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미는 그녀의 말에 기가 막혀 쓰러질 뻔했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던 윤선미는 반승제에게로 시선을 돌려 도움을 구했다. 그는 여유롭게 앉아 엄지로 카드를 쓸었다. 마침 그가 베팅할 차례가 되어 그는 칩을 몇 개 앞으로 던졌다. 40억 베팅. 순간 사람들의 시선을 테이블로 다시 집중시켰다. 어쩌다 보니 윤선미를 도와준 셈이기도 했다. 윤선미는 한숨 돌렸지만 마음 한편은 아직 서늘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더 이상 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윤선미는 그제야 성혜인을 노려보았다. 성혜인은 눈썹을 둥글게 휘며 웃어 보였다. 손끝은 이미 두 카드에 놓고 다시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반승제가 40억을 베팅한 후, 게임의 룰에 따라 그 후의 사람들도 40억보다 적지 않은 금액을 베팅해야 했다. 도박판에 걸린 돈이 이젠 400억 가까이 되었다. 딜러는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번 라운드가 다 돌고 드디어 3장의 공유 카드를 공개했다. 하트 에이스, 하트 10, 그리고 다이아몬드 5. 성혜인 오른쪽의 사람은 이미 포기했고 이젠 그녀의 차례가 왔다. 그녀는 등을 의자에 붙이고 시선을 고정한 채 80억 원어치의 칩을 앞으로 밀었다. 족히 두 배였다. “80억.”처음에는 2억씩만 베팅하던 사람이 이제는 80억이나 베팅하다니. 성혜인은 반승제마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반승제는 곧 시선을 거두어 갔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손에 어떤 패가 있는지 궁금해했다. 이승주는 두 장의 5 카드를 들고 있었다. 공유 카드까지 더하면 트리플이었다. 트리플은 그 어떤 투페어보다도 크다. 이승주는 성혜인을 보고 비웃었다. “카드 볼 줄은 알아요?”“승주 도련님 생각에는요?”성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교활하게 말끝을 올렸다. “전 다른 사람한테 돈을 그저 줄 생각이 없어요. 여러분들한테는 껌값이겠지만 저한테는 평생을 일해야 하는 금액이거든요.”80억이니까. 이승주는 눈으로는 웃
이승주는 다른 말은 듣지 못한 채 로얄스트레이트 플래쉬만 들었다. 이 조합을 만들 기회는 몇만분의 1이었다. 아마추어에게는, 전생에 덕을 쌓지 않는 이상 얻기 힘든 기회의 조합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신중하던 이 여자가 왜 갑자기 1600억씩이나 베팅하는 것일까. 아마도 성혜인에게는 모두를 이길 수 있는 카드가 있을 것이었다. 조금 전에 200억을 베팅할 때도 이승주는 머뭇거렸었다. 지금은 주변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에 더욱 심란해져서 미간을 팍 찌푸린 이승주는 성혜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 여자는 아주 담담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승주 도련님, 마지막 베팅인데 안 하실 거예요?”그 말인즉슨, 그가 포기하면 이 돈들은 모두 성혜인의 것이 된다. 그냥 사실을 서술한 것이지만 이승주의 심정은 복잡해져만 갔다. 이게 모두 성혜인의 도발 같았다. 1600억을 잃는 게 두려운 게 아니다. 1600억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도 이 도박판에 돈을 뿌리는 것이 멍청하다고 느껴지는 것뿐이다. 그는 손목을 돌리다가 카드를 던지려고 했다. 성혜인은 그를 보다가 피식 웃으며 얘기했다. “전 로얄스트레이트 플러쉬가 아니에요. 전 분명히 말씀드렸으니 절 원망하지 마세요, 승주 도련님.”“이런 싸구려 도발에 내가 넘어갈 줄 알아?”불만이 가득한 이승주가 재빨리 카드를 던져버렸다. 딜러가 그의 카드를 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두 장의 5, 공유 카드까지 더하면 트리플 5이었다. 이승주의 카드를 오픈한 딜러는 곧이어 성혜인의 카드를 건네받았다. 미소 짓고 있던 얼굴이 그 카드를 확인하자마자 살짝 굳어버렸다. 주변의 사람들은 더욱 기대되었다. 딜러는 자기 눈을 비비며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확인했다. “무슨 카드인데? 로얄스트레이트 플러쉬가 아니면 테이블 먹는 거 라이브 한다.”다들 성혜인의 카드가 로얄스트레이트 플러쉬라고 굳게 믿으며 얼른 확인하려고 했다, 반승제 한 사람만 빼고. 반승제는 금색과 푸른색으
“저기요?”성혜인이 의문스럽다는 듯 다시 한번 불렀다. 생각에 빠져있던 온시환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빌려 간 만큼만 돌려주시면 됩니다.”“아니에요, 받으세요. 저는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거든요.”도박장의 아마추어가 하룻밤에 4000억을 이겼다. 게다가 여자라니. 그녀가 이 돈을 갖고 이곳을 멀쩡히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그래서 최고의 방법은 이 돈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돈을 빌릴 때 했던 약속이 최고의 이유가 되었다. 온시환은 되려 심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2000억을 두고 갖지 않겠다니, 왜 저러는 거지?아무리 반승제의 디자이너라고 해도 얻는 보상은 얼마 안 될 것이었다. 그녀가 한평생 일해도 2000억이라는 금액은 손에 넣기 힘들었다. 설마... 반승제 앞에서 잘 보이려고?온시환은 더 망설이지 않고 받았다. 그리고 반승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얘기했다. “기혼자는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지?”기혼자라는 단어에 임팩트를 주며 성혜인을 흘깃 쳐다보았다. 아마도 들었을 것이다. 반승제는 가만히 있다가 이 말을 듣고 의문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가정은 그냥 장식품이라는 것은, 온시환이 더욱 잘 알 텐데. 온시환은 생각을 정리했다. 성혜인이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럼 반승제가 목적이다. 바로 반승제를 좋아한다는 것. “승제야, 아직도 모르겠어? 혜인 씨, 널 좋아하는 거잖아.”반승제 수중의 칩이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 적잖이 놀란 그의 속눈썹마저 파르르 떨렸다. “어디를 봐서?”온시환은 눈짓으로 칩을 가리키며 말했다. “2000억.”그들 눈에 2000억은 껌값이겠지만 일반인들한테는 평생도 갖지 못할 금액이었다. 하지만 성혜인은 별로 감흥도 없다는 듯 온시환에게 떠넘겼다. 반승제의 호감을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온시환은 이것 외의 이유를 떠올리지 못했다. “결혼했대, 남편이랑 사이 엄청 좋다던데.”담담한 어투였지만 옆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반승제는 고개를 돌
성혜인이 자리로 돌아가자 옆의 이승주가 또 작정한 듯 시비를 걸기 위해 입을 열었다. “2000억으로 반 대표 앞에서 알짱거리면 눈길 한 번이라도 더 줄줄 알았어요?”성혜인은 이제 이 사람한테 대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지금 이승주는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된 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으니 그의 시비를 받아줄수록 더욱 난리를 칠 것이다. 이승주는 성혜인이 자기를 무시하자 배알이 꼴리는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여자 때문에 이토록 화나는 것 같았다. 반승제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윤선미도 꽉 주먹을 쥐었다. 성혜인이 도박에서 망신당하리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큰 성공을 거두어들이니 주변의 재벌 2세들도 다 그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다음 기회에 그녀와 사업을 하고 싶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빌어먹을, 왜 저 빌어먹을 년이 운이 이토록 좋은 것인지. 윤선미는 턱이 저릴 정도로 이를 꽉 깨물고 분노에 차서 성혜인을 노려보았다. 성혜인은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원래의 신중하게 베팅하는 방법으로 게임을 계속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만 이미 한번 크게 이겨버린 상태여서 이곳을 벗어날 별다른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지 못한 이유도 있거니와 옆에서 호시탐탐 노려보는 이승주 때문도 있었다. 반승제가 몸을 일으키자 성혜인은 속으로 한시름 놓았다. 성혜인은 남은 칩 몇 개를 이승주에게로 밀어주었다. “승주 도련님, 오늘 여기에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놀았어요.”이건 가장 일반적인 하얀색의 칩이었다, 하나에 200만 정도 하는, 가치가 낮아서 얼마 없는 칩이기도 했다. 이승주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손끝으로 테이블만 두드렸다. 원래 화를 내고 싶었지만 성혜인이 반승제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반승제가 있기에 이승주는 무조건 참아야 했다. 이렇게 참다가는 화병이 날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윤선미도 마찬가지였다. 반승제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저번에 실수한 것이 떠올라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반
‘이 여자가 정말 나를 좋아한다.’반승제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랐다. 전에 그에게 마음을 전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반승제는 모조리 거절하곤 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달랐다. 그들은 이미 관계를 가진 사이였다. 물론 성혜인은 처음이 아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살과 살을 맞대는, 그런 스킨쉽이 있었으면 더 이상 상대를 보통 사람처럼 대하기 어려워진다. 그와 관계를 가졌던 여자가 지금 그를 좋아한다니. 차갑게 거절한다면 매정하게 보일것이다. 반승제는 망설이다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결혼한 것은 알고 있지?”성혜인은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당연히 알고 있던 것이지만, 지금은 디자인에 관한 얘기를 하던 것이 아닌가? 반승제는 성혜인이 말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머리를 굴렸다. “사실 나도... 부인과 사이가 엄청 좋아.”아내라는 두 글자가 그의 입안에서 한참을 맴돌다가 나오질 못했다. 사이가 엄청 좋다는 말도 그의 입에서 나오다니 믿기지 않았다. 성혜인은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마치 진짜냐고 묻는 듯했다. 부인인 그녀가 바로 반승제의 눈앞에 떡하니 서 있는데. 성혜인은 자신이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심지어 지금의 반승제가 말한테 머리를 얻어 차이지 않는 이상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반승제는 진지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내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너는 알 거라고 믿는다.”뭘 알 거라는 거지. 성혜인은 오늘 그와 했던 얘기들을 생각해 보며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반승제는 성혜인의 고용주이니 고용주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반승제는 성혜인이 고뇌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가 알아들었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뭐라 말하지 않았다. 성혜인은 서서 그가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냥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한 것뿐인데 이상한 말들만 들었다. 주기 싫으면 말할 것이지. 그냥 라인으로 보내
“어찌 됐든 이모에게 먼저 사과하렴. 밤에 혜원이를 한참 찾았단다.”그의 말이 성혜인의 심장을 사정없이 후벼파는 것 같았다. “혜인아. 너도 혜원이 상태가 어떤지 알다시피, 의사가 조심하지 않으면 10년밖에 못 산다고 하지 않았니. 널 돕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성휘는 소윤을 진정시키면서 성혜인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성혜인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듯했다.당황한 성휘의 얼굴에 속상함이 묻어났다.“이번엔 이모가 너무 감정적이었다. 얼굴이 부었는데, 약 가져다주마.”성혜인은 병 주고 약 주는 이 상황에 질려버렸다.“됐어요.”성혜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며 얼굴을 만지던 손을 내려놓았다.“가볼게요. 혜원이 일어나면 잘 챙겨주세요.”몸을 돌리는 순간, 소윤의 냉소가 고막을 찔렀다.“혜원이가 응급실에서 나오기도 전에 가버린다니,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혜원이가 못 나왔으면 좋겠지? 그래야 성씨 집안의 여식은 너 하나뿐일 테니까. 아니야?”“소윤!”도가 지나친 발언에 성휘가 결국 언성을 높였다.“화가 나서 그런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반면, 위로 휘어 올라간 성혜인의 입꼬리에서 조소가 느껴졌다.“제가 혜원이의 쾌유를 빌어도 성씨 집안에서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겠죠. 이번 일은 제가 참겠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에요.”말을 마친 성혜인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소윤은 떨리는 손으로 성혜인이 서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저 애 태도 좀 보세요. 제 아비는 눈에 뵈지도 않네!”성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반 씨 집안에서 우리에게 2차 파이낸싱 진행하고 싶다는 소식을 들었어. 이게 다 혜인이 덕이야. 확실히 막무가내일 때가 있기는 해도, 어른이라는 사람이 뺨을 때렸으면 안 되지.”하지만 더 세게 때리지 못한 것이 아쉬운 소윤은 입을 삐죽였다.성혜인은 정신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얼굴보다는 마음이 욱신거렸다
의사에게 둘러싸인 성혜인은 반희월의 말에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막 입을 열려는 그때, 의사가 다친 얼굴을 실수로 건드리면서 올라온 통증에 ‘씁’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그 소리에 반희월은 더 화가 났다.“승제야. 10분 안에 그 자식 집에 데려다 놔라. 오늘 아주 혼을 내놔야겠어!”반승제는 호텔 통유리창 앞에 섰다.‘임경헌이 페니를 때렸다고? 그럴 리가.’“고모. 무슨 오해가 있던 게 아닐까요?”“손자국이 선명할 정도로 부었는데, 오해는 무슨 오해야! 경헌이에게 너무 실망했어.”같은 시각,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술집에 있던 임경헌은 왠지 모르게 귀가 간지러웠다.‘또 뺨을 맞아?’반승제는 차분했다.드디어 말할 기회가 생긴 성혜인이 급히 입을 열었다.“아주머니, 그런 거 아니에요. 경헌 씨처럼 좋은 사람이 저를 때릴 리가요.”반희월은 순간 멈칫했다.‘아니라고?’“경헌이한테 벌이라도 줄까 봐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니?”“정말 아니에요.”“그럼 누가 때린 거야?”“... 가족이 그랬어요.” 반희월의 눈빛에서 동정이 느껴졌다. 임경헌이 한 것이 아니라는 말에 걱정 역시 덜었다. “경헌이 짓이었으면 용서 안 했을 텐데, 아니라니 됐다. 내 전화번호 저장해 두고 경헌이가 못되게 굴면 언제든지 연락하렴.”성혜인은 망설여졌다. 그녀와 임경헌의 관계는 가짜지만, 반희월의 권유를 거절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반희월은 여전히 전화를 끊지 않고 있었다.“승제야. 그럴 필요 없겠다. 끊으마.”성혜인은 반승제가 그녀와 임경헌의 사이를 실토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바로 눈앞에 반희월이 있는 상황이라 더욱 난감했다.하지만 다행히 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한 성혜인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래.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거든 나에게 전화하거나 경헌이한테 이야기하렴. 여자친구인 너를 당연히 도와야지.”성혜인은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거짓말이 눈덩이처
승산이 없자, 진유나는 강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느꼈다.하지만 계속 말씨름해 봤자 얼굴 붉힐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고 옆에 있던 남자를 쳐다보며 말을 돌렸다.“네이처 빌리지 건을 누가 따냈는지 궁금하댔지? 바로 얘야. 근데 그리 떳떳한 방법은 아니었을걸.”조금 전까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이한은 흥미롭다는 듯 날카롭게 찢어진 눈을 반짝였다.“이렇게 아름다운 여성분이셨다니.”그는 먼저 악수를 청했다. 가벼운 웃음을 머금은 잘생긴 얼굴에서 왠지 모를 송연함이 느껴졌다.“안녕하세요. 신이한 입니다. 제 이름 들어본 적 있을 거예요.”디자이너 업계 소식에 대해 말이 오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성혜인은 사람들과의 소통이 적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디자이너들의 유명 작품을 보러 다니며 영감을 얻고는 했다.신이한. 업계 내에서 꽤 들어본 이름이다.그녀는 신이한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빼려는 순간, 신이한은 그녀와 맞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이내 손등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서야 손을 놔주었다.“페니 씨. 아름답기만 하신 게 아니라 실력도 남다르시군요. 따라다니는 남자가 많겠어요.”속수무책으로 당한 성혜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진유나는 신이한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마음에 들었다는 거지.훤칠한 키에 고급 외제차까지 갖추고 있는 재력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다.하지만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신이한은 자신에게 넘어온 여자들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온갖 이유를 대며 차버린다.진유나의 눈빛에서 악랄함이 느껴졌다. 신이한이 성혜인도 갖고 놀다 뻥 차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둘 다 디자이너니까 할 말도 많겠다. 얘기 좀 나눠. 나 먼저 들어갈게.”신이한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애인 있어요?”성혜인은 입술을 삐죽였다.“없어요. 혼자가 더 익숙해요.”명백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신이한은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혼자는 심심하잖아요. 같이 예술관 좀 둘러보는 거 어때요?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
온시환은 천천히 손을 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래, 알았어.”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온시환의 눈가는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러나 공지민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온시환이 또 심심풀이로 자신을 괴롭히려 한다고 생각했다.차인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온시환 같은 남자가 진심일 리 없었다. 설령 진심이라 해도, 공지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는 식당 밖에 홀로 서 있었다.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공지민이 택시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잠시 후, 그는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야, 오늘 한 잔 하자.”반승제는 흔쾌히 응했다.이상하게 오늘 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는 서주혁까지 불렀다.두 사람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여러 병의 술을 비운 상태였다.“시환아, 너 대체 왜 이래?”온시환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했다.“뭐 하는 거야? 얼른 앉아.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못 가!”혼자서 술을 퍼마신 온시환을 보며 반승제는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너 혹시 무슨 고민 있냐?”“고민은 무슨...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하하.”서주혁은 말없이 나무토막처럼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그는 분위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반승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들을 모두 치우고 온시환 앞에 과일주스를 내밀었다.“솔직하게 얘기해. 무슨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온시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반승제는 그가 웃는 줄 알았다. 웃을 때도 어깨가 들썩이긴 마찬가지니까.“뭐야, 웃긴 얘기라도 있어?”그는 온시환의 몸을 돌려보았고 그제야 그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야, 주혁아! 이거 봐. 시환이가 울고 있어!”온시환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꺼져!”반승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동차가 레스토랑 앞에 멈춰서자 공지민이 먼저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온시환도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자리를 예약 해둔 터라 직원이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공지민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푸른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왜, 내가 이제 그 점이 없으니까 나를 쳐다볼 생각도 없어진 거야?”공지민은 그가 귀찮을 뿐이었다. 이미 진실을 알았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지, 굳이 이런 말로 둘 다 어색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그러나 온시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네가 다니던 고등학교 가서 구은우 사진 봤어. 솔직히, 별로 잘생긴 것도 아니던데.”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온시환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오히려 더 그녀를 찌르는 말을 꺼냈다.“그렇게 좋으면 왜 안 찾아가? 아니면 이미 결혼이라도 한 거야? 네가 이러거 있는 거 보면, 그 자식도 너를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지? 참 안 됐네.”그때 마침 직원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말없이 잔을 들어 올린 공지민은 그대로 커피를 온시환에게 끼얹었다.온시환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감정적인 반응이 반갑기까지 했다.마치 나무토막처럼 감정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공지민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정신이 좀 들었어?”온시환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있는 냅킨을 집어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어쩌지? 평생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공지민, 난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왜 날 대체품으로 썼는지. 진짜 그 점 하나 때문이야?”그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을 터였다.그래서 그는 더더욱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심지어 그
온시환은 공지민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왜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그에게 와서 상처를 남겼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더 한심한 건 자신이었다. 대체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몰래 보러 온 자신이 더 우스웠다.온시환의 차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주차돼 있었다. 연예계에서 그의 영향력 덕분에 차를 촬영장 근처에 세워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그는 창문 너머로 공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문 장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아픈 손목을 문지르는 모습, 옆에 있던 낯선 여성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별다른 장면도 아닌데 온시환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공지민은 오후 촬영을 마치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보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공지민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쪽으로는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으로는 문보영이 여전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둘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문보영은 공지민이 그날 밤의 일을 봤다는 걸 몰랐다. 여전히 밝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했다.“지민아, 요즘 다시 촬영 시작했어? 혹시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내가 대표님께 한 번 말씀드릴 수 있어. 사실 대표님도 꽤 후회되시는 것 같더라. 요즘 네 인지도도 높잖아.”“아니, 괜찮아.”“그런데 너랑 시환 씨... 지민아, 너희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파티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잘 될 줄 알았는데, 요즘은 연락도 안 한다고 하던데.”예전 같았으면 공지민은 문보영의 말을 진심 어린 걱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문보영이 정말 궁금한 건 온시환이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여부라는 걸.“헤어졌어. 이번에는 정말 끝이야.”문보영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넌 괜찮아? 너 시환 씨 정말 좋아했잖아. 혹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너를 상처 준 거야?
당연히 취했다. 취하지 않았으면 온시환의 성격상 추지성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추지성은 온시환에게 다시 술병을 열어주며 말했다.“아직 덜 취한 것 같으니 더 마셔.”온시환은 희미하게 뜬 눈으로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지성아, 나 지민이 고등학교에 가봤어. 그리고 지민이 첫사랑을 알게 됐지. 꽤 괜찮게 생겼더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뭔지 알아?”“뭔데?”“내 코끝 여기.”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여전히 흐릿한 눈빛이었다.“여기에 구은우랑 똑같은 점이 있었잖아. 공지민은 아마 그 점 때문에 나에게 잘해줬던 거야. 너도 우습지 않냐?”그는 입으로 우습다고 말했지만 눈빛에는 슬픔이 넘칠 듯 담겨 있었다.추지성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누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가지고 놀고 싶을 뿐이었고 막상 손에 넣으면 금세 흥미를 잃었다.“못 가지는 게 가장 좋은 거지. 손에 넣으면 금방 싫증 나는 법이거든.”“지성아, 나 여기가... 정말 아프다.”추지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야, 네가 진짜 내 친구 아니었으면 벌써 널 집어 수영장에 던져 넣어버렸을 거다. 여자를 두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술 더 마셔야겠어.”“안 마셔. 마시면 더 괴로워질 뿐이야.”온시환은 그 말을 끝으로 옆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추지성은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려다 그의 축축한 속눈썹을 보고 멈칫했다.‘설마 또 울었어? 요즘 완전 여자 같아. 조금만 힘들어도 시도 때도 없이 우네.’온시환은 원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수년 전 큰 수술을 받은 후, 의사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로 그는 늘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그가 쓰는 드라마 대본들도 대부분 막장극이었고 그는 막장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막장이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돌아와 부메랑처럼 자신을 찌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밤중에 온시환은 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