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야근 때문에 바빠요. 그래서 부담 주고 싶지 않아요.”성혜인은 어지러움증을 완화하기 위해 관자놀이를 천천히 눌렀다.반승제에게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그녀는 에스컬레이터를 잡고 그에게 인사를 전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대표님 차는 저쪽에 있죠?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반승제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젯밤 그런 상황에서 혹시라도 그녀가 욕실안에서 쓸어졌다면 아마 생명이 위험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생각하고 있으니.바보인 건지 아니면 자신의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이러는 건지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그녀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로 이번에는 그에 대한 보상을 하고 싶었다.“병원까지 데려다줄게.”성혜인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다.그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여 자기 쪽으로 당겨왔다.“페니?”성혜인은 이미 극에 달하였다. 사실 레스토랑에서부터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갑자기 햇빛을 보니 현기증이 더 심해졌다.그녀는 반승제가 자신을 부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목이 막힌 것처럼 대답할 수가 없었다.반승제는 그녀의 몸에서 열이 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불덩이가 될 지경까지 참아왔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그의 차가운 손 덕분에 편안함을 느꼈는지 그녀가 참지 못하고 그의 손을 자신의 이마에 대고 문질렀다.반승제의 손은 잠시 멈칫하더니 감전이라도 된 듯 급히 손을 뗐다.앞으로도 두 사람은 일 때문에라도 자주 만나야 하니 이렇게 사람을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반승제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내 허리를 굽혀 그녀를 품에 안았다.거리에 막 들어서자, 차 한대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을 내리니 양한겸었다.양한겸은 아직 성혜인이 이 계약 건을 성사시킨 것에 대해 몰랐다. 멀리서 반승제를 발견하고는 인사를 나누어 좋은 인상이나 남기고 싶었던 것뿐인데 반승제가 성혜인을 안고 있는 걸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반승제도 그를
양한겸은 그녀를 부축하며 그의 말에 다시 한번 놀랐다.성혜인이 결혼을?반승제의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하는 건 같지 않았다.그해 성혜인은 졸업하자마자 양한겸에게 스카우트 되었다.이 삼 년 동안 그녀가 이성과 접촉하는 걸 본 적도 없는데 결혼이라니.양한겸의 놀란 표정을 본 반승제는 눈썹을 치켜들었다.“일단 병원부터 가죠.”양한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성혜인을 부축하며 병원 로비로 들어섰다.반승제는 더 이상 머물지 않았다. 이것도 앞으로의 파트너쉽을 위해서 한 일일 뿐이었다.차에 돌아와 BH 그룹으로 돌아가는 길, 반태승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승제야. 혜인이는 만났어? 전보다 더 이뻐진 것 맞지?”몇 마디도 못하고 기침을 하고 숨쉬기 힘들어하는 걸 보니 병세가 더 악화한 모양이었다.“할아버지는 요양원에서 몸조리나 잘하세요. 이쪽은 걱정하시지 마시고요.”“이 늙은이 걱정 안 하게 빨리 손주나 낳아서 효도 좀 해. 혜인이가 원래 내성적인 데다가 예술만 하는 애라 그래. 남자인 네가 좀 적극적으로 나서야지, 안그래?”반승제의 미간이 구겨졌다. 애초에 그녀가 할아버지에게 무슨 방법을 썼는지 알고 싶어졌다.반박하려고 하자 수화기 너머로 반태승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한마디 더 하면 말이 더 길어질 걸 아는 그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하였다.“노력할게요.”그제야 반태승도 만족하였는지 웃었다.“난 다음 달 돌아갈련다. 외국에 있으려니까 아는 사람들도 없고 그리고 우리 혜인이도 보고 싶기도 하고. 나 없는 동안 네가 잘 돌봐주어야 해. 누구도 괴롭히게 해서는 안 돼.”반승제의 미간이 구겨졌다.당시 할아버지는 외국으로 출국할 때 거기 섬에 있는 요양원에 있겠다고 하였는데 일 년도 안 되는 지금 다시 귀국하려고 하는 것이었다.그는 원래 먼저 이혼을 한 후, 천천히 반태승에게 말할 작정이었다.그런데 다음 달에 돌아와서 갑자기 이혼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 자리로 쓰러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여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반승제의 표정은 더
성혜인은 그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정직하고 이성적인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가정폭력을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었다.양한겸이 이렇게 생각하는 거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밤 반승제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아마 정상적인 사람은 사랑을 받는 일에 이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한다는 걸 알지 못할 것이다.그래서 성혜인은 더 난감해졌다.“아니에요... 저한테 잘해줘요. 이런 결혼 생활 자연스럽고 좋아요. 마음도 따뜻하고요.”양한겸은 그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친구한테라도 연락해, 안 그럼 나 걱정돼서 못 가.”성혜인은 핸드폰을 들어 강민지에게 연락하였다.껍데기뿐인 자신과 달리 강민지는 진정한 로열 패밀리었으며 그녀의 몇 안 되는 친구였다.대학 시절, 두 사람은 학과는 달랐지만 우연히 같은 숙소로 배정받았다.강민지는 요즘 한창 바쁜 시기였고 그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 양한겸은 그녀와 병실 밖에서 몇 마디 나누고서야 안심하며 돌아갔다.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백해진 성혜인의 모습을 보자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반승제가 귀국했다는 걸 왜 안 알려 줬어? 그 냉정한 자식 삼 년 동안 너 혼자서 있게 하고 지금 돌아와서 뭐 어쩌겠다는 거야?”강민지는 그녀는 이름만 부잣집 딸내미었지 성격은 난폭하기 그지없었다.“이혼하고 싶어서겠지.”성혜인의 미간이 좁혀졌다.“그때 우리가 왜 결혼했는지 우리 둘 다 너무 잘 알아. 그리고 그 사람은 따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어. 나 때문에 그렇게 된거 니까 당연히 기분 나쁘고 화날 거야.”“좋아하는 사람? 설마 그놈하고 윤단미, 어릴적 소꿈놀이하던 시절의 감정?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는데 아직도 감정이 남아있다고? 난 반승제에게 그렇게 깊은 연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강민지가 주는 물을 받았다.“감정이 깊던 아니던 나랑은 상관없어. 난 일하고 돈만 받으면 돼.”강민지가 웃으며 옆에 앉았다.“그래, 네가 그 누구보다도 계산이 밝은
그대로 정곡을 찔렀다.강민지는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말하는 성격이었다.성혜인은 눈초리까지 떨렸다. 사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하지만 성휘도 이제는 늙었다. 원래부터 사업적 수단이 없는 그였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욱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강민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그녀가 괴로워하는 걸 눈치채고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네가 방금 했던 말 무슨 말이야? 돈을 받고 일하면 된다니? 설마 반승제 그 건 하기로 한 거야?’“응, 네이처 빌리지 내가 인테리어 하기로 했어.”그녀의 말에 강민지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엄지손가락을 지어 내보였다.“혜인아, 너 정말 대단해. 지금 남편이 맘에 품고 있는 사람의 신혼 방을 꾸며주겠다고? 아니지 그 여자뿐만 아니지 재혼할 여자의 신혼집일 수도 있겠네.”혜인이 신나 하며 있는 그대로 말하였다.“그럼 이것도 알려줄게. 반승제 그 사람 내가 자기 와이프인지도 모른다?”강민지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연속 입꼬리를 말아 올리던 그녀는 결국엔 감탄한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였다.“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래서 예명도 일부러 쓴 거구나. 그리고 후에 집을 인테리어 한 사람이 누군지 알게 하려고. 이거 이거 완전 고수네.”성혜인은 웃었다. 방금까지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은 트이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그날 밤 있은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반승제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숨기고 갈 각자의 비밀로 남겨두기로 한 듯 싶었다.늦은 밤 의사는 링거 주사를 가져갔고 강민지는 퇴원 수속하러 나갔다.두 사람이 차에 앉고 강민지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그러니까 앞으로 얼마나 더 있어야 이혼할 수 있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반승제 그 사람 잡을수 잇으면 잡아. 얼굴도 반반하니 좋잖아.”사실 그는 출중한 사업적 수단은 그의 배경, 외모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었다.“됐어, 그 사람하고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안 해.”강민지는 엑셀러레이터를 밟더니 한심
이름이 적혀 있지 않고 친구 추가도 되지 않은 계정에서 문자 온 것을 보고 성혜인은바로 반승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반씨 저택에서 만나자고? 혹시 이혼 얘기를 하려는 건가?’성혜인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혼하든 말든 그녀에게는 크게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수많은 예술가의 작품을 보고 나니 성혜인의 머릿속에는 기본적인 설계도가 만들어졌다.그녀는 내일 펜션을 직접 보고 다시 결정하기로 했다.이튿날, 성혜인은 직접 운전해서 BH그룹으로 왔다.펜션에 직접 가보기 위해서는 집주인인 반승제와 말을 해야 했고, 또 이참에 질문할 것도 몇 가지 있었다.두 번째 방문에 안내 데스크 직원은 그녀의 얼굴을 기억했는지 미간부터 찌푸렸다.“죄송합니다만 일 얘기는 여전히 상무 부문을 찾아가야 합니다. 반 대표님 개인 면담은 예약이 필요합니다.”안내 데스크 직원은 이미 성혜인을 갖은 수를 써 가며 반승제를 만나 성공하려는 여자로결단 내린 듯했다.“저는 반 대표님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예요. 혹시 지금 시간이 있는지 물어봐 줄 수 있을까요?한 10분 정도만 있으면 돼요.”안내 데스크 직원은 성혜인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아 바로 대표 비서실로 전화를 걸었다.약 1분 후, 직원은 전화를 끊고 성혜인에게 말했다.“이쪽으로 직진하다가 오른쪽으로 돌면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위층으로 가시면 됩니다.”성혜인이 아무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 한 직원은 태도가 돌연 좋아졌다. 그녀도 반승제를 만나려는 막무가내에 너무 당해서 이렇게 된 것이었다.성혜인이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와서 들어가려고 했을 때,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백연서가 안에서 나왔다.‘어머니가 어떻게 BH그룹에 있지?’성혜인이 몸을 피하기 전에 백연서가 그녀를 불러세웠다.“너 혜인이니?”백연서의 놀라움은 금세 분노로 변했다.“네가 왜 여기 있어? 설마 승제를 만나러 왔어? 너 아직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니?”백연서는 애써 자신의 언성을 낮추면서 말했다.
“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얌전히 당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반승제는 성혜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반승제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백연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투자 유치를 시작하는 성씨 집안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쉽게 BH그룹이 가져다줄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에 자꾸 잔소리하게 되었다.통화를 끝낸 반승제는 덤덤하게 휴대전화를 내려놨다.“10분이면 된다고 했나? 오늘은 뭐가 궁금해서 찾아왔지?”성혜인은 방금 전의 통화 내용에 신경 쓰지 않고 할 말만 했다.“오늘은 반 대표님의 미래 계획을 물어보려고 찾아왔어요. 대표님의 애인은 어떤 취미가 있어요? 독서 혹은 요가? 그리고 자녀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실내 디자인은 집주인의 습관에 따라 만들어야 했고 성혜인이 물은 것은 펜션의 구조를 좌우지할 것이다.반승제는 성혜인의 질문에 약간 멈칫했다. 애인이라는 질문에 문뜩 떠오른 사람은 애인이 아니었고, 아이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반승제는 생각하다 말고 성혜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성혜인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리고 대답했다.“저는 피임약을 먹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커피를 들고 들어오다가 이 말을 들은 심인우는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는 겨우 중심을 잡고 성혜인을 바라봤다.성혜인은 그가 여자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줬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반승제를 보자마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반승제와 하룻밤을 보내고도 이토록 덤덤할 수 있는 여자는아마 그녀 한 명뿐일 것이다.성혜인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아닌 상대를 아예 매력적인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자고로 남자는 이 부분에 타고난 승부욕이 있어서, 반승제는 자신의 기술에 문제가 있는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반승제는 소파에 기대더니 이내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성혜인은 마치 싸늘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
빠른 사과에 반승제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성혜인과 대화를 할 때마다 속이 꽉 막히는 것만 같았다.“그럼 저는 오늘 펜션에 방문했다가 설계도를 그려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정확한 공사 일정은 설계도가 통과된 다음 다시 잡죠.”반승제는 짧게 대답하고 더 이상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사무실 밖으로 나온 성혜인은 한 여자가 커피를 들고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옆으로 비켜섰다.화려한 옷에 정교한 메이크업을 한 여자는 성혜인의 곁을 지나칠 때 일부러 휘청거리면서 그녀를 향해 커피를 전부 쏟아부었다.옅은 색의 정장을 입은 성혜인은 당연히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몰골이 되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저급한 수를 부리는 여자를 바라봤다.여자는 눈썹을 찡긋거리더니 놀란 척하며 입을 가렸다.“죄송해요. 제가 젖은 손수건으로 닦아줄게요.”성혜인은 그녀의 명찰을 바라봤다.‘윤선미... 혹시 윤씨 집안 사람인가?’윤선미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상대가 당연히 예의상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성혜인은 가만히 서서 미소 지으며 말했다.“좋아요. 그럼 깨끗하게 부탁드릴게요.”윤선미의 표정은 굳어지더니 이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성혜인이 반승제의 사무실로 들어간 순간, 그녀는 일부러 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절대닦아지지 않을 진한 색의 커피를 만들었다.일이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을 보고 윤선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아무래도 손수건으로는 닦이지 않을 것 같아요.”“그럼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요. 정 안 되면 제가 입고 나갈 수 있는 새 옷을 준비하던가요. 제가 워낙 급한 일이 있어서 도무지 집으로 돌아가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없어서요.”윤선미의 안색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녀는 눈앞의 여자가 참 눈치 없다고 생각했다.비서실의 다른 직원들은 윤선미가 골탕 먹는 것을 보고 비웃기도 하고 수군거리기도 했다.윤선미는 BH그룹에 새로 온 인턴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집안을 믿고 아주 기세등등했다.자신의 사촌 언니 윤단미가 BH그룹 대표가 아직도
발목이 퉁퉁 부은 윤선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고발하러 갔다.“형부, 이 여자가...!”성혜인은 CCTV를 가리키며 윤성미의 말을 가로챘다.“도대체 누가 잘못 했는지는 CCTV에 똑똑히 담겨 있어요. 그리고 제가 대표님을 찾아온게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러는 거라면 대표님을 너무 얕본 게 아닌가요?”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표님이 얼마나 정직한 분인데 설마 여자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겠어요?”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다고, 성혜인의 말은 반승제의 반박을 미연에 막아버렸다.그녀는 또 교활한 말투로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어찌 됐듯 인턴 직원인 윤선미 씨가 개입할 문제는 아닌 것 같네요. 이게 도대체사촌 언니를 위해서인지, 윤선미 씨 자신을 위해서인지 알 수가 있어야죠.”윤선미는 상대가 반승제 앞에서도 이토록 당당하게 말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제 분을 못 이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형부.”윤선미는 불쌍한 표정으로 반승제을 바라봤다. 그가 자신을 위해 나서주기를 기대하면서말이다.하지만 반승제의 시선은 시종일관 성혜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당당하게 반승제를 바라보는 성혜인은 교태 부릴 줄밖에 모르는 윤선미와 확연한 차이를만들었다.“형부, 저 진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윤선미는 슬슬 자신이 쫓겨나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 그녀는 BH그룹에 남아있어야만 사촌 언니 윤단미를 위해 정보를 줄 수 있었고 반승제의 잘난 얼굴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반승제는 윤선미가 내민 손을 단호하게 피했다. 그는 현재 상황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그건 CCTV를 보면 밝혀지겠지.”윤선미는 안색이 창백해서 주먹을 꼭 쥐었다.아무래도 반승제는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BH그룹으로 올 때 언니가 분명 대표님한테 나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는데? 근데 왜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거야?’반승제의 말을 듣고 성혜인은 약간 다르게 생각했다. 아무리 반승제라고 해도 좋아하는 사람의 눈에 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
온시환은 천천히 손을 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래, 알았어.”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온시환의 눈가는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러나 공지민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온시환이 또 심심풀이로 자신을 괴롭히려 한다고 생각했다.차인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온시환 같은 남자가 진심일 리 없었다. 설령 진심이라 해도, 공지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는 식당 밖에 홀로 서 있었다.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공지민이 택시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잠시 후, 그는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야, 오늘 한 잔 하자.”반승제는 흔쾌히 응했다.이상하게 오늘 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는 서주혁까지 불렀다.두 사람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여러 병의 술을 비운 상태였다.“시환아, 너 대체 왜 이래?”온시환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했다.“뭐 하는 거야? 얼른 앉아.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못 가!”혼자서 술을 퍼마신 온시환을 보며 반승제는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너 혹시 무슨 고민 있냐?”“고민은 무슨...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하하.”서주혁은 말없이 나무토막처럼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그는 분위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반승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들을 모두 치우고 온시환 앞에 과일주스를 내밀었다.“솔직하게 얘기해. 무슨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온시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반승제는 그가 웃는 줄 알았다. 웃을 때도 어깨가 들썩이긴 마찬가지니까.“뭐야, 웃긴 얘기라도 있어?”그는 온시환의 몸을 돌려보았고 그제야 그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야, 주혁아! 이거 봐. 시환이가 울고 있어!”온시환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꺼져!”반승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동차가 레스토랑 앞에 멈춰서자 공지민이 먼저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온시환도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자리를 예약 해둔 터라 직원이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공지민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푸른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왜, 내가 이제 그 점이 없으니까 나를 쳐다볼 생각도 없어진 거야?”공지민은 그가 귀찮을 뿐이었다. 이미 진실을 알았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지, 굳이 이런 말로 둘 다 어색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그러나 온시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네가 다니던 고등학교 가서 구은우 사진 봤어. 솔직히, 별로 잘생긴 것도 아니던데.”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온시환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오히려 더 그녀를 찌르는 말을 꺼냈다.“그렇게 좋으면 왜 안 찾아가? 아니면 이미 결혼이라도 한 거야? 네가 이러거 있는 거 보면, 그 자식도 너를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지? 참 안 됐네.”그때 마침 직원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말없이 잔을 들어 올린 공지민은 그대로 커피를 온시환에게 끼얹었다.온시환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감정적인 반응이 반갑기까지 했다.마치 나무토막처럼 감정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공지민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정신이 좀 들었어?”온시환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있는 냅킨을 집어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어쩌지? 평생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공지민, 난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왜 날 대체품으로 썼는지. 진짜 그 점 하나 때문이야?”그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을 터였다.그래서 그는 더더욱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심지어 그
온시환은 공지민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왜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그에게 와서 상처를 남겼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더 한심한 건 자신이었다. 대체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몰래 보러 온 자신이 더 우스웠다.온시환의 차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주차돼 있었다. 연예계에서 그의 영향력 덕분에 차를 촬영장 근처에 세워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그는 창문 너머로 공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문 장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아픈 손목을 문지르는 모습, 옆에 있던 낯선 여성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별다른 장면도 아닌데 온시환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공지민은 오후 촬영을 마치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보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공지민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쪽으로는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으로는 문보영이 여전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둘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문보영은 공지민이 그날 밤의 일을 봤다는 걸 몰랐다. 여전히 밝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했다.“지민아, 요즘 다시 촬영 시작했어? 혹시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내가 대표님께 한 번 말씀드릴 수 있어. 사실 대표님도 꽤 후회되시는 것 같더라. 요즘 네 인지도도 높잖아.”“아니, 괜찮아.”“그런데 너랑 시환 씨... 지민아, 너희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파티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잘 될 줄 알았는데, 요즘은 연락도 안 한다고 하던데.”예전 같았으면 공지민은 문보영의 말을 진심 어린 걱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문보영이 정말 궁금한 건 온시환이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여부라는 걸.“헤어졌어. 이번에는 정말 끝이야.”문보영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넌 괜찮아? 너 시환 씨 정말 좋아했잖아. 혹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너를 상처 준 거야?
당연히 취했다. 취하지 않았으면 온시환의 성격상 추지성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추지성은 온시환에게 다시 술병을 열어주며 말했다.“아직 덜 취한 것 같으니 더 마셔.”온시환은 희미하게 뜬 눈으로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지성아, 나 지민이 고등학교에 가봤어. 그리고 지민이 첫사랑을 알게 됐지. 꽤 괜찮게 생겼더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뭔지 알아?”“뭔데?”“내 코끝 여기.”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여전히 흐릿한 눈빛이었다.“여기에 구은우랑 똑같은 점이 있었잖아. 공지민은 아마 그 점 때문에 나에게 잘해줬던 거야. 너도 우습지 않냐?”그는 입으로 우습다고 말했지만 눈빛에는 슬픔이 넘칠 듯 담겨 있었다.추지성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누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가지고 놀고 싶을 뿐이었고 막상 손에 넣으면 금세 흥미를 잃었다.“못 가지는 게 가장 좋은 거지. 손에 넣으면 금방 싫증 나는 법이거든.”“지성아, 나 여기가... 정말 아프다.”추지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야, 네가 진짜 내 친구 아니었으면 벌써 널 집어 수영장에 던져 넣어버렸을 거다. 여자를 두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술 더 마셔야겠어.”“안 마셔. 마시면 더 괴로워질 뿐이야.”온시환은 그 말을 끝으로 옆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추지성은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려다 그의 축축한 속눈썹을 보고 멈칫했다.‘설마 또 울었어? 요즘 완전 여자 같아. 조금만 힘들어도 시도 때도 없이 우네.’온시환은 원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수년 전 큰 수술을 받은 후, 의사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로 그는 늘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그가 쓰는 드라마 대본들도 대부분 막장극이었고 그는 막장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막장이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돌아와 부메랑처럼 자신을 찌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밤중에 온시환은 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