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모습을 그녀는 처음 보았다.성혜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신이한의 뒤를 따라나섰다.불빛이 밝은 곳에 이르자, 신이한은 그녀의 목에 난 자국을 발견했다.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반 대표가 조른 거예요?”성혜인은 차에 올라탔다. 목 안이 마치 불타오르는 듯해 말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네.”“아내한테 너무 잔인하네요.”성혜인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로 사람들을 압도하던 그녀는 갑자기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씁쓸할 뿐.“페니 씨, 제가 일찍 알려주지 않은 걸 탓하지 마세요. 반 대표 평소에는 고고한 자태를 하고 있어도, 사실 성격이 별로 좋지 않아요. 지금 제원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자신의 목을 만지고 있었다.“3년 안에 해외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곳에는 미치광이들도 정말 많고 서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게 대부분이에요. 하지만 반 대표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잘 섞어 들었어요. 사실, 저랑 몇몇 친구들은 그가 밖에 거액의 재산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해요.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한테도 모질고 다른 사람한테는 더 모질게 굴어요. 페니 씨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며 그 후과는 엄청날걸요?”신이한은 비록 다른 속셈을 하고 있긴 했지만, 전혀 함부로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조금 전에도 하마터면 목을 졸라 죽일 뻔했는데, 나중에 그녀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목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아파 급히 뭐라도 마셔 통증을 완화하고 싶을 뿐이었다.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본 신이한은 결국 길가에 차를 세워 약방에서 약을 사 왔다.차에서 내린 성혜인은 곧바로 한 덩이의 피를 토해냈다.목이 극한으로 심하게 졸리면 이렇게 될 수 있었다.신이한이 건네준 약
로즈가든에 돌아온 성혜인은 주영훈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온통 반승제에 대한 욕을 쏟아내고 있었다.“빌어먹을 자식! 찢어 죽이지 못한 게 한스럽다, 한스러워! 화가 나 죽겠어. 너랑 결혼한 걸 감사하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밖에서 헛짓거리하고 돌아다녀?! 내 제자의 명성이 바닥을 치게 하네! 바닥을 치게 해!”성혜인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스승이 제원에 딱 하루, 그것도 일이 있어서 갑자기 돌아온 것뿐인데, 자신 때문에 사람들 앞에 서게 된 게 너무 죄송스러웠다. 주영훈이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반승제를 욕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서둘러 사과를 건넸다.“스승님, 죄송합니다.”주영훈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머리에서 연기가 날 정도였다.“어떻게 할 생각이냐? 계속 속일 작정이야?”“모르겠어요.”핸드폰 너머로 주영훈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목은 또 왜 그래? 다 쉬어버렸네. 혹시 우는 것이냐?”성혜인은 두 번 기침을 하더니 너무 아파 조금 전의 약을 또 두 모금 마셨다.“아뇨, 목이 조금 아파서요.”“페니야, 너는 반승제를 좋아하냐?”성혜인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좋아한대도 사귈 수는 없을 것 같았다.아마도 그 미미한 설렘은 단지 그들이 매일 밤 친밀한 스킨쉽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끌어당기고 몸을 부딪치지 못해 안달 나 하는 반승제의 모습이 떠오르면 여전히 얼굴이 뜨겁고 심장이 두근거렸다.‘이게 좋아하는 건가? 아닐 거야. 이혼에 대한 결심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으니까.’“그럼 반승제 그 녀석은 너를 좋아하냐?”“아뇨.”그녀의 대답은 빨랐다. 반승제의 옆에는 윤단미가 있으니 말이다.“그럼 너도 좋아하지 말렴. 찾으려면 일편단심인 남자를 찾아. 승제는 확실히 뛰어난 사람이 맞긴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들 네 것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알겠습니다, 스승님.”“너도 네 생각이 다 있을 테니 나도 더 말은 하지 않겠다. 이 그림은 내가 친
반승제가 들어오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온시환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술 한잔을 건넸다.“너 오늘 너무 늦게 왔어. 가장 재밌는 장면도 다 놓치고 말이야. 승제야, 네 아내 정말 대단하더라.”반승제는 겨우 반씨 집안의 일을 모두 처리했다. 김경자는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고 윤씨 집안에서는 계속 울며 간절히 하소연했다.성혜인은 모두가 평온할 수 없어 잔뜩 헤집어 놓았다.온시환은 반승제의 어깨를 토닥였다.“생긴 건 그저 그래도 말솜씨가 좋더라고. 그런 사람하고 결혼할 수 있는 것도 네 복이야.”오늘 내내 일이 순탄치 못해 예민했던 반승제는 시선을 떨군 채 차갑게 말했다.“이 복 너한테 줄게. 가질래?”온시환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예쁜 여자를 좋아했으니까 말이다.반승제는 술을 한 모금 들이키더니 뒤로 살짝 기댔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목에 있는 단추를 몇 개 풀었다.그러자 온시환이 또 위로하며 말했다.“됐어, 그 여자 말은 하지 말자. 그나저나 윤단미는 어떻게 할 작정이야? 오늘 밤 이후로 많은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텐데. 윤단미를 더 좋아하는 거면 빨리 이혼해서 명분을 줘.”반승제는 손에 들려있는 술잔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는 내가 성혜인하고 결혼하기를 바라고, 할머니는 내가 윤단미하고 결혼하기를 바라고. 왜 나는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할 수 없는 거지?”목소리가 너무 낮은 탓에 오직 온시환과 서주혁만이 그의 말을 들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재벌가들 사이에는 진정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걸 믿는 사람들은 아직 이 무리를 접한 사람이라 할 수 없었다.대부분의 재벌가 사람들은 집안과 타협하여 집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아내를 선택하고 밖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몇 명 두었다.집안에서는 잘 따르고 밖에서는 찬란하게 놀았다.그리고 대중들 앞에서는 쇼윈도 부부를 연기를 하는 것이 회사의 주가 상승에도 도움이 되었다.
성혜인은 이력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마음에 드는 듯 사무실로 불러달라고 청했다. 이력서의 주인 장하리는 올해 초에 입사한 21살의 예쁘장한 신입사원이었다.성혜인은 장하리를 훑어보며 단도직입으로 물었다.“장하리 씨, 제 개인 비서로 일할 생각 없어요?”장하리는 잠깐 멈칫하다가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성혜인이 어떤 사장인지는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이것은 분명 승진할 좋은 기회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러면 인사부로 가서 수속을 밟고 오후에 다시 돌아와요. 제가 자리를 만들어 줄게요.”장하리는 또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말없이 순종적인 그녀의 모습이 성혜인은 아주 만족스러웠다.같은 시각, 어제 크게 창피를 당한 윤단미는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 김경자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를 만나러 갔다.김경자는 이미 반씨 저택으로 돌아갔다. 법원에서 아직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자칫 기절할 뻔하기도 했다. 분노는 성혜인의 피부 껍질을 찢어내고 싶을 정도로 솟아올랐다.“요망한 년 같으니라고, 콜록콜록.”“할머니, 저 이제 어떡해요?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사람을 만나고 파티에 참석해요...”김경자는 잠깐 기침하다가 백연서에게 물었다.“성씨 집안에서는 무슨 사업을 하니?”성씨 집안에 관한 일은 백연서도 당연히 몰랐다. 그저 BH그룹에서 많은 투자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적자를 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이때 윤단미가 먼저 대답했다.“성씨 집안에서는 페인트 사업을 해요.”김경자는 눈살을 찌푸렸다.“너희 집안은 부동산 사업을 한다고 했지? 페인트 회사를 인수해서 도움이 되려나?”“도움은 당연히 되죠. 근데 SY그룹을 인수하면 할아버지께서 화내지 않을까요? 그리고 승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가장 중요한 건 SY그룹도 나름 큰 회사라 인수가 쉽지는 않을 거예요.”만약 윤씨 집안이 재벌가의 문턱을 밟았다고 하면 성씨 집안은 재벌가의 ‘ㅈ’자도 본 적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인수는
성혜인의 사무실은 괴이한 정적에 휩싸였다. 그녀도 장하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마 후 성혜인이 몸을 일으키며 장하리에게 말했다.“수고했어요, 이만 퇴근해요.”장하리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성혜인도 이만 퇴근해서 성씨 저택으로 돌아갔다. 윤단미에게 사과하는 것은 아예 선택지에 없었다. 아무리 이사회가 배신했다고 해도, 아무리 그녀의 편에 서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해도, 그녀는 윤단미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을 것이다.성혜인은 성휘의 방문 앞에서 잠깐 고민하다가 손을 들어 노크했다. 방 안에서는 성휘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회사를 잘 키우겠다고 다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벌써 이런 일로 찾아오게 되자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들어와.”성휘는 짧게 대답하고 또다시 기침하기 시작했다. 방 안으로 들어간 성혜인은 침대 곁에 앉으며 말했다.“아빠, 저 이만 지분을 팔아버리려고요.”성휘는 눈초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약 일 분간 침묵한 끝에 겨우 대답했다.“네 마음대로 해, 콜록콜록.”“죄송해요.”“사과할 것 없어. 내가 변호사한테 연락, 콜록콜록...”성휘는 이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분을 파는 일은 변호사에게 맡기고 이만 꿈을 좇으라는 그의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래도 속은 편하지 않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시작해 회사를 세우는 것이 어디 쉬운 일도 아니고 말이다.성혜인도 속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영원히 팔아버리는 게 아니라 그냥 잠깐일 뿐이에요. 제가 금방 되찾아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그냥 아빠가 놀라지 않게 미리 알려드리러 온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어떤 소식을 들어도 흥분하지 마세요.”성휘는 이제야 약간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혜인이 너는 나보다 훨씬 똑똑하니 무조건 잘 해낼 거다.”성혜인은 성휘에게 위로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잠자코 있었다. 이미 벌어진
신이한은 성혜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조금 전에 한 말은 그냥 장난이었어요. 그래도 돕겠다고 한 건 진심이에요.”성혜인은 스테이크를 우물우물 씹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표정은 한결같이 차분하기만 했다.신이한은 그런 성혜인에게 경외심이 들 지경이었다. 반승제의 위압감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지구를 통틀어도 몇 안 되기 때문이다.반승제의 곁에 서 있던 윤단미마저도 약간 겁먹은 듯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승제야.”반승제는 이제야 몸에 힘을 풀었다. 역시 성혜인은 가벼운 여자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온시환의 말이 맞았다. 불륜도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그는 성혜인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진실게임을 할 때도 그녀는 그가 아닌 신이한에게 키스하려고 하지 않았는가?말없이 성혜인을 쏘아보던 반승제는 금세 생각 정리를 끝내고 멀어져갔다. 윤단미는 그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성혜인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한마디 했다.“정말 더러워서 못 봐주겠네요. 남자가 그렇게도 고파요?”말을 마친 윤단미는 반승제를 쪼르르 따라갔다. 반대로 성혜인은 입맛이 뚝 떨어진 듯 가만히 머리를 숙였다.신이한은 성혜인를 바라보며 와인잔을 들었다. 눈빛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페니 씨, 아까는 반 대표님이 오는 걸 보고 일부러 그랬죠?”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이한은 한쪽에 놓인 숟가락을 가리켰다. 마침 그녀의 뒤를 볼 수 있도록 배치된 숟가락을 말이다. 신이한은 그녀가 반승제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일부러 뽀뽀하려 했다고 생각했다.“만약 제가 막지 않았다면 진짜 뽀뽀하려고 했어요?”“아마도요?”신이한은 약간 후회가 되기도 했다. 반승제 앞에서 대놓고 성혜인과 뽀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는 이미 날아갔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은 소용없었다.그는 원샷으로 와인잔을 비웠다. 그러자 성혜인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죄송해요, 이한 씨.”신이한은 씁쓸
열이 오른 반승제는 성혜인을 확 끌어당겨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젯밤 나무에 부딪히며 다친 데다가 목까지 쉬었던 성혜인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눈을 찔끔 감았다.반승제는 성혜인의 위로 올라타며 그녀의 턱을 잡았다. 그러자 그녀는 반승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갑자기 왜 화를 내시는 거예요?”반승제는 성혜인의 표정을 한참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혹시 내가 질투라도 한다고 생각하나?”성혜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반승제도 두말없이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잡았다.“오늘로 여섯 번째겠군.”셔츠의 첫 번째 단추를 푼 순간, 반승제는 얇은 셔츠 뒤에 가려져 있던 빨간 자국을 발견했다. 어두운 조명 하에 그 자국은 키스 마크와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다.반승제는 잠깐 멈칫하더니, 성혜인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내던졌다.“꺼져.”성혜인은 한참 휘청거리고 나서야 겨우 중심을 잡았다. 만약 중심을 잡지 못했다면 그대로 길바닥에 엎어졌을 것이다.뒤따라 차에서 내린 반승제는 한결같이 고귀한 자태로 팔짱을 꼈다. 그리고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의 성혜인을 바라봤다.“너 신 대표랑 잤어?”성혜인은 이제야 반승제가 무엇을 보고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아무래도 자신이 남긴 흔적의 일부만 보고 키스 마크로 오해한 듯했다.그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저 피식 웃었다. 반승제가 이미 차에 올라타 멀어진 참이라 설명할 기회도 없었다.다리에 힘이 풀려 길가에 쪼그려 앉은 성혜인은 목을 만지작대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약간 기운이 생긴 다음에야 자신의 차에 돌아가 로즈가든으로 향했다.저녁, 성혜인은 장하리의 전화를 받았다.“사장님, 세한에서 지분을 10%까지 모았어요. 아마 내일이면 이사회에 가입할 수 있을 것 같아요.”10%의 지분은 이사회에 가입하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조만간 SY그룹 전체를 삼켜버릴지도 몰랐다.“하지만 이상하게도 10%에서 멈춘 지 한참 됐어요.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
성혜인은 새벽 사이에 35%의 지분을 장하리에게 양도했다. 그녀가 주식을 팔았다는 사실을 세한그룹에 들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사실 장하리의 이름으로 파는 것도 너무 많은 양의 지분이기 때문에 리스크가 있었다. 그래도 음모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더구나 도움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장하리 밖에 없기도 했다.장하리가 지분을 받고 도망갈 걱정은 없었다. 신이한과 체결한 계약 덕분에 지분의 중심은 언제나 성혜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계약 내용은 그녀와 신이한만 알 뿐,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았다.35%의 지분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눈이 먼 세한그룹 측 책임자는 곧바로 윤단미에게 소식을 알렸다.“이것만 얻으면 SY그룹 인수는 성공한 것과 다름없어요. 앞으로 단미 씨가 SY그룹의 주인이 되는 거예요.”윤단미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반승제는 그녀에게 전문가를 보내주지 않았다. 그저 컨설팅을 할 만한 돈을 보내줬을 뿐이다.다행히 윤단미 스스로 찾은 컨설턴트가 유능한 덕분에 하루 사이에 16%의 지분을 모은 건 물론이고 오늘은 35%라는 대어까지 낚을 수 있었다.윤단미는 귀까지 찢어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성혜인에게 복수할 상상만 해도 도파민이 마구 솟아나왔다. 그래도 아직은 완전히 성공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심호흡과 함께 진정하며 물었다.“가격은요?”“가격은 시장 가격의 2배로 4000억 원을 원한다고 했어요.”윤단미는 미간을 찌푸렸다. 4000억 원은 그녀에게도 높은 값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얼마 전 금방 가짜 그림에 1200억 원이나 썼으니 더욱 망설여졌다.가짜 그림 때문에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주영훈에게 선택받지 못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평가를 받았던 일이 생각나니 윤단미는 또다시 분노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건 모두 성혜인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성씨 일가는 죽어야 마땅하다.물론 페니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어젯밤 페니가 신이한과 뽀뽀하려고 했을 때 반승제의 반응은 누가 봐도 질투하는 것이었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
[원진과는 이미 연락했어요. 원진도 원아정을 해외로 보내는 데 동의했어요. 다만 문제는 원아정이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당장은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거예요.][흥, 그 정도는 해줘야지.]연승혁은 이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공지민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얼굴에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다.그녀의 시선은 곧장 연승혁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금테 안경을 쓴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첫눈에도 지적이고 세련된 인상을 풍겼다.‘분명 낯익은 얼굴인데... 어디서 봤지?’연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소개했다.“이쪽은 내 친한 친구, 이상우예요.”순간 공지민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이상우, 이 사람은 과거 그녀가 찾아갔던 유명한 최면술사의 수제자였다.최근 그 대가가 은퇴하고 이제 그의 제자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었었다.공지민은 아무 일도 없는 척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공지민입니다.”하지만 이상우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과거 그녀와 짧은 시간 교류한 적이 있었고 그때 그는 그녀를 최면하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그의 스승은 공지민의 마음속 집착이 너무 깊어 최면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었다.더군다나 스승과 함께 수련하던 한 달 동안, 이상우는 공지민에게 진지하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마음속 그 사람을 잊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했었다.지금 이 순간, 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이상우의 손을 잡았다.“안녕하세요.”이상우는 한순간 흔들리는 눈빛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혁이한테서 얘기 들었어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서요. 오늘 저랑 편하게 얘기 나눠보실래요?”얘기를 나누자는 말은 곧 그녀를 최면에 빠뜨리겠다는 의미였다.공지민은 그제야 연승혁을 흘깃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걸 알 리가 없는 연승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앉아요, 누나.”공지민은 자리에 앉
원아정은 팔꿈치로 미친 듯이 차창을 내리치며 동시에 운전대를 잡아당겼다. 게다가 뒤따라오는 경찰도 따돌리지 못하자 운전자는 결국 공항으로 가는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차는 이리저리 우회하며 간신히 경찰들을 따돌렸지만 결국 사람들로 붐비는 번잡한 지역에 들어서고 말았다.원아정은 문을 발로 차며 열고는 곧장 밖으로 내달렸다. 그녀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은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달려들어 경호운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경호원들은 이마에 땀이 맺히며 초조하게 멀어져가는 원아정을 바라보았다. 여자 하나를 공항까지 데려가라는 지시였을 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을까.진작에 마취라도 시킬 걸 싶었지만 마취한 상태로는 공항 보안검색을 통과할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결국 운전자는 급히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들은 연승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겨우 이런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해?”경호원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연승혁은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됐어. 다음 기회에 다시 처리하면 되니까. 우선 원진에게 이 일을 설명해야겠군.”원진만 동의하면 원아정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떠나야 할 운명이었다....원아정은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공지민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다 그년 때문이야. 그년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나는 연승혁과 결혼해서 상류층 생활을 하고 있었을 텐데... 이런 꼴을 당할 필요도 없었어.’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이전의 공지민은 그저 그녀 발밑에 있는 하찮은 존재였는데, 이제 상황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원아정은 허름하고 지저분한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지나가던 노숙자와 옷을 바꿔 입은 뒤, 다시 나왔을 때 그녀는 초라하고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거리를 전전하며 숨어 지
하지만 연승혁은 이 일을 아주 은밀하게 처리했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으니 고작 연예계에서 떠도는 무명 배우에 불과한 공지민이 진실을 알아낼 리 없었다.설령 나중에 공지민이 온시환과 얽혔다 해도, 온시환이 처음부터 그녀를 장난감처럼 여겼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를 위해 이런 일을 조사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연승혁은 지금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는 공지민이 아직 진실을 모르고 진짜 연씨 가문의 딸이며 구은우와의 관계는 그저 악연일 뿐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모든 일을 계획해 구은우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연승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만약 후자라면 이거야말로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최근 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평온했다. 그런데 이렇게 흥미진진한 일이 불쑥 나타나다니.그는 안정숙을 찾아가 당시 진행했던 두 번의 유전자 검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했다.하나는 머리카락을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쓰레기통에 버린 이쑤시개를 쓴 결과라는 말을 들은 연승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만약 이 정도까지 속일 수 있다면, 공지민도 참 대단한 사람이겠네.’“승혁아, 난 이제 나이가 많아서 이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너 솔직히 말해봐. 원아정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긴 한 거니?”“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할머니가 진행한 두 번의 친자 검사는 꽤 신뢰할 만한 결과잖아요. 그런 걸 조작하는 건 쉽지 않죠.”“휴,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일인지 원... 난 그저 내 손녀를 찾고 싶었을 뿐인데.”“할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걱정하지 말라니! 내가 어떻게 걱정 안 할 수 있겠니!”안정숙은 화가 난 듯 지팡이를 힘껏 바닥에 내리찍었다.“네가 조사한 구은우에 대한 자료, 나도 봤어. 그 아이 정말 뛰어난 사람이더라. 만약 지민이가 정말 그 아이를 좋아했고,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에 잃었다면? 너 같으면 그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을 잊을 수 있겠니
연승혁을 마주했을 때 원아정의 눈가에 잠시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오빠...”하지만 연승혁은 등을 기대며 차갑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쓸데없는 감성팔이를 하려는 거라면, 당장 사람 불러서 쫓아낼 테니까.”원아정은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꾸며낸 애잔함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연승혁이 옆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조용히 자리에 앉은 원아정은 이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았다.그때 안정숙이 입을 열었다.“마침 승혁이도 있으니, 구은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거라.”애초에 원아정은 이 일을 말하려고 온 터였다.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좋아요. 오늘 저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으니까요.”그녀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자의 눈매는 연승혁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안정숙과 연승혁 모두 한눈에 알아챘다. 이 남자는 분명 연씨 가문의 핏줄이었다.이미 벼랑 끝에 선 원아정은 더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만약 공지민을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해외로 쫓겨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승혁 오빠, 이 얼굴 잘 보세요. 연씨 가문이 큰 혼란에 휩싸였던 그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죠? 아버님께서 밖에 아들을 하나 두셨다고요. 물론 그건 아버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모든 게 누군가가 꾸민 계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이 그 일을 평생 떨쳐내지 못하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언니가 실종된 것도 큰 상처였지만 아버님이 다른 여자를 품었다는 사실은 어머님께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어요. 그 상처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남은 거죠.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그 여자가 임신한 걸 알고도 가만두지 않으셨어요. 그 여자는 목숨을 건져 간신히 도망쳤고, 결국 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가 바로 구은우예요. 그러니까 구은우는 승혁 오빠의 이복동생이라는 말이에요.”연승혁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안정숙의 시선을 의식하고