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머리를 숙여 핸드폰을 확인했다. 시간이 늦은 것을 보고 그녀는 덤덤하게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대표님, 저는 이만 쉬러 돌아갈게요.”반승제는 닫힌 방문 밖으로 사라진 성혜인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호텔 로비로 내려간 성혜인은 서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눈물을 참아 보려고 머리를 들었다. 별로 소용이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이때 장하리가 건 전화가 핸드폰을 울렸다. 그녀는 하루에 적어도 세 번씩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이번은 법무팀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사장님, 윤씨 가문의 희생양이 누군지 알아냈어요. 희생양은 윤희선의 아들인데 이미 구속되었다고 해요. 이번 사건은 화제성이 높은 데다가 윗분들의 시선을 끌었거든요. 더구나 증거가 명확해서 바로 구속될 수 있었대요. 윤희선은 지금도 아들을 살려보겠다고 동네방네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어요. 근데 지금 같아서는 최소 10년 형을 선고받을 거예요.”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의 이름에 성혜인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얼굴을 탁탁 치면서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한 장하리와 통화를 계속했다.반승제는 걱정되는 마음에 성혜인을 쫓아 나왔다. 늦은 시간에 그녀 혼자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자태로 호텔 대문에서 누군가와 화기애애하게 통화하고 있었다.한순간에 치밀어 오른 분노는 반승제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 하지만 성혜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장하리에게 말했다.“법무팀한테 계속 노력해 달라고 전해. 진짜 10년 형을 받을 수 있다면 윤희선은 아주 윤단미라면 치를 떨게 될 거야. 때가 되면 아주 흥미진진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겠지.”성혜인이 이 말을 하고 있을 때 반승제는 마침 그녀의 말이 똑똑히 들리는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성혜인과 윤희선 사이의 원한이라면 반승제는 제원대학교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이제는 윤단미까지 더해졌으니 그녀가 윤씨 가문을 증오하는 것도
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더 이상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내린 채 이혼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보더니 억지로 입을 열었다.“며칠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반승제는 성혜인의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진 것을 보고 그나마 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덕분에 성혜인도 부드러운 방법을 쓰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태어난 그는 남에게 굴복하기에는 너무 잘났기 때문이다.“좋아, 그럼 날 차단한 것부터 풀어줘.”성혜인은 반승제가 보는 앞에서 차단을 풀었다. 그러자 반승제는 또 그녀를 벽에 밀치고 기나긴 키스를 시작했다.그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승제가 왜 이토록 키스를 좋아하는지를 말이다. 이번에도 반승제는 그녀가 숨넘어갈 직전이 되어야 천천히 풀어줬다.“빨리 결정해.”성혜인은 급한 대로 선택을 뒤로 미뤘을 뿐이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전혀 몰랐다.반승제와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무조건 피해야 했다. 그와 계속 만나다가는 조만간 그 부드러운 키스에 넘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반승제에게 한 번 넘어가면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성혜인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해결하면서는 그의 기분을 무조건 생각해야 했다. 적어도 윤씨 가문의 일에 개입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또 이틀이 지나고 성혜인이 반승제와 이혼하기까지는 다섯 날이 남았다.윤희선의 아들이 감옥에 가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이었다. 세간에 악명이 자자해진 세한그룹은 반승제의 6000억 원 투자금만 기다리고 있었지만 계약일은 열흘 후라고 했다.인터넷에는 한도하가 술 먹고 싸움질하다가 불구가 되었다는 기사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다만 싸움질의 상대가 반승제가 아닌 동네 조폭으로 나왔다.아침 식사가 끝난 다음 임경헌은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페니 씨, 한도하 씨의 일은 제가 깔끔하게 해결했어요.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요.”임경헌은 이토록 진지한 일도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성혜인이 짧게 대답한 것을
룸 앞에 도착한 반승제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성혜인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건 또 처음이기 때문이다.문이 열리고 테이블에 놓인 수많은 술병이 반승제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것도 전부 한 방에 훅 가는 도수 높은 술들이었다.눈치 백단인 반승제는 금방 성혜인의 꼼수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별말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가 그녀가 술을 따르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마셔요, 대표님.”반승제는 술잔을 매만지면서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아주 평온했다. 하지만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분명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반승제는 알아차렸다. 이것은 함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그는 기꺼이 속아 넘어가기로 했다.성혜인은 술잔을 잡은 채 움직이지 않는 반승제의 손에 자기 손을 겹쳤다.“왜요? 혹시 오늘은 술 별로예요?”이 순간 반승제는 미인계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술잔에 담긴 술을 단번에 원샷 했고 성혜인은 또다시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역시 시원하시네요.”반승제는 지금의 상황이 웃기기만 했다. 만약 성혜인이 그를 술 취하게 하는 것으로 보복하려는 것이라면 너무나도 유치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혜인만 즐겁다면 그는 기꺼이 취해줄 수 있었다.반승제는 시선을 떨군 채 성혜인이 술을 따르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는 이번에 가장 독한 술을 한 잔 가득 채웠다.“대표님, 만나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한 잔 마실까요?”성혜인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반승제는 눈썹을 튕기며 피식 웃었다.“그래?”“네.”반승제는 또다시 술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로 마시지 않고 성혜인과 팔짱을 꼈다. 러브샷을 하려는 것이었다.가까이 다가온 반승제에 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반승제는 술잔을 단번에 비웠는데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나머지 머리카락이 다 스치고 있었기 때문이다.사실 성혜인은 알고 있었다. 반승제가 진작 자신의 유치한 수단을 보아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반승제는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그가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성혜인을 안으려고 했을 때 예상 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제야...”윤단미는 룸 안에 한가득 퍼진 술 냄새와 반승제의 모습을 보고 금방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눈빛에는 기쁨이 번져갔고 속으로는 신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그녀는 빠르게 외투를 벗어 조각 같은 몸매를 드러냈다.“승제야, 너 괜찮아? 내가 부축해 줄게.”윤단미가 가까이 오자 성혜인과 완전히 다른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반승제가 아무 말도 없자 윤단미는 당연히 묵인으로 여겼다. 그리고 바로 무릎을 꿇으며 그의 바지 벨트를 풀려고 했다.반승제는 몸을 뒤로 쓱 빼더니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어떻게 왔어?”윤단미는 반승제의 질문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다시 그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그에 의해 매정하게 내쳐지고 말았다.“대답해, 어떻게 왔냐니까?!”반승제는 언성을 높이면서 술병을 던졌다. 귀를 찌르는 쨍그랑 소리와 함께 술은 바닥으로 쏟아지고 말았다.윤단미는 놀란 듯 창백한 안색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반승제의 뜻을 거스를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반승제가 정신을 차린 순간 윤씨 가문이 산산이 조각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토록 좋은 기회를 그냥 날려 보내는 것도 싫었다.“승제야, 나랑 하자. 나 페니 씨보다 잘할 자신 있어. 난 진심으로 널 좋아한다고.”반승제의 표정은 아주 차가웠다. 공기 속에 서리가 낄 정도로 말이다.“계속 말 돌리는 걸 보면 6000억 원이 필요 없어졌나 봐?”반승제의 말투는 아주 가벼웠다. 마치 세한그룹의 파산이 장난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윤단미는 이를 꽉 악물며 제자리에 얼어붙었다.“모, 모르는 사람의 문자를 받았어. 네가 여기에 있다는 문자... 난 그냥 속는 셈으로 한 번 와본 거야. 나한테 화내지 마...”반승제는 모든 것이 이해된 듯 먼 곳을 바라봤다. 약 기운과 분노가 가슴에서 들끓어 올랐지만 정신만큼은 또렷했다.‘어쩐지 나
약물에 심한 알레르기 반응이 생긴 반승제는 하룻저녁 꼬박 응급실에 있다가 병실로 갔다. 이번에는 진짜 목숨을 잃을 뻔한 정도였다.진세운은 반승제가 안정을 되찾은 다음에야 한숨을 쉬면서 반씨 집안과 그의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그중에서도 서주혁과 온시환이 연락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금방 병원에 도착했다.반승제가 약물 알레르기로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두 사람은 긴장한 기색으로 스카이웨어의 CCTV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가 성혜인과 함께 스카이웨어에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 후에는 윤단미까지 왔으니 총 두 명의 용의자가 있는 셈이었다.서주혁은 윤단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반승제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에 겁을 먹은 그녀는 어젯밤 룸에서 본 모든 것을 불어버렸다.서주혁은 금방 이해했다. 반승제에게 약을 먹인 사람은 성혜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약 안에 그와 맞지 않는 성분이 있는 탓에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반승제가 눈을 꼭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서주혁은 주먹을 쥐면서 몸을 일으켰다.“내가 그 여자를 죽여버리고 말 거야!”온시환은 황급히 서주혁을 막아섰다.“진정해. 그 여자를 건드리면 승제가 깨어나자마자 너를 죽이려 들 수도 있으니까.”진세운은 의사 가운을 입은 채로 한쪽에 서 있었다. 서주혁과 온시환보다는 훨씬 태연한 모습이었다.“승제는 괜찮을 거야. 그리고 이번 일의 진실을 절대 반씨 집안에 알리지 마. 안 그러면 할아버지가 페니 씨의 존재를 알아버리고 말 테니까.”만약 반태승이 나선다면 아무도 페니를 지킬 수 없게 된다. 어차피 반승제가 깨어난 후에 알아서 해결할 일이니 진세운은 성급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얼마 후 반태승이 직접 병원에 왔다. 반승제가 약물 알레르기 때문에 쓰러졌지만 지금은 괜찮다는 말을 듣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왜 갑자기 알레르기가 생겼냐는 반태승의 질문에 진세운은 그냥 약을 먹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라고 했다. 어차피 전에도 반승제에게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몰랐으니 말이
성혜인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남자의 동작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살려줘! 누가 나 좀 살려줘! 아파, 아프다고!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혹시 이승주인가? 아니면 한도하의 사람? 이 향수 냄새는... 절대 반 대표님일 리가 없어.’성혜인의 눈물은 진작 얇은 천을 흠뻑 적셨다. 하지만 등지고 있던 탓에 반승제에게는 보이지 않았다.반승제는 성혜인이 쓰러진 다음에도 풀어주지 않았다. 그는 장장 이틀 동안 밥도 먹지 않고 성혜인만 괴롭혀 댔다.처음에는 그래도 눈물이라도 흘리던 성혜인은 뒤로 가면서 그냥 몸을 웅크리고만 있었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만 들어도 몸은 굳어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기나긴 시간을 견뎠다.반승제는 마음속의 분노가 진정된 다음에야 성혜인을 풀어줬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가린 천은 끝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반승제는 정신을 잃은 그녀를 깨끗하게 씻겨주고 로즈가든으로 돌려보냈다.성혜인은 저녁 여덟 시쯤에 눈을 떴다. 몸은 구석구석 다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천천히 눈을 뜨고 익숙한 천장을 본 그녀는 헛것이라도 본 줄 알고 몸부림치다가 그만 침대 아래로 쿵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머리는 윙 울렸다.협탁에 놓인 핸드폰을 확인하고 나서야 성혜인은 시간이 이틀이나 지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장장 이틀 동안이나 납치당했다는 뜻이기도 했다.성혜인은 아직도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다. 치욕스러운 자세로 침대에 엎어져 있느라 상대의 몸매가 약한지 뚱뚱한지, 키는 큰지 작은지도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아직도 몸이 덜덜 떨리는 탓에 핸드폰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래서 반 시간이나 진정하고 나서야 겨우 강민지에게 전화를 걸었다.강민지는 연락받자마자 바로 출발해서 로즈가든으로 왔다. 그녀는 귀로부터 시작해서 붉은 흔적을 가득 달고 있는 성혜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너...”성혜인은 강민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안도감이 드는 동
피곤했던 성혜인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바로 침실로 들어가려 했다. 잔뜩 부은 눈과 불편한 걸음걸이는 누가 봐도 험한 일을 당한 사람의 모습이었다.반승제는 몸을 일으키면서 성혜인을 불러세웠다.“페니야.”반승제를 상대할 기운조차 없었던 성혜인은 곧장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엎어졌다. 반승제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더니 문턱에 기댔다. 그리고 한참 주저하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성혜인의 길지 않은 머리카락은 완전히 흩어져 있었고 손은 이불을 꼭 잡고 있었다. 반승제는 그녀에게 했던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를 저승 문턱에 보냈다면 설명할 기회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그녀를 이틀 동안 괴롭힌 건 이미 많이 봐준 것이었다.반승제는 침대 곁에 앉아 성혜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자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그날 네가 나한테 먹인 약에 알레르기가 생겨서 나 응급실에 다녀왔어.”성혜인은 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아주 무서운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말이다.“죄송해요...”성혜인은 반승제가 알레르기가 있을 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약을 먹이지도 않았을 것이다.성혜인의 사과에 반승제는 화가 완전히 풀리는 것 같아 미소를 지었다.“만약 다른 사람이 나한테 이런 짓을 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수했을 거야.”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반승제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말을 이었다.“오늘 힘들었지?”성혜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승제가 오늘 일을 알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강민지가 선택한 병원의 보안이 잘 되어 있는 건 둘째 치고 그는 여자의 아픔으로 비아냥댈 사람 같지 않았다.그녀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몸을 떨었다. 그러자 반승제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사실 요즘 너랑 같이 있던 남자... 나야.”성혜인은 눈물 자국으로 가득한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퉁퉁 부은 눈에서 놀라움은 금방 분노로 변했다.“반승제!!!”성혜인은
성혜인의 반응에 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슴은 찢어지듯 아팠다. 그가 큰 결심을 내리고 한 고백은 결국 장난으로 지나가고 말았다.반승제는 24년의 인생 동안 단 한 번도 이런 굴욕을 당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 두말없이 로즈가든에서 떠나 온시환과 서주혁을 만나러 갔다. 온시환이 그의 이혼을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열었기 때문이다.반승제가 룸 안에 들어서자마자 온시환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너 페니 씨랑 사흘이나 사라진 거 알아? 너 솔직히 얘기해. 페니 씨 아직 이승에 있기나 해?”반승제는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에 잠겼다. 그러자 온시환은 성혜인이 벌써 뼛가루가 되어 어디 묻힌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온시환은 그가 이런 일에 휘말리는 것을 처음 봤다. 그가 목숨이 위태로워진 것도 물론 처음이다.서주혁도 궁금한 듯 반승제를 힐끗 봤다. 그들 모두 성혜인이 죽었다고 추측하는 듯한 모습이었다.“술이 상한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쓰지?”스카이웨어의 관리하에 절대 상한 술이 나타날 리가 없다. 더구나 술은 원래도 쉽게 상하는 것이 아니었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한결같이 향긋한 맛이었다.“네가 기분이 나빠서 그런 건 아니고? 설마 지금 와서 이혼하기 싫어진 건 아니지?”반승제는 손을 흠칫 떨며 시선을 떨궜다.“나 방금 페니한테 고백했어.”“뭐?!”쨍그랑!쨍그랑!온시환의 목소리와 함께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하나는 온시환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주혁의 것이었다.두 사람은 반승제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여자에게 고백할 줄은 진짜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이 자식이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네.’온시환과 서주혁은 서로 묵묵히 눈을 마주쳤다. 둘 다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온시환이 먼저 감정을 추스르며 물었다.“승제야, 너 페니 씨를 좋아해?”반승제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했다.“모르겠어.”온시환은 미
염정아는 그들의 집에서 제원까지 오려면 거리가 엄청나게 멀었고 동생은 멀리 외출한 적이 없어서 표는 어디서 어떻게 사고 차는 또 어떻게 타야 되는지도 모를 텐테 그냥 애교부리며 농담한다고 생각했다.“내가 말했지. 내가 갈거닉가 그때까지 집에서 애들 잘 돌보라고. 안 그럼 나 화낼거야. 알지? 화내면 널 버릴 수도 있다는걸.”동생이 살면서 제일 무서운 일은 염아정에게 버림받는 일이었고 그 말에 당황한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아니야, 나 집에서 애들 잘 돌보고 있을 테니까 절대 버리면 안 돼.”염정아는 전화기 너머로 동생의 당황함을 눈치채고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말만 잘 들으면 안버릴테닉가 걱정하지 마.”“알았어. 나 누나 말 잘 들어. 진짜 잘 들을 거야.”전화를 끊은 후, 화가 치밀어 오른 원아정은 바로 동생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원아정은 동생을 통해 염정아를 불러내여 공지민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내려 했지만 동생은 그렇게 통화를 끊어버렸다.동생은 뺨을 맞고도 이유를 몰랐고 감히 되받아치지도 못했다.원아정은 힘들게 이 남자를 불러 제원까지 데리고 온 것만 해도 억울함에 미칠것 같았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니 더 화가 치밀었다.원아정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고 계속하여 염정아의 동생을 위협했다.“누나한테 다시 전화 걸어 꼭 나오라고 해요. 안 그러면 나도 당신 상관 안 할 거예요. 이렇게 큰 제원에서 누나한테 연락 안 하면 당신은 먹지도 못하고 길바닥에서 그대로 죽어 버릴 수 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누나도 영원히 못 볼 거 아니에요.”동생은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누나한테서 버림받는 것이 더 두려워서 더는 연락 하지 않기로 했다.원아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바로 저절로 염정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염정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아까 물어보지 못한 말부터 했다.“너 누구 휴대전화로 연락한 거야? 왜 번호가 틀려?”원아정은 음험하고 악독한 소리로 말했다.“염정아, 잘 들어. 네
아래층 마트 이모는 몇 년 동안 줄곧 그들 남매를 돌봐 주었고 염정아가 사람을 시켜 동생을 데리고 제원에 오라고 한다니 살짝 의심은 생겨 걱정 되었지만 원아정의 깔끔한 옷차림을 보더니 돈이 모자랄 같지는 않았고 게다가 지적장애인 사람을 데려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테고 하물며 염정아의 친구이기도 하여 안심되었다.“이모, 이건 우리 집 열쇠에요. 제가 없는 동안 우리 집에 들러 애들 밥해줄 수 있어요?”마트 이모는 염정아가 좀 전에 집에 돌와왔을 때 물건도 많이 사들였고 돈 씀씀이가 큰 것으로 보아 제원에서 많은 돈을 벌어 동생을 데려다 이틀 정도 놀아 주려고 하는 거로 생각하여 이 상황이 잘못되진 않은 것 같았다.“그래, 알았어. 근데 갔다 일찍 돌아와야 해.”“네, 고마워요 이모.”동생은 조금 모자라지만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그는 인사를 마치고 옷 두 벌을 챙겨 원아정을 따라 떠났다.그들은 자가용으로 움직였고 동생은 처음 길을 떠나 보는 거라 물음이 끊기질 않았다.원아정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고 그런 동생을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누나가 왜 갑자기 그렇게 큰돈을 벌어 올 수 있는지 생각 안 해요? 당신을 집에 두고 밖에서 다른 남자랑 있는 거잖아요. 당신은 바보라서 침대에서 만족하게 해줄 수 없으니 나가서 다른 정상적인 남자를 찾은 거 아니에요? 그 남자랑 있으면서 당신을 바보라고 비아냥거렸을지도 모르잖아요.”동생은 원아정의 말뜻은 전혀 몰랐지만, 염정아는 절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원아정의 말을 듣고 동생은 더 이상 물음을 던지지 않고 창가에 기대어 빠르게 움직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입가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원아정은 누나가 바람 피고 있다는 말까지 하며 그렇게 자극했는데도 웃고 있는 동생을 보니 바보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이튿날 밤이 되자 그들이 앉은 차는 드디어 제원에 도착했다.원아정은 다시 거지로 위장해야 하기에 동생더러 같이 거지 옷차림을 하게 하고 여
온시환이 완벽하게 변장한 탓에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그렇게 쉽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공지민은 계속 별장에 머물러 있었고 매일 연승혁의 안부를 물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통화 너머로 공지민은 연승혁이 지금 많이 초조해진 것을 느꼈으나 그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공지민은 항상 자신의 계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것이 그렇게 빨리 찾아왔고 무정하게 무너뜨리게 할 줄은 몰랐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줄곧 원아정을 찾고 있었고 그와 원진이 원아정을 해외로 보내겠다고 한 후 원진의 부하들도 그녀를 찾고 있었다.하지만 원진은 원아정이 죽든 살든 별다른 관계가 없었기에 큰 신경을 써서 찾은 것은 아니였다.원아정은 항상 거지들 속에 숨어 지냈고 그동안 훔친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어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원아정은 기억 속에 있는 몇 개의 번호에 연락하여 일일이 도움을 청했고 다행히 정보도 얻어 냈다.그것은 당시 공지민에 의해 숨겨져 있던 사람이 발견되었고 그 별장으로 배달하던 배달원이 또 다른 곳에서 염정아를 보았다는 것이다.소식을 들은 원아정은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염정아의 집으로 향했다.그 배달원은 제원에서 배달하다가 며칠 전에 돌아왔는데 마침 식당에서 또다시 염정아가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원아정의 거지 차림에 배달원은 약간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손 크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다.“그 별장에 몇 번이나 배달해서 얼굴을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그녀가 일부러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매일 집에만 있는 것 같아 보여 부잣집 도련님의 내연녀일 거로 생각했어요.”배달원의 말을 듣고 원아정은 바로 돈 주고 사람 찾아 염정아의 정보를 알아봤다.알아본 데 의하면 염정아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고 심지어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다.그런데 왜 공지민은 제원에서 염정아를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자, 원아정은 자신이 찾아낸 정보 자료들을 정리해 보다가 다
온시환은 바로 인사를 건네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서 요리사의 일을 거들었지만, 눈길은 항상 거실에 있는 공지민 한테로 향했고 채소를 다 씻었을 때 공지민은 혼자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온시환은 주방 사람들에게 핑곗거리를 대고 공지민 뒤를 따라 올라갔다.온시환은 변장에 가발까지 쓰고 렌즈 색마저 바꿔버린 자신을 공지민이 알아보지 못하자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불렀다.“지민아.”공지민은 멈춰 선 대로 낯선 얼굴을 보며 몇 초 동안 뜸 들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온시환?”“응, 나야.”온시환은 카메라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말하기 시작했다.“너 연승혁의 별장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혹시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데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니?”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니었고 온시환을 잊은 것도 아니였다.그녀가 여기 별장에 들어오게 된 것도 이상우에게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공지민은 어떤 대가를 치르던 연승혁을 죽이고 구은우의 복수를 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애초에 온시환의 얼굴의 점이 구은우를 닮은 것도, 가슴에서 뛰고 있는 심장도 구은우의 심장이 었기에 온시환과 밤을 보낼수 있었고 그에게 잘해 준것도 구은우를 느끼고 싶은 작은 위로의 감정이었을 뿐이었다.이제 공지민은 연승혁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온시환과의 관계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온시환이 먼저 갖은 방법을 다해 찾아 올 줄은 몰랐다.“지민아,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면 공유하자고 하지 않았어? 연승혁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너도 잘 알고 있자나. 니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랑 함께 돌아가야 해. 내가 보호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온시환이 같이 나가려고 공지민의 손을 끌어당겼지만, 공지민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그런 공지민의 행동에 온시환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냉정한 눈빛을 보니 더욱 당황스러웠다.“온시환 씨, 이제 돌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
“맛있어, 먹고 싶으면 이따 저녁에 나가서 먹자.”동생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런 염정아가 걱정되어 소매를 잡으며 위로하려 했지만, 옷을 더럽힐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누나, 일하는 거 힘들지?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 우리한테 햄버거도 사주고 저녁에도 좋은 거 먹으러 가자고 하겠어.”염정아는 손을 들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번에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사장도 엄청 좋은 사람이고 월급도 많이 줘.”동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햄버거를 계속해서 허겁지겁 먹어댔다.염정아는 공지민의 계획에 피해라도 줄까 봐 내일 돌아가야 해서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없었다.아이들은 모두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야 밥상에서 일어섰고 동생은 배가 부름에도 토할 정도로 그냥 먹고 있었다.염정아는 동생의 손에 남은 햄버거를 뺏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배부르면 먹지 말라고, 왜 아직도 그 습관 못 버려?”“오늘 안 먹으면 다음엔 없을가봐...”“이젠 그런 걱정 하지 마. 내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 쭉 있을 거야.”“그래, 누나 말 잘 들을게.”염정아는 웃으면서 남은 햄버거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집에 있던 냉장고는 전에 중고로 샀던 거라 너무 작았고 티비도 화면이 매우 작아 아이들이 한데 모여야만 볼 수 있어서 염정아는 집에 온 틈을 타 냉장고랑 티비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새 티비는 백 인치라서 화면이 큰 소파에 앉아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아이들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췄고 젤 작은 막내 둘까지 신이 나서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갔다.염정아는 집 안에 있는 모든것 들을 교환하고 정리 한 다음 몇 시간이 지나 아이들을 데리고 랍스타 먹으러 나섰다.식당에 도착하자 동생은 낯선 환경이라 염정아 곁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처음 보는 주변의 분위기에 큰 소리로 말도 못 하고 있자 염정아는 바로 조용한 방으로 예약해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전부 주문했
동생의 연락을 받은 염정아는 아이들 생각에 먼저 공지민한테 연락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의 약속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결국 온시환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였다.염정아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뜸들이며 못하고 있자 온시환은 그녀가 집을 그리워하는 눈치를 채고 말했다.“이틀 정도 지연되여도 괜찮을 거예요. 제가 사람 시켜 집에 데려다줄게요.”염정아는 그 순간 얼굴색이 밝아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네, 고마워요 시환씨.”온시환은 말한 대로 그날 바로 사람 시켜 헬기로 염정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집에 도착한 염정아는 방문을 열고 동생이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것을 보았다.동생의 행동은 아주 서툴렀고 정상적인 사람들하고는 비교가 되지만 아이들이 그의 보살핌에 잘 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염정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문 여는 소리를 듣고 동생은 바로 뒤돌아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누나!”염정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능숙하게 아이들한테 분유를 타 주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동생은 염정아의 주변만 맴돌면서 금방 통화한 지 얼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것을 보며 꿈만 같게 생각했다.주방을 보던 염정아는 초라하게 놓인 반찬 몇 가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너희 요즘 이렇게만 먹은 거야?”동생은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니 1분 만에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시켜줬다고 자백했다.“미안해 누나,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시켰어.”두 남매는 부모님들이 살아 계실 때만 햄버거를 먹어봤었고 지금의 그들에겐 이런 음식들은 사치품이였다.그때 염정아는 집을 나서면서 아래층 마트 아줌마한테 돈을 맡겨뒀는데 동생의 요구에 아줌마가 배달을 시켜준 듯 하였다.염정아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먹고 싶으면 우리 오늘도 시켜 먹자.”4억, 그들은 지금 돈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고 공지민이 후에 또 몇천만을 주었다.동생은 또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바닥까지 밀고 닦기 시작했다.염정아는 빨
연승혁은 의자를 찾아 앉아 묵묵히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공격해 온 해커의 추적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시간이 오래 걸리자 연승혁은 귀찮은 어조로 물었다.“얼마나 더 걸려야 되는 거니?”“형님, 이틀은 걸려야 될 듯 해요. 그쪽에서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몰라 아직은 추적하기 어려워요. 일단 움직임이 있을 때 추적해 봐야 할것 같네요. 현재 상황에서 보아 신호는 10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잡히고 있으니 아마 해역 부근에 있는 것 같아요.”연승혁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래.”연승혁은 제원의 별장에서 나오면서 고용인 아줌마한테 공지민을 잘 돌보라고 지시했다.공지민은 휴대전화를 연승혁에게 빼앗겨 당분간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고 별장에 있는 아줌마는 매일 그녀의 건강 상태를 관찰하며 잘 돌봐주었다.이것 또한 연승혁이 지시한 일이었고 그는 이렇게 감시하며 공지민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지켜보고 있었다.별장에서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난 공지민은 아줌마가 연승혁에게 회보하며 온시환이 정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회장님, 저 사람 들여보낼까요?”연승혁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지만 아줌마는 알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시간은 벌써 저녁 무렵이 되었고 공지민은 온 하루 별장 안에만 있었다.온시환은 며칠 동안 공지민의 소식이 끊기자 걱정되어 그녀의 집에 찾아갔지만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공지민은 요 며칠 사람도 보이지 않고 통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다.많이 불안해진 온시환은 공지민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역시 받는 사람이 없었다.당연히 온시환은 공지민의 휴대전화가 연승혁의 손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연승혁은 공지민의 휴대전화에 뜬 온시환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또다시 생기게 되었다.그러고는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연씨 가문은 외래인 출입 금지라서 들어가지도 못한 온시환은 차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염정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