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이 퉁퉁 부은 윤선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고발하러 갔다.“형부, 이 여자가...!”성혜인은 CCTV를 가리키며 윤성미의 말을 가로챘다.“도대체 누가 잘못 했는지는 CCTV에 똑똑히 담겨 있어요. 그리고 제가 대표님을 찾아온게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러는 거라면 대표님을 너무 얕본 게 아닌가요?”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표님이 얼마나 정직한 분인데 설마 여자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겠어요?”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다고, 성혜인의 말은 반승제의 반박을 미연에 막아버렸다.그녀는 또 교활한 말투로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어찌 됐듯 인턴 직원인 윤선미 씨가 개입할 문제는 아닌 것 같네요. 이게 도대체사촌 언니를 위해서인지, 윤선미 씨 자신을 위해서인지 알 수가 있어야죠.”윤선미는 상대가 반승제 앞에서도 이토록 당당하게 말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제 분을 못 이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형부.”윤선미는 불쌍한 표정으로 반승제을 바라봤다. 그가 자신을 위해 나서주기를 기대하면서말이다.하지만 반승제의 시선은 시종일관 성혜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당당하게 반승제를 바라보는 성혜인은 교태 부릴 줄밖에 모르는 윤선미와 확연한 차이를만들었다.“형부, 저 진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윤선미는 슬슬 자신이 쫓겨나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 그녀는 BH그룹에 남아있어야만 사촌 언니 윤단미를 위해 정보를 줄 수 있었고 반승제의 잘난 얼굴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반승제는 윤선미가 내민 손을 단호하게 피했다. 그는 현재 상황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그건 CCTV를 보면 밝혀지겠지.”윤선미는 안색이 창백해서 주먹을 꼭 쥐었다.아무래도 반승제는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BH그룹으로 올 때 언니가 분명 대표님한테 나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는데? 근데 왜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거야?’반승제의 말을 듣고 성혜인은 약간 다르게 생각했다. 아무리 반승제라고 해도 좋아하는 사람의 눈에 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대표님의 부인?’윤선미는 약간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성혜인이 당연히 반승제의 결혼 소식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이는 업계 사람도 잘 모르는 일이었고, 안다고 해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게 태반이었다.SY그룹은 작디작은 기업에 불과했고 BH그룹과 혼인 관계를 운운할 자격이 없었다.“부인이라면 설마 그 투명 인간을 말하는 거예요?”윤선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 인간은 단 한 번도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춘 적 없어요. 반씨 집안에서도 인정 안 하는 사람을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부인이라고 불러요?”반승제의 부인이 못생긴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공식 석상에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이니 오죽 심각했겠는가.윤선미의 말 중에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성혜인은 반씨 집안에서 하루살이보다 못한 존재였고 반태승 앞에서만 그나마 손주며느리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윤선미의 말을 듣고서도 덤덤하게 대답했다.“공식 석상에 나온 적 있든 없든, 두 분이 결혼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아요.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로 인정받는 한, 바람을 피우는 것은 도덕적 및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하죠. 안 그래요?”윤선미의 말발은 성혜인을 이기지 못했다. 계속 변명하다가는 유부남을 넘본 불륜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얼굴이 예쁘장하면 우리 형부를 꼬실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우리 형부는 제 사촌 언니를 10년 동안이나 좋아했다고요.”“반 대표님이 그 정도로 일편단심인 분은 아닌 것 같던데요.”성혜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 앞에서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럼 내가 어떤 사람 같은데?”‘뭐야? 이 사람 회의하러 간 거 아니었어?’성혜인은 약간 멈칫한 모습이었다.반승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윤선미가 들어오며 문을 닫지 않은 관계로 그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듣고 말았다.이 점을 인식한 성혜인은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고, 윤선미는 꼴 좋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며 반승제의 곁으로 갔다.
성혜인은 레스토랑 앞에서 완전히 얼어버렸다. 임경헌은 그녀의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창가에 앉아있는 여자분이 제 어머니예요. 진짜 무서운 분이라, 만약 제가 오늘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다 페니 씨 덕분인 거예요.”성혜인은 어쩔 줄은 몰라 일단 머리부터 숙였다. 하지만 반희월은 이미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임경헌은 몸을 흠칫 떨며 말했다.“그럼 실례할게요.”임경헌은 성혜인의 허리에 손을 올리더니 반희월을 향해 걸어갔다.반희월은 예리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훑어봤다. 임경헌은 시종일관 젠틀한 미소를 유지하며 성혜인을 챙겨줬다.“어머니, 이쪽은 제 여자친구 페니 씨에요. 직업은 실내 디자이너예요.”머릿속이 하얘진 성혜인은 한참 진정한 후에야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반희월은 그녀를 모르는 눈치였기에 한시름 놓고 임경헌을 돕기 위해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처음 뵙겠습니다, 아주머니.”성혜인은 또렷한 이목구비와 하얀 피부 덕분에 차갑고 도도한 인상을 줬다. 한눈에 봐도 임경헌이 좋아하던 오만한 아가씨와 달랐기에 반희월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또 아무 여자나 데리고 와서 나를 골병 얻게 할 줄 알았더니 드디어 철이 든 모양이구나.”사실 임경헌은 아무 여자나 데리고 와서 한고비를 넘기기 위해 전 전 여자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선물을 사며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뺨을 맞고 방금 전의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다행히 그렇게 심하게 때린 건 아니었기에 지금은 아무런 자국도 보이지 않았다.“어머니, 페니 씨는 엄청 유능한 디자이너예요. 사촌 형의 네이처 빌리지도 페니 씨가 직접 디자인을 맡았다니까요. 그러니까 이젠 그만 걱정해요. 저 진짜 새사람 됐어요.”반승제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능력이 100% 보장되었기에 반희월은 보면 볼수록 성혜인이 마음에 들었다.“이건 첫 만남 선물이야.”반희월은 자신이 손목에서 팔찌 하나를 빼더니 성혜인에게 건네줬다.성혜인은 연신 손사래를 쳤다.“아니에요. 저는 따로 준비한
반승제는 서류를 보다 말고 동작을 멈추고 머리를 들었다.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반희월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설마 너도 몰랐던 거야?”임경헌은 사촌 형인 반승제를 무서워했기에 연애 소식을 알리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얘가 요즘 너무 바빴는지 데이트할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고. 네가 디자인까지 맡긴 아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참 괜찮은 것 같아. 얼굴도 예쁘장하니 인상이 참 좋아.”“혹시 페니를 말하는 거예요?”반승제는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는 페니가 결혼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반희월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래, 경헌이 데리고 온 여자 중에 이렇게 마음에 드는 아이는 처음이야. 그러니 너도 페니 양을 함부로 대하지 마. 미래에 한 가족이 될지 또 누가 알아?”반승제의 표정은 점점 식어갔다.“걱정하지 마세요.”반희월은 할 말을 끝내고 몸을 일으켰고, 반승제는 그녀를 전용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다줬다.이때 반희월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발걸음을 멈췄다.“경헌이도 좋은 사람을 만났는데 너도 이제 서둘러야지. 성씨 집안 아가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회장님이 좋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 한 번 제대로 만나보지 그래?”“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고모.”반승제의 단호한 모습에 반희월은 별말 없이 선글라스를 꼈다.“몸조심해. 위도 안 좋은 놈이 자꾸 식사를 거르지 말고.”반승제는 순순히 대답했다.“알겠어요.”반희월을 보내고 난 반승제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마침 커피를 들고 들어오던 심인우가 그의 어두운 안색을 보고 물었다.“경헌 도련님이 또 사고 쳤어요?”반승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사고까지는 아니고... 그냥 유부녀한테 빠진 모양이야.”심인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멈칫했다. 여자친구를 옷보다 자주 바꾸던 사람이 갑자기 취향이 변했으니 말이다.‘아무리 임경헌이 철없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하면 안 되지. 자기 남편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절절하게 말할 때는 언제고...’반승제는 언짢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응.”성혜인이 주저 없이 답했다. 남과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 걸 꺼렸던 그녀는 말투가 아주 차가웠다. 하지만 성혜원의 얼굴에는 기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성씨 저택 안으로 들어온 성혜인은 성혜원만 바래다주고 바로 돌아가려 했는데 꽃에 물 주고 있던 성휘와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성한도 그와 함께 있었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고, 성혜원은 이미 차에서 내려 쪼르르 달려갔다.“아빠! 오빠!”성한과 회사 얘기를 주고받던 성휘는 성혜인의 차를 보고 동작을 멈췄다. 성혜인은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와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성휘는 물 주는 일을 도우미에게 맡기고 바로 마중했다.“그래그래, 왔으면 됐다. 네 이모가 오늘 저녁 식사에 엄청 신경 썼어. 들어와서 밥이나 먹고 가라. 나도 마침 할 말이 있고.”성혜인은 아직 반승제를 만나러 가야 했기에 집 안에 들어가 앉을 시간이 없었다.“아빠, 저 아직 할 일 있어요. 저녁에 다시 얘기해요.”성휘가 흐뭇한 표정으로 성한의 어깨를 토닥이는 것을 보고 성혜인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성휘는 성혜인의 말을 듣는 체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한이가 제대로 된 직장이 없어서 네 이모가 인턴이라도 하라고 우리 회사에 보냈다. 보고하는 모습을 보니 신경 쓴 티가 나네. 참 잘 됐지?”성휘의 질문에 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윤이 자신의 아들을 회사로 보낸 의도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혜인아, 너도 오래간만에 돌아왔는데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한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어른 같이 말했다. 그리고 시선은 처음부터 성혜인의 몸매에 고정되었다.성한과 성혜인은 성휘의 곁에 서서 다정하게 얘기를 주고받았다. 분명 세 사람 다 코 앞에 서 있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졌다.성혜인은 말 못 할 공허함에 휩싸여 또다시 말했다.“아빠, 저 진짜 할 일이 있어요.”이 말을 들은 성휘는 표정이 점점 굳어
성혜인은 무거운 마음으로 차에 올라탔다. 반씨 저택에 도착하고 나자, 시간은 어느덧 20분이나 흘렀다.문을 열러 온 도우미는 성혜인을 보자마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성혜인 씨, 왜 또 왔어요? 사모님 오늘 안 계세요.”집 안에는 청소하고 있는 도우미 외에 아무도 없었다. 반승제가 집에 있는지 물으려고 하자 도우미는 이미 몸을 돌려 떠나버렸다. 백연서가 성혜인을 대하던 태도를 따라 배운 도우미는 그녀가 조만간 버림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누구 왔어요?”정원 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새로온 도우미예요? 이렇게 젊은 분일 줄은 몰랐네요.”소녀는 악의 없이 단순하게 물었다. 도우미는 피식 비웃으며 얕보는 눈빛을 보내왔다. 하지만 성혜인은 화내기는커녕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요. 만약 도우미라면 직업복을 입었겠죠. 저는 반 대표님을 만나러 왔어요.”성혜인의 당당한 태도에 소녀는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닫고 바로 사과했다.“죄송해요. 제 사촌 오빠를 만나러 왔다고요? 근데 오빠는 반 시간 전에 나갔는데...”‘사촌 오빠?’성혜인은 반승혜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알려줘서 고마워요.”성혜인은 진짜 볼 일이 있는 모양이었고, 더구나 자신이 오해한 게 미안했던 반승혜는 한 마디 더 보탰다.“아마 회사로 가서 회의하고 있을 거예요. 아까는 겨우 시간을 내서 돌아온 모양이던데요?”반승혜는 또 도우미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대접해야지 왜 가만히 서 있어요?”도우미가 입술을 깨물며 반박하려 할 때, 성혜인이 말했다.“괜찮아요.”성혜인이 자신을 탓하지 않는 것을 보며 도우미는 한시름 놓으며 말했다.“보세요, 괜찮다고 하잖아요.”“뭐요?”반승혜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당신 해고예요.”도우미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반씨 저택의 월급이 아주 높았기에 그녀는 해고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성혜인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반승혜의 천진난만함은 주변 사람도 기분 좋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평소 억지 부리기 고수만 만나왔던 성혜인은 오래간만에 마음 편히 타인을 마주했다.성혜인이 자신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을 보고 반승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녀는 별로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이때 성혜인은 붓을 들고 그림에 쓱쓱 몇 번 칠했다. 칙칙하던 그림에 순간 생기가 돌자 반승혜는 믿기 어려운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지금 그냥 색채만 바꾼 거죠? 그림이 완전히 확 살아났어요. 혹시 순수 미술을 매운 적 있어요?”반승혜는 전문가의 손길을 바로 알아차렸고, 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붓을 내려놓았다.“승혜 씨는 기초가 아주 좋아요. 이제 색감만 조금 신경 쓰면 될 것 같아요.”반승혜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덕분에 자신감이 확 생겼어요. 사실 저 이 그림으로 공모전에 나가려고 했거든요. 지도 교수님이 무언가 부족하다고 해서 오빠한테 물어보려고 했더니... 얼굴도 모르는 형수 때문에 다 망쳤어요.”반승혜는 투덜거리다가 반짝이는 눈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정말 고마워요. 이름이 페니 씨죠? 페니 씨는 어디 살아요? 저 이제 놀러 가도 돼요?”성혜인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도 반승혜가 좋기는 했지만 반씨 집안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았다.“죄송하지만 제 집은 좀...”단순한 반승혜는 성혜인의 말에 담긴 거절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껏 살아오며 단 한 번도 거절당한 적 없기 때문이다.“그럼 우리 라인 추가할까요?”성혜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일할 때 쓰는 라인 계정으로 반승혜와 친구 추가를 했다. 반승혜는 신이 나서 물감을 만지기 시작했다.“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줄래요? 덕분에 영감이 떠올라서 까먹기 전에 그림을 만져놔야겠어요.”성혜인은 그녀의 말대로 곁에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쉴 새 없이 주절거렸다.“이 화실은 원래 오빠 거였어요. 예전에 이곳에서 책 읽기를
성혜인은 한지은이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와서 앉았다.한지은은 여전히 삐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만약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졌다면 지금 주목받는 사람은 성혜인이 아닌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반승제도 동창인 양한겸을 봐서 계약한 것이지 성혜인과는 상관없기도 하고 말이다.한지은은 성혜인이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하필이면 회사에서 성혜인의 당당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나자 그녀는 열불이 터질 것만 같았다.“반승제 씨랑 계약 하나 했다고 기고만장한 것 같은데 반승제 씨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거든요. 제원을 떠들썩하게 한 소식을 설마 아직도 모르는 건 아니죠? 네이처 빌리지는 두 사람의 신혼집이라고요.”실내 디자인을 하다 보면 상류사회를 접할 기회가 아주 많은데 디자인을 핑계 삼아 부잣집 부부 사이에 개입해 불륜을 저지르는 일도 아주 많았다.용모가 출중한 한지은은 비슷한 루트로 빠르게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양한겸이 바로 첫 번째 목표였다. 비록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기는 했지만...아무튼 한지은은 오래전부터 반승제의 네이처 빌리지를 노리고 있었다. 그녀는 양한겸에게 여러 차례 사정했고, 심지어 생일날 밥을 사주기도 했다. 하지만 양한겸은 시종일관 반승제와 잘 아는 사이가 아니니, 실력으로 쟁취하라고만 했다.만약 진짜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성혜인은 또 어떻게 기회를 얻었겠는가. 양한겸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반승제까지 잃은 한지은은 더러운 짓을 하고도 깨끗한 척하는 성혜인의 모습이 너무 구역질 났다.이런 얘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던 성혜인은 머리를 들며 물었다.“지은 씨, 지금 저한테 말하는 거예요?”한지은이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흥, 반승제 씨랑 계약한 사람이 혜인 씨 말고 누가 있겠어요?”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기는 하죠.”성혜인의 시큰둥한 대답에 한지은은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였다.“지금 자랑
설연주는 내내 말없이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 물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설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강민이 지나치게 시끄럽다면 이 딸은 가끔 너무 조용했다.“연주야, 올라가서 자.”설연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아버지. 너무 화내지 마시고 일찍 주무세요.”설준석은 반평생을 살며 아들한테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도 아버지로서의 자각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가슴이 살짝 저릿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돈이 부족하면 말해.”“괜찮아요. 지난번에 주신 4억 원도 아직 안 썼어요.”설준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애인들을 만나러 간 것이다.설연주는 넓디넓은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너무도 넓어 차갑게 느껴졌고 마치 온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고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의 세상은 언제나 혼자 남는 것이 당연했다.방으로 가서 쉬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특정한 벨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설연주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며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얼른 전화를 받아들었다.남성의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밤 사람 보내서 널 데디러 갈 거야.”이 남자는 오성파의 두목이자 설연주가 기대고 있는 가장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와 엮인 것을 후회했지만 그때는 정승후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의 보호가 필요했다. 그때 마주친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 그녀에겐 선택지가 없었다.설연주가 말없이 듣고만 있자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왜? 이제 설연주가 됐다고 나를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설연주의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본능적으로 각인된 공포 그 자체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기다리던 남자는 짜증이 나는 듯 말을 이었다.“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 알잖아? 예전에 울며 빌면서 영원히 내
설우현의 시선이 설연주에게 머물렀다.목을 감싸 쥔 설연주는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설강민은 여전히 화가 나서 말했다.“두고 봐!”설우현은 동생을 대하는 설강민의 태도에 놀라며 미간을 찌푸렸다.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다시 웃으며 설우현을 바라보았다.“오빠, 이제 돌아가세요. 데려다줘서 고마워요.”설우현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며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설우현은 설연주의 눈빛에서 어딘가 죽은 듯한 고요함을 느꼈다. 웃고 있는 그녀였지만 마치 생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린 듯 언제까지 살아갈지 자신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차로 돌아와 한참을 고민하다가 설우현은 창문을 내렸다.“너도 어쨌든 설씨 가문의 사람인데 아무한테나 함부로 당하고 있지 마.”설연주는 목을 감싸고 제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설우현은 차를 출발시키며 백미러로 설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설연주는 조금 더 있다가 거실로 들어갔고 거실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설강민이 때려 부순 모양이었다.설강민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혐오 가득한 눈빛으로 차갑게 노려보았다.“설연주, 김현서한테 더 이상 덤비지 마. 아니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못 할 거야.”설연주는 그의 협박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설강민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계속할 생각이야? 김현서가 예전에 너를 괴롭힌 건 알지만 다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네가 괜히 건드리지 않았으면 걔가 널 괴롭혔겠어? 분명히 말해두는데 김현서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알아서 잘 처신해.”설연주는 설강민의 손을 뿌리치더니 그를 올려다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설강민, 너 때문에 네 여동생이 죽어도 넌 아무렇지 않을까?”설강민은 무심하게 대답했다.“너 지금 멀쩡히 잘 살고 있잖아? 진짜 죽기라도 하면 내가 폭죽 터뜨리며 축하해 줄게.”설연
설우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설연주의 눈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본 설우현은 역시나 자신이 놀림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고 정원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설연주는 그가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따라갔다. 두 사람만 남은 조용한 곳에 도착하자 설우현은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말했다.“네가 원하는 게 설씨 가문의 지분이면 됐지. 굳이 이런 자리에까지 끼어들 필요는 없잖아.”설연주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끝으로 옆에 핀 꽃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설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오빠, 내가 설씨 가문의 돈 때문에 여기 있는 게 아니라면 믿겠어요?”설우현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에게 돈을 뜯어내며 그들을 가지고 놀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오늘 같은 자리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돌아가.”설우현이 냉정한 게 아니라 오랜만에 성혜인과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자리에서 설연주 같은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었다.더군다나 그녀가 있으면 분위기만 어색해질 게 뻔했다. 아버지가 대체 왜 설연주를 부른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설연주는 속눈썹을 살짝 내리고 앞에 있는 꽃을 만지작거리며 그저 조용히 있었다.설우현은 참지 못하고 다시 다그쳤다.“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돌아가라고 했잖아.”“오빠, 혹시 혜인 언니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언니가 나 때문에 기분 나빠할까 봐?”설연주가 자신의 의도를 꿰뚫자 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건 굳이 말로 안 해도 알 줄 알았는데.”그 말을 들은 설연주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성혜인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오빠와 부모가 있으니 말이다.“알았어요. 지금 나갈게요.”설연주는 미련 없이 돌아섰고 설우현은 또 무슨 속셈일지 몰라 잠시 더 지켜보다가 몇 분 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
류소영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가 붉어지기를 반복하며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성혜인은 다소 귀찮은 표정으로 설계도를 정리하며 말했다.“천 달러면 되겠네요. 그런데 오늘 설씨 가문에 가서 식사하지 않으세요? 우리 같이 갈까요?”설연주는 깜짝 놀라며 성혜인을 바라보았다.“혜인 언니?”“맞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가자.”성혜인은 설연주를 도와 작은 판매대를 정리했다. 반면 류소영은 그 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두고 봐! 너희 가만두지 않을 거야!”설연주는 류소영의 말에 웃음만 나왔다. 그녀는 설씨 가문에서 존재감 없는 인물이지만 성혜인은 설의종의 친딸이다. 류소영이 성혜인을 상대로 어찌해 보겠다는 게 어이없을 따름이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차피 성혜인은 겉모습은 부드러워 보여도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류소영이 괜히 건드렸다가 큰코다칠 게 뻔했다.설연주와 성혜인이 설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마침 설우현이 설서율을 안고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어구구, 우리 서율이. 외삼촌이 안아 줄게요. 우리 아가 정말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반승제는 옆에서 인상을 잔뜩 쓰며 그 모습을 보았다.“안으려면 그냥 안든지, 그런 애정 표현은 좀 적당히 하시죠. 징그러우니까.”설우현은 뿌듯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고 반승제를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서율이가 안아주지 않으니까 질투하는 거 다 보이거든요.”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문가에 서 있는 설연주를 발견하고 표정이 굳어졌다. “누가 쟤 불렀어?”설연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의 옆에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오빠, 그 말 너무 섭섭하네요.”설우현은 한마디 더 하려다 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는 설의종을 보고는 꾹 참았다. 설의종에게 또 벌받는 건 피하고 싶었다.설연주의 시선은 설서율에게로 향했다. 귀엽고 얌전한 아기는 큰 눈과 긴 속눈썹을 가진 인형 같았다. 설서율의 부모를 보니 왜 이렇게 사랑스럽게 생겼는지 쉽게 이해
성혜인은 설계도를 한 장 집어 들며 흡족한 눈빛을 보냈다.“이 디자인에 저작권 있나요? 제가 사고 싶어요. 직접 디자인한 거죠?”갓 돌이 지난 쌍둥이를 데리고 성혜인은 플로리아로 부모님을 뵈러 왔다.이번에 반승제도 함께 동행했지만 설씨 가문에서 설서율과 반진율을 돌보고 있어서 함께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설연주가 대답하려는 찰나 주변에서 날카로운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어머나, 이게 누구야? 우리 재주꾼 진연주 아니야?”설연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때 단발머리를 하고 자신만만하게 걸어오는 김현서의 절친, 류소영이 눈에 들어왔다.류소영은 다가오자마자 옆에 있던 선반을 발로 툭 차며 거들먹거렸다.“너 여기서 매일 재주를 팔아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속이는 거야?”성혜인은 류소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류소영은 허리에 손을 얹고 성혜인을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얘가 전에 표절한 거 모르세요? 우리 학교에 소문이 다 퍼져서 아무도 얘 디자인 같은 건 안 사요. 학교 이미지에도 먹칠했으니 말 다 했죠. 그쪽이 돈 없어서 이런 데 온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제대로 된 디자이너 찾아보세요.”설연주는 이미 일어서서 류소영의 오만한 표정을 보며 손에 있던 물건을 던져버렸다.류소영은 순간 당황했다. 예전에는 늘 김현서의 뒤를 따라다니며 설연주를 괴롭혀 왔기에 겁이 많고 나약한 설연주가 반항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설연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표절하지 않았어.”그러자 류소영이 냉소를 흘렸다.“표절도 모자라 교수님과 부적절한 관계까지 맺었잖아. 학교에서 네가 한 짓을 다들 알고 있을걸? 정말 역겨워!”성혜인은 이제야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그 소문 많던 설연주였다. 이 또한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성혜인은 설연주를 다시 한번 바라보며 디자인을 살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꽤 잘 만든 작품이었다.“이거 당신이 직접 디자인한 거 맞죠?
김현서는 설강민의 옆에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당황스럽긴 설강민도 마찬가지였다. 창피한 것인지 설강민은 옆에서 아무런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로 아래층으로 끌려가며 김현서는 무의식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설강민!”“설강민, 너 정말 내가 이대로 쫓겨나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설연주와 엮이면서 김현서는 단 한 번도 설연주를 상대로 져본 적이 없었다. 김현서에게 있어 설연주 앞에서 창피한 꼴을 보이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한편, 설강민은 복잡한 얼굴로 계속하여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경호원들이 모두 설강민의 곁을 지키고 서 있는 탓에 김현서를 구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결국, 시선을 돌려 설연주를 바라보았지만 그 시각, 설연주는 이미 그녀의 방으로 모습을 감춰버렸고 외부의 소란 따위 그녀를 방해할 수 없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았다.설강민이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득 어쩌면 갑작스럽게 나타난 동생이지만 그의 지위에 위협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설강민의 뇌를 완전히 지배해버렸다.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후 설강민은 설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들, 무슨 일이야?”“아버지가 설연주에게 권한이 준거예요? 지금 별장 안의 하인들이 모두 설연주의 말만 듣고 있어요. 아버지, 앞으로 이 집의 물건은 여전히 제 것이에요. 설연주는 그저 남일 뿐이라고요.”설강민의 불평을 묵묵히 듣고 있던 설준석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비록 설준석 본인도 양아치 같은 짓을 많이 하고 다녔지만 최소한 설준석은 전체적인 상황과 흐름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키운 아들은 기본적인 눈치도 볼 줄 모를 줄이야.“설강민, 설연주는 네 동생이야. 김현서야말로 남이라고. 팔꿈치는 안으로 굽어야지. 너 다시 한번 더 그딴 짓거리 하면 내가 정말 네 카드 다 끊어버릴 줄 알아. 김현서 그 여자가 너와 사귀어주는 이유 내가 정말 모를 줄 알아?”설강민은 순간 말
설연주는 애써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어두운 눈빛은 쉽사리 감출 수가 없었다. 설강민이 나쁜 놈인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설연주에게는 거의 밑바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마 설씨 가문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진즉 찌꺼기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렸을 것이다.그런데 누가 또 환생시켜 주겠는가?결국, 인생은 운이었다.설준석이 떠나고 설연주는 다시 방문을 걸어 잠갔다. 이제 막 침대 위에 누웠는데 저 멀리 김현서의 목소리가 또다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보아하니 오늘도 찾아온 모양이다.관계를 끝마치고 김현서는 또다시 설연주의 방문 앞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예전이었다면 절대 상대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설연주는 방문을 열고 냉담하게 씩씩거리는 김현서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인데?”김현서가 팔짱을 끼며 설연주를 아니꼽게 쳐다보았다.“나 지금 배고파. 빨리 요리해줘.”“네가 직접 해.”“이 년이!”화가 치밀어 오른 김현서가 손을 들어 올려 설연주의 뺨을 향해 내려쳤지만 그 손길은 설연주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가로막히고 말았다.이윽고 설연주는 발을 들어 올려 김현서의 배를 거세게 가격했다. 힘이 얼마나 센 것인지 김현서는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반 미터 정도 날아가 버렸다.땅에 엉덩방아를 찧은 김현서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설연주를 바라보았다. 과거 순순히 뺨을 맞고 개 짖는 흉내를 내라면 그대로 따라 하던 진연주는 어디 갔단 말인가?‘감히 나한테 손을 대?’“너 죽고 싶어? 어디 감히 나한테 발길질이야!”혼쭐을 내주기 위해 김현서는 다급히 바닥에서 기어올랐지만 설연주는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거세게 내리쳤다.짝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깜짝 놀란 설강민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자신의 침실에서 달려 나와 물었다.“무슨 일이야?”“흑흑흑, 강민 씨, 저 천박한 년이 감히 나한테 손찌검을 했어.”설강민이 나타나자마자 김현서는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며 그에게
설연주가 집에 돌아왔을 때, 설준석 역시 이미 집에 들어와 있었다.웬일로 멀쩡하게 차려입은 설준석은 설연주를 보자마자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해주었다.“연주야, 네 설의종 삼촌이 방금 전화를 주셨는데 주식 양도 건은 일주일 안에 처리될 거라고 하시더구나.”곧이어 설연주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준비된 진수성찬을 보고 마침내 설준석이 갑자기 그녀에게 친절하게 구는 이유를 알아냈다.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설준석은 설연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식탁 앞에 직접 앉혀주었다.“앉아, 어서 앉아. 넌 앞으로 이 큰돈을 어떻게 쓸 예정이니?”설준석의 물음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나약한 기색이 역력해졌다.“저, 제가 직접 이 돈을 기획해도 될까요? 하지만 현서 언니가 이 돈은 언니가 갖고 싶다고 했거든요.”김현서의 존재라면 설준석 역시 대충 알고 있다. 설강민의 오래된 여자친구이고 가끔 별장에서 부딪힌 적도 있었다. 깊게 알아보지 않아도 욕심이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설준석 본인도 비록 쓸모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여자들의 목적에 대해서라면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런데 설연주의 말까지 들으니 설준석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아직 시집도 오지 않은 남이 감히 설씨 가문의 지분을 탐내? 어림도 없지.“김현서가 너한테 그렇게 말하든?”“네. 어젯밤에 별장에 왔는데 엄청 흉악한 어투로 절 협박했어요. 아버지, 언니가 절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어떡하죠?”“김현서 쟤가 무슨 자격으로 너한테 그런 말을 해? 김현서 그 여자는 아직 시집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연주야, 겁먹지 마. 이 일은 내가 반드시 잘 처리해둘게.”그 순간, 설연주는 공포에 삼켜진 얼굴을 하고는 설준석의 소매를 잡으며 애원했다.“아버지, 제가 아버님께 말했다는 것을 알면 기필코 또 저를 찾아와 못살게 굴 거예요. 아버지께서는 항상 집에 계시지 않으니 아무도 저를 지켜줄 수 없어요.”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좋은 사람은 결코 칭찬이 될 수 없다.설우현은 그대로 거실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느샌가 설연주의 장난에 휘말려 들어간 기분이었다.하지만 더 이상 설연주에 관한 생각을 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친구를 찾아가 술을 마셨다.그렇게 설우현이 별장을 떠난 후에야 설연주는 비로소 천천히 눈을 뜨고 눈앞에 드리워진 꽃밭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유리 꽃밭은 온통 잘 핀 꽃들로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는다는데 바람둥이라서 그런지 설우현은 이러한 낭만적인 놀이를 잘하는 편이었다.이윽고 설연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휴대폰을 슬쩍 살펴보았다.핸드폰 화면에는 온통 그녀를 저주하는 김현서의 욕지거리와 그녀가 보낸 잠자리 사진이었다.대학교 시절 설강민과 사귀게 되면서부터 김현서는 설강민과의 잠자리 사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물론 잠자리 장면이 전부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자고 있거나 두 사람의 팔이 드러난 사진 등 관계 후에 찍은 사진임이 명확했다.처음엔 차단을 해보기도 했지만 차단을 하면 꼭 김현서에 의해 잡혀버렸다.설연주에게 김현서는 악랄하기 그지없지만 다른 친구들 옆에서 김현서는 대범하고 밝은 여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찌 되었든 그녀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는 사람이라면 반에서 절대 잘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설연주는 늘 김현서의 가장 큰 적이었다.사진만 슬쩍 확인한 설연주는 바로 시선을 돌리고 옆에 환히 핀 꽃 한 다발을 잡아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꽃냄새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김현서를 연상케 하는 기분이 들었다. 손끝을 살짝 꺾으면 연약한 꽃은 힘없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부러지고 약간의 즙만 손바닥에 남을 뿐이었다.묵묵히 손가락을 바라보던 설연주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김현서가 정승후한테 연락했어요?”“네, 연락했습니다.”“그럼 다음에 두 사람이 사적으로 만날 때, 두 사람의 영상을 설강민에게 보내줘요. 물론 학교 카페에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