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에게 둘러싸인 성혜인은 반희월의 말에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막 입을 열려는 그때, 의사가 다친 얼굴을 실수로 건드리면서 올라온 통증에 ‘씁’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그 소리에 반희월은 더 화가 났다.“승제야. 10분 안에 그 자식 집에 데려다 놔라. 오늘 아주 혼을 내놔야겠어!”반승제는 호텔 통유리창 앞에 섰다.‘임경헌이 페니를 때렸다고? 그럴 리가.’“고모. 무슨 오해가 있던 게 아닐까요?”“손자국이 선명할 정도로 부었는데, 오해는 무슨 오해야! 경헌이에게 너무 실망했어.”같은 시각,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술집에 있던 임경헌은 왠지 모르게 귀가 간지러웠다.‘또 뺨을 맞아?’반승제는 차분했다.드디어 말할 기회가 생긴 성혜인이 급히 입을 열었다.“아주머니, 그런 거 아니에요. 경헌 씨처럼 좋은 사람이 저를 때릴 리가요.”반희월은 순간 멈칫했다.‘아니라고?’“경헌이한테 벌이라도 줄까 봐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니?”“정말 아니에요.”“그럼 누가 때린 거야?”“... 가족이 그랬어요.” 반희월의 눈빛에서 동정이 느껴졌다. 임경헌이 한 것이 아니라는 말에 걱정 역시 덜었다. “경헌이 짓이었으면 용서 안 했을 텐데, 아니라니 됐다. 내 전화번호 저장해 두고 경헌이가 못되게 굴면 언제든지 연락하렴.”성혜인은 망설여졌다. 그녀와 임경헌의 관계는 가짜지만, 반희월의 권유를 거절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반희월은 여전히 전화를 끊지 않고 있었다.“승제야. 그럴 필요 없겠다. 끊으마.”성혜인은 반승제가 그녀와 임경헌의 사이를 실토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바로 눈앞에 반희월이 있는 상황이라 더욱 난감했다.하지만 다행히 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한 성혜인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래.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거든 나에게 전화하거나 경헌이한테 이야기하렴. 여자친구인 너를 당연히 도와야지.”성혜인은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거짓말이 눈덩이처
승산이 없자, 진유나는 강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느꼈다.하지만 계속 말씨름해 봤자 얼굴 붉힐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고 옆에 있던 남자를 쳐다보며 말을 돌렸다.“네이처 빌리지 건을 누가 따냈는지 궁금하댔지? 바로 얘야. 근데 그리 떳떳한 방법은 아니었을걸.”조금 전까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이한은 흥미롭다는 듯 날카롭게 찢어진 눈을 반짝였다.“이렇게 아름다운 여성분이셨다니.”그는 먼저 악수를 청했다. 가벼운 웃음을 머금은 잘생긴 얼굴에서 왠지 모를 송연함이 느껴졌다.“안녕하세요. 신이한 입니다. 제 이름 들어본 적 있을 거예요.”디자이너 업계 소식에 대해 말이 오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성혜인은 사람들과의 소통이 적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디자이너들의 유명 작품을 보러 다니며 영감을 얻고는 했다.신이한. 업계 내에서 꽤 들어본 이름이다.그녀는 신이한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빼려는 순간, 신이한은 그녀와 맞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이내 손등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서야 손을 놔주었다.“페니 씨. 아름답기만 하신 게 아니라 실력도 남다르시군요. 따라다니는 남자가 많겠어요.”속수무책으로 당한 성혜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진유나는 신이한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마음에 들었다는 거지.훤칠한 키에 고급 외제차까지 갖추고 있는 재력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다.하지만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신이한은 자신에게 넘어온 여자들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온갖 이유를 대며 차버린다.진유나의 눈빛에서 악랄함이 느껴졌다. 신이한이 성혜인도 갖고 놀다 뻥 차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둘 다 디자이너니까 할 말도 많겠다. 얘기 좀 나눠. 나 먼저 들어갈게.”신이한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애인 있어요?”성혜인은 입술을 삐죽였다.“없어요. 혼자가 더 익숙해요.”명백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신이한은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혼자는 심심하잖아요. 같이 예술관 좀 둘러보는 거 어때요?
성혜인은 전시회가 열리는 아트센터로 들어섰다. 비즈니스계 인사들과의 자리에서도 세련되고 깔끔한 복장의 그녀가 유독 눈에 띈다.그녀는 사방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때, 인산인해 속에서 목표를 포착했다. 바로 정운테크의 사장, 지형오다.“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좀 늦었죠.”성혜인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걸어와 지형오와 악수했다.지형오는 학교 임원진들과 함께 있었다. 올해 지형오는 제원대학 마이크로컴퓨터 수업과 관련한 모든 전자 장비를 지원하고 에어컨 10만 대를 기부하고자 한다. 정장을 빼입은 지형오에게서는 장사꾼의 교활함이 아닌 그 나이대만의 독보적인 대범함이 느껴졌다. 팔목에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간 단련해온 체격은 일반인보다 더 건장했다.“드디어 왔군요, 페니 양. 잊은 줄 알았어요.”두 사람은 성혜인이 지형오에게 집을 설계해 주면서 알게 되었다.“사장님과의 약속은 잊을 수 없죠.” 성혜인은 한 중년 여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온몸에서 세련미가 물씬 풍겼다.“오랜만에 뵙습니다. 교수님.”윤희선. 35세. 깔끔한 스타일에 콧등에는 검은 선글라스가 걸쳐져 있다. 성숙한 여성의 자태가 눈길을 끈다.하지만 ‘교수님’이라는 부름에 윤희선의 낯빛이 조금씩 어두워졌다.옆에 있던 지형오가 놀리듯 입을 열었다.“아직도 교수님이라니. 올해 학과장으로 승진하셨답니다.”성혜인을 바라보는 윤희선의 눈빛이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머금으며 악수를 청했다.“혜인 학생이었군요. 서로 아는 사이인 줄 몰랐네요.”지형오가 하하 웃었다.“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집이 바로 페니 양이 설계해 준 겁니다. 제원대학 미술 아카데미 졸업생이라는 말을 듣고 올해 전시회에 초대했지요.”“그렇군요.”윤희선의 시선이 성혜인을 향했다. 수수한 얼굴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싸구려 제품. 두말할 것도 없었다.성혜인은 지형오 곁에서 한동안 집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형오가 벽에 걸린 그림에 더 큰 관심을 두자 이내 전시회로 화제를 돌
성혜인의 눈살이 움찔거렸다. 동영상 사건은 잊고 있었다.그녀가 말이 없자, 윤희선은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했다.“대표님이 네 안부를 종종 묻더라고.”그녀는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눈빛에서는 경멸이 느껴졌다.“일개 디자이너에 지나지 않는 네가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대표님이 알면 어떻게 될까? 과연 널 찾아올까? 그때 널 갖지 못해 아주 아쉬웠을 텐데, 널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동영상일 뿐이잖아요. 그렇죠?”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혜인이 입을 열었다.그때, 윤희선이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성혜인은 그녀를 화장실 칸으로 밀어 넣었다.콰당. 35세 윤희선의 체력은 성혜인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짓이야?!”성혜인은 말없이 변기 뚜껑을 열면서 한 손으로 윤희선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를 사정없이 눌렀다.물론 자신의 휴대폰으로 촬영하면서 말이다.학교에서 변기를 항상 청결하게 소독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역한 냄새가 그대로 윤희선의 코를 찔렀다.얼굴색까지 창백해진 그녀는 벽을 부여잡으며 구역질했다.하지만 성혜인은 강한 힘으로 그녀의 머리를 변기 속에 밀어 넣었다.15초짜리 영상을 찍고 나서야 그녀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동영상 잘 간직하셔야 할 거예요. 변기 물 마시는 동영상을 제원대학 홈페이지에 제가 확 올려버릴지도 모르니까요. 교수님 취미를 학생들에게 들키면 안 되잖아요?”윤희선은 역한 속을 부여잡고 게워 내느라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성혜인이 표절 의혹으로 모함을 당하고 있을 때, 아무리 해명해도 믿어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그때 윤희선이 나서 자신은 믿는다며 함께 주최 측을 찾아가 해명해 주겠다고 했다. 성혜인은 교수인 윤희선을 믿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주최 측’이라는 사람은 다름 아닌 HS그룹의 신기섭이었다.오래전부터 성혜인을 탐내고 있던 신기섭은 곧바로 온화한 모습으로 위장했던 가면을 벗어던졌다.그리고 성혜인이 가장 믿었던 교수는 이 상황을 카메라에 담
성혜인은 지영호와 함께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지영호는 갈수록 그녀의 해설이 마음에 들었다.오늘 업계와의 다리를 놓아주고자 성혜인을 부른 것도 사실이다.“HS그룹의 신 대표를 압니까? 그 댁 아들도 디자이너인데, 꽤 유명세를 탔다더군요. 나이도 제법 비슷해보이는데, 소개해줄게요. 같은 업계에 있으니 할 얘기가 있지 않겠어요?”성혜인은 거절의 표시를 내비추고자 입을 뗐다. 바로 그때, 지영호의 목소리가 말허리를 잘랐다.“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이한아. 너도 전시회 보러 왔니?”성혜인은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신이한이 있었다.안색을 보니 이미 다 회복한 듯 했다. 신이한은 웃으며 다가왔다.“삼촌. 온다고 말씀하셨으면 제가 도슨트 해드렸을 텐데요.”신이한의 시선이 성혜인에게 향했다. 마치 이글이글 타오를 듯한 눈빛이었다.“예전에 찾으셨던 디자이너도 페니 씨였나요?”“물론이지.”신이한은 성혜인에게 다가와 친숙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반승제 일까지 해서 페니 씨가 제 일을 두 번이나 가로챘네요. 우리 정말 인연이기는 한가봐요.”성혜인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젊은이들끼리만 통하는 이야기가 있겠지요. 마침 오늘 봐야할 그림은 모두 다 봤네요. 이한아, 페니 씨 따뜻하게 잘 대해주렴.”그 말의 뜻은, 미래 여자친구처럼 잘 지내라는 말.신이한은 씩 웃었다. 지영호가 자리를 뜨고 나서야 웃음기를 거두었다.“이따가 밥 한 끼 할까?”끝까지 발차기 사건을 꺼내지 않다니, 성혜인의 눈에 신이한은 뻔뻔함의 끝판왕이었다. 어영부영 넘어갈 생각인 듯 했다.성혜인의 시선이 마침 아래로 향했다. 내려간 시선 만큼 깔보는 듯한 그런 눈빛으로.”금세 회복하셨네요?”이 말 만큼은 어떠한 의미도 담지 않았지만, 듣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충분했다.신이한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다 회복했는지는, 직접 확인해보면 되지.”“...”그때, 옆에서 젊은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야. 너지!”
편이 생겨 든든한 듯, 서수연은 거만한 표정으로 성혜인을 흘겼다.성혜인은 이 상황이 그저 웃겼다.“이 학교 학생에게 모독당했다는 이유로 학과장님이 임의로 판단해 쫓아낸다니. 이게 학교 처리 방식인가 보죠? 오늘 투자자들도 꽤 많이 왔는데 감당할 수 있으시겠어요, 학과장님?”윤희선의 표정이 얼어붙었다.전시회 관객 중에 투자자들도 많은 건 사실이었다. 일을 키워 좋을 게 없었다.하지만 서수연은 여전히 고개를 잔뜩 치켜세우며 소리쳤다.“투자자들처럼 사리 분별이 좋은 분들이라면 학교 측의 과오가 아니라는 걸 더 잘 알겠지. 학교라 함은, 공정한 잣대로 학생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 곳이 아니겠어? 내 팔찌를 훔쳐 간 널 처벌해야 학교 원칙에도 신뢰가 생기는 거야. 투자자로 협박할 생각 마! 과장님. 쫓아내도 되겠어요.”서수연은 무서울 게 없었다. 윤씨 집안처럼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가문이 서씨 집안과 손을 잡는다는 게 얼마나 현명한 방법인가. 사실 윤희선도 가문을 위해서는 서수연에게 잘 보여야 할 판이었다.윤희선 역시 비아냥거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성혜인이 찍은 동영상에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그녀의 갤러리에도 성혜인의 동영상이 있으니까.게다가 이 일을 벌인 건 다름 아닌 서수연이다.말을 마친 서수연의 눈길이 신이한을 향했다.“오빠. 봤죠? 이런 도벽 있는 여자는 조심해야죠. 돈 때문에 접근했을지 어떻게 알겠어요?”아주 당당하게 ‘오빠’란다. 둘이 잘 아는 사이인 듯 보였다.신이한 역시 이제 자신이 나설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수연을 달래며 성혜인에게 좋은 인상을 줄 작전이었다. 하지만 때마침 총장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다.지천명의 나이를 넘긴 총장의 외모는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출중했다. 이 소란 속에 서씨 집안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좁혔다.“무슨 일이야? 희선아. 너는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니? 가서 직접 귀빈들 모시라고 하지 않았나?”총장도 때마침 귀빈을 모시러 가는 길이었다.이번에는 시선이 서수연
총장의 표정이 굳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로 반승제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반승제에게로 향했다.곁에는 반승혜도 함께 있었다. 그녀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찡끗 눈을 깜빡였다.반승혜는 어려움에 처한 성혜인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오늘 반승제도 오지 않았다면 상황 수습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서씨 집안의 서수연은 교내에서도 풍운아인 편이다. 일개 디자이너에 불과한 성혜인이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닌 만큼, 반승혜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공기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순간,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은 총장은 또다시 성혜인에게 따지려 들었다.“모두 방문 등록을 해야 한다면, 지금 전시회를 관람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겠죠? 오직 저를 위해서 만든 규정은 아닐 테니까요. 제가 뭐라고.”반승제의 시선이 총장에게 향했다. 총장은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성혜인을 밀어붙이고자 뱉은 규정인데 반승제가 등장할 줄이야.여기서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면 제원대학은 가장 큰 규모의 투자자에게 망신만 당하게 될 것이다.총장이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그때, 서수연이 나섰다. 최대한 예의를 갖춘 듯한 표정이었지만 반승제와 일면식이 있는 듯한 뉘앙스는 감출 수 없었다.“승제 오빠. 이번 일은 총장님 잘못이 아니야. 이 여자가 내 5500만 원 짜리 팔찌를 훔쳐 놓고 인정을 안 한다니까. 이번 일은 경찰이 처리하면 좋을 듯해.”“안 훔쳤다고 말했는데.”“너 말고 또 누가 있어!”성혜인의 미간이 좁아졌다.“소매치기 범인이 나라는 네 말을 왜 무조건 믿어야 해? 서씨 집안 사람이라서?”“뭐?!”말문이 턱 막혀버린 서수연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이 도둑년이!’상황을 지켜만 보던 신이한은 슬슬 상황을 수습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반승제까지 온 마당에 성과를 남에게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성혜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니까.신이한이 큼큼 목을 가다듬자,
긴장한 듯한 윤희선의 손가락이 파르르 흔들렸다. 조금 전, 서수연이 화장실에서 괴로워하는 윤희선을 직원실로 데려가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서수연은 신이한을 봤다며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의 이름을 언급했다. 마침 정운테크의 지형오도 봤다는 말 역시 나오면서 성혜인을 언급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어깨를 부딪친 이야기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윤희선은 성혜인이 죽을 만큼 싫었다. 때마침, 그녀의 눈에 서수연이 팔에 차고 있는 팔찌가 들어오더니 아이디어가 번뜩였다.그녀는 급히 팔찌를 숨겼다. 서수연이 자신의 팔찌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윤희선은 능청맞게 말을 던졌다.“방금 누군가와 부딪칠 때 훔쳐 간 거 아니니?”그렇게 성혜인이 떠오른 서수연이 곧바로 성혜인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이 순간, 서수연은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성혜인이 더 미워졌다. 성혜인이 훔친 게 아니라면 여기서 얼굴 붉힐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니까.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망신을 당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때마침 윤희선이 소리치자, 그런 서수연도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맞아요. 안 돼요! 저 여자가 훔치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그리고 CCTV 사각지대라 찍혔을 리도 없어요! 일부러 시간 끌고 있는 거라니까요!”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건 경호원이었다. 경호원은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했다.총장은 반승제에게 말을 걸었다.“대표님. 대표님 생각은…”반승제의 시선이 순간 냉랭해졌다. 총장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강단이 없어서야, 원.“심 비서가 가봐요.”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총장은 차마 시간을 더 끌 수 없었다. 그는 경비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모셔다드려라.”성혜인은 줏대 없는 총장의 태도가 웃겼다. 하지만 자신의 모교인 제원대학을 비웃을 수는 없었다.총장은 다른 사람을 제치고 그 자리에 앉게 된 것이지만, 그래도 기회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그가 총장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