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이 자리로 돌아가자 옆의 이승주가 또 작정한 듯 시비를 걸기 위해 입을 열었다. “2000억으로 반 대표 앞에서 알짱거리면 눈길 한 번이라도 더 줄줄 알았어요?”성혜인은 이제 이 사람한테 대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지금 이승주는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된 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으니 그의 시비를 받아줄수록 더욱 난리를 칠 것이다. 이승주는 성혜인이 자기를 무시하자 배알이 꼴리는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여자 때문에 이토록 화나는 것 같았다. 반승제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윤선미도 꽉 주먹을 쥐었다. 성혜인이 도박에서 망신당하리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큰 성공을 거두어들이니 주변의 재벌 2세들도 다 그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다음 기회에 그녀와 사업을 하고 싶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빌어먹을, 왜 저 빌어먹을 년이 운이 이토록 좋은 것인지. 윤선미는 턱이 저릴 정도로 이를 꽉 깨물고 분노에 차서 성혜인을 노려보았다. 성혜인은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원래의 신중하게 베팅하는 방법으로 게임을 계속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만 이미 한번 크게 이겨버린 상태여서 이곳을 벗어날 별다른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지 못한 이유도 있거니와 옆에서 호시탐탐 노려보는 이승주 때문도 있었다. 반승제가 몸을 일으키자 성혜인은 속으로 한시름 놓았다. 성혜인은 남은 칩 몇 개를 이승주에게로 밀어주었다. “승주 도련님, 오늘 여기에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놀았어요.”이건 가장 일반적인 하얀색의 칩이었다, 하나에 200만 정도 하는, 가치가 낮아서 얼마 없는 칩이기도 했다. 이승주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손끝으로 테이블만 두드렸다. 원래 화를 내고 싶었지만 성혜인이 반승제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반승제가 있기에 이승주는 무조건 참아야 했다. 이렇게 참다가는 화병이 날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윤선미도 마찬가지였다. 반승제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저번에 실수한 것이 떠올라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반
‘이 여자가 정말 나를 좋아한다.’반승제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랐다. 전에 그에게 마음을 전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반승제는 모조리 거절하곤 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달랐다. 그들은 이미 관계를 가진 사이였다. 물론 성혜인은 처음이 아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살과 살을 맞대는, 그런 스킨쉽이 있었으면 더 이상 상대를 보통 사람처럼 대하기 어려워진다. 그와 관계를 가졌던 여자가 지금 그를 좋아한다니. 차갑게 거절한다면 매정하게 보일것이다. 반승제는 망설이다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결혼한 것은 알고 있지?”성혜인은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당연히 알고 있던 것이지만, 지금은 디자인에 관한 얘기를 하던 것이 아닌가? 반승제는 성혜인이 말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머리를 굴렸다. “사실 나도... 부인과 사이가 엄청 좋아.”아내라는 두 글자가 그의 입안에서 한참을 맴돌다가 나오질 못했다. 사이가 엄청 좋다는 말도 그의 입에서 나오다니 믿기지 않았다. 성혜인은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마치 진짜냐고 묻는 듯했다. 부인인 그녀가 바로 반승제의 눈앞에 떡하니 서 있는데. 성혜인은 자신이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심지어 지금의 반승제가 말한테 머리를 얻어 차이지 않는 이상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반승제는 진지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내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너는 알 거라고 믿는다.”뭘 알 거라는 거지. 성혜인은 오늘 그와 했던 얘기들을 생각해 보며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반승제는 성혜인의 고용주이니 고용주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반승제는 성혜인이 고뇌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가 알아들었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뭐라 말하지 않았다. 성혜인은 서서 그가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냥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한 것뿐인데 이상한 말들만 들었다. 주기 싫으면 말할 것이지. 그냥 라인으로 보내
“어찌 됐든 이모에게 먼저 사과하렴. 밤에 혜원이를 한참 찾았단다.”그의 말이 성혜인의 심장을 사정없이 후벼파는 것 같았다. “혜인아. 너도 혜원이 상태가 어떤지 알다시피, 의사가 조심하지 않으면 10년밖에 못 산다고 하지 않았니. 널 돕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성휘는 소윤을 진정시키면서 성혜인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성혜인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듯했다.당황한 성휘의 얼굴에 속상함이 묻어났다.“이번엔 이모가 너무 감정적이었다. 얼굴이 부었는데, 약 가져다주마.”성혜인은 병 주고 약 주는 이 상황에 질려버렸다.“됐어요.”성혜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며 얼굴을 만지던 손을 내려놓았다.“가볼게요. 혜원이 일어나면 잘 챙겨주세요.”몸을 돌리는 순간, 소윤의 냉소가 고막을 찔렀다.“혜원이가 응급실에서 나오기도 전에 가버린다니,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혜원이가 못 나왔으면 좋겠지? 그래야 성씨 집안의 여식은 너 하나뿐일 테니까. 아니야?”“소윤!”도가 지나친 발언에 성휘가 결국 언성을 높였다.“화가 나서 그런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반면, 위로 휘어 올라간 성혜인의 입꼬리에서 조소가 느껴졌다.“제가 혜원이의 쾌유를 빌어도 성씨 집안에서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겠죠. 이번 일은 제가 참겠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에요.”말을 마친 성혜인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소윤은 떨리는 손으로 성혜인이 서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저 애 태도 좀 보세요. 제 아비는 눈에 뵈지도 않네!”성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반 씨 집안에서 우리에게 2차 파이낸싱 진행하고 싶다는 소식을 들었어. 이게 다 혜인이 덕이야. 확실히 막무가내일 때가 있기는 해도, 어른이라는 사람이 뺨을 때렸으면 안 되지.”하지만 더 세게 때리지 못한 것이 아쉬운 소윤은 입을 삐죽였다.성혜인은 정신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얼굴보다는 마음이 욱신거렸다
의사에게 둘러싸인 성혜인은 반희월의 말에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막 입을 열려는 그때, 의사가 다친 얼굴을 실수로 건드리면서 올라온 통증에 ‘씁’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그 소리에 반희월은 더 화가 났다.“승제야. 10분 안에 그 자식 집에 데려다 놔라. 오늘 아주 혼을 내놔야겠어!”반승제는 호텔 통유리창 앞에 섰다.‘임경헌이 페니를 때렸다고? 그럴 리가.’“고모. 무슨 오해가 있던 게 아닐까요?”“손자국이 선명할 정도로 부었는데, 오해는 무슨 오해야! 경헌이에게 너무 실망했어.”같은 시각,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술집에 있던 임경헌은 왠지 모르게 귀가 간지러웠다.‘또 뺨을 맞아?’반승제는 차분했다.드디어 말할 기회가 생긴 성혜인이 급히 입을 열었다.“아주머니, 그런 거 아니에요. 경헌 씨처럼 좋은 사람이 저를 때릴 리가요.”반희월은 순간 멈칫했다.‘아니라고?’“경헌이한테 벌이라도 줄까 봐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니?”“정말 아니에요.”“그럼 누가 때린 거야?”“... 가족이 그랬어요.” 반희월의 눈빛에서 동정이 느껴졌다. 임경헌이 한 것이 아니라는 말에 걱정 역시 덜었다. “경헌이 짓이었으면 용서 안 했을 텐데, 아니라니 됐다. 내 전화번호 저장해 두고 경헌이가 못되게 굴면 언제든지 연락하렴.”성혜인은 망설여졌다. 그녀와 임경헌의 관계는 가짜지만, 반희월의 권유를 거절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반희월은 여전히 전화를 끊지 않고 있었다.“승제야. 그럴 필요 없겠다. 끊으마.”성혜인은 반승제가 그녀와 임경헌의 사이를 실토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바로 눈앞에 반희월이 있는 상황이라 더욱 난감했다.하지만 다행히 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한 성혜인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래.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거든 나에게 전화하거나 경헌이한테 이야기하렴. 여자친구인 너를 당연히 도와야지.”성혜인은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거짓말이 눈덩이처
승산이 없자, 진유나는 강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느꼈다.하지만 계속 말씨름해 봤자 얼굴 붉힐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고 옆에 있던 남자를 쳐다보며 말을 돌렸다.“네이처 빌리지 건을 누가 따냈는지 궁금하댔지? 바로 얘야. 근데 그리 떳떳한 방법은 아니었을걸.”조금 전까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이한은 흥미롭다는 듯 날카롭게 찢어진 눈을 반짝였다.“이렇게 아름다운 여성분이셨다니.”그는 먼저 악수를 청했다. 가벼운 웃음을 머금은 잘생긴 얼굴에서 왠지 모를 송연함이 느껴졌다.“안녕하세요. 신이한 입니다. 제 이름 들어본 적 있을 거예요.”디자이너 업계 소식에 대해 말이 오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성혜인은 사람들과의 소통이 적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디자이너들의 유명 작품을 보러 다니며 영감을 얻고는 했다.신이한. 업계 내에서 꽤 들어본 이름이다.그녀는 신이한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빼려는 순간, 신이한은 그녀와 맞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이내 손등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서야 손을 놔주었다.“페니 씨. 아름답기만 하신 게 아니라 실력도 남다르시군요. 따라다니는 남자가 많겠어요.”속수무책으로 당한 성혜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진유나는 신이한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마음에 들었다는 거지.훤칠한 키에 고급 외제차까지 갖추고 있는 재력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다.하지만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신이한은 자신에게 넘어온 여자들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온갖 이유를 대며 차버린다.진유나의 눈빛에서 악랄함이 느껴졌다. 신이한이 성혜인도 갖고 놀다 뻥 차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둘 다 디자이너니까 할 말도 많겠다. 얘기 좀 나눠. 나 먼저 들어갈게.”신이한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애인 있어요?”성혜인은 입술을 삐죽였다.“없어요. 혼자가 더 익숙해요.”명백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신이한은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혼자는 심심하잖아요. 같이 예술관 좀 둘러보는 거 어때요?
성혜인은 전시회가 열리는 아트센터로 들어섰다. 비즈니스계 인사들과의 자리에서도 세련되고 깔끔한 복장의 그녀가 유독 눈에 띈다.그녀는 사방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때, 인산인해 속에서 목표를 포착했다. 바로 정운테크의 사장, 지형오다.“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좀 늦었죠.”성혜인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걸어와 지형오와 악수했다.지형오는 학교 임원진들과 함께 있었다. 올해 지형오는 제원대학 마이크로컴퓨터 수업과 관련한 모든 전자 장비를 지원하고 에어컨 10만 대를 기부하고자 한다. 정장을 빼입은 지형오에게서는 장사꾼의 교활함이 아닌 그 나이대만의 독보적인 대범함이 느껴졌다. 팔목에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간 단련해온 체격은 일반인보다 더 건장했다.“드디어 왔군요, 페니 양. 잊은 줄 알았어요.”두 사람은 성혜인이 지형오에게 집을 설계해 주면서 알게 되었다.“사장님과의 약속은 잊을 수 없죠.” 성혜인은 한 중년 여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온몸에서 세련미가 물씬 풍겼다.“오랜만에 뵙습니다. 교수님.”윤희선. 35세. 깔끔한 스타일에 콧등에는 검은 선글라스가 걸쳐져 있다. 성숙한 여성의 자태가 눈길을 끈다.하지만 ‘교수님’이라는 부름에 윤희선의 낯빛이 조금씩 어두워졌다.옆에 있던 지형오가 놀리듯 입을 열었다.“아직도 교수님이라니. 올해 학과장으로 승진하셨답니다.”성혜인을 바라보는 윤희선의 눈빛이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머금으며 악수를 청했다.“혜인 학생이었군요. 서로 아는 사이인 줄 몰랐네요.”지형오가 하하 웃었다.“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집이 바로 페니 양이 설계해 준 겁니다. 제원대학 미술 아카데미 졸업생이라는 말을 듣고 올해 전시회에 초대했지요.”“그렇군요.”윤희선의 시선이 성혜인을 향했다. 수수한 얼굴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싸구려 제품. 두말할 것도 없었다.성혜인은 지형오 곁에서 한동안 집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형오가 벽에 걸린 그림에 더 큰 관심을 두자 이내 전시회로 화제를 돌
성혜인의 눈살이 움찔거렸다. 동영상 사건은 잊고 있었다.그녀가 말이 없자, 윤희선은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했다.“대표님이 네 안부를 종종 묻더라고.”그녀는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눈빛에서는 경멸이 느껴졌다.“일개 디자이너에 지나지 않는 네가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대표님이 알면 어떻게 될까? 과연 널 찾아올까? 그때 널 갖지 못해 아주 아쉬웠을 텐데, 널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동영상일 뿐이잖아요. 그렇죠?”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혜인이 입을 열었다.그때, 윤희선이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성혜인은 그녀를 화장실 칸으로 밀어 넣었다.콰당. 35세 윤희선의 체력은 성혜인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짓이야?!”성혜인은 말없이 변기 뚜껑을 열면서 한 손으로 윤희선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를 사정없이 눌렀다.물론 자신의 휴대폰으로 촬영하면서 말이다.학교에서 변기를 항상 청결하게 소독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역한 냄새가 그대로 윤희선의 코를 찔렀다.얼굴색까지 창백해진 그녀는 벽을 부여잡으며 구역질했다.하지만 성혜인은 강한 힘으로 그녀의 머리를 변기 속에 밀어 넣었다.15초짜리 영상을 찍고 나서야 그녀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동영상 잘 간직하셔야 할 거예요. 변기 물 마시는 동영상을 제원대학 홈페이지에 제가 확 올려버릴지도 모르니까요. 교수님 취미를 학생들에게 들키면 안 되잖아요?”윤희선은 역한 속을 부여잡고 게워 내느라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성혜인이 표절 의혹으로 모함을 당하고 있을 때, 아무리 해명해도 믿어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그때 윤희선이 나서 자신은 믿는다며 함께 주최 측을 찾아가 해명해 주겠다고 했다. 성혜인은 교수인 윤희선을 믿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주최 측’이라는 사람은 다름 아닌 HS그룹의 신기섭이었다.오래전부터 성혜인을 탐내고 있던 신기섭은 곧바로 온화한 모습으로 위장했던 가면을 벗어던졌다.그리고 성혜인이 가장 믿었던 교수는 이 상황을 카메라에 담
성혜인은 지영호와 함께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지영호는 갈수록 그녀의 해설이 마음에 들었다.오늘 업계와의 다리를 놓아주고자 성혜인을 부른 것도 사실이다.“HS그룹의 신 대표를 압니까? 그 댁 아들도 디자이너인데, 꽤 유명세를 탔다더군요. 나이도 제법 비슷해보이는데, 소개해줄게요. 같은 업계에 있으니 할 얘기가 있지 않겠어요?”성혜인은 거절의 표시를 내비추고자 입을 뗐다. 바로 그때, 지영호의 목소리가 말허리를 잘랐다.“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이한아. 너도 전시회 보러 왔니?”성혜인은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신이한이 있었다.안색을 보니 이미 다 회복한 듯 했다. 신이한은 웃으며 다가왔다.“삼촌. 온다고 말씀하셨으면 제가 도슨트 해드렸을 텐데요.”신이한의 시선이 성혜인에게 향했다. 마치 이글이글 타오를 듯한 눈빛이었다.“예전에 찾으셨던 디자이너도 페니 씨였나요?”“물론이지.”신이한은 성혜인에게 다가와 친숙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반승제 일까지 해서 페니 씨가 제 일을 두 번이나 가로챘네요. 우리 정말 인연이기는 한가봐요.”성혜인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젊은이들끼리만 통하는 이야기가 있겠지요. 마침 오늘 봐야할 그림은 모두 다 봤네요. 이한아, 페니 씨 따뜻하게 잘 대해주렴.”그 말의 뜻은, 미래 여자친구처럼 잘 지내라는 말.신이한은 씩 웃었다. 지영호가 자리를 뜨고 나서야 웃음기를 거두었다.“이따가 밥 한 끼 할까?”끝까지 발차기 사건을 꺼내지 않다니, 성혜인의 눈에 신이한은 뻔뻔함의 끝판왕이었다. 어영부영 넘어갈 생각인 듯 했다.성혜인의 시선이 마침 아래로 향했다. 내려간 시선 만큼 깔보는 듯한 그런 눈빛으로.”금세 회복하셨네요?”이 말 만큼은 어떠한 의미도 담지 않았지만, 듣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충분했다.신이한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다 회복했는지는, 직접 확인해보면 되지.”“...”그때, 옆에서 젊은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야. 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