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는 그림을 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림판을 세워 한쪽에 두고 종이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조금 전 휘몰아치던 감정은 어느새 다시 누그러들어, 그는 침대로 돌아가 편안하게 잠을 청했다....다음 날 아침, 성혜인은 포레스트에서 출발했다. 이미 변호사에게 TJ 엔터로 가서 송아현의 위약금을 물어주라고 전화를 건 뒤였다.당시 한서진이 송아현의 계약을 아주 잘 처리했기 때문에 변호사는 별로 손을 쓸 것이 없었다. 하지만 도송애는 성혜인 때문에 많은 손해를 본 적이 있지 않은가, 때문에 앞날이 창창한 여배우를 또 한 번 잃게 되어 그녀는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도송애는 점심에 있는 접대에서 백지영을 만났다. 백지영이 주동적으로 그녀를 찾아간 것이었다.“도 대표님, 최근 TJ 엔터의 일에 대해 들었습니다. 성혜인이 도 대표님을 괴롭히는 데 맛 들였다면서요?”처음에는 대본을, 두 번째에는 한서진을 뺏겼는데, 이번에는 송아현마저 뺏기고 말았다.TJ 엔터는 성혜인과의 몇 번의 대결로 손실이 막대하다고 볼 수 있다.곧 도송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지영 씨가 왜 이런 말을 하실까요?'그러자 백지영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저는 막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공연을 마치고 왔습니다. 마침 최근 여유가 조금 있어 연예계에 발을 들일 생각이 있어요. 비록 송아현을 뺏기긴 했지만, 얼마 전 송아현이 맡은 드라마 촬영도 막 시작한 단계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저는 도 대표님과 협력을 하고 싶습니다. 저를 송아현의 드라마에 내보내 주세요. 송아현을 못생기게 만들면 성혜인의 회사에도 손해가 큰 것 아닙니까?”백지영의 손에는 술잔이 들려있었고 온 얼굴에는 음흉함이 가득했다.“저에게는 백씨 집안이 있으니 반승제 쪽에서도 저를 감히 어떻게 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백씨 집안은 연예계에 어울려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도 대표님과 협력하려는 겁니다.”도송애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가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은 바로 반승제였다.만약 백지영이 끼어들기를 원한다면
성혜인은 한 가지 예감이 들었다.‘앞으로 회사가 많이 시끄럽겠네.’송아현은 그녀 특유의 밝은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만들었다.그녀가 떠난 후, 사무실에는 성혜인과 한서진 단둘만 남게 되었다.이윽고 한서진은 몹시 고뇌하는 듯 한숨을 쉬었다.“사장님, 죄송합니다. 아현이가 원래 이런 성격이라... 사장님께 무례를 범할 생각은 없었을 거예요.”성혜인은 이 상황이 참 재미있었다.“아니요, 저는 아주 좋은데요, 오히려 한 매니저님께서 너무 긴장하신 것 같습니다.”“규칙이 없으면 아무 데나 날뛰기 마련입니다. 제가 TJ 엔터에서 가르치기는 했지만, 전혀 고칠 생각이 없나 보더라고요. 계속 이런 모습이면 조만간 큰 손해를 보게 될 겁니다.”성혜인은 책상 위의 서류를 앞으로 쓱 밀었다.“송아현 씨 지금 들고 있는 이 대본은 촬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여자 주인공 역할입니다. 대본도 아주 좋더라고요. 송아현 씨가 이 드라마 촬영을 끝마치면 저희 회사에서는 더 좋은 배역을 아현 씨에게 골라줄 겁니다.”송아현이 현재 찍고 있는 드라마는 라는 작품으로, 고대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권모술수의 세세한 부분까지 아주 잘 쓰여있어 여자 주인공의 연기력을 시험할 수 있었다.드라마 앞부분의 인물과 뒷부분에 흑화한 인물의 차이가 너무도 심해, 이 드라마에서 연기를 잘한다면 분명히 여우주연상을 노려볼 만했다.“사장님께서 대본을 고르는 능력은 매우 믿고 있습니다. 저도 사장님을 도와 다른 연예인을 봐 드리도록 할게요.”한서진은 탑급 매니저였다. 그의 눈에 든 연예인이라면 나중에 반드시 뜰 사람이었다.그래서 TJ 엔터에서는 그를 놓으려 하지 않았고 많은 일을 저질렀다.성혜인도 그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던 터라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송아현은 촬영장으로 보내졌다. 드라마 촬영은 3개월 정도가 있어야 끝일 난다고 한다.그러나 촬영장으로 가는 길에, 감독이 단체 톡방에 한 문자를 보냈다.「오늘 새로운 사람이 올 거야.
잠이 들었던 반승제는 잇따른 문자에 결국 눈을 떴다.이윽고 그는 핸드폰을 켜고 SNS를 보기 시작했다.‘겨울이가 사라졌다고?’이내 반승제의 눈앞에 강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예전에 성혜인은 포레스트에서 겨울이를 키우며 자주 산책을 하고는 했다.그는 즉시 일어나 심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사람을 풀어 겨울이를 찾아보게 하세요. 혜인이가 급한 것 같습니다.”아마 제원의 모든 사람들은, 반승제가 한 마리의 강아지 때문에 이렇게 긴장해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성혜인은 이미 30분 넘게 공원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성혜인은 겨울이가 개장수에게 잡혀갈까 더욱 걱정되었다. 일부 개장수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이렇게 주인을 잃어버린 개를 잡아서 개고기 시장에 팔러 가는 것이다.성혜인은 온몸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비를 맞아서일 뿐만 아니라 겨울이 걱정 때문이었다.겨울이는 반승우가 그녀에게 준 것이다. 때문에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녀는 얼굴에 빗물을 머금고, 길가를 계속 살펴보기 위해 재빨리 다시 자신의 차로 들어갔다.가속 페달을 밟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에게 CCTV 영상을 보냈다. 한눈에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해 성혜인은 그가 협력상인줄 알았다.「페니야, 이건 내가 조사해 본 CCTV야. 겨울이가 맞는지 확인 좀 해볼래?」화면에서 겨울이는 길가를 달리다가 갑자기 밧줄에 목이 묶여 회색 승합차 안으로 들어갔다.그걸 본 성혜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맞아, 틀림없이 겨울이야!’성혜인은 포레스트의 사람들에게 이 승합차가 가는 곳을 알아보라고 동영상을 즉시 보냈다. 1분 후,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포레스트의 사람인 줄 알았으나 그는 다름 아닌 반승제였다.상대할 시간이 없어 핸드폰을 끊으려 했으나, 그가 하나의 주소와 함께 보낸 메시지가 보였다.「이리로 와.」더 말할 것도 없이 성혜인의 반승제의 뜻을 알아차렸다. 곧이어 그녀는 급하게 가속 페달을 밟고 서둘러 그
성혜인은 겨울이의 상황이 너무 급한 나머지 반승제에게 강아지 털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그녀는 겨울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사실 성혜인이 조금만 반승제에게 눈길을 줬다면, 이내 그의 이상함을 감지했을 것이다.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성혜인의 시선은 단 한 번도 반승제에 향하지 않았다.그렇게 처음 반승제가 가졌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성혜인은 발견하지 못했고, 반승제 본인도 주동적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차가 동물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곧 기절할 것 같았으나 이내 겨울이를 냉큼 안아주고 안정된 걸음걸이로 차에서 내렸다.의사는 겨울이를 건네받고 바로 응급치료를 시작했다.이때 한 직원이 반승제를 발견했다. 그의 호흡은 분명하게 흐트러졌고 목에는 붉은 발진이 뚜렷하게 나 있었다.“선생님, 혹시 동물 털 알레르기가 있으신가요?”반승제는 눈앞이 마치 산수화마냥 흔들리며 어지러웠다.그제야 성혜인은 그에게 털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서둘러 입구에 서 있는 심인우를 바라보았다.“심 비서님, 대표님을 먼저 병원에 데려다주세요. 대표님한테 털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더 늦어지면 사고가 날지도 모릅니다.”“성혜인 씨는...”‘성혜인 씨는 그럼 안 가십니까?’본래 심인우는 이렇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성혜인을 보니 그녀는 전혀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는 또 반승제를 힐끗 바라보았다.반승제는 성혜인의 말투에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순간 그 어떤 감정은커녕, 온몸에 난 발진 때문에 뜨겁기만 했다.성혜인의 그런 태도에 반승제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마치 이미 익숙해진 듯 말이다.“성혜인, 딱 기다려.”차갑게 이 말을 남기고 난 뒤, 그는 스스로 몸을 돌렸으나 어지러움 때문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심인우가 급히 다가가서 반승제를 부축했지만, 그는 오히려 밀어낼 뿐이었다.반승제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조금 전 성혜인이 입을 열 때, 심장이 어찌나 요동치던지, 그는 그
반승제는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예전 자신이 성혜인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참을 수밖에 없었다. 화를 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더 큰 화를 입을 수 있으니 말이다.그는 침대에 누워 SNS를 내려보다가 온시환이 그녀에게 단 댓글을 발견했다.「어쩐지 승제가 강아지를 찾으러 나간다 했더니, 혜인 씨네 강아지가 사라진 거였군요.」그 말에 반승제는 기분이 많이 좋아진 듯싶었다.새로 고침을 했더니 온시환이 또 하나의 댓글을 단 게 보였다.「승제가 혜인 씨를 도와 찾으러 갔다면 꼭 주의해 주셔야 해요. 승제 털 알레르기 있거든요.」화가 많이 누그러들었는지 반승제는 담담하게 입꼬리를 씩 올렸다.바쁜 일을 다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어 이제야 침대에 오른 성혜인은 온시환의 두 댓글을 발견했다.반승제가 오늘 그녀를 도와준 건 사실이었기에 그녀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메시지를 보냈다.「고마웠어요.」짧은 말이었지만 반승제를 진정시키기에는 충분했다.‘뭐, 이 정도면 됐지. 완전히 양심이 없는 건 아니네.’그는 성혜인이 공손하게 몇 마디 더 물어보리라 생각하며 핸드폰을 응시했다.예를 들어...「대표님, 몸은 어떠세요?」「아직 병원에 있어요?」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핸드폰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정말 고장이 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사실 성혜인은 고맙다는 말을 보낸 다음, 저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반승제가 알 리 있겠는가.성혜인이 잠에서 깨니, 시간은 어느새 오전 10시가 되어가고 있었다.머리가 너무나 무거운 탓에 그녀는 감기약 한 봉지를 마셨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성혜인은 하마터면 앞으로 굴러떨어질 뻔하기도 했다.유경아는 성혜인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사모님 지금 열이 나시는 것 같아요. 감기약만 먹어서는 소용이 없으니 해열제도 같이 드세요.”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늘 조금 늦게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장하리에게 전화하려고 하는데, 마침 그녀에게
백지영은 통화를 끊은 후, 자신의 사람에게 말했다.“댓글 써주는 사람들 더 고용해, 얼른 송아현의 명성을 바닥까지 끌어내리란 말이야.”“이미 사고 있습니다. 지금 인터넷에는 온통 욕설로 가득 차 있어요. 모두 송아현이 일진이라며 말입니다.”백지영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녀의 뒤에는 백씨 집안이 있다. 남자에게만 의지하는 여자를 상대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성혜인, 내가 반드시 두 달 안에 울면서 나한테 직접 사과하게 만들 거야.’백지영에게는 그럴 자신감이 있었다.그 시각.성혜인은 송아현이 때린 그 서브 여주가 백씨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잠시 알지 못했다. 이윽고 성혜인이 직접 송아현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그녀는 받지 않았다. 딱 보아도 심술을 부리는 것이다.그녀는 또 송아현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매니저는 젊은 여자였는데 전화를 받자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얘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성혜인은 S.M의 사장이니 말이다.“사장님.”“아현 씨 지금 뭐 하고 있어요? 괜찮아요?”“언니는 지금 자고 있어요, 제가 문을 두드리고는 있는데... 아무리 두드려도 열지를 않아요.”“매니저로서 송아현 씨가 왜 그 여자분을 때렸는지는 알고 있겠죠?”“네, 알고 있습니다. 감독님께서 원래 서브 여주이던 분을 떨어뜨리시고 낙하산으로 들어온 새 사람에게 서브 여주 역할을 주셨어요. 원래 이런 일은 먼저 저희와 상의해야 하거든요? 하지만 감독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저희한테 고지를 한 적이 없으십니다. 그 여성분과 찍는 신 중에, 서브 여주가 아현 언니를 때리는 신이 있어요. 그런데 그걸 꼬박 18번이나 NG를 내는 거 있죠? 아현 언니 얼굴이 다 부을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는 누구도 언니를 도와 말하는 분이 없었어요. 그렇게 마지막에 그 여자분이 고의로 NG를 냈을 때, 도대체 아현 언니 앞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내 언니가 손을 휘두르더라고요.”연예계에서는 빽이 없으면 당하는 게 십상이다.하지만 성혜인은 자신의 밑에
연예인은 모두 자기만의 콘셉트이 있다.팬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모습도 그들의 콘셉트에 지나지 않고 사적인 상황에서 성품이 어떠한지 가까운 거리에서 접촉해 본 사람만이 안다.송아현의 성질은 다양하여 기분파 콘셉트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그럼, 스캔들을 합리화할 수도 있고 더 많은 사람을 자기 팬으로 만들 수 있다.한서진은 다소 흥분한 모습을 보이며 안경 뒤에 반짝이는 두 눈에서는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그는 가볍게 웃더니 곧장 차에서 내렸다.“성 대표님, 서브 여주로 출연하려고 했던 여배우를 찾으러 가 볼게요. 어떻게든 우리와 손을 잡을 수 있게끔 설득해 보겠습니다.” 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회사로 돌아오자, 포레스트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혜인 씨, 백지영 양은 전에 국내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때 외국에 있는 명문 예술 학교로 보증 추천되는 학생이 있었는데, 백지영 양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보증 추천 학생의 양손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 다시는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자, 그 자리를 백지영 양이 대신했다고 합니다.”한눈에 봐도 꺼림직한 일이다.“그때 그 보증 추천 학생과 연락을 닿을 수 있는지 한 번 알아보세요.”포레스트의 적지 않은 사람은 모두 어르신이 남긴 것이고 능력도 제법 뛰어나며 충심을 다하는 편이다.전화를 끊고 성혜인은 계속 이 일을 깊숙이 파고들고 싶었지만, 반태승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게 된다.“할아버지.”성혜인은 반태승에게 매우 깍듯하며 반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혜인아, 저녁 먹으러 집으로 오면 안 돼? 전에 약속했었잖아. 아무리 그래도 승제하고 밥은 한 끼 먹어야지.”이혼할 때 원수처럼은 헤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하여 성혜인도 반태승의 말에 거절하기 어려웠다.“네.”“그럼, 승제더러 마중 가라고 할게.”“아니에요. 혼자 차 운전해서 가면 돼요.”“어차피 승제도 꼭 지나가는 길이라 괜찮아.”성혜인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백연서에게 그런 일
성혜인은 차에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앞에서 차를 몰고 있는 사람은 심인우이고 반승제는 옆에 앉아 있다.두 사람의 다리는 거의 붙어 있고 얇은 옷감을 넘어 성혜인의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차 안의 불빛은 매우 어두우며 지나가는 가로등이 얼굴에 비칠 때마다 그림자가 새겨진다.이처럼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넋이 나간다.차를 타서 지금까지 10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성혜인은 주구장창 핸드폰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반승제에게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서서히 무력감을 느끼게 되었다.그는 성혜인이 한쪽 손을 무릎에 놓고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게 된다.다소 짜증이 났는지 뒤로 의자를 젖히며 지그시 눈도 감았다.오른손은 휴대 전화를 꼭 잡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놓고 있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두 눈을 감은 모습이 조용해 보였다.반승제는 일 분 정도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손을 내밀어 무릎에 놓여 있는 성혜인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온기에 성혜인은 온몸이 굳었고 두 눈을 번쩍 뜨니, 깊은 그의 두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심장까지 끓어오르기 시작하자 손을 빼려고 했지만, 반승제는 손에 힘을 주었다.성혜인은 애매모호하게 썸을 타거나 교제하는 사람이 아니다.두 사람은 잠자리를 한 적도 있지만, 모두 반승제의 마음에 따라 한 것이고 종래로 지금과 같은 장면이 펼쳐진 적이 없다.성혜인은 다시 손을 빼려고 했지만, 반승제는 놓아주지 않았다.아랑곳하지 않고 거듭 손을 빼려고 하자, 반승제는 깍지를 끼며 더욱 꽉 잡아버렸다.차 안의 온도도 이에 따라 올라가 성혜인은 더워지며 이마에 땀까지 송골송골 맺혔다.회사의 일로 짜증을 너무 부려서인지 어두웠다가 밝았다고 하는 그림자를 지나 반승제를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듯했다.놀라움이 스쳐 지나갔지만, 반승제는 서서히 다가와 고개를 성혜인의 목에 기대었다.성혜인의 손은 그에게 잡혀 있고 목에는 그의 숨소리로 가득하며 뜨겁기 그지없다.“대표님...”말이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