 제일 난감한 고객이 바로 이런 유형이다. 마치 학창 시절에 내준 과제와 같이 자신의 상상을 바탕으로 하는 문장 짓기 같은 거 말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선택지가 많다는 뜻이고 선택지가 많을수록 고민은 깊어지기 때문이다.그에 반해 명제는 범위를 좁혀준다. 비록 발휘할 수 있
성혜인은 레몬물을 마시다가 하마터면 사레 걸려 그대로 내뿜을뻔하였다.그녀도 당연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이 본인의 내연녀가 될 수는 없으니까.티슈를 손에 든 그녀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입가를 정리하였다.“알아요, 그래서요?”그녀의 말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하였다. 마치 반승제의 결혼이 자신과는 무관한 일인 듯이 말이다.이런 그녀의 단조로운 태도는 맞은 쪽에 앉은 반승제마저도 그녀를 흥미스럽다는듯이 쳐다보았다.진유나는 순식간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 한 꼴이 되고 말았다.그래서? 여기에서 어떻게 그래서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설마 그녀가 보낸 사인이 잘못 전달되기라도 했단 말인가?그녀의 행동은 너무도 기가 막혔다. 뻔뻔하다고 하였으면 좋을지 아니면 이미 반승제의 사랑을 독차지한다고 생각하여 자만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진유나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여기서 자기 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반승제를 보더니 다시 원래의 온화함을 보였다.“승제 씨, 삼 년 동안 한 번도 안 왔으니 여기 레스토랑 셰프 바뀐 건 몰랐죠? 여기 이번에 바뀐 새로운 셰프 네덜란드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분이래요. 승제 씨 입맛에 맞는 음식도 있어요.”그녀는 자연스럽게 메뉴판을 가져오더니 테이블에서 자신이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였다.반승제의 평온한 표정은 그 어떠한 것도 읽을 수 없었으며 눈빛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거절도 승낙의 대답도 없이 말이다.사실 그녀는 이렇게 냉담한 사람과 어색한 자리를 갖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다.하지만 고객의 니즈를 맞추고 그의 성향을 맞추는 것 또한 을한테는 업무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그녀가 웃어 보였다.“베어틴이 제일 자신 있어 하는 요리는 메뉴판에 없어요. 그리고 오늘의 선약은 저예요. 만약 대표님과 식사 자리를 원하시면 다른 시간으로 약속 잡길 바랄게요.”성혜인의 말은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천하의 진유나도 이런 말을 듣고도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제 남편은 엔지니어예요.”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한 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결혼 생활은 두 사람이 같이 하는거라고 생각해요. 한 사람만 노력하면 안 되죠.”그녀는 반승제 쪽으로 커피를 건네며 온화하게 웃었다.“돈벌이는 많지 않아도 책임감 있는 사람이에요.”성혜인은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남편 될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억지로 연상시켜 말하고 있었다.반승제는 그 어디로 보아도 그녀가 원하는 조건과는 멀어 보였다.“그러는 대표님도 결혼하셨다고 방금 들은 거 같은데요. 와이프는 어떤 사람인가요?”성혜인은 고객과의 뉴대감을 위해서 화제를 찾아서 말한 것뿐이었다.하지만 그는 그녀의 이름도 생긴 것도 몰랐다. 그러는 그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반승제가 눈썹을 치켜들더니 있는 그대로 말하였다.“나도 몰라.”하지만 이혼은 계속 미뤄지고 있는 상태이다. 이혼 합의서까지 성씨 집안에 보냈지만, 그녀는 아무런 미동도 없다.그녀는 뭘 기다리고 있는 걸까?설마 반가의 집안에서 기생충처럼 붙어 있으려는 작정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성혜인은 그의 솔직한 대답에 당황하였지만, 때마침 웨이터가 가져온 음식 덕분에 화제 전환을 할 수 있었다.“호텔의 베어틴 셰프도 예술 애호가게요. 제일 대단한 건 그 예술을 음식에 담아둔거구요.”정갈한 요리가 눈앞에 놓여졌다. 화려한 색상은 자칫 잘못 보면 어지러워 보일 수 있으나 서로 조화를 이루어 신비로웠다.“대표님, 드세요.”성혜인은 눈앞이 점점 더 흐려왔고 한시라도 빨리 이 대화를 끝내고 병원으로 가고 싶어졌다.하지만 그는 그녀의 생각과 달리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그런데 내가 위병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그녀가 잠시 멈칫하였다.“대표님이 일 중독자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러면 식사를 제때 못 챙기는 건 당연한 거고요. 한마디로 대표님 상황으로 맞춰본 거에요.”사실 그녀는 그의 할아버지와 연락할 때 반태승이 그녀에게 한 말이었다. 일 중독이라 자주 위병이 발작한다고
“남편은 야근 때문에 바빠요. 그래서 부담 주고 싶지 않아요.”성혜인은 어지러움증을 완화하기 위해 관자놀이를 천천히 눌렀다.반승제에게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그녀는 에스컬레이터를 잡고 그에게 인사를 전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대표님 차는 저쪽에 있죠?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반승제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젯밤 그런 상황에서 혹시라도 그녀가 욕실안에서 쓸어졌다면 아마 생명이 위험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생각하고 있으니.바보인 건지 아니면 자신의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이러는 건지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그녀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로 이번에는 그에 대한 보상을 하고 싶었다.“병원까지 데려다줄게.”성혜인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다.그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여 자기 쪽으로 당겨왔다.“페니?”성혜인은 이미 극에 달하였다. 사실 레스토랑에서부터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갑자기 햇빛을 보니 현기증이 더 심해졌다.그녀는 반승제가 자신을 부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목이 막힌 것처럼 대답할 수가 없었다.반승제는 그녀의 몸에서 열이 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불덩이가 될 지경까지 참아왔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그의 차가운 손 덕분에 편안함을 느꼈는지 그녀가 참지 못하고 그의 손을 자신의 이마에 대고 문질렀다.반승제의 손은 잠시 멈칫하더니 감전이라도 된 듯 급히 손을 뗐다.앞으로도 두 사람은 일 때문에라도 자주 만나야 하니 이렇게 사람을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반승제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내 허리를 굽혀 그녀를 품에 안았다.거리에 막 들어서자, 차 한대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을 내리니 양한겸었다.양한겸은 아직 성혜인이 이 계약 건을 성사시킨 것에 대해 몰랐다. 멀리서 반승제를 발견하고는 인사를 나누어 좋은 인상이나 남기고 싶었던 것뿐인데 반승제가 성혜인을 안고 있는 걸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반승제도 그를
양한겸은 그녀를 부축하며 그의 말에 다시 한번 놀랐다.성혜인이 결혼을?반승제의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하는 건 같지 않았다.그해 성혜인은 졸업하자마자 양한겸에게 스카우트 되었다.이 삼 년 동안 그녀가 이성과 접촉하는 걸 본 적도 없는데 결혼이라니.양한겸의 놀란 표정을 본 반승제는 눈썹을 치켜들었다.“일단 병원부터 가죠.”양한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성혜인을 부축하며 병원 로비로 들어섰다.반승제는 더 이상 머물지 않았다. 이것도 앞으로의 파트너쉽을 위해서 한 일일 뿐이었다.차에 돌아와 BH 그룹으로 돌아가는 길, 반태승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승제야. 혜인이는 만났어? 전보다 더 이뻐진 것 맞지?”몇 마디도 못하고 기침을 하고 숨쉬기 힘들어하는 걸 보니 병세가 더 악화한 모양이었다.“할아버지는 요양원에서 몸조리나 잘하세요. 이쪽은 걱정하시지 마시고요.”“이 늙은이 걱정 안 하게 빨리 손주나 낳아서 효도 좀 해. 혜인이가 원래 내성적인 데다가 예술만 하는 애라 그래. 남자인 네가 좀 적극적으로 나서야지, 안그래?”반승제의 미간이 구겨졌다. 애초에 그녀가 할아버지에게 무슨 방법을 썼는지 알고 싶어졌다.반박하려고 하자 수화기 너머로 반태승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한마디 더 하면 말이 더 길어질 걸 아는 그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하였다.“노력할게요.”그제야 반태승도 만족하였는지 웃었다.“난 다음 달 돌아갈련다. 외국에 있으려니까 아는 사람들도 없고 그리고 우리 혜인이도 보고 싶기도 하고. 나 없는 동안 네가 잘 돌봐주어야 해. 누구도 괴롭히게 해서는 안 돼.”반승제의 미간이 구겨졌다.당시 할아버지는 외국으로 출국할 때 거기 섬에 있는 요양원에 있겠다고 하였는데 일 년도 안 되는 지금 다시 귀국하려고 하는 것이었다.그는 원래 먼저 이혼을 한 후, 천천히 반태승에게 말할 작정이었다.그런데 다음 달에 돌아와서 갑자기 이혼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 자리로 쓰러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여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반승제의 표정은 더
성혜인은 그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정직하고 이성적인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가정폭력을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었다.양한겸이 이렇게 생각하는 거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밤 반승제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아마 정상적인 사람은 사랑을 받는 일에 이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한다는 걸 알지 못할 것이다.그래서 성혜인은 더 난감해졌다.“아니에요... 저한테 잘해줘요. 이런 결혼 생활 자연스럽고 좋아요. 마음도 따뜻하고요.”양한겸은 그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친구한테라도 연락해, 안 그럼 나 걱정돼서 못 가.”성혜인은 핸드폰을 들어 강민지에게 연락하였다.껍데기뿐인 자신과 달리 강민지는 진정한 로열 패밀리었으며 그녀의 몇 안 되는 친구였다.대학 시절, 두 사람은 학과는 달랐지만 우연히 같은 숙소로 배정받았다.강민지는 요즘 한창 바쁜 시기였고 그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 양한겸은 그녀와 병실 밖에서 몇 마디 나누고서야 안심하며 돌아갔다.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백해진 성혜인의 모습을 보자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반승제가 귀국했다는 걸 왜 안 알려 줬어? 그 냉정한 자식 삼 년 동안 너 혼자서 있게 하고 지금 돌아와서 뭐 어쩌겠다는 거야?”강민지는 그녀는 이름만 부잣집 딸내미었지 성격은 난폭하기 그지없었다.“이혼하고 싶어서겠지.”성혜인의 미간이 좁혀졌다.“그때 우리가 왜 결혼했는지 우리 둘 다 너무 잘 알아. 그리고 그 사람은 따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어. 나 때문에 그렇게 된거 니까 당연히 기분 나쁘고 화날 거야.”“좋아하는 사람? 설마 그놈하고 윤단미, 어릴적 소꿈놀이하던 시절의 감정?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는데 아직도 감정이 남아있다고? 난 반승제에게 그렇게 깊은 연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강민지가 주는 물을 받았다.“감정이 깊던 아니던 나랑은 상관없어. 난 일하고 돈만 받으면 돼.”강민지가 웃으며 옆에 앉았다.“그래, 네가 그 누구보다도 계산이 밝은
앞으로 성혜인에게 또 이런 일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이참에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알겠습니다, 도련님.”전화가 끊기고 설우현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그 후, 10분도 채 되지 않아 상대로부터 답장이 왔다.“도련님, 저희가 류소영 씨 휴대폰을 뒤져 발견한 문자 메시지가 있는데 아마 이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자극을 받아 성혜인 아가씨에게 손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는 경호원에게 막혔고 두 번째에 어쩔 수 없이 정승후에게 찾아간 것 같습니다.”“그 발신 번호... 누구야?”“해커로 추정됩니다. 아주 깊게 숨었더군요.”“아무리 깊게 숨어도 찾아내. 대체 어떤 놈이 배후에 숨어있는지 난 반드시 알아내야겠어.”“알겠습니다. 하루만 시간을 더 주시면 바로 그 해커를 눈앞에 가져다드리겠습니다.”이 일만 확실히 밝혀진다면... 적어도 설씨 가문 현재의 세력이 성혜인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설우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대화를 마치고 설우현은 또 침대에 누워있는 설연주를 바라보았다.오랜 시간의 고열로 인해 설연주의 이마는 이미 땀범벅이 되었고 손은 여전히 설우현의 소매를 잡고 있었다.아무리 힘을 주어 떼어놓으려고 해도 쉽사리 떨어지지 않으니 결국 설우현도 그녀를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서 깬 설연주는 옆에 앉아 눈을 감고 안정을 취하고 있는 설우현을 바라보았다.잘생긴 얼굴에 다정다감하기까지 하니 설우현은 수없이 많은 전 여자친구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설우현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연애할 때만큼은 모든 이에게 마음을 다했던 좋은 남자친구였던 모양이다.열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지만 왠지 이제 설우현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오빠.”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설우현을 부르자 언제 잠자리에 들었냐는 듯 설우현은 바로 눈을 뜨고 죽을 들여오라며 다른 사람에게 당부했다.하지만
20억?설준석과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았더라도 20억은 꽤 큰 금액이었다. 그런데 이제 설준석과의 관계마저 무너졌으니...설강민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어디서 20억을 찾으라는 겁니까?”“그건 조급해할 필요 없습니다. 방법이라면 저한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설 도련님께서 과연 받아드릴 수 있으실지 모르겠네요.”어릴 적부터 도련님 대우를 받으며 자라온 설강민은 유독 자극에 약했다. 하물며 현재 설강민은 이미지 개선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돋보일 수 있는 큰 성과가 필요했다.무려 천억이란 말이다. 설준석이 가진 프로젝트와 맞먹는 금액이었다.앞으로 이 천억이 있다면 설준석 앞에서 제멋대로 굴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설강민은 이제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래요. 만나서 자세히 얘기 나눠보죠.”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설강민은 그제야 그 방법이 대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게다가 상대는 설강민이 설씨 가문의 일원이라는 신분만으로 20억을 빌려주겠다고 약속해주었다.이렇게 직관적으로 설씨 가문의 지위를 알게 된 건 설강민도 이번이 처음이었다.‘설씨 가문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어쩐지 설연주가 그렇게까지 설씨 가문에 들어오려고 고심하더라니.’그렇게 설강민은 망설임 없이 서류 위에 손도장을 찍고 그와 함께 일을 해보고 싶다던 사람에게 물었다.“원금은 언제 돌려받을 수 있습니까?”“늦어도 일주일입니다. 일주일만 지나면 몇백억을 돌려받을 수 있죠. 하지만 중간에 도련님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도련님께서 직접 세관에 전화해 설씨 가문의 신분을 봐서라도 그 물건들을 통과시켜 달라고 부탁하셔야 합니다.”그냥 전화일 뿐인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정말 이거면 돼? 이렇게 쉽게 돈을 벌 수 있다고?’이렇게 된 이상 뭐하러 아버지 앞에서 하인 노릇이나 하고 있단 말인가. 이 돈이 있다면 앞으로 충분히 혼자 잘 살아갈 수 있다.설강민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당장이라도 일주일 뒤로 타임리프라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주일만 지나면 그의 실력을
설연주는 차에 타자마자 설우현이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다시 조사해 봐. 이 사람 설씨 가문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갑자기 왜 혜인이를 건드렸지?”설연주는 바짝 긴장했다. 설우현의 능력이라면 몇 시간 내에 진실을 밝혀낼 게 분명했다.오늘 밤에는 더 이상 설우현의 집에 갈 수 없을 것 같았다.“오빠, 저 그냥 제 집으로 데려다주세요.”설우현은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지만 별말 없이 방향을 돌렸다.설연주는 차에서 내리면서 뭔가 말하려고 했으나 설우현은 그런 여유를 주지 않고 바로 차를 몰고 떠났다.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쓴웃음을 지었다.그러나 이런 기분도 잠깐 곧 그녀의 얼굴에 흥분이 떠올랐다. 드디어 정승후가 끝장났다.그녀에게 악몽을 안겨주었던 남자가 마침내 그녀 손에 의해 추락한 것이다.다음은 설강민 차례였다.설연주는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들어갔고 곧 전화가 걸려 왔다.“김현서가 두팔을 찾아갔어. 너도 알다시피 두팔이 여자를 다루는 방식이 별로 좋지 않잖아. 아마 김현서는 편히 지내지는 못할 거야.”설연주는 다소 놀랐다. 김현서가 정승후를 떠나 바로 두팔을 찾아갈 정도로 수완이 좋다니.그녀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예전에 두팔 곁에 있었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섬뜩함을 느꼈다.김현서가 두팔의 손에 들어갔으니 살아나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김현서의 운명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두팔이 그녀를 편히 두지는 않을 테니.설연주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전에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이 떠오르자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오늘 밤 설준석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설연주는 도우미를 통해 설강민이 돌아왔는지 확인해 보았다.설강민이 돌아온다면 오늘 밤 제대로 잠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너무 피곤해서 빨리 자고 싶었다.“아가씨, 도련님은 아직 집에 돌아온다고 연락이 없어요. 게다가 도련님께서 집을 나가신다고 하셨잖아요.”다행히 설강민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설강민이 집을 떠난 것은 스스로 내
성혜인의 얼굴은 냉랭했다.“보아하니 이제 기억난 모양이군요. 저기 있는 사람들이 당신 부하들이죠? 어제 쇼핑몰에서 내 아이를 납치하려던 게 바로 그들이었어요.”정승후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는 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성혜인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총구가 그의 이마를 겨누자 그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비록 그가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더라도 지금처럼 속수무책인 상황은 처음이었다. 눈앞의 여자는 그의 아지트를 하룻밤 만에 초토화시킬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가졌고 그를 죽이는 일은 모기 잡듯 쉬운 일이었다.정승후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바로 그때 누군가 성혜인의 손에서 총을 빼앗았다.반승제가 그녀의 손을 제지하며 말했다.“아이가 보고 있어. 좋은 본보기를 보여야지. 설씨 가문에서 처리할 거야.”‘설씨 가문?’정승후는 그 말에 마치 날벼락을 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설마 플로리아의 설씨 가문일까?’생각해 보니 설씨 가문 외에 누가 이처럼 호화로운 집에 살며 단 하루 만에 그를 무너뜨릴 수 있단 말인가?입안 가득 피비린내가 맴돌았고 그는 깊은 후회를 느꼈다.곧 그는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나갔다. 그러다 정원 쪽을 지나가던 중 쿠키를 먹고 있는 설연주를 보았다.설연주는 그를 보고 약간 눈썹을 치켜세우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정승후는 속이 서늘해지며 이 모든 것이 설연주의 계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설연주는 설씨 가문에서 별다른 영향력이 없는 그저 주변을 맴도는 인물일 뿐이었다.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씨 가문 사람이 입을 열었다.“정승후, 다음에 누군가를 건드리기 전에 상대의 정체부터 조사하는 게 좋겠어. 류소영이 멍청하다고 너까지 멍청해질 필요는 없잖아.”정승후는 얼굴이 붉어지며 그 말을 듣고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는 기세를 보였다.설연주는 그에게 시선을 거둔 채 조용히 쿠키를 먹으며 그를 무시했다.“이 X년아! 설연주, 빌어먹을 년!”멀리서도 그의 욕설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곳은 방음이 잘 되어
그러나 설다연은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듯했다.성혜인은 한숨을 내쉬며 두 오빠의 일에는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반승제가 도착하자 그녀는 반진율을 안고 차에 올랐다.차창 너머로 설다연이 여전히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다연아, 같이 들어올래?”설다연은 눈을 깜빡이며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오빠가 데리러 올 거야.”성혜인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승제에게 차를 출발하라고 했다.그러나 차가 조금 달리자마자 성혜인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이번에 설다연이 아니었으면 반진율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플로리아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 일은 누가 벌인 짓이든 반드시 설씨 가문에서 밝혀내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승제 씨, 오늘 일으킨 사람의 배후를 조사해 주세요.”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사람들을 시켜 조사에 들어갔다.한편, 한쪽 구석에서 류소영은 자신의 사람들이 성혜인을 제압하고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초조해진 그녀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하나의 여자를 상대로 실패할 리가 없었다.류소영은 급히 쇼핑몰로 향했으나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경찰들이 그녀의 부하들을 들것에 실어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 모두 심각한 상처를 입은 듯 끙끙 앓고 있었다.류소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성혜인만 상대하면 될 일 아닌가?’당황한 그녀는 김현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김현서는 그때 정승후와 함께 침대에 있었고 둘은 설강민에 대해 험담을 하며 묘한 분위기 속에 있었다. 김현서는 류소영의 전화를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끊어버렸다.류소영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다.할 수 없이 그녀는 일단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한편, 성혜인은 반승제가 찾아낸 자료를 통해 그들의 대장이 정승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처음에는
설기웅은 설다연과의 대화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지금 당장 반진율을 데려와. 절대 다치게 하지 마.”“알겠어, 오빠.”전화를 받은 이는 열아홉 살의 소녀였고 전화를 끊자마자 몇몇 남자들이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설다연은 망설임 없이 바로 움직였다.성혜인이 달려왔을 때 본 것은 설다연이 반진율을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아이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녀는 반진율을 마치 강아지 다루듯 손에 들고 있었다.성혜인은 바로 다가가지 않고 그 소녀를 유심히 바라봤다. 어디선가 본 얼굴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설다연?”설다연은 반진율을 성혜인에게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아이를 데려오라고 했어.”성혜인의 시선이 그녀에게 멈췄다. 이전에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설다연은 연구소에서 길러졌기 때문에 세상 물정에 무지했고 말투도 다소 서툴렀다. 설기웅이 몇 년간 데리고 있었기에 이제 말은 능숙해졌지만 여전히 세상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그녀는 사랑스러울 정도로 귀엽게 생긴 소녀였고 눈에는 순수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성혜인은 그녀가 사람을 죽일 때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큰오빠로부터 설다연의 전투력이 보통 남자 쉰 명을 넘는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다.처음 설다연이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누군가가 그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저 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연구소에서는 옳고 그름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기에 그녀는 오직 자신이 기분 좋을 때만을 기준으로 삼았다.이런 사람을 옆에 두는 건 마치 시한폭탄을 곁에 두는 것과 같았다. 설기웅이 참을성 있게 그녀를 정상인으로 길러낸 덕분에 지금은 다소 평범해 보일 뿐이었다.성혜인은 한숨을 내쉬며 반진율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설다연은 눈을 깜빡이며 성혜인을 바라보더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들 중 한 명의 갈비뼈를 발로 으스러뜨렸다.성혜인은 그 소리에 온몸이 저릿했지만 이 남자들은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다.설다연은 다시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이제 됐어
설연주는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다 연락이 왔다. 정승후가 류소영에게 몇 사람을 붙여줬다는 소식이었다.설연주의 눈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원래는 류소영을 처리하려고 했는데 정승후까지 이 물에 뛰어들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아마 둘이 같이 자멸하게 될 터였다.“알았어. 계속 지켜봐.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고.”전화를 끊고 돌아서자마자 설우현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그녀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되짚어보며 성혜인의 이름을 언급했는지 확인했다. 언급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오빠, 걸음 소리도 없이 언제 온 거예요?”설우현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무슨 일이에요, 오빠?”“오늘하고 내일 집에 없을 거야. 형이랑 회사 시찰하러 갈 거라서.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도우미에게 말해. 약이나 다른 것들도 다 챙겨줄 거야.”순간 설연주의 심장이 쿡 쑤셨다. 마치 독이 조금씩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알겠어요. 고마워요.”그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고 설우현은 그녀의 환한 미소에 순간 눈이 부셨다.그는 몇 초간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지금처럼 웃으니까 훨씬 보기 좋네. 앞으로도 많이 웃어.”설연주는 말없이 속으로 생각했다.‘진실을 알게 될 때 화내지나 않으면 다행일걸요.’그때쯤이면 자신이 죽기만을 바랄 텐데 무슨 웃는 얼굴을 보고 싶겠나 싶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에 피어난 꽃을 바라보았다. 매일 아무 걱정 없이 피어나는 꽃들이 문득 부러워졌다.설연주는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붙였다.하지만 요즘 악몽에 시달리는 그녀에게는 설우현이 집에 있을 때만 유독 그 악몽이 사라지고는 했다.이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설우현은 그녀가 의지할 사람이 아니었다.아마도 가장 절망적인 순간 그가 천사처럼 나타난 그 장면이 마음속에 남아 그에게 약간의
류소영은 운도 참 좋았다. 그날 오후 성혜인이 혼자서 쇼핑을 나왔고 마침 그녀가 보낸 몇 명이 그녀를 발견했다.하지만 성혜인의 뒤에는 조용히 두 명의 경호원이 따라붙어 있었고 그들이 다가가기도 전에 경호원들에게 가뿐히 제압당하고 말았다.류소영은 멀리서 기다리며 자신이 보낸 사람들이 성혜인을 잡아 올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성혜인이 애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 상상만으로도 짜릿할 정도로 흥분됐다.하지만 곧 류소영은 자신이 보낸 사람들이 처참한 몰골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분노에 휩싸였다.“뭐야, 여자 하나도 제압 못 해? 정말 쓸모없는 놈들이야.”그들은 억울한 표정이었다. 쇼핑몰 보안 요원들이 이렇게 강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양아치들은 그들이 성혜인을 보호하는 경호원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성혜인은 이 모든 상황을 전혀 모르고 쇼핑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그러나 류소영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성혜인을 다시 발견하기만 하면 이번에는 확실하게 잡아 올 계획을 세웠다.“이번엔 꼭 성공해야 해. 여자 하나도 못 제압하면 너희들은 내 옆에 있을 자격이 없어.”이들은 원래 정승후를 따라다니며 생활을 유지하는 양아치들이었고 여자에게 명령을 받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류소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곧장 김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김현서는 요즘 설강민과 연락을 끊었지만 그가 쉽게 자신을 잊지 못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마음속 갈망이 점점 커지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지금 자신이 정승후와 함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남자라는 자존심으로라도 설강민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류소영의 전화를 확인한 김현서는 다소 귀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언니, 요즘 어떤 여자가 언니를 험담하고 다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여자가 설연주와 한패더라고요. 심지어 설연주의 따까리라니 어이가 없죠.”김현서는 웃음을 터뜨렸다. 설연주 같은 하찮은 인간에게도 따까
말을 마치자마자 설우현은 설연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설연주의 얼굴에는 마지막 남은 핏기마저 사라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얼굴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오빠... 오빠였구나. 깜짝 놀랐잖아요.”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오늘 밤의 일이 그녀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 분명했다.설연주가 아무런 소란을 피우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니 설강민은 그녀의 친오빠였다. 친오빠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 있겠는가.조금 전 겉으로 강한 척했던 건 전부 꾸며낸 모습이었다.설우현의 마음 한구석이 약간 부드러워지며 그는 도우미에게 수면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약 먹고 자.”“역시 오빠는 좋은 사람이에요.”그 말에 설우현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는 그 말이 별로 칭찬처럼 들리진 않았다.화가 난 그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방을 나갔다.설연주는 수면제를 삼켰다.원래는 이런 약을 함부로 먹지 않았다. 너무 깊이 잠들면 혹시 누가 방에 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침대에 몸을 기대었지만 곧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이건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설강민을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으면 이 공포심은 평생 그녀의 삶을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설연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화장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전화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방은 그녀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설연주는 오늘 밤 있었던 일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대신 되물었다.“김현서는 아직 정승후 옆에 있어?”“그래, 게다가 요즘 정승후는 김현서를 아주 애지중지하고 있어.”‘애지중지?’설연주는 피식 웃었다. 아마 김현서가 또 어떤 달콤한 말을 늘어놓았겠지.가끔 의아했다. 왜 이렇게 뻔하고 저급한 거짓말에 남자들이 넘어가는 걸까?하지만 곧 깨달았다. 아마 남자들도 김현서가 사람에 따라 다른 말을 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