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머리를 숙여 핸드폰을 확인했다. 시간이 늦은 것을 보고 그녀는 덤덤하게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대표님, 저는 이만 쉬러 돌아갈게요.”반승제는 닫힌 방문 밖으로 사라진 성혜인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호텔 로비로 내려간 성혜인은 서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눈물을 참아 보려고 머리를 들었다. 별로 소용이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이때 장하리가 건 전화가 핸드폰을 울렸다. 그녀는 하루에 적어도 세 번씩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이번은 법무팀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사장님, 윤씨 가문의 희생양이 누군지 알아냈어요. 희생양은 윤희선의 아들인데 이미 구속되었다고 해요. 이번 사건은 화제성이 높은 데다가 윗분들의 시선을 끌었거든요. 더구나 증거가 명확해서 바로 구속될 수 있었대요. 윤희선은 지금도 아들을 살려보겠다고 동네방네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어요. 근데 지금 같아서는 최소 10년 형을 선고받을 거예요.”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의 이름에 성혜인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얼굴을 탁탁 치면서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한 장하리와 통화를 계속했다.반승제는 걱정되는 마음에 성혜인을 쫓아 나왔다. 늦은 시간에 그녀 혼자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자태로 호텔 대문에서 누군가와 화기애애하게 통화하고 있었다.한순간에 치밀어 오른 분노는 반승제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 하지만 성혜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장하리에게 말했다.“법무팀한테 계속 노력해 달라고 전해. 진짜 10년 형을 받을 수 있다면 윤희선은 아주 윤단미라면 치를 떨게 될 거야. 때가 되면 아주 흥미진진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겠지.”성혜인이 이 말을 하고 있을 때 반승제는 마침 그녀의 말이 똑똑히 들리는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성혜인과 윤희선 사이의 원한이라면 반승제는 제원대학교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이제는 윤단미까지 더해졌으니 그녀가 윤씨 가문을 증오하는 것도
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더 이상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내린 채 이혼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보더니 억지로 입을 열었다.“며칠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반승제는 성혜인의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진 것을 보고 그나마 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덕분에 성혜인도 부드러운 방법을 쓰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태어난 그는 남에게 굴복하기에는 너무 잘났기 때문이다.“좋아, 그럼 날 차단한 것부터 풀어줘.”성혜인은 반승제가 보는 앞에서 차단을 풀었다. 그러자 반승제는 또 그녀를 벽에 밀치고 기나긴 키스를 시작했다.그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승제가 왜 이토록 키스를 좋아하는지를 말이다. 이번에도 반승제는 그녀가 숨넘어갈 직전이 되어야 천천히 풀어줬다.“빨리 결정해.”성혜인은 급한 대로 선택을 뒤로 미뤘을 뿐이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전혀 몰랐다.반승제와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무조건 피해야 했다. 그와 계속 만나다가는 조만간 그 부드러운 키스에 넘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반승제에게 한 번 넘어가면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성혜인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해결하면서는 그의 기분을 무조건 생각해야 했다. 적어도 윤씨 가문의 일에 개입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또 이틀이 지나고 성혜인이 반승제와 이혼하기까지는 다섯 날이 남았다.윤희선의 아들이 감옥에 가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이었다. 세간에 악명이 자자해진 세한그룹은 반승제의 6000억 원 투자금만 기다리고 있었지만 계약일은 열흘 후라고 했다.인터넷에는 한도하가 술 먹고 싸움질하다가 불구가 되었다는 기사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다만 싸움질의 상대가 반승제가 아닌 동네 조폭으로 나왔다.아침 식사가 끝난 다음 임경헌은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페니 씨, 한도하 씨의 일은 제가 깔끔하게 해결했어요.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요.”임경헌은 이토록 진지한 일도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성혜인이 짧게 대답한 것을
룸 앞에 도착한 반승제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성혜인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건 또 처음이기 때문이다.문이 열리고 테이블에 놓인 수많은 술병이 반승제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것도 전부 한 방에 훅 가는 도수 높은 술들이었다.눈치 백단인 반승제는 금방 성혜인의 꼼수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별말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가 그녀가 술을 따르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마셔요, 대표님.”반승제는 술잔을 매만지면서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아주 평온했다. 하지만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분명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반승제는 알아차렸다. 이것은 함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그는 기꺼이 속아 넘어가기로 했다.성혜인은 술잔을 잡은 채 움직이지 않는 반승제의 손에 자기 손을 겹쳤다.“왜요? 혹시 오늘은 술 별로예요?”이 순간 반승제는 미인계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술잔에 담긴 술을 단번에 원샷 했고 성혜인은 또다시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역시 시원하시네요.”반승제는 지금의 상황이 웃기기만 했다. 만약 성혜인이 그를 술 취하게 하는 것으로 보복하려는 것이라면 너무나도 유치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혜인만 즐겁다면 그는 기꺼이 취해줄 수 있었다.반승제는 시선을 떨군 채 성혜인이 술을 따르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는 이번에 가장 독한 술을 한 잔 가득 채웠다.“대표님, 만나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한 잔 마실까요?”성혜인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반승제는 눈썹을 튕기며 피식 웃었다.“그래?”“네.”반승제는 또다시 술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로 마시지 않고 성혜인과 팔짱을 꼈다. 러브샷을 하려는 것이었다.가까이 다가온 반승제에 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반승제는 술잔을 단번에 비웠는데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나머지 머리카락이 다 스치고 있었기 때문이다.사실 성혜인은 알고 있었다. 반승제가 진작 자신의 유치한 수단을 보아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반승제는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그가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성혜인을 안으려고 했을 때 예상 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제야...”윤단미는 룸 안에 한가득 퍼진 술 냄새와 반승제의 모습을 보고 금방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눈빛에는 기쁨이 번져갔고 속으로는 신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그녀는 빠르게 외투를 벗어 조각 같은 몸매를 드러냈다.“승제야, 너 괜찮아? 내가 부축해 줄게.”윤단미가 가까이 오자 성혜인과 완전히 다른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반승제가 아무 말도 없자 윤단미는 당연히 묵인으로 여겼다. 그리고 바로 무릎을 꿇으며 그의 바지 벨트를 풀려고 했다.반승제는 몸을 뒤로 쓱 빼더니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어떻게 왔어?”윤단미는 반승제의 질문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다시 그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그에 의해 매정하게 내쳐지고 말았다.“대답해, 어떻게 왔냐니까?!”반승제는 언성을 높이면서 술병을 던졌다. 귀를 찌르는 쨍그랑 소리와 함께 술은 바닥으로 쏟아지고 말았다.윤단미는 놀란 듯 창백한 안색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반승제의 뜻을 거스를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반승제가 정신을 차린 순간 윤씨 가문이 산산이 조각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토록 좋은 기회를 그냥 날려 보내는 것도 싫었다.“승제야, 나랑 하자. 나 페니 씨보다 잘할 자신 있어. 난 진심으로 널 좋아한다고.”반승제의 표정은 아주 차가웠다. 공기 속에 서리가 낄 정도로 말이다.“계속 말 돌리는 걸 보면 6000억 원이 필요 없어졌나 봐?”반승제의 말투는 아주 가벼웠다. 마치 세한그룹의 파산이 장난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윤단미는 이를 꽉 악물며 제자리에 얼어붙었다.“모, 모르는 사람의 문자를 받았어. 네가 여기에 있다는 문자... 난 그냥 속는 셈으로 한 번 와본 거야. 나한테 화내지 마...”반승제는 모든 것이 이해된 듯 먼 곳을 바라봤다. 약 기운과 분노가 가슴에서 들끓어 올랐지만 정신만큼은 또렷했다.‘어쩐지 나
약물에 심한 알레르기 반응이 생긴 반승제는 하룻저녁 꼬박 응급실에 있다가 병실로 갔다. 이번에는 진짜 목숨을 잃을 뻔한 정도였다.진세운은 반승제가 안정을 되찾은 다음에야 한숨을 쉬면서 반씨 집안과 그의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그중에서도 서주혁과 온시환이 연락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금방 병원에 도착했다.반승제가 약물 알레르기로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두 사람은 긴장한 기색으로 스카이웨어의 CCTV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가 성혜인과 함께 스카이웨어에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 후에는 윤단미까지 왔으니 총 두 명의 용의자가 있는 셈이었다.서주혁은 윤단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반승제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에 겁을 먹은 그녀는 어젯밤 룸에서 본 모든 것을 불어버렸다.서주혁은 금방 이해했다. 반승제에게 약을 먹인 사람은 성혜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약 안에 그와 맞지 않는 성분이 있는 탓에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반승제가 눈을 꼭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서주혁은 주먹을 쥐면서 몸을 일으켰다.“내가 그 여자를 죽여버리고 말 거야!”온시환은 황급히 서주혁을 막아섰다.“진정해. 그 여자를 건드리면 승제가 깨어나자마자 너를 죽이려 들 수도 있으니까.”진세운은 의사 가운을 입은 채로 한쪽에 서 있었다. 서주혁과 온시환보다는 훨씬 태연한 모습이었다.“승제는 괜찮을 거야. 그리고 이번 일의 진실을 절대 반씨 집안에 알리지 마. 안 그러면 할아버지가 페니 씨의 존재를 알아버리고 말 테니까.”만약 반태승이 나선다면 아무도 페니를 지킬 수 없게 된다. 어차피 반승제가 깨어난 후에 알아서 해결할 일이니 진세운은 성급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얼마 후 반태승이 직접 병원에 왔다. 반승제가 약물 알레르기 때문에 쓰러졌지만 지금은 괜찮다는 말을 듣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왜 갑자기 알레르기가 생겼냐는 반태승의 질문에 진세운은 그냥 약을 먹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라고 했다. 어차피 전에도 반승제에게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몰랐으니 말이
성혜인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남자의 동작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살려줘! 누가 나 좀 살려줘! 아파, 아프다고!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혹시 이승주인가? 아니면 한도하의 사람? 이 향수 냄새는... 절대 반 대표님일 리가 없어.’성혜인의 눈물은 진작 얇은 천을 흠뻑 적셨다. 하지만 등지고 있던 탓에 반승제에게는 보이지 않았다.반승제는 성혜인이 쓰러진 다음에도 풀어주지 않았다. 그는 장장 이틀 동안 밥도 먹지 않고 성혜인만 괴롭혀 댔다.처음에는 그래도 눈물이라도 흘리던 성혜인은 뒤로 가면서 그냥 몸을 웅크리고만 있었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만 들어도 몸은 굳어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기나긴 시간을 견뎠다.반승제는 마음속의 분노가 진정된 다음에야 성혜인을 풀어줬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가린 천은 끝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반승제는 정신을 잃은 그녀를 깨끗하게 씻겨주고 로즈가든으로 돌려보냈다.성혜인은 저녁 여덟 시쯤에 눈을 떴다. 몸은 구석구석 다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천천히 눈을 뜨고 익숙한 천장을 본 그녀는 헛것이라도 본 줄 알고 몸부림치다가 그만 침대 아래로 쿵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머리는 윙 울렸다.협탁에 놓인 핸드폰을 확인하고 나서야 성혜인은 시간이 이틀이나 지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장장 이틀 동안이나 납치당했다는 뜻이기도 했다.성혜인은 아직도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다. 치욕스러운 자세로 침대에 엎어져 있느라 상대의 몸매가 약한지 뚱뚱한지, 키는 큰지 작은지도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아직도 몸이 덜덜 떨리는 탓에 핸드폰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래서 반 시간이나 진정하고 나서야 겨우 강민지에게 전화를 걸었다.강민지는 연락받자마자 바로 출발해서 로즈가든으로 왔다. 그녀는 귀로부터 시작해서 붉은 흔적을 가득 달고 있는 성혜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너...”성혜인은 강민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안도감이 드는 동
피곤했던 성혜인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바로 침실로 들어가려 했다. 잔뜩 부은 눈과 불편한 걸음걸이는 누가 봐도 험한 일을 당한 사람의 모습이었다.반승제는 몸을 일으키면서 성혜인을 불러세웠다.“페니야.”반승제를 상대할 기운조차 없었던 성혜인은 곧장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엎어졌다. 반승제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더니 문턱에 기댔다. 그리고 한참 주저하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성혜인의 길지 않은 머리카락은 완전히 흩어져 있었고 손은 이불을 꼭 잡고 있었다. 반승제는 그녀에게 했던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를 저승 문턱에 보냈다면 설명할 기회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그녀를 이틀 동안 괴롭힌 건 이미 많이 봐준 것이었다.반승제는 침대 곁에 앉아 성혜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자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그날 네가 나한테 먹인 약에 알레르기가 생겨서 나 응급실에 다녀왔어.”성혜인은 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아주 무서운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말이다.“죄송해요...”성혜인은 반승제가 알레르기가 있을 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약을 먹이지도 않았을 것이다.성혜인의 사과에 반승제는 화가 완전히 풀리는 것 같아 미소를 지었다.“만약 다른 사람이 나한테 이런 짓을 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수했을 거야.”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반승제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말을 이었다.“오늘 힘들었지?”성혜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승제가 오늘 일을 알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강민지가 선택한 병원의 보안이 잘 되어 있는 건 둘째 치고 그는 여자의 아픔으로 비아냥댈 사람 같지 않았다.그녀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몸을 떨었다. 그러자 반승제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사실 요즘 너랑 같이 있던 남자... 나야.”성혜인은 눈물 자국으로 가득한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퉁퉁 부은 눈에서 놀라움은 금방 분노로 변했다.“반승제!!!”성혜인은
성혜인의 반응에 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슴은 찢어지듯 아팠다. 그가 큰 결심을 내리고 한 고백은 결국 장난으로 지나가고 말았다.반승제는 24년의 인생 동안 단 한 번도 이런 굴욕을 당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 두말없이 로즈가든에서 떠나 온시환과 서주혁을 만나러 갔다. 온시환이 그의 이혼을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열었기 때문이다.반승제가 룸 안에 들어서자마자 온시환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너 페니 씨랑 사흘이나 사라진 거 알아? 너 솔직히 얘기해. 페니 씨 아직 이승에 있기나 해?”반승제는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에 잠겼다. 그러자 온시환은 성혜인이 벌써 뼛가루가 되어 어디 묻힌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온시환은 그가 이런 일에 휘말리는 것을 처음 봤다. 그가 목숨이 위태로워진 것도 물론 처음이다.서주혁도 궁금한 듯 반승제를 힐끗 봤다. 그들 모두 성혜인이 죽었다고 추측하는 듯한 모습이었다.“술이 상한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쓰지?”스카이웨어의 관리하에 절대 상한 술이 나타날 리가 없다. 더구나 술은 원래도 쉽게 상하는 것이 아니었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한결같이 향긋한 맛이었다.“네가 기분이 나빠서 그런 건 아니고? 설마 지금 와서 이혼하기 싫어진 건 아니지?”반승제는 손을 흠칫 떨며 시선을 떨궜다.“나 방금 페니한테 고백했어.”“뭐?!”쨍그랑!쨍그랑!온시환의 목소리와 함께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하나는 온시환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주혁의 것이었다.두 사람은 반승제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여자에게 고백할 줄은 진짜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이 자식이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네.’온시환과 서주혁은 서로 묵묵히 눈을 마주쳤다. 둘 다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온시환이 먼저 감정을 추스르며 물었다.“승제야, 너 페니 씨를 좋아해?”반승제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했다.“모르겠어.”온시환은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