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성혜인이 의문스럽다는 듯 다시 한번 불렀다. 생각에 빠져있던 온시환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빌려 간 만큼만 돌려주시면 됩니다.”“아니에요, 받으세요. 저는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거든요.”도박장의 아마추어가 하룻밤에 4000억을 이겼다. 게다가 여자라니. 그녀가 이 돈을 갖고 이곳을 멀쩡히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그래서 최고의 방법은 이 돈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돈을 빌릴 때 했던 약속이 최고의 이유가 되었다. 온시환은 되려 심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2000억을 두고 갖지 않겠다니, 왜 저러는 거지?아무리 반승제의 디자이너라고 해도 얻는 보상은 얼마 안 될 것이었다. 그녀가 한평생 일해도 2000억이라는 금액은 손에 넣기 힘들었다. 설마... 반승제 앞에서 잘 보이려고?온시환은 더 망설이지 않고 받았다. 그리고 반승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얘기했다. “기혼자는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지?”기혼자라는 단어에 임팩트를 주며 성혜인을 흘깃 쳐다보았다. 아마도 들었을 것이다. 반승제는 가만히 있다가 이 말을 듣고 의문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가정은 그냥 장식품이라는 것은, 온시환이 더욱 잘 알 텐데. 온시환은 생각을 정리했다. 성혜인이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럼 반승제가 목적이다. 바로 반승제를 좋아한다는 것. “승제야, 아직도 모르겠어? 혜인 씨, 널 좋아하는 거잖아.”반승제 수중의 칩이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 적잖이 놀란 그의 속눈썹마저 파르르 떨렸다. “어디를 봐서?”온시환은 눈짓으로 칩을 가리키며 말했다. “2000억.”그들 눈에 2000억은 껌값이겠지만 일반인들한테는 평생도 갖지 못할 금액이었다. 하지만 성혜인은 별로 감흥도 없다는 듯 온시환에게 떠넘겼다. 반승제의 호감을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온시환은 이것 외의 이유를 떠올리지 못했다. “결혼했대, 남편이랑 사이 엄청 좋다던데.”담담한 어투였지만 옆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반승제는 고개를 돌
성혜인이 자리로 돌아가자 옆의 이승주가 또 작정한 듯 시비를 걸기 위해 입을 열었다. “2000억으로 반 대표 앞에서 알짱거리면 눈길 한 번이라도 더 줄줄 알았어요?”성혜인은 이제 이 사람한테 대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지금 이승주는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된 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으니 그의 시비를 받아줄수록 더욱 난리를 칠 것이다. 이승주는 성혜인이 자기를 무시하자 배알이 꼴리는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여자 때문에 이토록 화나는 것 같았다. 반승제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윤선미도 꽉 주먹을 쥐었다. 성혜인이 도박에서 망신당하리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큰 성공을 거두어들이니 주변의 재벌 2세들도 다 그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다음 기회에 그녀와 사업을 하고 싶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빌어먹을, 왜 저 빌어먹을 년이 운이 이토록 좋은 것인지. 윤선미는 턱이 저릴 정도로 이를 꽉 깨물고 분노에 차서 성혜인을 노려보았다. 성혜인은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원래의 신중하게 베팅하는 방법으로 게임을 계속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만 이미 한번 크게 이겨버린 상태여서 이곳을 벗어날 별다른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지 못한 이유도 있거니와 옆에서 호시탐탐 노려보는 이승주 때문도 있었다. 반승제가 몸을 일으키자 성혜인은 속으로 한시름 놓았다. 성혜인은 남은 칩 몇 개를 이승주에게로 밀어주었다. “승주 도련님, 오늘 여기에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놀았어요.”이건 가장 일반적인 하얀색의 칩이었다, 하나에 200만 정도 하는, 가치가 낮아서 얼마 없는 칩이기도 했다. 이승주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손끝으로 테이블만 두드렸다. 원래 화를 내고 싶었지만 성혜인이 반승제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반승제가 있기에 이승주는 무조건 참아야 했다. 이렇게 참다가는 화병이 날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윤선미도 마찬가지였다. 반승제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저번에 실수한 것이 떠올라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반
‘이 여자가 정말 나를 좋아한다.’반승제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랐다. 전에 그에게 마음을 전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반승제는 모조리 거절하곤 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달랐다. 그들은 이미 관계를 가진 사이였다. 물론 성혜인은 처음이 아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살과 살을 맞대는, 그런 스킨쉽이 있었으면 더 이상 상대를 보통 사람처럼 대하기 어려워진다. 그와 관계를 가졌던 여자가 지금 그를 좋아한다니. 차갑게 거절한다면 매정하게 보일것이다. 반승제는 망설이다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결혼한 것은 알고 있지?”성혜인은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당연히 알고 있던 것이지만, 지금은 디자인에 관한 얘기를 하던 것이 아닌가? 반승제는 성혜인이 말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머리를 굴렸다. “사실 나도... 부인과 사이가 엄청 좋아.”아내라는 두 글자가 그의 입안에서 한참을 맴돌다가 나오질 못했다. 사이가 엄청 좋다는 말도 그의 입에서 나오다니 믿기지 않았다. 성혜인은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마치 진짜냐고 묻는 듯했다. 부인인 그녀가 바로 반승제의 눈앞에 떡하니 서 있는데. 성혜인은 자신이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심지어 지금의 반승제가 말한테 머리를 얻어 차이지 않는 이상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반승제는 진지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내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너는 알 거라고 믿는다.”뭘 알 거라는 거지. 성혜인은 오늘 그와 했던 얘기들을 생각해 보며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반승제는 성혜인의 고용주이니 고용주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반승제는 성혜인이 고뇌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가 알아들었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뭐라 말하지 않았다. 성혜인은 서서 그가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냥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한 것뿐인데 이상한 말들만 들었다. 주기 싫으면 말할 것이지. 그냥 라인으로 보내
“어찌 됐든 이모에게 먼저 사과하렴. 밤에 혜원이를 한참 찾았단다.”그의 말이 성혜인의 심장을 사정없이 후벼파는 것 같았다. “혜인아. 너도 혜원이 상태가 어떤지 알다시피, 의사가 조심하지 않으면 10년밖에 못 산다고 하지 않았니. 널 돕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성휘는 소윤을 진정시키면서 성혜인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성혜인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듯했다.당황한 성휘의 얼굴에 속상함이 묻어났다.“이번엔 이모가 너무 감정적이었다. 얼굴이 부었는데, 약 가져다주마.”성혜인은 병 주고 약 주는 이 상황에 질려버렸다.“됐어요.”성혜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며 얼굴을 만지던 손을 내려놓았다.“가볼게요. 혜원이 일어나면 잘 챙겨주세요.”몸을 돌리는 순간, 소윤의 냉소가 고막을 찔렀다.“혜원이가 응급실에서 나오기도 전에 가버린다니,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혜원이가 못 나왔으면 좋겠지? 그래야 성씨 집안의 여식은 너 하나뿐일 테니까. 아니야?”“소윤!”도가 지나친 발언에 성휘가 결국 언성을 높였다.“화가 나서 그런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반면, 위로 휘어 올라간 성혜인의 입꼬리에서 조소가 느껴졌다.“제가 혜원이의 쾌유를 빌어도 성씨 집안에서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겠죠. 이번 일은 제가 참겠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에요.”말을 마친 성혜인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소윤은 떨리는 손으로 성혜인이 서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저 애 태도 좀 보세요. 제 아비는 눈에 뵈지도 않네!”성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반 씨 집안에서 우리에게 2차 파이낸싱 진행하고 싶다는 소식을 들었어. 이게 다 혜인이 덕이야. 확실히 막무가내일 때가 있기는 해도, 어른이라는 사람이 뺨을 때렸으면 안 되지.”하지만 더 세게 때리지 못한 것이 아쉬운 소윤은 입을 삐죽였다.성혜인은 정신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얼굴보다는 마음이 욱신거렸다
의사에게 둘러싸인 성혜인은 반희월의 말에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막 입을 열려는 그때, 의사가 다친 얼굴을 실수로 건드리면서 올라온 통증에 ‘씁’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그 소리에 반희월은 더 화가 났다.“승제야. 10분 안에 그 자식 집에 데려다 놔라. 오늘 아주 혼을 내놔야겠어!”반승제는 호텔 통유리창 앞에 섰다.‘임경헌이 페니를 때렸다고? 그럴 리가.’“고모. 무슨 오해가 있던 게 아닐까요?”“손자국이 선명할 정도로 부었는데, 오해는 무슨 오해야! 경헌이에게 너무 실망했어.”같은 시각,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술집에 있던 임경헌은 왠지 모르게 귀가 간지러웠다.‘또 뺨을 맞아?’반승제는 차분했다.드디어 말할 기회가 생긴 성혜인이 급히 입을 열었다.“아주머니, 그런 거 아니에요. 경헌 씨처럼 좋은 사람이 저를 때릴 리가요.”반희월은 순간 멈칫했다.‘아니라고?’“경헌이한테 벌이라도 줄까 봐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니?”“정말 아니에요.”“그럼 누가 때린 거야?”“... 가족이 그랬어요.” 반희월의 눈빛에서 동정이 느껴졌다. 임경헌이 한 것이 아니라는 말에 걱정 역시 덜었다. “경헌이 짓이었으면 용서 안 했을 텐데, 아니라니 됐다. 내 전화번호 저장해 두고 경헌이가 못되게 굴면 언제든지 연락하렴.”성혜인은 망설여졌다. 그녀와 임경헌의 관계는 가짜지만, 반희월의 권유를 거절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반희월은 여전히 전화를 끊지 않고 있었다.“승제야. 그럴 필요 없겠다. 끊으마.”성혜인은 반승제가 그녀와 임경헌의 사이를 실토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바로 눈앞에 반희월이 있는 상황이라 더욱 난감했다.하지만 다행히 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한 성혜인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래.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거든 나에게 전화하거나 경헌이한테 이야기하렴. 여자친구인 너를 당연히 도와야지.”성혜인은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거짓말이 눈덩이처
승산이 없자, 진유나는 강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느꼈다.하지만 계속 말씨름해 봤자 얼굴 붉힐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고 옆에 있던 남자를 쳐다보며 말을 돌렸다.“네이처 빌리지 건을 누가 따냈는지 궁금하댔지? 바로 얘야. 근데 그리 떳떳한 방법은 아니었을걸.”조금 전까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이한은 흥미롭다는 듯 날카롭게 찢어진 눈을 반짝였다.“이렇게 아름다운 여성분이셨다니.”그는 먼저 악수를 청했다. 가벼운 웃음을 머금은 잘생긴 얼굴에서 왠지 모를 송연함이 느껴졌다.“안녕하세요. 신이한 입니다. 제 이름 들어본 적 있을 거예요.”디자이너 업계 소식에 대해 말이 오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성혜인은 사람들과의 소통이 적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디자이너들의 유명 작품을 보러 다니며 영감을 얻고는 했다.신이한. 업계 내에서 꽤 들어본 이름이다.그녀는 신이한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빼려는 순간, 신이한은 그녀와 맞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이내 손등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서야 손을 놔주었다.“페니 씨. 아름답기만 하신 게 아니라 실력도 남다르시군요. 따라다니는 남자가 많겠어요.”속수무책으로 당한 성혜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진유나는 신이한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마음에 들었다는 거지.훤칠한 키에 고급 외제차까지 갖추고 있는 재력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다.하지만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신이한은 자신에게 넘어온 여자들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온갖 이유를 대며 차버린다.진유나의 눈빛에서 악랄함이 느껴졌다. 신이한이 성혜인도 갖고 놀다 뻥 차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둘 다 디자이너니까 할 말도 많겠다. 얘기 좀 나눠. 나 먼저 들어갈게.”신이한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애인 있어요?”성혜인은 입술을 삐죽였다.“없어요. 혼자가 더 익숙해요.”명백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신이한은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혼자는 심심하잖아요. 같이 예술관 좀 둘러보는 거 어때요?
성혜인은 전시회가 열리는 아트센터로 들어섰다. 비즈니스계 인사들과의 자리에서도 세련되고 깔끔한 복장의 그녀가 유독 눈에 띈다.그녀는 사방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때, 인산인해 속에서 목표를 포착했다. 바로 정운테크의 사장, 지형오다.“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좀 늦었죠.”성혜인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걸어와 지형오와 악수했다.지형오는 학교 임원진들과 함께 있었다. 올해 지형오는 제원대학 마이크로컴퓨터 수업과 관련한 모든 전자 장비를 지원하고 에어컨 10만 대를 기부하고자 한다. 정장을 빼입은 지형오에게서는 장사꾼의 교활함이 아닌 그 나이대만의 독보적인 대범함이 느껴졌다. 팔목에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간 단련해온 체격은 일반인보다 더 건장했다.“드디어 왔군요, 페니 양. 잊은 줄 알았어요.”두 사람은 성혜인이 지형오에게 집을 설계해 주면서 알게 되었다.“사장님과의 약속은 잊을 수 없죠.” 성혜인은 한 중년 여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온몸에서 세련미가 물씬 풍겼다.“오랜만에 뵙습니다. 교수님.”윤희선. 35세. 깔끔한 스타일에 콧등에는 검은 선글라스가 걸쳐져 있다. 성숙한 여성의 자태가 눈길을 끈다.하지만 ‘교수님’이라는 부름에 윤희선의 낯빛이 조금씩 어두워졌다.옆에 있던 지형오가 놀리듯 입을 열었다.“아직도 교수님이라니. 올해 학과장으로 승진하셨답니다.”성혜인을 바라보는 윤희선의 눈빛이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머금으며 악수를 청했다.“혜인 학생이었군요. 서로 아는 사이인 줄 몰랐네요.”지형오가 하하 웃었다.“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집이 바로 페니 양이 설계해 준 겁니다. 제원대학 미술 아카데미 졸업생이라는 말을 듣고 올해 전시회에 초대했지요.”“그렇군요.”윤희선의 시선이 성혜인을 향했다. 수수한 얼굴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싸구려 제품. 두말할 것도 없었다.성혜인은 지형오 곁에서 한동안 집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형오가 벽에 걸린 그림에 더 큰 관심을 두자 이내 전시회로 화제를 돌
성혜인의 눈살이 움찔거렸다. 동영상 사건은 잊고 있었다.그녀가 말이 없자, 윤희선은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했다.“대표님이 네 안부를 종종 묻더라고.”그녀는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눈빛에서는 경멸이 느껴졌다.“일개 디자이너에 지나지 않는 네가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대표님이 알면 어떻게 될까? 과연 널 찾아올까? 그때 널 갖지 못해 아주 아쉬웠을 텐데, 널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동영상일 뿐이잖아요. 그렇죠?”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혜인이 입을 열었다.그때, 윤희선이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성혜인은 그녀를 화장실 칸으로 밀어 넣었다.콰당. 35세 윤희선의 체력은 성혜인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짓이야?!”성혜인은 말없이 변기 뚜껑을 열면서 한 손으로 윤희선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를 사정없이 눌렀다.물론 자신의 휴대폰으로 촬영하면서 말이다.학교에서 변기를 항상 청결하게 소독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역한 냄새가 그대로 윤희선의 코를 찔렀다.얼굴색까지 창백해진 그녀는 벽을 부여잡으며 구역질했다.하지만 성혜인은 강한 힘으로 그녀의 머리를 변기 속에 밀어 넣었다.15초짜리 영상을 찍고 나서야 그녀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동영상 잘 간직하셔야 할 거예요. 변기 물 마시는 동영상을 제원대학 홈페이지에 제가 확 올려버릴지도 모르니까요. 교수님 취미를 학생들에게 들키면 안 되잖아요?”윤희선은 역한 속을 부여잡고 게워 내느라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성혜인이 표절 의혹으로 모함을 당하고 있을 때, 아무리 해명해도 믿어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그때 윤희선이 나서 자신은 믿는다며 함께 주최 측을 찾아가 해명해 주겠다고 했다. 성혜인은 교수인 윤희선을 믿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주최 측’이라는 사람은 다름 아닌 HS그룹의 신기섭이었다.오래전부터 성혜인을 탐내고 있던 신기섭은 곧바로 온화한 모습으로 위장했던 가면을 벗어던졌다.그리고 성혜인이 가장 믿었던 교수는 이 상황을 카메라에 담
말을 마치자마자 설우현은 설연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설연주의 얼굴에는 마지막 남은 핏기마저 사라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얼굴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오빠... 오빠였구나. 깜짝 놀랐잖아요.”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오늘 밤의 일이 그녀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 분명했다.설연주가 아무런 소란을 피우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니 설강민은 그녀의 친오빠였다. 친오빠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 있겠는가.조금 전 겉으로 강한 척했던 건 전부 꾸며낸 모습이었다.설우현의 마음 한구석이 약간 부드러워지며 그는 도우미에게 수면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약 먹고 자.”“역시 오빠는 좋은 사람이에요.”그 말에 설우현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는 그 말이 별로 칭찬처럼 들리진 않았다.화가 난 그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방을 나갔다.설연주는 수면제를 삼켰다.원래는 이런 약을 함부로 먹지 않았다. 너무 깊이 잠들면 혹시 누가 방에 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침대에 몸을 기대었지만 곧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이건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설강민을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으면 이 공포심은 평생 그녀의 삶을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설연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화장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전화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방은 그녀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설연주는 오늘 밤 있었던 일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대신 되물었다.“김현서는 아직 정승후 옆에 있어?”“그래, 게다가 요즘 정승후는 김현서를 아주 애지중지하고 있어.”‘애지중지?’설연주는 피식 웃었다. 아마 김현서가 또 어떤 달콤한 말을 늘어놓았겠지.가끔 의아했다. 왜 이렇게 뻔하고 저급한 거짓말에 남자들이 넘어가는 걸까?하지만 곧 깨달았다. 아마 남자들도 김현서가 사람에 따라 다른 말을 한다는
설연주는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다가 설우현이 따라오지 않는 걸 깨닫고 뒤돌아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설우현은 제자리에 서서 그녀의 몸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설연주는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거짓말쟁이는 평소 말투도 거슬리더니 마음속에도 한 고집을 품고 있는 듯했다.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그녀를 앞질렀다.설연주는 그가 왜 갑자기 성난 것처럼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기운조차 없었다.그녀는 거실로 들어와서도 여전히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사실은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우현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잠시 멈춰 서 있던 그녀는 점점 온몸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오빠, 저 오늘 밤 어디서 자요?”이 집에 그녀가 머물 방이 없었기에 설우현이 준비해 주어야 했다.설우현은 사람을 시켜 객실을 정리해 그녀가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설연주는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고일까 봐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시울이 이미 살짝 붉어져 있었다.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향했다.방 문을 닫자마자 그녀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 앞에서 토하기 시작했다.밖에 있던 도우미는 소리를 듣고 문을 두드렸다.“설연주 씨, 혹시 어디 불편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집 안에 약상자가 있어요. 속이 불편하신가요?”설연주는 입가를 닦으며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으며 볼은 전보다 핼쑥해 보였다.요즘 김현서와 설강민을 견제하느라 3킬로나 빠진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도우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자 그녀는 얼른 입을 헹구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하지만 방금 전 분명히 토하시는 소리가...”“아니에요.”그녀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곳 사람들은 모두 설우현의 사람들이었다.설연주는 바보가 아니었다. 설우현이 그녀를 싫
설우현이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설강민은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지금은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인데 설우현이 이 중요한 순간에 여기에 나타날 줄이야.설우현은 침대 쪽을 잠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설강민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쟤는 네 여동생이야!”설강민은 주먹을 맞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은 순식간에 부어올랐다. 그제야 설강민은 울먹이며 말했다.“난 이런 여동생 없다고요!”침대 주위에 둘러서 있던 남자들도 잠시 눈치를 보며 망설였다. 설우현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다 꺼져! 당장!”남자들은 설강민이 서럽게 울고 있는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설우현의 눈치를 보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침대 위에서 설연주는 손이 뒤로 묶인 채 멍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설우현은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목에 묶인 끈을 풀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피가 묻어 있는 끈을 보자 그의 손이 멈칫했다. 차마 그 끈을 풀 수가 없었다.“조금만 참아.”그때 설연주는 힘겹게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현 오빠, 진짜 와줄 줄은 몰랐어요. 순간 눈앞에 천사가 나타난 줄 알았어요.”설우현은 이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는 그녀를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그는 가위를 찾아 곧장 끈을 잘라냈다. 설연주의 손목은 이미 피가 나고 살이 벗겨져 끔찍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보이는 오래된 상처들까지 발견했다.설우현은 그 상처들이 무엇 때문에 생긴 건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설연주가 그동안 어떤 비밀을 숨겨왔는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설연주는 끈이 풀리자마자 피곤한 듯 침대에 몸을 기댔다.“저 좀 데려가 줘요. 너무 졸려요. 우현 오빠가 있는 곳이 저한테는 가장 안전한 곳이에요.”설우현은 거절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는 가슴께가 습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고개를 내려보니 설연주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그녀는 마치 깨진 인형처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설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 여자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안 가. 혼자 미쳐가든 말든 나 찾지 마. 밖에 너한테 매달리는 남자들 많잖아? 그쪽이나 찾아가.”설연주는 전화가 끊기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라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을 더욱 단단히 몸에 두르며 오늘 밤은 이렇게 버텨보려 했다.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비몽사몽인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나보니 설강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로 얘야.”곁에 있던 남자가 물었다.“정말 괜찮겠어? 이 여자 네 동생이라며. 너희 아버지가 돌아오면 우리 가만두지 않을 텐데.”“괜찮아. 우리 아버지는 얘 인정하지도 않거든.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할게, 할게. 우리도 설씨 가문 여자는 처음이거든. 전에 뉴스에서 본 성혜인 얼굴, 하... 진짜 대박이던데.”설연주는 눈을 번쩍 뜨고 자신 앞에 서 있는 네 명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상의를 벗은 채 야릇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연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문 앞에 서 있는 설강민을 바라봤다.‘설강민은 가출하지 않았나?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지?’설강민은 담배를 피우며 그녀의 도움 요청에 일부러 못 본 척하며 말했다.“너희한테 주는 거야. 마음껏 즐겨.”남자들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설연주는 몸을 한쪽으로 굴렸으나 금세 발목이 붙잡히고 말았다.“설강민, 제정신이야? 아버지한테 혼나는 게 두렵지 않아?”설강민은 오히려 더 화를 내며 소리쳤다.“그래, 당연히 혼내겠지! 이제 너 때문에 아버지가 나까지 쫓아낼 지경이라고. 이런 아버지 나도 필요 없어. 설연주,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놓고 넌 무사할 줄 알았어?”설연주는 설강민이 이렇게까지 미친 짓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남자들을 집에 불러 그녀를 겁탈하라고 하다니.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심으로 두려움이 밀려오는 순간이었
설연주는 내내 말없이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 물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설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강민이 지나치게 시끄럽다면 이 딸은 가끔 너무 조용했다.“연주야, 올라가서 자.”설연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아버지. 너무 화내지 마시고 일찍 주무세요.”설준석은 반평생을 살며 아들한테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도 아버지로서의 자각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가슴이 살짝 저릿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돈이 부족하면 말해.”“괜찮아요. 지난번에 주신 4억 원도 아직 안 썼어요.”설준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애인들을 만나러 간 것이다.설연주는 넓디넓은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너무도 넓어 차갑게 느껴졌고 마치 온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고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의 세상은 언제나 혼자 남는 것이 당연했다.방으로 가서 쉬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특정한 벨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설연주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며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얼른 전화를 받아들었다.남성의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밤 사람 보내서 널 데디러 갈 거야.”이 남자는 오성파의 두목이자 설연주가 기대고 있는 가장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와 엮인 것을 후회했지만 그때는 정승후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의 보호가 필요했다. 그때 마주친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 그녀에겐 선택지가 없었다.설연주가 말없이 듣고만 있자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왜? 이제 설연주가 됐다고 나를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설연주의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본능적으로 각인된 공포 그 자체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기다리던 남자는 짜증이 나는 듯 말을 이었다.“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 알잖아? 예전에 울며 빌면서 영원히 내
설우현의 시선이 설연주에게 머물렀다.목을 감싸 쥔 설연주는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설강민은 여전히 화가 나서 말했다.“두고 봐!”설우현은 동생을 대하는 설강민의 태도에 놀라며 미간을 찌푸렸다.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다시 웃으며 설우현을 바라보았다.“오빠, 이제 돌아가세요. 데려다줘서 고마워요.”설우현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며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설우현은 설연주의 눈빛에서 어딘가 죽은 듯한 고요함을 느꼈다. 웃고 있는 그녀였지만 마치 생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린 듯 언제까지 살아갈지 자신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차로 돌아와 한참을 고민하다가 설우현은 창문을 내렸다.“너도 어쨌든 설씨 가문의 사람인데 아무한테나 함부로 당하고 있지 마.”설연주는 목을 감싸고 제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설우현은 차를 출발시키며 백미러로 설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설연주는 조금 더 있다가 거실로 들어갔고 거실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설강민이 때려 부순 모양이었다.설강민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혐오 가득한 눈빛으로 차갑게 노려보았다.“설연주, 김현서한테 더 이상 덤비지 마. 아니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못 할 거야.”설연주는 그의 협박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설강민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계속할 생각이야? 김현서가 예전에 너를 괴롭힌 건 알지만 다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네가 괜히 건드리지 않았으면 걔가 널 괴롭혔겠어? 분명히 말해두는데 김현서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알아서 잘 처신해.”설연주는 설강민의 손을 뿌리치더니 그를 올려다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설강민, 너 때문에 네 여동생이 죽어도 넌 아무렇지 않을까?”설강민은 무심하게 대답했다.“너 지금 멀쩡히 잘 살고 있잖아? 진짜 죽기라도 하면 내가 폭죽 터뜨리며 축하해 줄게.”설연
설우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설연주의 눈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본 설우현은 역시나 자신이 놀림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고 정원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설연주는 그가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따라갔다. 두 사람만 남은 조용한 곳에 도착하자 설우현은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말했다.“네가 원하는 게 설씨 가문의 지분이면 됐지. 굳이 이런 자리에까지 끼어들 필요는 없잖아.”설연주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끝으로 옆에 핀 꽃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설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오빠, 내가 설씨 가문의 돈 때문에 여기 있는 게 아니라면 믿겠어요?”설우현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에게 돈을 뜯어내며 그들을 가지고 놀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오늘 같은 자리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돌아가.”설우현이 냉정한 게 아니라 오랜만에 성혜인과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자리에서 설연주 같은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었다.더군다나 그녀가 있으면 분위기만 어색해질 게 뻔했다. 아버지가 대체 왜 설연주를 부른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설연주는 속눈썹을 살짝 내리고 앞에 있는 꽃을 만지작거리며 그저 조용히 있었다.설우현은 참지 못하고 다시 다그쳤다.“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돌아가라고 했잖아.”“오빠, 혹시 혜인 언니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언니가 나 때문에 기분 나빠할까 봐?”설연주가 자신의 의도를 꿰뚫자 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건 굳이 말로 안 해도 알 줄 알았는데.”그 말을 들은 설연주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성혜인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오빠와 부모가 있으니 말이다.“알았어요. 지금 나갈게요.”설연주는 미련 없이 돌아섰고 설우현은 또 무슨 속셈일지 몰라 잠시 더 지켜보다가 몇 분 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
류소영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가 붉어지기를 반복하며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성혜인은 다소 귀찮은 표정으로 설계도를 정리하며 말했다.“천 달러면 되겠네요. 그런데 오늘 설씨 가문에 가서 식사하지 않으세요? 우리 같이 갈까요?”설연주는 깜짝 놀라며 성혜인을 바라보았다.“혜인 언니?”“맞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가자.”성혜인은 설연주를 도와 작은 판매대를 정리했다. 반면 류소영은 그 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두고 봐! 너희 가만두지 않을 거야!”설연주는 류소영의 말에 웃음만 나왔다. 그녀는 설씨 가문에서 존재감 없는 인물이지만 성혜인은 설의종의 친딸이다. 류소영이 성혜인을 상대로 어찌해 보겠다는 게 어이없을 따름이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차피 성혜인은 겉모습은 부드러워 보여도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류소영이 괜히 건드렸다가 큰코다칠 게 뻔했다.설연주와 성혜인이 설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마침 설우현이 설서율을 안고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어구구, 우리 서율이. 외삼촌이 안아 줄게요. 우리 아가 정말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반승제는 옆에서 인상을 잔뜩 쓰며 그 모습을 보았다.“안으려면 그냥 안든지, 그런 애정 표현은 좀 적당히 하시죠. 징그러우니까.”설우현은 뿌듯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고 반승제를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서율이가 안아주지 않으니까 질투하는 거 다 보이거든요.”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문가에 서 있는 설연주를 발견하고 표정이 굳어졌다. “누가 쟤 불렀어?”설연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의 옆에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오빠, 그 말 너무 섭섭하네요.”설우현은 한마디 더 하려다 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는 설의종을 보고는 꾹 참았다. 설의종에게 또 벌받는 건 피하고 싶었다.설연주의 시선은 설서율에게로 향했다. 귀엽고 얌전한 아기는 큰 눈과 긴 속눈썹을 가진 인형 같았다. 설서율의 부모를 보니 왜 이렇게 사랑스럽게 생겼는지 쉽게 이해
성혜인은 설계도를 한 장 집어 들며 흡족한 눈빛을 보냈다.“이 디자인에 저작권 있나요? 제가 사고 싶어요. 직접 디자인한 거죠?”갓 돌이 지난 쌍둥이를 데리고 성혜인은 플로리아로 부모님을 뵈러 왔다.이번에 반승제도 함께 동행했지만 설씨 가문에서 설서율과 반진율을 돌보고 있어서 함께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설연주가 대답하려는 찰나 주변에서 날카로운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어머나, 이게 누구야? 우리 재주꾼 진연주 아니야?”설연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때 단발머리를 하고 자신만만하게 걸어오는 김현서의 절친, 류소영이 눈에 들어왔다.류소영은 다가오자마자 옆에 있던 선반을 발로 툭 차며 거들먹거렸다.“너 여기서 매일 재주를 팔아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속이는 거야?”성혜인은 류소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류소영은 허리에 손을 얹고 성혜인을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얘가 전에 표절한 거 모르세요? 우리 학교에 소문이 다 퍼져서 아무도 얘 디자인 같은 건 안 사요. 학교 이미지에도 먹칠했으니 말 다 했죠. 그쪽이 돈 없어서 이런 데 온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제대로 된 디자이너 찾아보세요.”설연주는 이미 일어서서 류소영의 오만한 표정을 보며 손에 있던 물건을 던져버렸다.류소영은 순간 당황했다. 예전에는 늘 김현서의 뒤를 따라다니며 설연주를 괴롭혀 왔기에 겁이 많고 나약한 설연주가 반항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설연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표절하지 않았어.”그러자 류소영이 냉소를 흘렸다.“표절도 모자라 교수님과 부적절한 관계까지 맺었잖아. 학교에서 네가 한 짓을 다들 알고 있을걸? 정말 역겨워!”성혜인은 이제야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그 소문 많던 설연주였다. 이 또한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성혜인은 설연주를 다시 한번 바라보며 디자인을 살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꽤 잘 만든 작품이었다.“이거 당신이 직접 디자인한 거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