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조금도 지체할 수 없이 반승제에게 이곳의 주소를 보냈다.그 시각, 성혜인은 이미 룸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안에는 중년 남자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고 모든 남자의 곁에는 술 시중을 드는 여자들이 있었다.남자는 중년이 되어 일단 주색에 빠지기만 하면 매우 느끼해져서 보기 좋지 않아진다.성혜인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맨 가운데에 앉아 있는 한도하를 발견했다.그 사람이 바로 오늘 밤 그녀가 찾으려는 사람이었다.한도하의 지난 드라마는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탔다. 그래서 현재 그에게 투자하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원래 그는 성혜인을 거절하려 했으나 예쁜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눈빛을 반짝였다. 지금 품에 안겨있는 여자는 그녀와 비할 바 없이 추해 보였다.“한 감독님.”성혜인이 부르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당신이 페니 씨군요. 어서 앉으세요, 통화에서 페니 씨 목소리를 들었을 때 틀림없이 미녀일 거라고 생각했어요!”그러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모두 그녀에게 쏠리기 시작했다.모든 업계에는 작은 무리가 있었다. 현재 이곳 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한도하의 친구이자 감독들이었다.공기 중의 값싼 술 냄새와 향수 냄새를 맡은 성혜인은 속이 조금 불편했다.그러나 순간 어렸을 적 일이 떠오르며, 이 장면이 예전 성휘를 따라다니며 만났던 모습과 똑같다는 걸 발견했다.그래서 그녀의 적응력은 매우 뛰어났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상대방이 체면을 봐주리란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한도하는 곁에 있던 여자들을 밀치고 기다리다 못해 성혜인에게 손을 흔들었다.성혜인은 한 무리 남자들의 발끝을 넘어 자리에 앉았다.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빙긋 웃으며 한도하를 바라보았다.“한 감독님, 제 취지는 이미 알고 계시죠? 저는 감독님의 다음 영화에 투자하고 싶습니다.”“페니 씨, 일단 술부터 마시고 천천히 본론으로 들어갑시다.”다른 감독들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술도 안 마시면 얘기를 이어나갈 수 없어요.”성혜인은 이미 오기 전에
성혜인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제자리에 멈춰 섰다. 다행히 임경헌이 나타나 중간에서 꽃병을 가로막아 준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형, 이러다가 사람이 죽겠어요! 페니 씨도 보고만 있지 말고 와서 말려 봐요!”임경헌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꽃병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성혜인은 이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황급히 한도하의 앞으로 가서 호흡이 있는지 확인했다.한도하는 가까스로 호흡하고 있었다. 앞으로 촬영은커녕 사람 구실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성혜인의 노력 또한 헛되어 버리고 말이다.성혜인은 짧게 심호흡하고 119에 전화를 걸었다. 반승제는 곁에서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전화를 끊고 반승제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무엇이라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 반승제는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아채며 밖으로 끌어당겼다.혼자 남아 뒷정리를 하게 생긴 임경헌은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려 5분 안에 현장을 정리하도록 했다.반승제를 따라 밖으로 나간 성혜인은 단호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잔뜩 화난 얼굴로 성혜인을 길가의 나무로 내밀면서 말했다.“넌 진짜 남자면 다 되는 거야? 어떻게 된 여자가 수치심도 없어!”성혜인은 그래도 반승제의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가 계획을 망친 건 사실이지만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순간 얄팍한 고마움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대표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도 할 말이 없네요.”반승제는 순간 호흡을 멈추더니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리고 성혜인을 끌고 차 안에 들어갔다.“저런 남자를 찾아갈 바에는 나를 찾아오지 그랬어. 내가 돈이 없어, 권력이 없어?”반승제는 성혜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자존감은 반승제에 의해 짓밟히고 또 짓밟혔다. 성혜인으로서든, 페니로서든 반승제의 앞에서는 한치의 자존감도 남길 수 없었다.“질려서요. 대표님한테는 이제 관심 없어요.”성혜인은 시선을 떨구면서
성혜인은 머리를 숙여 핸드폰을 확인했다. 시간이 늦은 것을 보고 그녀는 덤덤하게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대표님, 저는 이만 쉬러 돌아갈게요.”반승제는 닫힌 방문 밖으로 사라진 성혜인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호텔 로비로 내려간 성혜인은 서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눈물을 참아 보려고 머리를 들었다. 별로 소용이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이때 장하리가 건 전화가 핸드폰을 울렸다. 그녀는 하루에 적어도 세 번씩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이번은 법무팀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사장님, 윤씨 가문의 희생양이 누군지 알아냈어요. 희생양은 윤희선의 아들인데 이미 구속되었다고 해요. 이번 사건은 화제성이 높은 데다가 윗분들의 시선을 끌었거든요. 더구나 증거가 명확해서 바로 구속될 수 있었대요. 윤희선은 지금도 아들을 살려보겠다고 동네방네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어요. 근데 지금 같아서는 최소 10년 형을 선고받을 거예요.”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의 이름에 성혜인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얼굴을 탁탁 치면서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한 장하리와 통화를 계속했다.반승제는 걱정되는 마음에 성혜인을 쫓아 나왔다. 늦은 시간에 그녀 혼자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자태로 호텔 대문에서 누군가와 화기애애하게 통화하고 있었다.한순간에 치밀어 오른 분노는 반승제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 하지만 성혜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장하리에게 말했다.“법무팀한테 계속 노력해 달라고 전해. 진짜 10년 형을 받을 수 있다면 윤희선은 아주 윤단미라면 치를 떨게 될 거야. 때가 되면 아주 흥미진진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겠지.”성혜인이 이 말을 하고 있을 때 반승제는 마침 그녀의 말이 똑똑히 들리는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성혜인과 윤희선 사이의 원한이라면 반승제는 제원대학교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이제는 윤단미까지 더해졌으니 그녀가 윤씨 가문을 증오하는 것도
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더 이상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내린 채 이혼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보더니 억지로 입을 열었다.“며칠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반승제는 성혜인의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진 것을 보고 그나마 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덕분에 성혜인도 부드러운 방법을 쓰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태어난 그는 남에게 굴복하기에는 너무 잘났기 때문이다.“좋아, 그럼 날 차단한 것부터 풀어줘.”성혜인은 반승제가 보는 앞에서 차단을 풀었다. 그러자 반승제는 또 그녀를 벽에 밀치고 기나긴 키스를 시작했다.그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승제가 왜 이토록 키스를 좋아하는지를 말이다. 이번에도 반승제는 그녀가 숨넘어갈 직전이 되어야 천천히 풀어줬다.“빨리 결정해.”성혜인은 급한 대로 선택을 뒤로 미뤘을 뿐이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전혀 몰랐다.반승제와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무조건 피해야 했다. 그와 계속 만나다가는 조만간 그 부드러운 키스에 넘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반승제에게 한 번 넘어가면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성혜인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해결하면서는 그의 기분을 무조건 생각해야 했다. 적어도 윤씨 가문의 일에 개입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또 이틀이 지나고 성혜인이 반승제와 이혼하기까지는 다섯 날이 남았다.윤희선의 아들이 감옥에 가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이었다. 세간에 악명이 자자해진 세한그룹은 반승제의 6000억 원 투자금만 기다리고 있었지만 계약일은 열흘 후라고 했다.인터넷에는 한도하가 술 먹고 싸움질하다가 불구가 되었다는 기사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다만 싸움질의 상대가 반승제가 아닌 동네 조폭으로 나왔다.아침 식사가 끝난 다음 임경헌은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페니 씨, 한도하 씨의 일은 제가 깔끔하게 해결했어요.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요.”임경헌은 이토록 진지한 일도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성혜인이 짧게 대답한 것을
룸 앞에 도착한 반승제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성혜인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건 또 처음이기 때문이다.문이 열리고 테이블에 놓인 수많은 술병이 반승제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것도 전부 한 방에 훅 가는 도수 높은 술들이었다.눈치 백단인 반승제는 금방 성혜인의 꼼수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별말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가 그녀가 술을 따르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마셔요, 대표님.”반승제는 술잔을 매만지면서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아주 평온했다. 하지만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분명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반승제는 알아차렸다. 이것은 함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그는 기꺼이 속아 넘어가기로 했다.성혜인은 술잔을 잡은 채 움직이지 않는 반승제의 손에 자기 손을 겹쳤다.“왜요? 혹시 오늘은 술 별로예요?”이 순간 반승제는 미인계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술잔에 담긴 술을 단번에 원샷 했고 성혜인은 또다시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역시 시원하시네요.”반승제는 지금의 상황이 웃기기만 했다. 만약 성혜인이 그를 술 취하게 하는 것으로 보복하려는 것이라면 너무나도 유치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혜인만 즐겁다면 그는 기꺼이 취해줄 수 있었다.반승제는 시선을 떨군 채 성혜인이 술을 따르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는 이번에 가장 독한 술을 한 잔 가득 채웠다.“대표님, 만나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한 잔 마실까요?”성혜인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반승제는 눈썹을 튕기며 피식 웃었다.“그래?”“네.”반승제는 또다시 술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로 마시지 않고 성혜인과 팔짱을 꼈다. 러브샷을 하려는 것이었다.가까이 다가온 반승제에 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반승제는 술잔을 단번에 비웠는데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나머지 머리카락이 다 스치고 있었기 때문이다.사실 성혜인은 알고 있었다. 반승제가 진작 자신의 유치한 수단을 보아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반승제는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그가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성혜인을 안으려고 했을 때 예상 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제야...”윤단미는 룸 안에 한가득 퍼진 술 냄새와 반승제의 모습을 보고 금방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눈빛에는 기쁨이 번져갔고 속으로는 신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그녀는 빠르게 외투를 벗어 조각 같은 몸매를 드러냈다.“승제야, 너 괜찮아? 내가 부축해 줄게.”윤단미가 가까이 오자 성혜인과 완전히 다른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반승제가 아무 말도 없자 윤단미는 당연히 묵인으로 여겼다. 그리고 바로 무릎을 꿇으며 그의 바지 벨트를 풀려고 했다.반승제는 몸을 뒤로 쓱 빼더니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어떻게 왔어?”윤단미는 반승제의 질문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다시 그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그에 의해 매정하게 내쳐지고 말았다.“대답해, 어떻게 왔냐니까?!”반승제는 언성을 높이면서 술병을 던졌다. 귀를 찌르는 쨍그랑 소리와 함께 술은 바닥으로 쏟아지고 말았다.윤단미는 놀란 듯 창백한 안색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반승제의 뜻을 거스를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반승제가 정신을 차린 순간 윤씨 가문이 산산이 조각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토록 좋은 기회를 그냥 날려 보내는 것도 싫었다.“승제야, 나랑 하자. 나 페니 씨보다 잘할 자신 있어. 난 진심으로 널 좋아한다고.”반승제의 표정은 아주 차가웠다. 공기 속에 서리가 낄 정도로 말이다.“계속 말 돌리는 걸 보면 6000억 원이 필요 없어졌나 봐?”반승제의 말투는 아주 가벼웠다. 마치 세한그룹의 파산이 장난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윤단미는 이를 꽉 악물며 제자리에 얼어붙었다.“모, 모르는 사람의 문자를 받았어. 네가 여기에 있다는 문자... 난 그냥 속는 셈으로 한 번 와본 거야. 나한테 화내지 마...”반승제는 모든 것이 이해된 듯 먼 곳을 바라봤다. 약 기운과 분노가 가슴에서 들끓어 올랐지만 정신만큼은 또렷했다.‘어쩐지 나
약물에 심한 알레르기 반응이 생긴 반승제는 하룻저녁 꼬박 응급실에 있다가 병실로 갔다. 이번에는 진짜 목숨을 잃을 뻔한 정도였다.진세운은 반승제가 안정을 되찾은 다음에야 한숨을 쉬면서 반씨 집안과 그의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그중에서도 서주혁과 온시환이 연락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금방 병원에 도착했다.반승제가 약물 알레르기로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두 사람은 긴장한 기색으로 스카이웨어의 CCTV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가 성혜인과 함께 스카이웨어에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 후에는 윤단미까지 왔으니 총 두 명의 용의자가 있는 셈이었다.서주혁은 윤단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반승제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에 겁을 먹은 그녀는 어젯밤 룸에서 본 모든 것을 불어버렸다.서주혁은 금방 이해했다. 반승제에게 약을 먹인 사람은 성혜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약 안에 그와 맞지 않는 성분이 있는 탓에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반승제가 눈을 꼭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서주혁은 주먹을 쥐면서 몸을 일으켰다.“내가 그 여자를 죽여버리고 말 거야!”온시환은 황급히 서주혁을 막아섰다.“진정해. 그 여자를 건드리면 승제가 깨어나자마자 너를 죽이려 들 수도 있으니까.”진세운은 의사 가운을 입은 채로 한쪽에 서 있었다. 서주혁과 온시환보다는 훨씬 태연한 모습이었다.“승제는 괜찮을 거야. 그리고 이번 일의 진실을 절대 반씨 집안에 알리지 마. 안 그러면 할아버지가 페니 씨의 존재를 알아버리고 말 테니까.”만약 반태승이 나선다면 아무도 페니를 지킬 수 없게 된다. 어차피 반승제가 깨어난 후에 알아서 해결할 일이니 진세운은 성급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얼마 후 반태승이 직접 병원에 왔다. 반승제가 약물 알레르기 때문에 쓰러졌지만 지금은 괜찮다는 말을 듣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왜 갑자기 알레르기가 생겼냐는 반태승의 질문에 진세운은 그냥 약을 먹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라고 했다. 어차피 전에도 반승제에게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몰랐으니 말이
성혜인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남자의 동작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살려줘! 누가 나 좀 살려줘! 아파, 아프다고!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혹시 이승주인가? 아니면 한도하의 사람? 이 향수 냄새는... 절대 반 대표님일 리가 없어.’성혜인의 눈물은 진작 얇은 천을 흠뻑 적셨다. 하지만 등지고 있던 탓에 반승제에게는 보이지 않았다.반승제는 성혜인이 쓰러진 다음에도 풀어주지 않았다. 그는 장장 이틀 동안 밥도 먹지 않고 성혜인만 괴롭혀 댔다.처음에는 그래도 눈물이라도 흘리던 성혜인은 뒤로 가면서 그냥 몸을 웅크리고만 있었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만 들어도 몸은 굳어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기나긴 시간을 견뎠다.반승제는 마음속의 분노가 진정된 다음에야 성혜인을 풀어줬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가린 천은 끝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반승제는 정신을 잃은 그녀를 깨끗하게 씻겨주고 로즈가든으로 돌려보냈다.성혜인은 저녁 여덟 시쯤에 눈을 떴다. 몸은 구석구석 다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천천히 눈을 뜨고 익숙한 천장을 본 그녀는 헛것이라도 본 줄 알고 몸부림치다가 그만 침대 아래로 쿵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머리는 윙 울렸다.협탁에 놓인 핸드폰을 확인하고 나서야 성혜인은 시간이 이틀이나 지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장장 이틀 동안이나 납치당했다는 뜻이기도 했다.성혜인은 아직도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다. 치욕스러운 자세로 침대에 엎어져 있느라 상대의 몸매가 약한지 뚱뚱한지, 키는 큰지 작은지도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아직도 몸이 덜덜 떨리는 탓에 핸드폰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래서 반 시간이나 진정하고 나서야 겨우 강민지에게 전화를 걸었다.강민지는 연락받자마자 바로 출발해서 로즈가든으로 왔다. 그녀는 귀로부터 시작해서 붉은 흔적을 가득 달고 있는 성혜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너...”성혜인은 강민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안도감이 드는 동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