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미는 그녀의 말에 기가 막혀 쓰러질 뻔했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던 윤선미는 반승제에게로 시선을 돌려 도움을 구했다. 그는 여유롭게 앉아 엄지로 카드를 쓸었다. 마침 그가 베팅할 차례가 되어 그는 칩을 몇 개 앞으로 던졌다. 40억 베팅. 순간 사람들의 시선을 테이블로 다시 집중시켰다. 어쩌다 보니 윤선미를 도와준 셈이기도 했다. 윤선미는 한숨 돌렸지만 마음 한편은 아직 서늘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더 이상 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윤선미는 그제야 성혜인을 노려보았다. 성혜인은 눈썹을 둥글게 휘며 웃어 보였다. 손끝은 이미 두 카드에 놓고 다시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반승제가 40억을 베팅한 후, 게임의 룰에 따라 그 후의 사람들도 40억보다 적지 않은 금액을 베팅해야 했다. 도박판에 걸린 돈이 이젠 400억 가까이 되었다. 딜러는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번 라운드가 다 돌고 드디어 3장의 공유 카드를 공개했다. 하트 에이스, 하트 10, 그리고 다이아몬드 5. 성혜인 오른쪽의 사람은 이미 포기했고 이젠 그녀의 차례가 왔다. 그녀는 등을 의자에 붙이고 시선을 고정한 채 80억 원어치의 칩을 앞으로 밀었다. 족히 두 배였다. “80억.”처음에는 2억씩만 베팅하던 사람이 이제는 80억이나 베팅하다니. 성혜인은 반승제마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반승제는 곧 시선을 거두어 갔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손에 어떤 패가 있는지 궁금해했다. 이승주는 두 장의 5 카드를 들고 있었다. 공유 카드까지 더하면 트리플이었다. 트리플은 그 어떤 투페어보다도 크다. 이승주는 성혜인을 보고 비웃었다. “카드 볼 줄은 알아요?”“승주 도련님 생각에는요?”성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교활하게 말끝을 올렸다. “전 다른 사람한테 돈을 그저 줄 생각이 없어요. 여러분들한테는 껌값이겠지만 저한테는 평생을 일해야 하는 금액이거든요.”80억이니까. 이승주는 눈으로는 웃
이승주는 다른 말은 듣지 못한 채 로얄스트레이트 플래쉬만 들었다. 이 조합을 만들 기회는 몇만분의 1이었다. 아마추어에게는, 전생에 덕을 쌓지 않는 이상 얻기 힘든 기회의 조합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신중하던 이 여자가 왜 갑자기 1600억씩이나 베팅하는 것일까. 아마도 성혜인에게는 모두를 이길 수 있는 카드가 있을 것이었다. 조금 전에 200억을 베팅할 때도 이승주는 머뭇거렸었다. 지금은 주변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에 더욱 심란해져서 미간을 팍 찌푸린 이승주는 성혜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 여자는 아주 담담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승주 도련님, 마지막 베팅인데 안 하실 거예요?”그 말인즉슨, 그가 포기하면 이 돈들은 모두 성혜인의 것이 된다. 그냥 사실을 서술한 것이지만 이승주의 심정은 복잡해져만 갔다. 이게 모두 성혜인의 도발 같았다. 1600억을 잃는 게 두려운 게 아니다. 1600억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도 이 도박판에 돈을 뿌리는 것이 멍청하다고 느껴지는 것뿐이다. 그는 손목을 돌리다가 카드를 던지려고 했다. 성혜인은 그를 보다가 피식 웃으며 얘기했다. “전 로얄스트레이트 플러쉬가 아니에요. 전 분명히 말씀드렸으니 절 원망하지 마세요, 승주 도련님.”“이런 싸구려 도발에 내가 넘어갈 줄 알아?”불만이 가득한 이승주가 재빨리 카드를 던져버렸다. 딜러가 그의 카드를 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두 장의 5, 공유 카드까지 더하면 트리플 5이었다. 이승주의 카드를 오픈한 딜러는 곧이어 성혜인의 카드를 건네받았다. 미소 짓고 있던 얼굴이 그 카드를 확인하자마자 살짝 굳어버렸다. 주변의 사람들은 더욱 기대되었다. 딜러는 자기 눈을 비비며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확인했다. “무슨 카드인데? 로얄스트레이트 플러쉬가 아니면 테이블 먹는 거 라이브 한다.”다들 성혜인의 카드가 로얄스트레이트 플러쉬라고 굳게 믿으며 얼른 확인하려고 했다, 반승제 한 사람만 빼고. 반승제는 금색과 푸른색으
“저기요?”성혜인이 의문스럽다는 듯 다시 한번 불렀다. 생각에 빠져있던 온시환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빌려 간 만큼만 돌려주시면 됩니다.”“아니에요, 받으세요. 저는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거든요.”도박장의 아마추어가 하룻밤에 4000억을 이겼다. 게다가 여자라니. 그녀가 이 돈을 갖고 이곳을 멀쩡히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그래서 최고의 방법은 이 돈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돈을 빌릴 때 했던 약속이 최고의 이유가 되었다. 온시환은 되려 심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2000억을 두고 갖지 않겠다니, 왜 저러는 거지?아무리 반승제의 디자이너라고 해도 얻는 보상은 얼마 안 될 것이었다. 그녀가 한평생 일해도 2000억이라는 금액은 손에 넣기 힘들었다. 설마... 반승제 앞에서 잘 보이려고?온시환은 더 망설이지 않고 받았다. 그리고 반승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얘기했다. “기혼자는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지?”기혼자라는 단어에 임팩트를 주며 성혜인을 흘깃 쳐다보았다. 아마도 들었을 것이다. 반승제는 가만히 있다가 이 말을 듣고 의문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가정은 그냥 장식품이라는 것은, 온시환이 더욱 잘 알 텐데. 온시환은 생각을 정리했다. 성혜인이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럼 반승제가 목적이다. 바로 반승제를 좋아한다는 것. “승제야, 아직도 모르겠어? 혜인 씨, 널 좋아하는 거잖아.”반승제 수중의 칩이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 적잖이 놀란 그의 속눈썹마저 파르르 떨렸다. “어디를 봐서?”온시환은 눈짓으로 칩을 가리키며 말했다. “2000억.”그들 눈에 2000억은 껌값이겠지만 일반인들한테는 평생도 갖지 못할 금액이었다. 하지만 성혜인은 별로 감흥도 없다는 듯 온시환에게 떠넘겼다. 반승제의 호감을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온시환은 이것 외의 이유를 떠올리지 못했다. “결혼했대, 남편이랑 사이 엄청 좋다던데.”담담한 어투였지만 옆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반승제는 고개를 돌
성혜인이 자리로 돌아가자 옆의 이승주가 또 작정한 듯 시비를 걸기 위해 입을 열었다. “2000억으로 반 대표 앞에서 알짱거리면 눈길 한 번이라도 더 줄줄 알았어요?”성혜인은 이제 이 사람한테 대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지금 이승주는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된 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으니 그의 시비를 받아줄수록 더욱 난리를 칠 것이다. 이승주는 성혜인이 자기를 무시하자 배알이 꼴리는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여자 때문에 이토록 화나는 것 같았다. 반승제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윤선미도 꽉 주먹을 쥐었다. 성혜인이 도박에서 망신당하리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큰 성공을 거두어들이니 주변의 재벌 2세들도 다 그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다음 기회에 그녀와 사업을 하고 싶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빌어먹을, 왜 저 빌어먹을 년이 운이 이토록 좋은 것인지. 윤선미는 턱이 저릴 정도로 이를 꽉 깨물고 분노에 차서 성혜인을 노려보았다. 성혜인은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원래의 신중하게 베팅하는 방법으로 게임을 계속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만 이미 한번 크게 이겨버린 상태여서 이곳을 벗어날 별다른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지 못한 이유도 있거니와 옆에서 호시탐탐 노려보는 이승주 때문도 있었다. 반승제가 몸을 일으키자 성혜인은 속으로 한시름 놓았다. 성혜인은 남은 칩 몇 개를 이승주에게로 밀어주었다. “승주 도련님, 오늘 여기에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놀았어요.”이건 가장 일반적인 하얀색의 칩이었다, 하나에 200만 정도 하는, 가치가 낮아서 얼마 없는 칩이기도 했다. 이승주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손끝으로 테이블만 두드렸다. 원래 화를 내고 싶었지만 성혜인이 반승제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반승제가 있기에 이승주는 무조건 참아야 했다. 이렇게 참다가는 화병이 날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윤선미도 마찬가지였다. 반승제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저번에 실수한 것이 떠올라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반
‘이 여자가 정말 나를 좋아한다.’반승제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랐다. 전에 그에게 마음을 전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반승제는 모조리 거절하곤 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달랐다. 그들은 이미 관계를 가진 사이였다. 물론 성혜인은 처음이 아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살과 살을 맞대는, 그런 스킨쉽이 있었으면 더 이상 상대를 보통 사람처럼 대하기 어려워진다. 그와 관계를 가졌던 여자가 지금 그를 좋아한다니. 차갑게 거절한다면 매정하게 보일것이다. 반승제는 망설이다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결혼한 것은 알고 있지?”성혜인은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당연히 알고 있던 것이지만, 지금은 디자인에 관한 얘기를 하던 것이 아닌가? 반승제는 성혜인이 말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머리를 굴렸다. “사실 나도... 부인과 사이가 엄청 좋아.”아내라는 두 글자가 그의 입안에서 한참을 맴돌다가 나오질 못했다. 사이가 엄청 좋다는 말도 그의 입에서 나오다니 믿기지 않았다. 성혜인은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마치 진짜냐고 묻는 듯했다. 부인인 그녀가 바로 반승제의 눈앞에 떡하니 서 있는데. 성혜인은 자신이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심지어 지금의 반승제가 말한테 머리를 얻어 차이지 않는 이상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반승제는 진지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내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너는 알 거라고 믿는다.”뭘 알 거라는 거지. 성혜인은 오늘 그와 했던 얘기들을 생각해 보며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반승제는 성혜인의 고용주이니 고용주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반승제는 성혜인이 고뇌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가 알아들었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뭐라 말하지 않았다. 성혜인은 서서 그가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냥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한 것뿐인데 이상한 말들만 들었다. 주기 싫으면 말할 것이지. 그냥 라인으로 보내
“어찌 됐든 이모에게 먼저 사과하렴. 밤에 혜원이를 한참 찾았단다.”그의 말이 성혜인의 심장을 사정없이 후벼파는 것 같았다. “혜인아. 너도 혜원이 상태가 어떤지 알다시피, 의사가 조심하지 않으면 10년밖에 못 산다고 하지 않았니. 널 돕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성휘는 소윤을 진정시키면서 성혜인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성혜인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듯했다.당황한 성휘의 얼굴에 속상함이 묻어났다.“이번엔 이모가 너무 감정적이었다. 얼굴이 부었는데, 약 가져다주마.”성혜인은 병 주고 약 주는 이 상황에 질려버렸다.“됐어요.”성혜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며 얼굴을 만지던 손을 내려놓았다.“가볼게요. 혜원이 일어나면 잘 챙겨주세요.”몸을 돌리는 순간, 소윤의 냉소가 고막을 찔렀다.“혜원이가 응급실에서 나오기도 전에 가버린다니,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혜원이가 못 나왔으면 좋겠지? 그래야 성씨 집안의 여식은 너 하나뿐일 테니까. 아니야?”“소윤!”도가 지나친 발언에 성휘가 결국 언성을 높였다.“화가 나서 그런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반면, 위로 휘어 올라간 성혜인의 입꼬리에서 조소가 느껴졌다.“제가 혜원이의 쾌유를 빌어도 성씨 집안에서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겠죠. 이번 일은 제가 참겠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에요.”말을 마친 성혜인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소윤은 떨리는 손으로 성혜인이 서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저 애 태도 좀 보세요. 제 아비는 눈에 뵈지도 않네!”성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반 씨 집안에서 우리에게 2차 파이낸싱 진행하고 싶다는 소식을 들었어. 이게 다 혜인이 덕이야. 확실히 막무가내일 때가 있기는 해도, 어른이라는 사람이 뺨을 때렸으면 안 되지.”하지만 더 세게 때리지 못한 것이 아쉬운 소윤은 입을 삐죽였다.성혜인은 정신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얼굴보다는 마음이 욱신거렸다
의사에게 둘러싸인 성혜인은 반희월의 말에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막 입을 열려는 그때, 의사가 다친 얼굴을 실수로 건드리면서 올라온 통증에 ‘씁’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그 소리에 반희월은 더 화가 났다.“승제야. 10분 안에 그 자식 집에 데려다 놔라. 오늘 아주 혼을 내놔야겠어!”반승제는 호텔 통유리창 앞에 섰다.‘임경헌이 페니를 때렸다고? 그럴 리가.’“고모. 무슨 오해가 있던 게 아닐까요?”“손자국이 선명할 정도로 부었는데, 오해는 무슨 오해야! 경헌이에게 너무 실망했어.”같은 시각,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술집에 있던 임경헌은 왠지 모르게 귀가 간지러웠다.‘또 뺨을 맞아?’반승제는 차분했다.드디어 말할 기회가 생긴 성혜인이 급히 입을 열었다.“아주머니, 그런 거 아니에요. 경헌 씨처럼 좋은 사람이 저를 때릴 리가요.”반희월은 순간 멈칫했다.‘아니라고?’“경헌이한테 벌이라도 줄까 봐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니?”“정말 아니에요.”“그럼 누가 때린 거야?”“... 가족이 그랬어요.” 반희월의 눈빛에서 동정이 느껴졌다. 임경헌이 한 것이 아니라는 말에 걱정 역시 덜었다. “경헌이 짓이었으면 용서 안 했을 텐데, 아니라니 됐다. 내 전화번호 저장해 두고 경헌이가 못되게 굴면 언제든지 연락하렴.”성혜인은 망설여졌다. 그녀와 임경헌의 관계는 가짜지만, 반희월의 권유를 거절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반희월은 여전히 전화를 끊지 않고 있었다.“승제야. 그럴 필요 없겠다. 끊으마.”성혜인은 반승제가 그녀와 임경헌의 사이를 실토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바로 눈앞에 반희월이 있는 상황이라 더욱 난감했다.하지만 다행히 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한 성혜인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래.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거든 나에게 전화하거나 경헌이한테 이야기하렴. 여자친구인 너를 당연히 도와야지.”성혜인은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거짓말이 눈덩이처
승산이 없자, 진유나는 강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느꼈다.하지만 계속 말씨름해 봤자 얼굴 붉힐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고 옆에 있던 남자를 쳐다보며 말을 돌렸다.“네이처 빌리지 건을 누가 따냈는지 궁금하댔지? 바로 얘야. 근데 그리 떳떳한 방법은 아니었을걸.”조금 전까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이한은 흥미롭다는 듯 날카롭게 찢어진 눈을 반짝였다.“이렇게 아름다운 여성분이셨다니.”그는 먼저 악수를 청했다. 가벼운 웃음을 머금은 잘생긴 얼굴에서 왠지 모를 송연함이 느껴졌다.“안녕하세요. 신이한 입니다. 제 이름 들어본 적 있을 거예요.”디자이너 업계 소식에 대해 말이 오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성혜인은 사람들과의 소통이 적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디자이너들의 유명 작품을 보러 다니며 영감을 얻고는 했다.신이한. 업계 내에서 꽤 들어본 이름이다.그녀는 신이한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빼려는 순간, 신이한은 그녀와 맞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이내 손등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서야 손을 놔주었다.“페니 씨. 아름답기만 하신 게 아니라 실력도 남다르시군요. 따라다니는 남자가 많겠어요.”속수무책으로 당한 성혜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진유나는 신이한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마음에 들었다는 거지.훤칠한 키에 고급 외제차까지 갖추고 있는 재력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다.하지만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신이한은 자신에게 넘어온 여자들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온갖 이유를 대며 차버린다.진유나의 눈빛에서 악랄함이 느껴졌다. 신이한이 성혜인도 갖고 놀다 뻥 차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둘 다 디자이너니까 할 말도 많겠다. 얘기 좀 나눠. 나 먼저 들어갈게.”신이한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애인 있어요?”성혜인은 입술을 삐죽였다.“없어요. 혼자가 더 익숙해요.”명백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신이한은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혼자는 심심하잖아요. 같이 예술관 좀 둘러보는 거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