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레스토랑 앞에서 완전히 얼어버렸다. 임경헌은 그녀의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창가에 앉아있는 여자분이 제 어머니예요. 진짜 무서운 분이라, 만약 제가 오늘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다 페니 씨 덕분인 거예요.”성혜인은 어쩔 줄은 몰라 일단 머리부터 숙였다. 하지만 반희월은 이미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임경헌은 몸을 흠칫 떨며 말했다.“그럼 실례할게요.”임경헌은 성혜인의 허리에 손을 올리더니 반희월을 향해 걸어갔다.반희월은 예리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훑어봤다. 임경헌은 시종일관 젠틀한 미소를 유지하며 성혜인을 챙겨줬다.“어머니, 이쪽은 제 여자친구 페니 씨에요. 직업은 실내 디자이너예요.”머릿속이 하얘진 성혜인은 한참 진정한 후에야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반희월은 그녀를 모르는 눈치였기에 한시름 놓고 임경헌을 돕기 위해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처음 뵙겠습니다, 아주머니.”성혜인은 또렷한 이목구비와 하얀 피부 덕분에 차갑고 도도한 인상을 줬다. 한눈에 봐도 임경헌이 좋아하던 오만한 아가씨와 달랐기에 반희월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또 아무 여자나 데리고 와서 나를 골병 얻게 할 줄 알았더니 드디어 철이 든 모양이구나.”사실 임경헌은 아무 여자나 데리고 와서 한고비를 넘기기 위해 전 전 여자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선물을 사며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뺨을 맞고 방금 전의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다행히 그렇게 심하게 때린 건 아니었기에 지금은 아무런 자국도 보이지 않았다.“어머니, 페니 씨는 엄청 유능한 디자이너예요. 사촌 형의 네이처 빌리지도 페니 씨가 직접 디자인을 맡았다니까요. 그러니까 이젠 그만 걱정해요. 저 진짜 새사람 됐어요.”반승제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능력이 100% 보장되었기에 반희월은 보면 볼수록 성혜인이 마음에 들었다.“이건 첫 만남 선물이야.”반희월은 자신이 손목에서 팔찌 하나를 빼더니 성혜인에게 건네줬다.성혜인은 연신 손사래를 쳤다.“아니에요. 저는 따로 준비한
반승제는 서류를 보다 말고 동작을 멈추고 머리를 들었다.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반희월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설마 너도 몰랐던 거야?”임경헌은 사촌 형인 반승제를 무서워했기에 연애 소식을 알리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얘가 요즘 너무 바빴는지 데이트할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고. 네가 디자인까지 맡긴 아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참 괜찮은 것 같아. 얼굴도 예쁘장하니 인상이 참 좋아.”“혹시 페니를 말하는 거예요?”반승제는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는 페니가 결혼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반희월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래, 경헌이 데리고 온 여자 중에 이렇게 마음에 드는 아이는 처음이야. 그러니 너도 페니 양을 함부로 대하지 마. 미래에 한 가족이 될지 또 누가 알아?”반승제의 표정은 점점 식어갔다.“걱정하지 마세요.”반희월은 할 말을 끝내고 몸을 일으켰고, 반승제는 그녀를 전용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다줬다.이때 반희월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발걸음을 멈췄다.“경헌이도 좋은 사람을 만났는데 너도 이제 서둘러야지. 성씨 집안 아가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회장님이 좋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 한 번 제대로 만나보지 그래?”“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고모.”반승제의 단호한 모습에 반희월은 별말 없이 선글라스를 꼈다.“몸조심해. 위도 안 좋은 놈이 자꾸 식사를 거르지 말고.”반승제는 순순히 대답했다.“알겠어요.”반희월을 보내고 난 반승제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마침 커피를 들고 들어오던 심인우가 그의 어두운 안색을 보고 물었다.“경헌 도련님이 또 사고 쳤어요?”반승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사고까지는 아니고... 그냥 유부녀한테 빠진 모양이야.”심인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멈칫했다. 여자친구를 옷보다 자주 바꾸던 사람이 갑자기 취향이 변했으니 말이다.‘아무리 임경헌이 철없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하면 안 되지. 자기 남편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절절하게 말할 때는 언제고...’반승제는 언짢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응.”성혜인이 주저 없이 답했다. 남과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 걸 꺼렸던 그녀는 말투가 아주 차가웠다. 하지만 성혜원의 얼굴에는 기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성씨 저택 안으로 들어온 성혜인은 성혜원만 바래다주고 바로 돌아가려 했는데 꽃에 물 주고 있던 성휘와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성한도 그와 함께 있었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고, 성혜원은 이미 차에서 내려 쪼르르 달려갔다.“아빠! 오빠!”성한과 회사 얘기를 주고받던 성휘는 성혜인의 차를 보고 동작을 멈췄다. 성혜인은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와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성휘는 물 주는 일을 도우미에게 맡기고 바로 마중했다.“그래그래, 왔으면 됐다. 네 이모가 오늘 저녁 식사에 엄청 신경 썼어. 들어와서 밥이나 먹고 가라. 나도 마침 할 말이 있고.”성혜인은 아직 반승제를 만나러 가야 했기에 집 안에 들어가 앉을 시간이 없었다.“아빠, 저 아직 할 일 있어요. 저녁에 다시 얘기해요.”성휘가 흐뭇한 표정으로 성한의 어깨를 토닥이는 것을 보고 성혜인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성휘는 성혜인의 말을 듣는 체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한이가 제대로 된 직장이 없어서 네 이모가 인턴이라도 하라고 우리 회사에 보냈다. 보고하는 모습을 보니 신경 쓴 티가 나네. 참 잘 됐지?”성휘의 질문에 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윤이 자신의 아들을 회사로 보낸 의도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혜인아, 너도 오래간만에 돌아왔는데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한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어른 같이 말했다. 그리고 시선은 처음부터 성혜인의 몸매에 고정되었다.성한과 성혜인은 성휘의 곁에 서서 다정하게 얘기를 주고받았다. 분명 세 사람 다 코 앞에 서 있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졌다.성혜인은 말 못 할 공허함에 휩싸여 또다시 말했다.“아빠, 저 진짜 할 일이 있어요.”이 말을 들은 성휘는 표정이 점점 굳어
성혜인은 무거운 마음으로 차에 올라탔다. 반씨 저택에 도착하고 나자, 시간은 어느덧 20분이나 흘렀다.문을 열러 온 도우미는 성혜인을 보자마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성혜인 씨, 왜 또 왔어요? 사모님 오늘 안 계세요.”집 안에는 청소하고 있는 도우미 외에 아무도 없었다. 반승제가 집에 있는지 물으려고 하자 도우미는 이미 몸을 돌려 떠나버렸다. 백연서가 성혜인을 대하던 태도를 따라 배운 도우미는 그녀가 조만간 버림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누구 왔어요?”정원 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새로온 도우미예요? 이렇게 젊은 분일 줄은 몰랐네요.”소녀는 악의 없이 단순하게 물었다. 도우미는 피식 비웃으며 얕보는 눈빛을 보내왔다. 하지만 성혜인은 화내기는커녕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요. 만약 도우미라면 직업복을 입었겠죠. 저는 반 대표님을 만나러 왔어요.”성혜인의 당당한 태도에 소녀는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닫고 바로 사과했다.“죄송해요. 제 사촌 오빠를 만나러 왔다고요? 근데 오빠는 반 시간 전에 나갔는데...”‘사촌 오빠?’성혜인은 반승혜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알려줘서 고마워요.”성혜인은 진짜 볼 일이 있는 모양이었고, 더구나 자신이 오해한 게 미안했던 반승혜는 한 마디 더 보탰다.“아마 회사로 가서 회의하고 있을 거예요. 아까는 겨우 시간을 내서 돌아온 모양이던데요?”반승혜는 또 도우미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대접해야지 왜 가만히 서 있어요?”도우미가 입술을 깨물며 반박하려 할 때, 성혜인이 말했다.“괜찮아요.”성혜인이 자신을 탓하지 않는 것을 보며 도우미는 한시름 놓으며 말했다.“보세요, 괜찮다고 하잖아요.”“뭐요?”반승혜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당신 해고예요.”도우미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반씨 저택의 월급이 아주 높았기에 그녀는 해고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성혜인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반승혜의 천진난만함은 주변 사람도 기분 좋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평소 억지 부리기 고수만 만나왔던 성혜인은 오래간만에 마음 편히 타인을 마주했다.성혜인이 자신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을 보고 반승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녀는 별로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이때 성혜인은 붓을 들고 그림에 쓱쓱 몇 번 칠했다. 칙칙하던 그림에 순간 생기가 돌자 반승혜는 믿기 어려운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지금 그냥 색채만 바꾼 거죠? 그림이 완전히 확 살아났어요. 혹시 순수 미술을 매운 적 있어요?”반승혜는 전문가의 손길을 바로 알아차렸고, 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붓을 내려놓았다.“승혜 씨는 기초가 아주 좋아요. 이제 색감만 조금 신경 쓰면 될 것 같아요.”반승혜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덕분에 자신감이 확 생겼어요. 사실 저 이 그림으로 공모전에 나가려고 했거든요. 지도 교수님이 무언가 부족하다고 해서 오빠한테 물어보려고 했더니... 얼굴도 모르는 형수 때문에 다 망쳤어요.”반승혜는 투덜거리다가 반짝이는 눈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정말 고마워요. 이름이 페니 씨죠? 페니 씨는 어디 살아요? 저 이제 놀러 가도 돼요?”성혜인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도 반승혜가 좋기는 했지만 반씨 집안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았다.“죄송하지만 제 집은 좀...”단순한 반승혜는 성혜인의 말에 담긴 거절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껏 살아오며 단 한 번도 거절당한 적 없기 때문이다.“그럼 우리 라인 추가할까요?”성혜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일할 때 쓰는 라인 계정으로 반승혜와 친구 추가를 했다. 반승혜는 신이 나서 물감을 만지기 시작했다.“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줄래요? 덕분에 영감이 떠올라서 까먹기 전에 그림을 만져놔야겠어요.”성혜인은 그녀의 말대로 곁에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쉴 새 없이 주절거렸다.“이 화실은 원래 오빠 거였어요. 예전에 이곳에서 책 읽기를
성혜인은 한지은이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와서 앉았다.한지은은 여전히 삐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만약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졌다면 지금 주목받는 사람은 성혜인이 아닌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반승제도 동창인 양한겸을 봐서 계약한 것이지 성혜인과는 상관없기도 하고 말이다.한지은은 성혜인이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하필이면 회사에서 성혜인의 당당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나자 그녀는 열불이 터질 것만 같았다.“반승제 씨랑 계약 하나 했다고 기고만장한 것 같은데 반승제 씨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거든요. 제원을 떠들썩하게 한 소식을 설마 아직도 모르는 건 아니죠? 네이처 빌리지는 두 사람의 신혼집이라고요.”실내 디자인을 하다 보면 상류사회를 접할 기회가 아주 많은데 디자인을 핑계 삼아 부잣집 부부 사이에 개입해 불륜을 저지르는 일도 아주 많았다.용모가 출중한 한지은은 비슷한 루트로 빠르게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양한겸이 바로 첫 번째 목표였다. 비록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기는 했지만...아무튼 한지은은 오래전부터 반승제의 네이처 빌리지를 노리고 있었다. 그녀는 양한겸에게 여러 차례 사정했고, 심지어 생일날 밥을 사주기도 했다. 하지만 양한겸은 시종일관 반승제와 잘 아는 사이가 아니니, 실력으로 쟁취하라고만 했다.만약 진짜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성혜인은 또 어떻게 기회를 얻었겠는가. 양한겸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반승제까지 잃은 한지은은 더러운 짓을 하고도 깨끗한 척하는 성혜인의 모습이 너무 구역질 났다.이런 얘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던 성혜인은 머리를 들며 물었다.“지은 씨, 지금 저한테 말하는 거예요?”한지은이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흥, 반승제 씨랑 계약한 사람이 혜인 씨 말고 누가 있겠어요?”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기는 하죠.”성혜인의 시큰둥한 대답에 한지은은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였다.“지금 자랑
한지은은 약간 겁나기 시작했다. 비록 그녀의 아우성으로 나온 제안이기는 하지만 그녀 자신도 받아들이기 꺼려졌다. 그녀는 사무실의 다른 직원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은 전부 눈을 피하기에 바빴다. 아무도 그녀가 실수로 만든 판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난감한 상황에 한지은은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평소 성혜인의 뒷담화를 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모르는 척 머리를 숙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혜인을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바보같이 총대를 멘 자신 때문도 있었다.한지은은 손톱이 살에 박히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이건 불공평해요. 반승제 씨랑 그만큼 만났으면 좋아하는 스타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아무런 정보도 없는 우리가 무슨 수로 혜인 씨를 이기겠어요?”한지은은 완벽한 핑곗거리를 찾아냈다. 어쩔 수 없이 도박을 받아들였다가 진다고 해도 이 핑계를 사용할 수 있었다. 떳떳하지 못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성혜인이지 그녀가 아니었다.성혜인은 천천히 머리를 들며 말했다.“도전할 용기가 없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핑곗거리를 찾는다고 해서 이미 사라진 체면이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니잖아요?”성혜인의 말투는 아주 덤덤했고 날카로운 목소리의 한지은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말문이 막힌 한지은은 가만히 서서 속으로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이 년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저격하는데! 반승제도 눈이 잘못된 거 아니야? 디자인을 배운 적도 없는 사람한테 무슨 생각으로 별장을 맡겨!’한지은도 속으로 생각할 뿐이지 입 밖으로 낼 용기는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지금 이대로 꼬리를 내린다면 그녀는 출근할 면목도 없었다.한지은은 만약 반승제가 자신의 외모와 몸매를 보게 된다면 분명 생각을 바꿀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희망을 품고 도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누가 안 한대요? 하지만 도전하기 전에 저도 반승제 씨를 만나야겠어요.”성혜인은 이해가 안 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한지은이 이어서 말했다.“
BH그룹의 꼭대기층.반승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그는 없는 시간을 겨우 짜내 집으로 돌아갔는데 글쎄 바람을 맞고 말았다. 성혜인에 대한 인상이 안 그래도 바닥 치고 있었는데 바람을 맞고 나니 더욱 나빠지고 말았다.이때 심인우가 서류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외국에 있는 주치의가 방금 전화 왔는데 회장님께서 약 1주일 후 귀국하기로 계획하셨답니다.”‘이렇게 빨리?’반승제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천천히 말했다.“새로운 계약서가 필요해요. 변호사한테 연락해서 SY그룹을 도와 2차 융자를 넘기는 조건으로 아내라는 사람이 저의 연극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 봐요.”반승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가 ‘아내라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상대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반태승이 ‘혜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적 있지만 성이 혜 씨인 건지 그냥 이름인 건지는 딱히 알아볼 관심이 없었다.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가더니, 반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변호사가 만든 계약서를 반승제에게 보내줬다. 그리고 프린트부터 사인까지 금세 완성되어 계약서 얘기가 나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성혜인의 집 앞까지 배달 왔다.회사에서 돌아온 성혜인은 어떻게 반승제와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홧김에 이혼을 강력하게 요구한다면 성휘의 기대를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문자를 보내는 게 좋을까? 아니면 통화를 하는 게 좋을까?’성혜인이 한창 주저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문밖에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있었다.“안녕하세요, 성혜인 씨. 이건 반 대표님이 전한 계약서인데 대표님은 이미 사인하셨어요. 성혜인 씨도 한 번 읽어보세요.”성혜인은 당연히 이혼에 관한 내용인 줄 알고 계약서를 꺼내봤다.‘2차 융자를 돕는 대신... 부부 연기를 해달라고?’이는 마침 성혜인이 원하던 바였기에, 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반승제의 사인을 바라봤다. 계약서 뒷면에서도 흔적이 보일 정도로 힘껏 사인한 걸 봐서 아무래도 기분이 아주 언짢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
온시환은 천천히 손을 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래, 알았어.”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온시환의 눈가는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러나 공지민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온시환이 또 심심풀이로 자신을 괴롭히려 한다고 생각했다.차인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온시환 같은 남자가 진심일 리 없었다. 설령 진심이라 해도, 공지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는 식당 밖에 홀로 서 있었다.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공지민이 택시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잠시 후, 그는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야, 오늘 한 잔 하자.”반승제는 흔쾌히 응했다.이상하게 오늘 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는 서주혁까지 불렀다.두 사람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여러 병의 술을 비운 상태였다.“시환아, 너 대체 왜 이래?”온시환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했다.“뭐 하는 거야? 얼른 앉아.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못 가!”혼자서 술을 퍼마신 온시환을 보며 반승제는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너 혹시 무슨 고민 있냐?”“고민은 무슨...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하하.”서주혁은 말없이 나무토막처럼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그는 분위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반승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들을 모두 치우고 온시환 앞에 과일주스를 내밀었다.“솔직하게 얘기해. 무슨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온시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반승제는 그가 웃는 줄 알았다. 웃을 때도 어깨가 들썩이긴 마찬가지니까.“뭐야, 웃긴 얘기라도 있어?”그는 온시환의 몸을 돌려보았고 그제야 그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야, 주혁아! 이거 봐. 시환이가 울고 있어!”온시환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꺼져!”반승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동차가 레스토랑 앞에 멈춰서자 공지민이 먼저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온시환도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자리를 예약 해둔 터라 직원이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공지민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푸른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왜, 내가 이제 그 점이 없으니까 나를 쳐다볼 생각도 없어진 거야?”공지민은 그가 귀찮을 뿐이었다. 이미 진실을 알았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지, 굳이 이런 말로 둘 다 어색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그러나 온시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네가 다니던 고등학교 가서 구은우 사진 봤어. 솔직히, 별로 잘생긴 것도 아니던데.”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온시환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오히려 더 그녀를 찌르는 말을 꺼냈다.“그렇게 좋으면 왜 안 찾아가? 아니면 이미 결혼이라도 한 거야? 네가 이러거 있는 거 보면, 그 자식도 너를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지? 참 안 됐네.”그때 마침 직원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말없이 잔을 들어 올린 공지민은 그대로 커피를 온시환에게 끼얹었다.온시환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감정적인 반응이 반갑기까지 했다.마치 나무토막처럼 감정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공지민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정신이 좀 들었어?”온시환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있는 냅킨을 집어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어쩌지? 평생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공지민, 난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왜 날 대체품으로 썼는지. 진짜 그 점 하나 때문이야?”그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을 터였다.그래서 그는 더더욱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심지어 그
온시환은 공지민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왜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그에게 와서 상처를 남겼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더 한심한 건 자신이었다. 대체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몰래 보러 온 자신이 더 우스웠다.온시환의 차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주차돼 있었다. 연예계에서 그의 영향력 덕분에 차를 촬영장 근처에 세워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그는 창문 너머로 공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문 장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아픈 손목을 문지르는 모습, 옆에 있던 낯선 여성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별다른 장면도 아닌데 온시환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공지민은 오후 촬영을 마치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보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공지민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쪽으로는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으로는 문보영이 여전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둘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문보영은 공지민이 그날 밤의 일을 봤다는 걸 몰랐다. 여전히 밝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했다.“지민아, 요즘 다시 촬영 시작했어? 혹시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내가 대표님께 한 번 말씀드릴 수 있어. 사실 대표님도 꽤 후회되시는 것 같더라. 요즘 네 인지도도 높잖아.”“아니, 괜찮아.”“그런데 너랑 시환 씨... 지민아, 너희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파티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잘 될 줄 알았는데, 요즘은 연락도 안 한다고 하던데.”예전 같았으면 공지민은 문보영의 말을 진심 어린 걱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문보영이 정말 궁금한 건 온시환이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여부라는 걸.“헤어졌어. 이번에는 정말 끝이야.”문보영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넌 괜찮아? 너 시환 씨 정말 좋아했잖아. 혹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너를 상처 준 거야?
당연히 취했다. 취하지 않았으면 온시환의 성격상 추지성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추지성은 온시환에게 다시 술병을 열어주며 말했다.“아직 덜 취한 것 같으니 더 마셔.”온시환은 희미하게 뜬 눈으로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지성아, 나 지민이 고등학교에 가봤어. 그리고 지민이 첫사랑을 알게 됐지. 꽤 괜찮게 생겼더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뭔지 알아?”“뭔데?”“내 코끝 여기.”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여전히 흐릿한 눈빛이었다.“여기에 구은우랑 똑같은 점이 있었잖아. 공지민은 아마 그 점 때문에 나에게 잘해줬던 거야. 너도 우습지 않냐?”그는 입으로 우습다고 말했지만 눈빛에는 슬픔이 넘칠 듯 담겨 있었다.추지성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누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가지고 놀고 싶을 뿐이었고 막상 손에 넣으면 금세 흥미를 잃었다.“못 가지는 게 가장 좋은 거지. 손에 넣으면 금방 싫증 나는 법이거든.”“지성아, 나 여기가... 정말 아프다.”추지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야, 네가 진짜 내 친구 아니었으면 벌써 널 집어 수영장에 던져 넣어버렸을 거다. 여자를 두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술 더 마셔야겠어.”“안 마셔. 마시면 더 괴로워질 뿐이야.”온시환은 그 말을 끝으로 옆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추지성은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려다 그의 축축한 속눈썹을 보고 멈칫했다.‘설마 또 울었어? 요즘 완전 여자 같아. 조금만 힘들어도 시도 때도 없이 우네.’온시환은 원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수년 전 큰 수술을 받은 후, 의사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로 그는 늘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그가 쓰는 드라마 대본들도 대부분 막장극이었고 그는 막장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막장이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돌아와 부메랑처럼 자신을 찌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밤중에 온시환은 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