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레몬물을 마시다가 하마터면 사레 걸려 그대로 내뿜을뻔하였다.그녀도 당연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이 본인의 내연녀가 될 수는 없으니까.티슈를 손에 든 그녀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입가를 정리하였다.“알아요, 그래서요?”그녀의 말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하였다. 마치 반승제의 결혼이 자신과는 무관한 일인 듯이 말이다.이런 그녀의 단조로운 태도는 맞은 쪽에 앉은 반승제마저도 그녀를 흥미스럽다는듯이 쳐다보았다.진유나는 순식간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 한 꼴이 되고 말았다.그래서? 여기에서 어떻게 그래서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설마 그녀가 보낸 사인이 잘못 전달되기라도 했단 말인가?그녀의 행동은 너무도 기가 막혔다. 뻔뻔하다고 하였으면 좋을지 아니면 이미 반승제의 사랑을 독차지한다고 생각하여 자만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진유나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여기서 자기 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반승제를 보더니 다시 원래의 온화함을 보였다.“승제 씨, 삼 년 동안 한 번도 안 왔으니 여기 레스토랑 셰프 바뀐 건 몰랐죠? 여기 이번에 바뀐 새로운 셰프 네덜란드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분이래요. 승제 씨 입맛에 맞는 음식도 있어요.”그녀는 자연스럽게 메뉴판을 가져오더니 테이블에서 자신이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였다.반승제의 평온한 표정은 그 어떠한 것도 읽을 수 없었으며 눈빛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거절도 승낙의 대답도 없이 말이다.사실 그녀는 이렇게 냉담한 사람과 어색한 자리를 갖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다.하지만 고객의 니즈를 맞추고 그의 성향을 맞추는 것 또한 을한테는 업무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그녀가 웃어 보였다.“베어틴이 제일 자신 있어 하는 요리는 메뉴판에 없어요. 그리고 오늘의 선약은 저예요. 만약 대표님과 식사 자리를 원하시면 다른 시간으로 약속 잡길 바랄게요.”성혜인의 말은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천하의 진유나도 이런 말을 듣고도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제 남편은 엔지니어예요.”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한 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결혼 생활은 두 사람이 같이 하는거라고 생각해요. 한 사람만 노력하면 안 되죠.”그녀는 반승제 쪽으로 커피를 건네며 온화하게 웃었다.“돈벌이는 많지 않아도 책임감 있는 사람이에요.”성혜인은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남편 될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억지로 연상시켜 말하고 있었다.반승제는 그 어디로 보아도 그녀가 원하는 조건과는 멀어 보였다.“그러는 대표님도 결혼하셨다고 방금 들은 거 같은데요. 와이프는 어떤 사람인가요?”성혜인은 고객과의 뉴대감을 위해서 화제를 찾아서 말한 것뿐이었다.하지만 그는 그녀의 이름도 생긴 것도 몰랐다. 그러는 그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반승제가 눈썹을 치켜들더니 있는 그대로 말하였다.“나도 몰라.”하지만 이혼은 계속 미뤄지고 있는 상태이다. 이혼 합의서까지 성씨 집안에 보냈지만, 그녀는 아무런 미동도 없다.그녀는 뭘 기다리고 있는 걸까?설마 반가의 집안에서 기생충처럼 붙어 있으려는 작정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성혜인은 그의 솔직한 대답에 당황하였지만, 때마침 웨이터가 가져온 음식 덕분에 화제 전환을 할 수 있었다.“호텔의 베어틴 셰프도 예술 애호가게요. 제일 대단한 건 그 예술을 음식에 담아둔거구요.”정갈한 요리가 눈앞에 놓여졌다. 화려한 색상은 자칫 잘못 보면 어지러워 보일 수 있으나 서로 조화를 이루어 신비로웠다.“대표님, 드세요.”성혜인은 눈앞이 점점 더 흐려왔고 한시라도 빨리 이 대화를 끝내고 병원으로 가고 싶어졌다.하지만 그는 그녀의 생각과 달리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그런데 내가 위병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그녀가 잠시 멈칫하였다.“대표님이 일 중독자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러면 식사를 제때 못 챙기는 건 당연한 거고요. 한마디로 대표님 상황으로 맞춰본 거에요.”사실 그녀는 그의 할아버지와 연락할 때 반태승이 그녀에게 한 말이었다. 일 중독이라 자주 위병이 발작한다고
“남편은 야근 때문에 바빠요. 그래서 부담 주고 싶지 않아요.”성혜인은 어지러움증을 완화하기 위해 관자놀이를 천천히 눌렀다.반승제에게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그녀는 에스컬레이터를 잡고 그에게 인사를 전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대표님 차는 저쪽에 있죠?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반승제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젯밤 그런 상황에서 혹시라도 그녀가 욕실안에서 쓸어졌다면 아마 생명이 위험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생각하고 있으니.바보인 건지 아니면 자신의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이러는 건지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그녀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로 이번에는 그에 대한 보상을 하고 싶었다.“병원까지 데려다줄게.”성혜인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다.그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여 자기 쪽으로 당겨왔다.“페니?”성혜인은 이미 극에 달하였다. 사실 레스토랑에서부터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갑자기 햇빛을 보니 현기증이 더 심해졌다.그녀는 반승제가 자신을 부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목이 막힌 것처럼 대답할 수가 없었다.반승제는 그녀의 몸에서 열이 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불덩이가 될 지경까지 참아왔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그의 차가운 손 덕분에 편안함을 느꼈는지 그녀가 참지 못하고 그의 손을 자신의 이마에 대고 문질렀다.반승제의 손은 잠시 멈칫하더니 감전이라도 된 듯 급히 손을 뗐다.앞으로도 두 사람은 일 때문에라도 자주 만나야 하니 이렇게 사람을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반승제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내 허리를 굽혀 그녀를 품에 안았다.거리에 막 들어서자, 차 한대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을 내리니 양한겸었다.양한겸은 아직 성혜인이 이 계약 건을 성사시킨 것에 대해 몰랐다. 멀리서 반승제를 발견하고는 인사를 나누어 좋은 인상이나 남기고 싶었던 것뿐인데 반승제가 성혜인을 안고 있는 걸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반승제도 그를
양한겸은 그녀를 부축하며 그의 말에 다시 한번 놀랐다.성혜인이 결혼을?반승제의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하는 건 같지 않았다.그해 성혜인은 졸업하자마자 양한겸에게 스카우트 되었다.이 삼 년 동안 그녀가 이성과 접촉하는 걸 본 적도 없는데 결혼이라니.양한겸의 놀란 표정을 본 반승제는 눈썹을 치켜들었다.“일단 병원부터 가죠.”양한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성혜인을 부축하며 병원 로비로 들어섰다.반승제는 더 이상 머물지 않았다. 이것도 앞으로의 파트너쉽을 위해서 한 일일 뿐이었다.차에 돌아와 BH 그룹으로 돌아가는 길, 반태승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승제야. 혜인이는 만났어? 전보다 더 이뻐진 것 맞지?”몇 마디도 못하고 기침을 하고 숨쉬기 힘들어하는 걸 보니 병세가 더 악화한 모양이었다.“할아버지는 요양원에서 몸조리나 잘하세요. 이쪽은 걱정하시지 마시고요.”“이 늙은이 걱정 안 하게 빨리 손주나 낳아서 효도 좀 해. 혜인이가 원래 내성적인 데다가 예술만 하는 애라 그래. 남자인 네가 좀 적극적으로 나서야지, 안그래?”반승제의 미간이 구겨졌다. 애초에 그녀가 할아버지에게 무슨 방법을 썼는지 알고 싶어졌다.반박하려고 하자 수화기 너머로 반태승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한마디 더 하면 말이 더 길어질 걸 아는 그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하였다.“노력할게요.”그제야 반태승도 만족하였는지 웃었다.“난 다음 달 돌아갈련다. 외국에 있으려니까 아는 사람들도 없고 그리고 우리 혜인이도 보고 싶기도 하고. 나 없는 동안 네가 잘 돌봐주어야 해. 누구도 괴롭히게 해서는 안 돼.”반승제의 미간이 구겨졌다.당시 할아버지는 외국으로 출국할 때 거기 섬에 있는 요양원에 있겠다고 하였는데 일 년도 안 되는 지금 다시 귀국하려고 하는 것이었다.그는 원래 먼저 이혼을 한 후, 천천히 반태승에게 말할 작정이었다.그런데 다음 달에 돌아와서 갑자기 이혼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 자리로 쓰러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여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반승제의 표정은 더
성혜인은 그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정직하고 이성적인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가정폭력을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었다.양한겸이 이렇게 생각하는 거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밤 반승제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아마 정상적인 사람은 사랑을 받는 일에 이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한다는 걸 알지 못할 것이다.그래서 성혜인은 더 난감해졌다.“아니에요... 저한테 잘해줘요. 이런 결혼 생활 자연스럽고 좋아요. 마음도 따뜻하고요.”양한겸은 그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친구한테라도 연락해, 안 그럼 나 걱정돼서 못 가.”성혜인은 핸드폰을 들어 강민지에게 연락하였다.껍데기뿐인 자신과 달리 강민지는 진정한 로열 패밀리었으며 그녀의 몇 안 되는 친구였다.대학 시절, 두 사람은 학과는 달랐지만 우연히 같은 숙소로 배정받았다.강민지는 요즘 한창 바쁜 시기였고 그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 양한겸은 그녀와 병실 밖에서 몇 마디 나누고서야 안심하며 돌아갔다.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백해진 성혜인의 모습을 보자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반승제가 귀국했다는 걸 왜 안 알려 줬어? 그 냉정한 자식 삼 년 동안 너 혼자서 있게 하고 지금 돌아와서 뭐 어쩌겠다는 거야?”강민지는 그녀는 이름만 부잣집 딸내미었지 성격은 난폭하기 그지없었다.“이혼하고 싶어서겠지.”성혜인의 미간이 좁혀졌다.“그때 우리가 왜 결혼했는지 우리 둘 다 너무 잘 알아. 그리고 그 사람은 따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어. 나 때문에 그렇게 된거 니까 당연히 기분 나쁘고 화날 거야.”“좋아하는 사람? 설마 그놈하고 윤단미, 어릴적 소꿈놀이하던 시절의 감정?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는데 아직도 감정이 남아있다고? 난 반승제에게 그렇게 깊은 연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강민지가 주는 물을 받았다.“감정이 깊던 아니던 나랑은 상관없어. 난 일하고 돈만 받으면 돼.”강민지가 웃으며 옆에 앉았다.“그래, 네가 그 누구보다도 계산이 밝은
그대로 정곡을 찔렀다.강민지는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말하는 성격이었다.성혜인은 눈초리까지 떨렸다. 사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하지만 성휘도 이제는 늙었다. 원래부터 사업적 수단이 없는 그였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욱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강민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그녀가 괴로워하는 걸 눈치채고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네가 방금 했던 말 무슨 말이야? 돈을 받고 일하면 된다니? 설마 반승제 그 건 하기로 한 거야?’“응, 네이처 빌리지 내가 인테리어 하기로 했어.”그녀의 말에 강민지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엄지손가락을 지어 내보였다.“혜인아, 너 정말 대단해. 지금 남편이 맘에 품고 있는 사람의 신혼 방을 꾸며주겠다고? 아니지 그 여자뿐만 아니지 재혼할 여자의 신혼집일 수도 있겠네.”혜인이 신나 하며 있는 그대로 말하였다.“그럼 이것도 알려줄게. 반승제 그 사람 내가 자기 와이프인지도 모른다?”강민지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연속 입꼬리를 말아 올리던 그녀는 결국엔 감탄한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였다.“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래서 예명도 일부러 쓴 거구나. 그리고 후에 집을 인테리어 한 사람이 누군지 알게 하려고. 이거 이거 완전 고수네.”성혜인은 웃었다. 방금까지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은 트이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그날 밤 있은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반승제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숨기고 갈 각자의 비밀로 남겨두기로 한 듯 싶었다.늦은 밤 의사는 링거 주사를 가져갔고 강민지는 퇴원 수속하러 나갔다.두 사람이 차에 앉고 강민지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그러니까 앞으로 얼마나 더 있어야 이혼할 수 있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반승제 그 사람 잡을수 잇으면 잡아. 얼굴도 반반하니 좋잖아.”사실 그는 출중한 사업적 수단은 그의 배경, 외모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었다.“됐어, 그 사람하고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안 해.”강민지는 엑셀러레이터를 밟더니 한심
이름이 적혀 있지 않고 친구 추가도 되지 않은 계정에서 문자 온 것을 보고 성혜인은바로 반승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반씨 저택에서 만나자고? 혹시 이혼 얘기를 하려는 건가?’성혜인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혼하든 말든 그녀에게는 크게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수많은 예술가의 작품을 보고 나니 성혜인의 머릿속에는 기본적인 설계도가 만들어졌다.그녀는 내일 펜션을 직접 보고 다시 결정하기로 했다.이튿날, 성혜인은 직접 운전해서 BH그룹으로 왔다.펜션에 직접 가보기 위해서는 집주인인 반승제와 말을 해야 했고, 또 이참에 질문할 것도 몇 가지 있었다.두 번째 방문에 안내 데스크 직원은 그녀의 얼굴을 기억했는지 미간부터 찌푸렸다.“죄송합니다만 일 얘기는 여전히 상무 부문을 찾아가야 합니다. 반 대표님 개인 면담은 예약이 필요합니다.”안내 데스크 직원은 이미 성혜인을 갖은 수를 써 가며 반승제를 만나 성공하려는 여자로결단 내린 듯했다.“저는 반 대표님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예요. 혹시 지금 시간이 있는지 물어봐 줄 수 있을까요?한 10분 정도만 있으면 돼요.”안내 데스크 직원은 성혜인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아 바로 대표 비서실로 전화를 걸었다.약 1분 후, 직원은 전화를 끊고 성혜인에게 말했다.“이쪽으로 직진하다가 오른쪽으로 돌면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위층으로 가시면 됩니다.”성혜인이 아무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 한 직원은 태도가 돌연 좋아졌다. 그녀도 반승제를 만나려는 막무가내에 너무 당해서 이렇게 된 것이었다.성혜인이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와서 들어가려고 했을 때,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백연서가 안에서 나왔다.‘어머니가 어떻게 BH그룹에 있지?’성혜인이 몸을 피하기 전에 백연서가 그녀를 불러세웠다.“너 혜인이니?”백연서의 놀라움은 금세 분노로 변했다.“네가 왜 여기 있어? 설마 승제를 만나러 왔어? 너 아직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니?”백연서는 애써 자신의 언성을 낮추면서 말했다.
“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얌전히 당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반승제는 성혜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반승제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백연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투자 유치를 시작하는 성씨 집안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쉽게 BH그룹이 가져다줄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에 자꾸 잔소리하게 되었다.통화를 끝낸 반승제는 덤덤하게 휴대전화를 내려놨다.“10분이면 된다고 했나? 오늘은 뭐가 궁금해서 찾아왔지?”성혜인은 방금 전의 통화 내용에 신경 쓰지 않고 할 말만 했다.“오늘은 반 대표님의 미래 계획을 물어보려고 찾아왔어요. 대표님의 애인은 어떤 취미가 있어요? 독서 혹은 요가? 그리고 자녀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실내 디자인은 집주인의 습관에 따라 만들어야 했고 성혜인이 물은 것은 펜션의 구조를 좌우지할 것이다.반승제는 성혜인의 질문에 약간 멈칫했다. 애인이라는 질문에 문뜩 떠오른 사람은 애인이 아니었고, 아이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반승제는 생각하다 말고 성혜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성혜인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리고 대답했다.“저는 피임약을 먹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커피를 들고 들어오다가 이 말을 들은 심인우는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는 겨우 중심을 잡고 성혜인을 바라봤다.성혜인은 그가 여자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줬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반승제를 보자마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반승제와 하룻밤을 보내고도 이토록 덤덤할 수 있는 여자는아마 그녀 한 명뿐일 것이다.성혜인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아닌 상대를 아예 매력적인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자고로 남자는 이 부분에 타고난 승부욕이 있어서, 반승제는 자신의 기술에 문제가 있는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반승제는 소파에 기대더니 이내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성혜인은 마치 싸늘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
반승제는 순간 멍해졌다. 예전 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성혜인을 선택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었다.“시환아, 내 충고를 하나 하자면, 진심으로 지민 씨를 감동시키는 데 집중해. 억지로 잡으려고 하다간 너도 서주혁처럼 될 거야.”온시환은 순간 말을 잃었다. 사실 그도 두려웠다.하지만 공지민은 죽은 사람에게 마음이 묶여 있는 데다 자신의 진심 따윈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반승제가 전화를 끊자 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잠시 후,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그렇게 공지민은 바로 오하윤을 만나러 갔다.오하윤은 그녀에게 과일 주스를 따라 주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나 오늘 원아정 만났어. 너도 기억하지? 고등학교 때 널 화장실에 가둬놓고 물을 끼얹으라고 시킨 애 말이야.”공지민이 원아정을 잊을 리 없었다. 원아정은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다.그때 원아정은 화장실로 그녀를 몰아넣고 옷을 벗기라고 명령했으며 사진을 찍어 협박했다. 그 이후 괴롭힘은 점점 더 악랄해졌다.공지민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저 묵묵히 참으면 지나갈 거라 믿었지만 어느 날 원아정은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공지민, 너랑 은우가 원래 아는 사이라며? 지금 무릎 꿇고 빌어. 안 그러면 네 사진을 모두에게 뿌려서 네가 어떤 년인지 보여줄 거야.”그녀는 그런 고등학생은 본 적이 없었다. 고고한 척하면서도 잔인했고 사람을 완전히 조롱거리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원아정은 재벌가 출신으로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항상 고급 외제차가 그녀를 데리러 왔고 때로는 경호원까지 동원되었다.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조차 그녀의 괴롭힘을 부추겼다.만약 구은우가 없었다면 공지민은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그때 원아정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용서를 구했다.이후 구은우가 원아정에게서 사진
지금 공지민은 사실상 온시환에게 감금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온시환은 외부와의 연락을 금지하지는 않았다.오하윤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 공지민은 별다른 감정 없이 받았다. 사실 그녀는 이 사람과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오하윤의 첫 마디가 공지민을 놀라게 했다.“지민아,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누가 은우를 죽음으로 몰았는지 알아냈어.”공지민의 눈빛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문밖에 서 있는 두 명의 경호원을 발견했다.온시환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오하윤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는 전화 속에서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래, 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널 정말 싫어했어. 왜냐하면 나도 은우를 좋아했거든. 정말 너무너무 좋아했어. 그때 내 계부가 자주 날 때렸고 난 늘 구석에서 몰래 울곤 했어. 그런데 은우는 그런 나를 마치 천사처럼 도와줬어. 먹을 것도 챙겨주고 나를 위로해 줬거든. 신고하자고 말했지만 난 너무 겁쟁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 이후로 난 계속 은우를 지켜봤어. 은우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니,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 너도 알잖아? 은우는 그 자체로 모든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었어. 그래서 내가 은우를 찍은 사진이 그렇게 많았던 거야. 예전에 난 계속 널 질투했어. 은우는 언제나 널 지켜줬으니까. 그런데 그동안 난 네가 돈 때문에 온시환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이제야 알았어. 지민아, 오늘 밤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됐어. 이걸 너한테 알려주는 게 내 사과가 될 거야. 잠깐 나올 수 있어?”“알겠어. 주소 보내줘.”전화를 끊은 공지민은 바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성혜인은 마침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공지민이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 조금 의아했다.“무슨 일이에요, 지민 씨?”“혜인 씨, 나 잠깐 밖에 좀 나가고 싶어요. 시환 씨에게 전화해서 얘기 좀 해줄 수 있어요? 내가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거든요.”성혜인은 두 사람의 관계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원아정의 얼굴에는 잠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지만 오하윤이 옆에 있다는 걸 생각하며 서둘러 표정을 감췄다.오하윤은 아직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문득, 공지민이 왜 그렇게 앨범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남겨진 사진이 거의 없어서 더 간절했던 게 아닐까...오하윤은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이 원아정은 다시 말을 꺼냈다.“하윤아, 지민이 지금 제원에 있지?”원아정이 평생 가장 싫어했던 사람은 공지민이었다.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의 여자가 어떻게 감히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빼앗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있어. 근데 내가 따로 만나진 않았어. 너 온시환 알면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야.”‘온시환이라고?’원아정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마 연승혁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조만간 만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원진이 원씨 가문을 장악한 이후 원아정은 늘 눈치를 보며 살았다. 하지만 누려야 할 대접은 빠짐없이 받았다. 원진이 돈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하윤아, 나 곧 결혼해. 상대는 연승혁이야. 넌 잘 모를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온시환과 같은 무리야. 앞으로는 지민이를 만날 일도 많겠지.”고등학교 시절 원아정은 공지민을 괴롭히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구은우가 공지민을 지켜주며 이 괴롭힘은 끝이 났으나 원아정의 마음속 공지민에 대한 증오심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원아정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악의가 서려 있었다.한편 오하윤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한때 그녀도 공지민을 질투했다. 공지민이 구은우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은우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들은 뒤 오하윤은 갑자기 공지민이 안타깝게 느껴졌다.예전의 공지민은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구은우 앞에서는 유일하게 환하게 웃곤 했다.그녀가 지금처럼 타락하고 온시환 같은 남자에게 기대고 있는 이유는 구은
룸 안은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원아정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금세 악랄한 표정이 스쳤다.그녀는 얼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한 이는 다름 아닌 오하윤이었다.원아정은 고등학교 시절 오하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구은우는 학교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공지민만 보였다.이 사실에 분노한 원아정은 연씨 가문 사람을 알게 되면서 구은우의 외모가 연씨 가문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이 정보를 연씨 가문에 흘렸다.‘내가 못 가지는 건, 공지민 그년도 가지지 못하게 할 거야.’“하윤아, 나 제원에 왔어. 나올 수 있어? 얼굴 좀 보자.”오하윤은 원아정이 무서웠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겉으로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척했지만 뒤로는 후배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렸고 그 일에서도 아무런 손해를 입지 않았다.게다가 구은우를 향한 그녀의 집착은 누구나 알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를 보며 모두가 의아했지만 아무도 그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랐다.구은우와 공지민이 졸업할 때까지 원아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만나자고 하니 오하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요즘 심심했던 오하윤은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에 곧장 약속 장소를 정했다.약속 장소에서 만났을 때 오하윤은 자신이 너무 화려하게 차려입은 것을 깨달았다. 온몸을 명품으로 둘러싼 그녀와 달리, 원아정은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이었다. 상대적으로 자신이 천박한 졸부처럼 느껴졌다.“하윤아, 오랜만이야.”어색하게 자리에 앉은 오하윤은 학창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모두가 알다시피 원아정은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돈을 아낌없이 쓰며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아정아, 갑자기 제원에 웬일이야? 너희 집 사업은 여기가 아니었잖아.”당시 원아정 집안이 대규모 사업을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고 대학 입시조차 필요 없이 앞길이 보장된 그녀를 부러워하며 줄을 서서 비위를 맞추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지민이 잘 지켜. 괜히 나가서 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온시환은 속이 상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결국 술집으로 발길을 옮겨 한잔하려 했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원아정을 마주쳤다.‘원아정이 제원에 왔다고?’그녀 곁에는 원진이 서 있었다. 원진은 시선을 앞만 향한 채 걸음을 옮기다가 온시환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온시환도 마침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 옆에 있는 룸의 문을 열며 말했다.“같이 한 잔 할래?”원진은 망설임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원아정도 서둘러 뒤따랐다. 얼굴에는 상류층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원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였다.과거 원진은 원씨 가문을 철저한 강경책으로 정리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은밀한 거래를 했고 가문 내 반대 세력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그런 원진 앞에서 원아정은 잔뜩 움츠린 채 룸 안의 의자에 앉았다.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그때 원진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연승혁과의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손을 꽉 움켜쥔 원아정은 연승혁을 떠올리니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얼마 전 연승혁을 만나러 연씨 가문에 갔다가 그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익숙해 보였다.겁이 많은 원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연씨 가문의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연승혁, 그 끔찍한 인간!’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승혁이 비록 잔혹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구은우의 존재를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원아정은 원씨 가문에서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원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활에 지친 지 오래였다.연승혁이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그의 아내가 된다면 무
‘그래, 공지민. 구은우와 관련된 일만 나오면 이성을 잃고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이지.’온시환은 어깨에 박혀 있던 단검을 뽑아내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옆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일단 지민이 데리고 돌아가.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공지민은 그 순간도 악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난 여기 남고 싶어요.”그녀는 직접 구은우 사건의 진상을, 그리고 그의 가족 중 누가 손을 썼는지 듣고 싶었다. 온시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데려가.”“시환 씨!”공지민은 경호원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 억지로 차로 이끌려 갔다.온시환은 곧 사람을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어깨의 부상은 치명적인 부위는 아니었지만, 출혈이 많았다.차 안에서 부하가 온시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일을 꾸민 건 연씨 가문의 둘째입니다.”연씨 가문의 둘째, 바로 현재 가문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당시 권력을 다투는 상황에서 그는 형과 자신 아래의 모든 남자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연씨 가문은 전통적으로 후계자를 남자에게만 물려주는 규율을 따랐다. 딸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가문 밖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언제든 폭탄이 될 수 있었다. 구은우를 알지도 못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제거한 것이다.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연씨 가문의 모든 권력은 연승혁의 손에 집중되었다. 2년 전부터 그는 해외에서 국내로 사업 중심을 옮겼고 해상 운송 사업을 시작해 원씨 가문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현재의 연승혁은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존재였다. 구은우를 위해 복수를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연씨 가문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거대 가문이었다. 온시환이라 해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온시환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연승혁은 방탕한 성격에 수단이 잔혹했다. 그를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결코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원씨 가문의 원아정과 약혼한 상태였다. 원아정은 원진의
“당신들 도대체 뭐야!”여자는 분명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얼굴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가 구은우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이 사람 기억나요?”여자는 사진을 보는 순간 얼굴빛이 확 변했다.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날 풀어줘요!”공지민은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사람답게,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발로 여자의 손등을 짓밟으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지민아, 뭐 하는 거야?”그녀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온시환은 한 번도 그녀의 이런 냉혹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부드럽고, 강인하며, 침착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녀의 눈에 번진 살기가 너무나도 선명했다.만약 자신이 막지 않았다면 이 여자의 손뼈는 이미 부서졌을 것이다.‘구은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거야?’온시환은 속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분노를 억누른 그는 낮게 말했다.“심문은 내 사람들이 할 거야. 넌 결과만 들으면 돼.”공지민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발을 세게 내리찍었다.온시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속이 쓰리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옆 의자에 앉아 차갑게 변한 공지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여자는 비명을 질렀다.“당신들 신고할 거야! 다 고소할 거라고!”공지민은 여자의 눈앞에 쭈그려 앉아 차갑게 물었다.“그때 누가 돈을 줘서 청부 살인을 사주했나요? 그 사람 얼굴을 기억하나요?”여자는 공지민을 악에 받친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지만 두 명의 경호원이 그녀를 바닥에 제압하고 있어 꼼짝할 수 없었다.공지민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단숨에 침대에서 밀어 떨어뜨렸다.그 아이가 구조되었을 당시 대략 여섯, 일곱 살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할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함께 거짓말에 동
공지민은 구은우의 부모가 굉장히 화목한 부부라고만 알고 있었지, 그 사이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구은우와 오랜 친구였다. 그의 부모가 다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대체 누가 10억을 들여 구은우의 목숨을 노린 걸까.그녀는 하루빨리 이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시환 씨, 신정우 어머니랑 동생은 찾았어요?”신정우의 말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에게 돈을 요구하며 동생의 치료비를 대라고 했다.그런데 신정우가 이를 거부했으니, 아마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찾았어. 내일 나랑 같이 만나러 가자.”공지민은 온시환과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가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문득 그녀는 과거 온씨 가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온시환이 거의 망설임 없이 온씨 가문와 절연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물론 이건 그녀가 들은 단순한 가십에 불과했다. 당시 온씨 가문 사람 중 누군가가 성혜인을 건드려 일이 몹시 커졌다는 이야기였다.온시환은 가족에게도 무척 냉정한 태도를 보였고 사랑에 있어서도 마치 구경꾼처럼 시큰둥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만큼은 진심을 다하는 것 같았다.공지민은 온시환에 대해 깊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와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에 대해 더 알 수밖에 없을 터였다...다음 날, 그는 정말 그녀를 데리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갔다.구은우가 사고를 당했을 당시 공지민은 정신이 없어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기억나는 건 구은우가 구조된 후, 그 어머니와 아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그 후에는 구은우가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다.그 당시 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나중에야 그 모자가 무책임하게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들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공지민은 그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많았다.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복잡하고 때로는 무척 어두운 법이다. 처음에는 구은우가 단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