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의 표정이 너무도 태연한 나머지 반승제는 자신이 너무 단순해서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가 싶었다.반승제는 마치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어두운 표정으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성혜인은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이라도 회사의 미래를 위해 쟁취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체면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깟 체면에 비해 반승제가 줄 수 있는 게 너무 많았다.“반승제 씨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 저도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어요. 만약 마음에 안 든다면 돈을 받지 않고 포기할게요.”반승제는 도대체 어떻게 이 여자를 형용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는 한참이나말문이 막혀서 가만히 있다가 겨우 한마디 했다.“고객이라면 이미 있잖아?”성혜인은 약간 놀란 눈치였다.‘혹시 본인의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까 봐 이러는 건가?’동시에 여러 고객의 일을 하는 디자이너도 물론 있지만 성혜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반승제 씨를 맡게 되면 다른 고객은 받지 않을 거예요. 만약 관심이 있으시다면 저한테 5분만 내어주실 수 있을까요?”“관심 없어.”반승제는 먼저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섰다. 양한겸을 부축하고 있는 성혜인은 어찌 따라갈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양한겸을 데리고 대리 기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양한겸은 술에 취했어도 성혜인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성혜인이 문라이트 밖으로 나서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던 차 안에서 예쁜 여자한 명이 내려왔다.여자는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성혜인의 뺨을 때렸다.“너지?! 회사에서 물어볼 게 있다며 귀찮게 굴 뿐만 아니라 집으로 ‘사랑의 커피’를 보낸 사람이 너지?! 내가 진작에 발견했어. 너 오늘은 내 남편이랑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양한겸을 부축하고 있느라 미처 피하지 못한 성혜인은 뺨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여자는 화를 주
이튿날 아침, 성혜인은 메이크업으로 간신히 뺨에 난 자국을 가리고 출근했다.양한겸의 회사는 한 건물에서 2층만 사용하고 있었는데 성혜인은 아르바이트생으로서 굳이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회의는 꼭 참가해야 했다.예전 같으면 가장 먼저 도착해 있어야 할 양한겸이 오늘은 반 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는 어제와 같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행색도 단정하지 못했다.성혜인은 바로 양한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렸다.“늦어서 죄송해요.”양한겸은 가장 앞으로 가서 앉았다. 성혜인의 걱정하는 눈빛을 보고 그는 멋쩍게 미소를지어 보였다.직원들이 순서대로 보고를 끝내고 회의도 끝이 났다.성혜인은 다른 직원과 함께 나가려고 하다가 가만히 앉아있는 양한겸을 발견하고 다가가서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요?”양한겸은 피곤한 듯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재이 친정에 문제가 생겼어.”그는 밤새 골머리를 앓은 듯 목소리가 걸걸했다. 그리고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머뭇거렸다.“많이 심각해요?”양한겸은 한참이나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결심했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지금 회사를 팔아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고 있는데... 어떻게 직원들한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성혜인은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회사가 승승장구하는 타이밍에 판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양한겸은 돈이 모자란 사람이 아니었다.이 회사는 양한겸이 다년간 노력한 결과이기에 그도 마음 같아서는 팔고 싶지 않았다.“아직 얼마나 필요한데요?”“적어도 40억 정도.”양한겸은 씁쓸한 표정으로 이어서 말했다.“반승제의 일이 성사됐으면 좋았을 것을... 아쉽게 됐네.”“제가 계속 얘기해 볼게요.”성혜인은 자신의 물건을 정리하며 말했다.“그리고 이 일을 아직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마요.”양한겸은 한숨을 쉬었다.“너도 반승제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지는 마. 그리고 어제는 내 아내가 전적으로 잘못했어. 내가 대신 사과할게.”회의실에서 나온 성혜인은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던 성혜인은 바로 답장했다.‘제가 직접 반승제 씨와 얘기할 수는 없을까요?’이미 BH그룹까지 온 마당에 반승제만 원한다면 두 사람은 바로 만날 수 있었다.변호사는 반승제와 상의해 본다고 답장하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BH그룹의 가장 위층.반승제는 검은색 대리석으로 장식된 사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이때 심인우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성혜인 씨가 대표님과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반승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거절해요.”반승제는 이것 또한 이혼하지 않을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나랑 만나면 뭐가 달라질 줄 아나? 퍽이나...’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단호하게 말했다.“변호사더러 이혼 서류를 성씨 저택으로 보내서 직접 사인할 때까지 지켜보고 있으라고 해요.”심인우는 반승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성혜인의 얘기를 그만하고 스케줄을 확인했다.“HD은행 이문호 대표님과의 골프 스케줄은 지금 출발해야 합니다.”반승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넥타이를 정리하며 말했다.“그래요.”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성혜인은 가만히 앉아서 분주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마치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듯이 말이다.기다림은 아주 평화로웠다. 성씨 저택에서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혜인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승제가 왜 너랑 이혼해?”성휘는 다급하게 말했다.“둘이 싸우기라도 했어? 일단 집으로 와서 잘 좀 얘기해 보자.”성혜인은 약간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아빠, 아무리 남편이라고 해도 저희는 남과 다를 바 없어요. 그리고 승제 씨가 귀국한 이상 저를 아내로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ㅂ성휘는 급한 나머지 랩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혜인아, 이혼은 절대 안 된다. SY그룹에서 곧 투자 유치를 시작할 건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혼한다면 주가가 무조건 하락할 거야.”휴대전화 건너편에서는 소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내가 이럴 줄 알았어요. 혜인이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성혜인은 반승제의 차가운 표정에 몸이 흠칫 떨리는 것만 같았다.그의 일행은 빠르게 성혜인을 스쳐 지나갔다. 가장 선두에 있는 사람은 반승제와 얘기하느라 주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어 보였다. 뒤에 있는 사람은 전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이는 성혜인이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낯선 세상이었다.성혜인은 잠깐 넋을 놓고 있다가 골프채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평범한 생김새의 이승주는 명품 운동복을 입고 가볍게 공을 치고 있었다. 성혜인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골프채를 캐디에게 건네주며 말했다.“드디어 만났네요, 페니 씨. 일 한 번 같이 하기 너무 힘든 거 아니에요?”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아닙니다. 저는 그냥 평범한 직원일 뿐인데요.”이때 골프장 직원들이 주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거물이 방문하려는 모양이었다.성혜인의 시선을 느낀 이승주는 허풍을 치기 시작했다.“BH그룹이라고 알아요? 제 아버지가 오늘 BH그룹 대표랑 4조짜리 경기를 준비했어요.”성혜인의 경험으로 허풍 치기를 좋아하는 고객을 상대로는 무조건적인 칭찬이 가장 옳았다.“도련님께서 금방 산 땅만 해도 600억은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4조쯤은 HD은행에게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이승주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그 정도는 아니에요. 하지만 반승제가 금방 귀국하고 나서 첫 합작 기회가 생겼으니 이쯤은 준비해야죠.”“반승제 씨의 귀국이 확실히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죠.”성혜인은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칭찬만 했다.이때 이승주가 캐디가 건네는 물을 받아들며 몸을 일으켰고, 성혜인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일어났다.“제 아버지 말로는 반승제가 이미 결혼했다고 하더라고요.”“그래요? 보기에는 전혀 결혼한 사람 같지 않던데요.”성혜인은 골프채를 꺼내면서 말했다. 갑이 하고 싶은 얘기라면 그녀는 뭐든 맞춰줄 수 있었다.“그러게 말이에요. 결혼을 했으면 와이프를 보여줘야 할 거 아니에요. 이쯤 되면 사람들이 비웃을 정도
이승주는 성혜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밖에는 그의 경호원으로 쫙 깔려 있었다.반승제가 우월한 몸매가 숨김없이 드러나는 운동복을 입은 채로 우아한 자태로 걸어오고있었다. 그는 멀지 않은 곳의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이승주는 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성혜인에게 말했다.“남편이 왔는데 인사는 해야 하지 않나요?”성혜인은 숨을 잠깐 고르더니 밖으로 걸어 나갔다.반승제가 휴게실 문을 빼꼼 열었을 때 여자의 손길을 느끼고 동작을 멈췄다. 여자는 그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휴게실 안으로 밀어버렸다.반승제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나가.”성혜인은 빠르게 휴게실 문을 잠그고 간절한 표정으로 반승제를 바라봤다.“정말 죄송해요. 저 여기 잠깐만 있다가 가면 안 될까요?”반승제는 말없이 성혜인의 무릎을 바라봤다.그의 시선을 따라 성혜인도 자신의 무릎을 바라봤다. 샤워하면서 따듯한 물이 닿아서인지 무릎의 상처는 더욱 선명해졌다. 마치 ‘잘못된 자세’로 이렇게 된 것처럼 말이다...“이건 차에 부딛혀서 이렇게 된 거예요.”성혜인은 발그레한 얼굴로 약간 어색하게 설명했다.‘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왜 설명하고 있는 거야!’“여긴 뭘 하러 왔어?”반승제는 눈을 깔아 그녀는 바라봤다.“일하러요.”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반승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복잡한 표정으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녀를 쫓아낼 생각은 없는 듯했다.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성혜인은 눈을 피했다. 반투명한 욕실 문 뒤에서 반승제의 그림자가 은은하게 보였다.반승제의 몸에는 군살이 하나도 없었다. 샤워기에서 떨어진 물은 단단한 가슴팍을 따라 은밀한 곳으로 흘러내렸다.성혜인은 그의 온도와 힘이 또다시 생각날 것만 같아서 눈을 꼭 감고 몸을 돌렸다.이승주에게 보여줄 건 다 보여줬으니, 성혜인은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반승제와 하룻밤을 보낸 것만으로 해도 이미 충분히 어색했는데 그녀는 이혼을 앞두고 다른 에피소드를 만들고
이승주는 잠깐 멈칫하다가 뒤늦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아차린 듯했다.‘감히 부승제의 이름으로 나를 밀어내다니... 담도 크군.’당사자가 직접 아니라고 말했으니, 이승주는 조만간 다시 만나면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골프장에서 나온 성혜인은 아직도 이승주의 역겨운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그녀는 일단 이곳을 빠져나간 후 방법을 생각해 볼 작정이었다.성혜인의 초라한 차는 주차장의 고급 차량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차에 올라탄 성혜인은 조심스럽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 오던 차의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딪쳐 버렸다.성혜인의 차는 앞으로 3m나 밀려났고 바로 앞에 세워져 있던 벤틀리와 연이어 부딪치게되었다.차에서 내려온 성혜인은 한 중년 여자와 마주쳤다. 깔끔한 메이크업을 한 중년 여자는 성혜인의 차를 보고 약간 무시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성혜인을 돈 많은 남자를 쫓으러온 여자로 여기는 듯했다.중년 여자의 표정을 읽은 성혜인은 머리를 돌려 벤틀리를 바라봤다. 번호판이 무려 같은숫자인 자동차를 중년 여자는 봤는지 모르겠다.“그쪽 차는 내 보험회사에서 배상해 줄 테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여자는 손을 휘적이며 대놓고 귀찮은 티를 냈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앞에 있는 차는...”성혜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자가 먼저 가로챘다.“내가 시간 낭비하기 싫다고 했잖아. 앞 차도 내가 알아서 배상할 테니까 빨리 나가. 나도 주차해야 돼!”앞 차는 아무래도 2000만 원 정도 배상해야 할 것 같았지만 중년 여자가 알아 한다고 했으니, 성혜인은 개의치 않고 떠나갔다.중년 여자는 이제야 앞 차가 최고급 벤틀리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차주를 찾을 생각이 없는 듯 재빨리 주차하고 골프장 안으로 들어갔다....반승제는 이문호 부자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심인우는 차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앞으로 달려갔다가 처참한 현장을 바라보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주차
성혜인은 머리카락을 닦다 말고 골프장에서 부딪힌 벤틀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차라면 이미 얘기가 끝나지 않았던가?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옷을 갈아입고 경찰서로 따라갔다.“성혜인 씨, 이건 차량 번호 11111의 사고 현장 사진입니다. CCTV에 따르면 저녁 6시 20분경, 성혜인 씨가 사고를 내고 아무런 연락처도 남기지 않은 채 도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사고는 전적으로 성혜인 씨의 책임입니다.”성혜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다른 차 한 대를 가리켰다.“이분이 급한 일이 있는데 앞 차도 알아서 배상해 준다고 해서 제가 떠난 거예요.”“벤틀리의 차주분은 성혜인 씨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건 보험 회사의 청구서이니 확인해 보십시오.”6000만 원.이는 성혜인이 배상하지 못할 정도의 거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억울해서라도 배상하고 싶지 않았다.“만약 저희의 말을 따르지...”경찰이 말을 끝내기 전에 한 젊은 경찰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성혜인 씨는 이미 석방되셨습니다.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성혜인은 약간 의아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아무한테도 이 일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경찰을 따라 밖으로 나오자 경찰서 바로 앞에 검은색 차량이 보였다. 경찰은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가족분이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네. 감사합니다.”성혜인은 경찰이 떠난 다음에야 다가가서 상대가 누구인지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차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누군가가 그녀를 힘껏 끌어당겼다.이상함을 눈치챈 성혜인은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살...!”코와 입을 막은 손수건에서는 자극적인 냄새가 났다. 성혜인은 잠깐 버둥거리다가 금세 힘없이 축 늘어졌다.그녀는 정신이 몽롱해서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들었다.“도련님이 호텔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야. 얼른 데려가자.”“근데 진짜 예쁘게 생기기는 했네. 얼굴 하고 몸매가 아주 요물이 따로 없어. 어쩐지 승주 도련님이 CCTV를 보자마자 찾아오라고 한다고 했어
성혜인은 입술을 약간 벌렸고 약의 영향으로 인해 눈빛에 물기가 돌았다.애써 잊으려고 했던 기억의 파편들은 반승제의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며칠 전의 그날 밤에도 그녀는 이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무엇이라 표현할지 모를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그리고 성혜인도 이 분위기를 타 그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이승주는 반승제가 그녀를 밀어내지 않는 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분명 낮에 반승제의 입으로 그녀는 자기 부인이 아니라고 부정하였는데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이승주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성혜인에게 말했다.“페니 씨, 저 여기 있어요. 이쪽으로 와야죠.”이승주는 성혜인의 반응이 약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성혜인은 그 누가 데려간다고 하여도 반항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성혜인을 향해 손을 내밀던 이승주는 이내 반승제의 눈치를 보며 다시 손을 거두었다.반승제도 바보가 아니니 그녀가 낮에 자신의 탈의실로 뛰어 들어온 게 이승주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주의 여자친구일 리가 없었다."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는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겠죠..."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자기 목에 매달려 있는 여자를 힐끔 봤다.성혜인의 눈빛은 매혹적이었고 행동 또한 대담하였다.그녀는 이미 반승제의 목을 잡고는 한 마리의 고양이처럼 그의 목에 매달려 자신의 몸을 맞대며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더웠다. 그녀는 불같은 자신의 지금 이 상태를 식히고 싶었고 때마침 눈앞의 남자는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더운 기운에 그녀는 더 차가운 걸 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지금 이 행동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꼴밖에 되지 못하였다. 갈증이 났다.그녀의 행동을 본 이승주는 아랫배가 당겨 오는 것을 느꼈고 성혜인의 청량한 분위기와 표정은 독을 품은 장미의 가시처럼 남자의 가슴을 찔러댔다.설마 반승제도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닐까?여자와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그가 말하지
설연주는 내내 말없이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 물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설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강민이 지나치게 시끄럽다면 이 딸은 가끔 너무 조용했다.“연주야, 올라가서 자.”설연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아버지. 너무 화내지 마시고 일찍 주무세요.”설준석은 반평생을 살며 아들한테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도 아버지로서의 자각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가슴이 살짝 저릿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돈이 부족하면 말해.”“괜찮아요. 지난번에 주신 4억 원도 아직 안 썼어요.”설준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애인들을 만나러 간 것이다.설연주는 넓디넓은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너무도 넓어 차갑게 느껴졌고 마치 온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고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의 세상은 언제나 혼자 남는 것이 당연했다.방으로 가서 쉬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특정한 벨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설연주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며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얼른 전화를 받아들었다.남성의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밤 사람 보내서 널 데디러 갈 거야.”이 남자는 오성파의 두목이자 설연주가 기대고 있는 가장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와 엮인 것을 후회했지만 그때는 정승후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의 보호가 필요했다. 그때 마주친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 그녀에겐 선택지가 없었다.설연주가 말없이 듣고만 있자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왜? 이제 설연주가 됐다고 나를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설연주의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본능적으로 각인된 공포 그 자체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기다리던 남자는 짜증이 나는 듯 말을 이었다.“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 알잖아? 예전에 울며 빌면서 영원히 내
설우현의 시선이 설연주에게 머물렀다.목을 감싸 쥔 설연주는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설강민은 여전히 화가 나서 말했다.“두고 봐!”설우현은 동생을 대하는 설강민의 태도에 놀라며 미간을 찌푸렸다.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다시 웃으며 설우현을 바라보았다.“오빠, 이제 돌아가세요. 데려다줘서 고마워요.”설우현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며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설우현은 설연주의 눈빛에서 어딘가 죽은 듯한 고요함을 느꼈다. 웃고 있는 그녀였지만 마치 생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린 듯 언제까지 살아갈지 자신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차로 돌아와 한참을 고민하다가 설우현은 창문을 내렸다.“너도 어쨌든 설씨 가문의 사람인데 아무한테나 함부로 당하고 있지 마.”설연주는 목을 감싸고 제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설우현은 차를 출발시키며 백미러로 설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설연주는 조금 더 있다가 거실로 들어갔고 거실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설강민이 때려 부순 모양이었다.설강민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혐오 가득한 눈빛으로 차갑게 노려보았다.“설연주, 김현서한테 더 이상 덤비지 마. 아니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못 할 거야.”설연주는 그의 협박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설강민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계속할 생각이야? 김현서가 예전에 너를 괴롭힌 건 알지만 다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네가 괜히 건드리지 않았으면 걔가 널 괴롭혔겠어? 분명히 말해두는데 김현서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알아서 잘 처신해.”설연주는 설강민의 손을 뿌리치더니 그를 올려다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설강민, 너 때문에 네 여동생이 죽어도 넌 아무렇지 않을까?”설강민은 무심하게 대답했다.“너 지금 멀쩡히 잘 살고 있잖아? 진짜 죽기라도 하면 내가 폭죽 터뜨리며 축하해 줄게.”설연
설우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설연주의 눈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본 설우현은 역시나 자신이 놀림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고 정원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설연주는 그가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따라갔다. 두 사람만 남은 조용한 곳에 도착하자 설우현은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말했다.“네가 원하는 게 설씨 가문의 지분이면 됐지. 굳이 이런 자리에까지 끼어들 필요는 없잖아.”설연주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끝으로 옆에 핀 꽃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설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오빠, 내가 설씨 가문의 돈 때문에 여기 있는 게 아니라면 믿겠어요?”설우현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에게 돈을 뜯어내며 그들을 가지고 놀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오늘 같은 자리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돌아가.”설우현이 냉정한 게 아니라 오랜만에 성혜인과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자리에서 설연주 같은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었다.더군다나 그녀가 있으면 분위기만 어색해질 게 뻔했다. 아버지가 대체 왜 설연주를 부른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설연주는 속눈썹을 살짝 내리고 앞에 있는 꽃을 만지작거리며 그저 조용히 있었다.설우현은 참지 못하고 다시 다그쳤다.“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돌아가라고 했잖아.”“오빠, 혹시 혜인 언니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언니가 나 때문에 기분 나빠할까 봐?”설연주가 자신의 의도를 꿰뚫자 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건 굳이 말로 안 해도 알 줄 알았는데.”그 말을 들은 설연주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성혜인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오빠와 부모가 있으니 말이다.“알았어요. 지금 나갈게요.”설연주는 미련 없이 돌아섰고 설우현은 또 무슨 속셈일지 몰라 잠시 더 지켜보다가 몇 분 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
류소영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가 붉어지기를 반복하며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성혜인은 다소 귀찮은 표정으로 설계도를 정리하며 말했다.“천 달러면 되겠네요. 그런데 오늘 설씨 가문에 가서 식사하지 않으세요? 우리 같이 갈까요?”설연주는 깜짝 놀라며 성혜인을 바라보았다.“혜인 언니?”“맞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가자.”성혜인은 설연주를 도와 작은 판매대를 정리했다. 반면 류소영은 그 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두고 봐! 너희 가만두지 않을 거야!”설연주는 류소영의 말에 웃음만 나왔다. 그녀는 설씨 가문에서 존재감 없는 인물이지만 성혜인은 설의종의 친딸이다. 류소영이 성혜인을 상대로 어찌해 보겠다는 게 어이없을 따름이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차피 성혜인은 겉모습은 부드러워 보여도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류소영이 괜히 건드렸다가 큰코다칠 게 뻔했다.설연주와 성혜인이 설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마침 설우현이 설서율을 안고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어구구, 우리 서율이. 외삼촌이 안아 줄게요. 우리 아가 정말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반승제는 옆에서 인상을 잔뜩 쓰며 그 모습을 보았다.“안으려면 그냥 안든지, 그런 애정 표현은 좀 적당히 하시죠. 징그러우니까.”설우현은 뿌듯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고 반승제를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서율이가 안아주지 않으니까 질투하는 거 다 보이거든요.”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문가에 서 있는 설연주를 발견하고 표정이 굳어졌다. “누가 쟤 불렀어?”설연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의 옆에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오빠, 그 말 너무 섭섭하네요.”설우현은 한마디 더 하려다 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는 설의종을 보고는 꾹 참았다. 설의종에게 또 벌받는 건 피하고 싶었다.설연주의 시선은 설서율에게로 향했다. 귀엽고 얌전한 아기는 큰 눈과 긴 속눈썹을 가진 인형 같았다. 설서율의 부모를 보니 왜 이렇게 사랑스럽게 생겼는지 쉽게 이해
성혜인은 설계도를 한 장 집어 들며 흡족한 눈빛을 보냈다.“이 디자인에 저작권 있나요? 제가 사고 싶어요. 직접 디자인한 거죠?”갓 돌이 지난 쌍둥이를 데리고 성혜인은 플로리아로 부모님을 뵈러 왔다.이번에 반승제도 함께 동행했지만 설씨 가문에서 설서율과 반진율을 돌보고 있어서 함께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설연주가 대답하려는 찰나 주변에서 날카로운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어머나, 이게 누구야? 우리 재주꾼 진연주 아니야?”설연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때 단발머리를 하고 자신만만하게 걸어오는 김현서의 절친, 류소영이 눈에 들어왔다.류소영은 다가오자마자 옆에 있던 선반을 발로 툭 차며 거들먹거렸다.“너 여기서 매일 재주를 팔아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속이는 거야?”성혜인은 류소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류소영은 허리에 손을 얹고 성혜인을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얘가 전에 표절한 거 모르세요? 우리 학교에 소문이 다 퍼져서 아무도 얘 디자인 같은 건 안 사요. 학교 이미지에도 먹칠했으니 말 다 했죠. 그쪽이 돈 없어서 이런 데 온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제대로 된 디자이너 찾아보세요.”설연주는 이미 일어서서 류소영의 오만한 표정을 보며 손에 있던 물건을 던져버렸다.류소영은 순간 당황했다. 예전에는 늘 김현서의 뒤를 따라다니며 설연주를 괴롭혀 왔기에 겁이 많고 나약한 설연주가 반항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설연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표절하지 않았어.”그러자 류소영이 냉소를 흘렸다.“표절도 모자라 교수님과 부적절한 관계까지 맺었잖아. 학교에서 네가 한 짓을 다들 알고 있을걸? 정말 역겨워!”성혜인은 이제야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그 소문 많던 설연주였다. 이 또한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성혜인은 설연주를 다시 한번 바라보며 디자인을 살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꽤 잘 만든 작품이었다.“이거 당신이 직접 디자인한 거 맞죠?
김현서는 설강민의 옆에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당황스럽긴 설강민도 마찬가지였다. 창피한 것인지 설강민은 옆에서 아무런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로 아래층으로 끌려가며 김현서는 무의식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설강민!”“설강민, 너 정말 내가 이대로 쫓겨나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설연주와 엮이면서 김현서는 단 한 번도 설연주를 상대로 져본 적이 없었다. 김현서에게 있어 설연주 앞에서 창피한 꼴을 보이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한편, 설강민은 복잡한 얼굴로 계속하여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경호원들이 모두 설강민의 곁을 지키고 서 있는 탓에 김현서를 구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결국, 시선을 돌려 설연주를 바라보았지만 그 시각, 설연주는 이미 그녀의 방으로 모습을 감춰버렸고 외부의 소란 따위 그녀를 방해할 수 없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았다.설강민이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득 어쩌면 갑작스럽게 나타난 동생이지만 그의 지위에 위협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설강민의 뇌를 완전히 지배해버렸다.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후 설강민은 설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들, 무슨 일이야?”“아버지가 설연주에게 권한이 준거예요? 지금 별장 안의 하인들이 모두 설연주의 말만 듣고 있어요. 아버지, 앞으로 이 집의 물건은 여전히 제 것이에요. 설연주는 그저 남일 뿐이라고요.”설강민의 불평을 묵묵히 듣고 있던 설준석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비록 설준석 본인도 양아치 같은 짓을 많이 하고 다녔지만 최소한 설준석은 전체적인 상황과 흐름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키운 아들은 기본적인 눈치도 볼 줄 모를 줄이야.“설강민, 설연주는 네 동생이야. 김현서야말로 남이라고. 팔꿈치는 안으로 굽어야지. 너 다시 한번 더 그딴 짓거리 하면 내가 정말 네 카드 다 끊어버릴 줄 알아. 김현서 그 여자가 너와 사귀어주는 이유 내가 정말 모를 줄 알아?”설강민은 순간 말
설연주는 애써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어두운 눈빛은 쉽사리 감출 수가 없었다. 설강민이 나쁜 놈인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설연주에게는 거의 밑바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마 설씨 가문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진즉 찌꺼기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렸을 것이다.그런데 누가 또 환생시켜 주겠는가?결국, 인생은 운이었다.설준석이 떠나고 설연주는 다시 방문을 걸어 잠갔다. 이제 막 침대 위에 누웠는데 저 멀리 김현서의 목소리가 또다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보아하니 오늘도 찾아온 모양이다.관계를 끝마치고 김현서는 또다시 설연주의 방문 앞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예전이었다면 절대 상대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설연주는 방문을 열고 냉담하게 씩씩거리는 김현서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인데?”김현서가 팔짱을 끼며 설연주를 아니꼽게 쳐다보았다.“나 지금 배고파. 빨리 요리해줘.”“네가 직접 해.”“이 년이!”화가 치밀어 오른 김현서가 손을 들어 올려 설연주의 뺨을 향해 내려쳤지만 그 손길은 설연주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가로막히고 말았다.이윽고 설연주는 발을 들어 올려 김현서의 배를 거세게 가격했다. 힘이 얼마나 센 것인지 김현서는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반 미터 정도 날아가 버렸다.땅에 엉덩방아를 찧은 김현서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설연주를 바라보았다. 과거 순순히 뺨을 맞고 개 짖는 흉내를 내라면 그대로 따라 하던 진연주는 어디 갔단 말인가?‘감히 나한테 손을 대?’“너 죽고 싶어? 어디 감히 나한테 발길질이야!”혼쭐을 내주기 위해 김현서는 다급히 바닥에서 기어올랐지만 설연주는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거세게 내리쳤다.짝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깜짝 놀란 설강민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자신의 침실에서 달려 나와 물었다.“무슨 일이야?”“흑흑흑, 강민 씨, 저 천박한 년이 감히 나한테 손찌검을 했어.”설강민이 나타나자마자 김현서는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며 그에게
설연주가 집에 돌아왔을 때, 설준석 역시 이미 집에 들어와 있었다.웬일로 멀쩡하게 차려입은 설준석은 설연주를 보자마자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해주었다.“연주야, 네 설의종 삼촌이 방금 전화를 주셨는데 주식 양도 건은 일주일 안에 처리될 거라고 하시더구나.”곧이어 설연주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준비된 진수성찬을 보고 마침내 설준석이 갑자기 그녀에게 친절하게 구는 이유를 알아냈다.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설준석은 설연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식탁 앞에 직접 앉혀주었다.“앉아, 어서 앉아. 넌 앞으로 이 큰돈을 어떻게 쓸 예정이니?”설준석의 물음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나약한 기색이 역력해졌다.“저, 제가 직접 이 돈을 기획해도 될까요? 하지만 현서 언니가 이 돈은 언니가 갖고 싶다고 했거든요.”김현서의 존재라면 설준석 역시 대충 알고 있다. 설강민의 오래된 여자친구이고 가끔 별장에서 부딪힌 적도 있었다. 깊게 알아보지 않아도 욕심이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설준석 본인도 비록 쓸모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여자들의 목적에 대해서라면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런데 설연주의 말까지 들으니 설준석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아직 시집도 오지 않은 남이 감히 설씨 가문의 지분을 탐내? 어림도 없지.“김현서가 너한테 그렇게 말하든?”“네. 어젯밤에 별장에 왔는데 엄청 흉악한 어투로 절 협박했어요. 아버지, 언니가 절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어떡하죠?”“김현서 쟤가 무슨 자격으로 너한테 그런 말을 해? 김현서 그 여자는 아직 시집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연주야, 겁먹지 마. 이 일은 내가 반드시 잘 처리해둘게.”그 순간, 설연주는 공포에 삼켜진 얼굴을 하고는 설준석의 소매를 잡으며 애원했다.“아버지, 제가 아버님께 말했다는 것을 알면 기필코 또 저를 찾아와 못살게 굴 거예요. 아버지께서는 항상 집에 계시지 않으니 아무도 저를 지켜줄 수 없어요.”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좋은 사람은 결코 칭찬이 될 수 없다.설우현은 그대로 거실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느샌가 설연주의 장난에 휘말려 들어간 기분이었다.하지만 더 이상 설연주에 관한 생각을 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친구를 찾아가 술을 마셨다.그렇게 설우현이 별장을 떠난 후에야 설연주는 비로소 천천히 눈을 뜨고 눈앞에 드리워진 꽃밭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유리 꽃밭은 온통 잘 핀 꽃들로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는다는데 바람둥이라서 그런지 설우현은 이러한 낭만적인 놀이를 잘하는 편이었다.이윽고 설연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휴대폰을 슬쩍 살펴보았다.핸드폰 화면에는 온통 그녀를 저주하는 김현서의 욕지거리와 그녀가 보낸 잠자리 사진이었다.대학교 시절 설강민과 사귀게 되면서부터 김현서는 설강민과의 잠자리 사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물론 잠자리 장면이 전부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자고 있거나 두 사람의 팔이 드러난 사진 등 관계 후에 찍은 사진임이 명확했다.처음엔 차단을 해보기도 했지만 차단을 하면 꼭 김현서에 의해 잡혀버렸다.설연주에게 김현서는 악랄하기 그지없지만 다른 친구들 옆에서 김현서는 대범하고 밝은 여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찌 되었든 그녀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는 사람이라면 반에서 절대 잘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설연주는 늘 김현서의 가장 큰 적이었다.사진만 슬쩍 확인한 설연주는 바로 시선을 돌리고 옆에 환히 핀 꽃 한 다발을 잡아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꽃냄새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김현서를 연상케 하는 기분이 들었다. 손끝을 살짝 꺾으면 연약한 꽃은 힘없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부러지고 약간의 즙만 손바닥에 남을 뿐이었다.묵묵히 손가락을 바라보던 설연주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김현서가 정승후한테 연락했어요?”“네, 연락했습니다.”“그럼 다음에 두 사람이 사적으로 만날 때, 두 사람의 영상을 설강민에게 보내줘요. 물론 학교 카페에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