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은은 약간 겁나기 시작했다. 비록 그녀의 아우성으로 나온 제안이기는 하지만 그녀 자신도 받아들이기 꺼려졌다. 그녀는 사무실의 다른 직원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은 전부 눈을 피하기에 바빴다. 아무도 그녀가 실수로 만든 판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난감한 상황에 한지은은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평소 성혜인의 뒷담화를 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모르는 척 머리를 숙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혜인을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바보같이 총대를 멘 자신 때문도 있었다.한지은은 손톱이 살에 박히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이건 불공평해요. 반승제 씨랑 그만큼 만났으면 좋아하는 스타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아무런 정보도 없는 우리가 무슨 수로 혜인 씨를 이기겠어요?”한지은은 완벽한 핑곗거리를 찾아냈다. 어쩔 수 없이 도박을 받아들였다가 진다고 해도 이 핑계를 사용할 수 있었다. 떳떳하지 못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성혜인이지 그녀가 아니었다.성혜인은 천천히 머리를 들며 말했다.“도전할 용기가 없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핑곗거리를 찾는다고 해서 이미 사라진 체면이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니잖아요?”성혜인의 말투는 아주 덤덤했고 날카로운 목소리의 한지은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말문이 막힌 한지은은 가만히 서서 속으로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이 년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저격하는데! 반승제도 눈이 잘못된 거 아니야? 디자인을 배운 적도 없는 사람한테 무슨 생각으로 별장을 맡겨!’한지은도 속으로 생각할 뿐이지 입 밖으로 낼 용기는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지금 이대로 꼬리를 내린다면 그녀는 출근할 면목도 없었다.한지은은 만약 반승제가 자신의 외모와 몸매를 보게 된다면 분명 생각을 바꿀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희망을 품고 도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누가 안 한대요? 하지만 도전하기 전에 저도 반승제 씨를 만나야겠어요.”성혜인은 이해가 안 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한지은이 이어서 말했다.“
BH그룹의 꼭대기층.반승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그는 없는 시간을 겨우 짜내 집으로 돌아갔는데 글쎄 바람을 맞고 말았다. 성혜인에 대한 인상이 안 그래도 바닥 치고 있었는데 바람을 맞고 나니 더욱 나빠지고 말았다.이때 심인우가 서류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외국에 있는 주치의가 방금 전화 왔는데 회장님께서 약 1주일 후 귀국하기로 계획하셨답니다.”‘이렇게 빨리?’반승제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천천히 말했다.“새로운 계약서가 필요해요. 변호사한테 연락해서 SY그룹을 도와 2차 융자를 넘기는 조건으로 아내라는 사람이 저의 연극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 봐요.”반승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가 ‘아내라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상대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반태승이 ‘혜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적 있지만 성이 혜 씨인 건지 그냥 이름인 건지는 딱히 알아볼 관심이 없었다.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가더니, 반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변호사가 만든 계약서를 반승제에게 보내줬다. 그리고 프린트부터 사인까지 금세 완성되어 계약서 얘기가 나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성혜인의 집 앞까지 배달 왔다.회사에서 돌아온 성혜인은 어떻게 반승제와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홧김에 이혼을 강력하게 요구한다면 성휘의 기대를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문자를 보내는 게 좋을까? 아니면 통화를 하는 게 좋을까?’성혜인이 한창 주저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문밖에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있었다.“안녕하세요, 성혜인 씨. 이건 반 대표님이 전한 계약서인데 대표님은 이미 사인하셨어요. 성혜인 씨도 한 번 읽어보세요.”성혜인은 당연히 이혼에 관한 내용인 줄 알고 계약서를 꺼내봤다.‘2차 융자를 돕는 대신... 부부 연기를 해달라고?’이는 마침 성혜인이 원하던 바였기에, 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반승제의 사인을 바라봤다. 계약서 뒷면에서도 흔적이 보일 정도로 힘껏 사인한 걸 봐서 아무래도 기분이 아주 언짢
변호사는 알아서 안 되는 진실을 알아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BH그룹으로 온 그는 반승제에게 계약서를 건네줬다.“대표님, 성혜인 씨가 사인을 끝냈습니다.”반승제는 성혜인의 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성혜인... 혜인은 이름이었군.’반승제는 또 계약서를 펼쳐보며 물었다.“다른 요구는 없었어요?”변호사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성혜인이 별다른 요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주 쿨하게 사인했다고 말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반승제는 피식 웃었다. 2차 융자를 도와주고 이혼을 미룬다고 하니 이렇게 빨리 사인을 했는데, 점심에 바람맞은 일은 이혼을 피하고자 일부러 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계약서를 한쪽에 놓으며 짧게 답했다.“알겠어요.”변호사는 반승제가 무언가 오해를 한 것 같기는 했지만 여전히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이혼할 사이에 서로 많이 알아봤자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사인을 하고 난 성혜인은 기분이 아주 후련했다. 2차 융자와 이혼을 전부 해결했으니 그녀는 더 이상 반씨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으로서 그녀는 반승제의 연기에 협조하며 디자인 일만 제대로 하면 되었다.이는 가뭄에 내린 단비 같은 일이었기에 성혜인은 최선을 다해 임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내일 인테리어 팀과 함께 현장 조사를 하고 구체적인 견적을 내보기로 했다.성혜인이 한시름 놓고 침대에 눕기 바쁘게 강민지가 위치와 함께 메시지를 보내왔다.「혜인아, 나 여기서 네 동생을 봤어.」‘스카이웨어? 몸도 아픈 애가 어떻게 술집에 있어?’「네가 잘못 본 거 아니야?」「그럴 리가. 너한테 문자 보내는 새로 사라졌네. 네가 직접 와서 찾아볼래?」성혜인은 부랴부랴 옷을 입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스카이웨어 앞에 도착한 성혜인은 자신의 VIP 카드를 꺼냈다. 이곳은 부자층을 노리고 만들어진 곳이기에 VIP 카드 한 장에 4억으로 판매됐다. 하지만 대부분 고객이 이곳에서 만나기를 좋아하는 관계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생각하니 이승주는 더욱 득의양양해져서 손을 뻗어 성혜원의 턱을 잡으려 했다. 놀란 성혜원의 질끈 감은 두 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쁜이는 데려가고 너는 나랑 위층으로 가서 좀 더 재밌게 놀까?”성혜인은 이승주가 진심으로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곳, 스카이웨이에서 혜인이 소리를 지른다면 바로 보디가드들이 달려올 것이다. 하지만 여긴 재벌 2세들이 제일 많이 찾는 사교모임 장소이니 이곳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가 망신을 당하는 건 본인이었다. 사업도 유지해야 하는데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간 이 사교모임에서 더 이상 얼굴도 못 들고 다닐 것이다. “승주 도련님이 말씀하시는 재밌는 거라는 게 위층의 도박장인가요?”이승주는 눈썹을 씰룩거리고 위층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얘기했다. “그래요, 와본 적이 있나 봐요?”성혜인은 입을 꾹 닫고 말을 하지 않았다. 성혜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려 하는 것을 본 성혜인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성혜원을 풀어주세요. 까짓거 저랑 놀죠.”사실 이승주는 성혜원보다 성혜인에게 더욱 끌리고 있었다. 이승주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승낙했다. “그렇다면 혜인 씨 얼굴을 봐서라도 들어줘야겠네요. 그런데 혜인 씨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예요. 난 재미없는 건 딱 질색이거든.”성혜인은 묵묵히 시선을 성혜원 쪽으로 옮겼다. 왜 그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인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혜원아, 먼저 돌아가.”얼굴이 창백해진 성해원을 잡고 있던 보디가드들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런데 언니는...”“난 괜찮아.”성혜인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넌 왜 여기에 혼자 오게 되었는지,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줘야 할 거야.”성혜원은 고개를 푹 떨구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사람이 오늘 밤 여기에 있으니까, 그 사람을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참지 못하고 온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성혜인을 마주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근검절약하는 성혜인이 여기서 4억이나
이승주는 반승제의 반응을 보기 위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승주의 기대와는 달리 반승제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그의 예상이 맞았다. 같이 잤다고 해서 뭐가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바닥에서 여인이라는 건 장식품과도 같았다. “네, 취향이 좀 바뀌었어요. 요즘은 페니가 좋더라고요.”그렇게 말하면서, 이승주는 손을 뻗어 성혜인의 턱을 잡고 더욱 가까이 붙었다. 성혜인이 그의 손목을 잡아채고 고개를 들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승주 도련님, 까먹고 얘기를 못 한 게 있는데요, 저 남편 있어요. 여기서 함께 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이 테이블의 사람이 가장 많았기에 가장 주목 받는 것도 이 테이블이었다. 그 원인은 반승제가 이 테이블에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온시환까지. 두 사람 모두 제원의 권력 중심에 위치한 사람들이고 게다가 반승제가 호구처럼 돈을 계속 던져주고 있었으니까. 반승제는 도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보통 이곳에 끌려오는 게 대다수였다. 그리고 종래로 이기고 지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금방 귀국했을 때 와서 잃은 돈은 파산 위기의 회사가 기사회생할 정도의 금액이었다. 툭하면 4000억 정도랄까. 이런 호구를 누가 싫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반승제가 이 테이블에 앉은 후 조금이라도 자격이 되는 사람들은 이 테이블에 바로 착석했다. 이승주가 또 성혜인을 데리고 왔으니 이 테이블은 수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낯이 깎인 이승주의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심지어 성혜인을 한 대 치고 싶은 생각까지 치밀어 올랐다.하지만 진짜 한 대 친다면 자기의 명성이 바닥까지 떨어질 게 뻔했다. 이 년이 여기까지 계산하고 온 건가?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이승주가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래요? 남편이 누군데요? 설마 저번에 호텔에서 봤을 때 옆에 있던 남자는 아니잖아요?”목숨이 열 개 주어진대도 이승주는 직접 반승제의 이름을 거론할 담이 없었다. 성혜인
윤선미는 이런 곳에서 성혜인을 만나게 될 줄 생각도 못 했다. 성혜인을 노려보는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불꽃이 일 것 같았다. 전에 성혜인 때문에 반승제 앞에서 크게 망신당한 적이 있었다. 최근에는 반승제의 호감을 다시 사기 위해 계획 중이었는데 성혜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니. 성혜인은 윤선미를 무시한 채 반승제에게로 시선을 돌려 부드럽게 물었다. “반 대표님, 칩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두 배로 돌려드릴게요.”둘러 모인 사람들은 반승제에게 말을 거는 성혜인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늘 반승제의 등장에 수많은 여자가 말을 걸려고 노력했지만 반승제의 냉랭한 태도에 그 누구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런데 성혜인이 이리도 많은 사람 앞에서 먼저 말을 걸다니? 그녀가 솔로라면 목적은 분명히 반승제와 엮이고 싶어서 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결혼 한 유부녀가 반승제한테서 돈을 빌리다니?어리석은 방법이었다. 반승제가 성혜인이 자기한테서 돈을 빌리려는 것을 예상치 못해 굳어있을 찰나 그 옆의 온시환이 자신의 칩 절반을 밀어서 주었다. 웃음을 짓는 정교한 눈매 밑으로 조롱이 살짝 섞여 들어갔다. 온시환의 생각도 다른 사람들과 같았다. 성혜인이 반승제의 관심을 끌려고 이런 저급한 방법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저급해서 재미도 없을 정도였다. “이 거래 너무 욕심나는데, 페니 씨 제 칩을 빌려드려도 괜찮죠?”성헤인이 반승제를 찾아 돈을 빌리려던 것은 단지 이 테이블에 친한 사람이 없어서였다. 반승제는 이후에도 같이 사업을 하는 사이이니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하기가 쉬웠을 뿐이다. 하지만 빌려주는 사람이 있다니 그녀도 거절하지 않았다.“감사드려요.”온시환은 성혜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입술만 끌어올렸다. 누가 봐도 온시환이 이 기회로 성혜인을 꼬시려는 것은 아니었다. 성혜인은 개의치 않고 칩을 가진 후 딜러를 쳐다보았다. 딜러는 급히 영업용 미소를 장착하며 이어 나갔다. “그럼, 다들 준비되신 것 같으니 시작하겠습니다...”“
보다시피 반승제의 기분은 꽤 좋았다. 현장의 분위기도 오묘해졌다. 이승주는 성혜인과 기 싸움을 해봐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속해서 기 싸움을 이어간다면 화병이 도지는 것은 이승주 본인뿐이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딜러를 향해 말했다. “시작하죠.”딜러는 모든 사람이 준비된 것을 확인하고 포커를 꺼냈다. 성혜인의 주위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그중 대다수는 재미를 보러 온 것이고 간혹 그녀를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까 성혜인이 칩의 가치도 모른 채 두 배로 갚는다고 했으니 온시환에게 4000억을 갚아야 하는 셈이다. 게다가 아마추어인 그녀가 노리밋 텍사스 홀덤의 테이블에 들어와 앉았다니. 이런 도박은 웬만한 타짜도 재차 고려하는 판이었다. 심지어 이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은 다 손에 꼽히는 재벌 2세들이지만 성혜인은 얼굴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등을 곧게 편 성혜인 오른쪽의 두 사람이 먼저 보지 않고 각각 2억과 4억을 베팅했다. 그리고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성혜인은 자기 손에 들어온 두 장의 카드를 보고 생각하더니 포기했다. 다들 그녀의 이런 행동이 교활하다고만 느껴졌다. 반승제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윤선미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실력도 안 되면서 자리나 차지하고 계신 거예요? 다들 시간이 남아돌아서 여기 온 줄 아나.”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딜러한테 물었다. “포기하면 안 되는 거예요?”딜러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되긴 합니다.”하지만 지금 단 한 장의 공유 카드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는 베팅도 하지 않고 포기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돈을 잃기도 싫고, 잃기 두려워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여기에 앉아있는 걸까. 노리밋 텍사스 홀덤에 참가하는 사람은 돈이 흘러넘치게 많은 사람이다. 그 정도의 재력이 없다면 이곳에 끼지 말았어야지.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불만스러워했지만 성혜인은 개의치 않
이러한 도발에도 성혜인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들어 이승주를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승주 도련님, 전 분명히 유부녀라고 말씀드렸는데, 마음을 거절했다고 해서 이렇게 저만 쥐 잡듯 잡을 필요가 있나요?”그 말인즉슨 남자로서 속이 참 좁다는 뜻이었다. 정확한 발음과 청량한 목소리로 내뱉은 성혜인의 말은 곧장 퍼져나가 주위 사람들의 웃음을 불러일으켰다. 이승주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마음을 받아달라고 했었나요?”성혜인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 대답하지 않으니 자연스레 방관자들이 추측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승주가 성혜인을 데려왔건만 유부녀라는 소리에 태도가 완전히 변했으니. 갖지 못하면 부숴버린다는 것인가? 성혜인이 너무 적게 베팅하는 것은 맞지만 거절당했다고 해서 여자 하나를 물고 늘어지는 건 품위 없는 행동이었다. 이승주는 체면을 잃어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이 년을 너무 얕잡아 봤다. 다른 사람까지 이용하다니. 이 바닥에서는 원래 남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에게 머무는 시선들이 의미심장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적 가운데서 윤선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음 쳤다. “승주 도련님이 뭐가 부족하다고 당신처럼 헤픈 여자를 좋아하겠어요? 진짜 별꼴이라니까.”자기가 이승주를 거절했다는 둥, 제까짓게 뭐라고 감히 여기서 자기를 치켜세워?성혜인은 윤성미를 의문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누구세요?”윤선미는 표정이 순간 굳었다. 윤선미는 성혜인이 자기를 모른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런 연기를 이어가려는 건지, 이 불여시 같으니라고. 이승주가 성혜인을 괴롭힐 때 그녀는 억울한 척 기회를 잘 잡아 판세를 뒤집었다. 윤선미는 처음부터 성혜인을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았다. 윤선미는 성혜인의 말끝마다 시비를 걸었지만 성혜인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선미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시비를 걸
남자가 전화를 한 상대는 오혜수였다. 지금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보스뿐이니까.전화를 받은 오혜수는 여전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오번? 너 퇴직한 거 아니니? 왜 아직도 전화해.”오번은 남자의 암호명 순위일 뿐이다. 전에 오혜수의 곁을 따라다닐 때 해킹을 담당하며 얻은 암호명이다.그 후 제원시에서 미움을 사는 바람에 플로리아로 건너와 자신의 기술로 용돈 벌이를 하는 것이다.비록 전에 충분히 많은 돈을 벌어두었지만 돈이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으니 더 벌면 안될 것도 없었다.“보스, 이번에 저를 구하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주혁과 장하리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설우현 도련님께 잡혀 왔는데 번거로우시겠지만 도련님께 전화 좀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당장 두 다리를 잃을 것 같습니다.”오번이 서주혁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 설우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 일이 서주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아하니 남자는 그저 서주혁이 대신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한편, 오혜수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서주혁을 알고 있는 건 맞지만 서주혁도 아직 장하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체면을 세워줄 이유가 없었다.“보스, 저를 구하지 않으면 오늘 정말 다리가 부러질 겁니다.”“닥쳐. 그러게 멀쩡히 잘 있는 설씨 가문을 왜 건드려?”오혜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부잣집 자제들과 접점이 생기는 것이었다.그러나 오번 역시 상황이 급한지라 또 몇 번이나 거짓 울음을 터뜨리면서 꼭 구해주러 오라고 몇 번이고 당부한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전에 제원에 있을 때 장하리의 행방을 감추는 것을 도운 적이 있기에 지금 오번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하리와 서주혁뿐이었다.설우현은 휴대폰을 낚아챈 뒤 바로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 아닌 유심히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겁에 질린 오번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감히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5분 후, 누군가가 설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설우현은 싸늘한 말투로 다시 한번 그녀를 밀어냈다.“꺼져. 선 넘지 마.”설연주는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설우현에게 밀려 푹신푹신한 소파에 주저앉으니 순간 지그시 감은 두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혹시 자신의 힘이 너무 셌던 건 아닌지 하는 마음에 설우현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설연주를 바라보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솔직히 설연주는 이미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설우현은 소위 말하는 여동생과 그렇게 가까이 지내서는 안 됐다.그녀를 뒤로하고 설우현은 곧바로 옆에 앉아 컴퓨터를 켜 자신이 투자한 프로젝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모든 프로젝트는 많은 돈을 벌어들이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한 시간이 지나고 그는 소파 변두리에 아슬아슬하게 누워있는 설연주를 발견했다.그러나 설우현의 각도에서는 그녀의 흰 옆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설우현이 천천히 다가가 설연주를 바로 눕혀주었다.정말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약간의 카리스마에 매혹적인 기질을 갖고 있어 설령 가장 무난한 옷을 입더라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여우로 보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녀의 여우처럼 길게 찢어진 눈은 말로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 눈동자에 서러운 감정이 서리니 자꾸 마음이 약해지는 기분이 들었다.설우현은 마침내 왜 자신이 그녀를 싫어할 수가 없었던 건지 알게 되었다. 솔직히 설우현은 얼빠였던 것이다.바로 눕히고 막 손을 빼려던 참이었다.그런데 그때, 설연주가 그의 큰 손바닥에 뺨을 대고 비비적거리는 것이 아니겠는가.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찰나 설우현은 자신의 손끝이 촉촉하게 젖어있는 것을 느꼈다. 확인해보니 다름 아닌 설연주의 눈물이었다.꿈속에서는 매일 울고 있으면서 깨어있을 땐 그 누구보다 독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설우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담요를 다시 덮어주고 설우현은 아예 그녀를 안아 들어 위층으로 올라갔다.이곳에 설연주고 살던 방이 있는데 그녀를 침대로 내려놓자 더웠던 모양인지 바로 담요를 걷어버렸다. 옷은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벙어리는 이제 영원히 그녀에게 답을 줄 수 없었다.흐릿한 의식 속, 설연주는 천천히 잠자리에 들었고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그러나 흐리멍덩한 와중에도 후회되진 않으냐는 물음은 꿈속에서 천만 번이고 반복되었다.그런 쓰레기를 구해준 게 후회되진 않냐고, 그딴 쓰레기를 위해 그녀의 창창한 미래를 내바친 것이 후회되진 않냐고...온몸이 불타오르는 듯 뜨거웠다. 머릿속에는 벙어리의 필체와 벙어리와 수화로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 아른거렸다.시간도 참 빠르지. 설연주가 여전히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을 때, 벙어리는 지금쯤 두 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한편, 막 차를 멈춰 세웠는데 옆에서부터 설연주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설연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설연주는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그 모습에 설우현은 손을 뻗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턱을 살짝 꼬집었다.“입 벌려.”그러나 설연주는 여전히 별 반응이 없었다. 입술에 붉은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그 순간, 설우현이 갑자기 힘을 주더니 손가락 하나를 뻗어 그녀의 이가 계속 맞물리지 않도록 입안에 집어넣었다.“설연주, 일어나.”여전히 눈가에 맺혀있는 눈물을 뒤로하고 설연주가 희미하게 두 눈을 떴다.무언가가 자신의 혀끝에 와 닿는 것만 같았다.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혀를 말아 그 무언가를 감쌌고 순간 온몸이 굳어진 설우현이 그녀를 밀어냈다.“정신이 들어?”등이 시트 위에 쾅 하고 부딪히며 통증이 살짝 밀려왔지만 이제 정말 정신이 들었다.“오빠.”정신을 차린 설연주는 힘없이 옆에 기대어 안전벨트를 풀기 위해 팔을 허우적거렸다.설우현은 축축이 젖어있는 자신의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옆에 있던 휴지를 뽑아 손가락을 닦았다.차에서 내린 후 설우현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지만 시간이 지나도 설연주는 그를 따라오지 않았다.뒤돌아보니 그녀는
점점 멀어져가는 설우현의 자동차를 바라보며 설연주는 또다시 천천히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갔다.그러나 몇 분 후, 멀어져 가던 자동차가 다시 돌아오고 설우현은 끝내 참지 못한 듯 설연주를 향해 외쳤다.“차에 타. 네가 병에 걸려 죽어버리면 아버지가 또 나한테 뭐라 하실 거 아냐.”곧 설연주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조수석에 올라탔다.차에 올라타고 안전벨트를 매고 싶었지만 오랜 고열로 인해 설연주는 이미 모든 힘이 빠져버리고 말았다.몇 번을 시도해도 안전벨트 하나 매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설우현은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별다른 생각 없이 바로 몸을 기울여 그녀를 대신하여 안전벨트를 잡아당겨 매어 주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설우현의 몸에서 은은한 향을 맡게 되었는데 그건 남성용 향수로 대나무의 향기와 매우 흡사했다.설연주가 고개를 돌려 설우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설우현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한 채 안전벨트를 매어준 뒤 말없이 액셀을 밟았다.이리저리 흔들리는 와중에 설연주는 갑자기 잊고 있던 옛일을 떠올렸다.설연주 역시 줄곧 외로웠던 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좋은 친구 한 명이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벙어리었고 매일 간단한 수화 몇 개만 그릴 줄 알았다.하지만 주위에는 수화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이에 설연주는 특별히 수화를 배우러 가 그와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벙어리는 매우 똑똑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같은 전공은 아니었고 컴퓨터 전공이었다.컴퓨터 전공은 당시 학교 최고의 전공으로 졸업한 뒤 연봉 1억은 시작에 불과했다.그때 설연주는 항상 벙어리에게 컴퓨터 학과가 점점 더 인기를 얻고 있다며, 나중에 졸업하면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다며 놀려주곤 했었다.그러나 벙어리는 끝내 졸업을 하지 못했다.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물에 빠진 설강민을 구해주다가 벙어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그러나 의식을 되찾은 설강민은 김현서가 그를 구해주었다가 착각하며 그녀에게 단념하게 된 것이다.물론 김현서도 이 모든 것을 자연스레 받
앞으로 성혜인에게 또 이런 일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이참에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알겠습니다, 도련님.”전화가 끊기고 설우현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그 후, 10분도 채 되지 않아 상대로부터 답장이 왔다.“도련님, 저희가 류소영 씨 휴대폰을 뒤져 발견한 문자 메시지가 있는데 아마 이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자극을 받아 성혜인 아가씨에게 손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는 경호원에게 막혔고 두 번째에 어쩔 수 없이 정승후에게 찾아간 것 같습니다.”“그 발신 번호... 누구야?”“해커로 추정됩니다. 아주 깊게 숨었더군요.”“아무리 깊게 숨어도 찾아내. 대체 어떤 놈이 배후에 숨어있는지 난 반드시 알아내야겠어.”“알겠습니다. 하루만 시간을 더 주시면 바로 그 해커를 눈앞에 가져다드리겠습니다.”이 일만 확실히 밝혀진다면... 적어도 설씨 가문 현재의 세력이 성혜인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설우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대화를 마치고 설우현은 또 침대에 누워있는 설연주를 바라보았다.오랜 시간의 고열로 인해 설연주의 이마는 이미 땀범벅이 되었고 손은 여전히 설우현의 소매를 잡고 있었다.아무리 힘을 주어 떼어놓으려고 해도 쉽사리 떨어지지 않으니 결국 설우현도 그녀를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서 깬 설연주는 옆에 앉아 눈을 감고 안정을 취하고 있는 설우현을 바라보았다.잘생긴 얼굴에 다정다감하기까지 하니 설우현은 수없이 많은 전 여자친구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설우현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연애할 때만큼은 모든 이에게 마음을 다했던 좋은 남자친구였던 모양이다.열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지만 왠지 이제 설우현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오빠.”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설우현을 부르자 언제 잠자리에 들었냐는 듯 설우현은 바로 눈을 뜨고 죽을 들여오라며 다른 사람에게 당부했다.하지만
20억?설준석과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았더라도 20억은 꽤 큰 금액이었다. 그런데 이제 설준석과의 관계마저 무너졌으니...설강민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어디서 20억을 찾으라는 겁니까?”“그건 조급해할 필요 없습니다. 방법이라면 저한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설 도련님께서 과연 받아드릴 수 있으실지 모르겠네요.”어릴 적부터 도련님 대우를 받으며 자라온 설강민은 유독 자극에 약했다. 하물며 현재 설강민은 이미지 개선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돋보일 수 있는 큰 성과가 필요했다.무려 천억이란 말이다. 설준석이 가진 프로젝트와 맞먹는 금액이었다.앞으로 이 천억이 있다면 설준석 앞에서 제멋대로 굴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설강민은 이제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래요. 만나서 자세히 얘기 나눠보죠.”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설강민은 그제야 그 방법이 대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게다가 상대는 설강민이 설씨 가문의 일원이라는 신분만으로 20억을 빌려주겠다고 약속해주었다.이렇게 직관적으로 설씨 가문의 지위를 알게 된 건 설강민도 이번이 처음이었다.‘설씨 가문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어쩐지 설연주가 그렇게까지 설씨 가문에 들어오려고 고심하더라니.’그렇게 설강민은 망설임 없이 서류 위에 손도장을 찍고 그와 함께 일을 해보고 싶다던 사람에게 물었다.“원금은 언제 돌려받을 수 있습니까?”“늦어도 일주일입니다. 일주일만 지나면 몇백억을 돌려받을 수 있죠. 하지만 중간에 도련님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도련님께서 직접 세관에 전화해 설씨 가문의 신분을 봐서라도 그 물건들을 통과시켜 달라고 부탁하셔야 합니다.”그냥 전화일 뿐인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정말 이거면 돼? 이렇게 쉽게 돈을 벌 수 있다고?’이렇게 된 이상 뭐하러 아버지 앞에서 하인 노릇이나 하고 있단 말인가. 이 돈이 있다면 앞으로 충분히 혼자 잘 살아갈 수 있다.설강민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당장이라도 일주일 뒤로 타임리프라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주일만 지나면 그의 실력을
설연주는 차에 타자마자 설우현이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다시 조사해 봐. 이 사람 설씨 가문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갑자기 왜 혜인이를 건드렸지?”설연주는 바짝 긴장했다. 설우현의 능력이라면 몇 시간 내에 진실을 밝혀낼 게 분명했다.오늘 밤에는 더 이상 설우현의 집에 갈 수 없을 것 같았다.“오빠, 저 그냥 제 집으로 데려다주세요.”설우현은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지만 별말 없이 방향을 돌렸다.설연주는 차에서 내리면서 뭔가 말하려고 했으나 설우현은 그런 여유를 주지 않고 바로 차를 몰고 떠났다.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쓴웃음을 지었다.그러나 이런 기분도 잠깐 곧 그녀의 얼굴에 흥분이 떠올랐다. 드디어 정승후가 끝장났다.그녀에게 악몽을 안겨주었던 남자가 마침내 그녀 손에 의해 추락한 것이다.다음은 설강민 차례였다.설연주는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들어갔고 곧 전화가 걸려 왔다.“김현서가 두팔을 찾아갔어. 너도 알다시피 두팔이 여자를 다루는 방식이 별로 좋지 않잖아. 아마 김현서는 편히 지내지는 못할 거야.”설연주는 다소 놀랐다. 김현서가 정승후를 떠나 바로 두팔을 찾아갈 정도로 수완이 좋다니.그녀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예전에 두팔 곁에 있었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섬뜩함을 느꼈다.김현서가 두팔의 손에 들어갔으니 살아나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김현서의 운명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두팔이 그녀를 편히 두지는 않을 테니.설연주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전에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이 떠오르자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오늘 밤 설준석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설연주는 도우미를 통해 설강민이 돌아왔는지 확인해 보았다.설강민이 돌아온다면 오늘 밤 제대로 잠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너무 피곤해서 빨리 자고 싶었다.“아가씨, 도련님은 아직 집에 돌아온다고 연락이 없어요. 게다가 도련님께서 집을 나가신다고 하셨잖아요.”다행히 설강민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설강민이 집을 떠난 것은 스스로 내
성혜인의 얼굴은 냉랭했다.“보아하니 이제 기억난 모양이군요. 저기 있는 사람들이 당신 부하들이죠? 어제 쇼핑몰에서 내 아이를 납치하려던 게 바로 그들이었어요.”정승후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는 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성혜인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총구가 그의 이마를 겨누자 그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비록 그가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더라도 지금처럼 속수무책인 상황은 처음이었다. 눈앞의 여자는 그의 아지트를 하룻밤 만에 초토화시킬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가졌고 그를 죽이는 일은 모기 잡듯 쉬운 일이었다.정승후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바로 그때 누군가 성혜인의 손에서 총을 빼앗았다.반승제가 그녀의 손을 제지하며 말했다.“아이가 보고 있어. 좋은 본보기를 보여야지. 설씨 가문에서 처리할 거야.”‘설씨 가문?’정승후는 그 말에 마치 날벼락을 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설마 플로리아의 설씨 가문일까?’생각해 보니 설씨 가문 외에 누가 이처럼 호화로운 집에 살며 단 하루 만에 그를 무너뜨릴 수 있단 말인가?입안 가득 피비린내가 맴돌았고 그는 깊은 후회를 느꼈다.곧 그는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나갔다. 그러다 정원 쪽을 지나가던 중 쿠키를 먹고 있는 설연주를 보았다.설연주는 그를 보고 약간 눈썹을 치켜세우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정승후는 속이 서늘해지며 이 모든 것이 설연주의 계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설연주는 설씨 가문에서 별다른 영향력이 없는 그저 주변을 맴도는 인물일 뿐이었다.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씨 가문 사람이 입을 열었다.“정승후, 다음에 누군가를 건드리기 전에 상대의 정체부터 조사하는 게 좋겠어. 류소영이 멍청하다고 너까지 멍청해질 필요는 없잖아.”정승후는 얼굴이 붉어지며 그 말을 듣고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는 기세를 보였다.설연주는 그에게 시선을 거둔 채 조용히 쿠키를 먹으며 그를 무시했다.“이 X년아! 설연주, 빌어먹을 년!”멀리서도 그의 욕설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곳은 방음이 잘 되어
그러나 설다연은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듯했다.성혜인은 한숨을 내쉬며 두 오빠의 일에는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반승제가 도착하자 그녀는 반진율을 안고 차에 올랐다.차창 너머로 설다연이 여전히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다연아, 같이 들어올래?”설다연은 눈을 깜빡이며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오빠가 데리러 올 거야.”성혜인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승제에게 차를 출발하라고 했다.그러나 차가 조금 달리자마자 성혜인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이번에 설다연이 아니었으면 반진율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플로리아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 일은 누가 벌인 짓이든 반드시 설씨 가문에서 밝혀내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승제 씨, 오늘 일으킨 사람의 배후를 조사해 주세요.”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사람들을 시켜 조사에 들어갔다.한편, 한쪽 구석에서 류소영은 자신의 사람들이 성혜인을 제압하고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초조해진 그녀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하나의 여자를 상대로 실패할 리가 없었다.류소영은 급히 쇼핑몰로 향했으나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경찰들이 그녀의 부하들을 들것에 실어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 모두 심각한 상처를 입은 듯 끙끙 앓고 있었다.류소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성혜인만 상대하면 될 일 아닌가?’당황한 그녀는 김현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김현서는 그때 정승후와 함께 침대에 있었고 둘은 설강민에 대해 험담을 하며 묘한 분위기 속에 있었다. 김현서는 류소영의 전화를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끊어버렸다.류소영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다.할 수 없이 그녀는 일단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한편, 성혜인은 반승제가 찾아낸 자료를 통해 그들의 대장이 정승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처음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